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유재산의 원리, 사적 소유의 원칙에 따라 기업주 가족이 대대로 가업을 세습하거나
승계하는 것은 당연히 보장된다. 창업주의 기업가 정신에 따라 세습경영을 배제하는 경우도 있지만, 특히
혈통과 가계를 중시하는 한국 등 아시아권에서는 세습경영이 일반적이다. 다만 3,4세 경영이 만연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일반적인 현상이라고 하기 어렵다.
하지만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5,6세 세습경영인들 제재할 도리도 없거니와 반드시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친다고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관건은 가풍이나 기업문화에서 찾을 수도 있다.
경영승계를 준비하는 과정, 세습경영자의 선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세습(승계)되는 경영철학과
기업의 조직문화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안드레 오스카 발렌베리(1816~1886), 그가 1856년 발렌베리 가업을 창업했다)
일례로, 스웨덴 발렌베리 그룹은 150년에 걸쳐 5대째 ‘족벌세습 가족경영’을 하고 있지만,
스웨덴 국민들은 오히려 발렌베리 일가를 존경하고 자긍심을 갖는다고 한다.
이 그룹은 14개의 대규모 기업을 보유하고 스웨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0%, GDP 30%를
차지하면서도 ‘단일가족에 의한 경영’을 고집하고 있다. 이런 세습성, 폐쇄성이라면 대대로 비난을 받을
만한데, 정반대로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엄청난 기업의 부를 개인적 귀속물로 삼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렌베리 그룹의 가족 경영자들은 세계 1,000대 부호 명단에 한명도 오르지 않았다.
부와 특권 대신에 책임과 은인자중을 지켜온 기업정신의 발로이다.
둘째,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으로 지켜 온 기업의 가치, 정신, 원칙이다. 발렌베리 그룹은 직원(노동자)을
경영의 동반자(파트너)로 규정해 왔다. 그래서 노동조합 대표를 이사회에서 중요한 지위와 역할로
존중하였다.
셋째,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선도해
왔다는 점이다. “기업이 생존하는 토대는 사회”라는 가치의 명제를 “수익의 85%를 법인세로 사회에
환원한다”는 실천의 명제로 실질적으로 전환시킨 놀라운 전통이다.
또한 대학, 도서관, 박물관 등 한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풍부하게 하고, 보존-전수하는 분야에 대한
‘공공투자’(public investment)를 기업의 의무적 정책으로 채택하고 실천해 왔다.
이러한 가풍의 영향일까. 2차대전 당시 외교관이었던 라울 발렌베리는 헝가리에서 유대인 수천명이
가스실로 이송돼 몰살당하는 ‘홀로코스트’(대학살)를 막아냈다고 한다. 발렌베리판 ‘쉰들러 리스트’였던
셈이다. 하지만 라울은 ‘유대인 대탈출’ 이후 실종되었다.
4. 윤리경영 기본이 결여된 재벌체제, ‘3세세습 폐단’ 우려
세습이든 승계든, 그 어떤 표현이든지 간에 자자손손이 권력과 부를 독(과)점하거나 과대하게 보유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나, 현재적으로나 부정적 이미지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예술문화나 과학기술, 혹은
학문에서 대대로 훌륭한 업적을 이어가거나, 조그마한 생업의 터전에서 장인정신을 이어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즉, 재벌 세습경영체제는 사회적 영향(긍정적, 혹은 부정적)이 지대한 만큼 사회적 책임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사회적 상식과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특히
한국에서 그러하지만 재벌 3,4세 경영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부의 편중에 대한 질시나 혹은 이념적
색안경으로 치부할 수 없다.
실제로 삼성그룹만 해도 ‘사카린 밀수사건’부터 X파일, 에버랜드 불법상속 논란 등등 끝없는 비리,
정경유착이 있었고, 유력한 재벌총수들 대부분이 비자금, 분식회계, 횡령 등으로 숱하게 유죄, 실형선고를
받았다. 이런 경험에 비추어 일반 국민들이 재벌 3세 경영에 대하여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차라리 바람직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승무원 활주로 방출사건’에서 드러난 대한항공 3세 경영자의 함량미달과 권한남용은 5세 경영까지
이어온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가정신’(entrepreneurship)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도, 한국 재벌체제는 윤리경영(Ethical Management)의 기본을 결여함으로써, 3세~4세 경영이
가속화되는 향후 10여년간 ‘한국형 족벌세습 경영’의 폐단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
5대에 걸쳐 대기업을 세습해 온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1994년 겨울,부다페스트에 있는 독일군들은 생전 처음보는 광경에 어리둥절했다.
