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문학관 --권 숙이
이곳은 청마유치환 시인의 업적을 기려 2000년 2월14일에 문을 열었습니다.
청마 유치환(柳致環) 시인은 한국 시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시인입니다. 학생 시절 국어 교과목에서 읽혀지기도 했던 그의 시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즐겨 애송하고 있으며, 특히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방대한 양감과 울분, 탄식, 저항, 질타 등의 호방한 시풍이 그의 시를 읽는 사람들에게 여느 시들과는 다른 강렬한 인상을 심어줍니다. 이러한 시풍은 그가 시작을 펼쳤던 통영의 문화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경남 통영은 옛 부터 많은 문인, 화가 등 예술인들의 활동 무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통영의 문화란 당시부터 이어져 내려온 통제영 문화, 정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군 통제영이 있던 이곳의 문화는 한성의 궁중 문화 못지않게 화려했고 그에 대한 자긍심이 대단히 강했으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이라든가 이 고장 사람들의 구국의 의지와 무훈 또한 왕실로 부터나 각 고을로부터도 칭찬의 대상이었고 그러기에 비록 궁중 관료들처럼 관직을 부여받은 자들은 많지 않았어도 통영의 문화는 전라좌수영(전남 여수)과 더불어 한성 못지않은 자부심을 가지고 그 때 이후로 이때껏 당시의 풍류와 호방함을 간직한 채 내려오고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상대학교 사학과 김상환 교수).
유치환 시인의 시 세계에서 보여 지는 강한 어투와 호탕한 성품이 바로 이 통영-"통제영" 문화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청마 유치환 선생은 1908년 이 통제영 문화의 중심지인 통영시 태평동에서 출생하셨으며. 당초 통영시에서는 태평동 생가를 복원코자 했으나 이 일대가 도심 지역인데다가 또한 도시 계획 등의 문제를 고려, 결국 바다가 바라보이는 이곳 정량동 언덕에 생가 터를 복원하고 그 아래에 청마 문학관을 개관하여 통영의 관광 명소, 특히 문학/예술과 관련한 기행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청마 문학관은 도입부와 3개의 주제로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는데, 도입부에서는 청마를 비롯한 통영 출신 유명 예술인들의 예술혼을 접할 수 있고,
첫번째 주제인 "청마의 생애" 코너에서는 청마의 생애를 연도별로 정리, "인간 유치환"에 대해 심도 깊게 접근 할 수 있겠습니다.
두번째 주제인 "청마의 문학"코너에서는 시대별 작품 경향과 대표작 감상을 통하여 청마문학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세번째 주제인 "청마의 발자취" 코너에서는 청마의 각종 유물과 관련 서적의 전시를 통하여 생전의 숨결과 체취를 입체적으로 느끼면서 고결했던 삶과 치열했던 문학 정신을 총체적으로 표명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시청 홈페이지에 실린부분 인용 했습니다. (^_^;;
<문 앞의 강구안 그림> --오셔서 관람하는 입장에서 설명임을 참조하십시요.
그림 위에 희미한 옛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이 사진은 1945년에 결성된 통영문화협회 회원들의 사진입니다.
이 협회의 회장을 맡았던 분이 청마 선생님이셨고, 뒤에 서 계시는 분은 청마와는 무려 열네 살이나 나이 차이가 있었고 회원 중 가장 막내여서 총무를 맡고 있었던 김춘수선생님이십니다. 2004년 10월 30일에 초정 김상옥선생께서 타계하시고 한달 만인 11월29일에 대여 김춘수 선생님께서도 돌아가셨습니다. 대여는 청마와는 일찍부터 인연이 있었는데 청마가 22살로 결혼을 할 때 김춘수 선생님은 7살의 유치원생이었습니다. 그 때 청마의 부인이 되신 권재순 여사가 그 유치원의 보모로 재직 중이었으며 김춘수 선생님은 화동으로 픽업 되어 두 분의 결혼행진에 꽃을 뿌리며 나왔다고 합니다. 옆에 서 계시는 분은 통영이 자랑하는 국제적인 음악가 윤이상선생님입니다. 청마가 말없이 따라 가는 회장이었다면 윤이상 선생은 문화협회의 일을 기획하고 추진해 나갔던 아이디어맨으로 통했다 합니다. 청마 오른쪽 옆에 앉아 계시는 분은 사진 밑의 그림을 그린 전혁림 화백으로 색채추상화의 대가이신데 우리나라 전통5방색(빨강 ,노랑, 파랑, 검정, 흰색)을 가지고 우리 민화를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들이 많으며, 그림의 특징은 원근법을 무시하고 평면적 추상적인 그림의 특징을 가진 것들이 많습니다. 여기에는 안 계시지만 시조시인인 초정 김상옥선생님도 여기 멤버였습니다. 초정은 10월31일 오후 6시 20분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시조문학사에 가람 이병기 선생과 이호우 선생 외 노산과 더불어 대가라 이를 수 있겠습니다.
