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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항 密航
복수는 꿀보다도 감미롭다.
― 호메로스
경기도 화성시 궁평항.
간척지에는 마을은 보이지 않고 갈대만 무성한 개활지가 넓게 펼쳐져 있다. 화성호에는 황혼녘이 되어 겨울 철새들이 군무를 추며 한가롭다. 일직선으로 곱게 뻗은 화웅방조제 도로에는 초겨울 오후 5시가 넘어서자 벌써 차량 통행이 뜸하다. 띄엄띄엄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이 보인다. 그 빛이 바다와 간척지로 공간을 둘로 갈랐다. 바다로부터 물안개가 피어오른다. 쓸쓸한 해안선의 창백한 색조 속에 건너편 미군 비행장과 포 사격장이 있는 매항리의 고온이포구가 아스라이 보였다.
그날은 첫눈이라고 하기에는 그저 싸락눈이 조금 내렸다. 그러나 눈은 땅에 내리자마자 녹아 사라졌다. 지금은 날씨가 완전히 개었다. 연안 근처에서 채낚기 어업을 하던 작은 어선들이 벌써 돌아오고 있다.
궁평항 배머리 쪽 외진 곳.
등산복 차림을 한 사십 대 초반의 남자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연신 담배를 피워대며 초조하게 서성거리고 있다. 자세히 보면 얼굴에 다크서클이 깊게 패여 있다. 가끔 멍멍하기 이를 데 없는 커다란 두 눈으로 바다 쪽이나 허공을 바라보았다.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틀림없다.
그때 때맞춰서 검은색 쏘나타 승용차가 도착했고 역시 낡은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초행길인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운전석에서 내렸다. 기다리고 있던 그 남자가 구십도 각도로 깍듯이 인사를 한다.
“회장님! 회장님! 멀리서 오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길은 안 막혔는지요.”
“서해안 고속도로 비봉나들목까지는 괜찮았지.”
“초겨울인데도 겨울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바다는 쌀쌀할 겁니다. 바람이 많이 부니까요.”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다네. 내 형편이 지금……”
“날씨가 좋으니까…… 모든 게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김 이사, 준비는 잘 된 거지.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마지막 기회이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리고…… 내가 떠난 후에도 절대적으로 기밀을 요하네.
이 일에 관한 한 무덤 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입을 꿰매고 있어야만 하지.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거야. 부디 신중하게.
그러면 말일세…… 얼마간 지나서…… 사람들은 건망증이 심하니까 제풀에 꺾여서 모두들 잊어버릴 거야. 영원한 망각…… 그게 필요한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누구입니까. 언제 회장님의 지시를 추호라도 어긴 적이 있었습니까.”
“그건 그래. 나는 지금 김 이사밖에 없지. 난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 안 했지. 마누라 년도 안 믿으니까. 돌아가거든 마누라 뒤도 챙겨 봐야할 거야, 눈치가 좀 이상하거든. 천하 사기꾼인 내 눈을 속일 수는 없겠지.
내게는 직관력과는 다른 제7의 감각이 있으니까. 내가 오랫동안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고 발기부전이었다네. 돈을 뒤로 챙기고 있는데 말이야, 통장에 넣어두었던 돈을 몽땅 빼서 자기 비밀 구좌로 옮겨 버렸더라고. 나에게 더 이상 기대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 여자도 불안했겠지, 틀림없이 불안했을 거야.
나는 마누라까지 연루되어 위험에 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던 거야. 물론 여자란 워낙 입을 나불거려서 도저히 믿을 게 못 되니까 마누라 역시 믿지 못하는 면이 있었던 거지.”
“알겠습니다. 제가 은밀하게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이제부터 서울 쪽 이야기를 해보란 말이야. 아주 궁금하거든. 내가 잠수탄 지가 몇 개월이나 되었으니까. 아무리 감쪽같이 은신과 도피를 한다고 해도 지겨운 일이야, 정말 지겹지.
평생 제일 많이 책을 읽었던 거야.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정말 미치도록 무료했으니까. 하지만 기나긴 기다림의 밤은 항상 초조하고 불안한 법이거든. 가끔 악몽이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지만 아주 불길한 꿈을 꾸게 되지.
한번은 이상한 꿈을 꿨는데 옛날 우리 교회의 설교단 뒤쪽 나무 십자가에 예수님이 혀를 빼물고 목을 매달고 있는 거야. 그 바로 옆에서 유다가 음흉하게 웃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이나 유다 모두 어디서 많이 본 한국인처럼 생긴 거야.
내가 그놈의 꿈 때문에 식은땀을 흘렸었지.”
“지금까지 잘 견뎌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상한 꿈은,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개꿈이 틀림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남았군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 회장님은 누구나 잘 아는 유명한 교회의 집사님 아니었던 가요?”
“옛날 일이야. 아주 옛날……”
“김병만 사장님은 동부지검 5호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계속 잡아떼고 있답니다. 동부에서 막 옷을 벗은 부장검사 출신 변호사를 샀습니다.”
“김 사장은 실제로 알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출근도 거의 안하고…… 회사 인감도 김 상무가 보관하고 있다가 분양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으니까.”
“그건 그렇지요.”
“그 친구 은행 지점장 출신이야. 그런데, 그러면 뭐해. 이것저것 손댔다가 퇴직금 다 까먹고 빚 갚으려고 아파트까지 날려버렸지. 그랬으니 알거지가 된 거야.
우리 아버지도 시골에서 농협에 다녔지만 은행원 출신이라는 게 도대체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쪼다 병신들이라고.
내가 월 500만원 주기로 하고 바지 사장으로 내세운 거야. 그 사람 앞뒤 잴 것도 없었어. 굶어 죽을 판에 감지덕지했지.
그자는 돈 받은 만큼은 대가를 치러야 할 거야,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늙은 사무장이 보석으로 바로 풀어주겠다고 장담하더니만 아무튼 보석이 안 되었습니다. 보석을 실제 신청하기는 한 것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지금은 백 프로 집행유예로 풀어주겠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만……”
“변호사 사무장 말은 믿을 게 못 되지. 그것들 찍새니까 거의 사기꾼 수준이지. 걔들도 제 몫을 챙겨야 하니까, 아마 뽀찌로 반은 뗄걸. 그런데 얼마나 준 거야?”
