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권 제 30장 운명(運命)의 재탄생(再誕生)
-1
①
전각(殿閣).
정교하게 축조된 삼층의 전각은 수려한 산세와 더불어 마치 산의
한 부분인 듯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각은 한 채의 웅장한 장원(莊園) 내의 후원에 있었으
며 주위로는 역시 정교하게 가꾸어진 화원과 연못, 그리고 가산이
있었다.
그것은 실로 수려한 구조물로 그 주위에는 잔설이 채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그러나 긴 겨울의 막바지는 이제 봄을 맞아들일 준
비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열려져 있는 삼층 전각의 창문, 그곳에는
한 아름다운 여인이 홀연히 창밖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종리유향(鐘里有香).
바로 천하제일지녀이자 천룡보의 금지옥엽이며 절음폐혈증을 앓고
있는 비운의 소녀였다.
그녀는 멀리 산봉에 쌓여 있는 잔설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서 있
었다. 그녀의 안색은 무척 창백했고 모습 또한 다소 초췌했으나
역시 타고난 우아한 미(美)는 여전했다.
지금 그녀가 들어있는 전각 삼층의 방은 궁전을 방불케할 정도로
화려했고 그녀의 바로 뒤에는 두 명의 청의시녀들이 시립하고 있
었다.
종리유향의 우수에 젖은 눈은 산봉의 잔설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눈에는 몽롱한 기운이 어렸다.
'하후성.......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사랑을 심어준 분, 그리
고 아버님과 전 중원의 운명... 그 모든 것이 저 잔설에 덮여 쓰
러졌다.'
문득 그녀는 자잘한 기침을 쏟아냈다.
'이제... 이 마지막 겨울이 가면 나도 사라지겠지. 후회는 없다.
그러나.......'
그녀의 등 뒤에서 한 줄기 부드럽고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종리소저, 몸도 좋지 않은데 왜 창문을 열어놓고 계시오?"
독고황이었다. 그는 여전히 흑의를 입고 있었으며 창백할 정도
로 흰 영준한 얼굴과 흑의가 좋은 대조를 이루어 그의 기질을 더
욱 돋보이게 했다.
종리유향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이 분.... 지난 반 년이 넘는 동안 이 분은 나를 자신의 몸처럼
아껴주었다. 처음에 나는 그 얼마나 이 분을 증오했던가? 천혈성
의 마성을 타고난 전 무림의 공적, 그러나 유독 나에게 있어서만
은.......'
그녀의 마음 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달콤한 느낌이 가득 차오르고
있었고 독고황이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종리소저, 창문을 닫고 안으로 드시오."
그러나 종리유향은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처연히 대답했다.
"아니에요, 잔설을 구경하고 싶어요."
독고황은 두 눈 가득히 연민의 정을 담고 다시 권유했다.
"잘못하면 찬바람에 건강을 해치게 되오."
"어차피... 이 겨울이 지나면 새 봄을 다 보지도 못하고 죽을 목
숨...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독고황의 안색이 변화를 일으켰다.
"아니오, 낭자는 아직 건강하오.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종리유향은 비로소 몸을 돌리더니 독고황의 염려에 가득찬 눈을
응시하며 미소 지었다.
"하늘의 뜻은 어길 수가 없는 법이에요."
그 말에 독고황의 가슴 속에서는 갑자기 뜨거운 기운이 북받쳐 올
라왔다. 그는 격동을 일으키며 두 손으로 그녀의 가냘픈 양 어깨
를 잡았다.
"낭자는 죽지 않소! 아니, 절대로 죽을 수가 없소. 내가, 이 독고
황이 그것을 허락치 않을 것이오. 천하패존인 나의 명령을 어기고
당신이 어찌 죽을 수가 있단 말이오?"
독고황의 음성은 거의 처절함에 가까웠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
이 아닐 수 없었다.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일대
의 마웅(魔雄)이 독고황 아닌가?
