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풍운아(風雲兒)
개봉(開封)은 변경(邊京)이라고도 한다.
중원의 북방지역에 위치한 도시이기에 변황민족들이 중원을 정복할 때마
다 수난을 당한 곳으로, 금(金)의 수도 노릇을 했던 치욕의 시절도 있었
다.
금의 수도였던 시절에는 변경이라고도 불리운 바가 있다.
여하한 개봉부(開封府)는 사통팔달(四通八達)한 수륙(水陸) 교통의 요지
로서, 중원에서 가장 번화하고 번잡스러운 도시로 손꼽히고 있다.
폭우 속, 관도를 따라 치달리는 마차(馬車)로 인해 길가에 흙탕물이 퉁기
어 올랐다.
표행업이란 시각을 다투는 일이기에 표국의 표차들은 매우 빠르게 치달
리기 마련이며, 표차의 행렬이 지나가면 사방에서 난리가 나기 마련이다.
새옷을 입고 걷다가 마차 바퀴에서 퉁기어 오르는 흙탕물에 옷이 더러워
지자 소리를 치는 사람도 있으며, 마차 소리에 놀라 들고 가던 물건을 떨
어뜨리는 사람도 있다.
개봉부는 활력이 있는 곳이다. 모든 사람이 부산히 움직이고 있고, 새벽
부터 깊은 밤까지 열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밤이면 야화(夜花)의 노랫소리가 거리를 덮고, 낮에는 장사꾼의 외침 소
리가 거리를 덮는다.
개봉부 한가운데 사당 비슷한 건물이 서 있다.
그 건물은 삼국지의 영웅이며, 중원 대륙의 무신(武神)으로 추앙을 받고
있는 관우(關羽)를 위한 묘였다.
일컬어 관제묘(關帝廟).
관제묘 가운데 가장 큰 관제묘가 바로 개봉부에 서 있는 관제묘이다. 개
봉부의 관제묘는 공자묘(孔子廟)에 비교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나 개봉부의 관제묘에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그 소란스러움에 안색을
찌푸릴 수밖에 없을 것이며, 도처에 주저앉아 손을 벌리고 있는 거지들에
혀를 내두를 것이다.
폭우 속, 관제묘로 접어드는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는 장대비가 뿌려짐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걷지 않았다.
우장(雨裝)이래 봤자 너른 방립(方笠) 하나에 불과한지라, 가슴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젖은 상태이다.
그는 이 곳 저 곳을 휘둘러 보다가는 처마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거지 하나를 발견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늙은 거지는 자루를 다섯 개 꿰차고 있었다.
그 앞, 이가 빠진 도자기 그릇을 앞에 놓고 있는데… 도자기 그릇 안에는
동전이 반이고, 빗물이 반이었다.
청년은 천천히 걸어 거지 앞으로 다가갔다.
거지는 누가 앞으로 다가서자, 졸던 눈을 뜨며 그를 올려다봤다.
그는 청년의 허름한 차림을 바라보며 낄낄거렸다.
"동냥을 해 주기는커녕 동냥을 받을 녀석이군."
늙은 거지는 하품을 하다가 상의를 벗는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이를 잡기 시작했다.
청년은 거지노인이 이를 잡는 솜씨를 구경하다가 말을 꺼냈다.
"바람은 아직도 빈 그릇에서 일어나는지?"
"어?"
거지의 입이 딱 벌어졌다.
그는 눈을 휘둥그래 뜬 채 청년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이 숯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순양공(純陽功)을 익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눈빛이
그리도 뜨겁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다가 말을 받았다.
"빈 그릇을 모욕하는 자, 소의(素衣)의 오묘함을 알지 못한다."
"소의는 영원히 더러워지지 않고……."
"만상(萬象)의 웅지(雄志)는 대륙(大陸)을 덮으니……."
"개방도는 사해(四海)에서 으뜸이라!"
청년의 대구가 거기에 이를 때, 노개는 포권을 취하며 청년을 바라봤다.
그의 자세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정중해지고 있었다.
