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S.A 역사기행 - 남북 전쟁
※ 이 글은 수업간 들었던 내용을 토대로 하고 있으며, 당시 수업을 담당하신 선생님의 생각과 제 자의적인 생각이 혼합된 글임을 밝힙니다. 특히 강의를 토대로 하며 필기과정을 통해 왜곡될 수 있기에, 인물 및 사건, 작품명 등에 있어서 정확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I. 남북 대립
1. 면화 재배업
1836년에서부터 1847년까지를 미국의 "팽창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영토적인 확장뿐 아니라 산업혁명기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공업 및 원료와 상품 수송을 위한 도로, 운하 등의 교통로, 그리고 이 늘어나는 일자리를 메우기 위해 엄청난 수의 이민자가 쏟아져들어온 미국 대발전의 시기였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에는 항상 그렇듯 기존 질서를 고수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세력과 변화를 주도하는 신흥 세력 간의 충돌이 필연적이었다.
이 당시 특히 전통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은 농경사회 성향이 강했던 남부였는데, 여기서 가장 큰 관건이 된 것은 바로 노예 산업이었다. 일반적으로 다들 알고 있다시피, 북부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고 남부는 노예제 존속을 주장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왜 그랬을까? 오히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남부는 더 적극적으로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던 지역이었다. 이것은 그 이전 남부를 대표하던 인물, 토머스 제퍼슨만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양상이 왜 갑자기 뒤바뀌었을까? 이것은 남부에서 주를 차지하고 있던 산업이 바뀌었기 때문인데, 본래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남부의 주 산업은 담배 산업이었다. 이러한 담배 농사는 땅을 쉬게 하지 않고 계속 재배하는 과정에서 양분이 메말라 척박해지는 결과를 초래했고, 새 땅을 찾아 계속 서부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인디언들과의 충돌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담배는 토양을 상당히 가리는 편인 작물이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롭게 인기를 끈 것이 면화 농사였다. 당시 면화는 방적 산업이 발달한 영국 등에 얼마든지 수출의 길이 열려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면화 농사는 그 씨 빼는 작업이 너무 복잡해서 하루 종일 일해봐야 겨우 500g 남짓밖에 면화 씨를 뺄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 당시 엘리 휘트니Eli Whitney라는 한 청년이 간단한 조면기, 즉 씨 빼는 기계를 고안해내는 데 성공한다. 이 기계는 사람 손보다 무려 50배나 빠른 속도로 씨를 빼낼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미 남부의 면화 농사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여 1821년에 이르러 면화 수출액은 담배 수출액의 4배까지 증가했다. 심지어 남북전쟁 직전에는 면화 수출액이 기타 수출액의 수출 총계보다도 많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러한 면화 농사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면화를 심을 수 있는 새롭고 넓은 농경지가 필요할 것이다. 이에 따라 남부 지역은 더욱더 서부 진출, 새 영토의 개척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조건이 바로 문제였는데, 면화 농사는 대형 농장에서 면화를 따고 그 씨를 뽑는 조면기를 돌리는 등 막대한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바로 여기서 노예 수요가 폭증하게 된 것이며, 남부가 노예제 존속에 목숨을 걸고 전쟁까지 불사하게 된 이유였다. 실제로 이 당시 노예 가격은 거의 7배에 달할 정도로 뛰었으며, 수에 있어서도 70만명에서 400만명까지 증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노예제 폐지란 말 그대로 남부 경제를 완전히 파탄시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며, 남부로서는 반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 사회라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 문제로 모두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를 보면서 우리는 남부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었다거나 링컨이 정말 윤리적인 사람이었다거나 하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것은 단순히 이 사건의 텍스트적 측면만을 고려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당시 북부 노동자의 작업 환경은 남부 노예와 비교, 결코 양호한 편이 아니었으며, 남부 측에서도 노예 문제에 대한 윤리적 공격이 있을 때마다 이러한 부분을 걸고 넘어지고는 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컨텍스트적인 측면이며, 남북 전쟁은 이러한 측면을 특히나 잘 살펴볼 필요성이 있는 전쟁이었다. 이는 단순히 "노예의 해방"이라는 윤리적 문제로 다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속에 있는 정치적, 경제적 맥락을 잘 살필 필요가 있는 전쟁이었다.
