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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시: 2012년 3월 23일~25일
☞ 인 원: 개포동 친목회원들과 함께
☞ 소재지: 경남 삼천포(사천), 남해, 하동 / 전남 구례
서울 개포동에서 30여년간을 같이 살아온 친목회에서 5년전부터 모임을 하면서
매달 5만원씩 별도로 적립하여 서유럽 10박 11일을 여행하기로 하였으나 회원들의
스케줄이 맞질 않아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회비 일부를 사용하여 우선 콧구멍에 바람을
쒤겸하여 우선 남도여행을 하기로 하고 남해를 무작정 향하였다.(내가 10일씩 사무실을 비울수 없어서...) 목적지도 없고 숙박도 정하지 않은 채 차량 2대를 나눠타고 가다가 좋은데 있으면 들리고
시간 늦으면 숙소를 정해서 자는 철저한 자유여행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출발하는 금요일에는 서을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바람도 세차 꽤나 추운 날씨다.
아침 08시에 개포동에서 출발하여 경부고속도로 안성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는다.
그런데 모임에 여인들이 집에서 음식을 얼마나 많이 싸왔는지 휴게소 정자에서 버너로
국을 끓여 아침부터 진수성찬으로 식사를 하고 남쪽으로 향하는데 빗줄기는 굵어진다.
다음 휴게소는 대진고속도로 덕유산 휴게소에서 쉬기로 하였는데 운전은 나하고 나이드신 분
2명이 하였는데 아! 글씨 이 분이 나를 추월하더니만 대전을 지나 우측 통영쪽을 빠지질 않고 대구쪽
경부고속도로로 가버린 것이다. 덕유산 휴게소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않아 전화를 했더니만
추풍령 휴게소에서 기다리고 있는게 아닌가. 그 분들이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2시간이 날아간다.
참고로 우리 친목회는 개포동 구의원, 예비군 중대장, 부녀회장, 동대표, 통장 출신 등으로 모두
나이가 6학년(60)이 지났고 유일한 5학년인 내가 가장 영게(?)이다. 여인 일곱에 남자 셋으로 이 분들이
나한테 개포동에서 영업을 하는데 상당히 도움을 많이준 늘 고마운 분들이다.
그 분들이 다시 덕유산 휴게소로 돌아와 만난 시간이 오후 1시 반이 넘어 버렸다.
또다시 이 휴게소 정자에서 가져온 음식으로 진수성찬을 벌인다.
3년을 넘게 매주 베낭을 메고 산에만 다닌 범여는 어쩜 여행이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오늘은 아무래도 여행은 틀린것 같고 숙소부터 정하고 해야 할것 같아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해 여기저기를 알아보니 통영과 거제쪽은 마땅한 숙소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남해쪽을 알아보니 산림청에서 운영하는 휴양림에 숙소를 하나 구할 수 있어서
통영을 포기하고 목적지를 남해로 돌려 진주I.C를 빠져나와 삼천포 어시장에 들린다.
1일차(3월 23일)
삼천포항 [三千浦港]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항구로 1958년 대(對)일본 선어수출항으로 지정되었고, 1966년 4월에 무역항이 되었다.
1990년 현재 주요항만시설은 안벽 1,072m, 물량장 1,597m, 방파제 588m와 잔교(棧橋) 1기가 있으며,
접안능력은 6척이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바라보며 평지가 띠처럼 펼쳐진 포구의 자연조건과 경상남도
서부지방의 관문으로서 외견상 임해공업의 수출항으로 발전할 좋은 여건을 가졌다. 그러나 수심이 얕고 항역이 좁으며 바위가 많아 국제항으로 개발하기가 어려워 사천에 대규모 공업단지가 들어서는 데
장애 요소가 되고 있다. 입출항 선박은 연안선이 대부분이며, 정기 여객수송 노선은 사천-부산, 사천-여수, 사천-읍덕으로 연결되는 3개 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입항 화물량의 90% 이상이 유연탄이고,
출항 화물은 대부분이 고령토이다. 일반 해면어업으로는 쥐치와 멸치류가 주로 어획된다.
대진고소도로에서 남해고속도로로 들어섰다가 사천I.C를 빠져나와 삼천포로 빠진다.
자꾸만 빗줄기는 굵어진다. 삼천포 어시장에서 도다리,전복, 멍게, 해삼, 등등 사서
잔뜩 차에다 실고 새로 생긴 삼천포와 남해를 잇는 창선대교를 건너서 남해로 접어든다.
꼬불꼬불한 해안도로를 지나니 이곳은 확실한 봄이오는 느낌이다.
30분정도 지나 경남 남해군 삼동면에 위해한 ‘남해 편백나무 휴양림’에 도착하여 여장을 푼다.
삼천포 어시장에서 도다리를 사다.
제주도 근처에서 겨울 산란기를 지낸 도다리가 매년 3월쯤이면 경남 사천 삼천포 앞 바다로 올라온다.
‘봄 도다리, 여름 민어, 가을 전어, 겨울 광어’라는 말이 있듯, 봄에는 도다리가 제일 맛이 좋다.
