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가가 주목한 수필집⑬】-임종안 《산에는 길이 있네》《지리산의 노송》
시공을 초월하는 광대 무량한 인연의 세계 / 백남오
1. 기구한 운명의 아이
세상에는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 있다. 상상조차도 어려울 정도로 힘겨운 삶의 역정이 존재한다. 여기에 그런 운명을 타고난 한 작가와 작품집을 만나본다.
80여 년 전, 해방 전후의 혼란스러운 역사적 공간에서 깊고 깊은 지리산 속의 비구니 승려만 사는 조그마한 암자 대문간에 갓 태어난 아기 한 명이 버려진다. 물론 그 어미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기는 자라서 80여 년의 세월을 기적처럼 헤치고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다. 여기까지의 사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하다. 더구나 그가 작가가 되고 책까지 내었다면 그 삶의 서사가 더욱 궁금할 수밖에 없다.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보통사람에게도 인생이란 팍팍하고 만만치가 않은 일인데 산속에 버려진 아이가 살아서 80년의 세월을 헤치고 작가가 되고 작품집까지 내었다면 그 자체로서 충분하고 훌륭한 서사가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임종안 수필가이다. 그는 첫 수필집《산에는 길이 있네》(2020, 에세이스트)에 이어 이번에 두 번째 수필집《지리산의 노송》(2024, 수필과비평)을 펴내게 되었다. 이 두 권의 작품집을 중심으로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독일의 관념주의 철학자 헤겔은 태초에 정신이 먼저 있었다고 생각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 정신은 그 자체 만으로서는 추상적인 것이라 실현이 안 되고 그냥 정신적인 상태로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은 자기 자신을 투사해서 자연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관념에서 물질이 나왔다는 관념론자가 된다. 이와 반대인 물질에서 정신이 발생했다고 보는 입장이 유물론이다. 헤겔이 정신의 자기투사가 자연이라고 했을 때, 간난 아기가 거울을 보고 자신인 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정신은 자연을 대할 때 그게 자신의 외화(外化)된 모습이란 걸 모른다. 이때 자연은 일종의 타자가 되고 만다. 내가 아닌 남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그게 나라는 걸 알게 된다. 자기동일성의 인식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자연이 정신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투사해서 드러낸 것이 작품이라면, 헤겔이 말한 외화를 통해서 비로소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내가 쓴 작품을 보고, 그게 나라는 걸 아는 것, 진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쓴 작품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약 여기 80대의 후줄근한 할아버지가 있다고 하자. 그 속에는 할아버지의 10대, 20대, 40대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모습에서 할아버지의 전부를 찾아내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인식을 할 때만이 가능하다. 문제는 그 젊은 날 모두를 두고 온 줄 알지만, 두고 올 공간이 있어야 한다. 존재란 시간과 공간을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란 온전히 현재의 모습에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사상, 감정변화의 족적까지도 온전히 저 후줄근한 늙음 속에 전부 새겨져 있음이다. 임종안 작가 역시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서 그의 삶의 궤적을 추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이유다.
2. 할머니 스님의 사랑으로
임종안은 2020년에《산에는 길이 있네》라는 첫 수필집을 펴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울컥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 인연으로 애잔한 그의 삶이, 이제는 마음속 깊이 들어와 나의 한 부분이 되었을 정도다.
도계암은 지리산 천은사의 말사로써 절 대문간에 버려진 아이들을 키우는 비구니 암자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임종안 역시도 강보에 싸인 채 도계암 문간에 버려진 아이였다. 매정한 부모를 대신하여 어린 그를 거두고 길러주신 분은 인자하신 할머니스님이셨다. 그렇게 그는 험난하고 고독한 세상을 핏줄 하나 없이 80년의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어려서 네발로 기어 다닐 때, 부모님께서 지리산 자락의 한 비구니 암자에 맡겨졌다. 부모님은 어디론가 떠나셨고 이후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어머님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어린 나를 낯선 암자에다 무정하게 버려두고 떠나셨을까. 정확히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다만 그때 흉년이 들어 모두 먹고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으므로 암자에 나를 맡기면 배고픈 곤궁함은 덜 겪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리하지 않으셨던가 짐작한다.
