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장
원제 : The Sheik
1921년 미국영화
감독 : 조지 멜포드
출연 : 루돌프 발렌티노, 아그네스 에어스, 아돌프 멘주
20여년전만 해도 그레타 가르보나 루돌프 발렌티노는 그냥 책으로만 접할 수 있는 '과거의 전설'이었습니다. 즉 에디슨, 링컨, 베토벤, 고흐 같은 역사속 인물이었지요. 그레타 가르보는 20년대 무성영화의 여신으로 루돌프 발렌티노는 전설의 미남배우로 알려졌을 뿐 그들의 영화를 확인해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 시대가 좋아지다 보니 이런 100년전 배우들의 영화들까지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책으로 읽던 전설에서 직접 그들의 영화를 접하고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30년대에도 제법 많은 영화에 출연한 그레타 가르보의 작품들은 우리나라에 제법 DVD가 여러편 출시되었고, 루돌프 발렌티노의 영화까지 출시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1926년에 사망한 인물로 그야말로 무성영화 시대에만 활동한 배우입니다. 그런데도 전설의 미남배우로 많이 회자되고 있고, 그에 대한 영화인 켄 러셀 감독의 '발렌티노'도 나왔습니다 즉 그가 출연한 1920년대 영화들도 고전영화 보관이 잘 된 덕분에 볼 수 있는 것입니다.
1921년에 만들어진 '족장'은 루돌프 발렌티노의 출세작입니다. 그의 나이 26세때 출연한 작품이지요. 이 영화에서 그는 사하라 사막의 아랍부족을 이끄는 젊은 미남족장으로 출연합니다. 모험 로맨스 물입니다.
사하라 사막에서 부족을 다스리는 젊은 족장 아흐메드(루돌프 발렌티노), 원래 그는 영국인 아버지와 스페인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유럽 혈통이었는데 아랍에 온 그의 부모가 사망한 뒤 그곳 족장에게 발견되어 키워졌습니다. 이후 프랑스 유학을 가서 서구 문물을 공부했는데 족장이 죽자 다시 아랍에 와서 족장을 물려받아서 부족을 다스리게 된 것입니다. 아랍부족을 이끌고 있지만 미개한 인간이 아니고 프랑스에서 데려온 하인도 있고, 유럽에 친구들도 있는 인물입니다.
사하라 사막 인근 도시에 놀러 온 영국인 처녀 다이애나(아그네스 에어스)는 신비로운 아랍 문물을 구경하고 싶어합니다. 아랍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카지노에 아랍옷을 입고 몰래 들어간 그녀는 아흐메드를 만나게 되고 아흐메드는 이 당돌한 영국 처녀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다이애나가 안내인과 함께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는 도중 아흐메드는 그녀를 납치하여 자신의 숙소에 데려갑니다. 다이애나는 완강히 반항하지만 넓은 사막에서 도망칠 수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붙잡혀 지냅니다. 아흐메드는 그녀를 신사적으로 대하지만 쉽게 마음을 얻지 못합니다. 아흐메드를 만나러 프랑스의 교수인 위베르(아돌프 멘주)가 찾아오고 위베르 덕분에 다이애나는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위베르는 아흐메드와 매우 절친한 관계로 여자를 납치하는 야만인같은 행위를 지적합니다. 위베르의 조언을 듣고 아흐메드는 다이애나를 보내주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흐메드의 프랑스 하인 가스통과 승마를 갔던 다이애나는 도적떼들에게 납치되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아흐메드는 부하들을 데리고 도적떼의 소굴로 진격합니다
사막의 미남 족장과 영국 처녀와의 로맨스와 모험을 다룬 통속물입니다. 영화 자체는 뭐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지만 미국에서 만든 1920년대 영화에서 아랍이 배경으로 등장한다는 점과 광활한 사막, 아랍의 춤, 기마부대 등 볼거리가 제법 있어서 쉽게 외국여행을 하기 힘든 1920년대 관객에게는 흥미롭게 보였을 것 같습니다. 특히 잘생긴 루돌프 발렌티노의 앳되보이는 20대 외모가 꽤 돋보입니다. 그러다보니 상대 여배우가 너무 평범하고 더 늙어보이기까지 합니다. (실제 나이는 발렌티노보다 2살 적은 여배우입니다.) 너무나 존재감없는 여배우와 번듯한 미남 배우의 공연이다 보니 루돌프 발렌티노의 외모만 더 빛났지요. 그래서 로맨스의 감흥은 그다지 와닿지 않습니다.
