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떤 해후 / 유젬마
저 아래 쪽에서 떠드는 조무래기들의 노란 목소리를 들으며 빈희는 소나무 숲을 향해 잔돌이 굴러있는 언덕 진 오솔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소맥 빛 피부에 와 닿는 아침나절의 바람은 더위를 머금고 눅눅했다. 그렇지만 소나무 숲에서 불어 내리는 바람 결에는 OZONE의 솔잎 냄새가 묻어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솔길이 끝나고 소나무 숲을 접어 들자 빈희는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 묻혀있는 조그만 바윗돌로 가 앉았다. 호수처럼 누어있는 바다와 --- 이른 봄 부터 신축하기 시작해 여름에 부쩍 수효가 늘어난 --- 별장 지붕이며 테라스가 펼쳐져 있는 게 한 눈에 들어왔다. 또한 머리 위에서 재깔거리는 새들의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가슴으로 번져가는 일말의 희열을 느끼며 빈희는 풀꽃 잎같은 입술로 미소를 베어 물었다. 감색 플래어스커트 호주머니에서 진주 빛이 도는 수정 알같은 묵주를 꺼내 한 알 한 알 헤아리며 무언의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빈희는 풍광 수려한 이 조그만 포구에 있는 종합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졸업반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부모인 안씨 부부는 서울에서 굴지의 회사를 경영하는 어느 재벌의 황실 저택같은 별장을 지켜 주는 일, 이른 바 가난한 별장지기였었다. 그러나 문사장네 별장을 지키며 살아 온 지난 17년 동안 인근의 포도원에서 일을 거들어 준다든지 근로를 사랑하는 매우 근면한 사람들로 생계 유지에는 별 불편을 느껴보지 못했었다. 말하자면 마음에 헛욕심없는 사람들에게는 평화라는 하느님의 축복이 깃들어 있는 것이리라. 문사장네와 안씨네는 무엇보다도 독실한 카톨릭 신앙 가족이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린인애가 두터웠었다.
어느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주저리 주저리 열린 포도가 무르익다 못해 피폐 할 무렵이면 별장에는 황실가족(?)이 그들의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피서를 왔었다. 올해도 예외없이 며칠 후면 날아 들 그들을 상기하면서 빈희는 꿈꾸듯 푸른 환타지를 떠올렸다. 그녀의 부모는 벌써 주인네 황실가족을 맞을 준비를 완료해 두지 않았는가.
누구인지 바삭바삭 풀잎을 밟는 발자국 소리가 났으므로 빈희 고개를 돌려 보았다. 연한 노루빛 폴로셔츠에 불루진바지를 입은 대학생 풍의 청년 하나가 바이얼린을 손에 들고 패랭이 꽃들이 수줍게 흩어진 풀 위에 앉고 있었다. 대번에 빈희는 그가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는 K장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다리를 건너서 저 쪽 바다 가까이 새로 지은 그네의 별장이 있었다. 별장을 짓기 시작하는 첫 무렵에 뚱뚱한 웬 낯선 신사가 목수들이 일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근래 가끔 보게 된 지금 붉은 바이얼린을 들고 있는 저 청년이 바로 그 신사의 아들인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청년은 서울 S대 음대에 재학 중이라고 했다. 먼 눈으로 그를 보았을 뿐이었는데 정말 이런 장소에서 그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고 빈희는 생각했다. 청년은 일어 서더니 바이얼린을 턱 밑에 고정시키고 섬세한 현 위에 보우를 내려치면서 켜대기 시작했다. 혼을 빼앗는 뮤즈의 미묘한 음향의 메아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놀라운 감탄을 갖고 별안간 빈희의 가슴은 비밀스런 환희로 높다랗게 고동치고 있었다. 소리의 마술사인 청년도 자신이 켜는 바이얼린 선율에 나르시스처럼 취해 서늘해 뵈는 눈매의 거풀 안에서 눈동자의 빛을 탁 꺼버린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역시 소나무 숲 그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빈희는 대학생이 켜는 바이얼린 곡(曲)에 귀를 적시며 저무는 해가 빨갛게 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빈희네가 고용된 별장 앞에서 막 정거를 한 유난이 차체가 긴 낯익은 자동차 한 대가 시선을 끌었다. 드디어 경아네가 온 것이다. 문이 열리자 먼저 쌍갈래로 땋아 내려뜨린 머리가 허리가지 온 은빛 의상을 입은 경아가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 뒤를 리본으로 머리를 단정이 가다듬은 올드미쓰 정선생이 --- 수년동안 수행원처럼 따라다니며 경아의 학과공부를 협력해 주고 때로는 보살펴 주기도 하는 가정교사 --- 다음에는 주인 마님인 허여사 그리고 문사장이 대기하고 있던 빈희 부모의 극진한 환영을 받으며 각각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화다닥 빈희는 일어섰다. 붉은 바이얼린의 대학생 곁을 지나 갈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치 친한 친구한테 하는 것 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와락 부끄러워 홍조가 물든 두 볼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마구 달려갔다.
