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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군자의 길을 걷고자 시간은 물같이 흘러 나흘이 지났다. 다음날은 소영이 독수약왕과 약속한 대로 자기 몸을 버려 피를 흘려야 하는 날이었다. 소영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고, 마음은 실꾸리같이 뒤엉켜 가지 가지 상념으로 날을 밝혔다. 그는 동이 트자 중주이고를 찾았다. "두 분 형제께서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 계시겠지요?" 상팔이 대답했다. "당연히 알고 있소이다. 오늘은 형님께서 피를 내어 저 독수약왕 의 독녀를 구하는 날이 아닙니까?" 소영은 밤새 고민으로 지새웠으나 아침이 되니 기이하게 정신이 맑아지며 마음은 고요한 물과 같았다. "아주 잘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두구가 한 마디 했다. "독수약왕은 약속을 받았으니 올 것입니다." 상팔이 보태었다. "만일 그가 오늘 오지 않는다면 그 편에서 약속을 어긴 것이니 형님께서는 후일 그를 만나더라도 구태여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두구가 어두운 낯으로 일렀다. "그 사람의 위인됨에 비추어 반드시 일찍 찾아올 것입니다. 그러 나 한낮이 되도록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기다릴 필요가 없습 니다." 그들은 이미 신투 향비와 약속을 한 바가 있었다. 만일 나흘째 되는 날 밤 삼경까지 신투 향비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충분한 고수들의 도움을 얻은 것이니 중주이고가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난 밤에 향비는 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가 충분히 원조자를 얻 은 것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계속해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소영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였다. 소영은 담담히 선 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가 비로소 입을 열어, "우리는 길에 나가 그를 영접해야 합니다." 이 소리를 듣자 두구가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라구요? 우리가 나가 그를 영접한다는 말이오?" "그렇소. 우리는 그들 부녀를 영접해야 하오. 아마 그들은 이곳 으로 오는 도중에 길을 막는 사람들을 만날는지도 모르니까요." 두구는 이 말을 듣고 쇠와 같이 누르스름한 얼굴이 금세 자줏빛 으로 물들었다.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상팔 역시 멍한 표정으로 한참 동안 말을 못하다가 그래도 한마 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 내뱉았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만일 그들 부녀가 중도에서 원수들을 만 난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며 우리들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외 다." 소영은 마음을 가다듬고 조용히 말했다. "만일 우리와 정말 관계가 없다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아 마도 그렇지 못한 관계가 있을 것이외다." 상팔, 두구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이구동성으로 소 리쳤다. "무슨 관계란 말이오?" 소영은 직선적으로 그들에게 일렀다. "만일 신투 향비가 다른 고수들과 약속을 하여 도중에서 그들 부 녀를 가로막는다면 어찌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 할 수 있겠소?" 상팔은 속으로 아차 싶었으나 짐짓 깊이 감추고는 극구 반대했 다. "신투 향비는 형님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이니 그런 일은 없을 것 입니다." 두구 역시 극구 부인하여, "그렇습니다. 형님께서는 너무 마음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소영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향비는 두 분 형제와 한통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가 두 분 형제의 청을 받아들인 것이나 아닙니까?" 중주이고는 이제 막다른 골목에까지 밀리고 말았다. 