출처: 웃긴대학 건방진똥덩어리
3.
아내가 재 놓은 안심 고기를 이용해 돈까스를 만들었다.
슈퍼에서 사 온 빵가루를 묻히고, 식용유를 잘 둘러 놓은 프라이팬에 고기를 튀긴다.
튀겨지는 동안 다지기를 이용해 참깨를 갈았다.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온다.
소스는 아내가 미리 만들어 놓은 것을 꺼냈고, 밑반찬은 간소하게 차렸다.
방울토마토와 양배추, 오이 등이 담긴 샐러드를 가운데에 놓고,
김치와 오이지를 작은 접시에 담아 양 옆에 두었다.
자, 이것으로 세팅은 끝났다.
이제 튀겨진 고기를 접시에 담아 오는 일만 남았다.
......
......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딸칵
“여보세요?”
-아 자기 집에 들어왔어?
“응, 지금 밥 먹는 중이야. 고기 잘 재 놨네. 맛있어.”
-신경 좀 썼지. 나 지금 막 동창들 만났어. 늦지 않게 들어갈게.
“그래, 모처럼이니까 재밌게 놀다 와. 은비 때문에 안 불편해?”
-은비 지금 잠들었어. 식사 나오면 깨워야지. 동창들이 귀엽다고 좋아하네.
“역시 우리 딸은 어딜 가도 환영을 받네. 알았어. 끝날 때쯤 전화해. 끊어~.”
-딸칵
......
......
한 손으로 핸드폰을 꼭 쥐고, 나머지 손으로 리모컨을 이용해 티비 채널을 돌린다.
마침 푸드 채널에서는 태국 고추를 이용한 놀랍도록 매운 요리가 소개되고 있었다.
열시가 넘으면서 부쩍 시계를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났다.
지금도 시계를 쳐다보며 10시 15분인 것을 확인했다.
방금 전에 입에 넣은 껌에서 씹는 족족 넘치도록 단물이 흘러나온다.
이제 껌은 네 개밖에 남지 않았다.
......
......
-여보세요? 자기야 나야. 미안해. 많이 늦었지? 응. 어 아니.
동창 중에 한 명이 갑자기 밥을 먹다가 쓰러져서 지금 응급실에 와 있어.
응? 어 어. 은비는 옆에서 자고 있어. 자기 먼저 자. 어.
동창들 아무도 집에 안 갔는데 혼자만 집에 간다 그러기가 좀 뭐해서.
그래도 이따가 슬쩍 먼저 나오려고. 아무래도 은비도 있으니까. 어 어.
아 무슨 떡 종류를 먹다가 식도에 걸린 것 같아.
얘가 조금 급하게 먹는 버릇이 있거든. 아휴. 걱정이야. 응.
그렇게 됐으니까 계속 기다리지 말고 시간 늦으면 먼저 자라고.
응. 사랑해 자기야~
......
......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벽에 걸린 시계의 작은 바늘이 숫자 12를 약간 넘기고 있었다.
아내는 어떻게 빠져나오겠다더니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밖에 없는 집은 상당히 조용했다.
일정의 소음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는다.
적막하고 쓸쓸한 기분에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기 때문이다.
탁상 위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치익, 치익 네 김... 기자. 거... 치익, 치익
뉴스가 나오는 모양이었다.
맑은 소리를 듣기 위해 천천히 주파수를 조절해 본다.
-치익. 네, 부산 해운대구에서 신종 마약 사범이 잡혔다는 속보입니다. 이들은 특이하게도 껌을 통해 마약을 판매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껌 얘기였다.
왠지 귀가 솔깃해지는 뉴스였다.
-껌을 씹으면 마약 성분이 흘러나와 우리 몸의 중추신경으로 퍼지고, 이내 다른 마약과 같은 증세를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이번같이 껌을 매개로 해서 마약이 등장한 것은 처음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일반인들까지 마약의 마수에 걸려들 수가 있으니 국가적으로 대처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약이 함유된 껌.
그러니까 마약 껌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씹고 있는 껌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사람을 매료시키는 껌은 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마약을 할 때처럼 환각이나 환청이 생기진 않았다.
대신에 씹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때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마약이라기보다 담배에 가까웠다.
뭐, 담배도 마약의 한 종류라면 종류겠지만.
그리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껌의 근원지는 부산이지만, 내가 가진 껌은 강원도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대충 합리화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쨌건 뉴스는 내가 잠드는 데 도움을 줄 것 같지 않았다.
다시 주파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주파수에서 손을 멈춘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때, 푹 빠져 지냈던 빌리 홀리데이의 슬픈 재즈였다.
마음이 편해진다.
그리고 조금씩 잠에 빠지기 시작했다.
껌을 뱉는 것도 잊은 채.
......
......
“커억, 컥, 컥.”
잠에서 깨어났다.
목구멍에 뭐가 걸린 느낌이 나 헛기침이 계속 나온다.
“커억, 퉤.”
껌이었다.
뱉지 않고 자는 바람에 목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가까스로 뱉어낸 후에도 몇 번 더 기침을 했다.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래도 삼키진 않았으니 다행이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며 시계를 확인한다.
