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 2024. 2. 11
예수 스타일
빌3:17-21
또 한 번의 새해를 맞이합니다.
옆 사람과 축복의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10년 전(2012년), ‘싸이’라는 가수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와 춤을 통해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습니다. 유튜브(YouTube) 공식 채널 조회수가 50억 뷰를 넘었습니다. 지금은 더 많이 조회되었겠지요. 이 당시 한국 가수로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당시에는 세계 사람들이, 강남이 어디에 있는지도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열광적으로 ‘오빤 강남스타일’ 하면서 따라 부르곤 했습니다.
거기에다가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영상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습니다. ‘대구스타일’, ‘홍대스타일’, ‘평양스타일’을 비롯해서, 아줌마 댄스 동아리 회원들이 만든 ‘줌마스타일’, 심지어는 어느 교회 전도사님은 ‘교회스타일’라는 패러디 영상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오래전 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함입니다. 취향이나 성격이 다 다르기에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도 다 다릅니다. 그래서 옷도 아무 옷이나 입지 않습니다. 자기 스타일이 아니면 아무리 비싼 옷이라도 입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자신과 다르더라도 다른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만의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가져야 할 ‘공통적인 스타일’이 있습니다. 그 스타일은 인종이나 국가나 빈부귀천, 남녀노소, 그리고 개인의 개성과 상관없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본받으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우리는 그 ‘공통적인 스타일’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사도 바울의 말씀인데,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언뜻 들으면 바울을 굉장히 교만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그리고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말을 한다면 듣는 사람들은 당장 거부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아무리 초대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바울이라 하더라도,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고 고백하면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던 바울의 태도와는 180도 다르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본’의 의미>
그러나 이 말씀을 좀 더 깊이 되새겨 보면 그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말의 ‘본’에 해당하는 영어는 ‘pattern’입니다.
이 pattern은 양복이나 주물 따위를 만들 때에 사용하던 원형 또는 모델을 말합니다.
옛날 버선 신던 시절에는 집집마다 버선 본이 있었습니다. 그 본에 맞추어 어머님들이 버선을 만들곤 했습니다.
양복도 그냥 눈대중으로 대충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디자인에 따른 pattern을 대고 재단하는 것입니다.
구두나 등산화(송림수제화) 같은 신발을 만들 때도 다 pattern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맞추어서 잘라 신발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번 김민경 집사님께서 다양한 동물 모양(토끼, 너구리 등)의 수세미를 떠서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때 그 모양이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뜨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집사님이 “본이 있어서 그 본을 따라 뜨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바울이 지금 ‘본받으라’고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따르고 있는 pattern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pattern이 무엇인지 고린도전서 11: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그러니까 ‘나를 본받으라’는 말은 나 개인의 인격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으려고 애쓰며 살아가는 모습, 그 삶의 pattern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에, 그의 삶의 목표와 스타일은 180도 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은 듣지 못한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사람들이 받는 핍박을 자신이 당하는 것으로 일체화시켰습니다. 바울을 향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며 그를 책망하셨습니다. 그의 눈을 멀게 하셨고, 아나니아의 안수 기도를 받을 때 눈에 씌운 비늘이 벗겨지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전하며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처럼 죽고, 예수님처럼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것이 그의 평생의 꿈이었습니다. 곡 ‘삶의 패턴’이 바뀐 것입니다. ‘패턴’을 다른 말로 바꾸면 ‘스타일’이 됩니다. 바울이 이 세상을 향하여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예수 스타일’(Jesus style)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 스타일’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삶의 스타일’을 본받기를 원했습니다.
사도행전 26장에 보면 바울이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아그립바 왕도 있었고, 베스도 총독도 있었고, 당시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높은 사람들이 모두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미쳤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26:29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쇠사슬로 채워진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울의 소원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처럼 예수님을 믿고, 그를 닮아 살기를 소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여겨보라>
그런데 바울만 본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을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바울 한 사람만이 ‘본받을만한 대상’은 아닙니다. 너희 가운데에도 본받을만한 사람들이 이미 있고(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을 눈여겨보라는 것입니다. 찾아서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옆 사람을 보시지요. 과연 본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우리 가운데에도 그렇게 예수님의 삶의 pattern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하며 또한 피차 서로 닮아 가기를 축원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라는 pattern을 보여주지는 못하고 엉뚱한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바울은 지금 화를 내면서 말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기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옥중편지). 그들은 한때 십자가의 은혜를 함께 체험했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본 회퍼). 말로는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행동은 변화되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정반대되는 pattern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특징>
바울은 그들의 구체적인 특징들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첫째, ‘그들의 신은 배’라고 말씀했습니다.