2. 신생 주 가입 문제
한편 북부는 이 시기 공업 분야에 있어 엄청난 발전을 이끌었는데, 1831년 버지니아의 농부 맥코믹이 발명한 곡물수확기, 존 디어의 쇠쟁기 대량 생산 등 여러 산업들이 큰 발전을 거두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게 발전한 것은 섬유 산업이었는데, 1810년까지만 해도 230만 노동력 중 1만명 가량이 섬유 산업에 종사하던 것이 1812년 이후 1/4에 달하는 인구가 종사하는 산업의 중추로까지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북부 또한 노동자의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것이 노예를 반대하는 이유가 되었다기에는 부족한 감이 많다. 사실 노동자의 증가는 노예제가 폐지되면 더 증가할 가능성이 있었지만, 단순한 가능성의 문제로 전쟁까지 치렀다는 것은 약간 의문의 여지가 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는 그 이전까지 지속되었던 북부와 남부의 대립이란 측면이 더 크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관세 문제에 대한 지역적인 이해관계 격차였다. 공업 지향적이었던 북부는 성장하는 상공업을 위해서는 보호 관세가 필요하였고, 농업 지향적이었던 남부는 원료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자유 무역 쪽이 더 이익 창출에 유리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중앙 정부의 지지 하에 공업 발전을 추구하던 북부와 지방 주도의 체제를 꿈꾸던 남부와는 메울 수 없는 사고의 격차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역간의 이해 격차와 사고 격차는 결국 그 둘간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여기서 노예제 문제는 오히려 노예제 자체보다는 남부의 편이냐 북부의 편이냐를 가르는 표면상의 문제였다고 보는 편이 더 옳을 듯 싶다.
그러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미국 정치가 나름대로의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까지만 해도 노예주가 11개, 자유주(주 :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주)가 11개로 1:1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1819년, 새로 미국의 영토가 된 미주리주가 노예주로 연방가입을 신청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노예주, 자유주 간 균형이 깨질 상황이 된 것이다. 이는 다행히 마침 메사추세츠 주의 일부가 메인 주로 떨어져 나오는 것을 자유주로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해결되었지만, 이것은 임시 방편일 뿐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이에 따라 36도 30분을 경계로 그 이남 지역은 노예제 인정, 그 이북 지역은 노예제 불인정의 원칙을 세운 미주리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미봉책에 불과했고, 결국 문제는 다시금 터져나왔다. 팽창시대를 거치면서 영토는 크게 늘어났는데, 이 당시 새롭게 등장한 주였던 캘리포니아, 유타, 뉴멕시코, 텍사스 등의 주는 기본적으로는 36도 30분 이남에 위치해있으므로 미주리 협정에 따라 노예주가 되어야 하나, 이주민들이 대부분 북부 출신이어서 자유주로 가입할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1849년 캘리포니아가 연방가입을 하면서 노예제 불허를 선언하자, 남부는 격렬하게 반발하며 연방 탈퇴까지 불사하였다. 이에 당시 대통령 테일러는 무력 동원까지 내세우며 대 혼란이 발발했는데, 이에 헨리 클레이Henry Clay 의원이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는 노예제 문제를 전적인 주민 의사에 맡기되 노예법을 오히려 강화, 남부 노예 소유주들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하는 안을 제시했고, 이는 일리노이 출신의 스티븐 더글라스Stephen A. Douglas 의원의 노력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1850년의 타협Compromise"이다.