5시 40분.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다시 잠을 청하기도 애매한 시각이었다.
아내는 여전히 없었다.
외박까지 할 줄은 몰랐기에 마음이 불편했다.
핸드폰을 열어 보니 아내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자기야, 자는 중일 것 같아서 문자로 보내. 동창이 결국엔 죽고 말았어. 이제 막 가족들 불렀고, 오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린다네? 모처럼 만난 자리에서 일어난 일이라 다들 슬픔이 커. 그래서 나도 아침까지는 같이 있기로 했어. 미안해 자기야.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어. 은비는 대기실에 있는 침대에서 잘 자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말어. 늦지 않게 출근 잘 해. 미안해 자기야♡]
......
......
새벽 공기가 무척이나 차갑다.
아침을 차려 먹기가 귀찮아 일찌감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근처에 있는 샌드위치 매장에 들어가 카푸치노 커피와 에그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갓 구운 토스트 안에 잘 으깬 계란과, 야채들이 알차게 들어 있었다.
입가에 카푸치노 거품을 잔뜩 묻히며 허겁지겁 아침을 해결했다.
물론 다 먹은 후에 껌을 입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김 대리, 김 대리. 잠깐 이리 와 봐.”
박 과장이 일찍부터 나를 찾는다.
잠시 자리에서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박 과장에게로 갔다.
“기획서 이야기는 들었어. 뭐 직장 생활이 다 그런 거잖아. 너무 담아 두지 말라고.”
“예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런가 보다 해야죠.”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나온다.
“아, 그건 그렇고. 김 대리 하루만 더 수고해야 할 일이 생겼어.”
역시 용건은 따로 있던 모양이었다.
“예? 하루만이라는 건...”
“오늘 점심 먹고, 강원도에 한 번 더 내려가야 할 것 같아.”
나는 깜짝 놀랐다.
강원도를 내려가라니.
불과 이틀 전에 당일치기로 다녀오지 않았던가.
“아아, 그런 표정 짓지 말어. 상무님 지시니까 나도 어쩔 수가 없다고.”
“아니, 이유가 대체 뭐예요. 뭐가 또 빠졌어요?”
“우리 쪽 확인서를 팩스로 보내야 되는데, 팩스가 고장난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상무님이 직접 다녀오라고 지시하셨어.
그런데 너를 지목하시더라고.”
미칠 노릇이었다.
이건 단순한 응징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팩스가 고장났으면 다른 데서 양해를 구하고 받으면 되잖아요.”
박 과장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박 과장이 무슨 죄가 있겠냐마는.
“아 요즘 상무님한테 기획부가 별로 안 좋게 찍혀서,
출장 가 있는 사람들한테도 잘 믿음이 안 가는 모양이야.
더군다나 어제는 하루 종일 연락도 안 됐잖아.
가서 업무 상황도 체크해 보라는 이유도 있는 거지.”
어이가 없었다.
업무 상황 체크를 대리밖에 안 된 내가 왜 해야 하며,
당장 다시 써야 하는 기획서는 어쩌라는 말인가.
스트레스 때문인지 난폭하게 턱이 움직인다.
“당일치기로는 죽어도 못 갑니다.”
“누가 당일치기로 가랬나. 내가 간신히 설득해서 내일 하루 빼 주기로 했으니까.
하루만 수고 좀 해 줘.”
다행히 당일치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기획서의 압박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기획서는 어떡합니까. 김 상무님이 당장 갖고 오라고 난리인데.”
“아 그것도 말 다 끝났어. 일단 다녀오는 것을 우선으로 해.
기획서는 조금 천천히 써도 되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다시 내려가야 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어쩌겠는가.
위에서 하라면 하는 게 직장 생활인 것을.
아내와 딸을 또 못 보게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어제도 내내 혼자였는데 말이다.
그래도 최대한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껌도 세 개밖에 안 남았으니,
내려간 김에 다시 그 가게를 들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이면 열 통 정도는 사 와야지.
......
......
“은비는 학교 잘 갔어?”
-어, 거기서 곧바로 보냈어. 조금 늦게 갔는데, 미리 학교에 전화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안 피곤해? 자고 있는데 내가 깨운 건가?”
-아예 꼬박 밤을 샌 것도 아닌걸 뭐. 집 좀 치우고 자려고.
“으응. 어쨌든 나는 그렇게 됐어. 내일 회사 쉬게 해 준다니까, 늦어지면 하루 자고 갈게.”
-아휴... 우리 자기 힘들어서 어떡해. 은비도 아빠 보고 싶다고 난리일 텐데.
“이러다가, 나 강원도 사투리까지 쓰는 거 아냐? 하하. 아무튼, 도착하면 전화할게.”
-추우니까, 단추 잘 잠그고 다녀. 감기 조심하고. 끊을게~
......
......
점심식사는 박 과장과 함께 서울역 근처의 유명한 게장 집에서 먹었다.
늘 주문하던 매운 게장무침을 시켰는데,
박 과장은 매운맛에 별로 소질이 없는지 버벅거리며 잘 먹지 못 했다.
