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각자의 길 걷다 일본 메이지 대학 졸업 후 조봉암 아래서 농지개혁 추진 솔선해서 농토 나눠주는 등 농민 생활개선 위해 팔 걷어
■ 6·25 직후 북으로 아내와 자식 놔둔채 북한행 월북·납북 여부 안 밝혀져 북 고위직 활동설 '공공연'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출신으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했던 배기철(裵期澈)은 일제강점기 동안 천석꾼의 아들로 보광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벌였고 해방 후에는 조봉암 농림부 장관 아래서 농지개혁의 실무자로 농촌개혁에 앞장서는 등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이런 행동은 한국동란 때 끝났다. 선각자로서 그의 활동이 이처럼 짧았던 것은 한국동란 때 그가 북으로 갔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북한에서 고위직으로 있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지만 남한에서는 잊혀진 인물이 되었다.
|
|
|
▲ 배기철이 북으로 간 후 그 동안 돌보는 이가 없어 많이 훼손되었던 울주군 두서면 서하 마을의 집. 최근 들어 배기철 누나의 손녀인 김혜경씨가 천석꾼 집의 옛 모습을 아직 간직하고 있는 사랑채에서 살고 있다. |
그의 집안이 천석꾼이 된 것은 아버지 배인찬(裵仁燦)때부터다. 아버지는 두서로 오기 전 경주에서 살았는데 이 때 경주에서는 최 부자 다음으로 잘 살았던 부자였다. 배인찬은 두서로 올 때 아버지로부터 많은 재산을 얻어 왔는데 이를 늘려 천석꾼이 되었다.
해방 전후 두서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경주까지, 남으로는 언양까지 있었던 대부분의 논이 이 집안 소유였을 정도로 논이 많았다. 그러나 논은 많았지만 자식은 적어 배인찬은 슬하에 딸 수덕(守德)과 아들 기철을 두었을 뿐이다.
기철은 1913년 두서면 서하리 505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행보 중 궁금한 것이 학력이다. 그가 메이지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초·중등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이에 대한 것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두서초등학교의 전신인 공립보통학교가 두서면에 들어선 것이 그가 태어난지 14년 뒤인 1927년이기 때문에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외지에 나가 공부를 한 것이 된다.
그의 아버지 배인찬은 두서에 머물면서 서울로 가 한 동안 돈암동에서 살았다. 이 때 아버지가 서울로 간 것은 아들 기철을 서울에서 공부를 시키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그는 초·중등 과정을 서울에서 마친 후 일본으로 갔을 가능성이 높다. 이 집은 이후 기철이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 온 후 농림부 농정국장으로 있을 때도 살았던 집이다.
친인척의 얘기를 들어보면 기철은 학교를 다니는 동안 공부를 잘했다. 친인척들은 그가 후일 농림부에 있을 때 농지개혁을 입안했다는 자체가 보통 머리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메이지대학은 전문부 입학은 쉬웠지만 학부는 입학이 까다로웠는데 그가 조선 학생으로 학부에 입학했다는 자체가 명석한 두뇌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졸업 후 행적에는 미스터리가 많다. 우선 그가 언제 귀국했나 하는 것인데 그가 두서 우체국장을 1938년부터 한 것을 보면 25살 때 이미 귀국한 것이 된다. <두서면지>에는 그가 1943년 9월부터 1948년 3월까지 두서우체국장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보광학교 교사로 재임했던 기간도 정확지 않다. 그는 이때 교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보광중학교는 통도사가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통도사 주지를 지냈던 구하스님을 비롯해 스님들 중 독립운동가들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이 학교에서 교사로 있는 동안 항일운동을 했을 가능성은 높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그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쫓겨 두서로 온 후 이 마을에서 멀지 않은 상선필 마을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훈처가 발간한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중 서훈자는 물론이고 미서훈자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없다.
선각자로서 그의 면모가 드러난 것이 1950년 국회 인준을 받아 실시된 농지개혁 때였다. 농지개혁은 농지를 경작하는 자가 농지를 가질 수 있도록 농지소유 제도를 바꾼 것으로,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농촌개혁이었다.
