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97세로 순하고 곱게 가신
장인 어르신의 장례식장.
손 위 동서 형님은 거동이 부자유해서
사위 둘 중, 막내 사위인
소생이 2박 3일을 있어야만 했다.
해서, 짬을 내어 작정하고는
아스라한 소싯적 우리들 발자국이
찍힌 고향 땅을 찬찬히 걸어 봤습니다..
소싯적 그 위치는 아니로되
모다들 애틋하고 아련한 각자의
추억이 있을 '야수' 또는 예수병원은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병원으로
우리 온고을의 근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지롸 잉!
등잔 밑이 어둡단
말이 실감 나네!
장례식장 바로 건너 산비탈에
임진왜란 때의 용장 '이 영남' 장군의
사당, 선충사가 여기 있었다니...
거그다가 전주 출신이었다니.
참 내~
예수병원에서 완산다리 쪽으로
쪼까 내려오면 미국 남장로가
1900년에 세운 선교학교,
신흥학교가 나오지롸 잉!
(주: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의
안치환 가수, 정세균 전 총리 등
꽤 많은 유명인사를 배출한 사학
명문 미션 스쿨이다.)
아~! 기억이 난다.
광주댁인 소생 제수씨의 고등학생
남동생이 광주서 그 먼 길을 걸어,
걸어서 전주로 피신 왔던 그 때다.
쉬쉬했던 이 시위를
고 이*렬 시인이 귀띔 해줬지. 아마~
우리의 자랑이란 그 고등학교도
침묵하고 있던 그 시절에..
기전학교를 받치는 산비탈에 세운
5.27 기념정과 비문. 정자를
보고 있자니 5.18 광주 학살의
기억이 스멀스멀 그러나
또렸히 떠오른다.
울 동기 하나가 공수특전단
지휘관으로 학살 측에
있었단 것도....
이 강당 뒤 예수병원서 내려오는
낮은 고개 길섶에
안과의사와 간호원에게 바칠(?)
명절 선물을 실은 '짐 자징기'를
뉘어놓고,,
'펑 펑' 실컷 목놓아 울었다.
고등 1학년 추석 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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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경 처방전 잘 부탁드린다고
준비해서 바친 추석 선물(?)-
그때로는 꽤 비싼
'반달표 스타킹'을
예수병원 안과 수간호원이
홱허니 되돌려 준다.
'양에 안 찬다는 거구나!'
'아부지한티 뭐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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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지는 이렇게까지 해서
자식들을 먹여 살려야 되나!
장사하는 우리 집에
돈생각이 나면 들이닥치는
언필칭 국가 공무원
하나 - 형사 그리고 경찰 공무원
또 하나 - 세무서 공무원,
또, 또 하나 - 세관 공무원.
공무원이어서 '갑'(?)인 이 자들을
가게 뒤 부엌방으로 모셔가(?)
봉투를 찔러준다.
가끔 이를 본 사춘기의 소생이
뭘 느꼈을 것 같습니까!
거그다가
안과의사들과 위와 같은
간호원들의 근거 없는
'갑질'에 이르면,,,,
장사하시는 아부지가
원망스럽고 ,
여하튼 무조건 분하고 원통하여
짐자징기 내팽개치고, 길섶에
주저앉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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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광학의 지식 배경이
없어 이 설움이구나!
오오냐! ㅆ팔~!'
안광학 학교를 맹글어 쟈들 맹키로
'국가공인 자격 제도'로 가자고!
양 이빨 악물었지롸!
신흥학교 바로 뒤, 아니 같은
울타리에 조금 지대가 높은
일본 신사 자리에 지은,,,
지금이야 기전대학이지만
울 소싯적엔 빨간 원피스 교복의
기전여고 아니 것더라고!
기억이 정확허담 '혼불'의
최명희 작가도 여그 출신인가
싶은디,,,
고 이 *렬군 동기가
그녀의 문재를 알고 문단에.
신흥학교 건너편 다가산 기슭의
유서깊은 활터.