“제가 집행유예 조건으로 오천만 원 줬습니다. 너무 불쌍해서 눈 딱 감고 줬습니다. 회장님…… 어쩌겠습니까.”
“뭐야! 그 돈이 무슨 돈인데!”
이따금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지 않고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정박등이 켜진 낡은 화물선이 보인다. 회장님이 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물도 없이 꿀꺽 삼켜버렸다. 김 이사도 그 약을 알고 있다. 회장님이 정기적으로 먹는 한약으로 만든 진통제 겸 두통약이었다. “이걸 몇 시간마다 삼켜야만 하네. 요즘에는 이 약 기운으로 살고 있는 셈이지. 난 강한 남자는 못 되는 거야. 차라리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김 이사는 더 이상 회장님의 추궁을 피하려고 눈치를 살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피해자들이 대책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가지고 청와대와 국회 정무위원회, 대검찰청에 진정을 넣고, 일부는 계속 회사 사무실을 점거해서 농성 중에 있습니다.
신문에는 안 났습니다만…… 피해자들 일부가, 피해자들도 내부적으로는 강경파와 온건파가 갈려있는데 소수파인 강경파 쪽에서는 숨은 주범을 검거하지 못하고, 재산 추적도 지지부진하다고 해서 송파 경찰서장을 직무유기로 고소했습니다.”
“멍청한 것들, 무슨 진정을 하고 그래, 쓸데없는 짓이야.
사무실도 그렇지, 사무실에 휴지 조각밖에 더 있어.”
“그 사람들도 안타깝습니다. 모두들 무척 흥분해서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고. 여자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너무, 너무 불쌍하지요.”
회장님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를 시종일관 똑바로 바라보았다. 도전적인 태도로 콧잔등을 실룩거렸다. 갑자기 그가 낯설게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그의 평소 얼굴에서 다른 얼굴을 찾아낸 것처럼 말이다.
회장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사람 왜 이래.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어. 갑자기 휴머니스트가 된 거야, 때려치워, 때려치우라고. 사기꾼은 그런 것에 눈을 딱 감아야하고 뻔뻔스러워야 되는 거야.
다른 사람의 아픔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아야 된단 말이야. 그리고 말이야 냉철해야만 하지. 독사처럼 냉혈한이 되어야만 하는 거야.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험한 세상에 연민이나 동정은 금물인 거지.
그러니까 스스로 자책해서도 안 되고 혐오감을 느껴서도 안 되는 거야. 그리고 눈 하나 깜짝 않는 배짱이 있어야만 해.
암, 그렇고말고. 사기에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해서 사람을 녹초로 만들어 버리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나는 그걸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 올려야만 한다고 믿고 있어…… 나는 사기술의 마술사, 사기술의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거야.”
“회장님 말씀은 너무나 지당하십니다. 그래서 존경합니다.”
“그런데…… 사기는 대단한 게 아니야. 사기의 본질은 그저 거짓말일 뿐이지…… 좀 더 교묘하고 정교한 거짓말.
모든 종류의 사기에는 필수적으로 거짓말이 들어가지.
거짓말 안하는 사람…… 누가 있어? 오직 인간만이 거짓말을 씨부렁거릴 줄 알기 때문에 거짓말은 인간의 본성인 거야.
다시 말하지만 기만과 거짓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인 거지. 그걸 저명한 심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냈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인간의 본성에 따른 행동을 한 거밖에 없다고. 그걸 알아야지.
우리가 흔히 즐기는 포커가 있지 않은가. 포커란 게 이기려면 속임수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네. 자네도 포커라면 사족을 못 쓰지 않은가.”
“그렇지만 저는 포커해서 돈을 따본 적이 없지 않습니까. 회장님만…… 모든 패를 훤히 꿰뚫고 있으니까요.”
“본론으로 다시 들어가자고. 인간은 원초적으로 그랬던 거야.
그래서 카인은 시기 질투하고, 거짓말을 하고, 배신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인간의 진정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지.
인간들 모두 매일 빠지지 않고 거짓말하며 살고 있다고.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비난하던 사람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했을 때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었겠어.
뭐니 뭐니 해도 진짜 고수는 정치한다는 사람들이지.
바로 그거야. 문제는 거짓말에 속는 사람, 거짓말을 믿는 사람이 문제인 거야. 돈을 잃거나 손해를 보는 것은 단지 그 결과에 불과한 거라고.
그러니까 사기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가 문제가 있는 거야. 누가 속으라고 했냐 말이야. 아무리 그럴 듯한 이야기로 현혹한다고 해도 정당한 대가보다 3배, 4배 훨씬 많은 이득을 주겠다고 하면…… 그건 틀림없는 사기라는 거지.
많은 피해자들이 사기꾼의 거짓말에 속기보다는 자기 마음속 탐욕 때문에 사기를 당한단 말이지. 아무리 뻔한 속임수라도 피해자의 욕망과 만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된다네.
그래서 사기꾼과 피해자는 서로 피터지게 머리싸움을 하는 거라고.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을 4천 냥에 팔아먹었는데 그 돈이면 그때 황소 60마리를 살 수 있었거든. 당한 사람들이 바로 한양 상인들이었어. 어수룩한 평양 양반 속여서 쉽게 돈 벌겠다고 너무 욕심 부리다 당한 거지. 세상에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인간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머리가 아주 좋은 부류하고 반대로 머리가 너무 나쁜 부류가 있는 거야. 머리가 너무 좋으면 터무니없는 욕망 때문에 눈이 뒤집혀서 자기 꾀에 넘어가는 거고. 반대로 머리가 너무 나쁘면 아주 어리석기 때문에 남한테 속아 넘어가는 거라네.”
“회장님은 정말 천재이십니다. 신이나 다름없지요. 주위에서는 모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모두가 혀를 내두르지요. 그 기발한 상상력을 누가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치밀한 기획과 조직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귀신같은 변신술은 최고이지요.
저희 같은 둔재들은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지요.”
“천재는 무슨…… 의지가 중요해. 사기도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동시에 목숨을 걸고 실행해야만 성공하는 거야. 자네는 주인에게 그저 충실하니까…… 그게 집사의 자질이야.