사천의 항구 중에서 도다리를 만나기 쉬운 곳이 삼천포항이다. 구항과 신항으로 이뤄져 있는데,
구항으로 행선지를 잡아야 도다리는 물론 항구 주변에 펼쳐진 어시장도 구경할 수 있다.
삼천포어시장에는 상점, 좌판 할 것 없이 도다리가 주인공이다. 도다리는 뼈째 썰어내는 세꼬시로 먹기도 한다.
제철의 가격은 1kg에 3만5천~4만원선. 구입할 때는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15~20cm 내외)가 좋다.
산란기를 끝낸 도다리는 살이 꽉 차서 찰지고 쫄깃하다.
도다리는 광어와 비슷해서 자칫 혼동하기 쉽다. 구별법은 ‘좌광우도’라는 말처럼 도다리는 눈이 오른쪽에 몰려 있다. 또 광어가 입이 크고 이빨이 있는 데 반해, 도다리는 입이 작고 이빨이 없다.
또 봄의 향기를 만끽하는 도다리 쑥국은 전라도의 홍어 애탕에 비견되는 경상남도의 대표적 봄철 음식이다.
남해편백자연 휴양림
산림청 국립 휴양림 관리소가 선정하는 3월의 휴양림으로 선정되었다는 T.V보도를 접하고 이곳에서 숙소를 정했다. 이곳은 여의도 면적의 1.5배되는 넓이에 100만그루의 편백이 있어 휴양장소로는 참 좋은 곳이다.1998년에 개장하였으며 구역면적은 227만㎡, 1일 수용인원은 305명이다. 함양국유림관리소에서 관리한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북쪽 해발 681m의 금산 동쪽 자락에 있으며, 남해 바다의 아름다운 경관과 함께 울창한 편백이 절경을 이룬다. 편백에서 심폐기능 강화와 항균, 이뇨, 거담효과가 뛰어난 피톤치드가 많이 나오므로 삼림욕에 매우 좋은 휴양림이다. 임도를 따라 산행하면 왕복6.4km 등산도 할 수 있고 , 정상의 전망대에서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크고 작은 섬들과 금산 38경의 장관을 내려다볼 수 있다.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야영장, 숲탐방로, 물놀이장, 어린이놀이터, 숲속 강의실, 일출전망대, 산책로, 등산로,잔디마당, 체력단련시설 등이 있다. 휴양림 바로 밑에 낚시가 가능한 내산저수지가 있고, 갈곡저수지, 노루목과 양화금 바다에서도 낚시를 즐길 수 있다. 그 밖에 보리암, 남해대교, 충렬사, 용문사, 송정해수욕장, 상주해수욕장, 망운산, 호구산, 김만중의 유허노도 등의 관광지가 있다.
2일차(3월 24일)
어젯밤 밤12시가 넘도록 매달 만나는 사람들이 뭔 넘의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리고 술을 너무 많이 먹었는데도 아침 6시가 안되어 잠에서 깨어난다.
등산화로 갈아신고 숙소에서 3.2km 떨어진 전망대까지 걸어가는데 편안한 임도라
35분정도가 소요된다. 숲속에서 나오는 맑은 공기탓인지 머리가 상쾌하다.
이곳은 남해의 진산인 금산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림청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참으로 깔끔하고 관리가 잘되어 있는 편이다.
휴양림 전망대
이곳 전망대(開麗亭)에 오르니 바다가 보이고 금산을 등산로도 있다. 정맥길 타면서 낯이 익은
시그널도 보인다. 반갑기 그지없다. 저 아래 유명한 남해 미조해수욕장도 보인다
정맥, 기맥길을 타면서 만난 시그널
1시간의 워킹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침 식사를 마친 다음에
무작정 목적지도 없이 휴양림을 나선다.
휴양림 입구로 나오니 ‘나비생태관’이 나타난다. 구경을 하기 위해 관람관을 가니
10시에 문을 여는 모양인지 문은 굳게 잠겨있어 기다릴 수 없어 다시 길을 나선다.
날씨는 맑으나 바람이 너무 세게 불고 춥다. 잠시 후에 독일마을과 예술촌에 도착한다.
남해 독일마을
1960~70년대에 국가정책으로 독일로 간 광부들과 간호사분들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고국으로 귀국하여 정착한 곳이 이곳 독일마을이라고 한다.
통일된 건축모양과 인테리어및 이름까지도 독일풍으로 마을을 조성해놨다
이곳이 유명세를 타면서 지금은 독일에서 귀국하신 분들의 몇배에 이르는 펜션과 카페들이
주변에 조성되어 있다. 고즈늑한 분위기는 없고 상업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독일마을 아래에 있는 물건방조 어부림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南海 勿巾里 防潮魚付林)
[천연기념물 150호]
분 류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생활
수량/면적 25,091㎡(지정구역)
지정(등록)일 1962.12.03
소 재 지 경남 남해군 삼동면 물건리 산12-1
시 대
소유자(소유단체) 남해군
관리자(관리단체) 경남 남해군
물건리 방조어부림은 해안을 따라 펼쳐진
길이 약 1,500m, 폭 30m의 숲으로
약 3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심어놓은 것이다.