"어떠한 분이기에 본방의 칠결제자(七結弟子) 이상이 사용하는 대구를…
…?"
노개는 풍화유개라 불린다.
그는 천하에서 문하제자 수가 가장 많기로 유명한 개방의 순찰당(巡察堂)
부당주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개방의 아홉 단계 품격 가운데 오결제자
지위에 올라 있었다.
방금 전, 청년이 말한 시구는 개방의 중요인물만이 아는 암호였다.
"난 방주를 만나러 온 사람이오."
"방주님을?"
"후후… 날 방주께 안내해 주시오."
"혹, 곤륜(崑崙)에서 나오신 분이 아니신지?"
"곤륜?"
청년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난 곤륜에서 태어났지. 곤륜산은 나의 고향이지.'
그는 백무영이었다.
그는 풍화유개가 묻는 말의 저의를 짐작하고 있었다.
곤륜에서 왔느냐는 말은, 관산검맹에서 왔느냐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렇지 않소."
"그럼……?"
"방주에게 전할 물건이 있어 왔소. 몹시 급박한 일이오."
"으음……."
풍화유개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폭우발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풍화유개는 백무영이 눈치 못 채는 사이에 여러 개의 신호를 보냈다.
손으로 턱을 만지는 동작이며, 그릇을 들었다가 내리는 동작이 모두 개방
의 비밀 암호이다.
얼마 후, 풍화유개는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라는 신호를 받은 것이다.
개방의 총타(總舵)는 관제묘 지하에 위치하고 있다.
개방의 분타는 천하 수백 군데에 설치되어 있으며, 개방 총타에서는 여러
가지 연락 방법을 써서 분타를 총괄지휘하고 있다.
대륙은 넓은 곳으로, 산동(山東) 사람과 광동(廣東) 사람만 만나도 말이
통하지 않아 통역이 필요할 정도이다.
그러하기에, 중원에세 거대세력을 이룩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인데개방은
누천 년에 걸쳐 방대한 조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건 개방의 이념이 많은 제자를 포용할 만하며, 천하의 어디든 거지가
없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개방제자들의 연락 방법은 신묘하고 쾌속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상태이
다.
혈의육존은 백무영에게 중원 흑백양도의 제반무공과 각대방파의 은밀한
수단까지 알려 주지 않았던가?
백무영이 배운 것 중에는 개방의 연락 방법까지 들어 있었다.
관제묘 지하에는 지상의 건축물보다도 규모가 방대한 지하 축조물이 건
립되어 있다.
백무영은 비도를 따라 지하로 접어들었다.
통로는 텅 비어 있는 듯 보이되, 도처에서 숨결이 들려 왔다.
거의 이십 보마다 개방무사들이 지켜 서 있는 것이다.
지하 십오 장 되는 곳.
이십만 제자들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는 개방주의 거처가 마련되어 있다.
일컬어 백의전(白衣殿).
그 어떤 무림방파의 종사가 이렇듯 누추한 장소에 머무르겠는가?
벽은 토벽(土壁), 흙바닥 위에는 융단이 깔리어 있지 않았다. 흙바닥에 놓
인 가구래봤자 다리가 찌그러진 탁자 하나에 불과하다. 개방을 전담하고
있는 철지신걸(鐵指神傑)은 포단을 깔고 앉아 있었다.
그는 빛이 바랜 청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아홉 개의 자루를
걸치고 있었다. 그는 개방의 품계상 구결제자(九結弟子) 위치에 올라 있
는 것이다.
그는 인상이 청수한 인물이었으며, 문사풍(文士風)의 인물이었다. 그는 개
방의 일급 암호를 아는 사람이 풍화유개와 더불어 접어든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방 안으로 접어드는 백무영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풍화유개는 철지신걸 뒤에 시립해 섰다.
방 안에는 단 세 사람이 있는 것 같지만, 백무영은 천이통(天耳通)을 써
서 적어도 열다섯 사람이 더 머물러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섯은 천장, 다섯은 지하, 다섯은 내 뒤쪽 벽 뒤에 은잠해 있다!'