머리가 약간 벗겨진 스웨덴 외교관 한사람이 군본부로 들이닥쳐 아우구스트 슈미트후버 장군을
협박했다. 아구구스트 슈미트후버장군에게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슈미트후버장군은 50만 병력을 지휘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장군의 부하들은
어서 장군이 이 오만불손한 외교관을 제거하라고 명령하기를 기다렸지만 오히려 장군은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거주지를 독일군의 보호아래 그대로 보호하라. 만약 한 사람이라도 다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해도 좋다." 라고 명령을 내린 후 스웨덴의 외교관인 발렌베리와 악수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스웨덴의 뷰유한 금융집안에서 태어났다. 은행가 집안인 발렌베리 가문에서는
라울 발렌베리를 은행가로 만들기 위해 교육했다. 라울 발렌베리는 6개국어에 능통할 정도로 언어
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서 그는 출장을 많이 갔었는데 한번은 팔레스타인에 가문을 대표해서 출장을
갔다가 유럽에서 피난해온 유대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나치가 유대인들에게 저지르는 만행에 대해 말했고 그 만행을 막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는 상황을 발렌베리에게 말했다. 그는 이 일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그 후 스톡홀름에서 만난
유대인 사업파트너는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말을 한다. 그는 자신이 전에 살던 헝가리 정부가
나치에게 잘 보이기위해 이른바 인종법을 제정했고 여행, 다른 사람과의 접촉, 거주지 제한 등
독일의 유사법을 모델로 하여 '인종청소'를 할 만발의 준비가 되어있다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파트너는 더이상 헝가리로 갈 수 없었으므로 발렌베리가 그를 대신해 출장을 갔다.
그는 그곳에서 일명 '사냥개'라고 불리는 아돌프 아이히만이 저지르는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헝가리에 도착하자마자 헝가리의 유대인들을 하루에 3000명씩 가축 수송용 차에 실려서
수용소로 보내졌고 1944년까지 25만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독일의 군대가 소련의 진군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자, 헝가리가 점령되기 전에 '유대인 청소'를
더 서둘러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러한 학살을 막기위해 고민하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과
전쟁난민위원회,세계유대인위원회는 스웨덴 출신의 정의감 넘치는 청년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이해도 깊고 여러 언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이 일의 적임자였다.
아이히만은 1994년 가을 부다페스트에서 발렌베리를 처음 만났다. 처음에 그는 발렌베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전형적인 퇴폐적 외교관"
만약 그에게 조금만 더 사람보는 눈이 있었다면 자신의 '청소'임무를 끝까지 해낼 수 있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아이히만은 사람보는 눈이 없었다. 발렌베리는 도착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 확인이 안될정도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매수,감언이설, 협박 등 유대인을 아이히만의
손아귀에서 빼내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화가난 아이히만은 당장 발렌베리를 죽이려
했지만 당시 중립국이던 스웨덴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던 독일은 아이히만에게 털 끝하나
건드리지 말 것을 명령했다.
아이히만은 하는 수 없이 자신에게 잡힌 유대인들을 죽이는데 더 혈안이 되었다. 아이히만은 더
많은 유대인들을 죽이려 했고 발렌베리는 더 많은 유대인을 구하려 했다.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방법은 스웨덴 비자를 무더기로 발급하는 것이었다. 스웨덴비자를 받으면 스웨덴의 국적을
획득하게 되고 독일은 스웨덴사람을 건드리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에 적절한 선택이었다.
그는 서류를 위조하기도 하고 심지어 포로수용소까지 간여했다. 그는 그 곳을 운영하는 헝가리인들
에게 뇌물을 주거나 전범으로 기소 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1944년 겨울까지 그는 스웨덴 서류를
위조해서 유대인 2만명을 구했고, 헝가리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사람들을 위해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리고 독일군 사령붇에 압력을 엏어서 부다페스트 유대인 주거지에 갇힌 유대인
7만명을 구했다.
