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봉-1953년 충남 공주 출생, 숭전대(현 한남대) 국문과 졸. 숭실대 대학원에서 국문학 석사, 박사학위 수여. 1983년 《삶의문학》 제5집에 평론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고, 1984년 창작과비평사의 17인 신작시집 『마침내 시인이여』에 「좋은 세상」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좋은 세상』, 『봄 여름 가을 겨울』,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무엇이 너를 키우니』,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평론집 『실사구시의 시학』, 『진실의 시학』, 『시와 생태적 상상력』, 연구서 및 시론집 『한국현대시의 현실인식』, 『화두 또는 호기심』, 편저로 『시와 리얼리즘』, 『이성부 산시 연구』, 공저로 『송강문학연구』, 『홍희표 시인 연구』등 상재. 한성기문학상, 유심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등 수상. 《삶의문학》,《시와사회》, 《문학과비평》, 《문학마을》, 《시와사람》, 《시와상상》, 《시와인식》, 《불교문예》, 《시와시》 등의 편집위원, 편집인, 주간 역임.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 정평불 공동대표, 창공클럽 회장,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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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6일 오후, 온 생애 내내 시를 쓰고 시지를 만들고 시를 가르쳐 오신 이은봉 교수님을 대전정부청사 공원에서 뵙고, 시인의 삶과 시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사진-박소영 시인)
이상적인 시공간을 복원하는 상고주의자上古主義者, 이은봉 시인-김명원 시인과의 대담
방학이라 하경한 아이들이 외출한 여름 정오, 혼자 마루에 앉아 참외를 깎아 먹는다. ‘참외’의 ‘외’는 오로지 ‘하나’라는 뜻, 곁에 아무도 없다는 뜻, ‘외롭다’의 첫음절로서 얼마나 혼자임을 강조하고 싶으면 ‘참외’는 영어로도 ‘me-lone'이다. 게다가 접두어로 ‘참’이 붙어 참다운 외로움을 뜻하게 되었으니, 참외는 왜 이다지 외로움을 표상하는 단어로 불리워졌을까. 이유는 마디 하나에 참외꽃이 하나씩만 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다른 식물들은 쌍꽃으로 피어 열매도 쌍으로 맺는데 비해, 박과 식물인 참외는 외꽃으로 피어 자신이 혼자 둥글게 맺어야 할 시간과 공간을 처절히 확보한다. 홀로 꽃 피고 홀로 꽃 지고 홀로 열매 맺는 가운데 더욱 자라고 넓어지고 둥그러져 여름이 내는 과일로서의 멋진 면모와 진한 당도를 자연에 펼쳐 보이는 것, 그리고 내 입 안에서 찬미 받는 것.
작열할 듯한 뜨거운 햇빛들을 어쩌지 못하다가 신선한 미감을 선사하는 참외 한 조각으로 시원해지는 시간, 나는 그 행복한 미감 끝에서 이은봉 시인을 떠올린다. 내가 마주하고 있는 참외가 이은봉 시인의 풍모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중심이 아닌 변방에서, 그것도 혼자 사유하고 고투하며 지켜낸 진실의 외곽에서 그는 늘 뜨겁게 자신을 지켜냈으며 날카롭게 시대를 응시하고 포용했다. 철저하게 외로워 본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참다운 경지에서 가장 잘 익은 시간을 우리에게 시로 달콤하게 증명해 보인 연유에서이다. 그렇다. 그는 혼자를 익혀 온 봄을 아는 시인이며,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는 여름을 증거하는 시인이다.
시인을 모시고 시 세계와 주변 일상의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듣고 기록하는 이 지면에서 나와 가장 오래된 인연이 있다면 바로 이은봉 시인일 터. 시인은 내 패기 있고 젊던 이십대를 보아준 유일한 문인이기도 하다. 문학에 대한 편편한 그리움을 어쩌지 못해 대전성모병원 약제과에서 야간근무를 하면서 낮에는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을 다녔던 내 이십대 후반의 가을날 이은봉 시인은 멋지게 등장한다. 국어국문학회 세미나에서 처음 만난 시인은 지금처럼 그때도 언제나 웃는다. 웃는 모습은 심히 아름다워 가히 격조 높은 수묵화폭이다. 시인은 그때처럼 지금도 언제나 상대를 격려해준다. 격려는 따듯하고 구체적이어서 듣는 즉시 효과를 발현한다. 축 쳐져 있던 어깨가 올라가고 힘이 불끈 솟는다. 시인은 그때처럼 지금도 재미난 이야기꾼이다. 비운에 죽어 간 시인들로부터 현문단의 대소사, 시인들의 근황을 쫄깃한 언어의 질감을 살려 이야기해준다. 시인이 나타나면 그때처럼 지금도 지방방송들은 스스로 소거되고 그에게만 주파수를 맞추게 된다.
서툴었으나 눈부셨던 문청시절을 공유한 시인,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예뻤던 지를 기회가 될 때마다 들려주는 덕담의 시인, 변화가 발전 목록이 된 안타까운 현실에도 변하지 않는 가치와 진한 의리를 지닌 시인, 만나는 사람마다 본인의 진가를 발휘하여 그들 삶의 주인공이 되도록 도모해주는 시인, 시대와 사람을 재산으로 등록한 시인, 대학생들에게 인기 절정인 선생님 시인, 그런 시인을 어찌 추종하지 않을 수 있으랴. 나는 그간의 어떤 인터뷰보다 달뜬 채 전화를 드려 대담 허락을 받았고,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시인에게 가고 있다. 염소 떼 모양의 하얀 구름들이 정답게 동행해주는 8월 하순이다.
고향 ‘막은골’의 여름 영상
김명원--무더운 날들이 연일 계속되고 있습니다. 더위로 인해 집중력이 떨어져서인지 앉아서 책을 보는 것만도 부담스러운 성하의 오후인데요. 선생님께서는 방학 중이지요?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으신지요?
이은봉--단순하게 지내요. 책 읽고, 글 쓰고, 사람 만나고…… 뭐 대강 그렇지요. 아, 산책할 때도 있기는 하네요. 그런데 올해 여름은 너무 더워 산책할 마음이 잘 안 나고요. 방학이기는 하지만 더러 광주에 다녀오기도 해요. 실은 그때그때 주어진 일들을 하기 위해 늘 바쁘게 지내고 있어요.
김명원--여름방학이라고 해도 대학 선생님인데다 시지 주간 일도 맡고 있으니 여러 업무들로 분주하시겠지요. 선생님의 고향인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 ‘막은골’은 이제 행정중심복합도시인 세종시가 들어 와 옛 모습이 사라졌지만요. 고향에서 여름이면 어떤 놀이들을 즐기셨는지요? 여름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이은봉--고향마을인 막은골(망골杜谷)의 남쪽에는 드넓은 장남평야가 펼쳐져 있었지요. 북쪽에는 말 그대로 뒷산이 삼태미처럼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고요. 서쪽에도 높지 않은 산이 펼쳐져 있었어요. 서쪽에서 발원한 구릉이 동쪽으로 계속 이어져 마을의 앞을 절반 정도 가리고 있었는데요. 동쪽으로 계속 이어져 온 이 구릉의 끝을 뻬삭부리라고 불렀는데, 그 뜻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곳에서 백색 흙, 백토가 났는데, 그래서 뻬삭부리라고 부르지 않았겠느냐고 어머니는 말씀하시더군요. 이 산과 구릉이 겨울에는 차가운 북풍과 서풍을 막아주었지요.
뻬삭부리 앞쪽으로 펼쳐져 있는 장남평야가 끝나는 지점에 금강이 흐르고 있었고요. 막은골에서 금강까지는 한 3km쯤 되었을 거예요. 남쪽의 금강을 바라보고 동쪽으로는 금강으로 흘러드는 모듬내(제천濟川)가 흘렀지요. 여름에는 수량이 꽤 많았어요. 어렸을 때는 여기서 물장구를 치며 놀았지요. 물놀이는 동네에서 멀지 않은 들녘의 둠벙에서도 많이 했는데요. 멀지 않은 들녘에 ‘찬물내기’라는 둠벙이, ‘도깨비탕’이라는 둠벙이 있었거든요. 물놀이에 지치면 ‘짐너머’ 참외밭에서 참외서리를 하기도 했고요. 조금 컸을 때의 일이기는 하지만, 여름 장마가 지는 밤에 모듬내 둑방을 타고 북쪽으로 기어가 이웃 마을 과수원에서 복숭아 서리를 한 적도 있지요.