1854년, 노예주와 자유주 충돌은 다시금 발발했다. 이것은 오하이오 서부 지역이 연방가입 신청을 하면서였는데, 문제가 커지자 다시금 더글라스 의원이 나섰다. 그는 이 지역을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의 2개 주로 나누고, 각 주에서 노예제 여부를 주민 투표로 결정토록 하는 안을 제시했다. 이 지역은 36도 30분 이북에 있는 지역이었고 당연히 북부는 거세게 발발했지만, 남부 출신 의원들의 강력한 지지로 이 안이 통과되면서 미주리 협정은 사실상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과 같이 철저한 주민등록제로 각 주의 주민을 구성하는 형태가 아니었고, 이러한 틈을 이용해 남부와 북부는 캔자스 지역에서 자신을 지지해줄 투표권자를 늘리기 위해 이 지역에 자 소속의 주민들을 대거 이주시키기 시작하였다. 이 결과 남북부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고, 투표 결과 노예제도가 공식 채택되자 반노예주의자들은 격렬하게 반발, 토피카에 별도의 주 정부를 구성하여 한 개의 주가 두 개의 주로 나뉘어 연방가입을 신청하는 등 점차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북부의 찰스 섬너Chjarles Sumner 의원이 남부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자, 남부 출신 프레스턴 브룩스Preston Brooks 의원이 그를 지팡이로 두들겨 패 평생 불구자로 지내게 만든 사건까지 벌어지는 등, 감정 싸움은 점점 더 격해졌다.
그러나 정작 캔자스에는 노예가 300명도 채 되지 않았었고, 이는 노예제라는 것이 표면에 나타난 구실일 뿐 그동안 쌓여있었던 지역감정, 경제적 이해관계, 문화의 차이가 노예제 문제라는 포장으로 나타난 것임을 역력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캔자스 문제는 몇년간 더 지속되었다가 결국 1858년 재투표에서는 압도적으로 노예제 금지를 결정하였고, 남부는 점차 더 깊은 위기의식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렇게 점점, 남북 간의 관계는 전쟁이란 최악의 상황이 불가피하게 되어가고 있었다.
II. 전쟁의 시작
1. 스토 부인과 존 브라운
캔자스 문제로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 대립은 점차 치열해졌는데, 이러한 한편에서는 폭력과 테러 등으로 노예해방을 추진하려는 과격분자들과 비밀리에 남부 노예들의 탈출을 도와주는 지하 조직들이 활약, 남부인들의 증오를 더욱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특히 이 당시 대표적인 조직이었던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경우, 노예를 "화물", 접선지를 "역"이라 부르는 등의 암호를 사용하며 남부 노예들을 계속해서 북부로 빼돌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북부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가장 핵심 쟁점이었던 노예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었는데, 이것이 두 인물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바로 존 브라운과 해리엣 스토 부인이었다.
해리엣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 부인은 본래 목사의 딸로 태어나 결혼 또한 신학교 교수와 했는데, 그녀는 노예제 주와 오하이오 강 하나만을 경계에 두고 있던 신시내티에서 살았던 관계로 탈출한 노예와 접촉할 기회가 많은 편이었다. 또한 그녀 자신도 친구들에게 전해듣거나 자신이 직접 방문하면서 남부의 생활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을 기반으로 그녀는 1850년, 브런즈웍에서 워싱턴 특별구의 반노예제 신문 "네셔널 에라National Era"지에 연재물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Uncle Tom's Cabin : or, Life among the Lowly"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1853년 출판되면서 엄청난 화제가 되었는데, 비참한 흑인 노예들의 삶을 읽고 북부인들은 엄청난 분노를 터뜨리며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북부인들의 여론에 불을 지폈다.