모두들 알아서 다행이구만. 나를 당할 자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그런데…… 누가 속으라고 했냐 말이야. 다시 말하지만 자업자득인 거지. 돈에 눈이 뒤집혀가지고.”
“제주도 건은……”
“제주도 땅만 해도 그래…… 거기에서 함덕해수욕장은 보이지도 않고…… 해변 조망이니 한라산 조망이니 했지만 조망은 무슨…… 첩첩산중에 있는 급경사진 땅인데 그게 어떻게 개발이 가능하냔 말이야…… 개발 좋아하시네. 거기에 무슨 리조트니 최고급 호텔을 짓고 27홀 골프장이 가능하냔 말이야. 도저히 허가가 날 수 없는 땅이야. 건설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 수 있느냐 말이야. 그 땅은 담보 가치도 없으니깐 은행에서 거들떠보지도 않지.
가령 말이야…… 개발 계획이 예정대로 시행된다고 가정하더라도 무슨 재주로 10년간 실투자금 대비 연 30, 50프로씩 고정 수익이 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이야. 그러니까 투자를 결심하기 전에 한번 가서 제 눈으로 확인해 보면 되는데 말이지.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을 거야. 시청에 전화를 해서 개발 계획이 수립 되어 있는지 확인해보면 되는 거야. 그러면…… 아무리 교묘하게 신문 광고를 때리고 투자 설명회를 개최해도 바로 알 수 있는 거야. 글로벌 1위 브랜드 파워인 세계적인 호텔 체인이 거기에 어떻게 합작투자를 할 수 있겠는지, 왜 의심을 해보지 않은 거야.”
“말씀을 들어보니…… 회장님은 사기학의 교수님이라고……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날 진짜 알아봐 주는 사람은 자네밖에 없어.
다시 말하지만 누굴 탓하겠어. 폭력의 세계에서는 두려움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지만, 그러나 사기꾼은 어리석음을 이용해서 지배하는 거라고. 피해자들은 어리석을 뿐이지, 정말 어리석지.
그러나 말이지, 나는 내 운명을 예감하고 있지. 내가 한때 신실한 교회 집사였는데 하느님에게 많이 실망했었지.
나자렛 예수의 일가인 예수 그리스도, 요셉 그리스도, 마리아 그리스도 등등 그리스도 집안의 어처구니없는 지독한 사기에 실망한 거야. 예수가 정액도 없이 그냥 태어났다는 거야.
나는 요한묵시록에서 말하는, 알파와 오메가 또는 인류의 종말론을 믿을 수 없는 거야. 그 마지막 성경은 아주 애매모호한 암시를 하고 있는데 그건 영락없는 사기이거든.
하지만 나는 종말을 알 수 있는 거야. 죄가 쌓이고 쌓여 하늘에 닿고, 하느님이 그 악행을 기억하시고…….
나는 결코 666이 될 수는 없어. 그건 아니지. 언젠가 그들한테 잡히면 내 모가지를 비틀어 버리겠지. 암전. 사기꾼의 말년이 좋을 수는 없을 거야. 그것만은 확실하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기꾼은 혀의 악과를 먹으리라.
예상보다 훨씬 빨리 종말이 올지도 모르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회장님!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두렵습니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든다네……”
“경찰 쪽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제가 연락해도 그 쪽에서 만나는 것을 피하고 있습니다.”
“송파서 전담반 형사들이 연고지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는 모양인데 내가 그렇게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지. 고향에 가본 지는 10년도 넘었고. 내 주민등록지는 20개가 넘지만 전부 가짜야.
걔들이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있다는데 내가 도망치면 쏘려고 말이지. 난 현장에서 절대로 도망치지 않아, 현장에는 없을 테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는데 내 꽁무니만 한참 뒤에서 쫓고 있는 거야. 감히 나를, 어림없는 일이지. 걔들은 너무 멍청하고 무능하다니까. 대충 일하니까 말이지……”
“경찰들…… 그렇지요?”
“그런 애들한테 국민의 혈세로 월급을 주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지. 나는 경찰 쪽에 확실한 정보망이 있는데, 그 자식들 내 돈 많이 울궈 먹었으니까, 코가 꿴 거지. 나를 비호하는 막강한 세력이 있지.
고위층은 내가 빨리 국외로 달아나 주길 바라는 거야. 아직 해경 쪽에는 수배령이 안 내려갔을 거야. 2, 3일 후에나. 그것들은 만날 뒷북만 치고 있지. 그래서 지금은 입출항 통제가 없는 거지. 지금이야말로 밀항의 찬스…… 절호의 찬스인 게지.”
“회장님은 예전에도 몇 차례 수배를 받고 기소중지가 되었지만 실제 체포된 적이 없었지 않습니까.”
“바지 사장한테 떠넘기고 잠수를 탔지. 항상 허공 속으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거야. 하지만 날 흉내 낼 필요는 없겠지. 따라할 게 못 되는 거야. 결국 파멸이 있을 뿐이야.”
지금은 대조기여서 밀물은 최고조에 달했다. 거대한 잿빛 장막이 해안선을 뒤덮었다. 간단없이 밀려드는 파도가 물마루를 훤히 드러낸 채 거칠게 철썩거리며 방파제를 때렸다. 황혼녘의 바다는 일몰이 가까워짐에 따라 붉게 물든다. 하얀 갈매기 몇 마리가 방파제 주위로 어슬렁거리며 날아다닌다. 모텔의 간판에 벌써 네온사인이 들어왔다. 그때 새벽에 먼 바다로 출항했던 남루한 어선들이 피곤에 찌든 어부들을 싣고 찢어진 깃발을 펄럭이며 그제서야 항구로 돌아오고 있다.
김희걸 회장님이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럼, 자세히 이야기해봐.”
“네, 그렇습니다. 저기…… 그러니까…… 배는 30분쯤 지나서 출항할 예정입니다. 이곳 어선이지요. 선원들은 전문 밀항꾼들이 아니라 순박한 어부들입니다.
궁평항에서만 평생 어부 생활을 했다고 했으니까…… 서해 쪽 바다는 자기 손금 보는 것처럼 훤하겠지요.