그는 독일이 헝가리에서 철수하기만 하면 유대인들이 안전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인을
가능한 많이 구하려고 애썼다. '청소'는 소련군이 소련군이 헝가리에 들어오자 끝났다.
그러나 발렌베리는 KGB요원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1945년 1월 17일,
부다페스트 외각에 위치한 소련 군사령관 본부는 유대인들의 처후 문제를 위해 회의할 것이
있다고 발렌베리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가 사라진 후 여러 터무니 없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진실은 1990년, 영국으로 망명한 KGB의
고위 간부,올레크 고르디프스키에 의해 밝혀졌다.
그를 납치한 것은 KGB였다. KGB가 발렌베리를 주목하게 된것은 그의 가문때문이었다.
그의 가문은 앞에서도 밝혔지만 스웨덴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했다.
그런데 스웨덴이 중립을 선포했을 때, 소련은 은밀히 철강을 제공해줄 것을 제안했다.
이 일의 중개역을 맡은 것이 발렌베리 가문이었다. 이 일로 발렌베리 가문을 알게 된 소련은 그의
가문이 독일의 고위층과도 밀접한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로 인해 KGB는 발렌베리 가문을 이용해 독일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궁리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힘든 일을 자청해서 하는 라울 발렌베리를 주목하게 되었다. KGB는 부자집 도련님의 이러한 고행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탈린은 그가 그의 가문을 대표해서 미국과 독일의 정보원역활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가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독일 장교와 접촉하는 장면을 목격한 KGB는
스탈린의 추측을 확실하게 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납치되어 처음에는 비교적 정중하게 심문 받았다. KGB는 그를 정보원으로 역이용
하기 위하여 그를 다래보려 했지만 라울 발렌베리는 그것을 단호히 거절하고 자신은 정보원이
아니라고 밝혔다. 정중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 다고 생각한 KGB는 그를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는 시베리아의 가장 혹독한 곳으로 끌려갔고 악명 높은 빅토르 아바쿠모프의 손에 넘겨졌다.
그는 잔학성으로 악명이 높은 사내였다. 그는 날마다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러면서도 그는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KGB는 그가 생각했던것 보다 끈질기자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의 아버지가 그들을 의심하기 시작하자 당신의 아들은 소련에서 귀빈대접을 받고 있고
매우 양호한 상태라고 짧게 통보했다. KGB는 스웨덴이 압력을 가해오자 발렌베리의 소련내에 존재
가능성을 없어보이게 만들려고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발렌베리가 고문을 버티며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갇혀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KGB의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고 발렌베리에 대한 헛소문 덕분에 KGB는 자신들조차 발렌베리의 존재를
모르게 되었다. KGB의 상부는 스웨덴의 압력을 견딜 수 없게 되자 유일한 증거를 없애버리기로
했다.
1947년 7월 17일, 독방에서 나온 발렌베리는 약을 먹으로 진료소로 간다는 말을 듣고 진료소로
향했다. 진료소에서 독약이 섞인 약을 집었고 그 자리에서 사망해다. 스탈린이 죽고 3년뒤, 소련은
그가 독일의 스파이였다고 밝혔고 다시는 그에 대한 언급을 안하겠다고 선언했다.
1990년 수수께끼를 푼 장본인인 올레크 고르디프스키는 당시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설명했고 발렌베리의 비문에는 "매우 위대하고 용감한 사람" 이라고 적혀있다고 했다.
그는 헝가리에 있는 동안 약 10만명의 유대인들을 구했고 후에 그리스는 그를 '정의로운 이방인'
이라고 평가했다.
158년 동안 5대에 걸쳐 스웨덴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발렌베리 가문. 그들은 스웨덴 최초의
근대적 상업은행을 세워 1870년대부터 이미 ‘북유럽의 메디치’로 불릴 만큼 큰 부를 일궜으며,
이를 기반으로 동토의 땅 스웨덴의 산업화를 이끈 백년 기업들을 키워냈다. 오늘날 발렌베리를
빼놓고는 스웨덴 경제를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말할 정도다. 한 가문이 이처럼 오랫동안, 이처럼
큰 성공을 거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렵다.