이 책은 영국에서도 1년 만에 150만부가 팔리고 기타 23개 국어로 번역되면서 전세계로 퍼져나갔고, 그녀 자신도 이 인세를 노예제 철폐 운동에 기탁하며 노예 해방운동에 큰 역할을 수행했다. 심지어 링컨은 남북 전쟁 이후 스토 부인을 만나, 그녀에게 "이 전쟁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한 분이 바로 당신이군요"라며 격찬하기도 했다. 물론 남부에서 그녀의 이름이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존 브라운John Brown은 코네티컷 주 토링턴에서 태어났는데, 그는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엄격한 청교도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열렬한 노예해방론자가 되었고, 그의 집은 비밀결사 "지하철도"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그는 현실적인 노예 해방은 오직 폭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당시 유혈 사태로 시끄럽던 캔자스로 이주하여 자신의 아들들과 도망친 노예들을 모아 폭력비밀 결사대를 결성, 열렬한 노예주의자 백인 다섯 명을 포타와토미Pottwatomie Creek에서 살해, 하퍼스 페리에 있던 정부군의 무기고를 점령한 후 흑인들의 봉기를 선동하였다. 그러나 흑인들의 봉기는 뒤따르지 않았고, 그는 로버트 리Robert Edward Lee 장군이 지휘하던 정부토벌군과 맞서 결국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의 "범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에 대해 전 미국에서 그의 죄에 대한 찬반 여론이 들끓었다. 당연히 남부에게 있어 그는 공포스러운 살인마이자 폭동 반란의 괴수였지만, 스토 부인의 책에 열광하고 있던 북부에 있어 그는 정의의 용사이자 신의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1859년 12월 2일 교수형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 사건은 당시 남북간의 감정 대립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또 남북 사이에 파인 골이 이미 너무 깊어서 충돌은 필연적이라는 것을 역력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현재 노예가 해방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장 위대한 흑인 해방 운동가라는 시선과 폭력에 의존하려 했던 광신적인 정신병자라는 혹평 사이에서 엇갈리고 있다.
2. 드레드 스콧 사건
이 무렵 또하나의 사건이 터졌는데, 바로 드레드 스콧Dred Scott 사건이었다. 드레드 스콧은 미주리 주 출신 군의관이었던 존 에머슨의 흑인 노예였는데, 주인의 직업상 그는 주인을 따라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닐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가 머물렀던 곳이 노예주만 있었을 리 없었고, 그는 자유주였던 일리노이와 위스콘신 주에서도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유주에 있을 때는 아무 말 없었던 스콧이 고향인 미주리에 돌아오자, 연방대법원에 자신이 더 이상 노예가 아님을 인정해달라는 소송을 낸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문제는 매우 미묘한 정치 문제로 발전하여 남부는 북부가 스콧을 꼬드겼다며 격렬하게 비난했고, 이 사건으로 미국 전체가 양측으로 나뉘어 법정 싸움에 매달리게 되었다. 당시 연방대법원장 로저 토니Roger Taney는 이에 대해 원고 패소, 즉 드레드 스콧이 여전히 주인 존 에머슨의 사유재산이며 자유의 몸이 아님을 선언했지만, 이러한 대법원의 판결은 노예문제를 둘러싸고 있었던 당시 남북 관계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미국 전국은 이 판결 문제로 온통 들끓어올랐고, 미국 정계는 팽팽한 긴장 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스티븐 더글라스 의원은 다시금 타협책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상원의원 선거에 더글라스에 맞서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던 무명의 시골 정치인이 이에 대해 노예 문제는 타협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공개토론을 요구하였다. 바로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이었다. 정계에서 말 그대로 애송이에 불과했던 링컨이었기에 더글라스는 피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었고 결국 일곱 차례에 걸친 공개토론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는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후보끼리 벌어진 지역 행사였지만 곧 전국적 관심이 총집중되는 엄청난 행사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링컨은 "분열된 집안은 살아남을 수 없다A divided house cannot stand"라는 구호로 더글라스의 노예문제에 대한 임시방편식 타협안을 매섭게 비판하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그 격차는 당시까지는 너무 컸기 때문에 1858년 선거에서 링컨은 낙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선거를 통해 이름없는 시골 변호사에 지나지 않았던 링컨은 전 북부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결국 186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면서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라스와 다시금 격돌하게 된다.