가급적 선원들이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그들도 성깔이 있으니까요. 이 가방에는 오십만 달러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중국 돈 오만 위안은 별도로 드리겠습니다. 현지에 도착하면 당장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 잘했어. 자네는 역시 흠잡을 데 없는 훌륭한 집사이지. 언제든지 준비가 철저하거든.”
“어선에는 자기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2배나 많은 3천만 원을 줬습니다. 해경 경비선을 피해서 공해상으로 나가면 중국 쪽 배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쪽에도 이미 선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리고 중국 쪽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척 능청을 떨다가 칭다오 항에는 다음 날 밤늦게 도착할 예정입니다.
하지만 칭다오에 가시면 몸을 숨기십시오. 중국의 명산인 태산에는 오를 생각을 아예 하지 마십시오. 한국 관광객이 너무 많이 찾아옵니다. 회장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권을 잘 간수해야할 것입니다. 가짜이기는 하지만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그렇군. 가짜 여권에 가짜 비자가 찍혀있다는 말이군. 그런데 그 넓은 중국에서도 결국 숨어서 지내야한다는 거지.”
“회장님…… 제게 알려줄 게 있을 것 같은데요.”
“그렇지. 내 오피스텔의 금고 번호를 알려주겠어. 그 속에 만 원권 구권 화폐와 대포 통장이 150개쯤 들어 있을 거야, 모두 합하면 20억 원이 넘겠지. 마지막 비자금인 거지.
그걸 중국 조선족 명의를 빌려 소액으로 쪼개서 송금하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물론입니다…… 제가 누구입니까…….”
“그렇지, 그렇고말고. 송금이 종료되면 말이야 김 이사가 중국으로 와야만 하지. 수사 상황과 회사의 파산 처리, 재산정리 상황을 보고하라고. 내가 잠깐 중국에 머물겠지만 다시 인도네시아 발리로 갈 수 있도록 절차를 밟아 주어야 할 거야.
자넨 몸이 자유스럽지 않나 말이야. 경찰 쪽에서는 자네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 없지. 내가 자네 신분을 끝까지 숨겼거든. 자네가 정말이지 부럽군, 부러워. 자네의 자유가 한없이 부러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백골이 난망입니다. 물론입니다……. 잘 알겠습니다. 틀림없이 잘 처리할 것입니다…….”
“좋아…… 좋다고. 자네는 의리의 돌쇠라고…… 나에게는 둘도 없는 수호천사라고 할 수 있지.”
“밖이 춥습니다. 차 안에서 기다리시지요. 제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회장님이 떠나시면 차를 가지고 올라가겠습니다.”
“수고했어, 수고가. 당분간 만날 수 없겠군. 잘 있으라고. 그런데 술을 작작 마시라구, 안 그래.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말일세.”
“회장님…… 안녕히 가십시오…….”
회장님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었다. 손에 힘이 하나도 없다. 그는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그 손을 몇 초 동안 힘껏 쥐었다 놓았다. 회장님이 돌아섰다. 김 이사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회장님의 뒷모습을 언뜻 바라보았다. 구부정한 등이 많이 지쳐 보이고 초라해 보였다. 뒷모습은 진실하다. 앞모습은 꾸미거나 감출 수 있겠지만 뒷모습만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 * *
“준비는 잘 되었나? 기름은 충분한가?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지.”
“예, 예. 형님, 별것 아니지요. 엔진은 손을 좀 봤습니다. 부속을 여러 개 갈아 끼우고 기름칠도 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묶어놨더군요. 기름은 만땅으로 채웠지요. 비상용도 준비했구요. 그리고 심해낚시를 할 수 있는 외줄낚시 도구들, 낚싯밥은 크릴과 갯지렁이, 혹시나 해서 루어낚시를 위해 플러그를 많이 준비했습니다.”
“대충 준비를 한 것 같군. 그런데 너희들이 바다낚시, 그것도 밤낚시의 묘미를 알기나 해? 백령도가 그립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진짜 낚시를 해야 할 겁니다. 낚싯줄을 바다에 던져 놓고 기다리면서 마음의 충격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지요.”
“오늘 밤 물때가 맞을 거니까 낚시 도구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게 좋겠지. 낚싯줄은 튼튼한 거야? 간혹가다 큰 놈이 걸리면 그자식이 몸부림칠 때, 그럴 때에는 안 끊어져야 하니까 말이야.
낚싯대의 드래그를 끝까지 풀었다가 그 녀석이 힘이 완전히 빠지거든 천천히 조이라고.”
“그렇지요. 정말 튼튼한 밧줄을 준비했어요. 다른 용도도 있으니까요. 그리고 뱃멀미 알약, 비상용 마취제 주사, 미국 제닝스사 22구경 J-22 권총과 탄환 3발이죠.
권총은 부산 감천항에서 러시아 선원한테 백 불 주고 산 것이지요. 만약의 경우 이 총이 필요할 때가 있을까요?”
“총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어쨌거나 너희는 화성 출신 어부인 거지. 그 작자한테는 그렇게 말했어.
언제나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서 한 번도 처벌을 받지 않았으니까……. 그 살찐 미꾸라지도 이번만은 안 될걸.”
“틀림없이 지시한 대로 해야겠지요. 물건은 어디에 있지요?”
“가방에 들어있어. 그걸 챙기라고. 그러면 우리 사이 계산은 깨끗이 끝나는 거야. 서로 연락을 해서는 안 되지. 위험한 일이지.
경찰이 눈치채면 안 되니까.
다시 말하면 대포폰도 사용해서는 안 돼. 임무가 끝나거든 그걸 바다에 던져 버리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야겠지요.”
“임무가 끝나고 항구로 돌아오거든 선주한테 배를 부두 그 자리에 묶어 놨다고 말하라고. 선주는 지금 심한 디스크 증세로 꼼짝없이 집에 누워 있거든.
너희들은 노련한 바다 낚시꾼이라고 했어. 밤낚시를 환장하게 좋아하는. 임파도와 풍도 사이 바다까지 갔다 왔다고 말해. 그 근처가 연중 내내 농어, 우럭, 볼락 등이 잘 잡히는 바다낚시의 명소이거든.”
