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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윤리학 / 엄현옥
공감Empathy은 다른 사람의 상황과 기분을 느낄 수 있는 능력으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경험의 일부가 되어 그 느낌을 공유하며 그것을 통해 상대방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타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공감의 동물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감의 범위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미친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J.Rifkin은 그의 《공감의 시대(The Empathic Civilization.2009)》에서 “인간이 세계를 지배하는 종이 된 것은 뛰어난 공감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공감하는 인간을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icus’라 명명하며, 인류의 역사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에너지는 공감이며, 미래는 확실히 ‘공감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했다.
공감의 윤리학을 자신의 철학의 중심에 둔 대표적인 철학자는 쇼펜하우어다. 그는 ‘이기주의Egoismus’를 변화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고 ‘고통에 대한 공감Mitleid’을 윤리의 기초로 삼았다. 이렇듯 쇼펜하우어의 윤리학은 타인의 고통을 배려하고 제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모든 고통의 근원은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이기주의의 극복을 목적으로 삼아야 하며, 이기주의는 공감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다.(〈공감은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가〉소병일,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철학 제124집. 2015.에서 발췌) 나아가 감정을 함께 느끼는 상태를 의미하는 일상적인 공감 개념보다, 역동적이며 이성적인 공감 능력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수필은 문학의 다른 장르에 비해 관조적이며 자성적인 성격이 강하다. 소통지향적이며 보편성을 추구하는 수필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 빛을 발한다. 지난 호의 작품 중 감동을 동반한 공감이 담긴 작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신정호의 〈겨울여행〉에서는 혼자 떠난 여행에서의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발돋음으로” 떠난 안동여행에서, 자신처럼 일행이 없는 젊은 여성을 만난다. 그녀와는 각자 혼자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누리다가 가끔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보내곤 했다.
점심은 자유식이었다. 삼삼오오 일행끼리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는데, 혼자 참석한 그녀와 자연스럽게 동석했다. 식사가 끝날 즈음, 그녀는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작가에게 동의를 구했다. 식사 전까지는 일면식도 없던 젊은 여성이, 담배를 피우겠다는데 말릴 명분은 없다. 좋을 대로 하라고 했으나, 이유는 물어야 했다. 치료를 위한 흡연이라는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는 3년 전부터 조울증이라는 양극성 장애로 고생을 해왔단다. 우울증보다 더 위험하다는 증상을 치료 받기 위해, 직장도 그만두고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혼자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흡연은 그녀에게 긴장을 풀기 위한 심호흡에 도움이 되는 치료의 한 방편이었다. 작가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홀가분한 혼자만의 여행을 하지 못하고 뜻밖에 맞닥뜨린 그녀의 상황이 무겁게 나를 눌렀다. 내가 어쭙잖게 위로랍시고 해주는 말이 그녀의 심리상태에 어떤 영향을 줄까봐 조심스러워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대화만 나누었다. 빨리 완쾌되어 복직도 하고 남자 친구랑 결혼도 하라고.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뿔뿔히 흩어지는 시간. 그녀는 활짝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주고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당연히 이름도 묻지 않았고 나도 담담하게 돌아섰다. 그러나 내 마음을 마구 휘저어 놓은 듯 그녀의 잔영이 눈앞에서 맴돌았다. 그저 소극적인 방관자가 되어 그녀의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토닥거려줄 너그러움이 내겐 없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오늘 여행은 들떴던 나를 잠재우고 새해 새 다짐도 다지기 위해 출발한 혼자만의 여행이었는데 종일 그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내 바람에 한 가지가 더 보태졌다. 가파른 젊음의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그녀가 건강을 되찾고 밝은 모습으로 사회의 일원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
-신정호의 〈겨울여행〉에서
인간은 서로의 감정을 공유하는 동물이다. 과거에는 인간과 동물의 다른 점을 높은 인지능력에서 찾았으나, 현대사회는 지능이 아닌 공감으로 그 차이를 인식한다. 인간의 본성에는 사람은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 공자는 사람으로서 평생 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서恕’라 꼽았다. 이는 자신의 마음이나 사정으로, 다른 사람을 헤아리고 깨닫는 마음이다.
더불어 살기가 쉽지 않은 환경으로 변한, 현대사회 속의 개인은 소외감과 고독감 속에서 살아간다.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여성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한 신정호 작가는 공감이 주는 힘의 본질인 동질성의 확대에 이른다. 투병생활을 털어놓은 초면의 그녀에게, 작가가 해 줄 수 있는 명백한 위로는 없어 보인다. 홀가분함을 즐기기 위한 혼자만의 여행길이었으나,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순간 작가에게 마음의 여유는 사라졌다. 그녀의 상황에 몰입하고 공감하여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위로의 전부였다.