나는 성장하면서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가 몹시 보고 싶었다. 만나볼 수 없는 어머니가 그리워 서러움이 북받칠 때도 많았다.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남몰래 품고 살았다. 누구에게나 있는 부모가 왜 나에겐 없을까, 그것이 내게 찾아온 최초의 질문이었다.
왜 나에게만 이런 불행이 주어졌을까. 참으로 원망스럽고 통탄스러웠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마땅찮았다. 꿈에라도 어머니가 나타나 주시길 바랐다. 내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신다면, 나는 그 손길을 영원히 흡족하게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질없는 공상이고 바람이었다. 항상 갈증과 허전함에 허덕였다.
- 〈박빙여림〉부분
눈물 없이는 읽어 내려갈 수 없는 상황을 작가는 담담하게 서술해 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픔, 굶주림과 멸시받는 설움이라면 그중에서도 부모 없는 고통이 가장 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70을 올라서는 나이인데도 늘 어머니가 보고 싶다. 부모님의 사랑이 살아갈수록 사무치게 그립다. 그러니 천륜의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그 슬픔과 아픔의 깊이를 짐작이라도 할 수가 있겠는가. 다행히도 그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따뜻하게 키워준 고마운 분이 있었다. 그분은 나이 많으신 여스님이셨는데 스님이라 부르지 않고 할머니라고 불렀다. 임종안이 버려지고 자란 지리산 도계암은 지금은 지리산으로 오르는 관광도로가 생겨서 길가 암자로 변했지만 그때는 첩첩산중의 외딴 암자였다. 하루 종일 사람 하나 구경할 수 없는 곳, 그래서 날아다니는 산새들의 울음소리도 더욱 정답게 느껴지는 고독한 산암이었다. 그 속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유년기를 보낸다.
“또 제 에미가 보고 싶은 게로구나. 그렇게 자주 보고 싶으면 어찌 살거나. 쯧쯧, 몹쓸 매정한 년. 천륜을 저버리면 천벌을 받는 것인디”
그런 다음 스님할머니는 나를 품에 안고 등을 다독여 주셨다. 할머니의 품에 안겨 포근한 젖무덤에 얼굴을 묻으면 할머니의 가슴에서는 작설차 향기가 묻어났다. 나는 향기에 취해 슬그머니 할머니의 젖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할머니는 흠칫 놀라시며 “요놈이 어디다 손을 넣어” 말은 그렇게 하시면서도 내 손을 뿌리치지 않으셨다. 나는 할머니의 젖을 만지는 황홀감에 젖어 슬픔을 잊어갔다.(중략)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자주 법당에 들러 부처님께 절을 했다. 법당 중앙의 좌복은 그 절 책임자인 주지스님의 자리로 정해져 있다. 그런 규정이 있는 것을 알지 못할 만치 어렸던 나는 중앙에 깔려 있는 좌복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러면 어른스님들은 전생에 이 암자 주지스님이 다시 환생해 오셨으니 그대로 두자며 중앙좌석을 나에게 양보하셨다.
- 〈그리움〉부분
이런 행동을 본 어른스님들은 전생에 이곳 암자 스님이었다가 다시 태어나서 이곳으로 온 동자라고 기뻐하셨다. 강보에 싸여 대문 앞에 버려졌던 작가는 이 암자의 전생 주지 대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부러움 없이 지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야말로 부처님께서 이 아이의 미래를 지켜준 것이 아닌가 싶다. 전생과 현생을 하나로 묶어보는 스님의 사유가 특별히 주목된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3. 끝없는 투쟁과 갈등 속으로
작가는 1941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데 청소년기는 여순반란사건, 한국전쟁 등 우리의 현대사가 지리산을 중심으로 요동치던 격동의 시기였다. 목숨을 다투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초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 이후 여수에 있는 작은 암자에 대처승으로 출가를 한다. 말이 출가이지 무려 6년 동안 새경 없는 종살이에 불과했다. 견딜 수 없는 비인간적인 고역이었다. 그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구례에 6년 만에 돌아오니 반란군들은 모두 소탕이 되고 옛날의 평온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옛날에 사시던 암자에서 그대로 생활하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듯이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다. 내 인사를 받고 난 할머니는 무겁게 입을 떼셨다.