“그렇…… 그렇군요.”
“그래, 그래. 너희들에게 행운을 빈다.”
* * *
그 남자는 오십 대 중반으로 키가 크기보다는 오히려 작은 키, 165센티미터 가량으로 보인다. 몇 개의 머리카락만 남아있는 대머리에 주름 제거 수술을 받은 사람처럼 매끈매끈하게 펴진 얼굴이 둥글넓적하다. 원래는 살집이 포동포동하였을 텐데 지금은 조금 야위었다. 그러나 친근하게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왼쪽 다리를 약간 저는 것처럼 보인다. 심하게 다리를 절지는 않지만 분명 절름발이였다. 그는 변장하기 위해서인지 검은 테 안경을 썼는데 초조하게 썼다 벗었다를 반복하였다.
그는 배에서 풍기는 생선 썩은 냄새와 타르 냄새를 맡으며 코를 벌름거렸다. 갑판에는 찢어진 낡은 그물, 낚시 도구들, 통발, 부표, 갈고리, 꼬챙이, 장대, 밧줄, 크고 작은 플라스틱 통 등 어구들이 얽혀서 나뒹굴고 있다. 그가 발을 디딜 때마다 낡은 어선의 밑바닥이 삐걱거린다.
“회장님! 우리 회장님, 어서 오르십시오.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신들 궁평리 어부들인 거지? 선장 이름이 이백만이라고 했던가? 잘 부탁해……. 잘……. 그런데, 바람이 불고 있어. 바다가 약간 거칠군 그래.”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저는 평생 서해 바다에서 어부로 살았습니다. 저 친구는 원래 고향이 고흥인데 어쩌다 보니까 여기까지 올라와서 뱃일을 하고 있지요.
여기 이 친구는 처음에는 군산 쪽에서 잠수부 생활을 하였지요. 물일을 하다가 가는 귀가 먹었어요. 그러다가 잠수병이 무서워서 그만두고 배 조종을 한 지가 이십 년이 넘었습니다.
물론 정식 면허는 없습니다만, 그러나 눈 감고 헤엄쳐서 공해상까지 갈 수 있겠지요.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는 말없이 조타기를 잡고 그저 무심한 눈초리로 바다 저쪽을 응시하고 있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꼽추는 아니지만 등이 몹시 굽었다. 평생을 바다에서 산 그 바다 사나이의 몸에서 축축하고 비릿한 냄새, 진짜 바다 냄새가 풍겨 나왔다.
“그러니까, 안심이 되는군. 이 배의 키잡이는 잠수부 하다가 귀가 먹고 꼽추까지 될 뻔했군, 그래. 밀항 조직은 믿을 수가 없지. 돈 때문에 배신을 때린다고 하니까. 그래서 김 이사가 특별히 당신들한테 부탁을 한 거야.”
“일기예보에 의하면…… 요즈음 예보는 제법 믿을 만하지요. 오늘밤은 약간…… 약간입니다만 바람이 어느 정도 불고 파도가 조금 친다고 합니다.
뱃멀미가 걱정됩니다. 속이 편하게 이 멀미약을 드시지요. 견딜 수만 있다면 안 들어도 우린 상관없습니다만…….”
“글쎄, 선장이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선장은 꽁지머리를 뒤에서 묶고 검은색 군대식 모자를 쓰고 있다.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냉철하고 차분한 사람이다. 이따금 크게 웃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우리 임무는 공해상까지 가는 거고, 거기서 중국 배에 회장님을 옮겨 드리는 것입니다.”
“음, 여부가 있겠나.”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 배가 오지 않으면 어떡하죠. 바다에 그냥 던져 버릴까요. 그러면 회장님께서 직접 청도까지 헤엄쳐 가시겠습니까.”
회장님은 기분이 상하여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등골이 오싹한 농담이긴 하지만 단지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부드럽게 말한다.
“그럴 리가 있나, 김 이사가 하는 일은 틀림없을 거야.”
“그럼 출발합니다. 누추하고 냄새가 지독합니다만, 그러나 그 냄새는 뱃사람에게는 아늑한 고향 냄새 같지요.
그래도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약기운 때문에 약간 졸릴 것입니다. 한 잠 주무셔도……”
* * *
냉기를 품은 두터운 대기층이 바닷가를 뒤덮고 있다. 어선은 녹슨 철근들이 비죽비죽 삐져나온 방파제의 끝 쪽 계류용 밧줄에 매달린 채 여전히 출렁거리고 있다. 정박해 있는 다른 어선 무리와는 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있다. 230마력의 디젤 엔진을 단 5톤 목선 어선이다. 이제 제2희망호는 밧줄을 풀었다.
준비해라. 엔진을 돌려라. 우리는 출발한다.
부두의 조명등이 조는 듯 깜빡거리고 항구 밖 바다는 시커멓게 멍들어 더 이상 하늘과 구분이 되지 않는다. 부두는 깊은 어둠 속에 버림받은 듯이 남아있다. 디젤 엔진은 순조롭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어선이 통통거리며 항구를 서서히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곧바로 어선은 최고로 속도를 높였다. 배가 앞으로 쭉쭉 나아가면서 파도가 뱃전에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미 쪽에서 항적은 어둠 속으로 곧바로 사라진다. 잠깐 동안 배가 파도에 흔들렸다.
몇 시간 후 풍도를 지나고 덕적군도의 남쪽인 울도 근처 바다에 이르렀다. 멀리 항해등을 환하게 밝힌 채 중국 쪽으로 향해 가고 있는 컨테이너선이 보였다. 그러나 망망대해에 가녀린 별빛만이 깜빡거리고 파도는 여전히 거칠게 일렁거렸다.
밤이 이미 내려앉았다.
밤은 암흑이고 미지의 세계이다.
2013년 12월 5일에서 6일로 넘어가는 날의 차갑고 투명한 밤. \
회장님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여봐, 깜빡 졸았더니 목이 마르군, 물 좀. 벌써 공해상인가. 중국 배는 도착한 거야. 그런데 너희들 왜 날 밧줄로 묶어 놨지. 뱃멀미를 걱정한 거겠지. 그 정도는 아니야. 어서 빨리 풀어줘.