부인을 할래 야 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바로 대답하기도 어려워 그저 낯을 붉히 고 끽소리도 하지 못하였다. 소영은 웃음을 띤 얼굴로 슬그머니 변죽을 올렸다. "두 분 형제는 나에 대한 마음이 두터워 평소에 소영의 말을 어 기는 때가 없더니 오늘은 이 소영이 죽는 날을 당하여 두 분께서는 도리어 망설이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중주이고는 마침내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제까지 일심전력으로 형님의 분부를 따랐거늘 이제 와서 만일 우리가 두 마음을 먹는다면 곧 하늘이 벌을 내리고 땅이 우리의 육 신을 멸하게 될 것입니다." 소영은 옷섶을 여미며 꿇어 앉았다. "두 분 형제께서는 무림에서 십분 존경을 받는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이 소영을 형으로 인정해 주시었습니다. 당시 두 분 께서 너무도 진지하게 원했으므로 나 소영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연륜을 따진다면 나 소영이 어찌 두 분을 따르리 까." 소영도 눈에 눈물이 괴었다. 중주이고는 땅에 배복하여, "형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말씀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 을 이렇게까지 하여 우리 형제로 하여금 송구케 하시니...." 소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분 형제분의 두터운 정리에 소영은 오직 감격할 따름이올시 다." 두구가 결연히 말했다. "형님께서는 어떤 분부라도 꺼리지 마십시오. 저희 소제는 능력 이 미치든 못 미치든 분골쇄신하여 죽기까지 따르겠소이다." "나는 이미 독수약왕에게 대답을 했으니 이제 돌이킬 방법이 없 습니다. 게다가 부모님의 은혜는 바다와 같아 이 몸의 목숨으로 어 머님을 보호했으니 어찌 후회가 있으리까. 아무쪼록 이 소영이 죽 은 후라도 두 분 형제께선 이 몸의 부모를 잘 보살펴 주십시오. 그 러면 구천에 가서도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허허......." 돌연 상팔이 먼 하늘을 우러러보며 길게 웃었다. 그 소리는 마치 용의 울음소리처럼 구천에까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소영이 급히 물었다. "상형, 왜 웃으시오?" 상팔은 그제서야 웃음을 그치고 처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형님께서 진정 우리들을 버리시고 죽는다면 저와 두구는 반드시 저 독수약왕과 생사를 겨루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물질 을 빌려 독을 전하는 능력이 있으니 소제들이 생각컨대, 승률은 거 의 전무한 터이니 만일 형님이 죽는다면 저와 두구도 곧 황천길에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두구도 한 마디 곁들였다. "노부인께서도 이 일을 아신 후에는 통탄해 하신 끝에 세상에 살 아 계시려 하시지 않을 것인즉, 형님의 피를 내어 자당을 구하심은 결국 쓸데없는 일이 되지 알을까 합니다." 그의 말은 구구절절이 정감으로 충만되어 있으나 어조는 여전히 보통 때처럼 차디찼다. "두 분 형제가 이같이 마음을 쓰시니 실로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 군요......" 상팔이 결심을 굳힌 듯, "좋습니다. 우리는 형님의 말씀에 응답하겠습니다. 피를 뺀 후 소제 등은 먼저 두 분 노인을 안전하게 모신 다음 다시 독수약왕을 찾아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소영은 더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소영이 그렇다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전부 끊어지는 것은 아니외 다. 혹시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 니......" "사람이 몸의 피를 전부 뽑고도 살 수 있으리라고는 믿어지지 않 소이다." 두구의 말에 소영은 가볍게 웃고, "약왕은 의술이 신통하고 영약을 잘 다루니 내가 피를 뺀 뒤에라 도 만일 그가 약을 써서 치료를 한다면 혹시 회복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는 일이외다." 