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坡平君尹公墓誌銘幷序 (李 穡)
至正辛丑冬沙賊逼京城玄陵決策南幸士大夫多棄官奔竄坡平君尹侅以前福州牧使匹馬扈駕至廣州坐客舍門談笑自若予始得知其面蓋奇偉人也予之在病中甞問疾焉見其色若甚哀予予至今不敢忘也嗚呼公之歿己五年矣而以病餘拙文銘公之墓豈不可感也夫公諱侅字子奇坡平縣人也十三世祖莘達號三韓功臣生功臣先之功臣生左僕射金剛左僕射生右僕射執衡右僕射生惟忠佐命平戎拓地鎭國功臣開府儀同三司上柱國守大尉門下侍中判吏部事鈴平郡開國伯食邑三千五百戶實封三百戶監修國使文肅公瓘睿王時女眞侵我疆文肅公率兵逐去之女眞遠遁立石紀功而還文肅生中書平章事彦頣有志氣達死生之理將易簀有詩一篇類禪者語平章生尙書兵部侍郞惇信侍郞生衞尉少尹商季少尹生太常錄事諱復元於公爲高祖錄事生曾祖監察御史諱純御史生祖鈴平府院君諱珤鈴平生考少府尹諱諳娶萬戶判三司事朴公諱之亮之女以元貞丁未七月某日生公公年十四以門蔭授周陵直至元庚辰超授興威衞精勇護軍階奉善大夫賜紫金魚袋明年陞奉常兼通禮門副使興拜周旋皆中其度護軍四十餘人多驍傑豪放不拘繩墨公勳以禮法至今矜式焉歲壬午進親禦軍護軍監試主司閔思平家奴取柴城外而柝生松班主印安適出郊法當禁故禁之家奴不知其爲班主也聚擊之傷其脚王大怒令重房壞主司宅公以謂奴信有罪矣其主何與焉且今多士刮目放牓而壞主司宅主司何心而考閱哉未幾上怒解事得寢歲癸未進中正大夫三司左尹公以廉勤爲寶興庫官凡三年及王被召赴都政丞洪彬會計錢物獨公無少汚洪公嘆賞之歲己丑選臺臣執政者皆曰尹某世守禮尙淸節且知綱紀大體無以易此人也遂遷執義多所立白雖未盡行名動一時持平鄭國經亦以淸謹慷慨爲人所望時察院有執義執綱持平持節之語搢紳歆之歲庚寅以奉順大夫判少府寺事知典法司事裁決平允人無怨言玄陵五年乙未授監門衞上護軍重房諸吏素知公名敬憚之不敢欺閱月而有福州牧使之命措置有法民受其賜辛丑冬命其子今密直公曰吾不可不赴行在所也汝其與汝母便道而去遂從王行爲慶尙道點軍兵馬使旣而克復京師而錄功臣公功在二等知公者皆謂公屈盍訟之公咲而不答歲甲辰進奉翊大夫判典儀寺事歲壬子拜典法判書甲寅冬封坡平君階大匡公甞曰吾家侍中公而下凡七世登科而吾父子悔之何及丙辰冬十二月十二日以病卒于第享年七十明年正月甲寅葬于松林先塋夫人崔氏奉常大夫司憲掌令諱甬之女生四男二女長曰虎奉翊大夫密直副使上護軍次皆夭女長適判內府事金懷祖次適知驪興郡事柳元茂孫男女若干人密直公娶知善州事李公元厚之女生一男二女男曰云云女長適中書舍人方恂次適閤門祗候南在內府生三男四女長男曰瞻門下注書次曰䀒次曰盼幼女適護軍金餘皆幼驪興生六男一女長曰某次曰某餘皆幼密直公端謹有志善書能碁甞爲玄陵所知玄陵命書古詩以進蓋賞其筆跡也公曰月露風花非所以陳於王前乃書欺暗常不然欺明當自戮難將一人手掩得天下目旣進上謂其譎諫寖疎之君子曰公於是不負所學矣嗚呼坡平可謂有子矣密直公又曰吾父平居不喜飮酒當餘又無量生而無疾性尙儉約少肉食暑必具服寒不重裘其於聲色遠之又甚通制條格本國判旨留意尤深天不與之命柰何柰何予於是益知公之有子也銘曰
齡平之封王錫尹公出師關國乃碑其功襲封開府在于公祖公克嗣之惟仕之膴惟公之名惟誼之明位不稱德孰司其平幽堂之誌于永厥眎匪我之謏公有賢子
〔출전 : 『牧隱文藁』 권18〕
파평군 윤공묘지명 병서(坡平君 尹公墓誌銘 幷序)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 1361) 겨울 사적(沙賊 : 홍건적)이 서울을 압박하자 현릉(玄陵 :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난가기로 결정했다.