이분들이 주로 활동하였던 내용을 보면 해방 된 직후라 우리말(한글)강습회와 시민상식강좌 및 연극 ...등 각종 문화활동을 하셨습니다. 이 분들 뿐만 아니라 노벨 문학상까지 거론 되었던 소설가 박경리선생님과 희곡작가 유치진, 미국에서 활동하셨던 재미 소설가 김용익 선생님도 계십니다. 이렇게 걸출한 문화 예술인을 많이 탄생시킨 통영은 문화예술관광 도시로서 인구밀도 당 문화예술인이 가장 많이 배출 된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구안 : 강구안은 통영 심장부의 상징으로 볼 수 있으며 삼도수군 통제영(현 해군사령본부이며 조선시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들을 관장하던 본부였음)의 배들 즉 거북선과 판옥선을 정박시켰던 곳입니다. 세병관 입구 망일루에서 인정(통행금지 :밤 10시경)을 알리는 종을 치게 되면 강구안의 좁은 목에 쇠줄(수책)을 걸어서 배들을 보호하였고, 새벽에(4~5시) 파루(통행금지 해제를 알리는 북을 침)를 치게 되면 쇠줄을 걷고 했습니다. 1963년도에는 박경리 선생의 김약국의 딸들을 남망산과 이곳에서 촬영했습니다. 신성일 ,엄앵란, 황정순이 출연한 김약국의 딸들은 2002년 한국영상 자료원에서 선정한 10대 영화에 선정 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그 기념비는 남망산 조각 공원을 가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10대 영화 :① 김약국의 딸 들, ②이어도 ,③소나기 ,④바보선언, ⑤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⑥고래사냥, ⑦씨받이, ⑧화엄경, ⑨축제, ⑩아름다운 시절)
<청마의 흉상>
흉상 뒤에 있는 내용을 잘 읽어 보시면 청마의 시 쓰는 사상과 태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청마를 아주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청마는 시를 낳기 위해 시를 쓰지는 않는다 하였습니다. 초식동물인 사슴이 초식동물이 되기 위하여 애써 풀을 씹는 게 아니듯이 자연스런 일상의 한 행위로서 시를 썼다 합니다.
또 인간이 없는 곳엔 시도 뭣도 없기에 인간을 먼저 생각하였는데 “만약 인간이 , 그것도 우리민족이 짓밟힐 때는 그 짓밟는 대상이 비록 나의 조국일 지라도 펜 대신 총을 들고 분연히 일어 설 것이라”는 태도로 시를 쓰셨습니다. 청마의 휴머니즘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 되겠습니다. 실제로 청마는 1950년대 인권을 짓밟던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쓴 참여시들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민주투사시인의 선구자로 혹자는 청마와 김지하 시인을 꼽고 있습니다. 청마는 “한 시인이 되기 전에 한 인간이 먼저 되고자 한다.”는 자기성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흉상 뒤의 사진은 신혼 시절 아버지 유약국의 2층에서 잠시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하는데 그 때 찍은 사진으로 생각 됩니다.
<참여시의 대표시>----<눈초리를 찢고 보리라>
내 나기를 인욕의 태반에서 태여났고
내 살기를 오직 굴종의 채찍 밑에 지냈기에
그 치욕을 간(肝)에 새겨
만대(萬代)도록 잊지 않기를 맹세하여
짐승같이 먹이던 나의 부모가 처자가 형제가
오늘 이 자리에 고삐 끌려 왔기로
그 기쁨을 나는 치희(稚戱)하여 작약(雀躍)ㅎ지 않으리라
나의 겨레여 들으라
나라를 찾아 하늘 우럴어 머리 풀고 탄식하던 우리네가
오늘이야말로 뜨거운 손과 손 가슴과 또 가슴으로
말 없이 서로 묵약(默約)하여야 할 우리네가
밖으로 대해선 오히려 장선보다 떳떳ㅎ지 못하고
내 형제끼린 원귀모양 질투하고 모함하고
나라보다는 당파를 앞세우고
도리어 남 나라를 조상같이 위하고 아부함이 없는가.
