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四章 大尾之章
콰쾅!
꽝!
돌연 커다란 폭음과 함께 두 마디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크윽!”
허겁지겁 앞을 쳐다보던 중인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다랗게 부릅떠졌다.
안괴홍은 등짝이 완전히 걸레가 된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고, 그 조금 옆에는 천기무영이 역시 가슴이 너덜너덜해진 채 입에서 피를 콸콸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제서용이 음침한 얼굴로 제갈추를 쳐다보고 있었다.
중인들은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난데없이 천기무영이 안괴홍을 공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제서용은 또 천기무영을 공격한 것이다.
사형제지간에 서로 공격을 하다니,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행동이었다.
중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제서용이 천기무영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전 잔뜩 놀란 얼굴로 뒤로 물러날 때와는 달리 이미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흐흐흐, 내 진작부터 조심을 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군.”
한데 그가 말을 하며 고개를 쳐드는 순간,
쉬아악!
여태껏 묵묵히 있던 철군악이 갑자기 그를 향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번쩍!
거무튀튀한 무적인에서 시퍼런 검기가 쭈욱 일어나 제서용의 전신을 난자해 들어갔다.
“엇?”
제서용은 너무도 놀라 미처 철군악을 상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얼른 뒤로 몸을 빼냈다. 하나,
쓰악!
그의 동작이 조금 늦었는지 입고 있던 장포의 한쪽이 검기에 의해 싹둑 잘려져 나갔다.
“헉!”
제서용은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라 허겁지겁 뒤로 몸을 빼냈다. 순간,
스윽!
그의 모습이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엇?”
중인들은 너무도 놀라 입을 쩍 벌렸다.
귀신이 아닌 다음에야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도 급작스럽게 모습을 감출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철군악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란 얼굴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철군악은 이미 제서용이 정교한 기관(機關)을 사용해 모습을 감춘 것을 간파한 것이다.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제서용이 사라진 쪽으로 몸을 날리려 했다. 한데 바로 그때,
“구, 군악아……”
돌연 아주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와 철군악의 행동을 막는 것이 아닌가!
순간적으로 철군악의 얼굴이 기괴하게 굳어졌다.
그는 얼른 목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피비다 위에 천기무영이 숨을 헐떡이며 누워 있었고 그 옆에서는 제갈추와 모비룡이 안타까운 얼굴로 죽어 가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철군악이 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쳐다보자 천기무영이 천천히 복면을 벗었다. 순간,
“아니……”
“이럴 수가!”
중인들의 입에서 커다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천기무영, 그는 바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던 동천립이 아닌가!
성미 급한 왕충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동천립은 잠시 중인들을 둘러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주, 죽은 것으로 위…… 장한 것은 어쩔 수 없…… 는 일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서, 성검문을 돕는 척해서 잠…… 시나마 사부의 신임을 얻어 이때를 대…… 비하려고 그랬던 것이니…… 쿨룩, 쿨룩!”
그는 말을 하다 말고 미친 듯이 피를 게워 내기 시작했다.
제갈추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말하지 말게.”
하나 동천립은 피를 토해 내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이제 주, 죽는 마당에…… 무엇이 더 힘들겠는가?”
동천립은 잠시 숨을 헐떡이더니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그…… 제서용을 쫓아갈 피, 필요 없다. 조금 있으면 모든…… 기관의 작동이 머, 멈출 테니 그때 움직이면 된다.”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손을 꽉 잡았다.
동천립은 잠시 철군악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다시 눈을 제갈추에게 돌렸다.
“천기무영이 나라는 걸 어, 언제부터 알았나?”
“조금 전 자네를 보았을 때……”
“어떻게?”
제갈추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친구의 눈빛을 보고도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찌 친구라 말할 수 있겠나?”
핏기 잃은 동천립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하…… 그렇지, 우린 친구지……”
동천립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한참을 웃더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네…… 처음 삼성의 음모를 바, 밝힌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나?”
제갈추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바로 자네 아닌가?”
“그렇지…… 바로 나일세. 후후후…… 처음 서문륭이라는 거, 거목(巨木)의 제자가 되…… 었을 때 나는 정말 가슴이 뛰, 뛰었었네. 누구라도 그렇겠지, 천…… 하제일인을 사부로 두, 둔다면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게야…… 나는 자네들을 놀래 주…… 려고 처음에는 사부가 누구인지 마, 말도 하지 않았지. 하나 그토록 자랑스럽게 생…… 각하던 사부가 바로 군자의 탈을 쓴 아, 악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심정이 어땠는가 상상할 수 있겠나?”
제갈추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나는 정말 미칠 것만 같…… 았지만, 운명은 내게 한 가지만을 선…… 택할 수 있는 권한밖에 주지 않았네. 하나 나는 수많은 바, 밤을 고뇌로 지새운 끝에 내가 조금 힘…… 들더라도 친구와 사부 모두를 위해 노력하기로 새, 생각을 정리했네. 하나……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어. 으…… 쿨룩! 쿨룩!”
동천립은 말을 하다 말고 다시 한 사발의 피를 토해 냈다.
제갈추의 얼굴 가득 슬픈 빛이 어렸다.
“그만 하게…… 이제 됐으니 우선 안정을 취하게.”
하나 동천립은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이제 시간이 어, 얼마 남지 않았어. 나는 죽기 전에 이 말…… 을 꼭 하고 싶었네.”
동천립은 잠시 숨을 할딱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최…… 선을 다했네. 그렇지만 야, 양쪽을 위한 것이라고 생…… 각한 것이 결국은 모두를 파멸의 길로 이…… 끌고 말았네. 하나 이 한 가지만은 부, 분명히 말하고 싶네. 그것은 바로 내가 세…… 상에서 가장 좋아했고 사랑했던 사람은 바로 자네들…… 우공(愚空), 단소, 그리고 비룡이라는 것 말…… 일세.”
동천립은 매우 힘이 드는지 거칠게 숨을 내뱉더니 최후의 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모든 고수들에게 사, 산공독(散功毒)과 수(水)…… 은(銀)을 투여…… 이제 기관이 작동하면 그들의 히, 힘은 모두 없어질 것…… 단소가 저 멀…… 리서 나를 부르고 이, 있……”
동천립은 말을 하다 말고 끝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천립……!”
제갈추와 모비룡은 끝내 오열을 참지 못하고 커다랗게 통곡하기 시작했다.
중인들의 얼굴에도 숙연한 빛이 가득 어렸다.
동천립은 목숨보다 사랑하는 친구들에게도 차마 고백하지 못하는 고충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야 했다.
남보다 마음이 여리고 내성적이던 그가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니 제갈추와 모비룡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해 도저히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끼익!
뭔가 기괴한 마찰음 같은 것이 들리더니 지축이 미미하게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우르르릉!