공감은 단순한 감정의 발현이 아니다. 오늘날의 인간은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한 연결의 영역 초월이 이루어지고 있는 ‘초연결 사회’를 살아간다. 이런 사회일수록 정작 공감적 소통에는 소홀하기 마련이다. 〈겨울여행〉 결미에서 작가는 그녀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받기만을 바라는 심정을 토로한다. 그녀의 고통에 대한 작가의 공감은, 조급함보다는 여유롭게 기다리며 보낸 시간에 대한 보상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이어진다.
이성환의 〈역린을 건드리다〉는 도입부터 심상치 않다.
벤치 위에 권력 아닌 권력이 누워 있다. 누군가를 꾸짖듯 입을 연다. 장벽처럼 우람스레 서 있는 청사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가끔 소리를 버럭 지르지만 아무도 관심조차 없다. 누구도 저 여인을 통제하거나 간섭할 수 없다.
-이성환의 〈역린을 건드리다〉 중에서
여인은 백발의 노숙자다. 첫 문단의 분위기로 보아 그녀는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다. 그녀가 출근하듯 도착한 검찰청 청사는, S가 업무상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그녀는 추운 날에는 민원실 안에 앉아있거나 여름철에는 청사 뜰의 벤치에 누워있기를 일삼았다. 그녀가 어지간한 세간 살림이 다 들어있는 무거운 짐으로 인해, 인도의 턱을 넘지 못했을 때, S는 그녀의 짐을 승강기까지 옮겨 준 적이 있다. 그녀는 혼자서 공연 비슷한 행위를 하거나 무당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출근길의 S는 발걸음을 돌리곤 했다.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마음뿐이었다. 관공서에서 그녀가 해결하지 못한 민원은 무엇이었을까. 지키고자 했던 누군가를 지키지 못한 자책감이 그녀의 발걸음을 검찰청으로 향하게 한 것일까. 쓰라린 결별로 인한 상처와 관공서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분노, 거기다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멍하니 먼전만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억울함과 노여움을 함께 카트에 싣고 누군가를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일. 마치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고도Godot라는 구원자를 무작정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S는 대강 짐작이 들었다. 칠순이 넘은 노파가 노숙자 생활을 하며, 낮에는 법조계를 배회하는 데에는 필시 곡절이 있으리라고. 말 못할 울분이 그녀 가슴속을 바윗덩어리처럼 짓누르고 있으리라 여겨졌다. 여인이 상실한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이성환의 〈역린을 건드리다〉 중에서
반복되는 행동으로 배회하는 그녀를 보며 S는 사뮈엘 베케트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떠올린다. 부조리극의 고전으로 꼽히는 연극은, 한적한 길가의 나무 옆에서 ‘고도’를 기다리는 두 남자의 반복적인 대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막이 끝날 때마다 소년이 등장해 연극의 중심 테마인 고도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지만, 두 사람은 막연하게 그를 기다린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제는 “기다린다, 오지 않는다, 그래도 기다린다” 이다. 이러한 단순한 구성에 착안해, “오지 않는 것은 절망이지만, 무엇인가 기다린다는 것은 희망이다.”라는 보편적 해석을 내릴 수도 있겠다.
관찰자로서의 S는 단순한 방관자의 자세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녀에게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법정에서 판결의 부당함을 경험했거나, 기득권층 앞에서 소신을 펼쳤던 열정의 소유자일지 모른다. 정의 실현에 앞장선 투사였거나 이성과 감정의 부조화로 통곡하는 교양인이었을 수도 있다. 세상이 그녀를 냉대했으리라는 S의 예측을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그녀가 줄기차게 배회하는 장소가 검찰청 청사라는 점이다.
공감은 상대방의 감정이나 생각이나 가치관이 나와 다르더라도,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고 싶거나,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경청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다. S는 자신이 어느 정도 예측한 그녀의 처지에 공감하며, 그녀를 볼 때마다 법의 정당성에 대한 회의에 빠지곤 했다. 공감력을 갖추는 것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공감이 아니다. 소통을 전제한 공감이 진정한 공감이다. S가 시도한 공감은 그녀가 길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유추하거나, 그녀의 짐을 들어주거나 유심히 바라봐주는 것이었다.