다음 날 어제와 같은 일몰의 시각에 빈희가 그곳에 갔을 때 놀랍게도 대학생은 그녀가 즐겨 애용하는 예의 그 전용 바윗돌을 석권하고 앉아 있었다. 발자국 소리를 의식 했는지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당황 해서 멍하게 서있는 빈희를 보고 흰 이를 보이며 웃었다. 사뭇 그는 빈희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좀 망서리다가 빈희는 다가갔다.
"카톨릭 신자인 여학생인가? 본명이 뭐지? 아는 체 해서 미안 하지만..."
어제 공연스레 서두르다가 잃어버린 진주 빛나는 묵주를 건네어 주면서 대뜸 묻는 말이었다.
"............"
"숙녀에게 함부러 물어서 화났어?"
"...베로니카."
"좋은데! 어린 시절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분으로 할머님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지. 임종하시는 순간까지 그 분에게서는 생명의 향기가 풍겼어. 정말..."
"............"
"줄곧 여기서 살았나?"
"네. 큰 도시에 나가 본 것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예요."
"그래? 하지만 사실상 이렇게 공기 맑고 경치 좋은 곳에서 사느라면 나가고 싶은 생각도 안 나겠는데... 응."
"여기가 좋으세요?"
"그럼. 도회의 탁한 공기 속에서만 살아 온 내겐 은총이 내린 셈이지. 마치 이태리의 나포리에 온 것 같다고나 할까."
"선생님이 켜는 바이얼린 소리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좋아하는 작곡가가 있으세요?"
"내 취향에 맞는 작곡가로서는 바흐, 모짜르트, 브람스 그리고 멘델스존을 들 수 있겠는데, 글쎄, 클래식 뮤직은 모두가 워낙 훌융한 창작품들이어서 특별이 어느 누구의 응악을 좋아한다고 지적해 낸다는 것은 넌센스한 것 같애. 그렇지 않을까?"
"그것을 이해 할 만큼 음악에 대한 제 수준은 향상 돼있지 못해요. 결국 저의 모든 것이 다 그렇지만... 하지만 선생님은 음악을 전공 하시니까 잘 아시겠지요."
"음악을 전공하시니까? 하하... 어디서 내 얘기 들었어?"
"조금......"
"내 이름은 김태오라고 해. 자기 PR을 하자면 유모어 센스가 좀 풍부한 편이라고 해둘까. 그것 빼면 뒤로 넘어져요. 하하......"
"부러운데요. 배우고 싶네요."
"땡큐. 말해도 괜찮겠어?"
"............"
"베로니카의 미소는 참 예뻐."
파란 하늘에 솜사탕같은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일요일 아침나절 문사장과 안씨가족은 미사참례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노란 색채의 해바라기가 서있는 샘터를 지나 오면서 그들의 머리 속은 조금 전 사제의 강론 말씀이 자꾸만 맴돌았다. 낙원의 추방, 바벨탑, 저주받은 다섯 도시 그리고 죽음 속에서 시들어가는 시민들의 비참을 실제로 목격하는 것 같은 환각에 섬뜩해지기도 했다. 그들이 돌다리 가까이 이르렀을 때 건강하게 생긴 세터 한 마리가 다리 위에 나타났다. 그 줄을 쥐고 태오라는 그 대학생이 걸어오고 있었다. 약간 당황 했으나 빈희는 며칠 전 소나무 숲에서 그의 조용한 눈매에다 보냈던 꼭 그때 그와 같은 미소를 보냈다.