관직을 버리고 도망간 사대부들이 많았으나, 파평군(坡平君) 윤해(尹侅)는 전 복주목사(前 福州牧使 : 지금의 경북 안동)로 필마(匹馬)로 임금을 모셨다.
광주(廣州)에서 객사(客舍) 문에 앉아 담소를 하면서 태연하였다. 내가 비로소 얼굴을 알게 되었는데, 대체로 뛰어나고 큰 인물이었다.
내가 병중에 있을 때 일찍이 나아가 문안을 하였는데, 그 안색이 심히 나를 애달프게 여기는 듯 하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것을 감히 잊을 수 없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5년이 되었는데, 내가 병으로 인해 변변하지 못한 글로 묘지명을 짓게 되었다.
공의 묘인들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공의 이름은 해(侅), 자는 자기(子奇)이며 파평현(坡平縣) 사람이다. 13대조 신달(莘達)은 삼한공신으로 공신인 선지(先之)를 낳았다.
공신은 좌복야(左僕射) 금강(金剛)을 낳았으며, 좌복야는 우복야(右僕射) 집형(執衡)을 낳았다.
우복야는 추충좌명평융척지진국공신 개부의삼사 상주국 수태위문하시중 판이부사 영평군개국백 식읍 3,500호 실봉 300호 감수국사 문숙공 관(推忠佐命平戎拓地鎭國功臣 開府儀同三司 上柱國 守太尉門下侍中 判吏部事 鈴平郡開國伯 食邑三千五百戶 實封三百戶 監修國史 文肅公 瓘)을 낳았다. 예종때 여진이 우리 국경을 침략했는데, 문숙공(文肅公 : 尹瓘)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물리쳐, 여진이 멀리 달아났다. (이에) 돌을 세워 그 공을 기록하고 돌아왔다.
문숙공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 언이(彦頤)를 낳았다. 언이는 뜻과 기상이 있고 삶과 죽음의 이치에 통달하였다. 임종때 시 한편이 있었는데, 선가(禪家)의 말과 비슷하였다.
평장사는 상서병부시랑(尙書兵部侍郞) 돈신(惇信)을 낳았고, 시랑은 위위소윤(衛尉少尹) 상계(商季)를 낳았다.
소윤은 대상녹사(大常錄事)인 복원(復元)을 낳았다. 공에게 고조(高祖)가 된다.
녹사는 증조인 감찰어사(監察御史)인 순(純)을 낳았다.
어사는 조부 영평부원군(鈴平府院君)인 보(珤)를 낳았다.
영평은 아버지인 소부윤(少府尹)인 암(暗)을 낳았다. 암은 만호 판삼사사(萬戶 判三司事) 박지량(朴之亮)의 딸에게 장가들어, 원정(元貞) 정미년(충렬왕 33, 1307 ) 7월 모일(某日)에 공을 낳았다.
공은 14세에 문음(門蔭)으로 주릉직(周陵直)에 임명되었다.
지원(至元) 경진년(충혜왕 복위1, 1340) 흥위위 정용호군(興威衛 精勇護軍)으로 관품을 뛰어 임명되었으며, 관계(官階)는 봉선대부(奉善大夫)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이듬해 봉상대부 겸 통례문부사(奉常大夫 兼 通禮門副使)가 되었다.
공은 일어나고 절하며, 움직이는 동작이 모두 법도에 맞았다. 호군(護軍) 40여 인이 매우 날래고 호방하여 법도에 구애받지 않았으나, 공은 예법(禮法)으로 행동하여 지금까지 본보기가 되고 있다.