스웨덴의 수도인 아름다운 항구도시 스톡홀름에서 발렌베리의 존재를 느끼기는 어렵지 않다.
발렌베리는 스웨덴 국민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매년 노벨상 시상식 직후 기념 무도회가
열리는 스톡홀름 시청 골든홀에는 가문의 2세대인 크누트 발렌베리의 흉상이 서있다.
시청 신축 자금을 기부한 그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사회적 책임과 애국주의의 결합 '발렌베리'
스웨덴의 수많은 경영자를 길러낸 스톡홀름경제대학은 ‘발렌베리대학’이란 별칭으로 불린다.
북유럽 최초의 경제대학인 이 대학의 설립을 발렌베리 가문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발렌베리재단들은 스웨덴 기초 과학 연구의 가장 큰 후원자다. 스웨덴 출신 노벨상 수상자의
대다수가 발렌베리의 지원을 받아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발렌베리는 에릭슨, 사브, ABB, 일렉트로룩스, 아틀라스콥코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18개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 모두 각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자랑하는 알짜기업들이다. 스웨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무려 절반 이상을 발렌베리 기업들이 차지한 적도 있다. 이 정도면 발렌베리 가문이
스웨덴 갑부 명단 상위권을 싹쓸이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158년 동안 기업 경영으로 일군 부는 대부분 공익 재단에 넘겨져 있어 가문 소유의 개인 재산은
‘약소’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 대신 발렌베리 후계자들은 각 세대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남겼다. 거대한 ‘발렌베리 왕국’의 실질적인 주인은 바로 이들 재단들이다.
발렌베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특권보다는 의무에 대해 가르쳤다. 검소한 가풍 탓에 플레이보이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형이나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었고, 여름에는 정원 잡초를 뽑고
갈퀴질을 해야 했다. 매주 최소한의 용돈만 주어졌고, 또 그 중 일부는 저축을 하도록 했다.
특히 크누트와 함께 가문의 2세대 경영자였던 마르쿠스 시니어 발렌베리의 검소함은 전설적이었다.
그의 딸 안드레아는 아버지의 정장이 헤지면 안과 밖을 뒤집어 재단사가 다시 꿰밀 수 있도록
뜯어내는 일을 했다. 발렌베리는 흥미를 쫓는 미디어로부터 자신들을 엄격하게 차단했다.
신문의 가십난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일은 용납되지 않는 금기사항이었다.
‘존재하지만 드러내지 않는다(Esse non videri)’라는 가문의 유명한 모토는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다.
발렌베리의 전통은 개인주의와 사회적 책임, 국제화와 스웨덴 애국주의의 절묘한 결합을 보여준다.
그들은 창조적 개인의 능력을 신봉했지만 사회적 책임에도 똑같은 무게를 뒀다. 그들의 기업은 인구
900만 명의 좁은 내수 시장에서 벗어나 세계로 뻗어나갔지만 스웨덴이라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표현되는 세계최고의 복지제도를 자랑하는 스웨덴은 세계에서
소득세가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 북유럽의 메디치가문으로 존경받는 스웨덴의 명문가 '발렌베리' 가문의 한사람인 크누트 발렌베리(1853-1938).ⓒwww.wallenberg.com |
벨렌베리는 왜 세금을 피해 스위스로 가지 않는가
이 때문에 많은 부자들이 무거운 세금을 피해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IKEA의 창업자 잉그바르 캄프라드 회장이 대표적인 사례다.
기업들도 본사를 해외로 옮긴 곳이 적지 않다.
하지만 발렌베리와 벨렌베리 기업들은 스웨덴을 지키며 그들이 창출한 부를
재단을 통해 스웨덴 사회에 돌려주고 있다.
1856년 가문을 처음 일으켜 세운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는 퇴역 해군 출신이다.
15세 때 갑판 선원이 돼 혼자 배를 타고 미국 여행에 나설 만큼 바다에 대한 그의 애착은 유별났다.
그는 “선원으로서 얻은 경험은 집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곳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들은 마음이 좁아지기 쉽다”는 말을 남겼다.
그 후 앙드레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에서 복무하다 은행을 세워 큰돈을 벌었다.
생전에 ‘스웨덴 제2의 군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아들들도 모두 해군사관학교에 보냈다.