테라스의 원색 비취파라솔 아래서 청량음료를 마시며 경아는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그 숲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하여 연주 되고 있는 바이얼린 소리가 뇌살 시킬 듯이 그녀의 영혼을 매료 시켰다. 피아니스트를 꿈꾸는 그녀의 음악적 감수성은 누구의 그것보다 첨예한 것인지도 몰랐다. 별장에 와서 경아가 하는 일은 피아노 연습하기와 정선생에게서 외국어를 배우는 일 그리고 지금같이 이렇게 비취파라솔 아래 앉아 청량음료를 마시며 외국잡지를 들추어 보거나 바다와 동리를 전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비교적 늦게 배달된 편지를 가지고 빈희가 올라 왔을 때 경아는 바이얼린 소리로 인해 다소 몽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네준 편지를 파봉 하고 그녀는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으응, 내 친구들이 오겠다는구나. 여기루..."
"잘 됐지 뭐야."
"근데, 빈희야. 너 혹여 저 소나무 숲에서 바이얼린 켜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응, 조금. 왜 어제 돌다리 위에서 만난 셋터를 데리고 오는 젊은 이 있었잖아. 바로 그 대학생이야."
"그래? 꽤 핸섬해 뵈던데!"
"서울 S대 음대 재학 중인데 장관 아들이래나 봐."
"음... 너하고 잘 아는 사이인가 부지? 어제 보니까 아주 친밀하게 웃던데?"
"그렇지는 않아. 말을 하게 된 동기는 니가 오던 날이야. 저 숲에 가면 지정해 놓은 내 자리가 있거든, 거기 앉아 있는데 니가 오는 게 보이더구나. 묵주를 떨어뜨린 줄도 모르고 마구 달려 내려 갔었어. 근데 다음 날 가니까 그가 주어서 갖고 있다가 돌려 주었어."
"그럼 그 후 너는 죽 거기 갔었니?"
"바닷가는 사람이 많아서 싫구 저 숲은 한적해서 좋아."
"얘기 많이 나누었니?"
"아니야. 겨를이 없었어. 우리 같이 가볼까?"
"아유, 챙피해서 어떻게 가니."
경아가 말하는 이 챙피라는 단어의 의미를 빈희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틀 후 경아가 그녀 방 테이블 앞에서 봉한 꽃 봉투를 들고 빈희를 불렀을 때 비로소 그 단어의 의미를 이해 할 것만 같았다.
"이것 태오씨에게 갖다 주고 와. 별장을 잘 안다고 했지? 그를 저녁에 초대하려고 해. 그는 바이얼린을 하고 나는 피아노를 치니까 만나면 대화가 될 것 같애. 승낙한다는 답을 받아가지고 와야 해! 꼭..."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빈희는 지상명령에 움직이는 심복처럼 하오의 뜨거운 햇발이 쏟아지는 길 위에 나섰다. 길 건너 프라타나스 나무에서 기를 쓰고 울어대는 숫매미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돌다리 근처에 이르자 별안간 스산한 바람이 땅 위에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더니 잿빛 구름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내 그것은 억센 소나기로 변해서 따르어졌다. 저 쪽 하늘은 말짱 개여 있는데 잿빛 구름장이 이동해옴에따라 이 쪽에 소나기가 따르어지는 괴이한 현상이었다. 오직 편지가 젖지 않도록 가슴에 감싸안고 빈희는 굵은 빗발을 헤치면서 전력을 다해 뛰어갔다. 해안을 갉는 파도소리가 가까이 들렸을 때 파스텔 톤을 한 휘황한 K장관에 별장이 사납게 내리는 비를 맞고 번쩍이면서 눈에 들어왔다. 가쁜 숨을 몰아 쉬며 빈희는 이름 모를 덩굴이 기어오르는 베란다로 가 소나기를 피하며 잠시 서있었다. 흙탕물의 비말로 흰 삭스가 형편없이 더러워져 있었으며 스커트도 젖었으나 달라붙을 정도는 아니었다. 빈희는 비에 젖은 모자를 벗으며 바다를 향한 방위로 열려있는 창에서 들려오는 담소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빗소리 때문에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풍부한 음색의 누나같은 목소리와 태오가 틀림없다고 직감되는 테너 음색의 남자 목소리...... 발소리를 잔뜩 죽이고 다가가 빈희는 살며시 그 창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응접세트를 가운데 놓고 빗발을 바라보며 여자와 담소하고 있던 태오와 눈길이 맞부딧쳤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당혹한 빛이었다.
"아니, 이거 빈희아냐. 이렇게 소나기가 쏟아지는데 어쩐 일이지, 으응? 어서 안으로 들어 와."