그런데 그가 일개 여인으로 인해 이토록 감정이 격해지다니 타인
이 보아도 그럴진대 정작 당사자인 종리유향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공자님, 아니 황(皇).... 소녀는 당신에게 무척 감사해요. 보잘
것 없는 저 하나 때문에 아버님을 비롯한 수많은 무림인들을 해치
지 않고... 그리고 또 이렇게까지 소녀를 보살펴 주시니......."
종리유향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고 있었다.
"짧은 인생이나마 소녀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요."
"유향(有香)!"
독고황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할 길이 없는듯 그녀를 껴안았다.
"황......."
종리유향 역시 나직히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안겨 들었다.
오랫동안 하후성의 그림자 때문에 방황하던 그녀의 마음은 이 순
간 완전히 독고황에게로 깊이 스며들고 있었고 그것은 비로소 확
신하게 된 뜨거운 애정이었다.
독고황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그는 가냘픈 종리유향의 몸을
굳세게 껴안고는 내심 부르짖었다.
'유향... 너를 놓치지 않겠다. 나는 가장 친한 벗도 잃었다. 처음
으로 사랑을 느낀 너마저 잃은다면 나는, 나는.......'
두 사람의 가슴은 뜨겁게 불타 올랐고 아울러 그들은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듯 움직이지 않았다.
전실(殿室).
그곳에는 청의 중년문사와 독고황이 대좌하고 있었다.
중년문사는 바로 희대의 대마두인 불사지존 백리극이었으며 그는
고요한 눈으로 독고황을 바라보며 물었다.
"황. 마음이 괴로우냐?"
독고황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렇게 괴롭게 될 것을 왜 한 병밖에 없는 만년학정혈을 그녀에
게 먹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었느냐?"
독고황이 대답이 없자 백리극은 탄식했다.
"이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비로소 독고황은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사부님."
불사지존 백리극은 고개를 저었다.
"황. 정말 이 사부는 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지만 이번 일 만
큼은 너를 이해할 수가 없구나."
그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황. 내 말을 잘 들어라. 하후성이라는 아이는 너의 천적(天敵)이
다. 비록 그의 내공이 폐쇄되었다고는 하나 앞으로 어찌될지 모르
는 일이다."
독고황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이미 제자는 천로와 지로를 그에게 붙여 놓았습니다. 그들의 무
공은 오대마성에 못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합치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습니다."
"음......."
백리극은 침중한 신음을 발했으나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황. 걱정이구나. 네가 유향 그 아이 때문에 대업을 그르친다
면......."
그 말에 독고황의 눈에는 이제까지 없었던 강렬한 신광이 번쩍 솟
아 나왔다.
"사부님. 염려마십시오. 제자는 결코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분
간 못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대업을 달성할 것입니다."
백리극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음. 그러나 그 아이의 목숨은 앞으로 길어야 반 년이다. 어쩌면
이번 마지막 남은 겨울조차 못 넘길지도 모른다. 너는 그 고통을
견딜 수 있느냐?"
독고황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고 그것을 본 불사지존 백리극의 얼
굴에 괴이한 빛이 어렸다.
"황. 그 아이에게 천마환혼영체대법(天魔還魂靈體大法)을 쓰는 것
이 어떠냐?"
독고황의 안색이 홱 변했다.
"안 됩니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
독고황의 눈에는 강한 집념의 불꽃이 튕겼다.
"설사 유향을 죽일지언정 그녀를 혼백이 상실된 마녀로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차라리 순결한 유향의 모습을 평생 기억 속에 간직하
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유향 또한 그것을 원할 것입니다."
"음."
문득 사이(邪異)한 광채가 백리극의 눈에서 번뜩였으나 그는 금새
그것을 지워버리더니 무겁게 말할 뿐이었다.
"황. 너는 이 겨울을 유향을 돌보며 이곳에서 지내라. 노부는 봄
이 오기 전에 노부 평생의 숙원을 달성하겠다!"
"아!"
"오대마성과 전 마종지문의 고수를 이끌고 소림사를 공격하겠다.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소림을 무너뜨리지 못했으나 이번에 노부가
기필코 소림 삼성승을 죽이고 소림을 영원히 멸망시키겠다!"
불사지존 백리극의 두 눈에서는 서리서리 가공할 패기와 집념, 야
욕이 불타올랐다.
