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려타곤 152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상태에서 소모된 내공을 보충하느라 시간 가는 중 삼매경에 빠진 채 운공을 계속하던 소구의 의식이 돌아온 것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나서였다.
가부좌를 틀고 반장 정도 허공 위에 떠 있는 상태에서 깨어난 소구의 몸 주위로는 금빛 광채가 어려 있는 상태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내공이 바닥이라 운공을 꽤 오랫동안 한 것 같은데---."
말을 하는 사이 금빛 광채는 몸으로 스며들고 허공에 떠 있던 소구의 몸은 바닥으로 서서히 내려앉았다.
이제 운공이 끝난 것이다.
몸을 일으켜 세우고 소구는 천천히 기대에 찬 얼굴로 수십 년 만에 보게 된 사부와 사형의 옆으로 다가갔다.
"꽁꽁 얼어버렸네. 어찌되었건 살아있기는 살아있구나. 맥이 뛰고 있는 것을 보니 내공을 계속 운기하고 있나본데---, 화기(火氣)를 일으키면 되는 건가?"
소구는 정각과 양평이 서 있는 등 뒤에 서서 두 손을 두 사람의 명문혈에 올려놓았다. 소구의 두 손은 붉게 달아올랐고 정각과 양평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들은 물로 변해 땅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동굴이었다. 소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는 반경 석자를 넘기지 못하고 뿌연 수증기가 일어나는 가운데 수십년간 얼어붙어 있던 두 사람은 긴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적 속에 잠겨 있던 동굴 안에 한 시진이 흘렀을 때 요란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앗, 뜨거!"
"아이쿠, 뜨거워!"
두 사람은 뜨겁다는 비명을 내지르면서 그대로 차가운 얼음으로 이루어진 바닥에 드러누워 등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겨우 뜨거움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자신들의 눈앞에 서 있는 소구를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소--소구?"
양평은 삼십 세가 넘어 보이는 사제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어보았다.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 크게 바뀐 것이 없는 소구의 얼굴이었지만, 소구의 시간은 이십년이 넘게 흐른 상태였고 정각과 양평의 시간은 그렇지 못했다.
"예, 맞아요. 저 소구입니다."
소구는 웃으면서 힘차게 대답했다.
정각은 속으로 염불을 외우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빙하신전의 문이 열리면서 엄청나게 차가운 한기(寒氣)에 휩싸이면서 의식을 잃어버렸고, 깨어나 보니 열 살 때 헤어졌던 제자가 삼십이 넘어 보이는 나이로 앞에 서 있는 것이다.
"소구야, 지금 네 나이가 몇이냐?"
정각 대사는 장성해버린 제자를 향해 물어보았다.
"서른하고도 한 살이 더 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곳에서 잠들었던 시간이 꽤나 오래된 모양이로구나. 그래 네 병은 다 고친 것이냐?"
정각 대사와 양평이 이 혹한의 땅에 온 이유는 소구의 병을 치료할 약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정각 대사의 질문에 소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병은 다 나았습니다. 사부님."
"다행이로구나. 그럼 저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겠구나."
정각 대사는 빙하신전으로 통하는 문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그러면서 정각 대사와 양평의 얼굴 위로 끔찍하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저 문이 열리면서 그들은 긴 시간 동안 잠들게 된 것이다.
"한번 저기 들어가 보시겠어요?"
소구의 말이 끝나는 순간 두 사람은 동굴 밖으로 도망치듯 달려 나가면서 소리쳤다.
"싫다! 들어가려면 너 혼자 들어가!"
"문 열지 마!"
두 사람의 고함이 동굴 안을 울리고 있을 때, 두 사람의 몸은 이미 동굴 밖으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소구는 멍한 얼굴로 햇빛이 비치는 입구 쪽을 바라보다 빙하신전의 문 앞으로 다가서면서 중얼거렸다.
"빙하신전의 한기는 취하와 취앵이 거의 흡수해서 다시 얼어붙는 일은 없다고 하던데---, 하는 수 없지. 혼자라도 들어가서 구경해야지. 이곳까지 와서 빙하신전을 구경도 못하고 가기는 억울해---."
그러면서 굳게 닫혀 있던 커다란 석문이 소구의 손에 열리고, 세상 모든 것을 얼려버리려는 하얀 안개 같은 것이 밖으로 쏘아져 나왔다. 바로 다음 순간 소구의 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하얗게 변해버리고, 소구는 얼굴을 뒤덮고 있는 성에를 훔쳐내며 소리쳤다.
"뭐, 뭐야?!"