이제 내 고향인 공주군 장기면 당암리 막은골은 없어요. 얼핏 들으니 새로운 행정 동명이 만들어지는 모양이더군요. 동네가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고요. 우리 집 집터 옆에는 저류지인지 뭔지 하는 오폐수를 가두는 둠벙 같은 것이 생기는 모양이대요.
김명원--개발의 논리에 침몰된 고향이라니요. 오랜만에 둠벙에서의 물놀이와 참외서리, 복숭아서리라는 말씀을 들으니 왜 이다지 시린 유년의 추억들이 살아나는지요. 선생님 생가가 그대로 보존되어야 백년 후쯤 각광 받는 문학 탐방지로 활용될 텐데 아쉽네요. 저류지로 바뀐 아픈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다시 고향 이야기를 이어볼까요.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를 따라 전학을 하게 된 것이 고향을 떠난 최초의 사건이셨나요? 그 즈음의 어린 선생님과 만나고 싶은데요.
이은봉--그렇지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이니까, 여덟 살 때인 듯싶네요. 아버지가 아산군 인주면 금성리 붓당골의 금성초등학교로 발령이 났어요. 큰고모와 할아버지 등이 작당해 바람기 많은 아버지를 감시할 겸 나를 아버지의 발령지로 따라 보냈지요. 아버지와 단 둘이 붓당골에서 살 때 처음으로 외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바람기 많은 아버지는 그곳의 하숙방에 나를 버려둔 채 밖으로 나가 자정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기 일쑤였고요. 채 서른이 안 되었던 젊은 아버지는 내가 삼촌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했어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따로 할 일이 없으니 국어책이나 사회책 등을 읽고 또 읽고 했죠. 그러다 보니 책을 거의 다 외울 정도였어요. 독서 속도도 아주 빨라졌고요. 그때 그 금성초등학교 2학년 중에서는 내가 국어책을 가장 빨리 읽었지요. 그렇게 속독을 배웠어요.
그때 그곳에도 친구들이 좀 있었는데,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네요. 지금 바로 언뜻 이윤재라는 이름 하나가 떠오르기는 하는데, 맞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어요. 성이 지가인 쌍둥이 형제도 함께 학교에 다녔는데, 이름은 생각이 안 나요.
그곳에서 일 년 좀 넘게 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당암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일 년 사이에 바깥 물을 좀 먹었다고 많이 개화가 되었지요.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다는 얘기에요.
안터, 부귀동, 불탄터, 음담말, 띠울, 엄고개, 속골, 선돌, 양청, 당골, 용고동, 참샘골, 생기동, 머레, 소잠, 갈메, 시거리…,
이런 마을 이름 다 삼켜버렸네
옷시암거리, 수렁배미, 송종목께, 짐너머, 지내, 공수마루, 찬물내기, 도깨비탕, 모듬내, 빼리, 호미다리, 통묏산, 다꽝마루…,
이런 땅 이름 다 잡아먹었네
이들과 함께 키워온 꿈도 추억도 죄 씹어먹었네 아름다운 괴물도시 세종시가 아가리 딱딱 벌리고서는.
―「이름들―막은골 이야기」전문
문학에 경도되기 시작한 학창시절
김명원--초등학교 시절부터 시창작에 관심을 두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은봉--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그때 이미 내가 책읽기를 아주 좋아했어요. 읽기를 좋아하다 보니 쓰기를 좋아했을까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그냥 불현듯「돗자리」라는 제목의 시를 썼어요. 선생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집안에서 따로 누가 부추긴 것도 아니에요. 동시집 같은 것을 갖고 있지도 않았고요. 어머니가 시집올 때 해온 돗자리가 골방에 늘 기대 서 있기는 했지만요.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좀 외로웠을까요. 아, 그때도 뭘 좀 끼적이는 것을 좋아했어요. 만화 비슷한 것도 그렸고요. 물론 시 비슷한 것도 자주 썼고요.
김명원--선생님께서는 고향에서 당암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공주중학교와 대전보문고등학교를 다니셨지요. 중고등학교 시절, 문학에 대한 창작 욕구는 어떻게 현발現發되었는지요? 대학에서 국문학과를 선택하시게 된 계기와 연관이 있어 보이거든요.
이은봉--중학교에 다니고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그냥 범생이었어요. 지금도 그런 면이 좀 있지만 말이에요. 실은 범생이로 사는 것이 가장 힘들지요. 평생을 평범하게 사는 것이 평생을 가장 비범하게 사는 것 아닌가요.
공주중학교 때는 이성구라는 친구가 백일장 선수로 활동했는데요. 그 친구가 상을 타와 운동장 조회 때 시상식을 하고, 시낭송을 하면 마냥 부러워하며 쳐다만 보고 있었지요. 늘 콤플렉스를 느끼게 했던 그 친구…, 지금은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때도 문학을 한다고 하던 선후배와 친구들이 좀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좀 우습게 봤어요. 읽은 책도 별로 없이 글을 쓴다고, 문예반을 한다고, 백일장에 나간다고 나대고는 했으니까요. 그때 나는 신구문화사 판 전후세계문학전집, 한국문학전집, 을유문화사 판 세계문학전집 등을 줄기차게 읽고 있었거든요. 그러니 시건방을 좀 떨었던 것이지요.
고등학교 동기생 중에는 서완환이라는 친구가 문학 지망생으로 유명했는데, 그와 교실 복도의 창가에 기대어 까뮈의「이방인」등 실존주의 문학에 대해 뭐라고 얘기를 주고받던 기억이 나네요. 그때까지도 실존주의 문학이 유행을 하던 시절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는 대전에 ‘머들령’, ‘돌샘’, ‘판도라’ 등 범고등학생 문학회가 있었어요. ‘돌샘’에는 한두 번 정도 나갔고요. ‘판도라’에는 꽤 여러 번 나갔던 기억이 나네요. ‘판도라’는 은행동 네거리의 대전문화원에서 모였던 듯싶네요. 고등학교 때는 주로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했어요.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하면서 민족과 세계에 대해 처음 눈을 떴지요. 세계관이나 가치관 등도 흥사단 아카데미 활동을 통해 갖게 되었지요. 흥사단의 4대정신인 무실, 역행, 충의 용감은 지금도 내 삶의 실천 강령이 되어 있어요.
국문학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고등학교 2학년 때쯤에는 아주 확고했어요. 워낙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거든요. 아무런 의심도 없이 국어국문과에 올인했지요. 대학입시에 두 번씩이나 떨어졌지만요.
선생님 말씀을 습지濕紙처럼 빨아들이다
김명원--선생님의 대학 시절로 이야기를 옮겨 보겠습니다. 아마도 문학에 집중하셨을 시기였을 텐데, 어떤 분들과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이은봉--두 번의 입시에서 실패를 한 후 지금의 한남대학교, 당시에는 숭전대학교 대전 캠퍼스 국어국문과에 다녔어요. 대학 1학년 때는 ‘여명’이라는 학내 문학 서클이 있어 거기서 활동을 했지요. 시내의 가톨릭 문화회관 등에서 선배들을 따라 ‘문학의 밤’ 등을 개최했던 것이 생각나네요. 그런데 군대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이 ‘여명문학회’가 없어진 거예요. 그래서 1977년 봄인가요, 문학하는 친구들을 불러 모아 ‘창과벽’이라는 동인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런 뒤 『창과벽』이라는 이름으로 동인지도 4권을 냈는데, 이『창과벽』이 사람들이 다 잘 알고 있는 『삶의문학』의 전신이지요.
지방대학이지만 이 대학에서 나는 정말 좋은 교수님들을 참 많이 만났어요. 고전문학을 강의하던 박요순, 소재영, 최래옥 교수님은 물론 현대문학을 강의하던 김현승, 윤홍로, 이봉채, 조재훈, 김대행 교수님 등도 다 이 대학에서 만났거든요. 영문학을 강의하던 윤삼하, 김종철, 강선구 교수님, 불문학을 강의하던 이가림 교수님, 교육학을 강의하던 연문희 교수님도 대학에서 만난 은사님들이지요. 이분 은사님들한테 배운 것에 대해서는 따로 장문의 지면을 만들어야 대강이라도 얘기할 수 있을 정도예요.