그런 S가 출근길에 그녀로부터 봉변을 당한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그녀를 뒤돌아보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S에게 사기꾼, 양아치라던 그녀의 호통은 욕설이 아니었다. 그에겐 고독한 영혼의 절규로 귀에 꽂혔다.
그것은 욕설이라기보다 우울하고 고독한 영혼의 절규에 가까웠다. 그녀의 호통은 허명과 허욕에 여전히 집착하는 S 자신을 향한 죽비 소리처럼 들렸다. 현실의 부조리에 맞서는 함성이었고, 위선의 탈을 쓰고 잘난 척하며 어깨에 힘을 주는 자들을 혼내는 회초리인 듯도 싶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예측 불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 거미줄처럼 촘촘한 법망에 걸리지 않고 살아야 할 세상. 서로 먹고 먹히는 치열한 먹이사슬의 세계나 우리네 인생살이가 무슨 차이가 있으랴.
-이성환의 〈역린을 건드리다〉 중에서
그에 대한 호통이 허욕에 집착하는 자신을 향한 죽비 소리로 들리는 순간, 약자는 누구였을까. 누구라도 약자로 나락할 수 있는 예측 불허한 삶에서, 현재 호의호식한다 해서 미래를 장담할 수 있을까. 그녀가 처한 상황을 짐작하며 공감하려 했던 S,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도움을 베풀었던 그녀에게서 돌아온 것은 비난과 호통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S는 험담을 들으며 자신을 성찰한다. 그녀에 대한 공감 또는 역린을 건드린 답례치고는 씁쓸하다.
〈역린을 건드리다〉에서 필자가 주목한 점은 서사의 시점視點이다. 작가가 노숙여인의 행동과 사건을 바라보는 각도는, 작품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가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차용하여 여인의 외면적 행동을 이야기한다. 표정이나 외적 행동을 통해 내면세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1인칭 관찰자 시점과 일치한다. 독자가 보지 못한 시공간에 대해 서술하지만 여인의 내면 상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이 작품은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구성했으나, 독자들이 S를 1인칭으로 읽을 개연성이 크다. 그렇다면 왜 작가는 굳이 자신의 이야기를 서술자 시점이 아닌 3인칭 시점으로 구성했을까. 작가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나, 감정적인 요인을 차단하여 여인의 상황을 더욱 객관화시키려는 포석布石이었을 확률이 높다. 이는 1인칭 서술자의 시점에서라면 피할 수 없는 ‘말하기telling’ 기법의 해설적 성격을 지양하고자 했을 것이다. 3인칭 서술 시점의 특성인 보여주기showing를 통한 현장감 유지와 일관성 획득은 작가의 의도에 적중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화의 〈막장〉의 배경은 어휘만으로 상황을 유추할 수 있는 광산이다. 일반적으로 대중문화에서 소비되는 막장은 탄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회적인 시각에서 막장은 산업전사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막장의 주체인 광부의 삶의 내면을 담아내지 못한 단편적인 연상일 뿐이다. 현실 속의 막장은 탄광 노동자들의 삶이 막다른 곳으로 내몰려야 했던 지난한 삶을 대변한다. 그들에게 탄광촌은 정주하는 삶의 공간이 아니라,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머물러야 했던 공간이었다. 그들의 바람은 막장을 벗어나는 것이었으리라. 작가 역시 이 점에 집중하며, 광부와 그들 가족의 삶에 공감한다.
작품 속의 탄광촌은 강점기의 일본 기업이 광산을 개발하고, 자원 약탈을 위해 인력을 강제 동원했던 아픈 역사의 잔재가 남아있는 현장이다. 작가가 어렵게 찾은 마을 이름이 ‘꽃 피는 광산마을’이라니, 광산이라는 낱말이 안겨주는 고정관념과 꽃피는 마을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작가가 답사한 마을은 깨밭 이랑에까지 야생화가 군락을 이루는 명실상부한 꽃피는 마을이었다. 전성기에는 황금의 땅으로 불렸다지만, 당시 광부들의 아내 몇몇은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마을에 남아있었다. 사투의 현장이었을 갱도는 출입이 금지된 상태다.
〈막장〉에서 작가의 공감은 인지의 결과물이다. 대상을 파악하지 못하고서는 공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의 지인도 삶이 바닥에 이르렀을 때 광부 생활을 한 적이 있다. 고통에 대한 공감은, 자신의 고통에서 시작하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하건, 물자체物自體에 대한 인식에서 기인한다. 즉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의 의지에 대한 작가의 인식 혹은 통찰에 의해 발생한다.