“매운 거 좋아하나? 간장게장은 먹을 줄 아는데, 게장무침은 너무 매워서 못 먹겠어.”
먹느라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다리 한쪽을 입에 넣고 아그작 아그작 씹으며 맛을 음미했다.
말랑말랑한 속살이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매콤짭짤한 맛이 입에서 사라지기 전에 숟가락에 밥을 가득 담아 입에 넣었다.
“에이. 이것도 못 먹어서 어쩌려고 그래요. 강원도에는 여기랑은 상대도 안 되는 매운 가게도 있는데.”
“아후. 됐네, 됐어. 매운 거 좋아하면 빨리 죽는다는 말도 있잖나.
자극적인 건 피해야 돼.”
박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한다.
어쩔 수 없지.
박 과장 몫까지 내가 먹는 수밖에.
식사를 마치고,
아무래도 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계산은 박 과장이 했다.
가게를 나서자 매운 음식에 입이 뜨거워진 탓인지 벌써 하얀 입김이 나온다.
박 과장은 서울역까지 나와 함께 가 주었다.
“이번에 고생하면 상무님 시선도 조금은 좋아질 거야.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전화 오면 꼭 잘 받으라고. 알았지?”
3층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박 과장이 말했다.
아무래도 여기서 박 과장은 돌아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예 알았어요. 제 밑으로 집합시켜서 기합 한 번 주고 올게요.”
“그래. 그럼 내일 모레 보자고.”
“예. 다녀올게요. 밥 맛있게 먹었습니다.”
말을 마치고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껌 하나를 입에 넣었다
-오늘의 날씨를 알려드립니다. 먼저 서울은...
......
-강원도 지역은 서울과 비슷한 기온으로, 약간 쌀쌀한 날씨가 계속 이어지겠습니다. 단 강원도 춘천 지역의 경우 저녁에는 영하까지 떨어질 정도로 추워질 전망이니, 외출하실 때 겨울옷을 준비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틀간 후평동 쪽에 안개가 많이 낄 전망이니 운전자들은 각별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다음은 영남지방입니다...
......
......
“으으 추워라.”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매서운 바람이 몸을 훑고 지나간다.
서울에서는 그럭저럭 견뎌 주던 가을 자켓이 여기서는 힘없이 추위를 허락한다.
이틀 전만 해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는데 정말 이상한 날씨였다.
춘천은 여름에는 무지 덥고, 겨울에는 또 엄청 춥다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덜덜 떨면서 손목시계를 확인한다.
4시 45분.
애매한 시각이었다.
일단 거래처로 가서 확인서를 주고 와야 할 것 같다.
6시 전에는 가겠다고 말했으니까 말이다.
추워져서 그런지 부쩍 턱 운동이 심해진다.
그만큼 단물도 많이, 빨리 빠지겠지.
자켓의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유난히 희뿌연 안개가 눈에 거슬린다.
......
......
“아, 이거 하나 주려고 서울에서 내려온 건가? 팩스야 아무데서나 받으면 그만인 것을.”
“아, 뭐. 저희 회사의 정성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건물이 참 좋네요, 내부도 좋고.”
“하하. 올해 초에 지사가 들어왔으니까. 비교적 새 건물이지.”
“아 그렇구나. 네 사장님. 더 필요하신 건 있으세요?”
“아니 뭐, 이 정도면 충분하지. 혹시 시간 괜찮은가?”
“예? 아. 예. 뭐 시간이야 괜찮습니다만.”
“그럼 같이 저녁이나 들지. 춘천의 매운맛을 보여 주겠네. 허허.”
“저야 좋죠.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
......
......
얼떨결에 저녁식사까지 했더니 시간이 벌써 7시였다.
거래처 사장은 춘천의 매운맛 어쩌고 하더니 결국 닭갈비를 사 주었다.
다른 데보다 확실히 맵기는 했지만 춘천을 대표하는 매운맛이 되기에는 부족한 무언가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틀 전에 이 동네에서 이보다 열 배는 매운 맛을 맛보지 않았는가.
생각난 김에, 식사 중 사장에게 이런 질문을 했었다.
“사장님 혹시, 정말 매운 집이라고 아세요?”
사장은 허겁지겁 고기를 건져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역시 음식의 풍미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정말 매운 집?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 춘천에는 유명한 매운 집이 많은데.”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뇨. 가게 이름이 정말 매운 집이에요. 이틀 전에 점심을 거기서 먹었거든요.”
사장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매워선지, 뜨거워선지 반쯤 입을 벌리고 ‘쓰읍’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음. 이 근처에 유명한 집은 내가 거의 다 아는데 말이야.
그런 상호명은 처음 들어 보네. 그런 독특한 이름을 잊어버릴 리도 없을 테고.”
그다지 의외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일단 워낙 외진 곳에 있었고, 메뉴도 하나뿐인데다가,
그런 매니악한 매운맛을 즐기는 사람은 드물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봉내산 쪽으로 들어가는 외진 길에 있는 가게인데 잘 모르시겠어요?”
“봉내산이라... 그쪽 길이면 사람이 잘 다니지 않을 텐데 음식점이 있단 말이야?”