쿠르르르……
동천립이 말한 대로 성검문의 모든 기관이 작동을 멈추는 소리였다.
한데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웅웅거리던 진동음이 거의 멈출 때쯤 되자 갑자기 장내의 상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일……”
“으아, 내공이 모이질 않는다!”
죽어라 하고 대정회의 고수들을 공격하던 성검문과 제마궁의 고수들이 돌연 힘을 쓰지 못하고 맥없이 나자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역시 동천립이 말한 대로 산공독과 수은이 발작해 내공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콰쾅!
서걱!
“으아아……”
“꽤액!”
이제 죽어 나가는 것은 성검문과 제마궁의 고수들뿐이었다.
그것을 보자 냉좌기가 제갈추를 대신해 얼른 앞으로 나섰다.
“철 공자! 이쪽은 우리에게 맡기고 얼른 수괴(首魁)들을 찾아보게.”
철군악은 그제서야 생각난 게 있는 듯 눈을 번뜩이며 얼른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휘익!
그의 모습은 금세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스윽!
철군악은 주위를 샅샅이 살피며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과연 동천립의 말대로 모든 기관이 정지한 탓인지 움직이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었고 매복도 보이질 않았다.
철군악이 눈에 불을 켜고 제서용을 찾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제서용에게 꼭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갚아야 할 빚.
그것은 바로 철군악이 이루어야 할 가장 큰 목표이기도 했다.
철단소는 죽으면서 분명히 말했었다.
마지막에 나타나 자신을 이렇게 만든 무시무시한 고수는 바로 서문륭의 대제자(大弟子)라고.
철군악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했던 사람의 팔을 자르고 배를 갈라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자가 바로 제서용인 것이다.
철군악은 촌각이라도 더 빨리 제서용을 찾아 빚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결코 조급히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천천히 주위를 살피며 움직일 따름이었다.
철군악은 설령 자신이 싫다 하더라도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모든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던 철군악의 눈에 돌연 이채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
그의 바로 앞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 나직한 신음 소리가 들려 온 것이다.
철군악은 공력을 끌어올리고 다시 귀를 기울여 보았다.
“으……”
아주 미약하지만 사람의 신음 소리가 분명했다.
철군악은 공력을 잔뜩 모은 채 천천히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뭐라고? 도화선이 모자라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남궁룡은 황당한 얼굴로 앞을 쳐다보았다.
그의 아들이자 남궁세가의 현가주인 남궁해(南宮海)가 조심스런 얼굴로 대꾸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화약을 설치하는 데 쓰이는 도화선이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근 두 배 가량 더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지금 이 시점에 도화선이 모자라면 어떻게 하자는 것이냐? 특별히 중요한 곳이 아니면 그냥 이대로 일을 추진하거라.”
남궁해가 머뭇거리며 다시 대답했다.
“저…… 가장 중요한 중앙 암반 부분에 쓰일 도화선이 모자라기 때문에……”
“모자란 놈!”
남궁룡은 화가 벌컥 치밀어 올랐다.
수백 년 전통의 남궁세가를 이끌어 나가야 할 가주가 저렇게도 결단력이 없고 숫기가 부족해서야 도대체 어디에 써먹는단 말인가.
만약 남궁해가 손자인 남궁욱의 절반만 따라갔어도 그가 이처럼 복수를 한다고 난리를 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남궁룡은 억지로 화를 삭이며 남궁해를 노려보았다.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저…… 하인 중에 조인모라고 제법 일을 잘하는 놈이 있는데 그가 마침 약간의 도화선을 산기슭에 준비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어서 그놈을 보내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는 게냐?”
“예…… 알겠습니다, 아버님!”
남궁룡은 총총히 사라지는 남궁해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혀를 끌끌 찼다.
잔뜩 찌푸린 그의 얼굴에는 못내 남궁해를 못 미더워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라 있었다.
* * *
건물 안은 조금 어두웠다.
철군악은 눈을 빛내며 도대체 어디서 신음 소리가 들려 오나 살펴보았다.
“흐으……”
과연 저쪽 구석에서 아주 미약하나마 신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철군악은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조심스레 신음이 들려 온 곳을 살펴보던 철군악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뻥 뚫린 채 핏기 없는 얼굴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인물.
바로 학초명이 아니던가.
그는 옆에 반드시 누워 있는 아름다운 여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약혼녀인 것 같았다.
철군악은 탄식했다.
여인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듯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 있었고 학초명 또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철군악은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자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궁금했다.
“학() 형(兄)! 나를 알아볼 수 있겠소?”
철군악의 나직한 목소리에 거의 감길락말락 하던 학초명의 눈이 슬며시 떠졌다.
동시에 침침한 그의 눈에 반가운 빛이 가득 떠올랐다.
하나 학초명은 입을 열지는 못했다.
대답할 힘이 전혀 남아 있는 것 같지 같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
철군악의 물음에 학초명은 그저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평온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여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일순 복잡한 감정의 빛이 떠올랐다.
지극히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서릿빛.
그것은 여인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누군가에 대한 사무친 증오의 감정이었다.
학초명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철군악을 쳐다보며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으으……”
하나 그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철군악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그의 입 안을 살펴보았다. 순간,
“……!”
철군악의 눈에서 시퍼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학초명은 기운이 없어서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누군가가 그의 혀를 잘랐기 때문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어찌 이처럼 잔인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철군악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학초명을 쳐다보았다.
“누가 이랬소?”
하나 학초명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뭔가를 그려 보이려 했다.
“으, 으……”
학초명은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두 눈으로 뭔가를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간절한 눈빛…… 애달프도록 처량한 표정.
철군악은 그의 경황없는 듯한 태도와 흔들리는 두 눈을 보자 뭔가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막 몸을 일으켰을 때,
“으하하하하!”
누군가 아주 통쾌하게 웃어대는 소리가 마치 환청처럼 들려 왔다.
순간, 철군악은 여태껏 한 번도 펼치지 않았던 궁신폭장(弓身暴張)의 신법을 전력으로 펼쳐 냈다. 그와 동시에,
번쩍!
느닷없이 그가 있던 곳으로부터 눈을 멀게 하는 섬광(閃光)이 피어오르며 천번지복(天飜地覆)의 굉음이 함께 터져 나왔다.
꽈꽈꽈꽈꽝……
조금 전까지 철군악과 학초명이 있던 건물이 마치 종이쪽지처럼 터져 나가며 주위가 지진을 만난 것처럼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온 세상이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이내 바람이 멎고 사방으로 날아다니던 돌멩이며 먼지가 가라앉자 장내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났다.
건물이 있었다고 짐작되는 곳에는 커다란 웅덩이가 움푹 파인 채 매캐한 화약 냄새만 유령처럼 주위를 떠돌고 있을 뿐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물론 철군악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는 너무도 엄청난 폭발의 여력을 견디지 못하고 폭사(爆死)했는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쪽에 숨어서 한참 동안 그쪽을 살펴보던 제서용이 드디어 구덩이 앞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크하하핫…… 철군악 네놈도 화기(火器)에는 어쩔 수 없나 보구나!”