"못 들어 갑니다."
"왜?"
"신발이 너무 더러워 졌어요."
"고작 그게 들 올 수 없는 이유야. 얼간이같군. 괜찮아 어서 들어 오라구. 어머니도 기뻐 하실 꺼야. 그렇죠, 어머니?"
"그럼. 어서 들어 와요."
누나 같다고 느낀 목소리의 여자는 다시 보니 바닷가에서 보았던 유난이 희고 맑은 피부가 인상적이었던 우아한 부인이었다.
"안녕 하세요."
"들어 와서 정식으로 인사를 해야 할 게 아니야. 빈희."
"죄송 합니다. 저는 단지 이것을 전해 주려고 심부름을 왔을 뿐이예요."
"편지?"
"네. 우리 주인 집 경아가 이것을 갖다 주고 꼭 승낙한다는 답을 받아 가지고 오라고 했어요."
"경아가 누구지?"
"접때 돌다리 위에서 보셨을 거예요. 가족들과 함께 성당에서 돌아오고 있었던 일요일 날......"
"... 글쎄 그 날은 기억 나지만 어떻게 생긴 누구였는지는 자세히 봐 두질 않아서 말이야. 하..."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태오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피워 올랐다. 다 읽고 나서 도루 접어 그것을 봉투에 집어 넣었다.
"맞았어. 긴 쌍갈래 머리를 땋아느린 애지? 바이얼린 소리를 듣고 나를 알고 있다며 저녁식사에 초대 하겠다는군요. 어머니 좋아요?"
"원 애두... 네 의사래야지."
"좋아 가겠어. 하지만 동년배도 아니고 쑥스럽지 않을런지......"
편지를 전해주고 돌아 섰을 때 소나기 구름이 지나간 하늘은 어느새 활짝 개여 있었다. 다시 폭양이 팽팽하게 내려쪼이는 길을 젖은 모습으로 되돌아오면서 빈희는 왠지 헌전 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초대받은 태오는 마치 살로메가 베푸는 축하연에 초대받은 아테네의 명사와도 같은 우대를 받았다. 그는쥐빛 양복바지에 짧은 팔의 흰 드레스셔츠를 입고 자주빛 나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빈객을 위해 보라빛 드레스를 화사하게 차려 입은 경아는 어쩌면 꼭 살로메처럼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헤어밴드로 이마 위를 두르고 그대로 풀어 내린 머리칼은 만져보면 비로드처럼 부드럽게 감촉될 것 같았다. 천정에 매달린 선풍기가 미세한 엔진소리를 내고 풍차처럼 돌아가면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한동안 가족들과 의레적인 그러나 퍽 우호적인 인사소개가 있었다. 그들은 이내 두 액션 남녀를 남겨놓고 무대 저 쪽으로 퇴장하는 엑스트라처럼 사라져 버렸다. 경아와 빈객이 자리를 같이하고 있는 탁자 위로 빈희는 과일이며 소프트드링크 글라스를 날라다 주어야 했다. 그것들을 탁자 위에 얹는 순간 확실이 그녀의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으며 가볍게 초췌해진 얼굴이었다. 그렇게 어두워진 눈으로 빈희는 태오를 쳐다 보았다. 잠시 일말의 연민을 느꼈던 듯싶은 태오의 두 눈이 답변을 주려고 하는 듯 했으나 빈희는 핑그르르 돌아서 버렸다.
"빈희, 가지마. 브릿지 아냐. 같이 있자구."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미안해요."
그때 잠자코 있던 경아는 일어나 뚜껑이 열려있는 피아노 앞으로 가서 앉았다. 살로메가 하프 소리에 맞춰 무도를 하는 대신 경아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쇼팽의 즉흥 환상곡...... 방안은 일순간에 정념의 파토스가 밀려왔다.
"그럼 좋은 얘기 많이 나누다 가세요."
조용한 파문을 일으키는 이 한 마디를 남기고 빈희는 방을 나왔다. 복도를 빠져 나와 발코니 난간으로 가 섰다. 별 하늘이 넓었다.그 별 하늘아래 흩어져 있는 별장 집들 창에서 새어 나오는 별빛을 닮은 불빛들...... 경아가 탄주하는 아프로디테의 밀회를 가지려는 세레나데 풍의 선율은 잠드려는 밤의 대기를 진동시켰다. 발코니를 통해 열려있는 그들의 창에서 불빛이 마구 난폭하게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피아노 소리는 음향을 잃고 별 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이런 귀재가 숨어있는 줄은 몰랐는데요. 콩쿨에 나가 본 적은 있었는지......"
