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6. 25. 보람교회 주일낮예배 영광의 주님이 주신 은총 유백선목사 이사야 42: 5- 9 ybs9191@hanmail.net 상담 : 016-346-6468
‘홀로 아리랑’의 포크 가수인 한 돌이『저 산 어딘가에 아리랑이 있겠지』라는 책(단행본)을 하나 펴냈는데요. 그 책에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었던 자신의 아버지 사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써놓았어요. 해방 후에 북한은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5년 후에 북한 김일성은 6.25전쟁을 일으켰어요. 전쟁이 일어나자 아이들을 이북 고향에 두고 떠나야했던 아버지는 월남해서 따뜻한 남쪽 땅, 거제에 삶의 터전을 잡고 사셨죠.
1953년도에 저는 그곳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이북에 두고 온 자식들(형들과 누나)이 늘 잊을 수가 없었나 봅니다. 하지만 저는 형들과 누나와 함께 살아보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버지처럼 그리워하지도 않았고, 형들과 누나에 대한 이야기가 실감나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가슴 속에 맺힌 한(恨) 30여년 품고 오셨던 아버지가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진행될 때에 터졌어요. 이산가족이 만나던 방송이 있는 날이면 TV 앞을 떠나지 못하셨어요. 그걸 보시면서 하루는 저에게 “네가 여의도에 좀 갔다가 오거라. 여기에 헤어진 가족들 이름이 있으니까 잘 찾아보고 연락해라.”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여의도에 가서 열심히 찾아보았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적어 주셨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힘없는 소리로 “못찾았어요.” 하고 말하는 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아버지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헤어졌던 가족들이 다시 만난 장면을 보면서 소리없이 울고 계셨어요. 저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나오지 않는 코를 풀기도 하시고... 애써 헛기침을 했지만 저는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거든요. 자식을 두고 온 아비의 심정이 북받칠 때마다 아버지는 아리랑을 부르면서 이산(離散)의 아픔을 달래셨지요. 저는 아버지의 아리랑을 수없이 듣고 자라났어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던 날 바람이 몹시 불었는데, 그 바람 소리가 마치 아버지의 아리랑처럼 들리면서 저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어요.
지금이라도 이북에 살고 있는 형들과 누나에게 찾아가서 아버지의 아리랑을 전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방법이 없어서 안타깝죠.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한 가지 유언을 남기셨어요. “통일이 되면 네 형들과 누나를 꼭 만나거라... 만나거든 얘비가 너희 형제들을 버리고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고 말해주어라. 꼭!”
여러분! 전쟁으로 헤어졌던 가족들은 마음에 사무치는 그리움이 남아 있어요. 생활이 어려워서 헤어진 가족의 가슴은 아리고 시린답니다. 혹시 마음에 사무치도록 그립고 아리는 경험이 있으셨나요? 한국인은 전통 민요인 아리랑을 좋아하고 즐겨 부릅니다. 아리랑은 “곱고, 아리따운 님을 사모한다, 사무친 그리움으로 마음이 아리다” 라는 뜻이 있대요.
오늘은 6.25가 발발한지 56년이 되는 날인데 공교롭게도 주일입니다. 북한 김일성은 15살 때까지 교회에 다녔다고 말했다던데... 성령체험을 하지 못했던 그가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가장 평안하게 안식하는 주일에 전쟁을 일으키고 말았어요. 이처럼 사탄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사랑없는 이념에 사로잡힌 권력자(통치자)를 이용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약 9,000년에 걸쳐 전쟁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데, 사탄이 존재하는 한 전쟁은 계속될 것입니다.
독일 육군대학교장을 지낸 바 있는 클라우제비츠는 말하기를 “전쟁은 위대한 서사시와 위대한 영웅을 남기는 게 아니다. 전쟁은 인간의 욕심과 자만에서 탄생되고, 눈물과 고통, 피만 남기는 비참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랬어요. 챔벌린은 말하기를 “전쟁은 어느 편이 승리자라고 부를지라도 영원한 승리자가 없고 모두 패배자일 뿐이다.” 그랬어요. 이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전쟁이 그치고 하나님의 평강이 사람들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42장의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 제국에 멸망한 후에 바벨론에서 포로민으로 사로잡혀 가서 살고 있을 때, 제2 이사야를 통해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땅에서, ‘하나님을 믿었던 우리가 왜 전쟁에서 패배하고, 자유를 잃고 이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하고 깊이 생각하고 고민했었어요. 그런 후에 그들은 이유를 찾아냈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요, 진리로 공의를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하나님의 진리를 따를 때 진정한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공의가 세워질 때 평안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려면 창조주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은총을 얻게 되는 겁니다. 미가서 7장 7절에 보면,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 그랬어요.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히 12:2)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받은 사람은 왜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하늘을 창조하여 펴신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리스도께서 믿음의 시작이요, 온전케 하시는 분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오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을 보세요.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베푸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행하는 자에게 신(성령)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요. 창조주 하나님은 하늘을 펴시고, 그 땅과 소출(자손)을 주신 분입니다. 또한 땅 위에 사는 백성에게 호흡(네샤마 /neshamah)을 주신 분입니다. 여기서 “호흡”은 “생명의 호흡, 신적인 영감, 지능적인 영감”을 말합니다. 걷는 자에게 “신(루아흐 ruach/성령, 숨, 바람으로 번역함)”을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신 하늘의 은총을 받고 있나요? 신적인 영감으로 땅에서 그 소출을 내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지능적인 영감을 가지고 풍성한 삶을 살고 있나요?