그는 커다란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만만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철군악은커녕 쥐새끼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서용은 음침한 얼굴로 다시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학초명과 그의 약혼녀였던 강은연을 미끼삼아 철군악을 꾄 자신의 계책이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더 이상 강은연과 즐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제서용은 그리 욕심 사나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철군악을 없앤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크흐흐…… 나를 적으로 삼은 것이 네놈의 가장 큰 불행이니라!”
제서용은 음침한 얼굴로 구덩이를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제서용!”
느닷없이 들려 온 고함 소리에 제서용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순간,
“억!”
제서용은 너무도 놀라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철군악이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구덩이 뒤쪽에 있는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제서용은 앞뒤 가릴 틈도 없이 얼른 몸을 내뺐다.
휘익!
동작이 어찌나 빠르던지 그의 모습은 실로 눈 깜짝할 새에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제서용은 좋은 노리갯감을 희생하고도 철군악을 없애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인지 도망가는 와중에서도 이를 악물며 고함을 질러댔다.
“이놈, 다음에 보자!”
한데 그때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스윽!
무려 이십 장(丈) 이상 떨어져 있던 철군악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제서용의 코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으악!”
제서용은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설마 철군악이 전설의 신법인 궁신폭장(弓身暴張)을 익혔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지 시꺼멓게 변한 얼굴로 얼른 검을 치켜 들었다.
쾌애액!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의 검이 벼락치듯 철군악의 몸뚱어리를 베어 갔다.
하나 그가 천하최고의 검예라 생각하고 있는 능형검법(凌形劒法)으로도 철군악의 솜털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피윳!
철군악의 검으로부터 느닷없이 희뿌연 검기가 쏘아져 나온 순간.
“크아악!”
제서용은 뭔가가 자신의 팔을 가르고 지나가는 느낌에 목청껏 비명을 질러댔다.
“으…… 이놈!”
제서용은 잘려진 왼쪽 팔을 부여잡은 채 잔뜩 일그러진 눈으로 철군악을 쏘아보았다.
하나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단 한 마디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왼발은 혀를 잘린 학 형을 대신해 내가 당신에게 주는 선물이오.”
철군악은 말과 함께 다시 검을 슬쩍 그었다.
파아……
제서용은 아지랑이처럼 뭔가 희뿌연 것이 자신의 왼발로 쏘아져 온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력을 다해 그것을 피하려 했지만 몸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케엑!”
제서용은 돼지 멱따는 비명을 토해 내며 제멋대로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콰당탕!
하나 그는 이를 악물며 얼른 몸을 일으켰다.
왼발이 무릎부터 잘려 나가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지만 그는 아직도 기가 죽은 표정이 아니었다.
“이노`─`옴!”
제서용은 가슴이 터질 듯한 분노를 느끼며 남은 한 발로 몸을 지탱한 채 남은 한 팔로는 능형검법의 최절초인 초심제우(超心制宇)를 펼쳐 냈다. 순간,
키이이익……
인간이 펼쳤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기괴하고도 어마어마한 검기가 마치 폭풍우처럼 철군악을 향해 몰려가기 시작했다.
하나 그가 펼친 검법이 채 반도 펼쳐지기 전에 철군악의 무심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오른팔은 내 사형(師兄)의 선물이오.”
그리고 다시 악마 같은 희뿌연 검기가 허공 가득 피어나더니 그의 오른팔로 쏘아져 왔다.
피이잉……
“안 돼……”
제서용은 비명을 토해 내며 있는 힘껏 뒤로 물러났지만 희뿌연 검기는 여지없이 그의 남은 한 팔을 자르고 지나갔다.
서걱!
뭔가 잘려지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허공 가득 울려 퍼졌다.
“크아악!”
비틀비틀!
제서용은 쓰러질 듯 쓰러질 듯했지만 용케 한 발로 중심을 잡고 있었다.
“흐……”
몸뚱어리는 피로 목욕을 한 듯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윤기가 좔좔 흐르던 머리는 완전히 헝클어진 채 푸석푸석하게 변해 있었다.
또한 독기를 품고 철군악을 노려보던 두 눈에는 애원의 빛이 가득 어려 있었다.
“제, 제발……”
겨우 고개를 쳐들고 철군악을 쳐다보는 제서용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까지 보여 주었던 자신만만하고 거만한 표정은 조금도 볼 수 없었다.
단지 애원의 빛이 가득할 뿐이었다.
하나 철군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검을 추켜세웠다.
“으……”
철군악은 마구 떨리는 제서용의 두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검을 내리 그었다.
파아……
아지랑이 같은 우윳빛 검기가 피어나며 눈 깜짝할 새에 제서용의 전신을 가르고 지나갔다.
“크윽!”
사지가 거의 잘리고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던 제서용은 억눌린 신음과 함께 결국 차가운 땅바닥에 몸뚱어리를 누이고 말았다.
털썩!
철군악은 제서용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사지가 잘리고 복부가 쩌억 갈라진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모습이 매우 처참해 보였지만 철군악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는 묵묵히 제서용의 시체를 내려다보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건 그 동안 당신에게 고통 받았던 모든 사람들이 주는 선물이오.”
철군악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한데 바로 그때였다.
“젊은 사람이 너무 잔인하군.”
난데없이 차가운 음성이 철군악의 고막을 파고드는 것이 아닌가.
철군악은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각각 도(刀)와 검(劒)을 허리에 찬 두 명의 중년인이 쏘는 듯한 눈으로 철군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이 어찌나 강렬하던지 철군악은 피부가 다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한데 그들을 쳐다보던 철군악의 얼굴에 돌연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검을 찬 중년인은 바로 얼마 전에 주점에서 시비를 걸던 인물이 아닌가!
그 또한 철군악을 알아보았는지 얼굴이 기괴하게 변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도를 찬 중년인이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보군.”
그는 매우 화가 났는지 잔뜩 굳은 얼굴로 천천히 철군악에게 다가왔다.
일순 철군악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상대는 분명히 그의 정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대는 전혀 철군악을 두려워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둘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었다.
상대가 바보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있다는 증거였다.
철군악은 눈을 들어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가 난생처음 보는 강렬한 도기(刀氣)를 뿜어내는 것으로 보아 절대 바보는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요?”
순간 도를 찬 중년인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자네는 우리가 누군지 모른단 말인가?”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도를 찬 중년인은 한광(寒光)이 감도는 눈으로 철군악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자네가 몰살시킨 십존(十尊)의 나머지 둘일세.”