물건방조어부림을 이루고 있는 식물들로는 높이 10∼15m인 팽나무·
푸조나무·참느릅나무·말채나무·상수리나무·느티나무·이팝나무·
무환자나무 등의 낙엽활엽수와 상록수인 후박나무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 밖에 소태나무·때죽나무·가마귀베개·구지뽕나무·모감주나무·
생강나무·검양옻나무·초피나무·윤노리나무·갈매나무·쥐똥나무·
붉나무·누리장나무·보리수나무·예덕나무·병꽃나무·두릅나무·
화살나무 등의 낙엽활엽수와 청미래덩굴·배풍등·청가시덩굴·
댕댕이덩굴·멀꿀·복분자딸기·계요등·노박덩굴·개머루·송악·
마삭줄 등의 덩굴식물류가 자라고 있다.
물건방조어부림은 강한 바닷바람과 해일 등을 막아
농작물과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숲이며,
물고기가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만들어 물고기 떼를 유인하는 어부림의
구실도 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이 숲이 파괴되면 동네가 피해를 입는
사실을 알고 숲의 보호에 힘쓰고 있다.
이와같이 이 숲은 우리 선조들이 자연을 이용한 지혜를 알 수 있는
자료로서 문화적 가치가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어부림 앞에 있는 동백나무
보리암가는 해안도로 전망대에서
저 멀리 우측에 보이는 섬이 통영시에 속에 있는 사량도이다.
사량도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뱀이 기어가는 형상이라 해서 뱀 사(蛇)자를 써서
사량도로 하는데 통영에서 뱃길로 20km정도 떨어져 있다. 3개의 유인도와
8개의 무인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섬에 뱀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보리암과 금산 가는 길
보리암 올라가는 버스를 타려는데 친구한테 문자와 전화가 동시에 울린다.
사랑하는 친구가 운명을 하였단다. 이 무슨 변고란 말인가?
나이는 나와 같지만 학교는 1년 선배였는데 지난해 스트레스로 인하여 머리가
하도 아파 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마 수술이 잘못됐는지 거의 식물인간으로 살다시피
했는데... 한창 일할 오십일곱의 나이에 운명을 하였다니... 남의일 같지가 않다.
꼭 가봐야 하는데 지금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면 이 조직을 움직일 수도 없고...
미안하오... 부디 저승에서는 머리아프게 살지마오... 삼가 冥福을 빕니다.
보리암 가는 길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태조 이성계가 이 곳에서 백일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 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 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보리암 제석암과 관음암
보리암 해수관음상에서 바라본 남해 상주해수욕장
상사바위
한 과부가 자신을 짝사랑하는 총각의 마음을 알고 바로 저 바위 위에서 회포를 풀었다고 하는데
속세를 떠난 듯한 주변 풍경 때문인지 저리 훤하게 트인 곳에서 회포를 풀었다는데도
전혀 속되게 여겨지지 않는다.
관음상은 40년 전에 세운 것입니다만, 관음상 아니라도
저 뒤로 펼쳐진 제석-일월-화엄-대장, 네 봉우리 자체가 불상이고 보살상이다.
불교에서 관음보살은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는 보살, 곧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이다.
특히 관음보살이 영험하기로 유명한 기도 도량이 전국에 세군데가 있다.
강원도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 석모도 보문사, 그리고 보리암이 3대 관음성지이다.
모두 바다에 접해 있고 그래서 이곳 관음상을 해수관음상이라고 부른다
관음상이 서 있는 터, 절벽 쪽으로 작지만 범상치 않은 삼층석탑이 있다.
보리암 앞에 있다고 해서 보리암 전 삼층석탑이라고 부른다.
근데 탑 주변에선 나침반이 헛돈다고 한다.
바위가 자석성분, 자성(磁性)을 띠고 있기 때문이란다.
이 탑은 원효대사가 금산에 암자를 들인 것을 기념하기 위해
가락국 수로 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온 돌로 세웠다고 한다.
지금도 인도 갠지스강 하류에서 발견되는 이 돌은 자성을 띠고 있다고 한다.
이곳 안내문은 이런 내력을 써놓은 뒤 끝부분엔
탑 양식이 고려 초기 것이어서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명기되어 있다.
어쨌건 보리암이 아슬아슬한 절벽에 걸려 있어서 나쁜 기운을 누르려고 세운 탑이란다.
보리암 관음전의 모습.
보리암 관음전과 상주해수욕장
그림같은 남해바다
남해 금산 정상
금산은 삼남 제일의 명산으로 온갖 전설을 담은 38경의 기암괴석이
금강산을 빼어 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금강이라 불린다
금산 정상엔 망대(望臺)로 불리는 봉수대가 서 있다.
고려시대부터 육지 최남단 봉수대로 쓰여 현존 봉수대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남해의 제1경으로 불리우는 금산(錦山)
신라초 원효대사가 금산을 찾았을 때 갑자기 서광이 비쳐 보광산이라 불렀고 이후 고려말 이성계가 나라를 세우기 위해 전국의 명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이곳 에서 100일 기도로 산신의 호응을 받아 태조왕으로 등극 하였다
그 은혜로 산 전체를 비단으로 장식 할려고 했으나 산 이름만 비단 금자로 바꾸면 될 것이라는 신하의 말에 비단 ‘錦’자를 쓰어 錦山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금산 봉수대에서 바라본 남해
남해 금산에 있는 단군성전
남해군 관광 안내도
금산과 보리암을 구경하고 나와 무작정 해안도로를 따라 달린다.