바다에서의 거친 항해 경험이 강인한 정신과 넓은 시야를 길러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해군사관학교 졸업은 발렌베리 후계자들의 필수코스가 됐다.
앙드레가 세심하게 완성해 놓은 ‘후계 프로그램’에는 해외은행에서의 도제식 교육도 포함돼 있다.
발렌베리의 미래 주역들은 해군사관학교를 마친 뒤에는 수년 동안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적인
금융 중심지를 돌며 경력을 쌓았다. 이는 발렌베리가 은행을 모태로 성장한 탓도 있지만 산업의
큰 흐름을 읽고 기업 가치를 정확하게 보는 능력을 기르는데 금융 경험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발렌베리의 독특한 교육 프로그램은 158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발렌베리의 가계도는 처음 보는 사람을 혼란에 빠트린다.
‘마르쿠스’와 ‘야콥’이라는 똑같은 이름이 반복해서 나오기 때문이다.
매 세대에 마르쿠스와 야콥이 등장해 이름만으로는 구분이 안 된다.
발렌베리 정신을 후대에 물려주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어린 세대는 선조들과 같은 이름을 씀으로써 일찍부터 자신이 가문의 전통과 연결돼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최선을 다해 짊어져야 하는 짐이고 멍에이지만, 잘 지키고 더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저들의 노하우엔 뭔가 눈 여겨 볼 게 있다
발레베리는 집에서 손님을 맞을 때는 항상 아이들을 문 옆에 앉게 해 대화를 듣게 했다.
손님이 돌아 간 후 아버지는 아들과 함께 앉아 자신이 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며,
상대방이 그런 식의 반응을 보였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휴일 아침이면 아버지는 아들과 정기적으로 산책에 나섰다.
아버지는 길을 걸으며 선조들의 위대한 사업적 업적을 들려줬다.
그러나 전통이 항상 성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유럽 속담에 “창업자는 기업을 설립하고,
2세대는 기업을 물려받고, 3세대는 기업을 파괴한다”는 말이 있다. 기업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다. 발렌베리가 이런 속담의 예외가 될 수 있었던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발렌베리는 가족들의 경영참여를 엄격하게 제한했다. 미래의 경영자로 선택된 소수는
‘후계 프로그램’에 따라 오랜 기간 철저한 교육을 받았지만, 나머지는 기업 경영과는 거리를 두도록
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 가문을 이끌도록 했다. 거대한 기업을 독단적으로
경영할 경우 생길 수 있는 위험을 줄이기 위한 것이다.
이는 앙드레의 두 아들 크누트와 마르쿠스 시니어가 경영권을 물려받은 후 만들어진 일종의
불문율이다. 크누트와 마르쿠스 시니어는 평생 한 사무실에서 책상을 맞대고 앉아 함께 일했다.
크누트는 금융을, 이복동생인 마쿠스 시니어는 산업을 책임졌다. 이런 방식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황태자’의 지위는 저절로 주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야만 하는
조건부였다. 3세대를 이끈 마르쿠스 주니어는 아들 피터를 끊임없이 궁지로 몰아넣으며 능력을
시험했다.
발렌베리와 함께 스웨덴을 양분하고 있던 볼보와 합병을 전격 추진했으며, 볼보의 전설적인 CEO
길렌함마르에게 발렌베리 기업의 이사회 자리를 내주었다. 스웨덴 재계는 마쿠스 주니어가
발렌베리의 후계자로 피터 대신 길렌함마르를 선택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피터는 자신이 발렌베리 왕국을 이끌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다는 것으로 입증해야만 했다.
이밖에 유능한 전문 경영인 풀, 자회사 이사회에 적극 참여하는 이사겸직제도, 끊임없는 투자
포트폴리오 최적화, 그리고 안정적인 소유지배구조를 지탱해 준 차등주 등이 발렌베리 신화를
가능하게 한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실은 발렌베리는 이건희 삼성 회장 가문의 벤치마킹 모델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한 나라의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영향력에서 보면 삼성은 발렌베리에 비견할만한 거의
유일한 곳이다. 그러나 사회적 존경이라는 측면에서 삼성은 여전히 가야할 길이 멀다.
삼성이 백년기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반드시 풀어야할 과제다.
국내에선 오너 중심의 ‘소유경영’은 비난의 대상이다.
