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친 동생
이흥근
종친 동생이 이승을 떠났다는 전화가 왔다. 5년 전 정초 종친의 막내 아저씨가 갑자기 사고를 당할 때 아주머니와 남매의 모습이 떠오른다. 종친 막내 아저씨는 가난한 살림살이에서 토지를 구입해서 주택을 건축하고 마을 이장을 하며 경로당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주머니는 음식점을 운영하여 살림이 불었다. 종친 동생도 규모가 큰 족발 음식점을 운영하고 열심히 살았다.
갑자기 사고로 인해 막내 아저씨가 고인이 되고, 아주머니도 그동안의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3년 전 고인이 되었다. 미혼인 남매만 남았다. 종친 동생은 족발 음식점을 운영하고 재산을 늘렸으나 스트레스로 족발집 문을 닫고 최근에 택배를 하였다. 친구가 많았다. 종친 여동생은 검단탑병원에 수간호사로 근무하며 동료 직원들과 잘 지내고 환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주머니가 고인이 된 후에 검단탑병원을 그만두고 강화 주문도에서 쉬면서 섬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막내 아저씨가 살았던 곳은 인천 서구 당하동 신기 전주이씨 집성촌이다. 타성인 사람들도 살았지만, 이씨 종친들이 80% 이상이다. 몇 대에 걸쳐 후손들이 정착하여 서로 깊은 정을 나누며 살았다. 40세대 가 되었는데 서로 생활 형편을 잘 알고, 정이 두터웠다.
앞산이 있고 야트막한 뒷동산과 인근에 있는 독정마을의 경계에 공동묘지가 있고 족저 마을 경계엔 뒨 고개가 있다. 대부분이 초가로 이년에 한 번씩 새로 지붕을 했다. 당하동에 전기는 1960년 초에 들어왔다. 전기가 들어왔을 때 신기했던 기억은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논농사를 지어 가을이 되면 온 마을이 누렇게 황금벌판으로 변했다. 논에는 참게가 서식해 개울과 논이 연결되는 곳에 싸리나무로 만든 발을 치고 밤에 잘 보기 위해 접시나 그릇 깨진 것을 깔아 놓고 논에서 한밤중에 설설 기어 나오는 게를 잡았다. 비가 올 때 개울에 그물을 가지고 송사리, 붕어 미꾸라지를 잡았다. 여름에는 인근 개울가에서 멱을 감았다.
소를 인근 야산으로 끌고 가서 풀을 뜯어 먹이고 꼴을 베어 지게에 지고 왔다. 밤에는 마당에 쑥으로 모깃 불을 피었고 온 식구가 멍석에 옥수수와 감자를 쪄서 먹으며 두런거렸다.
결혼해서 사랑하는 남매를 두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돈으로 농지를 마련하고 새로 구입한 한강 농조 수로 옆 토지 100평에 일자 모양으로 35평 기와집을 건축하였다. 아주머니는 새로 지은 집에서 한식당을 운영하였다. 주로 인근의 공장 사람들과 지역 주민들이 점심때 식사했다.
대곶면 쇄암리 둘째, 넷째 누님이 사는 곳에 토지를 구입 보온덮개로 개 사육장을 관리사와 같이 40평을 건축하여 300마리 사육하였다. 이제 여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막내 아저씨는 농사와 식당을 운영하고 인근 대곶면에, 그동안 사우디 사막에서 일할 때 고생해서 그 시절을 생각하고 오갈 곳이 없는 우즈베키스탄인을 고용하여 농사일과 개 사육하는 일을 맡겼다.
이 년 전에 고용된 그가 술을 좋아하여 늘 과하게 마셔 걱정하였다. 막내 아저씨는 인근 음식점에서 나오는 음식 찌꺼기를 수거하여 개 먹이로 주었다.
그날도 대곶면 개 사육장 근처 다리 위에서 A를 만났다.
“A 어떻게 된 거야 아침에 개밥은 주었어요?”
“지금이 몇 신데 어제 술 마셨어요.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 어제 늦게 자는 바람에 아직 못 주었어요?”
정월이라 날씨가 바람이 불고 추워 땅이 얼어 미끄럽다.
다가가며 냄새를 맡으려 하자, A가 갑자기 손으로 떠미는 바람에 넋 놓고 있다가 뒤로 넘어지며 막내 아저씨는 다리 밑으로 떨어져 빙판에 머리를 부딪쳤다. 손쓸 사이도 없이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었다. 한 참 후 119로 양촌읍에 있는 고려병원 응급실에 싣고 갔다.
오랜 가난 속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살려고 하는 때에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 실려 온 모습은 처참하였다. 사고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귀를 의심했다. 막내 아저씨를 보고 아주머니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평소에 A가 술을 많이 먹어 막내 아저씨에게 내보낼 것을 말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내 아저씨가 사우디에서 고생한 것을 생각하고 고용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인 A는 경찰서로 송치되었다.
처음에는 인근에 있는 고려병원에 안치되었다가 딸이 인천 서구 탑병원에 간호사 로 근무하고 있어 검단동 탑 병원으로 이송했다. 평소에 막내 아저씨가 덕을 많이 베풀어 그를 아는 친구, 친지, 지인, 남매 친구들이 갑작스러운 죽음에 사흘 동안 안타까워하며 남매를 위로하고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쉬워했던 것이 오년 전 일이다.
검단 탑 병원 장례식장에는 종친 동생 친구 삼십여 명이 도와주고 음식값을 제외한 일체를 지불하고 사흘 동안 고인이 된 동생이 외롭지 않게 친구를 배웅했다.
상주가 된 종친 여동생이 주문도에서 하루에 배가 아침에 한번 저녁에 한 번 운행되어 나올 길이 망막하였는데, 오빠가 심장마비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가 있는 주민 6명이 배로 조문하고 다음 날 주문도로 돌아갔다.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종친의 동생 친구들이 시신을 운구하고 부평 승화원 14호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친구를 애도하였다.
종친 여동생은 오빠가 불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넋을 잃었다. 잠깐 타인의 실수로 종친 가족의 불행이 연속되었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종친 여동생의 마음을 어떻게 위로할지 말없이 손을 잡아준다. 종친 여동생의 적막한 마음을 말로 위로를 할 수 없다. 이제는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한다.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아무 일도 없는 듯 둥실둥실 떠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