그리고 도착한 곳이 남해군 남면에 가천마을이 있는 다랑이논이다.
내 고향 의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논이건만 이곳은 관광자원화 한것이 부럽다,
매스컴에 보도된 탓인지 사람들이 꽤나 많고 마을의 70%이상이 민박집을 운영한다.
다랑이논의 모습
마을이 이렇게 민박집으로 운영한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밥무덤의 모습
이 마을 아래 바닷가 가기전에 있는 이 집은 모 TV에 방영되고 나서 음식점이
주말이면 관광객과 등산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해물국수맛과 직접 담가서 팔고 있다는 유자잎 막걸리는 맛이 전혀 아니다.
거기다가 바빠서 그런지는 몰라도 서비스 정신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손님들의 입맛이 얼마나 까다로운데... 한번 먹어본 사람은 다시갈까?
쥔장은 지금부터라도 음식과 서비스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다랑이논에는 지금 마늘이 심어져 잇다.
다랑이논 마을에 있는 암.수 바위
다랑이 논이 있는 가천마을과 뒤에 있는 응봉산의 모습.
이 산이 정말 멋있어 보인다. 그리고 등산객이 꽤나 많다.
가천마을 다랑이 논의 유래
이곳 식당에서 늦은 오후 3시에 식사를 마치고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남면, 서면을 거쳐
남해읍에 도착한다. 저녁에 먹을 해산물을 사려고 삼천포 어시장 같은 곳을 찾으려 했지만
이곳 남해는 그런곳은 없고 남해읍내에 있는 전통시장에 들어서니 그래도 시골장 치고는
꽤나 크고 수산물도 많은 편이다. 이곳에서 각종 해산물을 사서 숙소를 구하려고 펜션에다
전화를 하니 방 2칸에 26만원을 달라고 한다. 그래서 약간 변두리인 설천면 문항리 옥동마을에
도착하여 깨끗한 방 2칸에 10만원에 들어간다. 여주인이 자기들이 심은 각종 상추와 파를
주는 바람에 오늘 저녁에도 맛있는 음식으로 포식을 한다.
문항리 앞바다의 모습
썰물이라 바닷가의 비릿한 냄새가 어쩐지 상큼하게만 느껴진다.
저 바다 멀리 보이는 곳이 삼천포의 모습이다.
저녁에도 멸치회, 전복,해삼, 멍게, 낙지 등등 내가 좋아하는
해산물에다 소주에 맥주를 말아서 마시고... 그것도 모자라서
이 지역의 막걸리로 입가심... 이러다가 술독에 빠질라 ㅋㅋㅋ
펜션 앞들에 잘 정리된 밭에는 마늘농사가 한창이다.
이 지역에는 마늘이 참으로 많다.
펜션에서 바라본 대국산과 산성의 모습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대국산의 정상에 지어진 산성으로, 산꼭대기를 빙둘러 돌로 쌓았다.
성의 둘레는 1.5㎞, 성벽의 높이는 5∼6m이고 윗부분의 폭은 2.4m인데, 성벽의 바깥쪽은 깬돌을
이용하여 겹으로 쌓아 올리고, 안쪽은 자갈과 흙을 섞어서 채워 성벽을 다졌다. 성벽의 둘레에는
네모꼴의 망대(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세운 높은 대)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성 안의 중앙에는
건물터와 연못터가 있으며, 천씨(千氏) 성을 가진 장군과 일곱 시녀 사이에 얽힌 전설이 있는 제사터가 있다. 성의 동남쪽과 북쪽에 성문이 있었던 듯한데, 이중 동남쪽의 문이 정문으로 추측된다
3일차(3월 25일)
문항리 앞바다의 일출(경남 남해군 설천면 소재)
바닷가를 홀로 아침 산책을 한다. 서서히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울에서 찌든 일탈을 벗어버리고 나홀로 호젓하게 걷는게 참으로 편하다.
저 멀리 노인 한분이 갯뻘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나오는 모습이 안쓰럽다.
참으로 인생살이란 고단한가 보다. 자세히 다가가보니 갯뻘에서 석굴을 캐서
지고 나온신다. 이른 아침부터 힘들게 하시냐고 하니... 서울, 부산에서
자식들과 손주들이 와서 먹이려고 석굴을 캐서 나오는 중이란다.
조금 살 수 있느냐고 물으니 1만원만 달라고 한다. 근데 많이 주시는지
자루를 펜션을 끌고 오다시피 하였다. 9명이 삶아서 실컷 먹었다.
에공 ... 자식이 먼...지 갑자기 울 모친이 생각난다.
돌사랑 민박집 명함
이 집 여주인은 울산에서 학교에서 교직에 있다가 바깥 양반이 건강이
좋질않아 이곳으로 이주해와서 민박을 겸한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처음부터 풍기는 용모가 시골아낙과는 달리 인텔리하고 예의가 바르다.
