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무근린(萬無近隣 : 철저하게 ‘이웃이란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서기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1419년 여름, 일단의 대마도인들은 선단을 짜서 명(明)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마도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명으로 향하던 왜구들이었다. 이들은 도중에 ‘식량을 구한다.’는 구실로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의 서해안을 침구했다. 병조(兵曹. 후기 고리/근세조선의 중앙 관청 가운데 하나. 군사와 관련된 일을 맡아보았다 – 옮긴이)에서 왜인을 사로잡아 취조해 보니, (그가 – 옮긴이) 다음과 같이 실토했다.
“나는 대마도에 사는 사람으로, 섬나라들이 다 굶게 되어 배 수십 척을 가지고 절강(제하[諸夏]의 절강성 – 옮긴이) 등지에서 노략질하려고 하였으나, 단지 양식이 떨어져 우선 비인(庇仁. 충청남도 서천)을 털고, (그 – 옮긴이) 다음에 해주(오늘날의 황해도에 있다 – 옮긴이)에 와서 도적질하려(고 하였다).[ 『 세종실록 』 권 4 ㅡ 세종 원년 조 ]”
식량난으로 인해(식량난 때문에 – 옮긴이) 연안을 침범한 왜구들이 재침구 시기만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궁핍한 왜(倭)의 현실이 정상적 교류에서 벗어나 비정상적 무력 침구로 전환되는(바뀌는 – 옮긴이)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일본 내 식량 사정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해, 조선정부는 선초(‘근세조선 초기’를 줄인 말 – 옮긴이)부터 금구(禁寇. 도적 떼[寇]가 나타나는/약탈하는 것을 막음[禁] - 옮긴이)를 목적으로 일본 각지의 수호(守護. 가마쿠라/무로마치 막부의 벼슬 이름. 서기 12 ~ 15세기에 일본의 각 지방을 다스리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 옮긴이)들과 통교를 맺었다.
왜구 거점인 대마도 소씨(宗氏[종씨 – 옮긴이])와는 1397년 이후 지속적으로 통교했다. 이런 교류는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조선이 손해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조선 정부가 대마도 소씨에게 쌀이나 콩 등을 보내준 것은 (소씨에게 – 옮긴이) 금구의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미(羈縻. ‘재갈[羈]과 고삐[縻]’ → ‘[짐승을 매어두려고] 재갈을 물리고 고삐를 채우듯이, 다른 나라의 이민족[이른바 “오랑캐”]과 종속 관계를 맺고 그들을 통제/회유하는 정책’ : 옮긴이)를 통한 회유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1428년 4월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가 죽자, 조선 정부와 대마도간 관계는 악화일로로 치닫는다. 그를 계승한 아들 ‘소 사다모리(宗 貞盛[종 정성 – 옮긴이])’가 아직 어려 해적 두목인 ‘소우다 사에몬타로(早田 左門衛郞[조전 좌문위랑 – 옮긴이])’가 실권을 움겨쥐며, 왜구는 교역에서 침구로 방향을 튼다.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이나 중국(명[明]나라 – 옮긴이)이 왜구의 침구를 수없이 받아온 것은, 침구가 주요한 ‘왜구식 교류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 간 정상적인 교역을 벗어난 파행적이며, 약탈적 존재로서 왜구를 지목하는 배경이 된다. 왜구들은 왜 이 같은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분란의 주역을 자처하며 동아시아 국가(나라 – 옮긴이)들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을까?
(중략)
(서기 – 옮긴이) 13세기 무렵, 왜구의 선단은 고려(왕건이 세운 나라인 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 연안에 지속적으로 침입해 왔다. 쳐들어오는 왜구를 격퇴해도 그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자, 고려 조정은 경계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일본에 대해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
1227년, ‘박인(朴寅)’을 일본 다자이후에 파견해(보내 – 옮긴이) 왜구 침략과 약탈 행위에 대한 단속을 요구한 것은 이와 관련 있다.
고려 측의 요구에 일본 막부는 왜구의 침공 사실에 대한 공식 사과와 함께 수호통상을 희망하는 서신을 보내왔다. 고려와의 통상 이권에 일본 규슈(구주[九州] - 옮긴이)의 영주 세력들은 큰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일본은 고려에 방물(方物. 지방의 특산물 – 옮긴이)을 바치고 고려는 이들의 협력을 얻어 한때 왜구의 침입을 완화시키는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263년 2월, 왜구는 전선 1척을 이끌고 (후기 고리의 – 옮긴이) 세공선(稅貢船. 조세[稅]와 공물[貢]을 실어 나르던 배[船] - 옮긴이)을 습격하여(덮쳐 – 옮긴이) 쌀과 비단을 약탈해 감으로써 ‘대화’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다. 교류를 하더라도 침구 행위는 계속되었고, 침구 행위가 멈췄을 때조차도 그 시기는 잠시였으며, 또 다른 침구를 위한 준비기에 불과했다(不過했다 → 지나지[過] 않았다[不] : 옮긴이).