3. 링컨의 당선
1860년 대통령 선거. 북부의 반노예주의자들은 일치단결하여 에이브러햄 링컨을 미국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사실 남부 측에서도 얼마든지 링컨을 밀어낼 수 있었지만, 당시 남부는 온건파였던 더글라스와 강경파였던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둘에 대한 지지로 갈라진 상태였고, 링컨의 당선은 필연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남부의 불만이 폭발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는 것과는 달리, 정작 링컨이란 인물은 노예 문제를 반대하고는 있었으나 그다지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최대 관심사이자 정치적 목적은 연방의 분열을 막는 것에 있었으며, 오늘날까지 링컨이 해낸 가장 위대한 업적은 사실 노예 해방이 아니라 전쟁까지 치러가며 미국의 분열을 막은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심지어 그는 더글라스와의 토론에서 남부를 다독이기 위해 "흑인들을 유권자나 배심원, 관리로 만들거나, 백인과 결혼하는 것을 찬성한 적이 없습니다"라는 발언을 하는 등, 그의 노예 해방은 철저히 정치적 목적에 입각해 있는 문제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그의 다른 발언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그는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가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노예제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다. 연방을 지키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이 다 필요하다면 그 역시 그렇게 하겠다"라고 발언하며 노예제보다는 연방의 존속이 중요하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였다.
그러나 어쨌건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남부에게는 치명적이었다. 당시 남부의 위기감은 극도로 팽배해가고 있는 상태였는데, 우선 초반의 남북 균형은 공업의 발달과 함께 북쪽으로 점차 기울어져가고 있었고 연방의회도 북부가 이미 다수를 차지, 법도 북부에게 유리하게 제정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철도 등도 북부에만 건설되었고 노예들은 계속 북부로 도망치는가 하면, 해외 이민 또한 일자리가 많은 북부에 집중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부의 마지막 희망은 남부를 지지해줄 대통령을 뽑는 것이었고, 이제 남부에게 있어 남은 선택은 연방 탈퇴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링컨의 대통령 취임 직전인 1861년, 사우스 캐롤라이나 주는 연방 탈퇴를 선언하였고, 그 뒤를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앨라배마, 조지아, 플로리다, 텍사스의 6개 주가 뒤따랐다. 이들 7개 주는 스스로 독립국가임을 선언한 후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정하였다. 건국 84년만에 미국 연방이 공식적으로 분열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이상 연방을 유지하는 방법은 오로지 전쟁밖에는 남지 않았으며, 링컨의 취임은 곧 4년간에 걸친 남북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III. 남북 전쟁
1. 초기의 부진
1861년 4월 12일, 남북 전쟁의 첫 포성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에 있는 섬터 요새Fort Sumter에서 울렸다. 당시 남부는 연방 탈퇴 후 남부연맹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연방정부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고 강제로 연방정부군 기지를 점거했는데, 이 당시 섬터 요새에 주둔하던 연방정부군이 철수를 완강히 거부한 것이다. 이후 1861년 7월 21일 불런 강가에서 남북부군이 첫 전투를 시작하였는데, 당시 3만명 가량의 북군은 "철벽Stonewall"이라 불렸던 토마스 J. 잭슨Thomas Jonathan Jackson 장군과 P.G.T. 보러가드 장군의 방어벽을 뚫지 못하고 패전했다. 이것이 제 1차 불런 전투Battle of Bull Run였다.