두구는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자비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 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독수약왕이라는 의호가 어울리겠습니까?" "내가 그 딸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약왕의 평생 소원을 들어 주 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그가 내가 죽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모른 체 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두 분 형제께서는 이 일에 대해 서 더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가 형님을 구하고, 구하지 않고는 전적으로 그에게 달린 문제 이며 옆에서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해서 될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가장 좋은 방법은 피를 빼지 않는 것이....." 소영은 한숨을 쉬고 두구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구는 그의 눈빛이 두려워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묵묵히 서 있었다. 드디어 날은 밝았다. 소영은 발길을 돌렸다. "우리는 가야만 하오." "어디를 간단 말씀입니까?" 두구는 아직도 미련을 씻지 못했다. "독수약왕을 맞이하러 가는 것이오." 소영의 어조는 두구 못지 않게 냉랭했다. 두구가 한 걸음 다가서며, "정말 그를 맞이하러 가실 셈인가요?" "소영이 한 번 입 밖에 낸 말을지키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까?" 중주이고는 어이가 없어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으나 결국 소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세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골짜기를 빠져 나왔다. 사방의 산세는 험했다. 그리고 굽이굽이 길은 거칠었다. 소영은 사방의 지세를 바라보며 혼자 생각을 굴렸다. '지세가 이렇듯 험난하니 어디에서 적을 막을지 알 수 없구나!" 만일 그들이 소영의 이름을 대고 독수약왕 등을 인적이 드문 곳 으로 유인해 들어간다면 더욱 일은 어렵게 될 것이다. 중주이고는 소영의 거동을 보며 마음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제발 신투 늙은이가 그들 부녀를 잘 다스려 은밀한 곳으로 데리 고 가 주시기를!" "두 분 형제, 어서 가십시다." 중주이고는 마지 못해 따라갔다. 세 사람은 모두가 무림의 고수급 인물이다. 다리를 놀려 걸어가 는 데도 말보다 더 빨랐다. 서너 시간을 달리니 이미 마문비가 수하인들을 매복시켜 심목풍 을 대적하던 그 골짜기 입구까지 다다랐다. 소영은 이곳이야말로 길을 지나는 요충지대라고 판단했다. 소영 역시 독수약왕이 도착하는 시간과 길을 몰랐다. 그것은 신 투 향비 편에서도 매일반인 것이다. 만일 약왕을 막으려고 한다면 바로 이곳이 가장 적합할 것이다. 주위의 산빛은 여전하고 협도의 입구는 텅 비어 있어 다만 산바 람만 불어 지나갈 뿐이었다. 그때 소영의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출구 속으로 땅바닥에 흐 른 핏자국이었다. 소영은 다가가 몸을 굽혀 그 핏자국을 자세히 조사해 보았다. 땅 바닥의 선혈은 시간이 오래되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되 었을 것이다. 당장 얼굴색이 변했다. 그는 뒤따라 온 중주이고에게 물었다. "두 분께서 막을 곳으로 약속된 지대가 바로 이곳인가요?" 상팔이 허리를 굽혔다. "주로 그것은 향비가 안출해 낸 것이며 그는 어제쯤 도착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디서 독수약왕을 맞이할 것인지는 아무 도 알 수 없습니다." 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 정남쪽을 향하여 달 려 갔다. 소영은 땅에 흘린 핏자국이 부상을 입은 자의 몸에서 흐른 것이 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것 같지는 않았다. 그 핏자 국이 정남쪽으로 달려간 것이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고는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상팔, 두구 역시 꼭두각시 모양 그저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처음엔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는 신투 향비의 행사가 알고 싶어 그리 지루한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나란히 달리면서 속으로 일이 잘되어 간다는 확신을 얻었다. 