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돈벌러 간 여동생을 구하러 가야 한다. 오늘 밤에 국경을 넘는다. 죽음도 두렵지 않다…"
멕시코시티 솔레닷(Soledad) 공원. 시민들도 무섭고 더러워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는 공원에 들어서자 행색이 초라한 50대 남성이 길을 막고 횡설수설한다. 해가 중천에 걸렸는데도 입에서 술냄새가 풀풀 난다. 잠시 뒤 그는 "10페소만 달라"고 손을 내민다.
늦은 아침식사를 하는 건지, 애인 같아 보이는 청년과 마주앉아 팩 우유를 나눠마시던 한 여성은 "내 남자친구가 돼달라"며 기자의 팔에 막무가내로 매달린다. 옷과 얼굴에 땟국이 잘잘 흐르는 꼬마들도 구경거리를 놓칠새라 우르르 몰려든다.
강순화(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 수녀가 "한국에서 온 사촌동생(?)"이라고 기자를 소개하자 그제서야 '신고식' 소동이 잠잠해진다.
강 수녀는 "솔레닷 공원 사람들의 가난과 불행은 500년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해발 2300m 고원에 위치한 멕시코시티는 고대 아즈테카 문명의 중심지였다. 정복자들은 원래 호수였던 도시 중심부(소깔로 광장 주변)를 메워 스페인풍 건물을 세우고 식민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때 부두와 섬 주변으로 몰려든 원주민들은 값싼 술을 품삯으로 받아가며 제국 건설에 동원됐다. 술과 매춘, 마약과 도둑질로 소란한 시장이 자연스레 형성되자 정복자들은 시장을 섬 동쪽으로 몰아냈다. 그 시장이 바로 우리나라 남대문시장 같은 메르세(Merced)시장이다. 솔레닷 공원 노숙자와 행려자들은 시장 주변을 서성거리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강 수녀는 처음에 집과 음식, 옷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줘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괴로웠다고 한다. 아파서 며칠째 먹지 못하는 아기가 너무 안쓰러워 닭죽을 퍼나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그건 자신의 생각이지 이곳 노숙자들의 희망사항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곳 사람들은 술과 마약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강 수녀는 궁리 끝에 공원에 천막을 치고 커피와 비스킷을 팔았다. 일명 '텐트 카페'다. 한 뼘 공간이라도 좋으니 폭력과 마약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노숙자들, 특히 청소년들과 인간다운 삶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서였다. 커피값은 우리 돈으로 200원쯤 되는 2페소. 공원 주변에서 제일 값싸게 구할 수 있는 마약, 그러니까 화장지에 본드 혼합물을 묻힌 게 2페소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들한테 와서 돈 벌려고 한다는 오해도 받았지만 가격 2페소와 영업시간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2페소는 서로 동등한 입장에서 만난다는 상징적 의미이고, 영업시간은 인간 사회에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2페소를 갖고 커피와 영양가 높은 비스킷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본드를 흡입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달려 있다.
텐트 카페에서 노숙자들 생일파티도 열어줬다. 파티에 초대된 노숙자들은 대부분 "난생 처음 생일 축하를 받아본다"며 엉엉 울었다. 특히 본드흡입과 커피 사이에서 망설이다 천막으로 찾아와 마음을 여는 청소년들이 점점 늘었다.
강 수녀는 "있는 그대로 친구들을 받아들인다"며 "그들과 나눌 것은 많지만 해결해 줄 것은 없다"고 말한다.
"서로 존중하면서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귀를 기울여주는 것뿐이에요. 친구들이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그리고 인간다운 삶에 대해 말합니다. '하느님은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항상 네 곁에 계신다. 하느님께서 네가 어떻게 살아가길 원하는지 생각해 보라'는 정도의 얘기죠."
강 수녀는 2년 전 천막을 걷고 최근까지 그 자리에서 기도모임을 열었다. 기도가 목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갖자는 취지였다. 기도를 하자고 하면 청소년들은 단 1분도 앉아 있지 못하고 몸을 배배 꼰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값진 시간이다.
"처음 공원에 갔을 때 나 역시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찾고 있었어요. 어린 아이들이 두들겨 맞고, 성폭행당하고, 헐값에 팔려가는 현실이 무척 힘들었어요. 길에서 태어난 아기, 부모가 그러했듯 평생 소외와 가난 속에서 살아갈 운명을 안고 태어난 생명을 볼 때는 특히 더 힘들었어요."
강 수녀는 공원 친구들을 몹시 사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빌어 우리에게 오셨고, 가난한 친구들을 통해 수난과 부활을 표현하고 계신다"는 게 사랑의 이유다. 수도회 본래 정신대로라면 그들 삶의 현장인 공원에서 똑같이 먹고 자면서 하느님 사랑을 나눠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성폭행 위험이 있는 데다 도둑질에 가담하지 않으면 무리에 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강 수녀는 7년 동안 공원 친구들과 사귄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구상 중이다.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고, 하느님 사랑을 더 분명히 증거할 수 있는 사업을 찾고 있다.
강 수녀는 공원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작은 성당으로 향했다. 20년 동안 거리의 아이들을 보살피다 1999년 세상을 떠난 스페인계 친차쵸마 신부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거리의 성자'라고 불러도 될만큼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선교사다. '대머리'라는 뜻의 친차쵸마는 거리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news.catholic.or.kr%2Fupload_data%2Fsection%2F20070817192152.jpg)
▲ 500여년전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인디오들을 위로하기 위해 모셔온 솔레다시 성모상 |
성당 제단 십자가 아래에 있는 예수 얼굴 액자가 유난히 시선을 끈다. 친차쵸마 신부가 거리 아이들 모습 속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흰천으로 두눈을 가린 얼굴에는 눈물인듯한 액체가 흘러 내린다. 눈물이 아니라 사람들이 뱉은 침이라고 한다. 친차쵸마 신부는 "거리 아이들은 쇠똥에 묻혀있는 다이아몬드다. 쇠똥만 치워주면 빛날 아이들이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