남부군은 당시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최고의 명장 로버트 리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며 공격을 강화하였는데, 계속되는 패배에 충격을 받은 북군은 신병 50만명을 더 소집하며 강경한 대응을 준비했다. 그러나 초기 북군의 사령관이었던 조지 맥클래런George Brinton McClellan 장군은 뛰어난 조직력과 병참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과감함에서는 상당히 모자랐다.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그의 공세였던 반도회전Peninsular Campaign에서 그는 패배한 적이 없으며 상당수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그는 계속 남군의 병력을 실제보다 크게 파악하고 지나치게 신중하게 대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1862년 8월, 남군은 리 장군 주도 하에 대대적인 총공세를 펼치기 시작했고, 북군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제 2차 불런 전투에서 리는 앤티텀에서 맥클래런에게 저지당하기 전까지 쾌속진군을 계속했으며, 이후 철수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후에는 버지니아주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맥클래런의 후임자였던 A.E.번사이드 장군을 무참히 패배시켰다. 이 패배 이후 북군 사령관은 번사이드에서 후커로 교체되었고 1863년 4월, 후커는 공세를 시작했지만, 그 또한 챈설러즈빌 전투에서 리의 책략에 넘어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상황에서 오히려 잭슨에게 우익을 공격당하며 패전했고, 결국 북군은 라파하노크 강 북쪽으로 밀려나갔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리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오른팔이었던 "철벽" 잭슨의 전사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를 기점으로 하여 전세는 변화를 맞이한다.
잭슨이라는 천재 전술가의 사망도 사망이었지만, 사실 남군은 북군과 비교했을 때 전력상에서 압도적으로 뒤져있었다. 남부 연합 측에서는 자신들이 북부에 비해 애국적 정열에서 앞서고 전략상 유리한 내륙수송로를 가지고 있으며, 국제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환금작물이었던 면화를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자금력에서도 앞설 수 있다며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북부 연합은 남부와 비교, 인구가 2배 이상 많았으며 공업 지역이었던 만큼 무기제조력이나 수송력에 있어서도 남부를 압도하고 있었다. 실제로 동원된 병력에서만 봐도 북부와 남부는 시합이 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리, 잭슨과 같은 뛰어난 장군들의 능력으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소규모 병력으로 대군을 걸핏하면 묶어버리고 교란시키는 데 천재적이었던 잭슨 장군의 사망과 함께 리의 군사력의 움직임 또한 둔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는 이미 예견되어 있었던 남군의 패배를 기정사실화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노예 해방 선언
1862년 9월 17일 앤티텀 전투Battle of Antietam는 사실 남군이 바로 프레더릭스버그에서 승리해버리는 바람에 남군을 한번 저지했다는 정도의 의의로 그쳤지만, 이는 초반 계속 지고 있던 북군의 최초의 승리였으며 이를 기점으로 링컨이 노예 해방 선언을 실시하게 된 계기로 작용한 사건이었다. 사실 남부의 대대적인 총공세와 함께 미국의 전쟁을 지켜보고 있던 유럽 국가들의 태도는 점차 남부 지지 쪽으로 변해갔는데, 대표적으로 멕시코와 관계가 깊었던 프랑스가 남부를 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방적 산업이 산업의 주축 중 하나였던 영국도 남부의 면화 때문에 그에 대한 지지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었다.
사실 링컨은 기본적으로 남부를 도로 끌어들여 연방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며, 전쟁이란 군사적 우위를 보여줌으로써 남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는 남부를 자극할 것이 분명한 노예 해방 선언을 피하고 있었으나, 오히려 북군이 계속 패전을 거듭하면서 북부의 입지는 점차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프랑스, 영국까지 남부를 지지하고 나서면 더이상 북부는 어떠한 우위도 점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면서 노예 해방 선언을 한다는 것은 그 모습이 우스울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마침 최초로 북군이 승전한 것이다.
결국 1862년 9월 22일, 링컨은 각료회의에서 역사적인 "노예해방선언The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실시했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865년 1월 수정헌법 13조에 의해 노예제는 공식적인 종말을 고하였다. 이 노예해방선언을 기점으로 단순한 남북 갈등으로 시작된 전쟁은 인류 역사에 숭고한 인권 전쟁, 인도주의와 위대한 인간애의 전쟁으로 격상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링컨은 단 한명의 노예도 해방시키지 못했는데, 왜냐하면 그의 권한이 미치는 북부에는 노예제 자체가 없어서 해방시킬 노예가 없었고 남부는 북부와 전쟁중인 적국이었기에 해방선언이 전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선언은 그 이전까지 노예제도를 비기독교적이며 야만적인 것이라 비난하던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들을 겨냥한 것으로, 이들이 남부를 인정하고 지원하지 못하도록 윤리적 이름 하에 못을 박자는 의도에 가까웠다. 실제로 노예해방선언 이후 유럽의 국가들은 사실상 남부에 대한 지지를 거두어들이게 된다.