멕시코 속담에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어떻게 살아갈지 그것을 아는 것이 축복이다.” 그랬어요. 멕시코인이 즐겨쓰는 말이 하나의 속담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겁니다. 멕시코는 미국과 국경이 인접해 있는데, 멕시코인과 미국인의 삶의 질은 천지차이가 납니다. 멕시코인들은 틈만나면 국경을 넘어서 미국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쓰고 있어요. 카톨릭 신앙을 가진 멕시코들인이 왜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멕시코 건국 초기 대통령인 프로피리오 디아스가 탄식했던 말 속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어요. “불쌍한 멕시코, 하느님으로부터는 너무 멀고 미국과는 너무 가까운 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의 은총도 멀어진다는 거예요.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인도를 받지 못할 때, 능력은 있지만 무기력한 삶을 사는 겁니다. 성령의 능력없이 무능한 상태로 자신없이 살아간다는 것이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어느 호랑이가 배가 고파서 사냥에 나섰대요. 그때 토끼 한 마리가 깡충깡충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앞발을 번쩍 들어서 낚아 채려고 했대요. 그때 토끼가 매서운 눈매로 호랑이를 째려보더니, 호랑이의 앞발을 탁 치면서, “이거, 놔 짜식아!” 그러더래요. 토끼의 행동에 호랑이가 한순간에 당황하면서 “뭐, 이런 토끼가 다 있어! 네가 무슨 배짱으로 감히 호랑이 한테 대드는 거냐?” 그러면서 호랑이가 되리어 놀라서 슬금슬금 도망쳤어요. 사냥을 못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다음날 먹이를 또 찾아 나섰는데, 토끼가 깡충깡충 그 앞을 지나가더래요. 다시 앞발을 들어서 토끼를 탁 치려고 하는데, 토끼가 다시 날카로운 눈으로 째려보면서 “짜식아, 내가 어제 그 토끼야!” 그랬어요. 호랑이가 ‘이 토끼는 안되겠는데...’ 그러면서 다른 토끼를 찾아서 나섰대요. 토끼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한 번에 낚아채려고 앞발을 번쩍 들었대요. 그걸 본 토끼들이 씨~익 웃으면서, “짜식아, 소문 다 났어!” 그러더래요. 연약한 토끼 앞에서 무기력한 호랑이 모습에 실소(失笑)하는데, 오늘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하늘을 펴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호흡을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건강한 삶을 살기 원하시죠. 성령님께서 주신 신적인 영감으로 지혜와 능력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본문 6절을 보세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그랬어요.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께 부름받은 것은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는 히브리말로 “쩨덱(tsedeq)” 인데요. 우리말로는 “(자연적으로,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올바르다” 하는 뜻입니다. 상징적으로는 “번영하다” 하는 의미도 있구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로 나(우리)를 부르시고, 손을 잡아 보호해 주셨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시편 106편 3절에 보면,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랬어요.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오직 의인은 믿음을 통해서 살 것이다.”(롬 1:17) 그랬어요. 하나님의 의가 없이는 믿음이 없고,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요. 그러면 왜 우리(나)를 하나님의 의로 부르셨을까요? 하나님의 언약을 세우시고,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려고 그런 겁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의 의를 실행함으로 빛이 되어야 합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신대륙에 정착해서 독립국가가 된 미국이 지금은 세계 경찰국가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미국의 지도자들이 올해 5월 4일(현지 시각)에 미(美) 전역 5만여 장소에서 “제 55회 전미 기도의 날(National Day of Prayer)” 행사를 가졌답니다. 올해 주제는 “미국이여, 하나님을 경외하라(America, Honor God)” 라고 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건국부터 지금까지 미국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라” 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군요. 기도회에 참석했던 미국인들은 오전부터 오후까지 정부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교육을 위해서, 가정을 위해서, 언론을 위해서 합심하여 중보기도를 했어요.
