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쫓는 모험』, 신태영 옮김, 문학사상사, 2001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에 의하여 주어진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를 상징하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 불리워진다. 가끔씩은
스스로도 불러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부른다.
"아무개야.."라고.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백지 위에 상대방의 이름 석 자를 써본다. 사람이 그리우면 백지 위에 그 사람의 이름을
수없이 그려낸 경험을 한 번씩은 갖고 있으리라고 본다. 그 사람은 볼 수 없으나 그 사람의 이름은 부를 수 있다.
이름을 갖고 있는가. 내 이름은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 거울에
비춰지는 것은 내가 맞나? 내가 있어야 이름이 있다. 이름이 없는
내가 여기 있다. 그래도 존재하니 이름 따위는 잊어도 좋다, 거울에 비춰지고 있는 인물은 분명 내가 맞는 것을. 그런데 저게 나란
말인가. 그렇게 자신의 '레종 데뜨르(존재 이유)'를 인지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 이름은 고래의 페니스. 수족관에 고래를 전시할 수는 없으니 고래 대신 전시되어있는 고래의 거대한 페니스.
이름 홀로 어딘가에 전시되어 있다. 내가 없는 저 이름이 내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것은 남극해(南極海)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중앙 아시아의 사막에서 발굴한 유물과도 같은 운치가 있었다. 그것은 내 페니스와도
달랐고, 내가 그때까지 봤던 어떤 페니스와도 달랐다. 그리고 거기에는 잘라 낸 페니스 특유의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비애까지
감돌았다." (49)
이름을 잃은 고래는 물론 죽었을 테지만 페니스를 잃은 채 잠시동안이나마 온전한 상태로 있었을 고래의 표정도 거울에 비춰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일까.
열일곱에 절망을 느끼기란 좀 부조리한 듯 보여서 우선 화자는
생각한다. '우리는 고래가 아니다라고.' 그리고 스물, 또 스물 아홉, 서른이 되기 두달 전. 잃은 것과 얻은 것들, 이름은? 여전히
잘려진 페니스는 천장에 대롱거리고 있고 어느새 십 년.
대학 시절에 잠시 알고 지냈던 여자아이의 죽음, 이별을 선포한
아내, 신비한 힘을 귀에 지닌 콜걸은 다가왔다 사라지고. 그녀들은 화자에게 이름이 있음을 확실히 감지했다. 자신에게는 이름이
없으나 그에게는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 알려주기를 무의식적으로 거부한 화자 곁에 남아있는 이들은 없다. 모두 떠나고 없다. 여기서 잠시.
왜 항상 하루키의 소설에서 여자는 '꽤 중요한 주변 인물'로만 그려지나. 그녀들에게는 정말 매력만 한가득일 뿐, 이름은 없어도
괜찮은걸까.
이름을 알려주고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다. 쥐는 쥐로 불리워졌다. 허나 쥐의 과거의 연인은 쥐를 쥐라
부르지 않고 이름으로 불렀었다. 쥐가 화자로 하여금 그녀에게 몇
년 전의 일에 대하여 대신 사과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불러주는 사람의 음성에 깃들어있는 그 엄청난 힘.
『양을 둘러싼 모험』의 양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안의 '무서운 마녀 유바바'와 동일한 존재다.
'치히로'라는 본명을 가져가고 '센'이라는 이름을 준다. 치히로는
사라지고 센만 남는다. 치히로는 돌아갈 수 있는 현실 세계가 존재하나 센에게는 귀신들의 온천장이 현실이다. 온천장에서 수없이
불리워지는 이름 '센'으로 그녀는 변해간다. 그런 그에게 '치히로'가 낯설지 않을 수 있을까. 본명이 낯설게 느껴진다.
'그건 내 삶이 아닌데, 왜 나를 향해 그 이름으로 부르지? 사라져버린 이름으로 왜 나를 부르지?' 소설에서의 화자도 똑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서 응답을 하지 않은 거고 화자의 본명을 아무리 힘차게 불러봤자 그가 듣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닫고
그녀들(죽은 여자 아이, 아내, 귀 광고모델)은 떠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현실적으로 평범'한 그가 갖고 있는 이름은 '비현실적으로 평범'한 영역에 존재한다. 자신의 이름을 찾기 위한 여정.