아들도 서른 셋이라는데 참으로 착해 보인다. 하룻밤을 잘 묵고 나온다.
아침 10시에 펜션을 떠난다. 남해군 창선면, 삼동면 미조면, 상주면, 남면, 서면을 거쳐
설천면을 지나서 남해대교를 건너 하동군으로 접어든다.
남해대교 건너 하동군 금오산의 모습
금오산은 지리산 동남쪽의 뻗는 줄기로 하동군 동쪽 남해안에 자리잡은
높이가 849m이고 둘레가 80리라고 한다. 하동군 진교면 임해에 위치한 금오산은
노적가리처럼 우뚝 솟아있어 옛날에는 소오산이라 하였으며 병목처럼 생겼다고
하여 병요산으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산의 주맥(主脈)을 따라 자그마한
산줄기가 끊어질 듯 이어져 내려 바다를 건너다보는 자라의 형상과 같고 오행설에
따르면 산의 상이 금상이므로 금오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금오산 정상에는 봉수대(경남 지방 기념물 제122호)가 자리잡고 있다.
고려 헌종 3년(1149)에 축성된 것으로 좌측에 통영, 우측에 여수가 보이는 중간에
위치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를 거쳐 한양으로 이어지는 지는 봉수대로 한려수도가
보이는 요새중의 하나라고 한다. 지금도 정상에는 군부대가 자리잡고 있다.
남해 충렬사 앞에서 바라본 삼천포쪽의 모습
남해대교(南海大橋)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를 연결한 다리로
길이 660m, 폭 9.5m, 높이 52m. 국도 19호선상에 있으며, 맬다리 또는 허궁다리라고도 부른다.
1968년 착공하여 1973년 준공된 한국 최초의 현수교이다. 상부구조는 현수교로 된 3경간 연륙교이며,
하부구조는 구주식으로 되어 있다. 교각 밑으로 노량수도(露梁水道)가 흘러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빨라 다리를 놓기에 상당히 힘들었으나, 양쪽 언덕에 강철선 묶음을 단단히 하고 거기에 다리를
매다는 공법으로 시공했다. 다리 양쪽 끝에 버팀목을 세우고 중간중간에 교각을 넣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특히 주탑은 케이블 및 보강형에서의 반력을 지지하는 구조물로 다리 전체의 아름다움을 더해주었다. 다리의 건설로 육지로부터 고립되었던 남해도지역과 부산·여수·마산·하동 등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남해도 각지에 산재한 명승고적과 한려해상국립공원지역을 찾는 관광객들의 유치와
지역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하동군 금남면의 5일장의 모습
내 어렸을 때 본 시골의 장터와는 사뭇 다르다. 여느 서울의
재래시장과 비슷한 모습이라 별 감동이 오질 않는다.
장터의 할머니 한테서 쑥과 냉이와 파를 산다. 울 어머니 생각에...
몽땅 다해봐야 7000원이지만... 이곳에서 시장구경을 마치고 도로를 따라
하동읍을 지나는데 섬진강 건너 광양쪽에 무슨 행사를 하는지 도로가 꽉 막혀있다.
할 수 없이 읍내로 돌아서 우회하여 박 경리 여사의 대하소설 ‘土地’의 무대가 된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로 향한다. 주위에는 매화꽃이 피어있고 도로에 이곳의
유명한 벚꽃이 개화를 할 준비를 한다.
평사리에 있는 박경리 여사 토지 문학비(경남 하동군 악양면 소재)
내가 土地를 접한건 10년이 넘은 세월이다. 이 소설은 내 고향 의령과 가까운
하동땅에서 처음으로 전개되었기에 정다운 고향 사투리로 구사되어 이해가 훨씬 쉬웠던
기억이다. 지금은 21권으로 되어 있다고 하니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지난해에 호남정맥을 타면서 정맥길을 이해하기 위해 조 정래의 태백산맥을 맛있게
읽은 기억을 생각하면서...
작가는 25년간 길고도 긴세월을 토지 21권을 쓰기 위해서 젊음을 바쳤다.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대 업적을 이루었다.
경남 평사리에서 서울과 간도 일본을 넘나들며 흘러와 하구에 다다른 대하의 저 거대한
마침표는 소설 속에서도 8월 15일이었다.
작가는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듯이
그만큼 살아온 생애가 평탄하지 만은 않았다.
유방암으로 갖은 고생을 했고, 가슴에 붕대를 동여 메고 글을 섰다.
손자를 업어 키우면서도, 글을 쓰고, 일상샐활을 하면서도 글을 섰다.
남편과 사위(시인 김지하)의 수감 생활로 끝없는 가슴앓이를 많이도 했다.
토지는 하동 평사리의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가 전개 되지만,
일제 강점기의 일제의 만행과 민초들이 살아가는 이야기가
물 흐르듯 잔잔하게 이어진다.
토지는 소설이지만 마치 실제로 보고 들은 것처럼 한 문장 한 문장을
이어간다. 21권을 읽는 동안 그 흔한 정사장면은 한번도 나오지 않은것 같다.
이 책의 등장인물만 해도 몇 백명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최참판댁 가는 길
소설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들
평사리 최참판댁 올라가는 길이 마치 10여년전에 일본 교토에 갔을 때 청수사 가는
길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이곳도 관광지화, 상업화가 너무되어 있다.