누가 광부가 되는가. 물론 식민통치 때는 억울하게 광부가 되었으나, 세상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이 스스로 광부가 되었을 때도 있었다. 땅 위의 세상에서 더는 희망이 없을 때, 돈을 벌겠다는 일념으로 독기를 품고 시커먼 굴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래서 광부들이 일하는 곳을 막장이라고 부른다. 갱도의 맨 끝,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 앞이 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막다른 공간, 인생의 절망보다도 더 캄캄한 세상, 긴장을 놓쳐버리면 목숨 줄이 끊어지는 곳, 어쩌면 그곳이 세상의 끝이 될 수도 있겠다. 그러니 광산촌 사람들에게 금기어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 김정화의 〈막장〉에서
‘꽃 피는 광산마을’이 광산으로서 전성기였을 당시, 광산은 저렴하고 효율적인 에너지원의 상징으로 산업 부흥의 토대가 되었으리라. 나아가 다수의 국민들에게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편이었으며,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욕구 충족의 방식이었다. 현재 남아있는 광부의 가족들은 무덤덤하게 당시 삶의 밥줄이 되어준 막장에 대해 눙치고 있지만, 삶의 막다른 현장이었던 ‘막장’은, 광산촌 사람들에게는 금기어였다. 막장은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창작의 고통을 안은 산실을 두고도 작가들은 저마다의 은유로써 이름을 붙여왔다.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서재를 막장이란 말로 표현했다. 어찌 가만히 책상에 앉아 글 쓰는 일을 가지고 목숨이 달린 갱도의 막장과 비교할 수 있을까마는, 막장의 굴을 파듯 생사를 걸고 한 땀 한 땀 글 삽을 파는 글쟁이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막장에서 광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두 가지뿐이라고 한다. 앞으로 더 나아갈 것인지 아니면 멈출 것인지 결정하는 일이라는 것을. 만약 멈추기를 선택했다면 내려왔던 길을 따라 지상으로 되돌아가면 된다.
하지만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싶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단단한 벽을 파내어야 할 것이다. 갱도를 개척하려는 의지를 갖고 곡괭이를 들 수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딘들 막장 아닌 곳이 있으랴.
- 김정화의 〈막장〉에서
작가는 치열함으로 창작에 임하는 글쟁이의 자세에 대해 언급한다. 작가의 숙명인 창작의 노고는 광산처럼 생사를 판가름할 위험까지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긴장의 연속인 창작자의 입장 역시 앞으로 나아가거나 그 자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나아가기 위한 방법은 한 가지, 자신만의 갱도를 개척하는 일이다. 글의 굴을 파는 작가야말로 저마다의 삶의 도구인 곡괭이를 점검해야 하리라. 김훈 작가의 표현을 빌린, 창작의 자세에 대한 작가로서의 명제가 서늘하다.
광부와 그들 가족의 치열한 삶에 공감했던 작가의 시선은 보편적인 인간의 막장으로 확산된다. 나아가 “막장까지 무너졌던 한 여자의 옛 기억”에 머문다. 탄광촌을 찾아 광부와 그의 가족의 삶에 대한 공감은, 창작자로서의 작가의 치열함을 대변하는 작가의 막장에서, 작가인지모를 한 여자에 대한 기억으로 수렴된다. 나아가 막다른 삶의 터에 뿌리를 내렸던 광부와 그들의 가족과의 공감을 획득한다.
공감의 대상은 타인만이 아니다. 이행희의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달리 작가 자신과의 공감을 시도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의 시작은, 자신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리프킨도 “자신의 취약함과 고통을 인정할 수 있어야 다른 사람의 취약함과 고통에 공감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공감은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객관적으로 상대를 관찰하는 행동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나의 마음과 같이 깊이 헤아리는 것이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에서 작가는 자신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학대한다. 평가는 타인을 대상으로 하지만, 작가의 주된 평가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스스로를 적으로 규명하고 총구를 자신에게 겨누는 격이다.
외출하고 온 날은 자주 마음이 편치 않다. 잡다한 생각으로 마음이 어지럽다. 내가 말을 잘못하여 오해받지나 않았을까. 이렇게 말했어야 했는데 저렇게 말해버렸네. 그 때 그 행동을 말았어야 했는데, 어떡하나. 잠자리에 누우면 낮에 있었던 사소한 일들에 괴로워하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약한 바람이 살짝 일어도 출렁이고, 수평에서 조금만 틀어져도 민감하게 움직이는 물 같다. 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다보니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 서툴러 실수를 할 때가 더러 있다. 이럴 때 상대를 탓하기보다 내 탓으로 돌리는 편이다.