김명원--선생님께서는 사석에서 시의 스승이신 김현승 선생님께서 생존해 계셨으면 문단활동을 하는데 좀 더 든든했을 거라는 심경을 털어 놓기도 했지요. 대학시절에 사제지간이었던 김현승 선생님에 대한 추억담을 좀 들려주시지요.
이은봉--숭전대학교 국문과에 그냥 끝까지 다니기로 한 데는 김현승 선생이 거기에 계시다는 것도 큰 역할을 했지요. 다형 김현승 시인을 가까이에서 뵌 것은 내가 대학 2학 때, 그러니까 1974년 봄의 일이지요. 다형 선생님이 강의하던 ‘시론’, ‘문예사조’, ‘시창작 실기’ 등의 과목을 도강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시론’은 3학년 과목, ‘문예사조’와 ‘시창작 실기’는 4학년 과목이었지 않나 싶은데요. 2학년 때 도강을 했다가 들켜 심하게 혼났는데, 심지어는 타이어 슬리퍼로 얻어맞기까지 했어요. 나가라고 소리를 쳐 강의실 밖 복도로 나왔는데, 복도까지 쫓아 나와 타이어 슬리퍼를 내게 집어던지더군요. 건방지게 2학년이 3학년 강의를 들으러 왔다는 것이지요. 3학년 학생들은 가까운 동춘당으로 학술답사에 갔던 참이에요. 3학년 학생들이 늦게 돌아오는 바람에 강의실에서 몸을 가릴 수 없게 된 것인데, 그날 선생님의 역정은 대단했어요. 내년에 똑같은 과목을 정식으로 들으면 시시해지고 재미없어진다는 것이 다형 김현승 선생님의 말씀이었어요. 해마다 똑 같은 강의를 하시는 것이 쑥스러웠는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때 김현승 선생님의 강의를 듣지 못했으면 영영 듣지 못했을 거예요. 1975년 4월 숭실대학교 채플에서 설교 기도를 하다가 쓰러져서는 끝내 일어나지 못했거든요. 으음, 그런데 선생님이 돌아가던 1975년 4월초 선생님의 이름으로 주던, 학보사에서 주최하는 제2회 다형문학상 수상자가 나였어요. 1974년 초봄의 제1회 수상자는 박만춘 선배였고요. 등록금이 7만 5천 원 정도이던 때였는데, 상금이 5만 원이었어요. 당시 5만원은 꽤 큰돈이었는데요. 그때의 상금으로 여자 친구에게 블라우스, 머플러, 속옷, 스타킹 등을 사주었던 기억이 나네요. 책도 좀 샀는데, 그때 산 책으로는 김현 선생의 첫 평론집 『상상력과 인간』, 『시회와 윤리』 등이었지요.
당시 다형문학상 수상작인「귀 기울이고 들어 봐」는 김지하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아 쓴 시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운 시이지요. 그래서 이 시는 시집에 넣지 않았어요. 그때 다형문학상의 실질적인 심사는 이성부 시인이 맡아서 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이성부 시인은 그때의 나를 잘 기억하고 계셨지요. 이런 일이 있은 후 김현승 선생님과 급속히 가까워졌는데, 이소룡이 주인공으로 출현하는 영화를 좋아해 모시고 갔던 기억이 나네요. 원고를 들고 수색의 선생님 댁으로 찾아뵈었다가 전기곤로 위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끓여주는 커피를 마셨던 기억도 나고요.
김현승이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해인 1974년 가을, 내가 대학 2학년 때 가을의 일들도 생각이 나네요. 그러니까 김현승 선생이 회갑을 맞은 해 가을의 일이지요. 국문과에서는 박요순 교수님이 중심이 되어 김현승 선생님의 회갑잔치를 해드렸어요. 대전의 가톨릭문화회관 소강당에서 학과의 학생들과 교수들이 모여 케이크를 자르는 등 회갑을 기념하는 작은 이벤트를 했지요. 회갑기념행사를 마치고 여흥시간이었데, 갑자기 박요순 교수님께서 시를 쓰는 이은봉이 회갑을 맞은 김현승 선생님을 기념하는 축가를 부르라는 것이에요. 좀 빼다가 좌중 앞에 나섰죠. 가곡이나 성가 등을 불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노래 중에는 자신 있게 부를만한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내 18번이었던 배호의 노래「마지막 잎새」를 구슬프고 처량하게 불러 젖혔지요. 그날은 유난히 노래가 아주 썩 잘 불러지더군요. 앙코르가 들어와 배호의 노래「누가 울어」를 한 곡 더 불렀던 듯싶네요. 김현승 선생님은 대중가요를 불러 그런지, 쑥스러워 그런지 별 반응이 없었어요. 그런 일이 있은 뒤 채 일 년도 안 되어 돌아가실 줄은 상상도 못했고요.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선생님, 스승이 없는 제자가 얼마나 외로운가를 실감하게 해준 선생님, 선생님의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해준 선생님, 선생님이 안 계셔 오랫동안 나는 방황해야 했다. ‘절대고독’을 노래한 선생님, ‘고독의 끝’을 노래한 선생님……. 그런 선생님과는 달리 나는 늘 너무 고독해, 너무 외로워 쩔쩔매야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김현승 선생님의 시「플라타너스」를 떠올리고는 했다. 떠올리며 중얼중얼 외우고는 했다. 외우며 생각에 빠지고는 했다. (…중략…) 내게도 ‘플라타너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플라타너스 같은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꿈을 아느냐”고 “물으면” 어느덧 머리가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는 플라타너스! 우리 “함께 神이 아”닌 플라타너스! 나도 이제 플라타너스의 “뿌리 깊이” 내 “영혼을 불어 넣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
젊었을 때는, 총각 때는 이런 생각에 빠져 일부러 플라타너스 길을 찾아 걷기도 했다. 물론 지금도 갑자기 외로워지면 습관처럼 시「플라타너스」를 중얼거리고는 한다. 중얼거리며 생각하고는 한다. 내게도 플라타너스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호올로 되어 외로울” 때 “나와 같이”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플라타너스 같은 사랑이!
-「까칠한 스승과 플라타너스」 부분
김명원--김현승 선생님과는 짧은 인연였지만 선생님께서 산문「까칠한 스승과 플라타너스」에 썼다시피 평생을 그리워하는 사제지간이 되셨군요. 김현승 선생님 이외에 선생님 시시계 정립에 영향을 준 문학적 스승으로는 또 누가 계실까요?
이은봉--김현승 선생님이 안 계셔, 기댈 곳이 없어 한동안 방황을 했지요. 그래서 그 무렵에는 충남대 국문과에 계시던 오세영 교수님을 찾아뵙기도 했어요. 송욱 선생님의『문학평전』과 『시학평전』을 소개해주시어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 맨 처음 만난 시인은 나태주 선생님이었어요. 여명문학회에서 나태주 선생님을 초대해 왔지요.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나태주 선생님이 첫 시집 『대숲 아래서』를 냈을 때였어요. 나태주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대학 1학년, 2학년 때는 순수 자연시를 써보기도 했지요. 나태주 선생님에게 몇 차례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요.
그러나 정작 문학적 스승들은 만난 것은 막 김현승 교수님의 사랑을 받을 무렵이지요. 그 무렵에 이가림 교수님도, 조재훈 교수님도, 윤삼하 선생님도 처음 뵙게 되었거든요. 정작 이들 선생님께 좀 더 많은 것을 배운 것은 방위병으로 군역을 마치고 복학한 1976년 가을 이후부터이기는 하지만요. 이가림 선생님을 따라 김종철 선생님과 함께 대전 신도극장 근처의 젓갈 백반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나네요. 이가림 선생님 댁에 가서 사모님이 해준 칼국수를 먹던 기억도 나고요. 두 분 선생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듣고 배우는 것도 큰 공부였으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내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선생님은 문학평론을 하던 김종철 선생님이었어요. 지금은 《녹색평론》을 만드는 생태철학자로 알려져 있지만요. 《창과벽》동인들 모두와 가까웠는데, 사석에서 문학과 인생, 역사와 사회 등에 대한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어요. 저는 시에 대한, 문학에 대한 열정이 강해 김종철 선생님의 말씀을 습지濕紙처럼 빨아들였지요. 이가림 선생님도 사석에서 불문학과 관련해 참 많은 말씀을 해주셨고요. 불문학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도 사석에서 이가림 선생님께 개인지도를 통해 배운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내가 스승 복이 참 많은 사람이네요.