평사리 土地 세트장의 모습
이용이네 집
소설속에 용이는 평사리의 상인으로 아내 강청댁이 호열자로 죽자 임이네
사이에서 아들 홍이를 얻는다. 간도로 간 후에 탐욕스러운 임이네 때문에
고초를 겪으며 운명적인 사랑인 월선의 품에서 숨을 거둔다.
최참판댁 행랑채 앞에서
최참판댁 마당에서 바라본 악양면 평사리(平沙里)의 들녁
과거 섬진강 물길의 영향으로 땅이 질척인다고 해서 일명 ‘무딤이들’이라 불리는 평사리 들판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 의 주무대로서 토지의 구성원들의 주무대 이기도 하다.
동학혁명에서 근대사까지 우리 한민족의 대서사시인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인 이곳 ...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에 소설속의 최참판댁이 한옥 14동으로 구현되었으며, 조선후기 우리민족의
생활모습을 담은 초가집, 유물등 세트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최참판댁은 토지에 나오는 주인공인" 서희"가 어릴적 살던 집으로 소설에 나오는 모양과
유사하게 지어 놓은 주택으로 하동군의 문화상품이다
이 넉넉한 들판이 있어 3대에 걸친 만석 지기 사대부 집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모태가 되었다.
생전 박경리 선생은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세 가지를 얘기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마른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라고 하였다.
이렇듯 이 넉넉한 들판은 모든 생명을 거두고 자신이 키워낸 쌀과 보리로 뭇 생명의 끈을 이어준다.
섬진강 500리 물길 중 가장 너른 들을 자랑하는 평사리 들판(무딤이 들)은 83만여 평에 달한다고 한다.
최참판댁 마당에 피어있는 할미꽃
평사리 들녁 너머에 도도히 흐르는 섬진강과 그 너머 울님의 乳頭처럼 볼록나온
호남정맥의 끝자락 광양 백운산은 아직도 눈으로 덮혀있다. 전라북도 진안 마이산 인근의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이곳까지 500리의 도도한 물길을 이루는 섬진강은 남한의 5대강 중에
오염되지 않은 최후의 청류(淸流)로 꼽힌다. 사계절의 아름다운 운치를 자랑하지만 그 중에서도
으뜸은 하얀 벚꽃이 온통 만발하는 4월초가 가장 좋다고 한다.
섬진강 벚꽃은 건교부 선정 ‘한국에서 아름다운 길 100選’ 에 선정되기도 했다.
최참판댁 물레방아 앞에서
평사리를 구경하고 섬진강 물줄기를 따라 서울로 가기 위해서 구례쪽으로 향한다.
조금 더 가니 대중가요로 유명한 화개장터가 나온다. 마침 오늘이 장날이라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북적거려 도저히 차를 주차할 곳이 없어서 쌍계사로 향한다.
쌍계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700m를 걸어 쌍계사로 향한다.
쌍계사 안내판
쌍계사 일주문
쌍계사는 3월 26일부터 3일간의 보살계 수계준비로 한창이다.
회주스님인 고산 큰스님께서도 통영 연화사에서 보살계를 위해
이곳 쌍계사에 와 계신다고 한다.
일주문에는 ‘三神山 雙磎寺’란 편액이 걸려있다.
삼신산은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을 뜻한다. 중국의 전설에서는 삼신산을 발해만(渤海灣) 동쪽에 있다는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의 3산을 말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삼신산에는 신선이 살고 있으며, 불사약이 있다 하여, 시황제(始皇帝)와 한(漢) 무제(武帝)가 불사약을
구하려고, 동남동녀 수천 명을 보냈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쌍계사는 통일신라 성덕왕 23년(723) 의상대사의 제자인 삼법(三法)선사가 창건한 절이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귀국하기 전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三神山)의
눈 쌓인 계곡 위의 칡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설리갈화처, 雪裏葛花處)”는 꿈을 꾸었다.
귀국 후 눈 위에 꽃이 피는 땅을 두루 찾아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지리산에 이르렀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지금의 쌍계사 금당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옥천사라는 절을 세웠다.
그 뒤 문성왕 2년(840년)에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이어온 진감(眞鑑)선사가 중창했다.
진감선사는 선(禪)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것을 벽암(碧巖)대사가 인조 10년(1632)에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조계종 25개 본사중 제13교구 본사이다.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 천왕문을 통과하는 것이 가람의 전통적인 배치이긴
하나 쌍계사처럼 3개의 문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는 사찰은 그리 많치 않다.
천왕문을 지나면 정면에 팔영루가 나타나고 이 누각을 지나면 쌍계사의 유일한
국보인 진감국사대공탑비(국보제47호) 계단 가운데 서있다.
쌍계사 [雙磎寺]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절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의 본사로 43개의 말사(末寺)를 관장하며 4개의 부속 암자가 있다.
723년(성덕왕 22)에 의상의 제자인 삼법(三法)이 당에서 귀국하여 육조혜능(六祖慧能)의
정상(頂相)을 모신 뒤 옥천사(玉泉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했다. 840년(문성왕 2) 진감선사(眞鑑禪師)가
당에서 차(茶) 씨를 가져와 절 주위에 심고 중창하면서 대가람이 되었다.
