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홍의 거리(Scarlet Street, 45년) 여색에 빠진 중년의 위기. 에드워드 G 로빈슨, 조안 베넷 출연

[아스팔트정글]

진홍의 거리

원제 : Scarlet Street

1945년 미국영화

제작, 감독 : 프리츠 랑

출연 : 에드워드 G 로빈슨, 조안 베넷, 댄 듀리아

마가렛 린지, 로잘린드 이반, 제스 바커

러셀 힉스

프리츠 랑 감독, 에드워드 G 로빈슨과 조안 베넷 주연의 '창속의 여인'은 1944년 만들어진 필름느와르 영화입니다.  그냥 잘 살던 중년남자가 어느날 묘령의 여인에게 이끌려 한눈을 팔았다가 우발적인 사건에 휘말려 단단히 곤욕을 치루는 내용이었습니다.  상당히 흥미진진한 필름느와르 걸작이었지요.

이들 3인은 바로 이듬해인 1945년 다시 유사한 내용의 필름느와르 영화에서 함께 했습니다.  제목은 '진홍의 거리'  동일한 감독, 동일한 배우입니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G 로빈슨이 연기한 주인공이 당하는 설정도 다소 유사합니다.  착실하게 잘 살던 중년 남자가 어느날 미모의 여인에게 빠져들면서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되지요.  두 편의 영화가 남자주인공이 겪는 이야기가 유사합니다.  오래전 '창속의 여인'을 리뷰했는데 오늘은 '진홍의 거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은행에서 출납원으로 일하는 크리스(에드워드 G 로빈슨)는 25년간 한 은행에서 착실히 일을 해온 성실한 직원입니다.  사장은 그에게 25년 근속을 축하하며 작은 선물을 합니다.  그날 집으로 귀가하던 크리스는 미모의 한 여인이 어떤 남자에게 두들겨 맞는 것을 목격하고 도와줍니다.  그 여인의 이름은 캐서린(조안 베넷), 크리스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 주다가 카페에 들러서 대화를 하게 되고 그녀에게 빠져듭니다.  캐서린은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했고, 크리스는 출납원이라고 말하기가 자존심이 상한 듯 해서 자신을 화가라고 소개합니다.  실제 크리스는 그림을 그리는 취미가 있었지만 정식으로 화가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림에 대한 크리스의 식견을 듣고 캐서린은 그가 유명화가라고 생각합니다.  두 사람은 계속 만나기로 했고, 캐서린은 크리스에게 무척 호감을 보입니다.

중년의 유부남, 물론 아내에게 애정이라곤 없는 크리스지만 이렇게 유부남이 젊은 여자에게 괜시리 눈독을 들였다가 나중에 안좋은 일을 겪기 마련인데 영화속 크리스도 그랬습니다. 사실 캐서린은 한량같은 악녀였고, 그를 두들겨 패던 남자는 자니(댄 듀리아)라는 이름의 건달이었는데 캐서린은 그렇게 폭력적인 망나니 자니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자니와 캐서린은 크리스가 부자 화가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합니다.  크리스는 캐서린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500 달러를 갖다 바치게 되고 이후 캐서린은 더 큰 돈을 요구합니다. 결국 크리스는 은행 공금에 손을 대게 되고 캐서린은 아파트를 얻어서 크리스에게 그곳에세 그림을 그리라고 합니다. 실상은 그곳에서 자니와 히히덕거리면서 지내는게 목적이었죠.  자니와 캐서린은 크리스의 그림을 몰래 갖다 팔려고 하는데 뜻밖에 유명한 미술평론가가 그 그림들에게 관심을 보이고 자니는 그림을 그린 화가가 캐서린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졸지에 캐서린은 촉망받는 신인 화가가 되고 전시회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크리스는 캐서린이 생활이 어려워 부득이 자기의 그림을 팔았다고 생각하고 그녀를 이해해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자니와 캐서린의 관계는 크리스에게 들통이 나는데.....​

보통 필름느와르 영화가 단순한 스토리로 이어지지만 이 영화는 처음에 사기를 저지르고 이후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사건이 예기치 않게 발생하는 재미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크리스가 캐서린에게 유명 화가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 그의 그림이 비싸게 팔리는 사건이 벌어지지요.  아무튼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캐서린은 크리스가 별 유명화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이번에는 그 그림을 자신이 그린 것처럼 속여서 화가행세를 하지요.  이런 예기치 않은 전개가 됩니다.