(왜국이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한 뒤 시작되어, 1354년 동안 계속된 – 옮긴이) 오랜 한일관계에서 일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난제에 속한다. (그 두 나라 사이의 관계를 파헤치다 보면 – 옮긴이) 과연 서로 간에 ‘이웃’이라는 개념이 존재하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사실, 나도 그렇다! 서기 21세기인 오늘날에 길거리로 뛰쳐나와 “<조센징>을 죽여라!”하고 시위하는 넷우익/재특회나, “<일본(왜국)>이 (서기 1592 ~ 1598년에) 조선을 <정벌>한 건데, 왜 그게 (‘임진왜란’의) ‘난(亂)’이야?” 하고 짖어대는 왜국 누리꾼이나, “한국인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잘 한다!”는 기사를 쓴 왜국 잡지사의 왜인 기자나, 혐한 서적을 써서 팔아먹는 수많은 왜국 작가들이나, 그 서적을 사서 읽고 그 내용에 박수를 보내는 수많은 왜국 독자들이나, 다른 나라에서 “한국은 안전하지 못한 나라니, 가지 마라!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지 아느냐?”고 모함을 일삼는 왜인들을 보노라면
– 그리고 “<위안부(왜군 성노예)>들이 붙잡혀 끌려가는 동안, 조선 남자라는 것들은 뭘 했느냐?”/“한국 놈들은 <일본(왜국)> 맥주가 없으면 폭동을 일으킬 것이다!”하는 망발을 일삼은 전[前] 왜국 왕족 ‘다케다 쓰네야스’를 보노라면 – ,
‘한국이 이런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는 게 가능해?’하는 험악한 의문을 품게 되며, 한국 정부에 왜국과의 “단교”를 요구하고 싶어진다[국제기구여,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여, 한국인인 내가 이런 말을 했다고 나를 비난하고 싶다면, 그 전에 내가 이 말을 꺼내기 몇 해 전부터 길거리에서 “한국과 단교해야 한다!”고 시위한 왜국 우익들부터 비난하세요. 그것들이 먼저 시작했고, 난 맞받아쳤을 뿐입니다!] : 옮긴이)
침략 행위에 대해 사과와 용서를 비는 것도 왜구로서는 ‘거래의 한 방식’일 뿐이었다.
이런 왜(倭)의 특성은 당시 일본에 와 있던 스페인(올바른 이름은 ‘에스파냐’ - 옮긴이) 선교사의 눈에도 그대로 비춰졌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수백 년에 걸쳐서 계속 일본의 해적질로 피해를 겪었기 때문에, (서기 – 옮긴이) 1392년 조선(근세조선 – 옮긴이)이 건국된 이래, 일본(왜국 – 옮긴이)과는 공식 관계를 맺지 않았다.
한국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얻고 싶어 했던 일본인들은 통상을 위해 1426년 한국의 3개 항구(제포/부산포/염포)에 들어왔다. 그러나 1510년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난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남해안의 3개 항구는 폐쇄되었고, (그 뒤 – 옮긴이) 어떠한 접촉이나 통상도 허가되지 않았다.
으레 그러하였듯이, 일본인들(왜인들 – 옮긴이)은 (근세조선 조정에게 – 옮긴이) 다시 용서를 빌면서 개항을 청원하였다. 일본의 계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포 항구만이 (다시 – 옮긴이) 개항되었다.
1544년 일본인들은 남해안에서 다시 해적질을 시작했기 때문에, 한국 조정은 모든 일본인들을 추방하였다(내쫓았다 – 옮긴이).”[ 『 Anales de la Historia Coreana 』 ]
이런 일본의 인식과 세계관은 16세기 말에 들어서도 변함이 없다.
“나는 강력한 군대를 모아서 대명국(大明國)을 정복하면서 서리에 찬 나의 칼로 400여 주(州)를 휩쓸 작정이다. 이러한 목적을 실행하는데 조선이 앞장서 주기를 나는 희망한다. 조선이 꼭 그렇게 하기를 나는 바란다. 왜냐하면 조선과의 우의는 내가 중국(명나라 – 옮긴이)을 공격하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할 때 귀국(여기서는 근세조선 – 옮긴이)이 취할 행동에 전적으로 달려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서기 – 옮긴이) 1591년 조선 국왕 선조가 일본에 사신을 보냈을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의 국왕 앞으로 보낸 서신 중(가운데 – 옮긴이) 일부이다.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 “명나라[明]를 치러[征] 가니, 길[道]을 빌려달라[假].”는 요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이 근세조선에게 요구한 것이었다 – 옮긴이)’를 내 달라는 협박성 서신이다.