"흐흐흐... 수천 년 간 유아독존 격으로 내려온 소림을 내가, 이
불사지존이 무너뜨리고야 말겠다!"
②
봄. 삼월(三月).
길고 긴 겨울도 부드러운 봄처녀의 향긋한 숨결에 밀려 도망쳤으
니 강(剛)을 이기는 것이 유(柔)이듯 혹한의 겨울도 마침내 살랑
대는 봄의 훈풍에 쫓겨나고 말았다.
황혼.
삼 월의 석양(夕陽)은 따스한 느낌을 주었다.
한 채의 장원(莊園), 그리고 한 화려한 방 안.
하후성은 창문을 열고 서산에 걸린 석양과 봄바람을 감상하고 있
었다. 그러나 감상이란 어쩌면 한가한 사람들이나 즐기는 사치스
러운 감정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지금 하후성의 심정이 그런 기분이 아님은 확실했으니 기
실 그는 창 밖에 가득 피어있는 화원의 봄꽃들에게서 향기가 풍겨
옴에도 불구하고 꽃을 보지 않고 있었다.
방문이 열리며 한 황의미녀가 걸어 들어왔다.
호연연(胡娟娟)이었다. 그녀는 다가와 부드럽고 다정하게 물었다.
"성랑, 무엇을 보고 계신가요?"
"꽃을 보고 있소."
하후성은 내심과는 달리 그렇게 말했고 호연연도 그 점을 눈치 챈
듯 그의 곁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성랑. 아직도 마음이 편치 않으신가요?"
하후성은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아아, 성랑! 소녀는 당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또
그것을 굳이 만류하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당신은 원래부터가 그
런 분이니까요."
그러나 하후성은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교랑(嬌 )은 어떻소?"
"화미(花美) 언니가 돌봐주고 있어요. 아마 며칠 안으로 아기를
낳게 될 거예요."
하후성의 안색에는 별다른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누가 알랴?
그의 마음에는 실로 커다란 기복이 일고 있었다.
'아기를 낳게 된다고?'
호연연이 그를 보며 다시 말했다.
"성랑, 백언니에게 너무 차갑게 대하지 마세요. 그녀는 진정으로
성랑을 사랑하고 있어요."
하후성은 몸을 돌려 호연연을 응시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
호연연은 마치 활짝 핀 모란(牡丹)을 연상케 하는 순결하고도 그
윽한 미(美)를 풍겨내고 있었다.
하후성은 담담한 눈길을 그녀에게 주며 입을 열었다.
"연연, 오늘따라 아름답게 치장했군. 대체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
렇게 아름답게 꾸몄지?"
호연연은 얼굴에 홍조를 띄우며 고개를 떨구었으나 내심 가슴이
무척 쓰렸다.
'성랑.... 당신은 너무나 야속하군요. 알면서도 묻는 당신의 그
저의는 무엇인가요? 그래요, 당신 때문에 연연은 이렇게 치장을
했답니다. 언제나 머나먼 허공 만을 응시하는 당신의 눈을 잡아두
기 위해서.......'
그녀의 눈에서 수정 같은 눈물방울이 아롱져 떨어졌으나 하후성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무심한 투로 말
했다.
"연연, 당신은 천하제일의 미녀이자 재녀(才女)요. 천하에 어떤
남자라도 당신을 보면 애정을 느낄 것이라는 말이오."
호연연은 가슴이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름다운 꽃도 세월이 흐르면 시드오. 연연, 당신은 이 좁고 답
답한 곳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는 것이 싫지 않소?"
호연연의 안색은 갑자기 충격을 받은 듯 창백하게 변했다.
"성랑... 다... 당신은......."
그녀는 말을 끊더니 섬섬옥수로 눈물을 씻었다. 그리고 그녀는 처
량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성랑. 당신이 절 보고 죽으라고 하면 죽겠어요. 제가 보기 싫다
면 때려도 좋아요. 그러나... 그러나 떠나라는 말 만큼은 하지 말
아 주세요. 제발......."