하지만 해외 기업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기업의 지속성장을 위한 경영체제로 받아들여진다.
한국기업의 소유경영, 해외기업과 무엇이 다른가.
국내 기업이 오너 중심의 ‘소유경영’으로 뚜렷한 성과를 낸 건 부정하기 어렵다.
삼성전자ㆍ현대차ㆍLG전자 등이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선 사례에서 볼 수 있듯 말이다.
정부의 지원이 있었지만 소유경영은 한국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총수를 중심으로 한 가족ㆍ소유경영의 장점은 장기적인 경영전략 수립,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 신속한 의사결정 등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늘도 짙다. 한국의 소유경영의 폐해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총수의 횡령ㆍ배임,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부의 비정상적인 상속ㆍ증여, 문어발식 사업진출로
인한 골목상권 붕괴 등이다.
최근 SKㆍ한화ㆍCJㆍ효성 등 대기업 총수가 연루된 사건에서 볼 수 있듯 소유경영은 일정한
성과에도 큰 약점을 지닌다. 이로 인해 많은 투자자와 자본시장 참여자가 치명적인 손실을 입는다.
국가경제와 우리나라 자본시장 전체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해외 소유경영의 사례는 어떨까. 네덜란드 하이네켄 가문의 하이네켄, 독일 콴트 가문의
BMW, 미국 포드 가문의 포드자동차,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은 소유경영의 모범적인 사례로 종종
언급된다.
하이네켄은 1864년에 설립된 세계적인 맥주회사다. 이 회사는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가족경영기업으로 꼽히지만 투명한 경영과 적극적인 사회 책임 활동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네덜란드는 전체 기업의 70%가량이 가족경영기업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내 가족경영기업처럼
비난받지 않는다.
▲ [더스쿠프 그래픽] |
독일 가족경영기업의 성공적인 성장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독일의 많은 가족경영기업은
강소기업으로 성장했다. 국제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으로 발전한 곳도 적지 않다.
세계적인 자동차부품회사인 보쉬, 윤활유 전문생산업체인 푹스오일이 대표적이다. 독일의 가족경영기업은
가족소유를 바탕으로 경영 리더십을 이어가고, 장기적인 사업전략을 추진하는데 장점이 있다.
하지만 후계자 선정은 자질과 의지를 가진 자를 우선시하는 능력 중심의 승계를 원칙으로 한다.
특히 창업자의 2ㆍ3세에 대한 승계목적으로 기업을 분할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창업자 가족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이 먼저라서다. 우리나라 소유경영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은 SEB은행과 유럽 최대 가전업체인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통신장비업체 에릭손 등 금융ㆍ통신ㆍ기계 분야에서 수십개 기업의 경영권을 직간접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발렌베리 가문은 경영권의 편법적인 승계나 사회의 지탄을 받을만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없다. 투명한 기업경영과 충실한 사회 책임 활동으로도 유명하다.
최근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미국의 구글은 창업자와 전문경영인의 성공적인 조합사례로 평가된다.
가족경영기업이 세대를 거듭하게 되면 전문경영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창업자의 가족(후계자 포함)
과 전문경영인이 상호 경쟁하면서 보완적인 관계를 잘 설정해 나간다면 좋은 경영의 한 모습이 될
것이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조정실장 jkjeong@cgs.or.kr유럽의 재계 명문가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가문이 있다. 바로 스웨덴의 유태계 발렌베리 가문이다. 영국의 유태계 로스차일드가문에
뒤지지 않을 만큼 너무나 유명한 금융가문이다. 영국의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로스차일드
가문에 대해 송곳같은 기사를 쓰지만 발렌베리가문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다.