“너도 이제는 나이도 먹고 했으니 비구니처소에서 같이 살 수가 없다. 아래 큰절로 내려가서 은사스님을 정하고 스님노릇 잘 하도록 하여라. 특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렵고 힘들다고 부정한 일에 쉽게 물들지 말고 정직하게 살거라. 지금 내가 한 말을 명심하고 꼭 지키도록 하여라. 알것냐?”
- 〈끝없는 부정들〉부분
작가는 할머니의 엄격하고 단호한 말씀대로 아래 천은사로 내려가 새로 은사스님을 정하여 사미계를 받고 본격적인 승려 생활을 시작한다. 정식으로 스님이 된 것이다. 당시 천은사는 대처승의 절이었다. 염불을 외우고 매일 종무소에 배달되어오는 각종 신문을 탐독하였다. 당시 절에는 고등고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과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이 무렵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사법고시 준비까지 하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전설 속의 암자인 상선암으로 처소를 옮겨 우번대를 오르내리며 3년간 사회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평범한 승려로 두지 않았다. 동료스님으로부터 사찰 산판에 부정이 있고 사회적으로 크게 말썽이 되니 바로잡자는 제의를 받는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 임종안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투사의 길로 들어선다.
내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이해득실이 없는 일임에도 내가 발 벗고 나서자, 그들은 나를 남 잘되는 일에 배가 아파서 방해나 부리는 불량배쯤으로 평가절하하였다. 나는 여론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정의에 대한 사랑과 부조리에 대한 분노랄까. 그 시절 나는 적어도 내 주변의 사회문제에 뜨겁게 고심하였다.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는 더 많은 이들이 나의 이 같은 행보에 공감해줄 것이라 믿었고 청정한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돕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외로움 싸움〉 부분
뿐만 아니라 사찰과 주지의 비리를 조목조목 들추어서 진정서를 작성하고 서명을 받아 청와대까지 보냈다. 구례경찰서가 발칵 뒤집힌 것은 물론이다. 정의를 사랑하는 이들이 박수를 보내고, 청정한 기운이 자신을 돕고 있다고 믿었다. 위축되지 않고 씩씩한 모습으로 싸워나갔다. 감독해야 할 기관마저 거대한 악의 고리에 함께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 과정에서 입영통지서를 받았고 30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천은사로 돌아온다.
전역 후에는 사찰운영에 눈을 감고 살 작정이었지만 현실은 너무나 부조리하게 보였다. 산판을 팔아서 부자 절이란 명성이 자자했지만 현실은 먹을거리가 없을 정도였다. 속가에 처자식을 둔 대처승들이 재산을 빼돌린 탓이었다. 문제는 그러한 부정투성이를 보고서도 누구도 나서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투쟁은 다시 시작된다. 이때 총무원에서 차라리 천은사 주지를 맡으라는 제의를 받고 임명장을 받았다. 26세의 피 끓는 나이였다. 총무원 지원금을 늦지 않게 납부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기에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주지 취임식도 못한 채 해임이 되었다. 총무원의 무원칙한 종무행정이 더 문제라는 사실도 알았다. 총무원을 검찰에 고발했다. 자신은 운명적으로 교단의 비리를 고발하고,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사찰 문전에 버려졌다고 믿었을 정도다.
그러나 그의 투쟁은 끝도 진전도 없었다. 종단개혁의 기폭제 역할도 하지 못했다.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처지만 곤궁의 수렁으로 빠져들 뿐이었다. 한 개인의 허망한 패배로 끝날 싸움이란 사실을 그때쯤 깨닫게 되었다. 그의 투쟁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만다.