자당(自黨)의 권세를 거미줄 치기에
민중의 복지를 일컬어 팔고
그릇된 주장을 부회하기에
어진 백성을 우롱함이 없는가.
아아 진실로 백사(百思)하여 그러함이 없는가.
나는 보리라
지낸 굴욕의 죄과를 다시 범하지 않기로
눈초리를 찢고 나의 똥창까지 드려다 보리라
아아 그러나 사색(四色)의 그 금수와도 못한 할퀴고 뜯음이
나의 민족의 다시 씻을 수 없는 악혈의 근성이라면
그는 천형(天刑)이어늘 어찌 뉘를 원망하료
아아 나의 겨레여 우리는 마땅히 망멸(亡滅)할 진저
--------------------------------------------------------
이시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의 세태에 비추어 오늘을 예고하여 쓴 듯한 느낌까지 듭니다.
아니, 그 시절의 현실을 고발하여 쓴 시인데
과거에 비추어 현재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겠습니다.
역사 인식의 발전이 없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민족끼리 이웃끼리 파를 따지고 당을 따지고
사분오열 하는 모습들을 보이며 살아가다 보면 닥쳐올
우리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 뼈아픈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 비수를 겨눈다면
종내 그 비수는 비수를 겨누었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서
결국 그에게도 상처를 내고 마는 게 이 세상 이치입니다.
이웃 간에 서로 간에
좋은 말을 많이 해 주면 그 좋은 말은 좋은 기운으로
말 한 사람에게로 되돌아갑니다.
칭찬을 되도록이면 많이 해 주세요.
아름다운 사회의 밑거름이 됩니다.
<행복 詩 >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느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봇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껓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망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네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는 1953년 9월에 썼던 시며
1954년에 발간한 청마시집에 실려 있는 시입니다.
지금 통영의 중앙동 우체국은 청마가 1946년부터 1952년까지 이영도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던 우체국으로 '청마우체국'으로 개명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중앙동 우체국'과 '이문당 서점'자리와(옛 양과자점) 시성집중 옷가게(옛 박애당 약국 자리)가 청마와 정운 이영도 선생의 스토리가 얽힌 자리로 청마의 기억을 더듬어 오는 사람들은 매우 가 보고 싶어 하는 곳입니다.
우체국 골목길 (청마거리 200m) 충무교회 안에 있는 문화유치원은 청마의 부인 권재순 여사께서 해방 후 약 5년간 운영했던 유치원이기도 하며 청마의 사택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우체국'과 '이문당 서점'과 '시선집중'의 트라이앵글 구역을 둘러 보시고 청마문학관을 오시면 감개가 무량 할 것입니다.
청마는 여성들 특히 문학을 지망하는 여성들이 편지를 보내오면 일일이 답장을 다 해 줄만큼 친절하고 자상했다고 합니다.
혹자들은 청마의 이러한 행위를 두고 여성편력으로 얘기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청마는 부인이외의 여인과 사이에서 얻은 아들도 있었던 것으로 ‘일향이의 생모 이란’에 대한 언급이 자작시 해설서 ‘구름에 그린다‘에도 나와 있습니다. 청마도 “사실 나는 교직자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고 하며 자신의 애정행위에 대해서 자책하는 말을 했습니다만, 그 부분을 어떤 시인은 “청마의 이와 같은 여성 편력은 세속적인 사랑에서라기보다는 존재의 영원성에 대한 생의 갈망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그의 시작(詩作)에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정운과는 특별히 긴 시간동안 편지를 주고받는 우정에 가까운 러브스토리로 아주 유명합니다. 정운 이영도 선생님은 이호우 시조시인의 여동생이며 여류 시조시인이자 수필가였던 분입니다. 청마와 정운은 통영여중(당시 5년제. 현 통영문화원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으며 약 20년간 50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게 됩니다.
청마는 특히 열애를 거쳐서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는데 그런 면에서 청마는 정운에게서 영혼의 구원을 얻으려 한 게 아니었나 생각 되어집니다. 그것은 청마의 내면 사색을 끌어내 표현함(창작)으로 얻는 문학적 동반자를 통한 자기승화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청마가 돌아가시고 정운은 청마로부터 받은 편지 중에서 200여 통을 간추려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으로 묶어 내게 됩니다. 그 책은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50년까지 주고받은 편지는 시국과 사상에 관한 것들이 많아서 6.25가 일어 나면서 청마의 안전을 우려하여 불에 태워 버렸으며 그 때 태워진 분량이 사과 상자(예전에는 꽤 컸습니다)로 3상자였다 하며 책으로 나온 부분은 50년 이후에 받은 편지 중에서 선정했다고 합니다.