철군악은 그제서야 상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성검문의 실질적인 최고수인 생사도(生死刀)와 빙마검(氷魔劒)이 드디어 철군악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철군악은 생사도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서문륭은 어디 있소?”
그러자 빙마검이 씨근덕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어린놈이 정녕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빙마검은 애초부터 철군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검의 손잡이를 잡아 갔다.
하나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생사도가 그를 제지한 것이다.
“임(林) 형(兄)은 잠시 참게.”
생사도는 침착한 표정으로 빙마검을 만류한 후 이내 철군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리들을 이기면 자네는 싫어도 문주(門主)를 만나게 될 걸세. 또 물어 볼 게 있나?”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말이 필요 없었다.
이제는 단지 생사의 갈림길만이 그들 세 사람의 앞에 놓여 있을 뿐이다.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싫어도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생사도는 철군악을 노려보며 천천히 도를 가슴 앞으로 세웠다.
동시에 빙마검 또한 검을 들고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쓰으으으……
생사도와 빙마검은 단지 무기를 들고 서 있을 뿐이었지만 실로 어마어마한 검기와 도기가 철군악을 향해 물밀듯이 몰려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하던지 철군악은 순간적으로 숨이 탁 막히는 것을 느꼈다.
하나 그는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상대를 노려보더니 어느 순간 번개처럼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
슬쩍 휘둘러진 검에서 비늘 모양의 시퍼런 검기가 마구 휘몰아쳐 나와 생사도와 빙마검에게로 몰려갔다. 순간,
“차압!”
“이야압!”
생사도와 빙마검이 기다렸다는 듯이 좌우로 쫘악 갈라지며 재빨리 병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생사도는 악마의 도법이라는 생사도법(生死刀法)을, 빙마검은 고금십대검법의 하나인 빙염탄사검법(氷焰彈邪劒法)을 전력으로 펼쳐 냈다.
양쪽이 전력으로 펼쳐 낸 공세는 허공에서 환상적인 파랑을 일으키며 곧바로 정면충돌했다.
꽈꽈꽝!
커다란 폭음과 함께 철군악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주춤 물러났다. 순간,
빙마검이 두 눈을 번뜩이며 철군악에게 달려들었다.
“뒈져랏!”
하나 그의 검식(劒式)이 채 반도 펼쳐지기 전에 철군악이 앞으로 슬쩍 움직이며 기이하게 검을 휘둘렀다.
피윳!
철군악의 검에서 희뿌연 검기가 피어나더니 빙마검이 펼친 검식을 간단히 와해시키며 계속해서 그를 향해 빠르게 쏘아져 갔다.
철군악은 상대가 강적임을 알자 주저하지 않고 처음부터 무극칠절을 펼친 것이다.
“으헉!”
빙마검은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 얼른 뒤로 물러났으나 희뿌연 검기는 여전히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다가왔다.
위기의 순간,
“생사일도(生死一刀)!”
동료의 위기를 본 생사도가 눈을 번뜩이며 도를 기이한 각도로 쳐냈다. 그러자,
기이잉……
엄청난 도풍(刀風)과 함께 그의 도가 마구 회전하며 철군악의 목덜미로 쏘아져 왔다.
그 기세가 어찌나 무시무시하던지 만약 그의 도에 걸리면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라 해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하나 철군악은 검을 거둘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는 뒤에서 무시무시하게 회전하며 다가오는 도는 무시한 채 두 눈을 번뜩이며 빙마검을 향해 더욱 더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파아……
초동생멸(初動生滅)의 검기가 수유단혼(須臾斷魂)의 쾌검식으로 바뀌더니 번개같은 속도로 빙마검에게 쏘아져 갔다.
“안 돼……!”
빙마검이 비명을 질러대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수유단혼의 막강한 검기는 어느새 그의 전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서걱!
“크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빙마검은 몸뚱어리가 양단된 채 생을 마치고 말았다.
절세의 고수답지 않게 너무도 비참하고 허망한 최후였지만 그 대가로 동료인 생사도는 결정적인 기회를 갖게 되었다.
콰콰콰콱……
그의 도가 무시무시하게 회전하며 철군악의 목 가까이 다가왔다.
그 기세와 속도가 어찌나 강렬하던지 생사도는 이번에야말로 철군악의 목숨을 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너무도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생사도의 도가 막 철군악의 목덜미를 베려는 순간,
스읏!
느닷없이 철군악의 몸뚱어리가 연기처럼 퍽 꺼지더니 저만치 옆에 가 있는 것이 아닌가!
취허비순(取虛飛瞬)이라는 절정의 신법이었다.
“엇?”
생사도는 너무도 놀라 일시지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손을 멈춘 시간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극히 짧은 순간이었지만 절정고수들의 대결에 있어서 승패를 판가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철군악은 그 짧은 틈새를 이용해 번개처럼 앞으로 쏘아져 오며 검을 십자로 그어댔다. 순간,
쭈아아악……
희미한 우윳빛 검기가 생사도를 향해 십자형(十字形)을 이루며 쏘아져 나왔다.
“이야압!”
생사도는 이를 악물고 생사도법의 최절초인 생사도강(生死刀)을 펼쳤지만 우윳빛처럼 뿌연 검기는 그의 도와 몸뚱어리를 한꺼번에 가르고 지나갔다.
카카캉!
“큭!”
도의 파편이 허공을 어지러이 날아다니며 분수 같은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생사도는 담담한 표정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정말 무서운 검법이군…… 이게 무슨 검법인가?”
철군악은 천천히 검을 거두며 대답했다.
“무극칠절(無極七絶)이오.”
“무극칠절이라…… 허허허, 정말 이름 그대로군.”
생사도는 가만히 허공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급격히 생기(生氣)가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십존이 한 사…… 람에게 당할 줄은 정녕 꾸, 꿈도 꾸지 못했…… 적이지만…… 자네는 정말 위대한 무인…… 후후후, 성검문의 모, 몰락이 보이는구나……”
생사도는 허공을 쳐다보며 가느다랗게 웃더니 땅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숨을 거둔 것이다.
철군악은 묵묵히 생사도를 내려다보았다.
도에 관해서는 역사상 가장 강한 사람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던 생사도조차 그의 검을 몇 번 받아 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고 말았다.
철군악은 이미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경지에 올라서 있었지만 과연 자신이 서문륭을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서문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천하제일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전설적인 고수요, 검객이었다.
철군악이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무적(無敵)이라 칭송받던 수많은 절세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지금의 이름을 얻은 사람이 바로 그였다.
철군악이 비록 모든 사람이 두려워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 하나 아직 서문륭에 비하면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철군악이 서문륭보다 뛰어나지 못해서도 아니요, 능력이 없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서문륭 같은 천재를 극복하기에는 세월의 차가 너무도 컸기 때문이다.