김현승 선생님이 1975년 4월에 돌아가신 후 1977년쯤부터인가 시 강의를 공주대학교의 조재훈 선생님이 맡았어요. 선생님은 강의를 마친 뒤 곧장 공주로 가지 않고 따로 나를 불러 시내의 찻집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어요. 찻집에서 그렇게 배운 것도 굉장했지요. 이들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것은 나만이 아니었어요. 1980년대에 들어《삶의문학》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던 친구들이 다 이들 선생님으로부터 관심을 받았죠. 물론 우리가《삶의문학》동인으로 활동하던 때는 1983년 이후의 일이지만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소명의식
김명원--선생님께서는 1984년 1월, 창작과비평사에서 발간한『마침내 시인이여』라는 신작시집에 시「좋은 세상」외 6편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하셨는데요.『마침내 시인이여』의 성격도 궁금하고요. 그 당시의 문학 환경과 시대 상황도 좀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은봉--『마침내 시인이여』는 일종의 시전문 무크지에요.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창작과비평』이 강제로 폐간되자 창작과비평사에서는 일종의 신작시집 형식으로 1년에 1권씩 사화집을 냈지요. 물론 신작소설집도 냈고, 신작평론집도 냈지요. 이들 무크지는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는 문화적 게릴라의 속성이 있었어요. 그렇게라도 꼼지락거려야 숨을 쉴 수 있었던 시대였지요.
아, 참, 1980년대 초의 시대 상황을 말해달라고 했지요? 말 그대로 암흑기였어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강제 진압한 전두환 군사정권은 말 그대로 철권정치를 했잖아요. 숨을 쉴 수조차 없을 만큼 억압적이었던 것이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거든요. 신군부의 경찰들은 길거리에서 불심검문을 통해 무시로 시민들을 감옥으로 끌고 가고는 했어요. 늘 불안했지요. 공포와 두려움의 떠나지를 않던 시절이었어요. 이런 시절에 신군부에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었지요. 그래도 이에 굴하지 않았던 것이 시인들이었고 작가들이었고요. 고은, 채광석, 김정환, 김사인 등 참 용감한 작가와 시인들이 많았지요.
김명원--『마침내 시인이여』에 시를 발표하시기 이전, 1983년 《삶의문학》 제5집에 평론 「시와 상실의식 혹은 근대화」를 발표하며 비평의 길로도 진입하셨는데요. 이처럼 활발하게 문학 활동을 시작한 그 즈음이 실상은 개인적으로 고초를 겪으시던 때였지요. 석사학위를 마치고 노동자들의 삶을 체험하겠다고 산업체 부설학교의 국어교사로 자원해 갔다가 해직이 되어 한남대학교에서 시간강의를 하시던 무렵이기도 하니까요. 어쩌면 그 시절의 경험이 선생님 시의 향방을 결정한 것은 아닐까요?
이은봉--당시에는 내가 꽤 진보적이었던 같아요. 석사학위 논문을 쓰고 난 뒤였는데, 노동자들 곁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그것이 내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체력이 달려 내가 노동자로 위장취업을 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때는 바짝 말라 겉으로 보기에도 아주 약해 보였어요. 그런 이유로 위장취업을 포기하고 동방산업의 부설학교인 혜천여고(야간)에 국어교사로 부임했지요. 동방산업은 제법 큰 제품공장이었어요. 부설학교를 둘 정도였으니까요. 동방산업에서는 주로 와이셔츠, 점퍼, 파카 등을 만들었는데요. 동방산업에서, 아니 혜천여고에서 노동현장을 경험하고 내가 크게 각성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삶의문학》 친구들과 더불어 나는 그보다 훨씬 전에 의식화되어 있었어요.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강한 신념 같은 것이 있었거든요. 우리 세대 지식인들에게는 모두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소명의식 같은 것이 있었어요. 우리가 우리 손으로 제대로 된 역사를, 민주주의를, 나아가 조국통일을 바르게 이룩해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 같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었으니 그것이 세계관을 형성해 시에 반영되기도 했겠지요. 시인 이전에 지식인이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때는 그랬어요.
김명원--결혼을 그 무렵에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두 분의 결곡한 결혼 인연은 어떻게 이루어지셨나요? 제 딸이 가장 궁금해 하는 연애담! 기대합니다.
이은봉--연애요? 연애담요? 아내와의 연애를 말하는 거죠? 아내의 이름부터 말할까요. 송윤옥이에요. 혈액형은 B형이죠. 제 혈액형은 O형이고요. 원래 B형 여자들이 적극적이고 실천적이잖아요. 추진력이 있지요. 리더십이 있다는 말이에요.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알지요?
김명원--그럼요, 선생님. 저도 혈액형이 B형인 걸요. B형 여성, 한 인물하지요.(웃음)
이은봉--아무튼 아내는 두부 두루치기를 좋아했어요. 리어카에서 파는 비닐구두도 잘 신고 다녔는데요. 『논어』에 “士志於道 而恥惡衣惡食者 未足與議也”라는 말이 있지요. “선비가 도에 뜻을 세우고서도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러워하면 더불어 말을 나눌만 하지 못하니라” 라는 뜻이죠. 그런데 아내는 내게 암소를 끌고 가서 썩은 사과를 바꿔 와도 좋다고 하더군요.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은 보인회에서 주최한 고전강습소였어요. 보인회는 충청도의 유림 조직이지요. 대전시 대흥동 대성한의원의 지하 강의실에서 여러 선생님들이『소학』, 『고문진보』, 『논어』, 『맹자』, 『중용』, 『대학』등을 강의했어요. 그분들 가운데 나와 가장 코드가 잘 맞는 분은 석정石庭 송각헌宋恪憲 선생님이었어요. 송각헌 선생님은 충남대학교 불문과에서 정년퇴직을 한 송재영 교수님의 춘부장이시지요. 송각헌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에요. 송각헌 선생님한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요. 다시는 송각헌 선생님 같은 천재 은사님을 만나지 못할 거예요. 진짜 천재였어요.『송자대전』을 영어와 불어와 독일어로 번역한 분이니까요.
그건 그렇고, 『소학』을 다 읽을 때까지도 송윤옥, 이 사람을 나는 의식하지 못했어요. 『소학』을 다 읽고 나서 『고문진보』를 읽을 때야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요. 강의를 마치면 송각헌 선생님이 나와 송윤옥 씨를 자주 따로 불러 저녁을 사 주셨는데요. 저녁을 먹고 차를 한 잔 마시고 선생님이 먼저 댁으로 들어가시면 나와 송윤옥 씨 둘만 남게 되는 일이 잦게 되었지요. 그렇게 되자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지요. 『고문진보』를 읽을 때인데 한시 한 편씩을 지어오는 것이 숙제였어요. 그때는 내가 제법 한시를 지으니까 송윤옥 씨가 내게 도움을 좀 받고는 했어요. 그러다 보니 내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나 봐요. 그런 인연으로 결혼에까지 이르게 되었네요.
김명원--결국 선생님께서는 가장 이상적인 결혼을 한 경우세요. 공통 관심사가 두 분께 형성되어 있으셨던 것이니까요. 고전강습소에서의 만남, 정말 낭만적이에요. 멋지세요. 또 궁금한 것, 박사학위 논문으로 『30년대 후반기의 현실인식 연구』를 상재하셨지요. 백석, 이용악, 오장환의 시를 중심으로 한 연구였는데, 이들 시인을 연구하게 된 특별한 동기가 있을까요?
이은봉—백석, 이용악, 오장환, 이들은 모두 아주 좋은 시인이잖아요. 한국현대시는 1935년이 기점이 되는 이들의 시에 의해 제대로 된 내용과 형식을 얻게 되지요. 아, 그리고 내가 이 분들의 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어요. 나만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시인 중 적잖은 사람들이 이들의 시로부터 영향을 받았지요. 1980년대의 민중시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말이에요. 김명원 선생도 ‘오장환 시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지요? 그때는 월납북문인들이 막 해금이 되는 시기이기도 한데다가 이들 세 사람의 경우는 막 전집이 나와 있기도 했어요. 이런저런 것들이 복합되어 박사논문의 테마가 만들어졌지요.