-이행희의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에서
삶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항해이며, 인간이 평생 가져갈 수 있는 관계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다. 사실 인간이 밖에서 찾는 모든 힘은, 이미 우리 내면에 있다.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심리상담가들은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삶이 놀라울 정도로 나아진다고 한다. 이렇든 단순한 것들의 심오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작가의 비판은 자신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작가도 상대방을 무의식 중에 평가한다. 자신의 행동에는 당위성을 부여하고, 상대방이 동일한 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적나라한 비판을 불사한다. 마침내 작가는 자신의 이중성을 인식하며 허점투성이인 인간도 존재 자체로 귀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온갖 깨달음이 늦은 것이 나이다. 진즉 알았어야 할 것을 이제야 알았다. 나에게 맞게 진도가 나가는 중이겠거니 여기자. 각자의 때는 다 다른 법이다. “당신이 알아야 할 때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란 구루의 말씀을 믿어 보자. 이런 나 자신을 알고,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어야겠다. 이해되지 않는 세상사도 받아들이며 품으려 노력해 보자.(중략)
목청 큰 어머니 밑에 자라서였을까. 어릴 때부터 고아이기라도 한듯 늘 춥고 외로웠다. 칼바람을 온 몸으로 맞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며 나와 동일시했다. 못 생기고 뭐 하나 잘 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여 주눅이 들었다. 분명히 사랑받고 있었는데 나는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질 못했다. 이제라도 두 팔을 들어 스스로 다정하고 온화하게 품어주자.
- 이행희의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에서
자아존중감의 결핍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열등감과 단점부터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자신에게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압박이다. 스스로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이 과연 무슨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에 조건을 붙이기 마련이지만 자신에게 공감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따질 이유가 없다.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작가는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에서 나와 친구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행희 작가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며 공감해야 할 대상을 자신으로 설정했다. 자신의 취약점을 인정했기에, 스스로 열어놓은 자유로움을 통해 일어날 기적을 체험할 수 있으리라.
홍정현의 〈위풍당당 저주 사건〉에는 상대방과 자신에게 공감하는 작품들과는 달리, 공감이라는 정서가 결여된 듯한 교사가 등장한다. 인간은 유전과 환경에 의해 형성되는 존재다. 공감 능력 역시 타고나지만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의 영향으로 능력에 차이가 있기에 누구나 공감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자칭 모범생이 아니었다고 고백한 작가는 열등감, 자책, 회의, 반문 등의 잔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억울함도 포함되어 있으나, 자신의 내면에 충실한 점이 모범이나 성실과는 다른 쪽으로 분류되는 것은 모순이다. 저주 사건의 전말에 위풍당당이라는 어휘를 붙인 것은 작가도 이 점을 인지하고 있음이리라.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사회교사는 명문대 출신이었다. 영문판 《뉴욕 타임스》를 양복주머니에 보란 듯이 꽂고 다니곤 했다. 이과 성향인 작가에게는 지루했던 사회 시간, 사건이 발생한다. 여드름 때문에 고민이 많았던 친구 정민에게, 여드름과 교회 오빠에 관한 장시를 쓴 쪽지를 접었다. 그것을 직접 전달하지 않고 쪽지를 던졌다. 장난삼아 던진 쪽지가 위풍당당하게 그려낸 포물선을 사회 선생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작가의 시는 쪽지를 가지고 나온 학생에 의해 낭독되었다.
사춘기 중학생의 위트와 은유를 여유롭게 받아넘기기엔 《뉴욕 타임스》 선생님의 사고는 편협했다. 그는 체벌 아닌 단호한 어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었다. 시를 쓴 학생은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고, 시 수준의 삶을 살 것이 뻔하다는 내용이었다. 만일 교사가 이 상황을 여유로움과 위트로 받아넘겼다면, 학습 분위기는 긍정적으로 향상되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거기에 더해 수업 시간의 일탈을 에둘러 지적하며, 시에 대한 극찬과 격려를 보냈다면 싹트기 시작했을 문학혼의 발아에 동기를 부여했으리라.