묵묵히 생사도를 내려다보던 철군악의 눈빛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혹시 그에게 진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철군악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잠시나마 나약한 생각에 빠져 있던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설령 서문륭의 검에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하더라도 철군악은 그를 만나야 했다.
철군악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다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내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 * *
서문륭은 원래 유명한 장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당대(當代) 최고의 명장(名匠)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그의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오히려 능가해 고금제일의 장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서문륭의 꿈도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본받아 최고의 명장이 되는 것이었다.
서문륭은 철이 들 무렵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그들의 기예(技藝)를 조금씩 배워 나갔다.
타고난 기재(器才)가 워낙 뛰어나서인지 서문륭은 조부와 부친의 재주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터득할 수 있었다.
서문륭의 조부와 부친은 자신들의 자손이 가업을 잇기에 조금도 손색없는 실력을 보이자 매우 기뻐했다.
찬란한 미래가 그들 가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하나 그들의 미래는 결코 찬란하지 않았다.
어느 날, 느닷없이 괴인 하나가 그들의 집에 난입해 들어왔을 때부터 비극의 씨앗은 잉태되었다.
복면을 한 괴인은 서문륭의 부친에게 한 가지 물건을 주며 그것을 두 자루의 검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난데없이 침입한 괴인 때문에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도, 서문륭의 부친은 그가 쥐여 주는 물건을 살펴보다 심장이 멎는 충격을 맛보았다.
─`이, 이것은……!
괴인이 전해 준 물건.
그것은 바로 장인이라면 꿈속에서조차 다루기를 원하는 곤오신철(坤烏神鐵)이었기 때문이다.
곤오신철을 보는 순간 서문륭의 부친은 도저히 괴인의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 또한 장인인지라 이미 오래 전부터 곤오신철을 사용해 고금의 명기(名器)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괴인과 부친과의 계약은 이루어졌고, 서문륭의 부친과 조부는 힘을 합쳐 검의 제련에 들어갔다.
곤오신철은 실로 어마어마한 강도와 경도를 지니고 있어 보통의 방법으로는 도무지 그것을 다른 형상으로 만들 수 없었다.
하나 서문륭의 조부와 부친은 무려 칠 년 동안 곤오신철과 씨름한 끝에 드디어 두 자루의 검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곤오신철로 검을 만들어 냈다! 으하하하하……
그들은 너무 기뻐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유사 이래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곤오신철로 검을 만들게 되었으니 그들이 미친 듯이 기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나 그들의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검을 찾으러 온 괴인이 그들에게 느닷없이 살수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크윽……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뻥 뚫린 가슴을 부여안은 채 묻는 서문륭의 부친에게 괴인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흐흐흐…… 내가 곤오신철로 만든 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
서문륭의 부친은 절규했다.
─`이 악마 같은 놈!
하나 그는 더 이상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이 칠 년 동안 피땀 흘려 만든 검이 가슴에 꽂힌 채 심장의 더운 피를 빨아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괴인은 서문륭의 조부와 부친을 죽이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가문을 완전히 몰살시켰다.
괴인은 나중에는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아예 복면을 벗어 던진 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죽이는 것에 열중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던 서문륭은 그때 괴인의 모습을 아주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만약 서문륭이 조부의 기지로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 나가지 못했더라면 그의 가문은 대가 끊기고 말았을 것이다.
서문륭은 자신의 무릎에 단정히 놓여 있는 검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아무런 광채도 없는 거무스름한 검신이 별로 볼품없어 보이는 검이었지만 당금 무림에서 이 검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다면 그는 그야말로 바보나 진배없었다.
서문륭은 손을 들고 가만히 검신을 쓰다듬었다.
슥! 스윽!
느낄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요철(凹凸)이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서문륭은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검을 쓰다듬었다.
요철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검신에 그림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림[畵].
그것은 지옥의 나찰(羅刹)이 불가의 사대명왕(四大明王)을 발로 짓누른 채 포효(咆哮)하고 있는 그림으로, 바로 서문륭 자신이 그려 넣은 것이다.
그는 가문의 참화(慘禍)가 있고 나서 홀로 산속으로 들어가 미친 듯이 무공을 연마했다.
하나 그는 자신의 무공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괴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장부의 복수는 십 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 차근차근히 노력했다.
그리고 다시 몇 년이 흐르자 그의 실력은 그야말로 일취월장, 적수를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다.
하나 그때도 서문륭은 괴인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괴인이 지닌 배경이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너무도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문륭은 다시 십 년 이상을 자중했다.
그리고 비로소 힘이 갖추어졌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그제서야 괴인을 찾아 나섰다.
괴인은 당시 화산파(華山派)의 장로이자 무림 십대고수 중 하나였던 매화검객(梅花劒客) 종리민(鍾里珉)이었다.
하나 서문륭은 단 삼 초 만에 매화검객의 목을 자른 후 그에게서 부친이 만든 두 자루의 검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 두 자루의 검에 내공으로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다.
“흐음!”
서문륭은 나직이 탄식했다.
비록 일이 잘못되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결코 후회스럽다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는 모든 노력과 열정을 불살라 실로 후회 없는 한평생을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그의 사랑스러운 손자 서문기(西門麒)였다.
서문륭은 잠시 묵묵히 허공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운이 따르지 않아 무림지존(武林至尊)이 되지는 못했지만 검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까지 천하제일의 고수는 바로 자신이란 것을 모든 사람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서문륭의 모습은 이내 방안에서 사라졌다.
* * *
남궁룡은 복우산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 중의 하나 금우봉(金牛峰) 정상에서 차가운 표정으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백 장 떨어져 있는 곳에서 성검문이 거대한 자태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밑을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초점 없는 몽롱한 표정이더니 그 다음에는 갈등 어린 표정, 그리고 종내에는 원독에 사무친 표정이 되었다.
남궁룡은 원한이 가득한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흐흐흐…… 이놈들! 이제 조금 후면 네놈들이 있는 곳은 완전히 불바다로 변할 것이다…… 욱아가 당한 것처럼 네놈들도 모두 처절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 크흐흐흐……”
한데 바로 그때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소, 남궁 선배!”
느닷없이 그의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남궁룡은 깜짝 놀란 얼굴로 얼른 뒤를 쳐다보았다.
“아니…… 너, 너는?”
차가운 눈빛으로 남궁룡을 쏘아보고 있는 인물.
바로 검제 냉좌기가 아니던가?
남궁룡의 얼굴에 기괴한 표정이 떠올랐다.
“조금 전에 뭐라고 했나?”
“남궁 선배가 원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했소.”
남궁룡의 얼굴에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요.”
“그렇다면……?”
“그렇소. 남궁 선배가 설치한 십만 근의 화약은 이미 모두 제거되었소.”
순간 남궁룡의 얼굴이 망연자실해졌다.