여기에는 조선 초 이후 200년간 맺어온 ‘이웃’이라는 사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넷우익이 길거리에서 “<조센징> 박멸!”을 외치며 시위하고, 혐한 서적은 왜국 서점에서 꾸준히 팔리는 걸 보면, 오늘날의 왜인[倭人]들에게도 한국을 ‘이웃’으로 여기는 사고는 없는 게 확실하다 – 옮긴이).
조선은 일본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고(당연하다. 남의 나라가 일으키려는 침략전쟁을 지지할 수는 없잖은가? - 옮긴이), 이는 불가피하게 임진왜란(올바른 이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근세조선 침략전쟁’/‘6년 전쟁’/‘아시아의 7년 전쟁’ - 옮긴이)으로 나타난다.
오랜 시간 한국과 일본은 ‘일의대수(一衣帶水. 한 줄기의 좁은 냇물이나 바닷물 – 옮긴이)’ 또는 ‘일위대수(一葦帶水)’라는 말로 양국 관계를 표현해 왔다. 두 나라 거리가 옷의 띠나 갈대만큼이나 좁은 강일 정도로 가깝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가깝다고 해서, 마음도 그러할까? 훌훌 털어버릴 수 없는 과거사가 현재사 내지 미래의 한일 관계를 이룬다는 점에서 왜구의 ‘역사성’이 있다.
‘일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때문에 일본의 ‘왜구적 성향’에 대한 이해 없이는 한 치도 전진할 수 없다(나아가, 그 왜구들을 지휘하기도 했고, 즈믄 해 동안 왜국을 다스리기도 했던 왜국 무사[武士]들에 대해서도 이해/분석을 못 한다면, 그 또한 왜국을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될 것이다 – 옮긴이). 일본이 극도로 꺼려해 마지 않는 ‘왜구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한/중/일을 둘러싼 동북아시아(동아시아 – 옮긴이) 바다는 삼국 간 점유와 활용 면에서 국제사의 한 단면을 이룬다. 이는 오늘날에도 동아시아 바다를 둘러싸고 엄연히 전개되고 있는 현재형 역사(歷史. 순수한 배달말로는 ‘갈마’ - 옮긴이) 전개 방식이다. (중세 말기와 근세의 – 옮긴이) 일본은 약탈과 침략이라는 비정상적 적대 행위를 반복하면서 공적인 교역 대신, (해적질 같은 – 옮긴이) 이단적인 해상활동을 수세기 동안 반복해 왔다. 역사상 이처럼 약탈 행위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경우도 없다(굳이 왜구와 견줄 만한 사례를 들라면, 청동기시대 말기에 동지중해 문명권을 무너뜨린 남유럽 백인 해적들인 이른바 ‘바다 사람들’과, 중세시대의 바이킹과, 중세부터 서기 19세기 전반까지 지중해를 누볐던 바르바리 해적과, 서기 16 ~ 19세기에 대서양에서 활동했던 서양 해적들을 들 수 있겠다 – 옮긴이).
왜구는 가장 가까운 나라에 대한 침구를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자행해왔다. 이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한국/조선 공화국 – 옮긴이)와 일본열도(왜[倭]열도 – 옮긴이)가 접한 탓에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왜구가 동아시아 평화를 깨뜨려 온 주역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에서 (결국은 – 옮긴이) ‘일본 책임론’으로 귀결된다. 한일관계에서 일본이 평화를 깨뜨린 예는 수도 없이 많다.
왜구 특징 중(가운데 – 옮긴이) 하나는 항시 전선(戰線)을 형성한다는 것인데, 대마도가 일본정부의 왜구를 통한 대외 약탈 창구역할(창구 구실 – 옮긴이)을 했음은 자명하다. 오랜 한일 관계에서 대마도는 왜구의 최전선이었고, 대한해협은 늘 긴장이 감도는 비무장지대(DMZ)와 같은 곳이었다.
(중략)
일본은 오랜 시간 양국(兩國. 두[兩] 나라[國] - 옮긴이) 관계를 선린보다는 ‘거래 중심’으로 생각해 왔고, 일본이 생각하는 ‘거래’란 무력에 의한 강압적 방식이었다. 그러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굴신(屈身. ‘몸[身]을 [앞으로] 굽힘[屈]’ → 겸손하게 처신함 : 옮긴이)의 자세를 취했고, 상황이 개선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침구하며 국가간 신의를 짓밟아 왔다.
역사적으로 보면, 한일관계에서 우리가 ‘이웃’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만한 사건은 그리 많지 않다.
(아래 줄임[‘이하 생략’])
( → 10 편으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