이들 세 사람 모두에게는 일관된 특징이 있어요.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시작을 출발해 낭만주의적 경향을 겪다가 리얼리즘의 세계로 옮겨가는 특징 말이에요. 이런 점도 박사논문을 쓰는 데 도움이 되었지요.
역사와 상호 삼투하고 교섭하는 문학
김명원--선생님의 시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질문입니다. 1986년에 첫 시집『좋은 세상』을 출간하셨지요. 시집의 후기에다가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줄기차게 나날의 평등한 삶과 통일 민족국가를 향해 나가는 우리의 역사를 위해, 이 보잘 것 없는 시집이 널리 읽히고 두루 쓰이길 바란다”고 적으셨고요. 1989년에 내신 두 번째 시집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후기에는 “삶 속의 사람을 바로 깨닫기 위해, 사람의 자유와 해방과 사랑과 혁명을 바로 실천하기 위해, 아아 나는 얼마나 많이 자연의 질서를 공부했던가”라고 하며 삶의 운동법칙을 형상화해온 시의 역사에 대해 피력하셨지요. 단순하게 정의되는 시집이 아니라 넓은 시적 외연을 감지하게 하는 문장들로 경외감이 느껴지는 시집들이었는데요. 어쩌면 시집의 후기는 시인이 견지하고 있는 시정신의 고백이나 독백으로 여겨지기도 하고요. 선생님께서 그 당시에 추구하신 시의 예술성이나 정치성은 무엇이었나요?
이은봉--말할 것도 없이 시는 예술의 하위 장르이지요. 마르크스 식으로 말하면 예술은 시와 함께 토대가 아니라 상부구조에요. 예술성, 곧 심미성 그 자체가 상부구조의 하나, 곧 정신(정서)의 하나라는 것이거든요. 달리 말해 의식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라는 것이지요. 의식의 하나, 정신의 하나인 예술성, 곧 심미성은 늘 다른 의식, 다른 정신과 교섭, 삼투하며 존재하기 마련이고요. 그런 이유에서 감수성의 하나인 예술성, 곧 심미성은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니에요. 실제로는 움직이며 활동하는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 예술성, 곧 심미성이지요. 예술성, 곧 심미성과 교섭하고 삼투하는 것 중에는 김명원 선생이 말하는 정치성이라고 하는 것도 있을 수 있겠지요. 물론 이때의 정치성은 논어에서 공자가 정자정야(政者正也)라고 할 때의 정(正)과 무관하지 않아야 하겠고요. 바르게 하는 것으로서의 정(正) 말이에요. 그런 점에서 정치성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해야 하겠죠. 이때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을 나는 역사의 바른 발전방향에서 찾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늘 역사와 상호 삼투하고 교섭하는 문학, 시를 강조했던 것이지요.
김명원--1994년에 출간된 세 번 째 시집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와 1996년에 나온 네 번 째 시집 『무엇이 너를 키우니』에는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들이 표출되고 있는데요. 어쩌면 선생님께서 놓치지 않고 붙들고 계셨던 현실인식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시집들에 내장된 의도를 설명해 주셨으면 해요. 더불어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리얼리즘 시에 대한 생각도 궁금하고요.
이은봉--리얼리즘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예술 경향을 가리키지요. 따라서 리얼리즘은 리얼리티가 무엇이냐가 핵심 관건이 되겠지요. 리얼리티가 무엇이지요? 쉽게 말하면 사실성, 현실성, 실재성, 진실성 등으로 번역할 수 있겠지요. 나는 리얼리티를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진실성과 관련시켜 이해를 해요. 리얼한 세계를 진실한 세계로 받아들이는 셈이지요. 그렇다면 이제는 진실이 무엇이냐는 질문이 따라야하겠지요. 진실에 대한 얘기를 하려면 따로 자리가 필요해요. 그러니 여기서는 이런 정도만 얘기하죠.
아,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는 말 그대로 절망이 어깨동무를 하고 밀려오는 나 개인의 심리와 당대사회의 심리를 동시에 말한 거예요. 여전히 비극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었던 셈이지요. 역사의 점진적인 발전을 기다리기에는 당시의 내가 너무 젊었으니까요. 아마 6월 항쟁의 결과가 뜻대로 역사에 실현되지 않은 데 대한 좌절 같은 것이 반영되어 있지 않은가 싶네요.
『무엇이 너를 키우니』에는 내가 나와 세계에 대해 조금씩 믿음을 회복하면서 쓴 시들이 담겨 있지요. 무엇이 너를 키우니, 사랑의 상처가 너를 키운다는 등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이 시집이니까요. 당연히 내가 내게 이르는 말이에요. 요컨대 너무 아파하지 말라는 것이죠. 아마도 민족에 대한 사랑, 민중에 대한 사랑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거예요. 물론 나 개인이 느끼는 사랑의 상처도 한 몫을 했겠고요. 이 시집에 이르러 나의 생태사상이 드러나기 시작한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겠네요.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
온다 입 모아 휘파람 불며
주머니 가득 설움덩이 쑤셔 넣은 채
빌딩 옆 가로등 뒤에서
가로등 뒤 철문 옆에서
절망은 불현듯
그대 가슴으로 온다 떼를 지어
서너 명씩 무리를 지어
허리춤 가득 눈물덩어리 찔러 넣은 채
눈빛 부드러이 절망은
별안간 그대 심장으로
온다 금빛 내일을 깔고 앉아
간혹 슬픈 낯빛으로 울먹이기도 하면서
전철역 지하광장에서
지하광장 신문판매대에서
절망은 콧노래를 부르며
온다 사람들 눈길을 피해
붐비는 발길을 피해
그대 여린 손목에
은빛 수정을 채우기도 하면서
온다 우쭐우쭐 어깻짓하며
투구를 쓰고 일렬횡대로
절망이여 잠시 너희의 날들이여
그렇구나 오늘은 이미
네가 이 세상 절대권력이로구나.
―「절망은 어깨동무를 하고」전문
김명원--2002년에 상재하신 다섯 번째 시집부터는 시의 색채가 현저히 달라지고 있는데요. 다섯 번째 시집『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는 자연과 인간과 더 나아가 우주가 일체를 이루는 두텁고도 도타운 관계로서의 생태시 지향을 보여주지요. 사실 시집 제목이 얼마나 매혹적인지요. 흔한 말로 섹시하다고나 할까요. (웃음) 그로부터 3년 뒤에 내신 여섯 번 째 시집 『길은 당나귀를 타고』(2005)는 개인적인 삶의 정서적 고통이 깊이 드러나 있는 듯하더군요. 선생님 개인사에 이런 아픔과 외로움이 도사리고 있었구나, 하며 마음을 끄덕인 시집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선생님의 깊은 그림자를 건져 올릴 수 있었기도 했지요. 거의 삼십 여 년 뵈었던 선생님의 이면과 배면을 읽을 수 있었던 새로운 페이지들이었으니까요. 그런 뒤 3년 후에 출간하신 일곱 번 째 시집 『책바위』(2008)에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심리적 피폐함을 고발하고, 그 황폐한 공간을 견인해내려는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최근 ‘부정과 생성의 생명의식’이라고 논평된 2010년의 여덟 번 째 시집『첫눈 아침』은 줄기차게 이끌고 오신 선생님 시의 주제의식이 심화되고 있는데요. 매번 새 시집을 엮으면서 놓치지 않고 추구한 것은 무엇이며, 변화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은봉--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군요. 다섯 번째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에까지 추구된 세계는 민족, 민중, 생태 등의 단어로 요약이 될 수 있어요. 물론 거기에 인간적 품위와 시적 우위 같은 세계가 덧붙여져 있기는 하지요. 이들 세 문제는 근본적으로 근대의 문제이죠. 자본주의적 근대의 핵심문제라는 얘기예요. 민족의 문제, 민중의 문제, 생태의 문제가 모두 자본주의적 근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잖아요. 역사의 한 과정에 보편화된 문제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 문제는 겉에 드러나 있는 몇몇 문제로 쉽게 요약될 수 없는 많은 문제를 갖고 있어요. 그와 관련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왜곡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민족, 민중, 생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아요. 자본주의적 근대에는 대부분 사람들이 비정상적으로 부추겨진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가잖아요. 그래서 제6시집 『길은 당나귀를 타고』와 제7시집 『책바위』는 인간의 왜곡된 마음, 특히 비뚤어진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착란된 마음, 이 마음 중에서도 뒤틀린 감정을 주로 다루고 있지요. 우리가 흔히 멜랑콜리라고 하는 죽음의 감정 말이에요. 이에 대해서는 꽤 자세하게 말한「죽음의 늪을 건너는 법」,「죽음의 정서 밖으로 내는 쬐그만 창」 등의 글들이 있어요. 모두 인터넷에서 검색할 수 있는 글이에요. 이 글들을 참조해 주기 바랄게요.