이후 목근 예술가로서 새로운 삶으로 출발하지만 그때는 사찰과 주지가 그를 가만두지 않는다. 자연 훼손죄로 경찰에 고발되어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풀려나기는 했지만 상처는 컸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정든 천은사와 도계암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환속 아닌 환속이었다. 지리산에서도 가장 깊은 심원마을에서 정착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막상 암자를 떠나기로 작정은 했지만 갈 길이 막막했다. 산골에서만 자라온 나는 산골을 떠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스님께 쌀 서너 되를 얻어 짊어지고 무작정 지리산 깊은 산골 하늘 아래 첫 동네로 불리는 심원마을로 찾아들었다. 정처 없이 떠난 길이었다. 나는 이때 내가 어려서 보았던 감나무 가지에 까치가 집을 지어 놓으면 어디서 덩치가 큰 까마귀 떼가 몰려와 집을 빼앗고 까치를 쫓아내던 일이 떠올랐다. 혼자 산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면서 처음으로 뼈저리게 외롭다는 생각에 젖어 보았다. 이런 것이 승려사회에서 문중 없이 사는 외톨이 인생의 시련이던가.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누구에게 원망도 미움도 없는 그저 내 인생의 회한에 젖어 쏟아진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심원마을에 도착하였다.
- 〈심원에 들다〉 부분
화전민의 집터를 얻어 힘겹게 둥지를 마련하고 한봉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어느 날 움막을 헐고 천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린 현장에서 아연실색하고 만다. 이미 그는 공단 직원과 정보기관 형사들의 감시대상이 된 것이다. 투신을 결행하려고 앞산 높은 절벽으로 이동 중에, 쏟아져 나오는 벌떼의 공격에 새로운 삶의 의욕을 찾게 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돌아갈 곳은 핏덩이로 왔던 도계암뿐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그를 마지막까지 받아주었던 곳은 핏덩이로 왔던 도계암뿐이었던 것이다.
4. 광대 무량한 인연의 세계
임종안 작가의 작품세계의 가장 큰 특징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점이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고 무량광대의 시공을 유영한다. 다음 작품을 보자.
금생에는 내가 백운수좌의 스승노릇을 하지만 내생에는 자네가 내 스승이 되어주게나. 내가 죽으면 반드시 인도환생을 해서 승가로 다시 돌아올 것이니 그때 만나세.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내가 기도하면서 석종소리를 들었던 우번암으로 하세. 더벅머리 총각으로 오든지 행자의 신분으로 오든지 와서 이 달마도 그림을 보고 죽고 못살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이 나인 줄 믿고 이 달마도를 다시 나에게 주시고 나를 지도해 주시길 부탁하네.
-〈어느 약속〉부분
우번암을 실질적으로 창건한 용화스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씀을 하시며 조그마한 달마도 그림 한 폭을 제자인 백운스님 앞에 내민다. 두 스님은 달마도 그림을 매개로 금생을 뛰어넘어 내생의 일을 약속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약속의 구체적인 만남 장소는 지리산 우번암이다. 그럼에도 그것이 조금도 황당하지 않고 마치 몇 년 후의 약속처럼 친근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임종안 작가의 필력의 깊이라고 생각한다.
이후 백운스님은 지금의 우번암을 복원하는데 전력을 다하며 용화스님의 환생을 기다린다. 백운스님의 간절한 기다림에도 달마도를 전해줄 더벅머리 총각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신심이 부족해서인가 하고 더 열심히 기도했다. 백운스님이 이승을 하직할 무렵 화자는 문병하여 궁금했던 달마도의 사연을 물었다. 백운스님은 “용화스님은 이미 찾아오셔서 새소리 바람소리로 계속 나에게 설법을 하고 계시는데도 내가 눈 귀가 어두워 깨닫지 못했을지도 몰라. 용화스님의 수행력으로 보아서는 약속을 어기실 분이 아니신데.”
두 스님은 이제 세상을 떠나시고 안 계시지만 약속의 전설은 오늘도 지리산 골골이 솔바람 바람소리로 남아 회자되고 있다.