텅 비어 있는 듯한 백의전은 살기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귀하는 어떠한 신분이기에 본방 사람만이 아는 일급 암호를 알고 있는
지……?"
철지신걸은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의 팔은 손목 부분까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묵강철지공력(墨强鐵指功力)이라는 내공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개방의 지휘자들은 긴급한 상황에 처해져 있었기에, 방주의 거처는
전에 비할 수 없이 삼엄한 경비망에 뒤덮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상황은 천하각지의 장로들이 모여서 비밀 회의를 하는 참
이었는데, 갑자기 백무영이 암호를 대며 불쑥 찾아온 것이다.
"방주에게 보여 드릴 물건이 있소이다."
백무영은 자신이 살기에 뒤덮여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어떠한 것을……?"
철지신걸이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방 안을 지켜보고 있는 만상십오위사
(萬象十五衛士)는 만에 하나 백무영이 암살자로 화할지 모른다는 우려심
으로 인해 혼신공력을 끌어모은 채 여차하면 암기를 쳐낼 준비를 갖췄다.
부드러운 분위기 가운데 살기가 짙어 가는 것이다.
"소생이 우연히 얻은 물건이 있소. 그것을 방주에게 전하고자 여기에 온
것이외다."
백무영의 입가에는 미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천천히 소매에서 보따리 하나를 끌렀다.
그 순간, 십오 방위에 한기가 치솟아 올랐다.
백무영이 이상한 행동을 한다면, 열다섯 군데에서 우모독침(牛毛毒針)이
퉁기어질 것이다.
철지신걸은 나서지 않고 풍화유개가 대신 보따리를 건네 받았다.
풍화유개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보따리를 끌렀다.
직후 풍화유개의 옷자락이 풍선처럼 부풀어올랐으며, 그의 무릎이 저도
모르는 사이 털썩 굽히어졌다.
"조, 조사(祖師)의 훈령(訓令)!"
그는 자지러지며 땅에 무릎을 꿇었다.
어디 그뿐이랴? 철지신걸의 뻣뻣하던 허리가 순간적으로 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보따리 안에서 나타난 물건은 한 권의 소책자, 그리고 길이가 세 치 정도
되는 죽장(竹杖)으로 마디가 열 개 되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되, 개방 사람이라면 그 물건의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십절죽부령(十節竹府令)!"
"오오, 이것은 오대조(五大祖)이신 불취신개(不醉神凱)와 더불어 개방을
떠난 물건이거늘……."
도처에서 많은 거지들이 몰려 나오며 절을 했다.
십절죽부령(十節竹府令)!
개방도라면 그것을 보는 순간, 오체투지를 해야 한다.
그것은 개방 사상 가장 위대한 무인으로 인정받은 불취신개와 더불어 사
라진 개방 최고의 신표이다.
불취신개가 개방을 이끌던 시절이야말로 개방의 전성기였다.
불취신개는 만상십오절(萬象十五節)이라는 절기의 비급과 더불어 개방팔
대용호호법을 이끌고 북방으로 떠났으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후 개방은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으며, 개방 사람들은 불취신개와
용호호법들과 더불어 사라진 실전절학들이 돌아올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살아왔다.
한데 이 날, 폭우 속에서 나타난 흑삼청년과 더불어 십절죽부령과 만상십
오절이 동시에 나타난 것이다.
개방은 규율이 엄한 방파로서, 영패(令牌)의 가치는 생사여탈권과 마찬가
지다.
백무영의 손에 십절죽부령이 있는 한 그는 개방주와 대등한, 어쩌면 개방
주보다도 뛰어난 지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백의전보다 훨씬 화려한 거처로 안내되었다.
그 곳은 개방의 귀빈을 위해 만들어진 접객소로, 개방에서 가장 화려한
서재였다. 일컬어 만상재(萬象齋).
백무영은 철지신걸과 마주 앉아 있다.
근처에 지키는 무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철지신걸은 만상십오절이 십절죽부령과 더불어 되돌아온 사실로 인해 수
십 년의 고민에서 헤어난 듯, 감루를 거듭 흘리며 옷섶을 적시고 있었다.