첫 한자를 못 읽어 놀부가
'화초장 타령' 하듯,
'구양정. 구양정~' 아닌디
'귀양정 귀양정~' 이것도 아니고
처 ~처 천양정 마져 마져!
왔구나!
그려 ~그려!
천양정이었지.
밝게 나온 건 찍사의 실력이고,
땅거미가 내려앉아
어두컴컴 허요.
(아파트 창문의 불빛 참조.)
'깜깜헌디 표적이 보여요?'
'기양 대충 쏘는 건디요 뭐!'
ㅎㅎㅎㅎ
이 비석들은 전주천 따라
나라비 섰었는디
다가산 오르는 자락으로
옮겼는갑다.
그때 눈으로는 엄청 성인으로
보였던 젊은 남녀들의 갈 데 없는
최고 데이트 장소가 '다가산'이다.
우리 까까머리들은 침 꼴깍거리며
으슥한 숲에서 몸 낮춰 남녀
상열지사를 피핑혔지롸 잉!
허긴
부래옥에서 맞선 본 후
소생 할마씨와 처음 데이트한
곳도
여그였다는 거 아니냐!
올라서 본, 전주천 따라
한벽루 쪽 중바위 쪽 야경.
그 시절은 건물이 없어
앞냇갈 부터,
매곡교로 서정다리까지
시원하게보였는데,,
긴 세월이 흘렀구나!
흐른 세월은 근다치고
남은 우리들 세월도
그리 길지 않구나!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긍게 요샛말로 '데자뷔' 아닌가!
맞습니다.
우리 추억 속의 빨간 벽돌의
진짜 예수병원 건물이지요.
여전히 병원이긴 한디,
엠마오 사랑병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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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반월성부터 길고 길었던
이바구 여기서 마칩니다,
봐주시고 댓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一雲 님: ' 경주기행 끝버전-전주 이야기 大尾 / <公무원'이라 쓰고 '私무원'이라 읽었다>
향년 97세로 세상을 떠나신, 장인의 장레식잔을 2 - 3일 지키는 동안, 짬을 내어, 소시적
발자취를 천천히 걸어 본 이야기 들 ... 당시애 큰 공헌을 한 예수병원을 비롯해서 장례식장
바로 건너편 산 비탈에 세워진 임진왜란 때의 용장 이영남 장군(전주 태생) 사당인 신충사,
예수병원 근처의 1900년에 설립된 선교학교로, 안치환 가수, 정세균 전 총리, '혼불'의 작가
최명희도 거쳐나온 곳으로 기억되는, 많은 명사들을 배출한 신흥하교와 5.18 광주사태 및
5.27 기념관과 비문, 안과병원 의사와 간호원에게 안경 처방전 발부를 부탁하면서 마련했던
반달표 스타킹이 받아들여 지지 안했던 실망의 경험이며, 신흥학교 건너편의 유서깊은 활터
천양정(穿楊亭), 처음으로 맞선을 보고 데이트를 한 다가산 ... 옛과 사뭇 다른 불빛 야경 등
각곳의 영상들과 함께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건강에 유의하시고 안녕히 계십시요.
第善 어르신!
윗편에 바로 이은 종결편에도
어김없으신 댓글 고맙습니다.
옛 것을 들추어 그 속에서 다시 먼 옛 추억을
되새기다 보니 인간 한 평생이란 게
그리 대단한 게 아니고 그렇다고 또
그리 가볍게 볼 수도 없는 그저 덤덤한
이바구 거리 같아서요!
여튼 어르신과는 6년 이란 긴 세월을
소통해 왔네요. 이리 긴 세월을 그리 대단하지 않은
개인의 기행 잡기를 도외시 하시지 않고
댓글로 주우욱 응원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거듭 고맙단 말씀 사룁니다.
내내 강녕하시기 기원합니다.
일운 님
우선 향년 97세로 천수를 누리시고 곱게 돌아가신 빙장어른에게 애도를 올립니다.