청마가 이영도 여사를 어떤 마음으로 대했나를 볼 수 있는 시가 있습니다.
<오동꽃(梧桐꽃)>
조찰히 맑은 아침
먼 천상에 선 듯
소리없이 땅에 지누나.
오직 높으고 으젓하기에
당신 같은 꽃.
하늘만한 애모의 애달픔에도
끝내 도이(桃李)처럼
스스로 낮추지는 않았거니.
목숨이란 본시
한낱 죄욕일진대
입어야 하던 청춘도
이제사 남길 회한(悔恨) 하나 없이
회한과 함께 하나 둘
부끄러운 의상인양
발 아래 던져 벗는 당신이야
끝내 닿을 수 없는 사랑이매
오동꽃 소리없이 지는 아침은
심심산골 앓이는
간장속 저물은 뻐꾸기 울음소리---------
위 오동꽃은 1957년 12월에 펴낸 제9시집에 실린 시입니다.
청마(유치환)와 정운(정향, 이영도)의 러브 스토리는 앞에 행복에서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문학관을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간혹 청마와 정운이 정말로
정신적인 플라토닉 러브만 하고 말았을까?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만난 지 초장에 어떤 사단이 나지 않았다면 그 사랑은
끝내 평행선으로 밖에 갈 수 없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이 시가 나온 때는 만난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난 때로서 청마는 사랑하는 이 옆에서
끝내 닿을 수 없는 사랑으로 구슬픈 뻐꾸기 울음 같은 속앓이를 간장 속 깊이
삭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마는 정운에게 도이처럼 스스로 낮춰서 자신에게로 다가오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오동꽃처럼 늘 의젓하고 높이 고고하게 있어 주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상반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론 손닿을 수 있는 사랑이길 간절히 바랐을 건데도 스스로 거리를 두고서
닿을 수 없는 애모의 애달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정운의 편지를 보면 두 분의 사귐이 어떠한 형편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단서가 되는 편지가 있습니다.
1967년 3월11일자 이영도여사의 편지 글입니다. 대구의 <죽순문학>의 주간으로 있던 석우 이윤수 선생께 보낸 편지 전문입니다.
석우 선생님.
글월 받고 저는 한없이 울었습니다. 우정이란, 참우정이란 얼마나 인생에 필요하고 귀한것임을 절감하면서....
면답을 쓸 수 없었습니다. 쓰지 않아도 알아주시는 선생님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20년의 열애를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열애를 행위하지 못하고 오직 희구로써 목마른 세월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애정을 신앙에까지 승화시켜보지 못한 사람은 지금의 저의 심정을 어찌 알아주겠습니까?
석우 선생님의 오랜 우정만이 짐작해 주셨음을 믿을 때, 저는 참았던 통곡을 혼자 터뜨렸던 것입니다.
저는 줄곧 병상입니다. 영결식장에서 얻은 감기가 달포째 이대로입니다. 원래 봄이면 앓는 체질이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애산(愛散)은 아랑곳 없이 세월은 물같이 흐르는 것, 말일로 청마가 간지 한 달! 돋는 움, 트는 싹! 어느 하나 그 분과 무관한 것이 없고, 어느 사물 어느 자연에 그 분의 체취가 묻어 있지 않은 것이 없어, 차라리 모든 것을 '보지 않는 죽음'으로 두는 것이 좋을 것 아닌가도 싶어집니다.
선생님! 청마의 애정에 질질 끌리는 먼 먼 세월 속에 제가 얼마나 청마를 사랑하고 있었음을 그가 가버린 오늘에야 깨달을 수 있구먼요.
이럴 줄 알았던들 좀더 흐믓하게 애정할 수 있었을텐데....오직 남은 세월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가 제게 남은 형벌 같습니다.
석우 선생님! 오래 사세요. 어느 하늘 아래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서로 든든할 것입니다.
4월 초에 어머님도 뵈올겸 대구에 가겠습니다. 갈 때 저의 수필집(재판된것) 20부쯤 가져다 드리겠사오니 혹 친분있는 교사라도 계시거든 학생들께 팔아서 고기 한 근이라도 반찬에 보탤 수 있게 하세요. 우리 서로 가난함 속에 적은 것이라도 정으로 나누고 싶을 뿐입니다.