소수의 등산객들은 있겠지만 이런 날씨에 굳이 산을 찾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더군다나 정식 등산로가 아닌 외진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적이 드물 것이었다.
사실 그런 곳에 가게를 차린다는 것부터가 이상하긴 했다.
굳이 고생해서 갈 만큼 서비스가 좋거나 내외관이 훌륭했던 것도 아니고.
“다 쓰러져 가는 건물 두 개가 있더라고요. 하나는 음식점, 하나는 구멍가게.”
“아! 혹시 그 집을 얘기하는 건가.”
사장이 갑자기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예? 그 집이라는 것은...”
사장이 씹고 있던 닭갈비를 꿀꺽 삼키고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봉내산 쪽에 낡은 기와집이라면 알고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역사적인 집이지.
그런데 거기가 음식점이 되었단 말이야? 전혀 몰랐는데.
자네는 어떻게 알고 간 건가?”
원래는 음식점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인터넷에 검색되던데요? 약도도 나오고. 그런데 예전에는 그냥 일반 집이었어요?”
사장이 검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톡톡 치며 말을 꺼냈다.
“그게 조금 기구한 사연이 있는 집이야. 나도 어릴 때라 나중에 아버지에게나 들었었지.”
어떤 사연일까.
사장이 다시 한 번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자네 국민보도연맹 사건이라고 알고 있나?”
국민보도연맹 사건.
물론 알고 있었다.
6.25 때, 이 연맹에 속한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사건이 아닌가.
북한에 동조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예 알다마다요. 살인마 이승만의 이름을 드높인 사건이었죠.”
“말 한 번 잘 했네. 살인마 이승만.
허허.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임당한 대부분이 그냥 평범한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이지.”
말 그대로였다.
국가는, 보도연맹에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신고하는 사람들에겐 쌀과 음식을 나눠줬었다.
춥고 배고프던 시절에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알 게 뭐였겠는가.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신고하고 음식을 얻기 바빴던 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참담했다.
전쟁이 터지자 국가는 제일 먼저 그들에게 총부리를 겨눴고,
무려 3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죽고 말았다.
“30만의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자기가 연맹원이 아니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그런데도 짧은 시간 안에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어.”
“음... 이 사건이 그 음식점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왠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아아, 그 기와집. 그 집 주인이 그 당시 연맹원들을 밀고하는 일을 했었네.”
"예에!?"
“그도 연맹원 소속이었는데, 애당초 그는 명단을 작성하기 위해 들어간 거였다네.
새로운 인원이 들어올 때마다 그는 몰래 기록을 남겼었지.
물론 그런 사람은 각 지역마다 있었을 거야.
그는 후평동만을 맡은 걸로 아니까.
어쨌든 그의 명단 덕분에 이쪽에서의 처리는 손쉽게 끝났다고 하네.”
충격적인 얘기였다.
그 정도면 거의 학살의 주범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알다시피 그 당시 강원도에서의 삶이란 건 정말 끔찍했다고 하네.
가난과 기근이 너무 심했다고 하지. 특히 이 근방은 더 심했지.
그러니까 그가 넘긴 명단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는 이야기야.
그들은 단지 배가 고플 뿐이었다고.”
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이왕이면 오늘 내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슬슬 마무리하고 일어나야 한다.
하지만 왠지 이 이야기만큼은 꼭 들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나요?”
“당연히 사람들에게 원망을 샀지.
오죽했으면 그를 죽이기 위해 사람들이 결사대까지 만들 정도였네.”
“용케 죽지는 않은 모양이죠? 버젓이 가게도 차렸으니.”
“그는 영악한 사람이었네.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그는 재빨리 잠적을 해 버렸다네.
하나뿐인 어린 딸을 데리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래, 그 잠적한 곳이 자네가 갔다던 그곳일 걸세.
사람의 발길이 없는 외진 곳. 그곳에 있는 낡은 기와집 말일세.”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야기를 듣느라, 남은 닭갈비가 점점 식어 가는 것도 잊는다.
그만큼 나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아예 못 찾을 만한 곳은 아니던데요.
약도를 보긴 했지만 저도 어렵지 않게 찾아갔으니까요.”
사장이 고기 하나를 입에 넣는다.
“맞네. 시간은 걸렸지만 여기저기서 그를 찾았다는 소문이 들려왔었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가 이제야 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해.”
“그런데 왜 죽지 않은 거죠?”
“그건, 마을에 갑자기 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라네.”
......
......
그렇게 늦은 시각도 아닌데 주의가 온통 컴컴했다.
익숙하지 않은 안개가 자욱하게 낀 탓이다.
가뜩이나 낯선 곳에서 시야까지 좁아지니 그다지 심기가 좋지 않았다.
물론 심기가 불편한 데는 거래처 사장의 거북한 이야기도 한몫 했지만 말이다.
이왕이면 오늘 서울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두 가지 일을 빠르게 처리해야 한다.
첫 번째는 지사에 들리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제 한 개밖에 안 남은 껌을 충원하는 것이다.
우선 지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 주임이 껌을 잔뜩 얻어 놨으면 좋겠다.
웬만하면 그 기와집에는 가고 싶지 않으니까.