왼쪽 다리가 저리는 게 쥐가 난 것 같기도 하고…… 본래 성치 않은 다리인데 몹시 저린단 말이야.”
그는 환하게 켜진 집어등 불빛 속에서 낙담한 표정으로 과장스럽게 웃는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챈 것일까.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동물의 감각처럼 직감했을까. 그는 습관인 것처럼 우둘투둘한 손톱을 물어뜯는다. 그리고 잠깐 동안 딸꾹질을 했다. 그러고 나서 한 번쯤 결박을 풀려고 마지막 힘을 쏟아서 머리와 엉덩이를 비린내 나는 바닥에 부딪치며 버둥댄다.
배 밑바닥이 계속 삐걱거린다. 힘이 잔뜩 들어간 둥근 얼굴은 혈관이 팽창하여 붉어지고 눈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세 사람 중 두목인 사내.
그는 살기에 찬 빛을 가리듯 짙은 턱수염이 얼굴을 덮고 있고 여기저기 주머니가 지나치게 많이 달린 붉은색 등산 조끼를 입고 있다. 뭔가 비웃음이 어린 뚱한 표정이다. 팔짱을 끼고 입술을 실룩거리며 그 사내를 훑어본다. 그가 윗옷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몇 모금만 마신 후 구둣발로 담배꽁초를 신경질적으로 짓이긴다. 에이, 씨발. 그가 독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여기야. 적당한 곳이지. 던질 준비를 해.”
회장님은 그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격렬한 강박 충동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왜 그래? 돈 때문이야, 벌써 돈 냄새를 맡은 거야? 빠르기도 하지. 그러면 이 가방을 가져가란 말이야. 오십만 달러가 들어 있거든. 그리고…… 살려줘…… 난 반드시 살아야만 되지. 내 인생이 너무 불쌍하잖아. 먹고 살려고, 잘 살아 보려고 평생 사기만 쳤는데 말이지. 그랬으니 평생 주위에 알려지지 않도록 나의 대부분을 베일로 감싼 채 살아 온 거야. 아마 내 마누라도 나의 정체를 정확히 모를 거야.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불쌍한 인간인 거야.”
“물론이고말고. 네 놈은 불쌍한 놈이지. 정말 불쌍하다고. 그 돈은 우리 돈이지. 더러운 개새끼야.”
“회장님한테 무슨 말 버릇이야.”
“회장님 좋아하시네. 씨발 새끼! 천하에 없는 사기꾼 중에서 사기꾼 놈 새끼!”
“…………”
“우리가 누구인지 알겠어? 우리가 피해자 가족이라면 복수가 필요하겠지. 아니면 정의의 사도 또는 형벌을 집행하는 집행자인 거지. 돈은 그다음 문제야.”
“알겠어, 알겠어. 내가 이미 말했잖아, 속은 사람이 바보인 거야. 다단계 기획 부동산 말이야, 그게 내 마지막 작품이었고 그러고 나서 깨끗이 손 털려고 했었거든. 일이 끝나면 최면술 같은 마법의 힘으로 망각을, 모든 것을 죄다 잊어버리려고 했지.
나는 일찍부터 건망증이나 기억상실증, 혹은 가벼운 치매 증상에 걸려서 추억이나 기억 따위는 없는 사람으로 노년을 살아가려고 했지. 오십만 달러이면 충분하지 않겠어? 위자료와 이자까지 계산해도 충분한 거야. 난 일급 사기범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마당에 너희를 강도나 공갈범으로 고발할 수도 없어. 너희들은 반드시 무사할 거야, 자유인 거야. 그러면 피장파장인 거지, 안 그래?”
“어림없는 소리를 하고 있군. 네가 대체 뭘 기대하고 있는지 궁금하군.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뭔지 알겠어?
죽은 남자의 시체야.
네놈은 밥 먹듯이 사기를 쳐봤겠지만 죽은 남자를 들어 본 적은 없었을 거야. 네 놈 모가지가 필요하지, 그래야만 아버지 원수를 갚을 수 있거든.”
“날 죽여서…… 나 같은 불쌍한 놈 죽여서 어쩌겠다고. 내가 마지막 남은 돈이 20억 원 있지. 태안 쪽에 숨겨둔 부동산도 있고. 이 김희걸이가 백프로 보장을 하지. 그걸 몽땅 주겠어. 내가 김 이사한테 그렇게 지시할 거야.”
“병신 육갑떨고 있네. 네 놈은 진짜 사기꾼이 못 되지. 가짜 이름이 스무 개가 넘어도 말이지. 네 놈처럼 둔한 놈이 사기꾼인 게 이해가 되지 않지.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만, 김 이사가 20억 챙기고 네 마누라와 함께 곧 외국으로 장기간 여행을 떠날 거야. 아마 안 돌아올지도 모르지. 이미 모든 준비를 끝냈거든.
마누라가 먼저 김 이사를 유혹했다고 하더군. 김 이사는 모르는 척 하면서 넘어간 거고.”
화장을 짙게 한 사모님은 요염한 자세로 유혹했다.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이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이었다. 이판사판이었다. 말이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사내는 연상의 여자 얼굴에 자기 얼굴을 밀착시켰다. 그리고 이미 옷을 다 벗고 완전히 나체가 된 여자의 몸속으로 단번에 삽입하였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 한두 번인가 아니면 몇 번인가 가벼운 비명인지 신음소리인지를 토해냈었다. 그리고 그걸 하는 중에도 여자는 계속 변명인지, 하소연인지 무슨 말을 하려고 헐떡였다. “그 인간 지겨워, 지겹다니까. 남자 구실은 못하면서 입만 살아가지고. 우리 해외로 나가자고…… 돈은 얼마든지…… 넘쳐나지.”
“그럴 리가? 어떻게 그 충실한 종놈인 김재필이가? 단 한 번도 이의 제기를 한 적이 없었는데.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듯이 그는 날 주님처럼 모셨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거 몰라? 아니면 김재필은 가롯 유다인 거야. 내가 카인의 숭배자라면 김재필은 유다를 숭배하는 거겠지. 우린 백령도 부대에서 만났었지.”