886년(정강왕 1) 쌍계사로 절 이름을 바꾸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2년(인조 10)에 벽암(碧巖)선사께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전형적인 산지가람배치로 남북축선상에 금강문·천왕문·팔영루(八泳樓)· 대웅전(보물 제500호) 등이 일직선으로 있고, 대웅전의 좌우에 설선당(說禪堂)과 요사가 있다.
이밖에 명부전·나한전·팔상전(八湘殿)·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금강문 등이 남아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진감선사대공탑비(眞鑑禪師大空塔碑:국보 제47호)·부도(보물 제380호) 및
여러 점의 탱화(幀畵)가 남아 있다.
쌍계사 마애불
진감국사 대공탑비(眞鑑國師 大空塔碑): 국보 제47호
비신에는 금이 가 파손되었는데 여순사건과 6. 25전쟁때
공비와의 교전으로 총탄을 맞아 비신 전체에 흠집이 있다.
신라 정강왕이 진감선사의 높은 도력과 법력을 앙모하여
대사가 도를 닦던 옥천사를 쌍계사로 개명한후 건립한것으로
850년 77세의 나이로 선사가 입적하여 887년 진성여왕이 대공탑비라 시호,
고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3년이 되는 31살때
친찬(親撰). 친서(親書). 친전액(親篆額)을 한 四山碑銘중의 1구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 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널리 대중화시킨 인물로, 애장왕 5년(804)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가 되었으며, 흥덕왕 5년(830)에 귀국하여 높은 도덕과 법력으로 당시 왕들의
우러름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이곳 쌍계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는 몸돌에 손상을 입긴 하였으나, 아래로는 거북받침돌을, 위로는 머릿돌을 고루 갖추고 있는 모습이다. 통일신라 후기의 탑비 양식에 따라 거북받침돌은 머리가 용머리로 꾸며져 있으며, 등에는 6각의 무늬가 가득 채워져 있다. 등 중앙에는 비 몸돌을 끼우도록 만든 비좌(碑座)가 큼지막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옆의 4면마다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직사각형의 몸돌은 여러 군데가 갈라져 있는 등 많이 손상된 상태이다. 머릿돌에는 구슬을 두고 다투는 용의 모습이 힘차게 표현되어 있고, 앞면 중앙에는 ‘해동고진감선사비’라는 비의 명칭이 새겨져 있다.
꼭대기에는 솟은 연꽃무늬 위로 구슬모양의 머리장식이 놓여 있다.”
하동지방의 쌍계사 부근에는 섬진강이 인접해 있어 안개가 많고 다습하다.
그리고 차 생산시기에 밤낮의 일교차가 심해 토양의 약산성으로 수분이
풍부하며 사력질 토양에 차 생육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하동녹차가 유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동군 화개면 정금리 해발 200m 산중턱의 도심다원에 수령 1,000년이
넘는 차나무가 2008년 7월 한국기록원으로 부터 삼국유사와 신라본기를 근거로
한국 최고의 차나무로 인증받아 이곳 하동이 차의 시배지로 공식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쌍계사를 관람하고 나와 쌍계사 주차장 옆에 있는 전통팥죽 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아직도 바람은 세차기만 하다. 이곳에는 40대의 젊은 부부가 운영하는데
경상도 사람답지 않게 싹싹하고 친절하다. 그리고 음식맛도 내 입에 딱맞는다.
어제 남해 다랭이 논이 있는 동네 음식점과는 전혀 딴판이다.
여기서 회원들이 산나물과 겨우살이, 고로쇠물을 산다.
맛있는 팟죽을 모두들 깨끗히 비운다. 이것저것 자꾸만 젊은 쥔장이 먹으라고 권한다.
수더분한 40대 초반의 여주인장. 부부가 이곳 화개출신으로 초등학교 선,후배사이란다.
이곳에서 든든하게 점심을 먹고 서울로 출발한다. 원래는 남원에 들려 광한루 옆에
있는 추어탕집에서 점심을 먹고 서울로 가기로 했으나 쌍계사로 가지 않았던 분들이
식사를 하는 바람에 스케줄이 변해 버렸다. 도로를 따라 쭉 내려오니 다시 화개장터를
만난다. 들리고 싶지만 차를 세울 공간이 없어 하동을 지나 구례지역으로 접어든다.
구례지역에서 바라본 지난 가을에 종주했던 호남정맥길의 백운산 자락
섬진강변에는 산수유가 피기 시작한다. 회원중에 한명이 이곳 구례출신이다.
그 분의 말에 의하면 이 지역의 여자들이 예전에는 전부 턱이 나왔다고 한다.
산수유 열매를 까기 위해 입을 하도 사용하여 그랬다고 한다.
운조루에서 바라본 지리산 노고단의 모습
쌍계사를 나와 화개장터를 지나 구례를 향한다. 노래가사에 나오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 지르는 섬진강에는 나룻배 대신에 하동군 화개면과
구례군 간전면을 잇는 멋진 남도대교가 새로 생긴 바람에 옛 정취는 잊어 버렸다.