방금 입에 넣은 껌에서 넘치도록 단물이 흘러나온다.
......
......
낡은 건물.
우리 지사의 건물이었다.
아까 전에 봤던 거래처 건물이 워낙 새 건물이라 그런지,
유난히 낡고 허름해 보인다.
“사장은 돈 벌어서 어디다가 쓰는지 모르겠네.”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7시 30분.
서울에서 출장 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퇴근했을 시간이다.
고개를 올려 보니,
역시나 4층만 불이 켜져 있고 나머지는 꺼져 있다.
야식으로 산 보쌈과 족발의 양이 많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손에 쥔 봉지를 열어 젓가락 개수는 충분한지 다시 한 번 세어 보았다.
열한 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끼이익
문을 열었다.
온통 컴컴하다.
1층 현관 정도는 불을 켜 놓는 게 좋을 텐데 말이다.
불 키는 곳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현관문 근처를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에 닿는 것은 울퉁불퉁한 벽면뿐이었다.
그냥 핸드폰에서 나오는 빛을 이용하기로 했다.
-딸칵
핸드폰 액정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너무 컴컴한 탓이었는지 생각보다 많이 밝게 느껴졌다.
벽면을 비춰 1층의 전등 스위치를 찾을 생각이었는데,
그냥 이것만으로도 4층까지는 그럭저럭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발 앞으로 핸드폰을 비추고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발에 툭툭 하고 살짝 걸리는 것들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었다.
현관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끝에 계단이 있었는데,
나는 오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가운데 보폭을 좁게 움직이니 꽤나 길게 느껴지는 거리였다.
혹시라도 넘어지진 않을까 한 손으로는 벽면을 짚어 가며 걸었다.
그렇게 한 발, 두 발...
-뚜벅, 뚜벅
얼마나 걸었을까.
정적 속에서 발걸음 소리만이 도드라지고 있다.
그러던 중,
-물컹
벽면을 짚은 손에 뭔가 이질적인 게 만져졌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웠지만, 뜨끈하고 끈적거리는 느낌이 났다.
뜨거운 설탕물에 담가 놓은 찰흙 같다고 할까?
핸드폰을 그쪽으로 비춰 보았다.
밀가루 반죽 같은 둥그런 흰 덩어리가 보인다.
찰흙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껌에 더 가까워 보였다.
4.
덩어리에서 손을 떼자 손에 닿았던 일부분이 마치 치즈처럼 쭉 늘어졌다.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 봤다.
별다른 향기가 느껴지진 않는다.
손에 붙은 잔해를 대충 털어 내고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한다.
불쾌한 찐득거림이 조금은 사라진 것 같았다.
마치 단물이 덜 빠진 씹다 만 껌을 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다시 앞을 향해 걸었다.
몇 걸음 안 돼서 2층으로 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핸드폰을 좀 더 가까이 비추면서 천천히 한 계단씩 오른다.
그렇게 세 계단쯤 올랐을까.
-물컹.
이번엔 발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어떤 물컹한 것을 밟아 찌그러뜨린 느낌이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걸음을 떼려는데,
-찌이이익
신발 바닥으로부터 뭔가가 쭉 늘어지는 느낌이 난다.
혹시 이것도 방금 전의 그 덩어리랑 비슷한 것일까?
허리를 숙여 발 가까이 핸드폰을 대 보았다.
“윽!”
나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아까와 모양새는 비슷했지만 색이 달랐다.
하얀 덩어리가 아니라 시뻘건 덩어리였다.
물컹한 느낌이 없었다면 응고된 피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신발 바닥에 들러붙은 잔해를 떼어 내야 했지만, 차마 이번 것은 손대고 싶지 않았다.
쓱쓱 땅바닥에 몇 번 발을 문지르고 다시 걸음을 움직였다.
혹시라도 비슷한 덩어리를 다시 밟을까 꼼꼼히 바닥을 비추며 걸었다.
효과적이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덩어리의 분포가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뻘건 덩어리, 흰 덩어리, 거기에 구불구불하고 긴 덩어리도 있었다.
어두운 덕에 낱개로 이것들을 보고 있었지만,
불을 켜 놓고 한눈에 본다면 결코 유쾌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모두 오르고,
3층으로 향하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투욱
뭔가가 가볍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2층 복도 어디쯤 같은데 도무지 어두워서 보이지가 않는다.
잠시 복도 쪽으로 핸드폰을 비춰 보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굳이 그것을 확인하러 복도를 걷고 싶지는 않았다.
느슨하게 걸어 놓았던 옷 따위겠지 라고 생각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불을 안 키고 온 것이 조금은 후회된다.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다행히도 덩어리들은 없었다.
그것들을 피하면서 걷는 수고로움이 없어지자 아까보다 두 배는 빨리 오르는 것 같았다.
대체 그 덩어리들은 뭐길래 2층 계단에만 있던 걸까?
-쿠웅
3층에 오르자 이번엔 2층에서 들었던 소리보다 더 크고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랄 정도의 소리였다.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칠흑 같은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소리가 들려온다.
-쓰윽, 쓰윽
무언가 복도에 끌리는 소리.