즉 ‘배를 신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는 과일이나 바다에 띄운 배가 아니라, 사람이 먹어서 채워야 하는 배를 가리킵니다. 배를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것은, 육신의 정욕을 좇아서, 욕심을 채우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배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여전히 높은 자리에 관심이 있고, 교회 다니면서 여전히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부끄러운 일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도 도대체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오히려 그것을 영광으로 압니다.
동네 깡패들이 돈 빼앗은 것 자랑하듯 자랑합니다. 남을 속여 먹은 것을 자랑하고,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한 것을 자랑합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진압군의 일부 – 부대로 돌아와서는 사람 죽인 것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가장 큰 위기는 부끄러움을 상실하는 데 있습니다. 양심이 병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면 어떻게 회개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부끄러움을 모르고 정욕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셋째, “땅의 일을 생각”합니다.
‘땅의 일’은 ‘하늘의 일’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즉 썩어질 것을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때 가지고 가지 못할 것에 목숨 걸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야단치실 때 하신 말씀도 이러합니다.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주님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지만, 베드로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뜻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사탄’이라는 심한 책망을 들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생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멸망으로 마치는 자들이 여럿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이것을 분노하면서 저주하듯이 말하지 않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말합니다.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의 결국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스타일>
그러면 ‘예수 스타일’로 사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요? 계속해서 바울은 ‘예수 스타일’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20-21절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첫째, ‘예수 스타일’로 사는 성도들은 자신이 속한 소속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아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시민권’이라는 말은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하고 잘 이해할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갖는 것은 커다란 특권이었습니다. 비록 식민지의 땅에 살고 있지만(비록 로마 본 도시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로마 사람들이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로마인들의 특권과 혜택을 그대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즉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자라는 것입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위치, 자리에 맞게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이 땅에서 어디에 살고 있든지, 천국 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의 행동이 천국 시민에 합당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천국 시민권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그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진짜 우리의 소속은 하늘나라입니다. 이와 같은 우리의 진짜 신분을 한순간이라도 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예수 스타일이 아니라 십자가의 원수 스타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매 순간 우리의 삶의 모습이, 우리의 행동이 천국 시민에 걸맞은 ‘예수 스타일’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예수 스타일’로 사는 성도들의 특징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기다립니까?
20절 b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누구를 기다립니까?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의 초점(목표)이 어디에 맞추어져 있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잠언 기자는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잠29:18)고 말씀했습니다. 즉 ‘비전’(소명, 목표)이 없으면 방자히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이 천국에 대한 소망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감 없이 신앙생활 하는 것을 봅니다.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묵시’(비전)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의 일이 아니라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눈앞의 이익을 따라 세상의 패턴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있으십니까? 그날을 ‘묵시’로 삼고 ‘예수 스타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와 같이 ‘예수 스타일’로 행하는 자들의 결국은 어떻습니까?
21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예수 스타일’ 산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늙은 몸을 새롭게 바꾸어주시고, 우리의 병든 육체를 새롭게 바꾸어주시고, 심지어 죽어 썩은 몸도 새롭게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바로 부활의 소망을 가리킵니다.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주를 믿는 자들, 주를 믿다가 죽어 잠자는 자들을 다 일으키셔서, 주님의 부활하신 영광의 몸과 똑같은 형체로 변화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힘들더라도 우리는 ‘예수 스타일’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 밖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있습니다. 신앙생활 오래 했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 차려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본래 의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까 결과적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있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전도의 문을 닫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것은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확실한 그리스도의 패턴이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스타일’이 완전히 몸에 배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예수 스타일’이 시작되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성장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그리스도를 알아 가야’ 하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 신앙공동체가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권면했듯이, 우리도 서로 격려하며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성장해 가면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예수 스타일’이 몸에 배어, 세상의 많은 사람이 저와 여러분을 보고 주께 돌아오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