임오년(충혜왕 복위3, 1342) 친어군호군(親禦軍護軍)으로 승진하였다. (국자)감시(監試) 주사(主司)인 민사평(閔思平)의 가노(家奴)가 성밖에서 땔나무를 채취하면서 생소나무를 잘랐다. 반주(班主)인 인안(印安)이 마침 교외로 나갔다가 보고, 법으로 금하고 있어 그것을 금하였다. 가노가 그가 반주임을 알지 못하고 떼 지어 그를 구타하여 다리를 상하게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중방(重房)에게 주사(主司 : 민사평)의 집을 무너뜨리게 하였다. 공은 “노비에게 실로 죄가 있습니다. 주인(민사평)이 어찌 죄를 함께 져야 합니까. 지금 많은 선비들이 과거의 발표에 주목하고 있는데, 주사의 집을 무너뜨리면 주사는 무슨 마음으로 답안지를 살펴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왕의 화가 풀려, 그 일이 잠잠해졌다.
계미년(충혜왕 복위4, 1343) 중정대부 삼사좌윤(中正大夫 三司左尹)으로 승진하였다.
공은 청렴하고 근면하여 보흥고(寶興庫)의 관원이 되었다. 3년만에 왕이 소환되어 원나라 수도에 갔을 때 정승(政丞) 홍빈(洪彬)이 돈과 물품을 회계해 보니, 홀로 공만이 조금도 부정한 바가 없어, 홍공(洪公)이 이를 칭찬하였다.
기축년(충정왕 1, 1349) 대신(臺臣)을 선발하게 되자, 집정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윤모(尹某)는 대대로 예법을 지키고 맑은 절조를 숭상하여 왔으며, 또 기강의 대체를 알고 있어 이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드디어 사헌집의(司憲執義)로 옮겨, 건의한 많은 것들이 비록 모두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명성이 당시에 크게 떨쳤다. 지평(持平) 정국경(鄭國經)도 또한 청렴하고 삼가며, 의기가 있어 당시 사람들의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당시 감찰원(監察院)에 “집의(執義)는 기강를 잡고, 지평(持平)은 절개를 지켰다”는 말이 있어, 사대부들이 이를 흠모하였다.
경인년(충정왕 2, 1350) 봉순대부 판소부시사 지전법사사(奉順大夫 判少府寺事 知典法司事)로 판결을 공평하고 마땅하게 하여, 사람들이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현릉(玄陵) 5년 을미년(공민왕 4, 1355) 감문위 상호군(監門衛 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중방(重房)의 여러 아전들이 평소 공의 이름을 알고 있어,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했다. 한 달을 지낸 후 복주목사(福州牧使)가 되었다. (목사로서) 조치하는데 법도가 있어, 백성들이 은혜를 입었다. 신축년(1361, 공민왕 10) 겨울 지금 밀직공(密直公)인 아들에게 “나는 행재소(行在所 : 임금의 임시 거처소)로 가지 않을 수 없으니, 너는 어머니와 함께 지름길을 따라 가라” 하고, 드디어 왕을 따라가 경상도점군병마사(慶尙道點軍兵馬使)가 되었다.
얼마 후 서울이 수복되어 공신을 선정했는데, 공의 공(功)은 2등이었다. 공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공이 억울한 데 어찌 호소하지 않느냐”고 하였지만, 공은 웃고 대답하지 않았다.
갑진년(공민왕 13, 1364) 봉익대부 판전의시사(奉翊大夫 判典儀寺事)에 임명되었다.
임자년(공민왕 21, 1372)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고, 갑인년(공민왕 23, 1374) 겨울 파평군(坡平君)으로 봉해지고, 품계는 대광(大匡)이었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시중공(侍中公 : 윤관) 이래로 무릇 7대간 내리 과거에 올랐는데, 우리 부자가 후회한들 어찌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병진년(우왕 2, 1376) 12월 12일에 병으로 자택에서 별세하였다 향년 70세이다.
이듬해 정월 갑인일에 송림(松林)의 선영 아래에 장사하였다.
부인 최씨는 봉상대부 사헌장령(奉常大夫 司憲掌令) 용(甬)의 딸로, 4남 2녀를 낳았다.
맏아들 호(虎)는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奉翊大夫 密直副使 上護軍)이다. 다음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맏딸은 판내부사(判內府事) 김회조(金懷祖)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지여흥군사(知驪興郡事) 유원무(柳元茂)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남녀 몇 명이 있다.