-쓰으윽, 쓰으윽
그리고 그 소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비춰 보면 그만이었지만 이상하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왠지 그곳을 비추는 순간 엄청나게 후회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 탓이었다.
-쓰으윽, 쓰으으윽
소리는 어느새 지근거리까지 다가왔다.
저절로 침이 꿀꺽 삼켜진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우당탕!
다급한 마음에 계단을 비추는 둥, 마는 둥 했더니 몇 계단도 못 오르고 걸려 넘어져 버렸다.
계단에 부딪쳐 몸 곳곳에서 아픔이 느껴진다.
“으윽. 씨팔...”
욕을 중얼거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려는데 뭔가가 허전하다.
“어, 핸드폰?”
넘어지면서 핸드폰을 놓친 모양이었다.
황급히 고개를 움직였지만 어디에도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난간 사이로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3층 높이에서 떨어졌으니 아마도 온전하진 못하겠지.
그나저나 큰일이었다.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단 한 계단도 제대로 오르기가 힘들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몸을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손을 더듬어 가며 계단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심히 오르는데도 팔꿈치나 무릎을 모서리에 부딪쳤다.
그리고 그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씨팔. 불 좀 켜 놓으면 덧나나.”
절로 입에서 욕이 튀어나온다.
“씨팔. 김 상무 개새끼. 좆같은 새끼.”
이번엔 김 상무 욕이 나왔다.
“씨팔. 오 과장. 찐따 같은 새끼.”
생각나는 모두에게 욕을 하며 그렇게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계단이라고 느껴지는 곳에 손이 닿았을 때 몸을 약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순간,
-덥썩!
무언가가 발목을 잡았다.
잡았다기 보다는 휘감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 같다.
-콰당!
살짝 일으키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면서 계단에 코를 박고 말았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큰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다급하게 고개를 내려 잡힌 발 쪽을 쳐다보았다.
물론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다.
단지 어떤것의 윤곽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덩치가 큰 것 같았다.
붙잡힌 발에 힘을 주어 보았다.
“으읍...”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발을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강하게 붙잡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좀처럼 이 상황에 대해 감을 잡을 수가 없다.
단지 질식할 것 같은 공포감만이 스멀스멀 생겨나고 있었다.
“후... 우... 후... 우...”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뭔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불과 몇 계단 위로 불이 켜진 4층이 있었고, 그곳에는 야근 중인 사원들이 있다.
나는 심호흡을 몇 번 더 하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오 주임! 오 주이임!”
목소리를 가다듬고 다시 한 번 배에 힘을 주었다.
“오. 주. 임!!”
방금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정도로 소리를 질렀으면 누군가 달려 나오는 게 정상 아닌가?
나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르기 위해 숨을 가득 마셨다.
그리고 정말 온 힘을 다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 주. 우우우아아악!!”
살면서 이렇게 큰 소리를 질렀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이렇게 무서웠던 적이 있었던가.
-쿵쾅 쿵쾅 쿵쾅
‘그것’이 엄청난 힘으로 내 발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는 계단 모서리에 온몸이 부딪치는 것도 잊은 채, 순수한 공포감만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씨팔, 오 주임! 으아아악!!”
-콰다당!
사정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어느새 3층까지 되돌아와 버린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우쉬추우후휘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낸 소리인가?
-우쉬추우후휘히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끔찍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입술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입안에 있는 껌만이 나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것도 단물이 많이 빠져 있다.
떨리는 손으로 자켓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렸다.
-우쉬추우후후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붙잡힌 발목에서 조금씩 통증이 생기는 걸로 보아 뭔가 다른 움직임이 있을 것 같다.
“퉤!”
비록 별 도움은 안 되겠지만, 저항의 일환으로 씹던 껌을 ‘그것’에게 뱉었다.
그리고 방금 빼낸 껌을 입에 집어넣어 난폭하게 씹었다.
그런데,
-우쉬추우후우우히!
뭔가 아까보다 격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발을 붙잡던 힘이 사라졌다.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일시적으로 풀려난 것은 확실하다.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모서리에 부딪히든 말든 미친 듯이 계단을 기어 올랐다.
아마 온몸이 멍투성이일지도 모른다.
간신히 계단 끝에 손을 올리고 몸을 일으켰다.
“후우... 후우... 후우...”
4층!
4층에 올라왔다.
나는 잠시 계단 쪽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의 윤곽조차도.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마음이 들어 급하게 복도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사무실마다 켜진 불빛이 복도까지 밝히고 있었다.
절뚝거리며 오 주임이 있는 402호 사무실로 향했다.
우습게도, 족발과 보쌈이 든 비닐봉지는 무사히 내 손목에 걸려 있었다.
걸어가면서 401호를 힐끗 쳐다보았다.
사람이 있었다면 소리를 질렀을 때 나와 보는 것이 정상이다.
생각해 보니, 401호는 입사 동기인 천 대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 앞을 천천히 지나며 내부를 살폈다.
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딱히 기척이 느껴지진 않았다.
아마도 비어 있는 모양이었다.
뭐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대부분이 퇴근하고 남은 직원이래봐야 한 사무실에 두 명에서 세 명 정도뿐일 것이었다.