어찌 흔쾌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아주 끝장을 냈는지 어떤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두구는 상팔을 따르며, "만일 이 핏자국이 독수약왕의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그것은 그 늙은 도둑의 실수라 해야 하겠지요." 이왕 일을 저지를 바에야 깨끗이 해치우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형님이 그것을 발견하여 우리 공모자들을 탓하게 된다고 해도 그것은 신투를 나무랄 일은 아니네." "나는 그 늙을 도둑의 위인이 매우 세심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 데, 그가 이렇게 핏자국을 지우지 않고 마각을 노출시킨 것은 무슨 까닭인지?" "신투가 세심한 사람임은 틀림이 없네. 그러나 그에게 그만한 틈 없이 일이 급박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 수는 없을 거네." 소영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물론 알고 있었 다. 한 마디로 독수약왕이 이미 죽었다면 속시원하겠다는 뜻이었 다. 얼마 안 가서 높은 구릉으로 올라섰다. 여기저기 풀숲이 보이고, 풀잎사귀에 간혹 피흔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상자는 곧장 길을 따라 달려간 모양이었다. 산세를 헤아려 보니 길을 따라 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영이 앞장을 섰다. 세 사람은 단숨에 십여 리를 달렸다. 아득 한 산줄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종횡으로 보이는 넓은 골짜기, 그들 은 이미 상당히 높은 지대로 올라선 것이다. 그러나 핏자국은 이로부터 전혀 아무데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부상자는 하늘로 올라갔는지 땅 속으로 꺼졌는지 알아낼 길이 없 었다. 두구, 상팔은 오히려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전음지술로 이야기했다. "그 늙은 도둑이 이처럼 영민하게 일을 깨끗이 수습할 줄은 몰랐 는 걸. 만일 그가 정말 독수약왕을 해치웠다면 우리는 그에게 톡톡 히 한턱 내야겠소." 두구의 말에 상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아직 단정을 내 리기는 어렵네. 독수약왕은 교활하기가 여우같고 게다가 무술이 높 으니 그렇게 간단히 처치하기는 어려울 것이네." "그는 오직 딸 생각만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백화산장의 고수들 을 동반했을 리도 없고, 또 게다가 숨이 넘어갈 듯한 딸자식을 데 리고 있으니 용이하게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오." "신투가 어느 정도의 고수들을 데리고 갔는지 모르겠군." 그의 무예가 아무리 높다고 해도 여럿이 차륜전을 벌인다면 약왕 하나를 해치우지 못하겠소?" "정말 그와 같다면 독수약왕은 필시 독수를 사양하지 않았을 것 이네." 두 사람은 줄곧 전음지술로 이야기하였으므로 물론 소영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소영이 소리쳤다. "두 분 형제께서는 어서 따라 오시오." 두구는 그 냉막한 어조에 희열을 나타내며, "시간이 이미 얼마 남지 않았소이다. 향비와 독수약왕이 싸움을 벌였다면 지금쯤 그 늙은이의 목숨을 취했을 것입니다. 또 일이 잘 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을 앞둔 약왕의 딸이 무사했을 리 는 없습니다." "그의 딸이 죽었다면 구태여 독수약왕이 형님의 피를 뺄 필요는 없을 것이외다." 상팔 역시 열심히 재촉했다. "형님, 천봉이 연면하고 개의 골짜기가 종횡한데, 털끝만큼도 찾 아낼 실마리가 없습니다. 소제가 보건대 다시 찾을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소영은 머리를 돌려 한동안 사방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한 점의 단서도 찾아내지 못하였다. "좋습니다. 돌아갑시다." 중주이고는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내심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세 사람은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갔다. 중주이고는 기 쁨이 넘쳐 연방 신투 향비를 칭찬했다. 소영은 아무 말도 하지는 않았으나 속으로는 그들의 성심에 감동 했다. 그들은 무림의 고수로서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이해득실만 따지 는 것으로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들이 아무 소득도 없 는 일에 이와 같아 기뻐하기는 난생 처음일 것이다. 