섬진강의 세찬바람을 따라 피아골 갈림길을 지나 토지면에 접어들어 운조루로 향한다.
운조루(雲鳥樓)
“구름(雲)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鳥)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에서 앞의 두 자를 따온 당호다.
집이 하도 커서 전체적으로 좀 허망해 보였다는 게 솔직한 인상이었다. 대부분 종가들은 좀 허망하다.
미학적인 구성보다는 종가로서의 기능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또 상당 부분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집 앞에 놓인 네모꼴 연지(蓮池)도 어딘지 집과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인다.
운조루가 자리하고 있는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는 지리산의 남쪽 능선을 배경으로 마을 앞에 섬진강이 흐르고 너른 들이 펼쳐진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명당이다. 반지를 떨어뜨린 곳이라는 의미인데, 여인에게 있어 반지는 출산할 때 외에는 잘 빼놓지 않는 소중한 것인 만큼 생산물이 풍부한 곳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례가 어떤 곳인가? 지리산 아래 있다는 것이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인지 아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함부로 명당 운운할 것이 못 된다. 경주 교동의 최준 고택이 그렇듯이 구례의 운조루가 질곡의 현대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문화 류씨 가문에 내려오는 나눔의 정신 때문이었다. 풍수상의 명당이 부를 가져다주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지킬 수 있었던 힘은 분명 항상 남들과 함께하는 길만이 스스로를 지키는 일이라는 가문의 정신 때문이었다. 동학과 빨치산, 6·25전쟁을 겪으며 많은 부자가 피해를 보았지만 이 집만은 무사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집에는 굴뚝이 없다. 굶는 집들이 많았던 당시, 그렇다고 같이 굶을 순 없고, 연기라도 감추기 위해 굴뚝을 없앴던 것이다.
소심한 배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대문 앞에 있는 뒤주를 보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다. 대문 앞에 뒤주가 나와 있는 건 가난한 동네 사람들에게 베풀기 위한 것이고, 그들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한 배려였다. 뒤주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고 적혀 있었다. 누구든지 마음대로 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가난한 이들과 같이 나누려는 운조루 사람들의 마음에, 가난한 이들의 자존심을 위한 배려에 숙연해졌다.
운조루의 안내판
운조루 내부 전경
기둥하나 돌맹이 하나도 옛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는듯...
운조루 경내에 피어있는 산수유
정원에는 복수초도 보이고...
자연 그대로를 이용하여 기둥을 세운게 참으로 기가 막히다.
곡전재[穀田齋]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전통 목조 건축물. 부농의 민가형식으로 지었으며 부연(附椽)을 단 고주(高柱)집, 문살의 외미리 형식, 기둥 석가래 등이 매우 크고 지붕이 높다.
풍수지리상으로 천상의 선녀가 떨어뜨린 금가락지 모양이라 하여 금환락지(金環洛地)라고도 한다.
1929년 승주에 살던 박승림이 건축하였으며, 1940년 곡전 이교신(李敎臣)이 인수하여 현재 5대손이 살고 있다.
원래 6채 53칸 규모로 지었으나, 현재는 5채 51칸 규모이다. 문간채, 안채, 사랑채가 모두 'ㅡ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높이 2.5m 이상의 호박돌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수 당시 동행랑과 중간채가 훼손되었으나 1998년 1월 동행랑과 중간 사랑채를 복원하였으며, 새로 ‘춘해루’라는 누각을 짓고 연못(세연)을 확장하였다.
운조루를 나와 서울가는 시간이 빠듯하여 곡전재 관람은 다음으로 미루고 구례 화엄사 I.C 를 거쳐
작년에 호남정맥길에 많이 다녔던 전주~순천간 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온다.
오랫만에 산에 가지못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자동차로 1,000km를 넘는 남도길 여행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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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고 귀경한번 잘했네..1000km도는것두 힘들지만 손가락으로 마우스 돌리며 보는것두 힘드네요
ㅎㅎ....목적지를 정하지 아니 하고 발길 닿는데로.... 그거 썩 좋은 방법이구료... 그런데 남해 독일 마을은 어데 있지요 ?
남해에는 독일마을도 있고 미국마을도 있더군요
덕분에 봄 여행 저도 잘하고 갑니다. 보리암 앞바다를 바라보면 가슴이 뻥~~~~뚫리는데....
보리암을 5번째있데 그리도 가장 기억에 남는게 남해대교 없을 때 배타고 남해 들어갈 때가로더군요. 불교성지가 너무 편하게 오르고... 왠 넘의 시설을 잘 해놔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땐 부처님에 대한 환희심으로 보리암에 올랐는데 지금은 보리암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나있어
상업적인 냄새땜에 불편하더군요. 절은 절다워야 하는데...
반가운 마음으로 잠시나마 하던일을 멈추고 남도에 푹 빠저봄니다.
종은 글 잘보고감니다.항상건강하시고............
귀경 잘하고 맛난거 잘먹고 갑니다.ㅎ 해삼에 침흘리고 팥죽에 침흘리고 어시장에 널린 생선에 침흘리고 도대체 몃번을
침흘리고 갑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