김명원--선생님께서는 거의 3년에 한 번씩 적당한 시기를 두고 시집을 상재했는데, 슬럼프라고 할까요, 시 창작의 공백기를 거친 적은 없으셨나요? 만약 있었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요?
이은봉--나는 내 마음이나 행동을 억지로 규격화하거나 작위적으로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마음이나 행동에서 특별히 폼을 잡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며 살고 있지요. 시를 쓰려고 특별히 공간을 이동하거나 만든 적도 없고요.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삶과 생각에서 시가 불거져 나오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할까요.
나는 청탁을 받아 시를 쓴 적이 별로 없어요. 행사시는 어쩔 수 없이 주문에 맞춰 써야 할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요. 하지만 잡지사에서 청탁이 오면 대부분 쌓여 있는 재고 중에서 퇴고를 해 보내지요. 물론 시적 기획, 내 나름의 프로그램이 있기는 해요. 몇 개의 시의 광맥을 갖고 있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시를 캐낸다고나 할까요. 그러니 특별한 슬럼프가 있을 리 만무하잖아요. 내가 늘 공부하는 사람, 늘 이런저런 소식을 얻는 사람이 아닙니까. 새로운 깨달음이 없으면 새로운 시가 써지지 않지요. 늘 자잘한 발견 속에 살고 있으니가요.
김명원--선생님과 사석에서 많은 시간을 공유했던 저로서는 선생님께서 동양의 고전들에서 깊은 사유를 얻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좀 전에 말씀하신 대로 1979년 석사과정 시절, 석정 송각헌 선생님을 모시고 동양의 고전들을 읽으셨는데, 『소학』, 『반야심경』 등을 읽으시면서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는지요? 그 공부가 시 창작에는 어떤 형태로 이어졌을까요?
이은봉--동양고전은 불교의 것이든 도교의 것이든 유교의 것이든 지혜의 보고이지요. 이들 책을 읽다 보면 삶의 태도가 고전적으로 변할까요? 글쎄요. 이들 책에서 깨달은 것들을 여기서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어요. 『소학』은 삶의 도리를 밝히는 아주 좋은 내용이 많이 나오지요. 나로서는 『소학』을 통해 특히 음악과 음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어요. 남아 있지 않은 『樂經』의 내용을 이 책 『소학』을 통해 알게 된 셈이에요.『소학』에 『樂經』의 내용이 많이 인용되어 있거든요. 특히 음악과 도량형과의 관계를 배운 것은 큰 소득이지요. 『반야심경』도 제대로 이해하면 엄청난 것들을 깨닫게 되지요. 『노자』나 『장자』는 말할 것도 없고요. 『반야심경』은 대학원에서 강의를 한 적도 있어요. 생각할수록 깊은 내용을 담은 경전이죠.
자동차에서 내려 바라다보는 강물은 자꾸만 힘을 잃고 비틀거렸다 바로 그때 고요가 제비처럼 대각선을 그으며 허공 위로 날아갔다 강물을 가로지르며 늘어서는 대각선, 문득 나는 대각선 위로 내 지루한 운명을 빨아 널고 싶었다 금세 거기 지난 시대의 무수한 역사까지 하얗게 펄럭이고 있었다 강가의 미루나무들도 이제는 고요에 익숙해진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입가에는 어느덧 담배연기가 뽀얀 낯빛으로 달려와 피붙이처럼 서성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다 함께 살려고 하니? 곁에 서서 주춤거리던 고요가 쯧쯧 혀를 차며 내게 물었다 힘을 잃고 비틀거리면서도 쉬지 않고 흘러가는 것이 강물이잖아 덤덤한 내 대답은 미처 말이 되지 못했다 그림자처럼 고요와 더불어 살고 싶기는 했지만 고요가 세상을 만든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금강을 지나며」부분
더는 뜻 세우지 못하리 더는 어리석어지지 못하리 더는 천박해지지 못하리 더는 사랑에 빠지지 못하리
더는 술 취해 길바닥에 나뒹굴지 못 하리 더는 비 맞은 초상집 강아지 노릇 못하리
가을이 오면 호박잎 죄 마르는 거지 늙어빠진 알몸 절로 불거지는 거지 담장 위 누런 호박덩어리 따위 되는 거지
그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 유유히 세상 내려다보는 거지 가난한 마음 더욱 가난해지는 거지.
-「쉰」전문
과거의 파라다이스에 마음이 가다
김명원--선생님 시의 시계에는 두 가지 성향의 시간들이 섞여 있지요. 하나는 농경적인 세계관이 드리운 공동체의 시간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적 규범이 지배하는 해체된 시간입니다. 전자에 대한 면모는 상실에 대한 그리움으로 드러나고, 후자에 대한 태도는 각성이나 성찰을 촉구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인지 선생님 시들은 줄곧 목가적인 서정과 비가적인 현실이 충돌하면서 슬프도록 아름답게 생성되곤 하는데요. ‘막은골 연작시’도 이런 도정에서 빚어진 듯싶고요. 선생님께서 가지고 계신 시적 시간관이 궁금합니다.
이은봉--나는 호모사피언스의 현존과 관련해 미래의 유토피아보다는 과거의 파라다이스에 마음이 더 가는 사람입니다. 시간의식도 다소간은 과거 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미래는 유토피아이기보다 디스토피아이기 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시간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결국 인류는 파국을 맞게 될 거예요. 과도한 기계문명이, 과도한 자연파괴가 끝내는 인류의 파국을 만들겠지요. 이제는 지나친 개발 위주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필요가 있어요. 보세요. 아이폰과 겔럭시폰이 여기서 경쟁을 멈추겠어요. 이것들이 앞으로 무엇으로 변신할지 모르잖아요. 돈이 되기만 하면 인간은 저를 닮은 로봇을 만들고, 은하철도를 만들고……, 그러다가 마침내 파멸하고 말겠지요. 물론 내 이런 생각을 기독교적 불의 심판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미래를 포기할 수는 없어요. 인류의 미래를 포기하면 살아가는 의미를 잃을 테니까요. 우선은 파멸을 늦추는 작업부터 해야겠지요. 인류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얘기예요. 좀 더 구체적으로는 대안적 근대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고요. 과도한 개인중심의 사회에서, 곧 왜곡되고 파괴되고 분열된 도시적 자아중심의 사회에서 과거의 가치를, 마을공동체의 가치를 되살릴 수 있는 사회로 나가야죠. 이는 도시의 개별적 자아들 사이에도 가능한 일이에요. 시내 한복판에 수목원을 두고 있는 대전 같은 도시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내심으로는 내 고향인 세종시가 그런 도시가 되기를 바라고 있고요.
김명원--미래를 기획하거나 계획할 때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할 말씀을 일러 주셨는데요. 선생님께서는 시론집 『화두 또는 호기심』에서 ‘각자’의 의미를 설명한 적이 있으시지요. 이와 관련하여 김수이 평론가는 격월간 문예지 《유심》에 「각자各自 刻字 覺者의 시학」이라는 글로 조명하기도 했고요. 선생님 호이기도 한 ‘각자’의 다의성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지면에서 설명하셨는데요. ‘각자各自’가 강조되는 오늘날의 시대와 관련해서 우리는 어떤 ‘각자’를 염두에 두어야 할는지요?
이은봉--김명원 선생 말대로, 옛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나를 두고 각자 선생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세상과 나를 조롱하려고 대학시절 내가 나를 두고 각자라고 자호(自號)한 적이 있거든요. 아마도 전인순, 이 친구가 각자 자호를 만들자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지금이나 당시나 제 생각의 요점은 간단해요. 자본주의 시대는 개인주의 시대, 각자(各自)의 시대이잖아요. 그러니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자본주의적 근대를 바르게 극복하고 대안적 근대를 옳게 살기 위해서는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려는 마음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오늘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마음의 자세가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려고 하는데 있다는 뜻이에요. 각자(各自)가 각자(覺者)가 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불가에서 말하는 수행의 핵심내용이지요. 이 자본주의적 근대를 제대로 살기 위해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각자가 수행하는 자세를 갖는 일이라는 것이죠. 물론 각자라는 말 속에는 시 쓰기에는 쇠나 돌 위에 글자를 새기는 각자(刻字)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뜻도 들어 있어요.