4월 1일에 오빠댁 전화 2-0097로 연락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 때쯤 대구에 갈 것 같습니다.
그럼 뵈올 때까지 부디 안녕히 계세요. 부인께도 문안드려 주시고.
-----------------1967년 3월 11일 정운 드림---------------
<무 제> -----이 영 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울여 기다리며
바라기도 하리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루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리라.
요즘의 젊은이들 중에 누가 이런 사랑을 감히 해 보겠다고 하겠습니까?
청마는 정운과의 사랑에서는 일반 범인들이 하기 어려운 사랑을 하셨다고 생각 됩니다.
<청마의 고향 통영>
통영이라는 지명은 삼도수군 즉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수군을 총괄하던 관청,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이 되겠습니다. 지금의 해군사령본부가 되겠습니다.
초대통제영은 한산도 제승당이었습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중심건물로 1604년도에 6대 통제사께서 세우게 된 건물입니다. 이후로 통제사들이 바뀌어 부임하면서 삼도수군 통제영은 군사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되었으며 1895년 폐영 될 때까지 290여년간 존립했었습니다. 지금 통제영 복원공사가 한창인데 복원이 다 되면 대표적인 군영유적지가 될 것입니다. 1908년부터 세병관 건물은 초등학교 건물로 쓰였으며 청마는 1918년에 세병관 보통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19년 청마가 2학년이 되던 해 삼월에 전국적으로 기미 독립 만세가 일어납니다. 통영에서도 3월에 만세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11살의 청마도 만세 부르는 어른들의 뒤를 따라 다녔다고 합니다. 거기서 청마는 평생의 반려자가 된 권재순 여사를 만나게 되는데 일본 유학을 가서(15세) 본격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 만난 지 10년 만에 결혼에 이르게 됩니다. 청마는 젊은 시인들로부터 시인이 된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면 스스럼없이 “아마 연애일 것이다”라고 하셨다는데 편지쓰기가 시 쓰기의 기초적 문학수업이 되었다는 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청마의 ‘소년의 날’이라는 시를 여기서 소개 해 드리겠습니다.
<소년의 날>
내 소년의 날은
일삼아 하모니카 불며 불며
풋보리 기름진 밭이랑
배추꽃 피어 널린 두던을 노닐어
햇살처럼 행복하고 달콤한 연정에 일찍 눈 떠
민들레 따서 가슴에 꽂고
꽃처럼 우울 할 줄 배웠노라.
그렇게 사랑하여 결혼한 부인임에도 ‘영혼에 대한 목마름 같은 갈증’으로 여성편력(?)을 하였지만 일생 아내에 대한 애정 또한 변함이 없었다 합니다.
<병 처(病 妻)>
아픈가 물으면 가늘게 미소하고
아프면 가만히 눈 감는 아내----
한 떨기 들꽃이 피었다 시들고 지고
한 사람이 살고 병 들고 또한 죽어 가다.
이 앞에서는 전 우주를 다 하여도 더욱 무력한가.
내 드디어 그대 앓음을 나누지 못하거니.
가만히 눈 감고 아내여.
이 덧없이 무상한
골육에 엉기인 유정(有情)의 거미줄을 관념(觀念)하며
요요(遙寥)한 태허(太虛)가운데
오직 고독한 홀몸을 응시하고
보지 못할 천상의 아득한 성망(星芒)을 지키며
소조(簫條)히 지저(地低)를 구우는 무색 음풍을 듣는가.
하여 애련의 여윈 손을 내밀어
인연의 어린 새새끼들을 애석하는가.
아아 그대는 일찍이
나의 청춘을 정열한 한 떨기 아담한 꽃
나의 가난한 인생에
다만 한 포기 쉬일 애증(愛憎)의 푸른 나무러니
아아 가을이런가.
추풍은 소조히 그대 위를 스쳐 부는가.
그대 만약 죽으면----
이 생각만으로 가슴은 슬픔에 즘생 같다.
그러나 이는 오직 철없는 애정의 짜증이러니
진실로 엄숙한 사실 앞에는
그대는 바람같이 사라지고
내 또한 바람처럼 외로이 남으리니
아아 이 지극히 가까웁고도 머언 자여.
<일본유학과 연희전문>
1922년 청마는 세병관 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의 부잔중학교로 유학을 가셨으나 부친의 사업실패로 1926년 도중에 귀국하여 부산 동래고보에 5학년 편입을 하셔서 다음 해에 졸업을 하십니다. 일본 유학중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죽창으로 찔러 학살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합니다.