"불취신개의 유품이 되돌아온 이상 개방은 다시 사해를 호령할 것이외다,
태상호법(太上護法)."
"전 국외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태상호법이라는 호칭은 삼가해 주십시
오."
"아닙니다. 공자는 개방의 은인이며, 의당 개방의 태상호법이 되실 분이
십니다. 이후 개방은 태상호법이 바라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입니다."
철지신걸의 주름진 뺨은 눈물에 뒤덮였다.
개방의 태상호법은 개방의 규율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
거지가 아니어도 되며, 화려한 생활을 해도 된다.
과거 개방은 방세를 확장하기 위해 무림제일인에게 개방의 태상호법 지
위를 제수하고, 그와 더불어 무림계의 질서를 이끌어 갔던 것이다.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 해 드리겠습니다."
"구태여 저를 돕고자 하신다면, 제가 알고자 하는 일을 알려 주십시오."
"그게 어떤 일이든, 개방의 이목(耳目)을 사용한다면 모두 알아 낼 수 있
습니다."
"두 사람의 거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두 사람이라면?"
"마도제일인 함백, 그리고 백도제일인 잠풍! 두 사람의 현재 위치를 알고
싶습니다."
백무영의 눈빛은 어두침침했다.
함백과 잠풍은 십 년에 걸쳐 백도와 마도세력을 양분해 다스려 온 절대
자들이 아니던가?
그들의 신변사항은 늘 비밀에 휘감기어 있다.
백무영이 개방에 직접 들린 이유는, 거처를 자세하게 알아 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천하쌍천(天下雙天)의 거처는 반년 간 미궁에 빠져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도 최근 그들의 거처를 알아 내고자 무수한 제자들을 강호에 퍼
뜨린 바 있습니다."
"미궁이라면?"
"함백은 원단(元旦)에 모습을 나타낸 이후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현재 연환검맹의 대권(大權)은 사륵(邪勒)에게 장악되어 있습니다."
"사륵……."
백무영이 어찌 사륵을 잊겠는가?
사륵은 신풍도(神風島)의 후예로, 백무영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 모욕을
준 자이다. 또한 그의 가문은 과거 백가를 붕괴시킨 장본인이라 할 수 있
다.
그가 당세의 마도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다는 건 특기할 만한 사실이
다.
함백은 사륵을 신임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이해 사륵이 함백의 후계자로
올라섰단 말인가?
"사륵은 산호부인과 더불어 마도를 다스리고 있습니다."
"산호부인?"
백무영은 뒷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이 된다.
산호부인, 그녀는 함백에 의해 강제로 백무영에게 던져진 비극의 여인이
다.
그녀가 무림대세에 정면으로 나타났다는 건 상상 밖의 일이었다.
"사륵이 올해 안에 백도를 붕괴시키겠다고 천명했기에, 백도는 폭풍전야
의 위기에 사로잡힌 상황입니다. 그로 인하여 연환마교가 위치한 옥천산
(玉泉山)에 무수한 첩자를 보내었는 바, 불행히도 한 사람도 살아오지 못
했습니다. 옥천산은 봉파(封派)된 상황이며, 그 안에서 어떠한 일이 벌어
지고 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마도의 정세는 반년 사이, 판이하게 달라졌다.
함백은 과거의 인물처럼 물러났으며, 사륵이 함백의 후계자로 정면에 나
타났다.
그는 마교의 창업공신들을 대거 제압하고 자신의 측근인사를 마교의 요
직에 심어 두었다.
또한 그는 운남대리국(雲南大理國)의 거두였던 환영대제(幻影大帝)의 유
산을 군자금으로 활용하여, 무수한 해외거마(海外巨魔)들을 자신의 휘하
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사륵의 휘하세력은 이십만여에 육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도에서 주
시하는 자는 역시 함백. 그가 왜 이십 년의 대결전이 다가서는 이 때에
무림계의 일선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
니다."
"……."
백무영은 눈길을 내리뜨고 있었다. 그는 한 사람의 눈빛을 기억해 냈다.