루이스 쉘던 목사님은 “미국의 기도 뿌리는 건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미국은 청교도 신앙인들에 의해 세워졌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미국 헌법의 철학이자 근간입니다.” 그랬어요.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미국 역사에서 기도는 국가 존립에 큰 역할을 했어요. 오늘날 미국이 봉착한 복잡하고 위협적인 문제들은 하나님의 지혜와 인도 없이 해결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모두 나라를 위해서 깨어 기도하십시다.” 하는 메시지가 전했대요. 이에 대해 죠지 부시 대통령은 이렇게 감사의 말을 전했대요. “기도는 하나님께서 미국 지도자들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입니다. 매일같이 나라와 군인, 지도자를 위해 기도하는 수백만 미국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미국이 우연히 강대국이 된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지도자들이 백악관에서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모습이 아름답잖습니까? 영광의 주님이 나의 손을 붙잡아 주시기를 간구하고, 왜 나를 보호해 주시는지, 그 목적을 알기 원한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것이요, 나를 보호해 주신 것은 이방인의 빛이 되라고 그런 거죠.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이 바로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참 행복은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데 있어요. 축복받은 신앙인은 행복한 삶을 이방인에게 나눠주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어떻습니까? 주님이 나(우리)에게 주신 영광을 믿지 않는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까? 내가 받은 은총이 빛으로 나타나고 있나요?
토마스 풀러는 말하기를 “일주일 동안의 삶에서 6일 동안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지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주일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 그랬어요. 무슨 뜻일까요? 선데이(sunday) 크리스천이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겠느냐? 주님의 영광을 받은 사람은 날마다 하루 하루 삶에서 빛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흑암에 갇힌 영혼들에게 영광의 빛을 비춰야 할 사명이 있는 거예요.
본문 7절을 보세요. “네가 소경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처한 자를 간(間)에서 나오게 하리라.” 이 말씀은 참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흑암에 갇힌 자들을 구원하러 오실 것이고, 예수님이 앞으로 행해야 할 사역이 어떤 것인가?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도 말씀하신 것이죠.
사탄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놓지 않을 것입니다. 되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유혹할 것입니다. 사탄은 사람들에게 탐욕의 눈을 크게 뜨게 해서 영적인 눈을 멀게 하고, 좋은 것을 좋게 보지 못하게 합니다.
J. 아담스 라는 기독교 상담학자가 있는데요. 하루는 어떤 부인이 상담하러 왔더래요. 그동안 남편에게 얼마나 속상한 일을 많이 당했는지... 의자에 앉자마자 푸념을 털어놓더래요. “저는 더 이상 남편하고 살 수 없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하고 물었더니, 대학 노트 한 권을 내놓으면서 15년 동안 남편이 했던 말을 다 적어 놨어요. 남편이 했던 실수들, 약점들, 허물들이 깨알같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어 놓았던 거예요. 게다가 실수했던 부분을 통계목록으로 만들어서 색인표까지 붙여 놓은 것을 보여주면서, “이런 남편하고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더래요.
만약에 여러분이 이런 부인을 상담했다면 어떻게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아담스가 부인을 쳐다보고, 노트를 들춰보면서 말했어요. “그러니까 모든 문제가 바로 이 노트 안에 있군요. 이 노트를 깨끗이 당신의 가슴에서 태워버리기 전까지 당신은 가정을 가질 자격이 없는 여인입니다. 그러니 돌아가십시오.” 그러면서 부인을 집으로 돌려 보냈대요.
그런 후에 그 가정의 아들이 밖에 나갔다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아빠에게 묻더래요. “아빠, 세계 3대 악처가 누구 누구예요? 세계 2대 악처는 알겠는데, 한 사람을 모르겠단 말예요.” 그러자 그 아빠가 아들 이마에 꿀밤을 주면서, “야, 이녀석아, 네 엄마 이름도 모르냐?” 그랬답니다.
여러분! 마음에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차 있으면 밝은 면을 보지 못합니다. 소경은 눈이 있지만 눈의 기능을 잃어 버렸어요. 그래서 보지 못한 거예요. 탐욕에 눈이 먼 사람은 감옥에 갇힙니다. 세상 이념에 갇힌 사람은 진리를 진리로 믿지 않아요. 사탄은 그런 사람들에게 진리를 불신하게 하고, 불순종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 풍속을 좇아가게 만들죠. 사탄은 사람들에게 육체의 욕심을 따르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조종합니다.
반면에 진리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어요. 모든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땅의 소금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빛의 자녀로 살라.” 하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광을 다른 자(우상)에게 주기 원치 않으십니다. 찬송도 우상에게 주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사무엘 존슨이 말하기를 “인생은 짧다. 그러므로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까? 하고 이것 저것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해서는 안된다. 나는 내 아내가 헬라어를 줄줄 외울 때보다도 저녁 식탁을 맛있게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다소곳이 앉아있을 때가 참으로 행복했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졌다.” 그랬어요. 우리가 보내는 하루, 삶 속에 영광의 주님이 함께 하시기 원합니다. 스웨덴의 경제학자요, 정치가였던 다그 하마슐드는 노벨평화상을 받았던 분인데요. 그가 이런 말을 했어요. “지나간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가올 모든 것을 긍정합니다.” 이제 참빛으로 오신 예수님이 주신 은총을 늘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심령을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게 채우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