그리고 1863년 7월 1일, 펜실베이니아에서 소부대끼리 벌어진 우연한 접전이 대규모 전투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게티즈버그 전투The Battle of Gettysburg였다. 이 전투는 남북전쟁 사상 가장 대규모의 전투로 양군 모두 2만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이 전투에서 북군은 남군을 방어하는 데 성공, 이를 기점으로 하여 전세가 뒤바뀌게 되는 남북전쟁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는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리는 폭우를 틈타 버지니아로 퇴각했고, 이 전투 당시 북군 사령관이었던 미드 장군은 비록 남군을 끝까지 추격해 궤멸시키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이 승리를 통해 국면을 전환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이 게티즈버그 지역은 이후 국립묘지로 지정되었으며, 이곳에 찾아온 링컨이 연설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라는 내용은 지금까지도 민주주의의 모범이 되고 있다. 다만 재미있는 것은, 이 당시 사람들이 너무 소란스러워 이 내용을 정확히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고, 이후 퍼진 연설문에서 사람들이 주목하면서 이 내용이 알려졌다는 것이다.
1864년 3월, 링컨은 또다시 새로운 사령관을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이 전쟁에서 가장 유명한 율리시즈 S. 그랜트Ulysses S. Grant 장군이었다.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에서는 39명 중 21등의 그리 좋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했으나 북군 내 사관학교 출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장군으로 임명되었던 그랜트였다. 그러나 그가 등장한 이후 북군은 본격적으로 그 압도적인 병력을 활용하기 시작했고, 현재 북군 사령관 중 이러한 우세를 유일하게 가치있는 것으로 활용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사령관이 되기 전 치렀던 빅스버그 회전Vicksburg Campaign에서 그는 남부연합을 둘로 쪼개버리는 데 성공하며 그의 군사적 천재성을 입증하였고, 미시시피강이 완전히 북부의 손에 장악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랜트는 사령관이 된 이후에는 북부의 압도적인 생산력을 바탕, 지구전에 돌입했다. 그는 피터즈버그 전방의 요새에 가장 무서운 상대였던 리를 포위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였고, 이 틈을 타서 그랜트의 오른팔이었던 셔먼Willam Tecumseh Sherman은 조지아 주를 침공, 애틀랜타 시를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 셔먼은 정신이상자가 아니냐는 소문까지 도는 인물이었으나 그랜트 휘하 지휘관으로 복무하면서 완전히 변신하였고, 특히 그는 애틀랜타에서 서배너까지 가는 그 유명한 "바다로의 행군" 작전을 시행하며 서배너 시를 링컨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바쳤다. 이후 그랜트는 리를 속이기 위해 버지니아의 삼림지대로 뛰어들고, 셔먼은 남북 캐롤라이나를 관통해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전쟁은 막바지 단계에 이르렀다.
3. 전쟁 이후
1864년 11월 8일, 미국 역사에서는 처음으로 전쟁 중에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사실 전쟁이 지루하게 지속되면서 여론도 나빠졌고 링컨의 인기도 떨어져 낙선 가능성이 점쳐졌으며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는 선거를 하지 않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이는 이런 때일수록 민주주의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링컨의 강력한 주장 하에 치러지게 되었다. 당시 민주당 후보로 지명된 것은 최초 북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맥클래런이었으나, 그는 이 당시 그렇게 선거운동에 대한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건 링컨은 재선에 성공하였고, 이후 전쟁은 급속도로 종전을 향해 달려갔다.