“이럴 수가……”
그는 넋 잃은 사람처럼 중얼거리더니 느닷없이 냉좌기를 노려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누구냐? 어떤 육시랄 놈이 감히 내 일을 망쳐 놓았단 말이냐? 크흐흐흐……”
붉게 충혈된 눈에 초점까지 없는 것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았다.
남궁룡은 그런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커다랗게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핫!”
한데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자꾸 벼랑 쪽으로 비틀비틀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냉좌기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어렸다.
“남궁 선배, 위험하오!”
하나 그의 외침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벼랑 끝에 도달한 남궁룡이 갑자기 밑으로 뛰어내린 것이다.
“으아아……”
구슬픈 비명이 메아리쳤다.
“남궁 선배!”
냉좌기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쫓아갔지만 이미 남궁룡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괴로움과 절망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냉좌기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남궁 선배, 꼭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소……?”
냉좌기가 안타까운 얼굴로 중얼거렸으나 그의 물음에 대답하는 것은 단지 허무한 바람 소리뿐이었다.
* * *
철군악은 묵묵히 앞을 쳐다보았다.
당대 최고의 고수이자 무림을 피바다로 만든 원흉, 서문륭이 담담한 얼굴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철군악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서문륭은 여태까지 그가 싸워 왔던 어떤 고수보다도 무시무시한 실력을 지니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하나……
철군악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는 설사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하고 굳센 모습을 저승에 있는 사형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죽음이 두려워 피하거나 도망 다니는 졸장부가 아님을, 철군악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철군악은 잠시 서문륭을 쳐다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빚을 받으러 왔소.”
서문륭의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떠올랐다.
“빚? 무슨 빚을 말하는 건가?”
“당신 때문에 내 사형이 죽었소.”
“사형이라면, 철단소를 말하는 건가?”
철군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륭은 잠시 번쩍이는 눈으로 철군악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내 기꺼이 자네에게 빚을 갚을 기회를 주지…… 이곳에서 빚을 받겠는가?”
철군악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무적인이 거무튀튀한 검날을 드러냈다.
순간 서문륭의 얼굴에 기이한 표정이 떠올랐다.
“허허허…… 천립에게 주었던 무적인이 거기에 있군.”
“이 검을 아시오?”
“알다마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바로 내가 그려 넣은 것이다.”
순간 철군악의 얼굴에 언뜻 놀란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서문륭은 어마어마한 내공으로 곤오신철에 그림을 그려 넣은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내공은 도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철군악은 내심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서문륭을 쏘아보기만 했다.
서문륭은 철군악이 나이답지 않게 침착한 모습과 당당한 기세에 내심 감탄한 기색이었다.
“대단한 기세로군!”
그는 가느다랗게 탄성을 터뜨리더니 이내 천천히 검을 꺼내 들었다.
스르릉!
역시 무적인과 거의 비슷한 모양의 검이 거무스름한 검날을 드러냈다.
이것이 바로 무림십대병기(武林十大兵器)의 서열(序列) 일위를 차지하고 있는 명검, 불마검(佛魔劒)이었다.
서문륭은 검을 가볍게 움켜쥐고는 슬쩍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먼저 시작하게.”
마치 손자를 대하듯 부드럽기 짝이 없는 말투였으나 철군악은 상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적의와 투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철군악은 갑자기 전신 혈관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며 숨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끼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드디어 서문륭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순간이 막상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니 조금은 긴장도 되고 흥분도 되었지만 철군악은 애써 침착하려 노력했다.
상대는 무(武)의 조종(祖宗)이라 추앙받는 달마(達磨)에 비견될 만한 절대고수다.
조금이라도 냉정함을 잃거나, 털끝만한 실수라도 했다가는 그가 여태껏 한 일은 모두 만용이 되고 말 것이다.
철군악은 물론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냉정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철군악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번쩍이는 눈으로 서문륭을 노려보더니 드디어 힘차게 몸을 날렸다.
콰아아아아아……
해와침소(海渦侵)의 절정검기가 허공 가득 일어나며 마치 해일처럼 서문륭을 향해 덮쳐 갔다.
실로 오금이 떨릴 만큼 어마어마한 공세였지만 서문륭은 전혀 긴장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담담한 얼굴로 철군악의 공세가 다가오는 것을 쳐다보더니 슬쩍 검을 흔들었다. 순간,
쾌쾌쾡!
불마검이 기이하게 떨리며 해와침소의 무시무시한 검세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서문륭은 간단하게 검을 휘두르는 것 같았는데도 막강한 광해삼검의 검세가 너무도 무력하게 뚫리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익힐 수 없다고 알려진 무량검도(無量劒道)였다.
철군악은 해와침소의 검기가 너무도 쉽게 뚫리자 얼굴을 굳히며 검을 기괴하게 움직여 무극칠절의 초동생멸(初動生滅)을 펼쳤다. 순간,
피윳!
그의 검으로부터 희뿌연 검기가 튀어나와 서문륭의 무량검도에 맞서갔다.
카카카캉……
“으음!”
철군악은 서문륭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손목이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다.
상대의 공력이 너무도 막강한 탓이었다.
“으하하하!”
서문륭은 커다랗게 광소를 터뜨리며 다시 칠(七) 검(劒)을 쳐냈다.
짜자자자작……
이번에는 기괴한 소리와 함께 불마검에서 거무튀튀한 번개가 쏘아져왔다.
검에서 번개가 튀어나오다니?
철군악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광경에 넋이 빠질 지경이었지만 얼른 옆으로 움직이며 반월신사(半月神絲)를 펼쳤다. 일순,
쓰쓰스스……
철군악의 검을 따라 반달 모양의 희뿌연 검기가 형성되더니 이내 서문륭의 검세에 맞서 갔다.
하나 수많은 절정고수를 덧없이 죽음으로 몰고 간 반월신사로도 검은 번개를 막을 수는 없었다.
반월신사의 검기가 검은 번개에 닿는 순간,
촤아아악!
비단이 날카로운 칼에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반월신사의 검기가 반으로 쫘악 갈라져 버리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철군악의 얼굴에 다급한 빛이 어렸다.
짜자자자작!
검은 번개가 여세를 몰아 그의 전신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군악은 눈을 무시무시하게 빛내더니 검을 십자로 힘차게 그어댔다. 순간,
쭈와와와왁……
절대 멈추지 않을 것처럼 보이던 검은 번개가 네 조각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서문륭의 얼굴이 드러났다.
철군악은 여세를 몰아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힘겹게 내리쳤다. 일순,
우우우우웅……
무적인이 무시무시하게 떨리며 주위에 있던 모든 것이 그쪽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무극칠절의 절초인 십자건곤(十字乾坤)과 일검압주(一劒壓宙)를 연거푸 펼친 것이다.
이번의 공격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서문륭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뒤로 서너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대단하구나!”
서문륭은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다시 검을 사선(斜線)으로 내리 그었다.