세상의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빙하의 기운은 많이 약화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기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소구는 몸을 부르르 떨며 열려진 문 안쪽의 빙하신전을 바라보았다. 일 년 내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얼어붙은 대지, 북해라 불리는 땅에 들어왔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한 소구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오르고 이빨이 딱딱 부딪칠 정도로 추위를 느끼고 있는 상태였기에, 소구는 안으로 들어가 보는 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거--, 안에 들어가 봐야 돼, 말아야 돼?"
덜덜 꺼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소구는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서진 두 개의 얼음 기둥 앞에선 소구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빙하신전 빙하신전하길래 뭐 좋은 거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아무 것도 없구만---."
투덜거리면서 소구는 사방을 연신 둘러보았지만 보이는 것은 얼음으로 만든 기둥뿐이었다. 얼음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장소에서 머물 필요를 못 느끼고 뒤돌아서 밖으로 나가려고 하던 소구의 몸은 문 앞에서 갑자기 멈추어졌다.
다시 뒤돌아 서서 안을 둘러보던 소구의 얼굴 위로 회심의 미소가 스쳐갔다.
"그럼 그렇지--. 아무 것도 없을 리가 있나---. 저기 안쪽에 또 다른 문이 숨어 있었군."
기둥 뒤쪽에 나 있는 작은 문을 발견하고 소구는 그 앞으로 다가갔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빙하신전은 그 안에 있었다.
소구는 멍한 얼굴로 수정인지 얼음인지 모를 투명한 관이 쭉 늘어선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수십개의 투명한 관속에는 하나 같이 시신들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살아있을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시신들이 누워 있는 관 앞에는 글자들이 적혀 있는 얼음으로 만들어진 비석들이 늘어서 있고, 그 비석에는 깨알같은 글자들로 관속에 누워있는 사람이 누구인지와 살아생전의 행적이나 무공 구결 같은 것이 적혀 있었다.
"체, 뭐야? 빙하신전이 무슨 장소인가 했더니? 납골당이잖아!"
가장 가까운 맨 앞에 놓인 관 앞의 비석을 읽다말고 소구는 투덜거렸다.
소구의 바로 앞에 놓인 관속에 잠들어 있는 시신은 빙하신궁의 초대궁주 빙하대제였고, 무림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빙하신공을 창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비석에도 빙하대제가 만들었다는 무공들이 적혀 있었고, 소구는 그것을 읽다말고 다른 관 앞으로 걸음으로 옮겼다.
소구는 빙하신공을 익힐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혼천문의 무학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소구가 빙하의 무공을 추가해서 익힐 리 만무했다. 그리고 이미 익힌 무공만으로도 세상에 자신의 상대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소구였다.
하나하나 오래 전 죽어 버린 인물들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관을 지나쳐 가던 소구는 맨 끝에 놓인 관을 보고는 무덤덤한 표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소구의 어머니 장봉화가 이 빙하신전의 맨 마지막에 놓인 관속에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서, 소구의 눈에 한 방울 두 방울 소리 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소구라 해도 어머니의 시신 앞에서는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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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신궁 이십사대 궁중 장봉화
명(明) 만력(萬曆) 삼십오년에 출생
청(淸) 순치(順治) 팔년에 칠호라는 살수에게 살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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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 앞에 놓인 비석에는 다른 비석들과 달리 아무 기록도 없이 태어난 해와 죽은 해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소구는 하염없이 비석만을 쳐다보았다.
한참을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어대던 소구는 말없이 관 앞에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어떤 말도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다만 아홉 번 절을 하고 일어서서 다시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소구는 복받치는 설움에 눈물이 마르질 않고 있었다.
빙하신전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사람들이 얼어붙어서 죽은 시체들이 즐비한 동굴로 나온 소구는 소매로 얼굴의 눈물 자국을 훔쳐내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시신은 여기 있는데---, 아버지의 시신은 어디로 간 거지? 그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누가 이곳에 옮겨 놓은 것일까?'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소구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시신조차 찾지 못했던 부모의 시신 중 어머니의 시신은 여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에 간 것인지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시신을 이곳으로 누가 옮겨 놓았는지도 의문이었지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취하와 취앵이가 이곳에 계속 있었으니 어쩌면 대답해 줄 수 있을지 몰라---.'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소구는 햇빛이 비치는 동굴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정각 사부와 양평 사형은 오랜만에 보게 되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고, 소구는 뒤돌아 서서 빙하신전으로 통하는 동굴을 바라보았다. 다른 시신들은 상관이 없었지만 어머니의 시신이 저 안에 있으니 이 안으로 아무나 들어가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떠나면 이곳을 지킬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소구는 얼어붙은 시체들을 하나씩 날라서 동굴 앞에 이리저리 포진하기 시작했다.