1865년 3월, 링컨은 두 번째 대통령 임기를 시작했고, 그 직후인 4월, 남부는 남부군 총사령관 로버트 리가 북부군 총사령관 율리시즈 그랜트에게 항복함으로써 북부에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일전에 다른 글에서 이야기한 적이 있기도 하지만, 이 당시 그랜트의 대처 방식은 매우 훌륭하여 남군 전체를 감복시켰고, 이는 남부가 북부에 대해 별다른 저항감없이 빠른 속도로 흡수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어쨌건 4년에 걸친 남북 전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고, 둘로 갈라졌던 미국은 다시금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 종료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14일 금요일, 링컨은 포드 극장에서 희극 "우리 미국인 사촌Our American Cousin"의 저녁 공연을 관람하던 도중, 존 윌크스 부스Jone Wilkes Booth라는 열렬한 남부 지지자 배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이 날은 바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수난절이기도 했는데, 이에 미국인들은 링컨에게서 워싱턴과 예수를 함께 느낀다고도 말한다. 비록 그는 사망했지만 결국 "통일된 미국"이라는 업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고, 이는 아직까지도 링컨이 미국 사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으로 남게 되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한 결과 연방은 보존될 수 있었으며, 노예제 폐지와 함께 해방노예에 대해서는 시민권이 주어졌다. 또한 전쟁으로 급속히 공업화되고 점점 도시화하고 있던 북부의 주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새롭게 등장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링컨의 공화당은 이후 한동안 정권을 계속 장악하였고, 이 시점은 국내 문제가 해결되면서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제국주의 시대가 열리기도 한 시점이었다. 동시에 이러한 산업화는 새로운 부르주아 계층을 탄생시킨 반면, 이들의 착취에 신음하는 가난한 노동자 계급의 탄생까지 연계, 이후의 미국 갈등은 남북 대립에서 빈부 대립,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대립 구도로 바뀌게 된다.
어쨌건 전쟁 종료 후, 의회에서는 수정헌법 제 13조-15조까지의 세개가 연이어 통과되었다. 수정헌법 제 13조에서는 노예제도의 영원한 폐지가 공식적으로 선언되었고, 14조에서는 시민의 생명, 재산, 자유의 보호를, 그리고 15조에는 흑인, 백인 할 것 없이 성인 남자 모두에게 투표권을 준다는 조항이 선언되었다. 물론, 아직까지도 여성에 대한 투표권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 흑인의 권한은 이후에도 계속 교묘한 방식과 폭력 등으로 억압되었고, 이에 따라 이후 말콤 X, 마틴 루터 킹과 같은 흑인 운동가들이 출현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18만 명이나 되는 흑인들이 이 남북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들이 진정한 "미국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100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 1866년 테네시 주 펄래스키에서 태어난 비밀폭력단체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일명 KKK단은 흑인, 특히 투표장에 나온 흑인들을 무자비하게 폭행, 심지어 흑인에게 동조하거나 동정적인 백인들에게도 가혹한 테러를 자행하며 흑인들의 법적 권리를 폭력으로 박탈하고자 했다. 이러한 KKK단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는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주의Racism의 상징처럼 존재하고 있다.
암살된 링컨의 뒤를 이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링컨의 뜻을 따라 패전한 남부에 대한 유화정책을 펼쳤으며, 이에 연방을 탈퇴했던 남부의 주들이 속속 연방으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정말 진정한 하나의 "미국"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4년간에 걸친 남북 전쟁은 끔찍한 피해를 남겼는데, 북부에서 37만여명, 남부에서 26만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상이 군인 및 민간인 부상자 또한 북부 27만여명, 남부 10만여명에 이르렀다. 또한 전쟁 비용도 북부에서 쓴 것만 32억 달러나 되어, 미 합중국의 빚은 1891년 9600만달러에서 28억 4000만 달러로 약 30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그 이후 미국 경제는 놀라운 성장을 거듭, 19세기 말 미국은 건국 120년만에 이미 당대 최대 강국 수준까지 발전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