적게는 한 명인 곳도 있을 것이고.
전체를 둘러보라는 임무를 맡긴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일개 대리에 불과했고, 그럴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우선 핸드폰을 저 어둠 너머에서 분실했다.
게다가 3층에서는 습격을 당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입에 있는 껌이 마지막 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연유로 401호에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내 발은 급격히 빨라졌다.
사무실 간의 거리도 그다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순식간에 402호 문 앞에 다다랐다.
문 손잡이를 잡은 채로 잠시 계단 쪽에 고개를 돌려 보았다.
지옥의 경계선이라도 되는 양 계단이 있는 복도 끝은 어둠에 둘러싸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
나는 점점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손에 힘을 주었다.
-끼이이익
거슬리는 낡은 쇳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휘이이이잉
제일 먼저 나를 맞은 것은 맞바람이었다.
춘천의 싸늘한 밤공기가 몸을 훑자 나도 모르게 몸을 감싸며 추위에 반응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이 반쯤 열려 있던 게 원인인 것 같다.
난로를 켜 놔도 모자랄 날씨에 창문을 열어 놓다니 정말 생각이 있는 건가?
“오 주임! 오 주임!”
그 자리에 서서 오 주임을 불렀다.
하지만 대답은 없다.
아무래도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쓰윽 주위를 둘러보았다.
싸늘한 공기 외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우선 창문을 닫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문을 닫은 후에는 히터도 틀 생각이었다.
걸으면서 슬쩍 책상들을 살펴보았다.
“이건 뭐 개판이구만...”
절로 이런 말이 나왔다.
책상들은 하나같이 아수라장이었다.
중요한 서류들은 죄다 땅에 내팽개쳐져 있었고, 필기구들과 이면지 따위가 지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당장 부도가 나도 이것보단 나을 지경이었다.
나도 모르게 혀를 끌끌 차며 앞으로 걷다가 오 주임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질러진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이면지에 크게 적어놓은 글귀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큼직하게 써 놓긴 했지만 휘갈겨 쓴 글씨라 멀리서는 식별이 힘들었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허리를 굽혔다.
[김 대리 개새끼. 저주할 거다.]
내 욕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 자리에 서서 오 주임 책상 위를 뒤적거려보니 글귀가 적힌 종이 세 장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손에 쥐고 한 장씩 읽어 내려간다.
[껌을 씹고 싶다. 정말 이대로 있다간 죽을 것 같다.]
[깨달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대체 뭘 깨닫고, 어떤 준비가 끝났다는 것일까?
“이 새끼, 혹시 여기 없는건가...”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끼이이익, 탁
창문을 닫으니 웅웅거리던 바람소리가 가셨다.
손목에 걸고 있던 봉지를 아무 책상에나 던져 놓고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천히 둘러보니 훨씬 더 난장판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조금씩 납득이 안 가기 시작했다.
내일이면 출장을 마치고 올라와야 할 사람들이 사무실을 이렇게 개판으로 만들고 어딘가로 사라졌다니.
왠지 이 건물에 나 밖에 없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자,
참을 수 없는 공포감이 또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신경이 곤두선 내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잡혔다.
-쿵.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불현듯 이 건물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쿠웅.
좀 더 명확하게 소리가 들려왔다.
3층에서 들었던 그 소리가 분명하다.
나는 미친 듯이 책상들의 서랍을 열어 보기 시작했다.
오 주임의 책상, 이 주임의 책상, 그리고 양 주임의 책상.
“차, 찾았다!”
양 주임 책상 두 번째 서랍에서 원하던 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손전등이었다.
오른 손으로 손전등을 잡고, 왼 손으로 이 주임의 서랍에 있던 대형 콤파스를 들었다.
-쿠웅.
소리로 미루어보아 아직 사무실 앞까지 오진 못한 것 같았다.
당장 문을 열고 왼쪽 계단 쪽으로 뛰어간다면 탈출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씨... 씨팔...”
왼쪽 계단을 통해서도 뭔가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그림자로 봐서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쩔 수 없이 황급히 뒤로 몸을 돌렸다.
-스르륵, 쿵
하지만 나는 더욱더 멈춰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미 401호 앞 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쉬우후우취우
‘그것’이 또 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나 또한 ‘그것’에게 소리를 냈다.
“야... 양 주임!?”
‘그것’은 바로 양 주임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양 주임의 얼굴이 ‘그것’에 붙어 있었다.
몸 전체가 헐렁한 옷처럼 바닥으로 축 쳐져 있었고, 팔이나 다리가 제멋대로 뒤틀려서 붙어있었다.
그리고 몹시 덩치가 크다.
양 주임의 덩치가 원래 컸다고 해도 이건 그보다 두 배 이상은 커 보였다.
거기에 손과 발의 갯수도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눈에 보이는 손만 네 개였는데 붙어 있는 위치도 제 각각이었다.
-우쉬우우후위우
또 한 번 괴상한 소리를 낸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슴팍에 붙어있는 양 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왼쪽 옆구리쯤에 붙어있는 이 주임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으, 으,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양 주임과 이 주임의 얼굴을 가진 ‘그것’은 아랑곳 않고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리가 풀려서 이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스르륵 쿵
‘그것’이 발을 움직일 때마다 축 쳐진 몸이 바닥을 ‘스르륵’하고 쓸었다.