김명원--오랜 기간 동안 ‘오늘의 좋은 시’를 선별하여 엮는 작업을 해오고 있으신데요. ‘좋은 시’의 선별 기준은 무엇일까요?
이은봉--글쎄요. 이번 질문도 간단하게 대답하기는 참 어렵겠군요. 우선은 내가 충분히 알 수 있는 시, 내게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는 시를 고르지요. 공감이 되는 시를 고른다는 뜻이에요. 시인에게도 이런 기준으로 쓴 시가 좋은 시로 인식되지 않을까요. 저도 모르는 시, 제게도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하는 시가 좋은 시가 되기는 어렵겠지요.
김명원--선생님께서는 1984년 몇몇 시인, 작가 분들과 함께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재구성, 재창립할 때부터 줄곧 한국작가회의에 참여해오셨지요. 명칭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한국작가회의로 개칭이 된 데는 많은 질곡의 세월이 존재할 터인데요. 긴 문단사의 현장에서 실무진으로서 보고 느끼신 소회나 한국작가회의가 나가야 할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신다면요.
이은봉--정말 이 자리에서 다 대답하려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말을 아낄게요. 한국작가회의도 결국은 이 나라 역사의 부침과 함께 할 거예요. 한국작가회의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 많지요. 지금 잘하고 있잖아요. 한국작가회의는 각 조직단위별로 십분 자생력이 있는 문인단체이거든요. 한국의 민주화운동 과정에 한국작가회의 역할은 너무 컸죠. 사람들은 벌써 그걸 다 잊어버렸더군요. 4․13호헌조치를 반대하는 한국작가회의 서명운동이 없었으면 이른바 6월 항쟁은 없었다고 나는 생각해요.
김명원--네, 알겠습니다. 언제나 애정으로 살펴주시는 극진한 마음을 한국작가회의의 회원인 저로서도 잘 감지하고 있답니다. 그저 늘 감사드리는 심정이에요. 음, 선생님께서는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후학을 지도 양성하고 계시지요. 학생들에게 창작 지도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덕목은 무엇인가요? 광주대 문창과는 신춘문예 배출 문인이 많은 학과로도 유명한데요. 특별한 비결이 있을까요?
이은봉--특별한 비결요? 그런 것은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동기예요. 학생들이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있어야 하지요. 좋은 시를 쓰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예요. 시인이 되려고 하는 욕구가 있어야 시인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래서 우선은 동기유발에 주력하는 편이에요. 물론 적어도 시에 관해서는 강의계획서가 단계별로 잘 만들어져 있지요. 시창작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발상과 언어예요.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 그리고 세련되고 정련된 언어가 필요하니까요. 그런데 최근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보면 세련되고 정련된 언어만 있고 기발하고 참신한 발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아쉬워요.
김명원—선생님께서는 《삶의문학》, 《시와사회》, 《문학과비평》, 《문학마을》, 《시와사람》, 《시와상상》, 《시와인식》, 《불교문예》, 《시와시》 등의 편집위원, 편집인, 주간 등을 역임하셨지요. 현재 전국에 시지를 포함하여 문예지들이 어림잡아 300여종이나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이 거의 없이 문인들 위주의 독자가 형성되고 있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문제가 제기되고 있거든요. 제가 학생일 때는 문인이라고는 전혀 없는 저희 집에서 《현대문학》, 《문학사상》, 《사상계》등을 구입해서 읽었는데요,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몇 십 년 사이에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요? 문예지는 많은데 일반인들은 구독하지 않으니까요. 문예지들은 앞으로 어떤 부분을 고려해야 할까요? 잡지를 기획하는데 귀재이신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은봉--김명원 선생이 죽 거론하신 문예지들을 보니 내가 문예지 발간에 정말 많이 참여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가장 최근에는 지난 3년 전에 《시와시》를 창간해 주간 겸 편집인으로 일하기도 했지요. 올해 가을호, 그러니까 2012년 가을호를 끝으로 《시와시》의 주간 겸 편집인 직을 맹문재 시인에게 넘기기로 했지요. 너무 지쳤거든요. 이제는 좀 쉬고 싶어요. 내 글도 더 쓰고, 내 책도 더 만들려고요.
내가 문예지 발간에 처음 참여하게 된 계기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전두환 군부독재의 문화정책에 저항하고 도전하기 위해서였어요. 국민들이 문학의 생산과 향수에 참여하면 할수록 민주화가 빨라지리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국민들의 인식의 수준이 높아질 테니까요. 그런저런 이유로 지난 1980년대에는 이른바 ‘창작주체논쟁’ 같은 것도 있었지요. 당시 나는 현단계의 입장으로 보면 창작주체의 전문성을 좀 더 옹호할 필요가 있다는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지만요.
문예지뿐만 아니라 모든 잡지들이 다 잘 안 팔리지요.《신동아》, 《월간조선》, 《월간중앙》 등의 대중적인 잡지도 잘 안 팔려요. 《여성동아》, 《여성조선》, 《여원》 등의 여성지도 마찬가지이고요. 아마 《사상계》가 복간 된다고 하더라도 잘 안 팔릴 거예요.《창작과비평》은 정기구독 식으로 좀 팔린다고 하는데,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는 사람도 제대로 다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데요.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고요. 들리는 소문이 그래요. 읽을거리가 넘쳐나는 시대이잖아요. 젊은이들은 신문도 스마트폰으로 읽잖아요. 읽기보다는 쓰기를 좋아하는 시대, 웅변보다는 속삭임을 좋아하는 시대이지요. 이제는 각자 모든 삶의 주체잖아요. 이 각자가 문제에요. 그래도 유명한 글은, 좋은 글은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를 통해 시간을 두고 계속 읽혀나가더군요. 이럴 때는 글이 돈이 되지는 않지만요.
퇴임 후엔 고향에 보금자리를
김명원--선생님께서는 지난 5월에「첫눈 아침」으로 제15회 한국가톨릭문학상을 수상하셨지요. 각 교구 가톨릭문인회와 출판사 및 문단 관계자 등을 대상으로 후보작을 공모, 수차례 운영회의와 심사회의를 거쳐 시와 소설 부문을 선정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한국가톨릭문학상 시 부문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김후란 선생님께서는 심사평을 통해, 일상의 모습에 문학적 감성을 불어넣어 인간성 회복과 삶의 훈훈함을 전한 작품이라고 밝히셨고요. 문학상을 이번 말고도 여러 번 받으셨는데, 문학상의 의미를 짚어주시고 수상금을 어디에 쓰셨는지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은봉--한국가톨릭문학상을 받은 것을 나로서는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해요. 일종의 행운이 따른 것이지요. 조계종 총무원에서 운영하는 현대불교문학상이 불교신자에게만 상을 주지 않듯이 한국가톨릭문학상도 가톨릭신자에만 상을 주는 것은 아니에요. 앞으로는 한국가톨릭문학상도 가톨릭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하더군요. 가톨릭정신이 보편적인 인간정신, 곧 보편적인 진실 혹은 진리와 무관하지 않지요. 나는 가톨릭 영세를 받기는 했지만 신앙심이 투철한 가톨릭신자는 아니에요. 지금은 냉담 중이라고 해도 좋고요. 물론 아내는 열심히 성당에 나가는 열렬한 가톨릭신자이지만 말이에요. 아내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과정에 가톨릭 영세를 받았지만 그래도 가톨릭정신에 내가 매우 긍정적인 것은 사실이에요.
어떤 한 종교에 깊이 맹신하기에는 지금 내 생각이 너무 복잡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철학으로서는, 삶의 지혜로서는 나는 불교에 대해서도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데요. 게다가 나는 불교철학과 가톨릭철학, 불교적 세계 이해와 가톨릭적 세계 이해가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불교적 세계 이해와 가톨릭적 세계 이해가 적대적 모순의 관계를 이루고 있지는 않다는 얘기에요. 불교의 경우 말은 종교지만 유일신을 섬기지는 않잖아요. 여호와 하느님이라는 외적 절대자를 갖고 있는 천주교와, 자기 수행을 통해 각자가 해탈을 하고자 하는, 곧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불교가 상호 적대적일 까닭이 없지요.