크리스 입장에서도 운이 좋게도 어떤 큰 고난을 잘 피해나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내가 자신의 바람을 눈치챈 줄 알고 난감해 하는데 알고 보니 엉뚱한 오해를 한 것이고, 경찰에서 자신을 살인자로 잡으러 온 줄 알았더니 공금횡령 때문에 온 것이고...교묘하게도 큰 잘못이 묻혀지고 작은 잘못에 대한 부분만 드러나게 되면서 행운이라면 행운의 상황이 벌어지지요.

'창속의 여인'과 유사한 또 하나는 살인이나 범죄에 대한 전개보다는 죄를 지은 사람이 겪는 심리나 불안감을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두 영화가 이런 점이 비슷하지요.  그래서 범죄에 대한 가장 무서운 형벌은 법에 의한 처벌이 아니라 양심에 의한 괴로움이라는 것을 프리츠 랑은 두 편의 영화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에드워드 G 로빈슨 만큼 이 역할에 대해서 적역인 배우가 있을까요? 중년의 나이에 볼품없는 외모와 작은 키,  남성적 매력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는 루저남이 겪는, 아름답고 젊은 여인에게 한번쯤 사랑받고 싶은 환상을 표현하기에 딱 적합한 배우입니다.  다른 배우라면 찰스 로톤이 어울렸겠지만 뭔가 뺀질한 악당 같은 잘스 토톤에 비해서 정신적 고난을 겪는 남자 역할로는 에드워드 G 로빈슨이 더 어울립니다.  팜므파탈 여성이 등쳐먹기 좋은 어리석은 열등남을 잘 연기했습니다.

조안 베넷은 아름답고 측은한 얼굴 뒤에 숨겨진 악녀로서의 이면을 가진 팜므파탈 역할로 역시 잘 어울렸습니다. '창속의 여인'에 이어서 에드워드 G 로빈슨과 호흡을 잘 맞추었죠.  '창속의 여인'도 그렇고 이 영화도 그렇고 미모의 여인 때문에 돌발적으로 벌어진 어떤 사건과 연관된 주인공 남자의 고난입니다.  '창속의 여인'이 난감한 상황을 함께 겪는 두 남녀라면 '진홍의 거리'는 그 여인에게 실컷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남자의 고난이지요.  25년의 성실한 근속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결과가 된 거죠. ​

 40년대 여러 필름 느와르 걸작 영화들이 만들어졌지만 프리츠 랑은 그런 시대적 기류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범죄 사회물을 계속 만들면서 미국에서의 성공적 정착을 했습니다.  그런 바탕에는 이미 독일에서 만든 '엠(M)' 이라는 범죄영화가 든든한 바탕이 되었고, 이후 '격노' '암흑가의 탄흔(그대는 살아있다)' '인간사냥' '창속의 여인' '진홍의 거리' '격노(36년 격노와는 다른 53년 작품), '도시가 잠든 사이에' 등 사회성있는 범죄영화 수작을 지속적으로 만들었습니다  '진홍의 거리'는 30년대 갱스터 무비의 스타인 에드워드 G 로빈슨의 특징과 개성을 잘 활용하였고,  '작은 아씨들'에 등장했던 미모의 조안 베넷을 같이 활용했는데 조안 베넷은 이미 '인간사냥'에서 프리츠 랑과 작업했고 이후 '창속의 여인' '진홍의 거리' '비밀의 문' 등 프리츠 랑 감독의 영화를 통해 40년대에도 계속 활발히 활동합니다.

아무튼 괜히 쓸데없이 젊은 여자에게 눈독들이지 말라는 중년남자들에 대한 톡톡한 경고를 하는 영화입니다. 다 부질없는 생각이고, 그냥 분수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이지요.  여자의 외적 아름다움에만 혹 해서 한눈팔다가 못 볼 꼴 보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매우 재미난 범죄영화입니다.

ps1 : 한국의 김승호, 미국의 에드워드 G 로빈슨, 영국의 찰스 로톤, 모두 외모는 뛰어나지 않고 키가 작지만 연기는 좋아서 오랜기간 명배우로 남았던 인물이지요.  다만 세 배우가 잘했던 캐릭터는 차이가 있죠.  김승호는 국민 아버지, 에드워드 G 로빈스는 갱조직이나 형사 등 범죄물 속의 인물, 찰스 로톤은 비호감 악당 등이 대표 캐릭터라고 볼 수 있습니다.

ps2 : 누명쓴 남자가 불쌍하게 보이는게 아니라 오히려 잘됏다 싶은 경우는 참 드문데 이 영화가 그렇죠.  그리고 범인이 불쌍하게 보이다니.... 

[출처] 진홍의 거리(Scarlet Street, 45년) 여색에 빠진 중년의 위기|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