이 작품은 승려 임종안의 가장 깊은 곳의 수행의 정도가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또한 그의 문학세계의 정수리라고 생각한다. 임종안 지금은 평복을 입고 있지만 그의 몸속에는 승려의 피가 흐른다. 그것도 간절하고 진한 승려로서의 수행이 그를 떠받치고 있다. 그러한 믿음과 의지가 험한 이 세상에서 살아남게 한 힘이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적한 삶을 살았지만 저 세상에서는 희망과 사랑이 넘치는 극락왕생을 꿈꾸는 강한 신앙심의 발로이기도 하다. 지리산 종석대 밑에 있는 숨은 암자 우번암은 현재는 백운스님의 상좌인 법종스님이 40여 년 이상을 상주하고 있다. 이런 작품도 있다.
나는 세숫대야에 물을 떠다 고양이의 상처를 깨끗이 씻은 후 묻었다. 전생에 무슨 인연으로 이생에 이렇게 만나 내 가슴을 이리도 아프게 하느냐. 부디 원한이 있거든 풀고 왕생극락하소서. 왕생극락하소서. 마지막 사십구일째 되는 날은 고양이가 좋아하는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놓고 영가 천도식을 했다. 그래도 고양이의 살생에 대한 죄책감은 풀리지 않고 가슴이 아팠다. 어쩌면 토굴 생활을 마치고 떠날 때까지, 아니 어쩌면 이생을 마치는 날까지도 고양이의 죽음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회한으로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 〈어떤 천도식〉 부분
키우던 고양이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화자의 실수로 고양이가 죽었기에 그 슬픔은 더욱 크다. 영가천도식까지 올렸지만 아리는 가슴을 해소하지는 못한다. 이 작품 역시 화자의 의식 밑바탕에는 이생과 저 생의 공간적 사유는 서로가 넘나들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임종안의 수필에서 또 하나 더 나타나는 특징이라면 고향 구례 사랑이라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다음 작품을 보자.
내 고향 전라도 구례는 업장처럼 지리산을 등에 업고 살아간다. 이곳의 봄은 이삼월이 되면 멀리 남쪽에서 서서히 섬진강을 따라 올라온다. 하동포구 다압 마을의 매화를 꽃피우고 나서 지리산 아랫마을 산동의 산수유 피운 다음 우리들에게 고로쇠 약수를 선사하는 것으로 봄은 첫인사를 한다. 메말랐던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잎이 피고 얼어붙었던 대지에는 새순이 돋아난다. 미끄럽고 위험하던 산길은 내가 그랬냐는 듯이 깔끔히 눈이 녹아 탐방객들의 길을 열어준다.
-〈내 고향의 봄소식〉부분
이 작품은 그가 얼마나 지리산과 고향 구례를 사랑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내 고향 전라도 구례는 업장처럼 지리산을 등에 업고 살아간다.’라는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문장역시 서정적이고 담백하다. 그 어떤 수련을 통해서 이런 다정다감한 문장을 체득했는지 궁금할 정도다. 그는 천부적으로 작가일수밖에 없다.
사실은 그가 태어난 곳은 구례가 아닐지도 모른다. 구례는 그가 버려져 살았던 곳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는 단 한 번도 구례가 고향임을 의심치 않는다.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고 아낀다. 그것이 작품의 행간에서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실제로 화자는〈고향〉이란 수필에서“내 고향은 남쪽, 산자수명한 지리산을 등진 구례, 지리산의 정기를 타고 반야봉의 지혜를 얻어 태어남인지 예부터 예의범절이 바른 고을. 그래 <禮>를 구<求>하며 사는 고장이라 하여 구례란다.”며 고향이 구례임을 분명히 하고 그 자부심 또한 대단하다.
이상에서 임종안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자신을 거두어 따뜻하게 길러주신 할머니 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간절한 정. ②화자를 버린 부모님에 대한 한스러움과 사무치는 그리움. ③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정의에 대한 사랑. ④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광대 무량한 인연의 세계. ⑤고향 구례와 지리산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다.