"중학교 때 몇 번 있었죠. 내년에 대학에 들어가면 정식으로 콩쿨 준비를 하고 이태 후에는 남독일로 유학을 가려고 해요. 부모님도 적극 원하고 계시니까요. 미스터 김도 계획이 있으시면 말해 주세요."
"나도 처음에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피아노 공부를 지도 받으면서 실은 성악을 희망 했었거든 도중에 어떤 바람이 불어서 바이얼린을 선택하고 지금에 이르렀는데 콩쿨에 세 번이나 낙방했지 하하... 글쎄 비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선진국으로 공부하러 가야겠는데 내 경우는 미국유학을 모색 중이지......"
이어서 들려오는 탄력있는 웃음소리 그리고 끊어졌다 다시 이어지는 얘기소리와 웃음소리...... 어둠이 밀려있는 구석에 서서 빈희가 잠시 돌아다 보았을 때 경아는 맥주 거품을 베어먹고 있었고 태오는 아름다운 소녀 살로메를 이윽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이 있은 바로 그 다음 날 미리 통보한 바 있었던 경아의 친구들 --- 투명한 안경 알속에서 좀 싸늘한 눈동자를 한 소녀와 다혈질일 것같은 소녀 --- 두 여학생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숏 팬티에 노 슬립 폴로셔츠 경쾌한 옷차림들을 하고 그들은 사뭇 쾌유자적 했다. 별장 안은 별안간 그들이 쿵쾅거리고 발소리로 봉고드럼이 울리는 니그로의 정글처럼 요란 해졌다. 태오와 더불어 경아들의 우정은 성하의 건초더미에 댕겨진 불과도 같이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태양과 바다와 산 숲... 미동하는 바람 조차도 그들의 섬머 홀리데이를 축전하는 것 같았다. 물을 찾는 건강한 물개들처럼 시원한 나무 그늘에 기생하는 산새들처럼 그들은 바다며 소나무 숲을 헤매 돌았다. 아아, 붉은 나무의 바이얼린 선율이 들려온다. 선율을 따라서 들려오는 계집애들의 청아한 코러스, 트랄라라아 트랄라라아 트라아...... 이제 빈희는 태오의 안중에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도외시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계집애들은 그녀에게 하녀대우를 했으며 그것은 보이지 않게 하는 구타를 의미 했었다.
무서운 타격...... 그들은 또한 보이지 않는 라인 밖으로 자꾸만 그녀를 배척해 냈으며 그러기에 빈희는 버림받는 오리새끼만이 감수해야 하는 고독과 소외감으로 이마가 어두워져 있었다. 자꾸만 눈 앞이 아슬해져 빈희는 눈을 아프게 감았다 떴다 하였다. 무궁한 밤 우주 저 펀으로부터 명멸 하는 별빛이 은총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순간 빈희는 흩어진 별 무더기와 별 무더기 사이에서 흰 옷 입은 마리아를 보았다. 루드르에서 파티마에서, 시라꾸자에서 조용이 꿇어 앉아 기도하는 비천한 소녀 앞에 말 할 수 없는 자비의 정(情)을 가지고 로사리오를 하시며 발현하셨던 마리아. 성모 마리아! 흰 옷을 입은 마리아는 어둠 속에 파묻혀있는 세파의 부조리를 멸하시겠다는 천상나라의 약속을 계시하려는 듯 빈희가 서 있는 적막한 주위를 응시하고 서신 듯 하였다.
"마리아, 거룩하신 천상의 모후이시여!"
그러자 세파의 동경은 한낱 무모한 획책으로 그녀로부터 사라지고 영혼에서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기쁨으로 빈희의 얼굴에는 어느 듯 뜨거운 눈물이 방울져 내리고 있었다.