돌아오는 길은 빨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본래 머물렀던 골짜기로 돌아 왔다. 해는 이미 장대 끝에 높이 솟아 있었다. 소부인은 금란, 은란이 좌우에서 모시는 가운데 천천히 거닐며 주위의 산세를 감상하고 있었다. 신기는 맑고 눈에는 기쁜 빛이 가 득했다. 소영은 가벼운 걸음으로 모친의 면전에 이르렀다. "어머님, 몸이 많이 좋아지셨습니까?" 노부인은 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는 듯 자애스런 눈빛으로 아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원래 어떤 큰 병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너를 지나치게 절실히 생각했을 뿐이다. 아, 내 지금 너를 보고 있거늘 무슨 병이 또 있 겠느냐?" 소영은 어버이의 사랑을 느껴 가슴이 뭉클했다. "소자가 불효하여 어머님을 괴롭혀 드렸습니다." 만일 노부인이 아들의 피를 대신하여 자기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대체 어떤 감정이 들까? 소영은 생각할수록 괴로웠다. 소부인은 이러한 아들의 심정은 모르고 좌우에 선 두 아가씨들을 돌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두 아가씨들은 다같이 훌륭하구나!" "어머님 말씀대로 저들은 아주 좋은 아가씨들입니다." 소부인이 돌연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영아, 넌 어디 갔었느냐? 내 일찍 일어나 너를 찾았다." 소영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 "친구를 만나러 갔었습니다. 몇 가지 일을 상의하느라고....." "아, 너는 원래 강호의 사람이 아닌데 어찌 이런 생활을 벗어나 지 못하느냐? 어미는 종일토록 조바심만 하게 되는구나." "모친의 말씀은......" 이때 침중한 목소리가 들려와 모자의 대화를 끊었다. "그렇지 않소 영아는 이미 무림의 수뇌인물이니 함부로 당신만을 가까이 할 수는 없는 일이오. 더욱이 그를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하다니......" 소대인이 천천히 걸어왔다. 소영은 얼른 예를 올렸다. 소부인은 대인의 얼굴을 한 번 건너다 보고 나서, "요새 내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보건대 강호에는 모두 은혜와 원한 과 원수와 살인이 뒤얽혀 있다는데 영아가 그 가운데 몸을 담고 있 다면 이 어미가 어찌 마음을 놓을 수 있겠습니까?" 소대인은 아들의 얼굴을 한 번 유심히 살핀 다음 옆에 선 사람들 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영아는 원래 몸이 약해 불치의 병에 걸려 있었소. 강호의 의협 들이 그에게 약을 주고 무예를 익히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이는 스무 살을 넘기지 못했을 거요. 그가 이렇듯 강호 고인들의 구함을 입었으니 마땅히 강호의 분부를 따라야 하오. 만일 불행히 죽는다 면 그건 그 애가 스무 살 때 죽은 것으로 치면 되오." 소부인은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그건 부친으로서 자식을 일찍 죽으라고 비는 말씀 같군요." 말을 마치고 노부인은 은란의 어깨에 팔을 걸고 걸어갔다. 소대인은 노부인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고개를 돌리고 노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얘야, 저기 독수약왕이 기다리고 있다." 이 말은 마른 하늘의 날벼락같이 여러 사람의 귀를 울렸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중주이고와 상팔과 두구였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소영은 좀 놀랐으나 음성은 지극히 차분했다. "독수약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거의 숨이 넘어갈 듯한 여아를 데리고 왔다. 이미 나와 오 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나를 따라 오너라!" 소대인의 얼굴은 비록 조용하나 엄숙하고 장중한 걸음걸이로써 그가 얼마나 심려하고 있는지를 역력히 알 수 있었다. 소영은 여전히 담담한 몸가짐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 히 부친의 뒤를 따라갔다. 중주이고는 긴장으로 몸을 떨었다. 십년 공부가 아미타불이 되는 판이었다. 그러나 멍청히 서 있을 수만도 없어서 상팔이 낮은 소리 로 이끌었다. "우리도 가세." 두 사람은 묵묵히 뒤를 따랐다. 대략 백여 장쯤 걸어갔을까. 