나는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면서 뒤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둠의 경계를 넘어 살짝 보이는 ‘또 다른 그것’의 일부분이 보인다.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
이 괴생물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스르륵 쿵
뒷걸음으로 어느덧 403호 앞까지 왔다.
하지만 무의미한 걸음이었다.
나는 그저 협살 당하는 주자에 불과했다.
저것들에게 붙잡히면 대체 무슨 일을 당하게 될까?
극에 달한 공포가 점점 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아빠. 치킨 사 올거지~?’
그러던 중,
문득 은비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그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동시에 살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불 타 오르기 시작했다.
“누, 누구 없어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손전등을 입에 물고 403호 문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덜컥, 덜컥
잠겨있었다.
나는 앞을 향해 콤파스를 휘두르며 계속해서 문을 흔들었다.
“읍! 으읍!! 으으으읍!”
입에 물고 있는 손전등 덕분에 명쾌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거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제발 누가 있어줘야 한다.
제발.
-스르륵, 쿠웅.
하지만 어느새 ‘그것’은 내가 휘두르는 콤파스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커다란 건축 설계용 콤파스도 이 괴물 앞에서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씨, 씨팔. 꺼져 꺼지라고!!”
소리를 내자 입에 물고 있던 손전등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떨리는 왼손을 더욱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다가오던 ‘그것’ 아니 괴물의 움직임이 조금은 멈칫하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 움직임을 계속한다.
-스르륵, 푸우욱. 쿵
콤파스가 보기 좋게 괴물의 배를 찔렀다.
하지만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콤파스를 빼려고 손을 당기자 엉겨 붙은 살이 쭈욱 하고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치 껌처럼.
“아, 아, 아아아아악 씨팔!!”
-투욱!
엉겨 붙은 살 때문에 더 이상 콤파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게 끝이다.
가까이 다가온 양 주임의 얼굴에서 왠지 희미한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으, 은비야. 미안해. 미안해.”
-철컥!
죽음 앞에서 환청이라도 들은 건가?
“#$#@@#$@세요!!”
무슨 소리가 들려온다.
기적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어서 들어오세요! 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소리는 403호에서 나온 것이었다.
나는 손잡이를 잡은 손에 다시 힘을 넣었다.
-벌컥!
문이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우이쉬휘위추휘
괴물의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시간이 없다.
몸을 던져서라도 들어가야 한다.
-콰악
“으아아악.”
하지만 보기 좋게 괴물에게 발을 붙잡히고 말았다.
고개를 내려 보니 다리춤에 붙어 있던 손이 뻗어져 나와, 기괴한 모양으로 내 발목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아마 엄청난 힘으로 나를 끌고 갈 것이 뻔했다.
“껌, 그 씹고 있는 껌을 뱉어요!”
403호의 사람이 소리쳤다.
“퉤!”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거의 조건반사 식으로 껌을 뱉어버렸다.
입에서 나온 껌이 포물선을 그리며 괴물의 바로 옆으로 떨어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양 주임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몹시 흥분한 표정이랄까.
-우쉬이위우취이추이!!!
그리고는 3층에서처럼 격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목을 감고 있던 손도 풀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와요! 어서!”
나는 이번에야 말로 몸을 날렸다.
-쿠당탕!
몸이 바닥에 부딪치면서 둔탁한 소리를 낸다.
하지만 아픈 줄도 모르고 급하게 몸을 추슬렀다.
“저, 저것들은 대체 뭐요!”
“일단! 문부터 잠그죠. 문 좀 잡아주세요.”
나는 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허겁지겁 문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까치발을 들고 문 위로 손을 올렸다.
“문이 움직이지 않게 잘 잡아 주세요.”
투명한 문 앞으로 그 괴물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내가 뱉은 껌 쪽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런지, 이쪽에는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에겐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그 등에도 얼굴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 씨발. 천대리 아니야.”
당장이라도 이 손을 놓고 싶었다.
괴물의 등짝에 달려있는 동기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끔찍했다.
더군다나 그 특유의 부리부리한 눈으로 계속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빠, 빨리 잠가요. 더 이상 못 견디겠어!”
“자꾸 손을 떠니까 균형이 안 맞잖아요. 잘 좀 잡아 봐요!”
짜증 섞인 말투였다.
하지만 몸이 떨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용할 정도였으니까.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최대한 집중해서 손잡이를 꽉 잡았다.
-우쉬추우후후
괴물의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나를 노려보던 천대리의 얼굴에서 나온 소리였다.
예상이 맞는다면 이제 내 쪽으로 관심을 돌릴게 분명하다.
-스르륵, 스르륵
그리고 예상대로,
괴물이 굽히고 있던 몸을 펴서 조금씩 내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씨, 씨파알.”
떨면 안 된다.
떨면 안 된다.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굵은 식은땀이 발밑으로 떨어진다.
-쿵.
첫댓글 으악 뭐여;
개재밌다....
와,,, 몰입감오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