지금보다 기술이 떨어지던 1920년대라는 것을 감안해도 찰리 채플린이나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들에 비하면 격이 많이 떨어집니다. 넓은 아랍 사막과 기마병 들을 등장시키지만 촬영에서 그다지 두드러진 점이 없고. 다만 그전까지 그냥 그저그런 영화의 조연배우에 불과했던 루돌프 발렌티노가 1921년에 '묵시록의 네 기사' '춘희' '족장' 등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미남 주연배우로 비로소 인기를 끄는 계기를 마련했는데 그중 '족장'에서도 아랍의 용맹하고 잘생긴 족장 역으로 본인의 장점인 외모뿐만 아니라 용맹한 상남자 역할로서 빛을 발할 수 있었습니다. 1921년은 이렇게 루돌프 발렌티노가 미남 스타로 발돋움한 시기였습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1926년 불과 31세의 나이로 요절해서 '이소룡'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 '제라르 필립' '히스 레저 '등과 같이 너무 일찍 요절한 배우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가 죽은 뒤 곧바로 유성영화가 도래했는데 아마도 그는 유성영화에서는 핸디캡이 많았을 겁니다. 이탈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억양이 능숙하지 못했을 것 같고 유성영화 시대가 되면서 게리 쿠퍼, 캐리 그랜트, 제임스 스튜어트 등 키가 크고 음성이 좋은 배우들이 인기를 누렸는데 외모만 번듯한 이탈리아 출신 루돌프 발렌티노가 할리우드에서 유성영화로 살아남기는 어려웠을 듯 합니다. 더구나 173cm 에 불과한 작은 키도 그렇고.
타고난 미남인 루돌프 발렌티노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도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학교에서도 성적이 나빠서 몇 군데 학교를 전전하다 농업을 전공했고, 여러 일을 전전하다가 미국으로 건너와서 댄서 등 여러 직업을 거쳤습니다. 그러다 연기자가 되어 단역, 조연 등을 거치면서 1920년대에 비로소 주연배우로 발돋움했고, 1926년 갑작스런 궤양으로 사망했습니다. 일찍 요절했지만 두 번이나 결혼했으며 미남배우로 여심을 사로잡으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가 사망하자 따라서 자살한 여성들도 있었다고 하고 조문객만 10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루돌프 발렌티노는 '시크(Sheik)' 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영화 '족장'의 원제가 'The Sheik' 였고 그만큼 이 영화가 그의 이력에서 영향력이 있는 작품이라는 증거입니다. 영화의 완성도보다 배우로서 루돌프 발렌티노의 인기를 높이고 그야말로 영화계의 '족장' 이 된 셈인데 아깝게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전설같은 존재로 남았던 세기의 미남배우 루돌프 발렌티노의 영화를, 그것도 그의 명성을 높여준 영화를 우리나라에서도 만날 수 있으니 정말 좋은 시대입니다. 이렇게 좋은 시대, 이 반의 반만이라도 우리나라 고전영화를 잘 보존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나라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 나운규의 영화를 단 한편도 접할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ps1 : 유럽인이지만 부모가 외지에서 사망해서 그곳에서 현지 부족들에게 키워진다.... 설정이 약간 타잔과 비슷합니다. 아랍의 백인 족장이지요.
ps2 : 1921년 당시는 아직 아랍지역에서 제대로 된 나라가 정식으로 형성되기 이전입니다. '사우디 아라비아'가 1927년에 정식 건국되었으니 1920년대 초반은 부족국가 형태로 아랍의 여러 지역이 운영되었지요. 그런만큼 아랍지역에 대한 신비로움이 더 크던 시절이었을겁니다.
[출처] 족장(The Sheik, 1921년) 전설의 미남 루돌프 발렌티노 출세작|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