잡초가 무성히 우거진 곳에 이르러 소대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소대인이 아직 입을 열기도 전에 잡초 속에서 독수약왕의 음성이 들려 왔다. "소영, 그대는 닷새 전에 약속한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가?" "대장부가 어찌 일 언을 가볍게 할 수 있겠소. 가슴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소." 풀대가 흔들리며 곧 독수약왕의 모습이 나타났다. 중주이고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 보고 있었다. 약왕은 몸을 나타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투 향비가 여덟 명의 고수들을 데리고 나 약왕을 길목에서 지 키고 있었다. 그대는 이 일을 알고 있는가?" "대개 짐작은 하고 있었소이다. 아침에 알게 되어 약왕을 영접하 러 나갔으나, 이렇게 돌아왔소." 독수약왕은 흥! 코웃음을 치고 냉랭하게 내뱉았다. "그 늙어 죽지도 못한 도둑놈이 나를 막을 수 있다면 노부가 어 찌 수십 년 간이나 강호에서 탈없이 지낼 수가 있었겠는가!" 상팔이 그 말을 듣고 한 마디 빈정거렸다. "약왕은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왔으면서도 아직도 장수하는 것 이 싫증이 나지 않소?" 독수약왕은 예리한 눈으로 상팔을 한 번 건너다 보았으나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 늙은 도둑놈이 쥐꼬리만한 계략을 써서 노부를 유인해 갔지. 운수 나쁘게도 그곳에서 바로 백화산장의 인물들을 만났단 말씀이 야. 그들은 이곳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라 생사를 건 일장의 악투가 벌어졌다. 노부는 도둑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그대의 얼굴을 보아 서 독을 쓰지 않았으니 이것은 이미 내가 인정을 보여 준 것이라고 알아야 하네." 냉면철필 두구가 참지 못하고 썩 나섰다. "우리 소형님은 협사로서 일단 입 밖에 낸 말은 산과 같이 엄숙 하니, 스스로 피를 내어 당신의 딸을 구한다는 말은 다시 변치 않 을 것이오." "노부가 그를 믿지 않았다면 어찌 향비 등을 그대로 살려 두었겠 는가?" 두구는 눈에 불을 켜고 소리쳤다. "형님께서는 비록 응답은 하였지만 이로써 다 된 것은 아니오. 아직 응답하지 않은 사람이 있소." "그게 누군가?" 두구는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소인 두구요." "흥! 그대가 무슨 연고로? 그럴 자신이라도 있는가?" 두구는 엄숙히 선언했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만일 약왕이 형님의 몸에서 피를 빼겠다면 먼저 우리 중주이고의 목숨을 거둬들이는 수고를 해야 하 오." 소영이 손을 들어 급히 말렸다. "두 분 형제!" 그러나 두구는 막무가내였다. "형님께서 신의를 중히 여기는 만큼 우리는 의를 다하여 맺어진 사이올시다. 만일 형님이 만류하신다면 우리 형제는 먼저 형님의 면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진지했다. 소영은 당황했다. "두 분 형제는 내 말을 들으시오." 상팔이 나섰다. "소제 등은 귀를 씻고 모시겠습니다. 형님은 꺼리지 마시고 이야 기하십시오." 소영은 독수약왕을 돌아보며, "소영이 피를 내어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죽어야 되는가 요?" 독수약왕은 눈을 껌벅였다. "만일 여러분들이 다 함께 노부와 협력한다면 노부는 수법을 다 하여 그대의 목숨을 보전하겠소." 상팔은 한숨을 내쉬고 두구에게 일렀다. "두제, 일이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도 형님을 더 곤란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네. 독수약왕이 형님의 목숨을 보장한다면 우 리는 힘을 모아 협력하는 일에 응답을 합시다." 독수약왕이 한 마디 보태었다. "노부는 그 위인이 강호의 규칙이나 법규에 얽매이기 싫어하나 오직 신의로써 승낙한 말만은 이제까지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소이 다." 두구는 그래도 다그쳤다. "그럼 피를 뺀 후에도 형님의 절세 신공은 유지될 수 있겠소?" "노부는 그 일만은 단언하기 어렵소이다. 그 뒤 경과를 보아야 될 것이오." 분위기는 어느덧 상당히 누그러져 있었다. 두구는 한숨을 내쉬고, "형님의 일신 무예가 전폐된다면 어찌 죽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으리오?" 소영이 마음을 가다듬고 한 마디 했다. "그런 것쯤은 대수롭지 않소. 소영은 본래 무림인이 아니니 일신 무예를 버린다면 그 날로 강호에서 물러나겠소." 소대인이 결론을 지었다. "이 한 마디로 이미 결정된 일이니 더 논할 필요가 없겠소이다." 