“…………”
* * *
그 희생 제물은 완전히 공포에 질린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몸은 부들부들 격하게 떨고 눈은 공포에 짓눌려 희번덕거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고통이 묻어 있고 그 고통 속에 증오가 서려있다. 자신의 궁핍했고 힘겹고 파란만장한 일생에 대한 증오가. 그리고 배신감 때문에 치를 떨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만. 사람들은 배반하기를 좋아하면서도 배반자를 증오한다.
그 사내가 자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묘한 불안감이 그를 감싼다. 온몸이 식은땀 때문에 흠뻑 젖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는 타는 듯한 통증이 그의 가슴과 심장 속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에서 잠깐 눈물이 비쳤다. 그 눈물이 어느 사이엔가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바닷바람에 꽁지머리가 날렸다. 그는 다시 술 몇 모금을 꿀꺽 삼켜서 목구멍 깊숙이 털어 넣었다. 그리고 물병으로 수건을 적셔 그 사내의 갈라진 입술 사이에 물을 몇 방울 떨어뜨려 적셔주었다.
복수는 달콤할까.
나는 지금 엄청난 환희를 느끼고 있는 것일까.
나는 지금 종작없이 뛰쳐나오는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논리적으로 연결시킬 수가 없다. 이 경우 대학의 논리학 강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지금 살인에 대해 강렬한 쾌감을 음미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냉혈한 살인마인가.
사기꾼도 인간이 아닌가.
인간이 인간을 죽일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애써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외면을 하고 있다. 나는 극단적인 혐오감을 나타내는 몸짓을 해서는 안 되리라. 나는 이 사람한테 개인적인 감정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분명히 있다. 내가 인간이란 게 수치스럽지. 나의 분노와 앙심, 복수의 일념은 나의 심신과 양심을 고갈시켜 버렸지.
그는 죽어야만 마땅하지. 전혀 구제할 길이 없는 그 수많은 피해자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들이 흘린 눈물이 홍수처럼 한강으로 흘러들어 강물이 불어났지.
그를 살려두면 또다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거야. 부정한 수단으로 모아둔 막대한 자금을 풀어서 빠져나갈 거라고. 유전무죄 무전유죄. 불기소 처분을 받거나 집행유예를 받겠지. 왜 법은 항상 우리 같은 약한 사람들을 편들지 않고 외면하는 걸까?
국가의 형벌제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도, 믿을 수도 없다. 사람 사이에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지. 사기는 인간의 신뢰를 배신하는, 인간 정신을 농락하고 모욕하는 행위인 거지. 그건 인격을 모독하는 인격 살인인 거야.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특히 수많은 사람을 울리는 집단적인 사기는 강도, 살인 보다 죄질이 훨씬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입법자들이 사기를 강도나 살인보다 가볍게 처벌하도록 법전에 규정한 것은 실수한 거지. 그들은 집단 사기나 인격 살인의 개념을 정립할 수 없었던 거지. 이 사람은 당연히 사형을 받아야 하고, 그 형이 즉시 집행되어야만 한다. 그게 정의인 거다.
어린애 같은 판사 놈들은 중형 선고를 꺼리고, 꺼린 게 아니라 두려워하고, 국가는 인권 운운하면서 아예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는 가해자의 인권만 있고 피해자의 인권은 없는 거다. 내가 직접 사형을 선고하고 그 형을 지금 집행하는 거지. 우리 세 사람은 이미 합의를 하였고 그렇게 평결을 내린 거지. 나는 스스로 사형집행인이 되어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거지. 일종의 자구책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기 때문에 밤마다 악몽을 꾸게 될 거야. 그가 네게 총을 겨누겠지. 총소리가 들리겠지. 총소리가. 빵, 빵, 빵.
그리고 백상아리들이 피냄새를 맡고 몰려들고. 이것들이 이중주, 삼중주, 사중주 아니면 합창을 할 것인가.
그러니 내일은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며 잠들 수가 없겠지. 밤이면 잠을 자기가 힘들 거야. 자리에 눕기 전에 방문과 창문을 꼭꼭 닫고 방이 확실하게 밀폐되어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해야만 할 거야. 그러니까 이게 진짜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군.
내가 이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을 만큼 인내력이 있을까. 결국 죄의식과 피해의식 같은 거 때문에 다시 알코올 중독이나 엑스터시에 손을 대지 않을까. 매일 밤 무슨 꿈을 꾸는지 잠꼬대를 잘하고, 잠꼬대를 할 때는 너무 거칠고 불만에 가득차서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그 여자, 그 여자가 날 받아 줄까, 그래서 따뜻하게 안아줄까.
나에게 이 배의 이름처럼 제2희망이 있을 수 있을까. 내 인생은 어차피 실패작이었으니 돈은 더 이상 필요 없겠지. 두 사람에게 모두 줘 버릴 거야.
나는 신이 아니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야.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그러나, 조금 낯선 상황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기다렸지. 죄책감을 느껴서는 안 되는 거지. 지금 끝내야만 하지. 주저해서는 안 돼. 맹목적인 의지. 그러나 지금 목을 맨 채 일그러져 있던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군. 벌써 10여 년 전의 일……. 그때 군 제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버지, 불쌍한 아버지.
그런데 총은 쏘지 않고 바다에 던져버려야 할 것이 아닌가. 아니야, 내 손으로 피를 보아야만 하는 거야. 총을 머리통에 갈기면 아주 통쾌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총을 쏘고 싶어서 안달을 하지. 총을 쏘는 것은 위엄 있는 일이야. 그러나 정확히 과녁의 중심을 꿰뚫어야만 하지.
마지막 가는 길에 고통을 줄여줘야 할 것이 아닌가. 그게 인간의 자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흘리고 묶인 채로 불편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실눈을 떠 애처롭게 처형자를 쳐다본다. 오줌을 지린다. 뭐라고 중얼거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알 수 없다. 소리 없는 단말마의 비명일까. 그 중년의 사내는 이제는 눈물을 글썽이며 어깨를 들먹이고 있다. 그는 앞으로 닥칠 일을 직감하고 있었다. 추위가 온몸을 휘감았다. 그는 기진맥진한 채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어쩔 수 없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그가 마지막 말을 남긴다. ‘신은 모든 곳에 계십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빨리 닥쳐버린 운명, 아니면 숙명. 암전. 단념. 체념.