밀직공(윤호)은 지선주사(知善州事) 이원후(李元厚)의 딸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아무개요, 큰 딸은 중서사인(中書舍人) 방순(方恂)에게, 다음은 합문지후(閤門祗候) 남재(南在)에게 각각 시집갔다.
내부(內府 : 김회조)는 3남 4녀를 낳았다. 아들 첨(瞻)은 문하주서(門下注書)이며, 다음은 우(盱)와 반(盼)인데 아직 어리다.
딸은 호군(護軍) 김간(金侃)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지여흥군사(知驪興郡事 : 이원후)가 6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아무개요 다음은 아무개이며,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밀직공(윤호)은 사람됨이 단정 근신하고 큰 뜻이 있었으며, 글씨를 잘 쓰고 바둑에 능하였다.
일찍이 현릉(공민왕)에게 알려져, 현릉이 고시(古詩)를 써서 바치라 하였다. 이는 대개 필적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공은 “달 아래 맺힌 이슬과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을 읊는 따위의 시는 왕 앞에 바칠 것이 못 된다” 하고, 드디어 “어두운 데서는 속일 수 있다 하나 항상 그런 것도 아니요, 밝은 데서 속이려면 마땅히 스스로를 욕되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의 손을 가지고 천하 사람의 눈을 가리기는 어렵도다” 라고 써서 올렸다. 임금이 “이는 나를 넌지시 간하는 글이다” 하고, 공을 점점 멀리하였다. 군자들은 “공은 이에 그 배운 바를 저버리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아, 파평군(坡平君)은 아들을 잘 두었다고 할 만하다.
또 밀직공은 “우리 아버지께서는 평일에 술을 잘 마시지 않으셨으나 마실 때는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었고 평생 질병이란 없으셨습니다.
천성이 검약을 숭상하여 육식하시는 일이 적었으며 더운 때에 반드시 옷을 갖추어 입으셨고, 추위에는 갓옷을 겹쳐 입지 않으셨으며, 성악(聲樂)이나 여색(女色)을 더욱 멀리하셨습니다. 또 원나라와 본국의 법과 제도에 해박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수명을 주지 않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이에 더욱 공이 어진 아들을 두었음을 알았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영평(鈴平)의 봉군(封君)을 왕이 윤공에게 주었네.
군사를 내어서 국토를 개척하니, 이에 그 공적을 비에 새겼네.
개부(開府)를 승봉(襲封)한 분은 공의 조부이네,
공이 능히 뒤를 이어 후한 벼슬을 역임하였도다.
공의 이름은 오직 그 예의의 밝음이네.
그 지위가 덕에 맞지 않으니, 누가 그 공평함을 맡았는가.
무덤에 이를 기록하여 그 길이 앞날에 보이리라.
(이것은) 나의 아첨이 아니요, 공이 어진 아들을 두었음이로다.
첫댓글 소부공의 장손 판도판서(휘 염)공은 불사이군의 절의로 진양땅 집현면 (현, 대곡면)입방에 은거하였으며 사촌 정후공(휘 호)은 개국공신이 되어 불천지위로 덕산재와 반장재에서 망제를 올리고 있지요. 저의 19대조이며 창녕 연곡문중과 가창,밀양, 청도, 사천, 함안백산문중과 이방은 파주쪽에서 세거, 숭조 경종하며 화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소부공의 장손께서 고려가 망할 징조가보이자,불사이군 절의로 집현면 삿갖마을로 피신을 하셨는데,
세월이 흐른후 많은 후손들이 과거급제 출세하자 -이번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소부공 후손이 왜군을 물리치니
왜놈들이 우리 윤문 사는 동네를 침범하고 못살게 굴어,외신재공께서 5살 어린나이에 재령이씨 어머니의 손을잡고 피난을 가신곳이 창녕땅이라.
부디 앞으로는 후손들께서는 영화롭고 축복받으며 잘 사십시요.
경남에서는 창녕땅에 우리 파평윤문의 후손들이 제일 많고, 종친들 활동도 열성적입디다.
금년에 청년회원들이 총회하고,노인종친들 대접하는데 초청되어 갔다가 윤재옥 국회의원도 오고
대접 잘 받고 왔습니다.,
윤해-판서공-13세- 소부공파-1306-1376(70세졸)-14세-윤호-정후공-(위화도회군)- 개국공신-파평부원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