상팔이 몸을 굽신하며,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하고는 다시 독수약왕에게로 얼굴을 돌리고, "약왕, 우리가 어떻게 협력을 해야 할 것인지?" "소영의 목숨을 건지고자 한다면 피를 내는 일에 앞서 우리는 우 선 조용히 외떨어진 장소를 찾아야 하오. 두 분은 좌우에서 우리를 보호하면 될 거요. 나는 칠 일 동안 한편으로 그의 피를 내는 한편 약물을 써서 그의 원기를 보충해야 하니까." 그제서야 상팔은 찬성했다. "좋습니다. 약왕의 말대로 따르겠소이다." 소영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시간을 가늠해 본 다음, "약왕께서 언제 손을 쓰실 건지?" "노부의 뜻은 빠를수록 좋소. 지금의 강호는 풍운만장, 앞으로의 일을 예측할 수가 없으니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에게 다 무익한 일이니......" "오늘 좀 늦게 손을 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소인이 모친을 배 별해야 하겠으니 용서해 주시오." "필요없다. 네 모친은 지금 황황난안하니 네가 배별하러 간다면 오히려 모친에게 슬픔만 더해 줄 뿐이다." 하고 소대인이 막았다. 소영은 땅에 배복하였다. "그럼 아버님께서 어머님에게 제 대신 말씀 전해 주십시오." "아비가 한 말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된다." 소영은 크게 절하고 몸을 일으켰다. "약왕은 시술할 장소를 선택해 놓았소?" 독수약왕은 기다렸다는 듯, "노부는 이미 찾아 놓았소." "여기서 먼 곳이오?" "십 리도 채 못 되오." "약왕은 좀 지체하시어, 저희들이 몇 마디 이야기한 다음 출발할 수 있을는지?" "노부가 좀 기다릴 수는 있으나 너무 시간을 끄는 것은 곤란하 오." 상팔은 코웃음으로 대답하고 바람같이 달려갔다. 그는 차 한 잔이 식을 시간이 지나자 곧 돌아왔다. 약왕은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해 보였지만 그에 대해서는 더 말 하지 않고 소영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소형. 아직도 미진한 일이 있소?" "아니오 이제 떠나도 되오." "노부가 길을 안내하리다." 소영, 상팔, 두구의 순서로 그의 뒤를 따랐다. 두 개의 산봉우리를 넘으니 어언 황혼- 독수약왕이 손을 들어 벼랑 중턱에 돌출한 바위를 가리켰다. "저 큰 바위 뒤에 서너 사람이 들어갈 동굴이 있소. 딸애는 그 안에서 기다릴 것이외다." "흥! 약왕은 이곳 지리를 잘 알아서 마침내 그런 동굴도 발견했 구료!" 상팔의 빈정거리는 말에도 독수약왕은 그다지 화를 내지 않았다. "그건 과찬이오, 단지 사람을 찾는 기술에 있어서는 천하에서 노 부를 따를 자가 없을 뿐이지요. 사람들은 그것을 모를 뿐이외다." 그의 말투를 들으면 어디까지나 남에게 굽히지 않으려는 뜻이 분 명히 보였다. 그것이 더욱 상팔에게는 밉살스러웠다. 두구가 한 마디 했다. "우리 형님은 한 번 말한 약속은 아주 중하게 여기는 성미지요. 그 덕분에 약왕은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오. 만약에 다른 사람이었 다면 이런 생사에 관한 문제를 어찌 이렇게 소홀히 하겠소?" 소영은 그들 중주이고가 왜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 지껄이는가 처 음에는 잘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차츰 그들의 의중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즉 상팔, 두구는 어찌해서든지 약왕을 부채질하여 먼저 화를 내 게 하려는 것이다. 화를 내고 먼저 손을 쓴다면 그 때는 당연히 정 당방위가 될 것이니 약속을 어겼다는 말은 듣지 않아도 되기 때문 이다. 그러나 소영은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두제, 이제 그런 말은 더 필요 없소." 독수약왕이 그런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오히려 소영보다 더 먼저 깨닫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그저 한 주먹에 골탕을 먹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식을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점점 피를 빼는 당사자에게 호감이 생겼다. '정말 군자다운 위인이로다!' 속으로 연방 감탄해 마지 않았다. 얼마 후 그들은 어렵지 않게 산중턱에 있는 동굴에 도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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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즐감 하고 갑니다
ㅎ늘 감사 히 잘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