물빛이 짙푸른 바다 물결은 좀 사나웠다. 태양을 가린 찌프린 날씨 탓인지 검게탄 캠프족들로 들끓던 바닷가는 한산했다. 바닷가 모래사장 저 쪽에서 텐트를 쳐놓고 레크레이션을 즐기는지 애들의 떠드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랑의 노래 들려온다
옛날을 말하는가 기쁜 우리 젊은 날
아 ~ 기쁜 우리 젊은 날 아 ~~
you are my sunshine my only sunshine
you make me happy when skies are
gray you`ll never know does
how much I love you
please don`t take my sunshine a way
해안으로 밀어 닿는 바람결에 머리칼을 흩날리며 빈희는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등 뒤에서 누구인지 사각사각 모래톱을 밟고 오는 발자국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별안간 그녀의 어깨를 탁 치는 것이었다. 빈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돌아다 보았을 때 뜻밖에 거기 태오가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짖고 서 있엇다. 헐렁한 푸른 면셔츠를 입고 단추가 풀어져 있어 구리빛으로 탄 그의 가슴이 드러나 보였다.
'여어, 빈희 오랫만인데! 한 집안 식구처럼 지내면서 만나기가 어려우니 웬일이야?"
"웬일이랄 게 있나요. 전 제 자신인걸요. 뭐..."
"그새 그렇게 에고이스트가 돼 있남?"
"그토록 사치스런 감상이 제겐 허용돼 있지 않아요. 정말 오해 없으시길 바래요. 제 자신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성모 마리아가 가르쳐 주셨어요."
"하하... 귀엽군."
그때 해안으로부터 저 쪽 상점들이 늘어선 찻집에서 경아와 그녀의 친구들이 낄낄거리며 달려 나오고 있었다. 원색계열의 간단한 옷 차림을한 그들은 쭉 곧은 다리로 사뭇 바닷가를 활보하였다. 그들은 보트가 정박해있는 곳으로가 검은 테 안경을 낀 싸늘한 눈동자가 소리쳤다.
"오빠는 그새 시골사람 다 되셨나 봐. 거기서 뭘 하시죠? 보트놀이 안하실래요?"
순간 태오의 미간이 약간 찌프러지는 듯 하였으나 이내 그는 환한 미소를 베어 물며 표표히 그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는 빈희에게 같이 가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빼놓지 않았다. 빈희는 마치 멀리 떠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내기라도 하듯 그들에게 저항없는 시선을 던졌다. 돌아서서 걸어오고 있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그들의 말소리는 웅얼거리는 바다소리 속에서 메아리치 듯 울려 왔다.
"아름다운 항해를 위해서는 좋지 않는 날씨인데..."
"아메리고가 신대륙을 예감하고 출항의 닻을 올렸던 날도 모르긴 해도 아마 이런 날씨였을거예요."
그런데 그날 오후가 기울어져 가고 있어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문사장은 암체어에 앉아 약간 굳어진 표정으로 파이프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바라보고 있었고 허여사는 근심스런 빛으로 다이닝 룸 창가에 붙어 서 있었다.
"웬일인가요. 이렇게 날씨가 험악해져 가는데 돌아오지들 않으니......"
창을 흔드는 바람은 사나워졌다. 안씨는 테라스에 올라 망보기 수병처럼 먼 바다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아래 발코니에 서있던 빈희는 아버지에게로 뛰어 올라가 같이 바닷가로 나가 볼 것을 자청하였다. 테라스께로 뻗어 오른 덩굴의 조그만 꽃들이 바람에 파르르 떨고 있었다. 그들이 나붓기는 머리를 하고 바닷가에 이르는 동안 바람은 점점 더 거세어졌으며 비례로 무성한 나무가지들이 심한 몸짓을 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바다는 크릉크릉 소리를 내며 울부짖었다. 사나운 파도가 해안으로 높이 뛰어 올랐다 용트림같은 하얀 거품을 토하며 달아나곤 했다. 미친 듯이 꿈틀거리는 해면 위에는 아무 것도 떠있지 않았다. 이내 천둥소리라도 울릴 것 같은 컴컴한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는 수평선 저 멀리를 향하여 빈희는 웨쳤다.