하후성의 굳어있던 마음에 비로소 격동이 치밀어 올랐다. 그는 갑
자기 두 손으로 호연연의 어깨를 꽉 쥐며 말했다.
"연연!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당신은 후회할 것이오."
그러나 호연연은 눈물어린 눈을 깜박이지도 않으며 고개를 흔들었
고 그 바람에 구슬같은 눈물이 떨어져 하후성의 손목을 적셨다.
"미모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재지(才智)가 무슨 소용이 있나요?
만인의 선망도 소용 없어요. 저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성랑, 당신
의 애정뿐이에요."
"연연......."
하후성의 마음은 마침내 여인의 부드러운 눈물에 녹아버렸다. 그
는 호연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연연, 당신은 너무나 어리석소."
호연연은 다시 뭐라 말하려 했으나 더 이상 말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것은 그녀의 입술이 하후성의 입술에 의해 덮여버렸기
때문이었다.
'아아! 이게... 꿈인가요, 현실인가요? 성랑.......'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며 하후성의 목을 끌어안았다.
깊고 깊은 입맞춤이었다. 두 사람의 입술은 서로의 애정을 캐내려
는 듯 뜨겁고 진하게 맞부딪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의 혀와 혀는
서로를 수없이 확인하고 또 찾았다.
'아아.......'
호연연의 가슴은 뜨겁게 파동치며 사나이의 한 없는 격정과 사랑
을 받아 들였다.
이윽고 하후성은 그녀를 안고는 서서히 걸어 자신의 침상 위에 반
듯이 눕혔다.
황혼은 일락서산(日落西山). 어둠이 몰려옴과 함께 방 안은 고요
한 춘풍(春風)이 넘쳐흘렀다.
"오늘 밤... 그대와 함께 하겠소."
하후성의 열정적인 음성이 꿈결같이 호연연의 귓전에 떨어졌다.
뒤이어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옷자락이 하나씩 벗겨져 나가는 것
을 느꼈다.
잠시 후 그녀는 태초 이래의 완전한 알몸이 되었다. 솟을 곳이 알
맞게 솟아오르고 꺼질 곳이 미묘한 계곡을 이룬 호연연의 육체는
실로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완숙미를 이루고 있었다.
어슴프레한 잔영 속에 드러누운 여체의 신비로움, 그것은 밝은 곳
에 노출된 모습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은은하면서도 뜨거운 유혹
과 충동을 불러 일으켰다.
학처럼 고운 목의 선은 가슴에 이르러 두 갈래의 굴곡을 이루었는
데 여인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며 순결한 모성(母性)이 잠재된 젖
가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또한 젖가슴 끝의 작은 열매는 미지의 희열과 두려움, 그리고 불
안스러운 기대로 인해 미미하게 떨고 있었다.
아랫배로 이어지는 미끈한 곡선(曲線)과 완만한 구릉은 대지(大
地)처럼 누워 있었고, 그 아래 초지(草地)는 숨막히는 긴장 속에
어둠을 뭉쳐 안고 깊이깊이 전율스런 호흡을 일으키고 있었다.
게다가 두 다리는 대리석처럼 반듯하고 수려하게 뻗어 내린 채 세
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호연연은 자신의 육체가 서서히 끓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가늘
게 신음했다. 그때였다, 하후성의 손길이 그녀의 육체에 닿은 것
은.......
"흑......."
그녀는 호흡이 급해지는 것을 느끼며 바르르 전율함과 동시에 발
끝을 오무렸다. 그 순간 사나이의 육중한 체중이 그녀의 몸에 가
득히 실렸다.
어느새 하후성은 옷을 벗고 있었고 사나이의 육체는 퍼득이는 여
인의 가슴과 온 몸을 짓눌렀다.
"으... 음."
호연연은 신음이 고조됨을 억제치 못하며 미끈한 팔로 하후성의
목을 휘감았다.
하후성의 남성은 여인이 굴복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함께 그들은
오지에 들어갔다. 단 한 치의 빈 틈도 없이 두 사람의 육체는 밀
착되고 접합되었다.