5. 문학으로의 귀환
1980년, 임종안 작가의 생애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신동아》11월호에 논픽션 〈인간 송충이〉가 당선작으로 뽑힌다. 대처승들의 부정한 사찰 운영에 눈감지 못하고 싸워온 탓으로 승적부에서 이름까지 지워야만 했던 그동안 그의 투쟁사를 정리한 것이다. 공식적인 학력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그가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물리치고 유명잡지의 공모전에서 일등을 한 것이다. 이는 분명 임종안 작가에게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이다. 그로부터 칼럼리스트로 대우를 받고 유력일간지와 잡지의 필자가 된다. 전국에서 격려의 편지가 쏟아졌고 유명문인들이 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법정스님이 직접 다녀갔을 정도다. 2012년에는 수필전문지《에세이스트》로 등단작가가 된다. 2023년에는 수필〈할머니스님과 엄마스님〉으로《에세이스트》올해의 작품상을 받게 된다. 이정도면 작가로서 충분한 자리매김을 했다고 본다. 문학이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최고의 안식처이자 화해의 공간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신동아 당선 소감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억울하고 서러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진정 종교인이 취해야 할 자세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선량하게 살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배가 고프다. 아예 양심을 수술해 버리고 오늘은 이같이 내일은 저같이와 협잡하며 사는 사람들은 부당하게도 살쪄간다. 이런 현실을 볼 때마다 나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서 분노를 비우라는 경전 앞에서 나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천애 고아인 그는 왜 투사가 되었을까. 어린 시절 주지승의 같은 또래 아들에게 뺨을 맞은 적이 있다. 그때 처음으로 힘 앞에서는 비굴해야 한다는 비애를 맛보았다. 이때 각인된 억울함이 무의식으로 잠재된 것이라 했다. 두 번째 수필집 서문에 보면 이런 표현도 있다.
내가 성장한 지금은 나를 길러주신 여스님은 세상을 하직하시고 아무도 안 계신다. 너무도 한스럽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은혜를 생각하면 사무치게 그립다. 나는 이 하해와 같은 은혜를 세상을 정의롭게 사는 것으로 보답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이 결심을 지켜나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적당히 타협하지 못한 탓에 겪어야만 되었던 어려움은 말로 다 형용하기가 어렵다.
-《지리산의 노송》서문 중에서
나를 길러주신 스님의 은혜를 갚는 길은 ‘정의롭게 사는 일’이라 했다. 그렇다. 그는 정의를 위하여 그 힘겨운 투쟁의 길을 나섰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무엇보다도 그 소중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결핍이야말로 그를 저항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영특하고 인정 많은 그가 투사의 길이 아니고 세상을 긍정하는 삶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궁금하기만 하다.
임종안 작가는 지금도 80여 년 전 버려진 그곳인 도계암에서 여전히 살고 있다. 도계암에서 그가 할 일은 많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길러준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암자의 허드렛일과 차량을 운전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화자와 같은 처지에 있는 지우를 돌보는 일도 중요하다. 근래에도 대문 앞에는 강보에 싸인 불쌍한 아이들이 버려진다. 이 아이들도 정성을 다해 돌보아야 한다. 그는 비구니 암자의 승려로서가 아니라 불목하니로 돌아온 것이다. 스스로가 자청한 일이다. 홀몸으로 와서 핏줄 하나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떠날 것임도 예견되어 있다.
필자는 임종안 작가를 문학의 인연으로, 지리산의 인연으로 연결되어 교류 하고 있다. 몇 년 전 그와 지리산 상선암과 우번대를 함께 오르는 기회가 있었다. 팔순의 작가는 아직도 정정하고 따뜻한 인정스러움이 넘쳐났다. 하산 길에 문득, 그가 신라시대 상선암에서 수행하던 우번조사가 환생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상선암에서 기도하던 우번은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려고 종석대에서 토굴을 파고 수행정진하다 도를 깨쳤다. 바로 그 현장이 지리산 우번대의 출발점이자 뿌리다. 그는 이 세상에 홀로 와서 홀로 살며 홀로 저세상으로 떠날 것이다. 우번은 수행으로 득도를 했지만 임종안 선생은 삶 자체가 수행이고 정진이다. 득도를 하지 않고서는 현실을 이어가기가 불가한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꼭 닮아 있었다.
임종안 작가가 다음 생에는 고적한 산사가 아니라 사람이 벅적대는 곳에 태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화목한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좋은 배필 만나서 아들딸 낳고, 부귀영화의 삶을 누리시길 기원한다.
|
첫댓글 머물며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