화자는 성공했으나 이미 양에게 이름-존재 이유-을 먹혀버린 그들(양 박사, 우익계의 거물인 선생, 쥐)은 현실에서 살아간 게 아니다. 결말 즈음에 가보면 알 수 있듯이 실상 양에게 먹혀버린 인물은 선생과 그의 비서 단 둘뿐이다. 양 박사는 많은 것들을 잃었으나 그에게는 남은 뭔가(대머리 아들의 애정 등등)가 존재하고 쥐는 양에게 완전히 자신의 이름을 뺐기기 전에 자살을 했다. 쥐의
선택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100% 먹히면 현실의 살아남은
그는 그가 아니기 때문에. 소설에서 양은 쥐와 함께 죽은 걸로 처리된다. 영화에서 센은 치히로라는 이름을 찾은 후 부모와 함께
현실 세계로 안전하게 돌아온다. 소설에서 화자는 '많은 것을 잃었'으나 양 박사의 말대로 '이제는 살기 시작하'는 거다. 치히로는 (스스로에 의한 스스로의 실종이었음을 깨달음) 행방불명되었다가 외롭지 않게 무사히 모험을 마치고 오고 소설 속 화자도 마찬가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확실히 구분됐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이게 가능할까. 양은 언제든지 죽은 쥐의 동굴 안에서 도움만 얻으면 금세 튀어나올 수 있고 마녀 유바바는 거대한 몸집을
가진 깜찍한 아들이 또한번 사라지면 미쳐버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따위야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머리카락을 공중에 휘날리지 않을까. 하지만 하루키는 과거와 결별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확실한 방법으로 온갖 의미를 묻는 질문에 똑.똑. 대답을 하며 안녕! 그래야만 더 이상 추운 수족관에 전시되어있는 고래의 페니스에 관해서 떠올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떠올려도 아파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라도.
"거기에는 구제 따위란 단어는 무엇 하나 없는 듯한 느낌이었다.
수족관의 물고기를 보면 절망감을 느낀다. 절망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젊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물고기가 아니다'라고. 내 추억 속의 수족관은 늘 가을의 끝 무덤이었다. 수족관 유리는 얼음처럼 찼다. 나는 옛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갇혀서 흐르지 못한 내 청춘에 대해, 그리고 고통에 대해……." *(117)
십 년이라는 세월을 도넛 구멍으로 지내온 사람이라면 이제는 좀
간헐적인 기억만을 간직하고 싶어할 수 있겠다. 분수령을 넘고 또
넘다보면 아주 옛날에 힘겹게 넘어왔던 언덕에 대한 기억은 먼지에 묻히게 마련이다. 그게 시간인걸, 그게 사람이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걸, 누가 뭐라고 할 수 있을까. 서른을 코 앞에 두고 '양을 둘러싼 모험'은 끝났다. 이름도 찾았겠다. 앞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건 제쳐둔다. 우선 사람들이 사는 현실 세계에 안착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살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불리워지는 이름, 나를 대표하는 나의 이름,
그냥 주어졌으니 달고 살아야 하는 일종의 꼬리표라고 여기고 말
것인가. 人生無常! 그 한 마디면 모든 게 용서되리라 하면 마음이야 편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바보같은 걸. 주름살로 온 몸이
덮이기 이전까지는 이렇게 말해도 괜찮겠지. 처음 읽었을 때에는
스물 하나. 당시에는 이름이 가닥인 줄 알지 못했다. 두 번 읽은
지금 '이름이 가닥이다'라고 하지만 세 번째 읽을 때에는 뭔가 다른 가닥을 잡을 수 있겠지. 고양이는 '정어리'란 이름이 붙여지기
전에는 그냥 화자가 키우는 고양이에 불과했다. 죽음을 눈 앞에
둔 늙은 고양이. 여행을 떠나기 전 '정어리'란 이름을 갖게 된 고양이. 정어리를 품 안에 느껴봐야 실제감이 확실해지리라. 고래의
페니스는 고래의 그 곳에 붙어있어야 한다. 페니스만 달랑 매달려져있는 살벌한 풍경이나 페니스 없는 고래의 거대한 몸집은 전혀
현실감이 없어 보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 치히로는 치히로의 삶이 있으니까 센의 흥미로운 인생을 저버리고 현실로 돌아간 걸테고 소설 속의 그는 모험을 떠난 이유가 단지 죽음이 무서워서라기보다는 죽어도 이 곳에서 죽어야지, 라는 모호한 결단을 품고 신발끈을 묶었을테고 나는 나대로 별것 아닌 하루키의 글을 줄 쫙쫙 그으며 읽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얼핏 보니 책 겉표지에 보라색 잉크로 두껍게 인쇄된 활자가 들어온다.
"나는 살아있는 세계로 돌아왔다"
'이름'에 관한 하루키의 말 하나 전하며 끝맺는다. 그런데 지금도 이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는.
"내 등에 달라붙어 있는 것은, 하나의 형태로 고정된 이름이고
각각의 취향에 따라 불려지는 것은 아니다. 이름이 있음으로 해서
나의 의미가 있어지지만, 이름이 있음으로 해서 괴롭고 피곤할 때도 있다. 어떤 땐 자신을 꼼짝못하게 얽어매어 놓는다. 그것은 책임감, 신뢰감을 주기도 하고 또는 혐오감을 주기도 한다.
이름이 없는 자는 없지만, 이름을 숨기거나 거짓 이름을 쓸 때,
그런 사람은 언제든 되갚음을 받게 된다. 혹시 그것은 자신을 위해서 마련된 작은 되갚음인지도 모른다.
이름은 곧 자기의 얼굴이며 거울이다. 그러나 이름 따윈 언젠가는
사라진다." *(81)
* 무라카미 하루키, 『남은 우리들의 시간은』, 천양희 옮김, 동해, 19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