정각과 양평은 몸뚱이가 이리 저리 잘려나간 시신들을 동굴 앞에 날라다 이리저리 배치하는 소구의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평아, 소구 지금 뭐 하는 거냐?"
"글쎄요. 징그러운 저것들을 가지고 도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질문하다 소구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얼음 동상으로 변한 시신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자 바로 소구는 시체를 잘라버렸다.
시체들을 마구 조각 내서 얼굴은 북쪽에 몸뚱이는 남쪽에 하는 식으로 배치를 하는 소구의 엽기적인 모습을 보면서 정각과 양평은 고개를 흔들었다.
"시신을 가지고 도대체 저게 무슨 장난이지?"
"진(陳)을 설치한 겁니다."
소구가 다가오면서 정각에게 대답했다.
"진? 여기에 누가 온다고 진까지 설치하는 것이냐?"
정각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소구를 바라보며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도 전에 죽게 될 장소였다. 이곳까지 오는 일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모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와 보았자 가져갈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굶어죽지나 않으면 다행인 장소였다. 이곳에 올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정각의 생각이었다.
"저 안에 제 어머님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정각 사부님."
"뭐? 네 자당(慈堂)이 돌아가셨다는 말이냐?"
"제가 실종되고---, 한 계곡에 갇혀 있는 동안에 부모님이 모두 살해되었다는 말을 형에게 들었지요. 그 때 형도 화상을 입고 도망치는 중이라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고--. 나중에 다시 부모님의 시신을 수습하려고 했지만 찾지를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 빙하신전 안에 어머님이--."
정각과 양평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이 의식을 중원을 떠나 외지를 돌아다니고 이곳에서 의식을 잃어버린 세월까지 합쳐서 이십년이었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으니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계절이었다. 그 세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두 사람은 소구의 말을 들을 때마다 놀람의 연속이었다.
잠시 뒤 양평은 또 하나를 물어보았다. 처음 소구를 보았을 때부터 물어보고 싶은 말이었지만 꾹 참고 있던 말이었다.
"소구야, 도대체 네 그 머리 모양은 어떻게 된 거냐? 전에 여진족하고 몽고족 사람들이 그 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만주나 몽고 땅에서 지낸 것이냐?"
소구는 변발이라는 형태를 취해서 맨들맨들한 앞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명(明)이 망하고 여진족이 세운 청(淸) 들어서면서 모두가 이 머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머리를 안 한다고 관리들이 목을 베는 세상이 되었지요. 말이 나온 김에---."
그렇게 말하면서 소구는 정각과 양평의 얼굴을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정각 사부님이야 스님이라 머리를 다 밀었으니 이 머리를 할 필요는 없고, 양평 사형은 잠깐 앉아봐요. 중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머리를 깎아야겠네요."
"싫다!"
양평은 소리치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남쪽을 향해 몸을 날리고, 소구는 한 손에 작은 비수를 들고 따라가면서 소리쳤다.
"안 깎으면 중원에서 돌아다니지 못해요!"
"얘들아! 같이 가자!"
혼자 빙궁의 폐허에 서 있게 된 정각이 소리치면서 황급히 멀어지고 있느 두 제자의 뒤를 쫓아갔다.
도망치고 있는 양평은 머리 앞부분은 깎고 나머지 머리만 남겨놓고, 남겨진 부분만 따서 뒤로 길게 늘어놓은 변발이라 불리는 머리 모양이 정말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하기 싫은 머리 모양이었다. 될 수 있으면 하게 되도 나중에 하고 싶어서 중원으로 도망치는 양평이었다. 청(淸)의 통치가 시작되는 장소에 이르면 저 머리를 해야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게 빙궁이라 불리는 장소에서 소구 일행이 떠나면서 이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빙하신전으로 통하는 문 앞에 얼어붙어 있는 얼음동상 중의 하나가 긴 잠에서 깨어나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정각과 양평이 얼어 있던 자리의 바로 옆에 있던 또 하나의 얼음 동상에 몸을 뒤덮고 있던 얼음이 천천히 녹아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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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발(辨髮) : 남자가 머리의 주위를 깎고 중앙의 머리만을 따서 등뒤로 길게 내려뜨리는 것으로 동북아시아 여러 민족 사이에 널리 행해졌다. 일찍이 거란인·여진인·몽고인 등 사이에서 행해진 것은 조금 모양이 달랐던 것 같다. 그러나 머리 앞부분을 깎고 나머지 머리는 남겨, 이것을 따서 뒤로 내리던가 갈라서 두 귀밑으로 내리거나 하여 그 어느 쪽이든 머리를 딴 것은 같으므로 변발(辨髮 :辨은 딴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