사진에 2019년 10월로 나와 4녀 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짐작합니다. 또 소싯적 발자국이 찍힌 고향 땅을 걸어보았다 하셨으니 그때는 전주에 사시지 않은 듯 짐작합니다만......
전주 하면 예수병원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소생이 60여년 전에 같은 미션계열 선교회의 광주 제중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들은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흥학교 학생의 5.18 민주화운동은 교사들의 만류로 교내에서 시위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다행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절 자신은 중앙부처에서 일요일도 없이 워크홀릭이 되어 공무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도 모르고 지냈었습니다.
예수병원의 안과의사와 간호사의 갑질은, 그 당시는 당연시 되었던 행패로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소생이 20여년의 공직을 떠나 의료기기관련 무역회사에 있을 때 겪어 보아 공감이 갑니다.
이쯤에서 댓글을 끝내는 것을 용서 바라며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goldwell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고뿔은 쾌차하셨습니까?
주위 지인들 말로는 이번 독감은
증상이 오래 가고, 또 나았다 해도
재발한다고들 합니다.
소생은 서른 여덟에서 부터 40년 가까히
대전에 거주해오고 있습니다.,
허나 처가를 비롯 형제들도 전주 고향에 있고
선친 묘소도 있어 자주 전주에 들립니다.
종결편을 지극히 개인사적인 글로 맺어
송구스럽습니다만 되돌아보면 아프고
굴곡진 세월이야 어르신들이 더하셨을 것이고
한 줌 권력 엘리트 패거리들의 사욕에
착한 서민들이 억압받는 것은 어르신들과
같은 공감대가 있다고 나름, 느껴
이렇게 마무리를 지은 점
해량 부탁드립니다.
공감 주셔서 감사하면서
소생도 이만 줄이겠습니다.
내내 강녕하시길 기원합니다.
一雲님: "전주 이야기 大尾"...장인 어르신이 소천하신 전주예수병원을 시작으로 그 일대에 남겨져 있는 미국 남장로회 연고의 여러 고적지를 함께 돌면서 많은 것을 새로 알게되었습니다.
예수병원과 신흥학교는 각각 1900년을 전후하여 전주에 설립되었다는데, 이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미국 북장로회가 대구에 설립한 대구동산병원과 대구계성학교와 함께 "고요한 아침의 나라" 라는 "은둔사회"에 최초로 서양근대문명을 도입하는데 선구적 역할을 한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후, 120년을 지나오면서 이 민족은 즐거움보다도 어렵고 쓰라린 경험을 많이 한 듯, 이 주위에도 갓가지 비석, 기념비, 추모공원 등이 세워져 있는데, 당시를 회고하면 우울하고 착찹한 마음이 앞서는군요. 그 중에서도 병원 직원의 공무원아닌 사무원 습성은 당시에 만연했던 부폐상을 다시 상기시켜 주어 우울해집니다.
그동안 유익하고 자미있는 기행문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 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며 경의를 표합니다. 이제는 입춘도 지나고 날씨도 풀리고 있습니다. 또 좋은 기사로 칼람을 빛내주시기를 기대합니다.
逸泉 어르신!
반갑습니다!!
기대되는 댓글이 한 참을 안 보이기에
발골절의 말씀을 하셨기 염려지심이
있었는데 이리 댓글 받으니 반갑고
고맙습니다.
젊을 때는 밥벌이에 쫓겨 소생 가까운
주위의 소중하고 소소하나, 귀중한 것들을
그냥 지나친 게,,,,,
낫살들어(지송) 되돌아 보게 보니
후회스럽기는 하오나 늘그막에 새삼
공부하고 알게 되어 다행으로 여깁니다,
지난 소생의 굴곡진 삶이 자랑스럽고
그 길이 소생이 밟아야만 했던
삶이었던 것에 자긍심과 감사를 느낍니다.
모교 대학에 세워진 윤동주님 시비의 싯귀 같이
앞으로의 세월도 길든 짧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 가겠습니다.(지송)
이 시리즈 끝날 때 까지 성실한 추임새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내내 강녕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