스와악!
순간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팍!
여태껏 한 번도 깨어지지 않았던 일검압주의 검세가 서문륭의 검로(劒路)를 따라 사선으로 쫘악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서문륭이 펼친 검세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철군악의 몸뚱어리를 비스듬히 베어 왔다.
쓰아아악!
그의 공세가 어찌나 날카롭고 빠르던지 철군악은 일시지간 대처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철군악은 무쇠처럼 굳은 얼굴로 서문륭의 공세를 쳐다보고 있더니 돌연 검을 미친 듯이 종횡으로 삼백육십 번이나 그어댔다.
순간,
끼끼끼끼……
우윳빛 검기가 마치 거미줄처럼 허공 가득 퍼지더니 서문륭의 공세를 간단히 와해시켰다.
이것이 바로 무극칠절의 제육절(第六絶)인 난마입령(亂麻入靈)이었다.
“엇?”
서문륭의 얼굴이 사뭇 딱딱하게 굳어졌다.
철군악이 이번에 펼친 검초는 그로서도 난생처음 대할 만큼 강력하기 짝이 없어 일시지간 대처할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끼이이이잉……
그러는 사이, 난마입령의 가공할 검기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서문륭을 향해 쏘아져 갔다.
서문륭은 철군악의 공세가 바로 코앞으로 쏘아져 올 때까지 굳은 얼굴로 가만히 팔을 늘어뜨리고 있더니, 느닷없이 검을 기이하게 휘둘러 무량검도 최후의 깨달음, 무량심파(無量心波)를 펼쳤다.
콰콰콰콰콰!
끊임없이 파도가 이는 것처럼 수백, 수천의 투명한 검기가 물밀듯이 철군악을 향해 밀려들었다.
‘아……’
철군악은 자신도 모르게 나직이 탄식을 터뜨렸다.
서문륭이 펼친 공세는 너무도 엄청나 그로서는 도저히 막을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철군악은 갑자기 전신이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끼고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았다.
송난령의 아름다운 얼굴과 지나갔던 추억이 편린처럼 떠오르더니 마지막으로 동굴에서 보았던 사형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다.
순간, 절대 이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게 철군악의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 이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철군악은 모든 힘을 짜내 검을 둥그렇게 휘둘렀다.
쓰으으으……
마치 둥그런 달무리처럼 희미하면서도 포근하게 느껴지는 검기가 허공을 온통 뒤덮었다.
서문륭은 어이없는 얼굴로 철군악을 쏘아보았다.
“이게 무슨 초식인가?”
철군악은 온몸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질 듯 비틀거리다 힘겨운 얼굴로 겨우 대답했다.
“무극생유(無極生有)요.”
“천하에 무량검도를 능가하는 것이 있었다니……”
서문륭은 망연히 중얼거리더니 슬픈 눈으로 갑자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神)이여!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서문륭은 일그러진 얼굴로 묵묵히 하늘을 쳐다보더니 어느 순간 미친 듯이 광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핫……”
한데 바로 그때였다.
촤악!
느닷없이 그의 몸뚱어리에서 분수처럼 피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무극생유의 막강한 검기가 그의 전신을 산산이 갈라 놓은 것이다.
“크흐흐……”
서문륭은 허무한 눈으로 자신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를 쳐다보더니 서서히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았다.
털썩!
철군악은 간신히 몸을 지탱한 채 서문륭이 죽어 가는 모습을 쳐다보았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었지만 철군악은 기쁨을 느낄 수가 없었다. 단지 가슴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할 뿐이었다.
철군악이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을 때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그에게 우르르 몰려왔다.
“철 공자님!”
“군악!”
개중에는 송난령도 있었고 제갈추, 동천립의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오대호법과 냉좌기의 모습도 보였다.
철군악은 그들을 보자 다리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꼈다.
비틀! 비틀!
철군악이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자 송난령이 얼른 부축해 주었다.
“천하의 냉면무적도 이렇게 비틀거릴 때가 있군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쌌다.
“정말 수고 많았네. 우리가 드디어 승리했어!”
“자네 덕분이네!”
그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 어려 있었다.
철군악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장 먼저 제갈추와 모비룡의 얼굴이 보였고 왕충과 호불곡의 우스꽝스러운 모습, 그리고 냉좌기의 차분한 모습도 보였다.
철군악은 다시 옆을 쳐다보았다.
배꽃처럼 화사한 모습의 송난령이 눈물을 머금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철군악은 피 묻은 손을 들어 가만히 송난령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윽!”
철군악이 말을 하다 말고 쓰러질 듯 비틀거리자 송난령은 물론 중인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철 공자님……”
“군악!”
동시에 호불곡이 앞으로 나서며 얼른 그를 만류했다.
“말은 나중에 하고 우선 안정을 취하게.”
하나 철군악은 막무가내였다.
“아니오…… 꼭 지금 말해야 하오.”
순간, 중인들은 물론이고 송난령의 얼굴에 의아한 빛이 가득 떠올랐다.
도대체 겨우 죽음을 모면한 사람이 이 상황에서 꼭 해야 될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송난령은 눈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세요.”
철군악은 잠시 그녀를 쳐다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서문륭과 싸울 때 나는 그의 검을 막지 못하고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소. 나는 전부터 사람이 죽기 전에 도대체 어떤 생각들을 할까 몹시 궁금했었소. 한데 막상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드는 거요.”
철군악은 말을 끊고 또렷한 눈으로 송난령을 직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도대체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바로 송 소저와 제대로 연애 한번 해보지 못한 게 정말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 거요.”
순간 송난령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왕충과 호불곡이 참지 못하고 그녀를 놀렸다.
“호가야, 저 송가 계집애 좋아하는 것 봐라! 아마 죽은 부모가 살아온다 해도 저렇게 좋아하기는 힘들 게야.”
“그렇군!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당분간은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송난령은 아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웠지만 내심 기쁘기 한량없었다.
철군악은 중인들의 웃음이 가라앉길 기다려 다시 송난령을 불렀다.
“송 소저!”
음성은 간절했고 눈빛은 강렬했다.
송난령이 차마 철군악의 얼굴을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고개를 처박은 채 조그맣게 대꾸했다.
“말씀하세요.”
철군악은 번쩍이는 눈으로 송난령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입을 열었다.
“나와 결혼해 주시오…… 결혼을 해도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라 장담은 못 하겠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소…… 그것은 송 소저만을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거요. 영원히!”
송난령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이더니 이내 별빛처럼 반짝이는 눈으로 철군악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철군악의 얼굴에 떠올라 있는 어떤 열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인 욕구나 순간의 욕망이 아니라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 왔던 사랑에 대한 희구(希求)였다.
송난령은 마치 홀린 듯한 얼굴로 철군악을 쳐다보더니 느닷없이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음……”
철군악은 깜짝 놀랐지만 이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함께 입을 맞췄다.
