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101장면 - 한국 최초 농구 중계방송 신입 아나운서 이현, 그가 도전한 농구 중계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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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4. 23:48조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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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 101장면
한국 최초 농구 중계방송
신입 아나운서 이현, 그가 도전한 농구 중계방송
요약 1939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나다 농구 팀 '캐나다 웨스턴'이 내한, 맡을 중계 아나운서가 없었음.
학창시절, 농구 선수였던 23살의 신입 아나운서 이현에게 농구 중계방송을 맡김.
야간경기로 하는 농구 중계를 해설자까지 옆에 두고 이현이 잘 해내 극찬을 받음.
그동안 일본은 야구, 한국은 축구 중계방송을 했지만 이후 농구 중계방송이 활발해짐.
1930년대 농구 장면
출처: 체육학대사전 - 한국의 농구
1927년 우리 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이 생기고 나서 스포츠 캐스터로 명성을 날린 사람으로는 박충근·이계원·민정호·심형섭 아나운서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했던 종목을 보면 축구와 럭비 그리고 복싱은 있는데 농구는 보이지 않는다. 농구는 이미 1907년 YMCA를 통해 들어와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방송국이 개국한 이래로 내한했던 외국팀만 해도 하르빈 농구단, 하와이 대학 농구단, 필리핀 농구단 등 다채로웠다. 그런데도 농구 중계방송을 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도대체 한국에서 최초로 농구 중계방송을 한 것은 어느 때이며, 그때의 아나운서는 누구였을까? 1939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캐나다 팀인 '캐나다 웨스턴' 팀이 내한했다. 방송국에서는 당연히 중계를 해야 했다. 시민들도 그렇게 알고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방송국에서는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농구 중계를 해본 아나운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룰을 제대로 아는 아나운서가 없었다. 예전 박충근 아나운서의 경우 권투경기 중계를 위해 조선권투구락부에 들어가 배운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벼락치기로 농구 규칙을 배워 중계방송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단 한 사람, 내가 해보겠으니 맡겨달라고 졸라대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를 거들떠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제 막 견습 딱지를 뗀 23살의 햇병아리 아나운서 이현이었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농구선수였다. 그러나 선배들 눈에는 그런 사실보다 짧은 아나운서 경력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시간은 계속 지나갔고, 경기장인 동대문운동장 정구 코트엔 마루판을 까는 공사가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농구 코트가 없던 시절. 캐나다 팀은 평소 플로어에서 경기를 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경기장으로 지정된 정구 코트 맨땅에 플로어를 깐 것이다.
축구라면야 박충근을 비롯해서 이석훈도 있고, 정문택도 있었다. 그러나 농구 중계를 하라니까 자신있게 나서는 사람은 이현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축구는 경기보다 중계방송이 더 재미있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나운서는 마이크를 잡으면 다짜고짜 "찼습니다, 찼습니다"를 연발하기가 일쑤였고, 관중의 함성은 들려오는데 아나운서는 왔다갔다 하는 공만 바라보다가 갑자기 "앗! 안 들어갔습니다!" 하고 외치기도 했다. 말이 막히면 우선 "혼전!" 하고 말하곤 했다.
농구 중계방송도 차라리 그렇게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계속 답답할 뿐이었다.
방송국에서는 할 수 없이 이현에게 중계방송을 맡겼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현은 마이크 앞에 앉더니 참으로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농구 중계방송을 잘해냈다.
더구나 그는 해설자까지 모셔다 옆에 앉혀놓고 했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이현이 모셔온 해설자는 평소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으로, 휘문과 연전의 농구 스타였던 손희문이었다.
그러나 청취자들은 한국 최초의 농구 해설자로 등장한 손희문의 목소리를 단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식민지 시대의 중계방송이었던 것이다. 일제 당국은 중계방송 때 아나운서 이외엔 누구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을 들어 농구 해설을 못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현은 살짝살짝 대화를 나누어 도움을 받으면서 무난히 중계를 마쳤다.
당시 농구경기는 낮에만 할 수밖에 없었다. 전기 시설이 미흡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캐나다 팀과의 경기는 특별히 야간경기로 이루어졌다. 때는 한여름인 7월. 경기 시간은 8시. 골든아워였다. 서울의 모든 귀는 온통 농구 중계를 듣고자 라디오에 쏠려 있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당시의 경기 장면 사진을 보면 관중은 코트 바로 옆바닥에 앉아 관전했다.
화제가 무성했던 경기였다. 그중 이현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은 극찬을 받았다. 조선총독부에서 관여하는 어느 신문의 기자는 일부러 이현을 찾아와 일촌설(一寸舌)이 장광설(長廣說)이었다고 문자를 써 칭찬해주었다. 농구 규칙을 잘 알았던 이현 아나운서가 거침없이 실황을 중계하자 그 언변과 실력에 놀라워하는 표현이었다.
당시 중계방송이라면 일본은 주로 야구였고, 한국은 축구였다. 그러나 이후로 농구 중계방송은 축구 못지않게 활발해졌다.
이현은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방송국 내에 농구팀을 만들었다. 그 농구팀은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체되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 최초 농구 중계방송 - 신입 아나운서 이현, 그가 도전한 농구 중계방송 (한국 최초 101장면, 1998. 9. 10., 김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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