한국가톨릭문학상 말고도 문학상을 여러 번 받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했지만 밖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상을 받은 것은 얼마 안 돼요. 유심작품상, 한성기문학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정도지요. 으음, 그런데 한성기문학상은 상금이 없잖아요. 따라서 상금을 모두 합산하면 정말 얼마 안 돼요.
한국가톨릭문학상의 심사과정은 전혀 알지 못해요. 심사위원님들께 그냥 고맙게 생각하며 좋은 시로 보답해야지, 하고 생각할 따름이에요. 한국가톨릭문학상 상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느냐고요? 절반은 여러 문인단체에 특별회비를 내는 등 공익을 위해 썼고요, 절반은 사익을 위해 썼어요. 사익을 위해 상금의 절반이나 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지요.
김명원--사실 저도 선생님의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금의 수혜자이지요. 지난 달 선생님께서 대전으로 내려와 《시와인식》 편집진들과 몇몇 시인들에게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해 주셨으니까요. 상금으로 먹는 밥이 얼마나 맛있고 정겨운 것인지 새삼 느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려요. 선생님의 새로운 수상 소식을 적극적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또 상 턱으로 밥을 사주실 거지요? (웃음) 가족 분들은 서울에 계시고 선생님께서는 광주에 계신데, 이런 생활을 하면 어떤 장단점이 있을까요?
이은봉--혼자 있는 시간이 많으니 외로운 시간이 많아요. 고독한 시간이 많지요.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로요. 물론 그만큼 생각할 시간도, 공부할 시간도, 시를 쓸 시간도 많은 셈이고요. 앞의 일이 단점이라면 뒤의 일은 장점이지요. 모든 단점은 장점을 거느리게 마련이니까요. 모든 장점은 단점을 거느리게 마련이고요. 아내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 가족을 소중하게 마음이 생긴 것도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김명원--장성한 두 아드님은 선생님의 시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는지요? 문학을 전공하는 아드님은 없나요?
이은봉--문학을 전공하는 아이는 없어요. 큰애나 작은애나 책 읽기를 좋아하기는 하지요. 큰애가 혹시 국문학자가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적은 있었죠. 큰애는 지금 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작은애는 지금 전방에서 포병으로 근무 중이에요. 일등병으로 군역을 마치고 있는 중이지요. 아이들은 나를 친구처럼 생각해요. 별로 어려워하지 않아요. 아버지를 비교적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하더군요.
김명원--퇴임을 하면 고향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데요. 고향은 비록 세종시에 포함되어 사라졌지만 인근 지역에 보금자리를 마련할 의향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신지요?
이은봉--그럼요. 퇴임을 하면 세종시로 갈 생각이에요. 잘 알다시피 저희 고향이 세종시에 수용되었잖아요. 그러니까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는 거죠. 고향으로 돌아가려면 당연히 보금자리도 마련해야겠지요.
김명원--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가까운 문인 분들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은봉--글쎄요. 이런 얘기도 대답하기 곤란한데……. 여기서 이름이 거론되지 않는 친구들은 섭섭하게 생각할 것 아니에요. 그래도 꼭 말해야 한다면 고향의 친구로는 김백겸, 강신용 등을 가깝게 생각하고요. 전국적으로는 공광규, 김사인, 최두석, 하종오, 고형렬, 도종환, 이시영, 이명수, 윤석산(한양대) 등을 친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해가 있을까봐 남자 문인들만 얘기했어요.
김명원--맞습니다. 선생님! 여성 문인 분들을 언급하셨으면, 지금부터 스캔들 조성되었을 거예요. 거론되지 못한 여성 문인 분들은 칼 물고 선생님의 악몽에서 주연급으로 등장할 테고요. 물론 저부터요…… (웃음)…… 앞으로의 계획을 여쭤 봐도 될까요?
이은봉--앞으로의 계획요? 특별한 계획이 없는데……. 으음, 우선 강의에 충실해야겠지요. 학생지도에 최선을 다해야지요. 내 본분이 광주대학교 문창과 교수이잖아요. 당연히 부지런히 공부도 해야겠죠. 으음, 그리고 내년쯤에는 시집과 평론집 등도 낼 생각이에요. 오늘은 이런 정도에서 얘기를 마치지요. 이런저런 계획을 말해놓고 지키지 못 하면 안 되니까요. 김명원 선생! 지루한 얘기 듣느라고 고생했어요.
이은봉 시인을 만나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대담을 위해 이동한 곳은 공원이었다. 시인의 어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대전 둥지아파트 인근에 있는 정부청사 녹지인데, 잘 가꾸어진 잔디밭에는 모과를 농염히 매단 얼룩무늬 수피의 모과나무들이 즐비했고, 늦여름이 익어가는 풀냄새가 자욱했다. 대담이 어느 정도 정리되던 차, 동석 중이던 박소영 시인이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하자 시인은 지금 이 어스름 무렵이 가장 사진이 잘 나온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녁 6시 무렵이었다. 땅거미가 깔리기 직전의 때, 시인은 바로 이때가 밤과 낮이 뒤섞이며, 감정과 이성, 주관과 객관이 착종되는 몽상이 가능한 아찔한 현기증의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여성들에게 심장발작을 일으킬만한 살인미소로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저녁 어스름으로 다듬어진 고요한 햇빛 아래서 여러 포즈로 서로의 친밀도를 확인했으며, 반드시 사진 속에 웃음소리까지 인화하겠다고 벼른 박소영 시인 덕분에 선생님과 나는 자연스럽고도 즐거운 사진 찍기를 마칠 수 있었다.
모든 일정을 끝내고 나무 벤치에 앉아 내가 준비해간 루왁 커피Kopi Luwak를 마셨던 그 저녁, 누가 우리에게 온 것일까. 부드러운 손길이 어깨에 느껴지고 주변 나무들에서 뿜어지던 환한 기운은! 아마도 좋은 사람들끼리 만나면 그러했으리라. 슬프도록 편하고 다스워지는 충일감으로 우리는 커피 이야기며 아이들 이야기, 학교 이야기 등 이런저런 담소를 앞뒤 구별 없이 나누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도록 행복해했다.
이은봉 시인은 최근 《문학나무》 2012년 여름호에 발표한 시 「저녁 길」에서 “벌써 저녁볕이 사위에 피어오르고 있다 서쪽 하늘은 아직 밝고 환하지만 머잖아 온 세상에 어스름 깔리리라/ 더 이상 머뭇대다가는 어둠이 오기 전 이 산언덕을 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음의 바른 터전을 찾는데 이처럼 많은 시간이 걸리다니!/ 멀찍이 밀쳐 두었던 낮 동안의 슬픔이 우르르 달려와 절뚝이는 발목을 다시 잡는다 별이 뜨고 달이 뜨더라도 밤길은 언제나 낯설고 서툴고 무서울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어둠이 내리기 전, 땅거미가 깔리기 전 서둘러 옛 마을로 돌아가야 한다/ 거기 다수운 마음으로 끌어안아야 할 고향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손잡고 함께 일구어야 할 땅이 있다 함께 뿌려야 할 씨앗이 있다”면서 고향과 고향사람들을 끝끝내 찾아가고 있다.
그는 너무도 빠르게 바뀌고 변하는 것이 지금의 이 시대이며, 이 시대에는 오래 남아 있는 것이 없다고 개탄한다. 고향 막은골도 마찬가지여서 개발로 마을도 없어지고, 마을 사람들도 없어지고, 마을 이야기도 없어졌다고 시 「저녁 길」의 〈시작 노트〉에서 밝히고 있다. 그리고 고향이 없어지면 마음 둘 곳이, 쉴 곳이 없어지게 되므로 대지이고 숲이고 어머니인 고향이 다 사라지기 전에 무언가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와 시인의 삶의 오후가 다 가기 전에 시인은 그 고향 이야기를 차근차근 복원해낼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가 되살려내는 고향의 시들에서 오래 지친 시간을 내려놓고 모처럼 마음껏 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아무 때나 찾아가더라도 잘 왔다고 등 두드려주며 우리에게 막은골 오빠로, 뻬삭부리 형으로, 모듬내 친구로, 잃어버린 이름들의 아우로, 다시 파라다이스를 찾아낸 시 선생님으로 두터운 의분誼分을 남김없이 나누어 주리라. (2012년 《시인광장》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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