"경아야 ---"
"경아야 ---"
그러나 그들의 웨침은 사나운 바다소리 속에 휘말려 들어 사라질 뿐 메아리도 없었다. 소리치면서 어느 듯 빈희는 알지 못하는 공포에 울고 있었다. 그녀는 또한 마음 속으로 구원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어떤 물체가 일렁이면서 떠오는 게 보였다. 주인없는 나무보트였다. 그 순간 빈희는 지체없이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애가 타서 숨결마저 가빠지는 안씨를 뒤로 하며 참으로 그녀는 불사신처럼 저돌적으로 성난 바다를 가르며 헤엄쳐 나갔다. 사정없이 내려치는 바람과 끊임없이 솟아 올랐다 스러지는 물기둥, 물기둥,물기둥... 것들 때문에 자꾸만 시야가 흐려져도 빈희는 마치 물에 익숙한 한 마리 건강한 물개처럼 집어 삼킬 듯 날름거리며 다가 드는 파도를 피해 달아 났었다. 가까스로 빈희가 나무보트를 잡았을 때 멀지 않는 거리에서 주위를 끄는 것에 눈길이 머물러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더 이상 항거할 기력을 잃어버린 경아들이 죽음의 시신처럼 물 속에 잠기어 최후의 순간같은 고개 짓을 하며 가냘픈 호흡을 할딱이고 있었다. 단지 태오만은 튜브를 목에 끼우고 발을 떼어버린 딱정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헤적이며 맴돌고 있었다. 생명의 줄을 가진 사도와도 같이 빈희는 본능적으로 그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뭐가 어떻게 되어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변없는 해저 저 밑을 망연히 배회하는 느낌이 들었고 의식세계로 돌아오고 싶은데 꼼지락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아스라한 몽환 속에서 빈희는 가까스로 눈거풀을 말아 올렸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낡은 테이블이 정면에 있었고 오른 쪽으로 창이 세워진 틀림없는 자기 방 침대에 뉘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늘 보아 온 자기 방 이었겄만 여늬 때 수면에서 깨어났을 때와는 다른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다이닝 룸 벽시계가 울렸다. 몇 개를 치는 것인지 헤아리기를 잊은 소리의 방향.........
그제서야 빈희는 왜 그녀가 생경한 느낌을 갖고 여기에 뉘어져 있는지를 곧 알아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의식을 잃어버린 것은 저 광란하는 물결의 해상 위에서 였던가? 아니면...... 것 보다도 경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경아들에게로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강박관념처럼 빈희의 머리를 점해왔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고 나오려는데 몹시 머리 속이 출렁거리며 목과 등 언저리에 뭉쳐있는 통증이 전류처럼 그녀를 휘여 잡았다. 침대를 미끄러져 내려와 빈희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성모 마리아!
그녀를 잠에서 깨어나도록 한 것은 꼭 열 번을 치는 다이닝 룸 벽시계 소리였다. 지난 밤 캄캄한 어둠을 뚫고 내려친 비 바람이 질탕하게 휩쓸고 가버린 정원... 상흔을 안은 정원이 창을 통하여 비춰 들어왔다. 문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나고 태오가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소형 망원경이 들리어져 있었다. 빈희는 단조로운 미소를 보냈다.
"빈희, 고마워! 평범한 말이지만 내 마음을 다해 하는 소리야."
"............"
"정말이지 놀랬어. 고운 마음씨... 용기만으로 과연 인간의 능력이 그처럼 무한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아스러워..."
"과찬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 순간 제가 믿었던 것은 하나의 굳센 신념이었지 용기는 아녔어요. 왜냐하면... 만일 제 자신의 용기만을 믿고 뛰어 들었더라면 그것은 무모한 모험에 지나지 않았을 거예요. 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럼 묻고 싶은데, 그처럼 강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은 신앙의 힘과 연관이 있나?"
"... 아무려나 성모 마리아가 제 신념의 어머니인 것만은 확실하죠."
"난 이번 여름을 생명의 은인인 빈희와 더불어 영원히 잊지 못 할 꺼야..."
매미의 울음소리도 쇠잔해지고 백열의 여름도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느 날 자동차에 몸을 싣고 하얗게 난 신작로 길로 질주해 오던 길을 홀연이 다시 돌아갔다. 손을 흔들며, 흔들며......
사색으로 허일 하며 빈희는 메마른 잎사귀가 굴러있는 산야를 거닐고 또 거닐었다. 그런 가을도 속절없이 가버렸다. 이듬 해 봄 이 바닷가 조그만 고장은 한동안 빈희가 수녀원에 입원했다는 풍문이 나돌았다. 또한 어느 주교님의 주선으로 이태리 유학을 떠났다는 얘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계속>
첫댓글 다음편이 기다려집니다. 글을 참 잘 쓰시네요.
저도 기다립니다 결혼전에 직장인 이었을때 많이 읽던 소설책 그때가 그립습니다 한 참 잊고 살았습니다
연속 읽고 그날 바빠서 댓글 못남기고 이제 남겨요. 작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