전 무림을 조롱해 온 자, 그리고 자신의 일 검을 유유히 막아 버린 진정
한 무림의 절대자.
그의 눈빛은 고독하고 오만했었다. 솔직히 함백의 인간적 매력은 누구든
빨아들일 수 있다. 만에 하나, 백치부인의 일만 없었더라면 백무영은 함
백을 정신적인 대부로 여기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그를 안다. 그는 쉽게 물러날 인물이 아니다. 그는 사륵 따위에게
당할 자가 아니다.'
백무영은 함백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백무영의 가문은 함백과 더불어 이대(二代)에 걸친 싸움을 하고
있다.
'함백, 그대는 날 기다려야 한다. 나를 피해 무림계를 떠나서는 아니 된
다.'
백무영은 살기를 안으로 깊이 갈무리했다. 그 때, 철지신걸이 그의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했다.
"백도의 잠풍 또한 오리무중(五里霧中) 상태. 하나 그는 종이 호랑이나
마찬가지이며, 보름 안에 그는 제거됩니다. 솔직히 개방은 그를 제거하는
일에 동참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잠풍을 제거한다면?"
"대명무문(大明武門)을 아십니까?"
"아오!"
백무영의 눈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는 잠풍이 알게 모르게 대명무문이 세력을 넓히는 것을 허용해 주고
있으며, 대명무문을 이용해 자신을 위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증인이다.
한데, 다시 대명무문을 주축으로 한 잠풍의 제거극이 벌어지려 한단 말인
가?
"며칠 안으로 대명무문 쪽 사자(使者)가 당도할 것입니다. 저는 그를 기
다리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태상호법께서 혹 곤륜에서 온 사람이
아닌가 생각했던 것이지요."
"잠풍을 제거하는 데 주축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건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본방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한 분의 노선
배께서 제게 사적으로 밀지를 보내 대명무문의 일에 동참하라 지시하셨
기에……."
"노선배라면?"
"개방을 돕다가 소림에서 파문당하신 대환선사(大幻禪師)께서 바로 그분
이십니다. 그분은 소림에 들기 전, 저의 사형이기도 하셨습니다."
"대환선사!"
백무영의 눈빛이 파랗게 타올랐다. 그는 철지신걸 모르게 손을 불끈 쥐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이제 여섯 사부의 마지막 한 사람을 알아 낸 것이다. 과거
낚시꾼으로 가장하여 그에게 무공이며 강호계의 풍속에 대해 소상히 알
려 준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이사부. 백무영은 그의 정체를 알아 내고자 노력한 바 있다.
그가 바로 대환선사였던 것이다.
대환선사는 소림에 입문하기 전, 개방의 제자였다. 그는 철지신걸의 사형
이었는 바, 장문인이 되는 걸 피하기 위해 소림에 입문한 특이한 인물이
다.
그가 개방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개방의 위세는 보다 강성해 졌으리
라.
백무영은 살기를 애써 억누르고 있었다.
관산검협(關山劍俠) 잠풍(潛風),
대환선사(大幻禪師),
묘수환랑(妙手幻娘) 소아후(蘇阿后),
천금신수(千金神手) 만박(萬博),
흑야홍(黑夜紅),
철객(鐵客).
위의 여섯 명이 바로 백비룡을 암살하고 백가(白家)의 평화를 깨뜨린 장
본인들이다.
그들은 백비룡을 암습하고 소수미랑의 가슴에서 무영을 납치한 걸 참회
하며, 무영을 백도의 소종사로 기르는데 이십 년을 쓴 사람들이다.
그들이 참회하고 어떠한 노력을 하였든, 백무영으로서는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로 인해 백비룡은 극천단 아래로 떨어져 내렸고, 소수미랑은 미친 채
함백에게 잡혀 갔고, 백무영은 무림에서 가장 고독한 무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절대… 용서할 수 없소.'
백무영은 장소(長嘯)가 터져 나오는 걸 애써 참았다.
대환선사는 잠풍과 더불어 배후 조종인물. 그런데 그가 개방주에게 명해
잠풍의 제거를 명하다니……?