활활 타오르는 육체의 불꽃, 정염(情焰)의 화신이 뜨거운 정해의
파도를 뛰어 넘고 있었다. 꽃과 나비가 서로 어울려 백 년의 공생
(共生)을 꿈꾸듯 뜨겁게 그들은 영육(靈肉)을 불태웠다.
호연연은 온 몸에 가득히 번지는 무한한 희열과 행복감에 다시금
눈물을 떨구었다.
'아아! 성랑, 성랑... 이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이제 그 누
구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아아... 성랑, 사랑합니
다.......'
밤, 뜨거운 밤이었다.
"으아... 앙......."
장원(莊園)의 또 다른 한 모퉁이, 힘찬 새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어린 아이의 울음소리가 그곳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모체에서 열 달 동안 자란 후 처음으로 세상의 광명(光明)을 접하
게 된 아기는 힘찬 울음을 터뜨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
리고 있었다.
하후성은 방문 밖에서 그 울음소리를 듣는 순간 벅찬 감동과 희열
을 느꼈다.
'드디어.......'
문이 열리며 백의를 입은 미녀가 나왔다. 그녀는 바로 백화미였
다. 그녀의 얼굴은 땀방울이 맺힌 채 흥분과 감동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어떻게 됐소? 아기는......?"
하후성이 격정을 삼키며 묻자 백화미는 생긋 웃으며 떨리는 음성
으로 말했다.
"아들이에요! 귀여운 옥동자(玉童子)를 낳았어요!"
"아들이라고? 하하핫... 아들이라고?"
하후성은 웃었다. 이 순간만은 만사의 시름을 잊으려는 듯 호탕하
게 웃고 있었다. 지난 반 년 동안 한 번도 웃지 않던 그가 처음으
로 자신의 분신(分身)인 아들의 탄생에 웃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그는 백화미에게 물었다.
"교랑은?"
"무사해요. 그녀는 지금 당신을 찾고 있어요."
하후성은 진심이 담긴 어조로 말했다.
"고맙소. 화미."
그 순간 백화미는 가슴이 뭉클함을 느꼈다.
'고맙다고? 그런데 분명 화미라고 했어. 이 분이.......'
그러나 하후성은 이미 날 듯이 방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침상으로 달려갔다. 침상 위에는 매군, 즉 매교량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호연연이 막 목욕을 끝낸 어린아
이를 품에 안아들고 있었다.
"아... 앙! 아앙......."
아기의 힘찬 울음소리에 하후성은 가슴이 찡하는 것을 느꼈다. 매
교랑이 수척해진 얼굴에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성랑, 보세요. 당신의 아기예요. 바로 당신의 분신이자 천첩
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후성은 아기를 받아 안았다. 그러자 기
이하게도 아기는 울음을 뚝 그치고는 앙징스러운 손으로 허공을
저었다.
맑은 눈을 상큼 떠 그를 쳐다보며 방글방글 웃는 아기, 정녕 귀엽
고 탐스러운 옥동자였다.
하후성은 가슴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며 아기의 터질듯 발그레한
뺨을 감싸 쥐었다.
"이 녀석, 네가... 네가 나의 아들이냐? 네... 네가?"
곧 가슴에 진한 감동의 물결이 번지자 그는 한동안 아기를 안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첫 아들을 본 아버지의 심정이 이럴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천하(天下)를 얻은 느낌이 이러할까? 한없이 마음이 넓어지는 기
분은 물론 전신이 훈훈함으로 가득 차오르는 듯했다.
이윽고 하후성은 침상으로 다가가 매교랑의 어깨를 짚더니 그녀의
창백한 뺨을 어루만지며 다정히 말했다.
"교랑, 정말 수고했소."
매교랑은 생긋 웃어 보였다.
"성랑... 기뻐요."
그녀의 맑은 눈에서 눈물이 아롱지는 것을 보며 하후성은 아기를
가슴에 지그시 안았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든 아기를 내려다보며
내심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가야, 너는 나의 분신이다. 이 하후성의 또 다른 생명이란 말이
다. 알겠느냐?'
하후성의 가슴 속에서는 일말의 희망이라는 것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생명(生命)의 탄생, 그것은 결국 또다른 운명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