발렌베리 가문 계보와 지배구조현황 |
발렌베리 가문이 유명세를 타고 좋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여럿이다. 157년의 역사동안 사회의
지탄을 받을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특출한 인사를 많이 배출했다. 또 유럽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을
소유하고 경영하면서 번돈으로 가문의 명예나 재력을 키우고 스웨덴 자체의 국부를 키우면서도
인류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고 있는 점이 다른 이유일 수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경영권을 둘러싼 골육상쟁없이 스웨덴 2위 은행인 SEB와 유럽 최대이자 세계
2위의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세계 최대 통신 장비 업체 에릭슨, 스웨덴 항공ㆍ방위산업체 사브,
중전기ㆍ산업장비 업체 ABB,광산ㆍ건설장비 아틀라스콥코 등 금융과 통신,기계와 의료,방위와
항공,건강과 IT 등 첨단 제조업 산업분야에서 19개 기업의 경영권을 직ㆍ간접으로 소유하고 있고
100여개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덕분에 연간 1200억 파운드(미화 20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려 스웨덴 국내총생산(GDP.2012년
기준)의 37%,상장사 시가총액의 3분의 1을 담당하며, 스웨덴 인구의 4.5%에 이르는 40여만명을 고
용하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250여년 역사를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가문이 금융업에만 치중하고
후손이 서로 등을 지며, 투자실패로 물의를 일으키고 있어 비판을 받는 것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발렌베리 가문의 역사는 1856년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EB)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웨덴에서
발렌베리라는 성이 등장한 것은 1670년생인 헤르 한손이지만 발렌베리 가문이 시조를 삼고 있는
인물은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다. 루터교 목사의 아들인 오스카는 해군장교로 제대한뒤 은행업에
뛰어들어 1856년 설립한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을 설립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은 지난달 5일자 FT인터뷰에서 "고조부는 상선 선원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다 스코틀랜드와 미국의 항구에서 은행업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한다음 귀국해 은행을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오스카는 1886년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고 장남 크누트가 SEB 최고경영자(CEO) 직을 승계했다.
그누트는 1907년부터 12년간 스웨덴의회 의원을 지내고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외무장관도
역임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1911년 CEO직을 동생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시니어에게 넘기고
SEB 회장이 됐다
그는 1916년 스웨덴 정부가 은행의 산업자본 주식 소유를 제한하자 '인베스터(Investor)'라는
지주회사겸 투자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기업을 산하에 편입시켰다. 자식이 없던 그는 또 본인과
아내의 이름을 딴 '크누트앤앨리스 재단'을 설립해 부가 대물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마르쿠스 회장은 설명했다.
창업 3세대는 마르쿠스 시니어의 장남 야콥이 SEB CEO를 맡고, 동생 마르쿠스 주니어가
부 CEO가 되는 투톱 경영체제를 이어갔다. 1953년 경영에 합류한 4세대는 마르쿠스 주니어의
장남 마르크가 CEO직을 1958년 물려받았다. 그의 동생 피터는 야콥이 1969년 경영권 다툼으로
물러난뒤 이사로 등재됐다가 마르크가 1971년 자살하면서 CEO로 변신했다.
피터는 또 큰 형의 아들이자 조카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현 SEB 회장을 대표자로 내세우고,
자기 아들 야콥 발렌베리를 또 한 사람의 후계자로 삼아 5세대 투톱 경영의 원칙을 살렸다.
마르쿠스와 야콥은 동갑네기로 각각 SEBㆍ일렉트로룩스ㆍ사브의 회장과 인베스터AB의 회장을
각각 맡아 가문을 이끌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 경영자는 아무나 되지 않는다.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복무해야 하며,
해외에서 유학한뒤 글로벌 금융회사에서 일하면서 국제 감각과 인맥을 쌓아야 하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마르쿠스 회장도 스웨덴 해군사관학교와 미국 조지타운 대학을 졸업하고, 해군에서 중위로
복무했다.그는 1980년 뉴욕의 시티뱅크 본사를 시작으로, 독일 도이체방크, 영국 SG워버그,
홍콩 시티그룹에서 경력을 쌓았다.
또 발렌베리 가문은 기업 주식을 직접 소유하지 않는다.주식은 '인베스터'가 갖는다.
인베스터를 다시 '크누트 앤 앨리스 발렌베리 재단'과 '마리앤느 앤 마르쿠스 발렌베리 재단',
'마르쿠스 앤 아말리아 발렌베리 재단' 등 발렌베리 가문이 설립한 3개 재단이 소유한다.
재단 이사회에 마르쿠스와 피터 등 가문 일원이 다수 참여해 지배력을 간접 행사한다.
발렌베리 재단은 3월 말 현재 인베스터 주식의 23.3%, 의결권의 50%를 갖고 있다.