작가가 교사의 저주 내용을 지금껏 분명히 기억하는 것을 보면, 35년이라는 시간도 희석시키지 못할 강펀치였음이 분명하다. 십 대의 제자에게 훈계의 수위를 넘은 저주는 일종의 언어폭력이었다. 정작 작가 본인은 크게 상처받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뉴욕 타임스》가 선생님 말의 신뢰를 떨어트렸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십 대였으나 조숙하게도 그의 영자英字 신문이 지적 허영과 우월감의 표상이었음을 눈치채버렸음을 입증한다.
자, 현실로 돌아와 이제 저주받은 내 인생을 살펴보자.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저주대로 ‘딱 이 정도 수준’으로 살고 있는 건지, 아닌지. 여전히 성실하지 않고 집중을 못해 산만하며 철없는 행동으로 후회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나는 ‘제대로 된 인생’에서 한참 떨어진 삶을 사는 것 같다. 거기에다 소름 끼치게도 최대 콤플렉스가 영어인 ‘영어낙오자’여서, 《뉴욕 타임스》를 술술 읽지 못한다. 영문 잡지 정도는 편하게 읽는 인생이 ‘제대로 된 인생’이라면 저주대로 나는 ‘제대로’가 아닌 ‘딱 이 정도 수준의 삶’을 살고 있구나, 하는 살짝 비꼬는 듯한 장난스러운 해석도 해본다.
-홍정현의 〈위풍당당 저주 사건〉에서
오래전 선생님이 내린 저주의 정도를 객관적으로 가늠해 봐도, 저주라 할 만한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작가는 도리어 선생님의 안위가 궁금할 뿐.
글을 쓰며 ‘저주 사건’을 무한 재생하다 보니, 그 교실 정경과 사람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시공간이 필터를 낀 것처럼 서서히 변해간다. 그때 선생님의 처진 입꼬리, 그 끝이 슬슬 올라가 옅은 미소를 만들고, 장난이 심한 제자가 귀여워 역시 장난으로 ‘이따위’ 어쩌고저쩌고 말을 하는, 즐겨 보던 TV 시트콤의 웃기면서도 따듯한 분위기로 바뀌어 간다. 선생님의 저주가 억센 일직선에서 방향을 틀어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고개를 숙이며 내게 인사를 한다. 다정하게 ‘안녕하세요’라고. ‘반백’의 세월이 선물하는 필터링이다. 이럴 때는 늙어가는 게 꽤 괜찮아 보인다.
-홍정현의 〈위풍당당 저주 사건〉에서
그날의 선생님의 저주가 위풍당당하게 부드러운 포물선으로 작가에게 우회한 것은, 기억의 사후성과 세월이 안겨준 선물이다. 공감 능력 제로인 사회 교사의 비교육적인 대처는 고작 학생을 향한 저주였다.
〈위풍당당 저주 사건〉을 읽으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가 떠오른다. 그 이유는 시로써 학생들과 소통하던 키팅 선생과, 학생의 시에 저주의 말을 던졌던 《뉴욕 타임스》 사회 교사와의 괴리 때문이다. 모교인 윌튼 아카데미의 영어 담당 교사로 부임한 키팅은, 제자 앤더슨의 소심함을 고치기 위해 시인 ‘월트 휘트먼’의 초상화와 대면시켜 대화할 정도의 창의적인 교육 방식을 펼친다. 또한 교과서의 시를 평가하는 구절이 마음에 들지 않자 찢어버리라고 하거나, 학생들에게 현재를 즐기라는 의미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외친다. 학생들은 키팅의 자유로운 교수방식에 의해 성장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학생들의 자유로운 영혼을 지지했던 키틴의 교육 철학은 학생들의 억압된 영혼에 활력소를 부여했으니, 아이비리그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기존 체제와 전통에 익숙한 학교와의 마찰은 당연했다.
키팅은 과거에 친구들과 일탈을 즐기던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동아리 구성한 바 있다. 그 일이 드러나자, 학교에서 비밀 조직을 주동했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키팅 선생이 학교를 떠나는 날, 엔딩 장면에서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며 책상 위로 올라가던 모습은 불후의 명장면으로 남아있다.
사람들은 문학작품에서 낯선 감성과 언어를 수용한다. 수필은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경험을 작가만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독특한 의미를 부여한다. 수필가는 작품을 통해 자기 안의 이질성과 공존하고, 다양한 대상에 공감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타인을 이해하고 그의 관점으로 바라볼 줄 아는 힘이다. 문학 작품과 뇌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들은 독서가 공감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한다. 수필 속의 화자인 작가들은 자신이 만난 타인과 대상에 대한 감정을 이입을 통해 공감에 도달한다. 작품을 통한 공감은 독자에게 이기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윤리의 기초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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