<청마의 작품 활동>
일제 때의 이층 목조건물 사진입니다. 이 건물은 청마의 부인이신 권재순 여사께서 1945년부터 1950년까지 운영하셨던 문화유치원 건물로 이층은 청마가 서재로 쓰며 시 창작을 했던 곳입니다.
서재는 책상대용으로 쓰는 작은 상 하나와 사전 한권만 뎅그러니 있었을 뿐 우리들이 상상하는 책이 꽉 들어 찬 그런 서재가 아니었다 합니다. 당호는 영산장, 청령장(고추잠자리), 낙목산방으로도 불렀다 합니다.
<만주로 간 청마>
청마는 1940년에 만주로 가셔서 1945년 6월에 귀국을 하시게 되는데 만주로 가실 당시에 주변에 아니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많아서 늘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나키스트는 정부의 존재를 부인하고 개인의 자유를 무제한 추구하는 사상을 가진 자들입니다. 일본으로서는 항일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이러한 아나키스트들도 주요 감시 대상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초기작품은 그 때 일본경찰에 빼앗기기도 했다 하는데 만주에서는 형님인 동랑 유치진 선생님의 처갓집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농장과 정미소의 관리를 하셨다 합니다.
<교장선생님>
학교교직에 몸담으셔서 특히 교장을 많이 지내시며 제자들을 양성하셨는데 아직까지도 청마 교장을 회상하며 찾아오는 제자들이 많습니다. 그만큼 청마는 인기 있고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청마는 다른 학교로 옮겨 가실 적마다 학생들이 가시지 말라고 데모를 많이 했다 합니다. (경남여고 부임사중 잊을 수 없는 대목을 들려주고 가신 분도 있음.)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부산의 남여상교장으로 재직하고 계셨는데 돌아가신 날은 부산문인협회의 회의가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셨다가( 1967년 2월13일) 저녁 9시 30분경 시내버스에 부딪혀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청마의 나이 만 59세였습니다.
<청마시의 문학사적 위치>
청마는 잘 알려진대로 생명파 시인입니다.
청마의 시는 ‘방법론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로 판넬에 씌여져 있습니다. 이것을 보며 느낀 건 시를 읽는 독자들은 방법론을 따져서 읽거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맘에 다가와 공감을 주는 걸 더 좋아하여 애송한다는 걸 알 수가 있겠습니다.
미당 서정주 선생께선 생명에 대한 의지 허무에 대한 의지등의 시를 썼다 하여 의지적 시인이라 하였으며 ,김춘수선생님께서는 청마의 시를 두고 센티멘탈리즘적인 서정시라 하셨습니다. 최근에는 “예술적인 면의 시는 아니지만 철학적인 시다”라고 하신 말씀은 그만큼 깊은 사유를 거쳐서 풀어내는 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청마 본인도 “나의 시는 시가 아니다”라고 하셨고 “나의 시는 시가 아니어도 좋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인간과 생명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사유하여 피같이 토해낸 것이므로 굳이 시가 못 되어도 좋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청마문학회 문덕수선생님께서 청마와 미당을 비교한 부분이 있는데 “시에 있어서 미당이 명장이라면 청마는 거장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명장과 거장의 차이점을 잘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 50년대에는 이승만 독재 정권에 강하게 항거하는 참여시도 많이 쓰셨으며 그로하여 경주고등학교 교장직을 타의에 의하여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그 뒤 정권이 바뀌었을 때 제자가 바뀐 정권에서 선생님을 대우 해 줄 거라는 말에 "지식인의 만년 야당설'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러 저러한 여러 면으로 비춰 볼 때 청마는 '전인적 시인(창신대 이상옥 교수설)'으로 소개 함이 바를 듯 합니다.
설명은 벽에 걸린 패널 위주로 청마의 생애와 에피소드를 정리하여 올린겁니다.
문학관 전면 오른쪽 돌계단을 올라 가시면 고증을 거쳐 이전 복원한 청마의 생가가 있습니다. 청마 출생시 아버지가 한의원을 하고 계셨던 터라 약국집 형태와 시옷자 형 구조로 복원했습니다. 청마가 대구 약령시장을 둘러보고 읊은 시에는 돌띠를 두르고 놀고 있는 자신의 옆에서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시며 약령시장을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2004년 12월 25일 2차 수정> 권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