“우와! 요새 젊은것들은 정말 막무가내로군……”
“어이쿠! 이거 원, 낯뜨거워서……”
중인들은 저마다 인상을 찡그리는 척하며 구시렁댔지만 누구 하나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철군악과 송난령은 한참 입맞춤을 하더니 이내 천천히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왕충이 또다시 놀렸다.
“요새 계집애들은 정말 응큼하단 말이야…… 남자보다 더 적극적이니, 이거야 원!”
그는 입맛을 쩝쩝 다시며 동의를 구하듯 옆을 쳐다보았지만 웬일인지 단짝인 호불곡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왕충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그만 심장이 멎는 충격을 느끼고 말았다.
“헉!”
송난령이 마치 독 오른 암사자 같은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게 아닌가!
왕충은 지레 겁을 먹고 얼른 딴전을 피웠다.
“험, 험……!”
송난령이 그를 노려보며 나직이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한 번은 봐드리겠어요.”
하나 왕충은 송난령을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딴전만 피울 뿐이었다.
“어흠! 흠……”
그의 모습이 어찌나 우스꽝스럽던지 중인들은 모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
“으하하하……”
중인들의 얼굴에는 고생 끝에 찾아온 낙을 즐기는 승자의 여유가 깃들여 있었다.
이제 지긋지긋한 혈풍도 끝이 났으니 모두들 당분간은 푹 쉬면서 재충전의 기회를 가질 것이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제갈추가 나섰다.
“자, 이제 돌아가도록 합시다!”
중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한데 바로 그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무사 몇 명이 웬 꼬마 아이를 끌고 오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인가?”
제갈추의 물음에 무사 하나가 얼른 대답했다.
“예! 은밀한 곳에 숨어 있던 서문륭의 손자 놈을 잡아왔습니다.”
순간 중인들의 얼굴에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뭣이? 서문륭의 손자라고?”
“으음!”
하나 그것도 잠시, 중인들은 이내 차가운 얼굴로 꼬마 아이를 쏘아보기 시작했다.
서문륭과 관계된 것이라면 뭐든지 달가울 리가 없었다.
육자예가 성큼 앞으로 나서며 차갑게 내뱉었다.
“서문륭의 핏줄은 뿌리를 뽑아야 하네!”
그의 단호한 말에 중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옳소!”
“서문륭의 손자 놈을 죽여야 한다!”
꼬마 아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자며 소리를 지르고 떠들어대자 잔뜩 겁먹은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나 중인들은 겁먹은 꼬마 아이의 얼굴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떠들고 있었다.
한데 바로 그때, 여태껏 묵묵히 있던 철군악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반대요.”
순간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중인들은 하나같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철군악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모든 혈겁의 원흉인 서문륭의 손자를 옹호하다니?
왕충이 사람들을 대신해 앞으로 한 발 나서며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철군악이 나직이 대꾸했다.
“꼬마를 죽이는 걸 반대한단 말이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만약 저 아이가 나중에 지 할아비의 복수를 한다고 하면 어쩔 텐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일 아니오? 그런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아이를 죽인다면 우리가 서문륭과 다를 게 뭐가 있소?”
순간 중인들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어렸다.
그러자 철군악이 성큼성큼 걸어가 꼬마 아이 앞에 버티고 섰다.
“이 아이는 내가 기르겠소. 이제부터 이 아이는 내 양자(養子)니 누구든 이 아이를 건드리면 나를 건드리는 것으로 간주하겠소.”
중인들의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 떠올랐다.
“아니, 자네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하나 철군악의 얼굴에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그만의 고집이 떠올라 있었다.
“여러 말 할 것 없소.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 정도는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철군악의 고집스런 표정을 본 순간 중인들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다.
중인들이 모두 잠자코 있자 철군악은 아이를 안았다.
“네 이름이 뭐지?”
아이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법 조숙한 듯 차분히 입을 열었다.
“서문기(西門麒)예요.”
“하하, 이름이 멋있구나! 나이는 몇이지?”
“여덟이에요.”
“그래? 우리 시원한 바람 쐬러 밖으로 나갈까?”
아이가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데루룩 굴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철군악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철군악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왕충이 나직이 탄식했다.
“정말 큰일이로군!”
제갈추가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군악 말대로 저 아이가 나중에 악인(惡人)이 되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지요.”
왕충이 묵묵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지……”
“좋게 생각하십시오.…… 자, 여러분! 이럴 게 아니라 우리도 나갑시다.”
“그럽시다!”
“모두 나갑시다!”
중인들은 제갈추를 따라 모두 밖으로 나갔다.
오랜 싸움으로 인해 하나같이 피로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모든 사람의 얼굴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환히 빛나고 있었다.
* * *
“철 공자님, 아니, 악가가(岳哥哥)! 이제 몸은 괜찮으세요?”
“송 소저 덕분에.”
“아이, 참! 언제까지 송 소저라 부를 거예요?”
“……”
“그건 그렇고, 악가가는 제마궁주(帝魔宮主)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사실은…… 나도 그게 궁금하오.”
“놀라지 마세요. 제마궁주는 독성(毒聖) 당문제와 동귀어진했어요.”
“당 노인이?”
“예. 그때 당신이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돼 느닷없이 제마궁주가 나타났어요. 우리는 모두 놀랄 수밖에 없었죠. 그와 대적할 만한 고수는 철 공자뿐인데 당신은 이미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여럿이 덤벼 봐야 희생만 커질 것 같고…… 우리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독성이 나타나 제마궁주에게 시비를 걸더니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 거예요. 나중에 알게 된 건데 독성하고 제마궁주는 깊은 산속에서 싸우다 동귀어진했대요.”
“그에게 손녀가 있는데 그녀는 어디 있소?”
“그게 좀 이상한데…… 그는 떠나기 전 제갈 선배에게 조그만 상자를 주며 악가가에게 전해 주라 했대요. 군사께서는 혹시 그가 무슨 암계(暗計)를 꾸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상자를 열어 봤는데 거기에는 손녀딸인 수아(琇兒)를 철공자에게 부탁한다는 편지와 함께 금양과(金陽果)가 들어 있었대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 공자께 이 말을 꼭 전해 달라고 했대요.”
“무슨 말을?”
“그는 스스로 수아를 잘 키울 자신이 없다고 했어요. 나중에 그녀가 자라 악에 찌든 자신의 과거를 안다면 얼마나 실망을 할지 몹시 두렵다면서 마지막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은 일을 해 손녀에게 떳떳한 할아버지로 남고 싶다고 그러더군요.”
“……!”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아무것도 아니오. 수아는 어디 있소?”
“호호호…… 걱정하지 마세요. 아마 지금쯤 호 노인에게서 오음절맥(五陰絶脈)을 치료받고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