농지개혁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농촌은 일부 대지주들이 농토를 대부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소작인들은 이들의 논을 경작해준 대가로 소작료를 받았는데 소작료가 너무 적어 농민들의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배기철은 농림부 초대 농정국장을 지냈다. 따라서 1948년 8월15일 농림부에 들어가 조봉암이 장관으로 있었던 1949년 2월까지 농정국장으로 농지개혁의 실무를 맡아 일했음이 틀림없다.
그를 고향 사람들이 존경하는 것은 그가 농지개혁의 실무자였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농지를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인데 그 스스로 직접 두서로 와 소작인들에게 논을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당시 소작인들에게 논을 배분해 준 것은 아직까지 각 면에 남아 있는 ‘분배농지 및 상환농지대장’에서 알 수 있다.
그가 북으로 간 것은 국회를 통과한 농지개혁법이 실시된 후 불과 한 달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친인척들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조차 그가 왜 당시 북으로 갔는지에 대해 알 수 없다는 표정이다.
북으로 갈 당시 그는 정부 고위직에 있었고 농지개혁으로 많은 논을 소작인들에게 주었지만 아직 대지주였다. 더욱이 그는 남한에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가족들은 그가 월북한 것이 아니고 납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당시 중앙지를 보면 한국동란이 일어나기 불과 한 달 전까지도 그를 제2대 총선에서 울산 갑구 후보로 언양의 정인섭(鄭寅燮)과 함께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김수선(金壽善)을 물리칠 수 있는 무소속 후보라고 써놓고 있다.
이렇게 보면 그는 북으로 가기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사상문제로 의심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부는 그가 북한으로 가면서 아들을 데리고 갔고 또 북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점을 내세워 월북으로 간주했고 이 때문에 가족들이 지금까지 입었던 피해가 컸다.
배기철이 월북이냐 납북이냐에 대해서는 제5공화국 주역이었던 허화평씨가 최근 발간한 <지도력의 위기>라는 책자에도 언급된다. 허씨는 ‘이승만의 농지개혁’이라는 제목에서 ‘울산 출신으로 농림부 차관을 지냈던 강정택은 물론이고 그 아래서 일했던 농지국의 윤택중, 안창수, 배기철 등 3명이 모두 한국동란 때 월북한 좌익계 인사였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월북 후 그의 행동과 관련 <두서면지> 편집위원으로 일했던 이진섭(李鎭燮·62)씨는 “배기철이 북으로 간 후 한 때 평양시장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두서 마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로 되어 있었지만 가족들이 원치 않아 이 사실을 면지에 쓸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배기철은 북으로 간 후 배기철 대신 배철(裵撤)이란 이름을 썼는데 그가 평양시장으로 활동하는 모습이 여러번 북한 텔레비전에 나왔다고 말한다. 이후 그는 외교부장직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기철은 남한에 있는 동안 두 번 결혼했다. 처음 부인은 엄복희로 아들 준호가 있었다. 두서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아버지와 함께 월북한 준호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79살이 되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머리가 영리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김분남(分南)과 결혼했는데 둘 사이에 한명의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이들이 지금도 남한에서 잘 살고 있다.
분남은 당시로서는 공부를 많이 했던 인텔리 여자로, 남편이 월북한 후 교직에 있으면서 자식들을 잘 키워 내었다.
기철은 북으로 가면서 남한에 있던 재산을 모두 누나 수덕의 남편인 김창준에게 맡기고 갔다고 한다. 따라서 중앙고보를 나와 울산 우정동에서 부자로 살았던 김창준은 두서로 가 배기철 집에서 살다가 타계했다.
배기철이 살았던 집은 두서면 서하 마을에 있다. 집의 형태는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고택이 찬연한 안채와 넓은 마당에서 천석꾼의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 집은 배인창이 두서에 자리를 잡으면서 지었다. 마당에는 수령 100년의 은행나무 2그루가 있는데 이 나무는 배인창이 집을 지을 때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 집에는 현재 김창준의 손녀 김혜경(58)이 살고 있다.
기철이 직접 세우고 우체국장을 지냈다는 두서우체국은 두서초등학교 정문 앞에 있었는데 그가 서울로 간 후 배기동이 운영하다가 지금은 공인중개사 사무실이 되어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