설마, 잠풍을 비롯한 혈의육존(血衣六尊) 사이에 내분이 벌어진 것일까?
아니라면 그들이 또다시 장계취계를 쓰고 있는 것일까?
혈의육존은 거의 팔 개월 간 무림계에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풍대협은 백도의 영도자. 그런데 그를 제거하는데 동조해야 한다는 게
괴로울 뿐입니다."
철지신걸은 통한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백무영에게 어떤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백무영은 개방 최고의 배분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가 명한다면, 개방과 대명무문의 연합은 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백무영은 묵묵히 있다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잠풍의 제거 계획은?"
"자세한 건 모르되, 건곤일척(乾坤一尺)의 승부를 내자는 게 대명무문 쪽
의 계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건곤일척이라면?"
"대세는 잠풍에게서도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백도를 이끌고 있는 한,
백도의 대권은 그가 지지하는 연검천(燕劍天)에게로 돌아갈 겁니다."
연검천, 그는 사륵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가 백도를 장악한다면, 연환마교와 더불어 관산검맹을 무혈정복(無血征
服)하는 게 될 것이다.
"대명무문은 이번 기회에 잠풍을 하야시키고, 연검천의 세력을 격파하려
고 하는 듯합니다. 그 계획은 천지벽력(天地霹靂)이라 불리우며, 보름 안
에 개시될 겁니다. 다른 변화가 없다면, 개방도 그 일에 참가하게 될 겁
니다. 그렇게 된다면 백도의 영도권은 대명무문에게 돌아갈 겁니다."
백무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혈의육존의 병법에 대해 불을 보듯 환하게 알고 있다.
그들은 대명무문을 이용하여 백도의 영도권을 진정한 백도대협들에게 주
고자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진정한 협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기에, 백도가 이제까지 마도에 정복당하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나, 그들로 인해 가문이 붕괴된 원한을 어찌 잊어버리겠는가?
백무영은 철지신걸의 기대 어린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개방과 대명무문의 연결에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하지 않았
다.
솔직히 백무영은 대세를 장악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다하는 것으로, 무림계에서의 일을 마칠 작정을 하
고 있는 것이다.
방 안 가득 다향(茶香)이 감돈다.
대화가 심각했는지라 두 사람 모두 찻잔을 비울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찻잔에서 다향이 짙게 피어 올라 방 안 공기를 맑게 물들인 것이다.
'그들은 처절히 죽어 가야 한다. 그것이 인과응보이다. 그들은 내 손에
죽어야 한다. 난 그들에게 철저히 조롱당해 왔다. 이제 그들에게 피빚을
갚아 줄 때다. 그들은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려 죽어 가야만 한다.'
백무영은 냉담한 눈길을 흘릴 뿐이었다.
그는 철지신걸에게 스물다섯 권의 비급을 주었고, 그것을 정해진 장소에
전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비급은 그가 기록한 것으로, 빙하지곡에서 우연히 얻게 된 백도의 절전비
학들이었다.
그는 변황에서 중원으로 돌아오는 가운데, 머릿속에 암기하고 있던 구결
을 적어 소책자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천하백도에 전하는 것으로 자신이 할 일을 다했다 여기는
것이다.
"천지개벽은 축융곡(祝融谷)에서 벌어질 것이라는 풍문이 있으되, 자세한
건 알지 못합니다."
"축융곡!"
"그 곳에서 백도의 위선자들이 척살될 것입니다. 자세한 것은 대명무문
쪽의 사자가 와야 알 것입니다."
말을 하는 쪽은 철지신걸, 백무영은 쭉 듣기만 했다.
'참 고요한 기도이다.'
철지신걸은 수많은 사람을 알고 있으되, 눈앞에 앉아 있는 신비청년처럼
단아한 기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지 못한다.
백무영은 바람에 휘말려도 흔들리지 않을 거목(巨木)의 기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칙칙한 눈빛.
거리에서 얼핏 지나친다면 별 느낌 없이 스쳐 보낼 인상이다.