인베스터에 대한 적대적 인수ㆍ합병(M&A)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발렌베리가문은 사회환원도 많이 한다.기업들이 이익을 배당형태로 인베스터로 보내고 이 돈이
공익재단으로 흘러간다. 공익재단은 이 돈을 대학 교육이나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R&D)에 집중 투입한다. 마르쿠스 회장드 "발렌베리 재단은 연간 1억6000만
파운드(한화 약 2조7000억 원)을 기부한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소유구조와 사회환원은 스웨덴 역사의 산물이다.발렌베리가문의 경제력 집중이 커지고,
노사분규가 극심해지자 스웨덴 정부와 스웨덴경영자연합(SAF)과, 스웨덴노동조합(LO) 등
3자는 1938년 샬트셰바덴 협약이라는 '노ㆍ사ㆍ정 대타협'을 체결했다.
오너 일가의 차등의결권을 도입해 기업 지배권을 인정하는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한다는 내용이 골자였다. 마르쿠스 회장은 "차등의결권은 장기투자에 대한 약속"이라고
옹호했다. 그는 "우리는 아틀라스 캡코와 1800년대부터 거래를 하고 있으며, 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펄프회사인 스토라 엔소의 이사회에 등재돼 있다"고 소개했다.
발렌베리가문은 2007년 재단자산운용회사(FAM)를 설립해 재단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FAM은 재단과 인베스터, 그룹의 투자ㆍ경영의 컨트롤타워다.FAM 이사회에도 마르쿠스 발렌베리,
야콥 발렌베리 등 발렌베리 가문의 수장이 모두 소속해 있으니 발렌베리 가문은 재단과 기업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틀림이 없어 보인다.
발렌베리 가문은 집안단속도 철저하다. 공익재단근무와 그룹 경영자로서 급여를 받을 뿐이어서
재산규모가 미국의 경제잡지 포브스가 발표하는 세계 1000대 부자는 물론이요, 스웨덴 100대 부자
명단에 끼지도 못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esse, non videri)'는 가문의 철칙을 철저히 준수한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조세피난처로 피한 잉그바르 캄프라드에 맹공을 퍼붓는 스웨덴에서조차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의무(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다한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이것이 삼성그룹이 벤치마킹하려는 이유가 아닐까?
[출처] 5대에 걸쳐 대기업을 세습해 온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작성자 샤크
---------------------------------------------------------------------------------------------------------------------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법인세 이야기
http://www.pgr21.com/pb/pb.php?id=freedom&no=56382 스웨덴의 세법 관련해 먼저 짚고 넘어갈 두가지가 있습니다. 1. 스웨덴 지주회사가 스웨덴 기업에서 배당을 받을 시 배당금에 대한 세금은 면세. 2. 배당주 판매에 따른 이득 또한 면세. http://www2.deloitte.com/content/dam/Deloitte/global/Documents/Tax/dttl-tax-swedenhighlights-2014.pdf 이런 세제 혜택을 받아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 Investor AB는 실효법인세로 약 0%를 내고 있습니다.
2013년 기준 대표적인 자회사들의 실효법인세율입니다. SEB 은행 18% 자회사 중 가장 지분비중이 높고, 발렌베리 가문의 자금줄로 불리는 북유럽 최대 은행 중 하나입니다. 다른 주요 회사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약: 아스트로제네카 21.3% 통신장비: 에릭슨 28.8% 전자: 일렉트로룩스 25.7% 자동차: 사브 24% 지난 10년간 제조업에 대한 실효법인세율은 폭등세를 보였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5%내던 자동차를 비롯한 중공업 회사들은 아쉬울 것 같습니다. 지주회사인 Investor AB의 구조를 보면 발렌베리 재단이 전체 주식의 25%를 가지고 있습니다. 황금주인 관계로 결정권 50%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호적인 스웨덴 연기금이 8%를 보유, 그 외 개인적인 가문 일원들의 지분을 합치면 외부에서 경영권 위협은 원천 차단되어 있습니다. Investor AB 위에 발렌베리 재단이 있고, 발렌베리 재단은 지난 5년간 연 평균 10억크로나(1300억원, Investor AB의 순이익의 2%)를 기부했습니다.
향하고 있습니다. |
첫댓글 최근 롯데그룹 사태를 지켜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