그가 감정을 감추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 편안하게 보내줄게. 나는 폭력은 질색이야. 지긋지긋하지. 특수부대에서 실컷 당했었지. 그래서, 나는 개자식은 아니니까, 네 놈에게 침을 뱉고, 짓이기고, 두들겨 패고, 때리지는 않겠어. 아무튼 폭력은 야만적이기 때문에 안 되는 거야.
하지만 칼이나 총은 별개야. 폭력이라고 할 수 없어. 신성한 물건이니까. 사랑 혹은 증오의 도구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이곳 바다는 이미 공해상이고 수심이 200미터가 넘는 깊은 곳이야. 알겠어? 지금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어. 이 망망대해에 오직 우리뿐이라는 말이지. 그믐달이 이지러지고 있구먼. 꼭 한밤의 공동묘지 같이 으스스해.
서해안 바다에서 제일 깊은 곳이고, 수온도 적당해서 육식 상어인 백상아리 떼의 본거지이고 산란장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것들이 얼마나 활개 치고 다니겠어.
나는 그 녀석들을 바다에서 본 적은 없고 어디더라, 대형 수족관에서 보았지. 영화 ‘조스’에 나오는 식인 상어가 바로 백상아리인 거지. 이빨이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거야.
그 녀석들이 피 냄새를 맡고 덤벼들면 한 시간도 못 되서 뼈까지 씹어 먹어버릴 거야.
그러니까 네놈이 바다 밑바닥까지 내려갈 틈도 없는 거야. 산 채로 뜯어 먹히면 그때 의식은 살아 있는데, 그러면 얼마나 고통이 심하고 아프겠어. 우리는 늑대나 하이에나가 되고 싶지는 않지. 그것들은 먹잇감을 산채로 마구잡이로 뜯어 먹거든. 그래서는 안 되겠다고, 마지막 자비를 베풀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지. 네 놈을 아주 편하게 보내주고 싶은 거야.”
* * *
바다는 칠흑처럼 캄캄하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야간 어로 작업을 하는 어선의 불빛이 아스라이 보인다. 그들은 엔진을 껐다. 배는 가벼운 바람에 삼각파도가 일며 방향이 틀어졌지만 다시 해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며 너울에 약간씩 흔들린다.
연속적으로 발사된 3발의 총성이 파도 소리에 묻혀 버렸다. 피가 튀면서 물 위로 떨어졌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물장구를 치며 몰려들었다. 상어들이 첨벙거리며 서두르느라 서로 부딪치고 물을 마구 튀겨서 바닷물이 거품투성이가 되었다.
그들은 플라스틱 통으로 바닷물을 퍼 올려서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런 후 배는 천천히 방향을 틀어 풍도 쪽을 향했다.
그런데, 몸집이 어마어마하게 큰 상어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수면을 뚫고 치솟더니만 멋지게 공중제비를 넘고는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리고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그 백상아리의 모습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길이가 5, 6미터는 돼 보이고 그 길이라면 몸무게는 2톤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상어 주위에는 그보다는 작은 상어 네댓 마리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가 번개처럼 덤벼들어 덥석 무는 순간 물살이 쫙 갈라졌다. 그리고 입에 문 채로 잠깐 동안 머리를 흔들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그 상어에게는 그것은 그저 코끼리 입에 비스킷 한 조각 정도밖에 안 되었을 것이다.
다른 상어들이 이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분명히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들었는데 그들이 좋아하는 지방이 풍부한 먹잇감, 물개나 바다사자 같은 먹잇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백상아리는 바다의 먹이사슬 중에서 최상층에 있는 육식동물이고 바다에 사는 가장 큰 놈이기 때문에 그에게는 적수가 없다. 천적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포악하고 잔인하다. 일단 피 냄새를 맡으면 미친 듯이 물어뜯고 반드시 죽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것들은 엄청난 파괴력으로 수면에 떠 있는 것이면 뭐든지 공격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잔뜩 화가나고 신경질까지 나 있으니.
두목은 뱃전 밖으로 얼굴을 쑥 내밀고 코를 킁킁거렸다. 바다 냄새가 폐부를 찌른다. 그리고 그 거대한 상어에 넋을 잃었다. 그것의 위협을 간과한 채 그 녀석에게 잔뜩 매료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치명적인 위험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미리 알았다고 해도 뾰족한 수는 없었으리라.
그 상어는 이제 배 주위를 유유히 헤엄치더니 그 거대한 힘을 과시하듯 그 낡은 배에 자신의 몸통을 살짝 살짝 부딪친다. 소름끼치는 아가리는 완전히 감추고 말이다. 그리고 물속으로 잠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더니 다시 불현듯 나타났다. 그러더니 갑자기 순식간에 그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고 격렬하게 몸통을 흔들며 배에 충격을 가했다.
배가 몹시 흔들리고 조타수는 깜짝 놀라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조타기를 놓쳐 버렸다. 고물 배가 신음을 하며 요동을 치고 널빤지의 이음매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그놈은 분하고 화가 나서 미치겠다는 듯이 입을 쩍쩍 벌리고 꼬리로 물을 도리깨질하였다. 이번에는 배의 좌현을 겨냥하고 돌진해서 연신 자신의 거대한 대가리로 여기저기 배를 충격해서 뒤흔들었다.
그 악마는 불가사의한 힘과 사악한 적의를 가지고 있었다.
배 안의 세 사람은 이 엄숙한 광경에 어쩔 줄 모르고 혼란에 빠졌다. 몸을 가누기조차 힘들었다. 두목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저 자식이 어쩌려고 저러나, 미쳐버렸는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야. 저놈을 어떻게 한담? 저놈에게 대항할 길이 없는 거야. 끝났어, 끝났어. 하나님이 어쩌자고, 하나님…….”
그 상어는 조금도 지치지 않았다. 격렬하게 부딪치기를 반복한다. 배가 어쩔 수없이 그 백상어가 만들어낸 거센 조류에 밀려서 맥없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며 작은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낡은 목선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삐걱거리더니 배의 이물 쪽부터 산산조각이 되어 부서지며 나무 조각들이 바다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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