하나 그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바라본다면, 영원히 잊지 못할 인상을 간직
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가슴 깊이 파고드는 무엇인가가 있
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특별히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백무영은 세 시진 정도 철지신걸과 이야기를 나눈 다음에, 비밀 통로를
통해 관제묘를 벗어났다.
철지신걸은 친히 나와 십 리 밖까지 배웅하고자 하였으나, 백무영이 이를
사양했다.
여전히 비가 퍼붓고 있다.
뇌전(雷電), 그리고 장대의 폭우 가운데 밤이 다가서고 있었다.
백무영은 죽립 끝에 손을 댄 다음, 죽립을 밑으로 끌어내렸다. 죽립의 테
두리를 타고 빗물이 떨어져 내린다. 거리는 짙은 물안개에 휘어 감기고
있었다.
백무영은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폭우에 잠긴 거리에는 인적이 별로 없
었다.
얼마를 갔을까?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사두마차를 모는 어자(馭者 : 마부)는 방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마차의 창문은 주렴에 감추어지고 있는 바, 하이얀 손이 주렴을 살짝 들
치고 있었다.
빠끔히 열린 주렴 틈바구니를 통해 맑은 눈빛이 흘러 나왔다.
백무영은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비켜 주었다.
두두두-!
요란히 치달리는 마차, 극처의 적요(寂寥)가 말발굽 소리에 산산이 깨어
져 버리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외침 소리가 들려 왔다.
"마차를 멈춰요!"
"어엇?"
마부는 흠칫 놀라며 말고삐를 낚아챘다.
네 마리 말이 앞발을 쳐들며 멈추어 서기도 전에 차상(車廂)의 문이 활짝
열리며 흰 옷 입은 여인이 폭우의 길가로 떨어져 내렸다.
"그 자닷!"
분노에 겨운 목소리.
얼굴을 두꺼운 면사로 가린 여인은 손에 냉옥보검(冷玉寶劍)을 쥐고 있었
다.
면사를 태울 듯한 눈빛이 흘러 나왔다.
그녀는 백무영이 서 있던 곳으로 미끄러져 나가는데, 몸이 나아가는 수법
은 암향표(暗香飄)였다.
"분명 그 자였는데… 빠드득! 난 그 자가 죽어 재로 화했다 하더라도 알
아볼 수 있다. 분명… 냉혈살흔(冷血煞痕)이었다."
백의여인의 뺨을 타고 뜨거운 빗물이 흘러내렸다.
그건 빗물이 아니라, 눈물이었다.
백무영이 서 있던 곳은 텅 비어 있었다.
길가의 잣나무 꼭대기, 백무영은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었으며…
모공에서부터 피어 오른 자욱한 회색 안개가 물안개와 뒤섞이며 그의 모
습을 감추어 주었다.
'오랜만에 만나는군!'
백무영은 근처를 뒤지고 다니는 백의여인의 뒷모습을 보며 감회에 사로
잡혔다.
그녀는 바로 냉약빙(冷若氷)이었다.
백무영에게는 첫 여인, 그리고 그녀에게 백무영은 첫 남자이자 마지막 남
자였다.
비가 더욱 심하게 뿌려졌다.
백무영은 냉약빙 앞으로 나서지 않고 조용히 몸을 날렸다.
'가자, 저 여인은 나와 인연이 없는 여인이었다. 모든 건 어두운 밤의 악
몽(惡夢)이었다. 잊어야 할 악연(惡緣)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부디 날 잊
기 바라오, 불행한 여인.'
백무영은 부광약영술(浮光躍影術)을 써서 폭우 속으로 사라져 갔다.
'이제부터 처형(處刑)을 시작해야 한다. 가장 처절한 보복을 가해야 한
다.'
냉약빙은 오랫동안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더욱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호위무사들이 다가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눈물을 거둘 줄 몰랐다.
'살아 있다면… 다시 만나겠지.'
냉약빙은 핼쓱해 보였다.
그녀는 달포 전 엄청난 고통 가운데 한 생명을 세상에 내보냈던 것이다.
백무영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감히 냉약빙 앞을 떠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