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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Desire의 속성 / 엄현옥
인간의 욕망Desire은 맹목에 가깝다. 욕망의 함정은 무한한 자기증식이다. 따라서 욕망은 근본적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바닷물처럼 채워도 모자란다. 욕망은 특정한 주체와 대상이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기능한다. 욕망은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욕망은 적극적인 행동을 촉발시키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마음속에 채워질 수 없는 근본적 결여를 의미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란 충족되지 않는 욕망과 권태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시계추와 같다."고 했다. 한 가지 욕망이 성취되면 권태를 불러오고,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는 욕망은 악순환을 반복한다. 집착으로 이어지는 욕망은 이기심을 확장하는 속성이 있다.
나의 욕망이 확장되면 타인과의 갈등을 불러온다. 홉스Thomas Hobbes로 대표되는 유물론자들은 사회 존속과 발전을 위해서는 개인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제어되어야 한다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칸트Immanuel Kant 역시 욕망에서 나온 행동은 자유로울 수 없고, 오로지 이성에서 비롯된 행동만이 자유를 가져다준다고 했다.
욕망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동양의 전통에서도 반복된다. 불교에서는 탐욕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해, 인간은 수행을 통해서만이 욕망을 조절하고 에너지를 제어할 수 있다고 했다. 맹자도 “마음을 수양하는 데는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養心莫善於寡欲).”며 절욕과 과욕을 강조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해서는 욕망을 소멸해야 한다지만, 인간은 존재 자체가 욕망이다. 따라서 그것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통 철학에서는 이렇듯 욕망의 실체를 의식적인 속성으로 여겼기 때문에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된 욕망의 정체가 철학의 주요한 테마로 떠오른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다. 이성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20세기에는 욕망을 이성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였기에, 욕망이 철학의 주요 개념으로 수용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호에는 인간의 욕망을 합리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노력하는 작가의 내면이 드러나는 작품들에 포커스를 맞추었다.
윤석희의 〈곳간 헐어내다〉
작가는 태국에 머물던 숙소에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낸 치앙라이 숙소는 볕과 바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임시 거처라지만 생활용품은 물론 책이며 옷가지가 넘쳤다. 여행을 일삼는 작가가 모아들인 눈요깃거리는 그 규모가 개인 박물관을 능가할 정도다. 작가가 이국생활에서도 많은 짐을 소유하게 된 것은 저마다 지닌 사연이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비워내야 할 시점이었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닌 물건은 버리거나 현지인들에게 나누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짐들을 덜어내니 가벼워졌다. 물건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이들이 도리어 고마웠다. 작가는 애면글면 소중히 감당했던 짐들을 과감히 처분하며 변모한 세태를 떠올린다.
바로 지금이다. 앉은 자리를 정리할 때다. 대신해 줄 누가 없다. 용역 업체에서 들이닥쳐 떠난 이의 세간을 포대로 쓸어 담는 영화를 보았다. 부모님 가시고 유품을 나누어 갖던 시절은 옛이야기다. 자녀들도 현금통장이나 재산에만 관심 둔다. 내게 살뜰한 것이 타인에겐 쓰레기에 버금간다. 정으로 반질반질 윤을 냈어도 새것에 밀려 세월이 무색해지기도 한다. 남은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면 실속 없는 곳간부터 비워낼 일이다.
-윤석희의 〈곳간 헐어내다〉 중에서
겉치레에 불과했던 읽지 않을 책도 처분했다. 해묵은 옷장마저 털어내니 의식이 명료해짐을 느꼈다. 작가의 의식이 저당 잡힌 것은 물상뿐만이 아니었다. 부질없는 욕망과 욕심으로 채워진 의식의 실체는 헛것이었다. 욕망의 속성은 그 무엇으로라도 채워야만 하고, 채워진 다음에는 그것을 지켜내야 한다. 혈육에게 남겨주기 위해서다. 욕망의 악순환이 삶의 모토가 되어버린 듯한 현대사회를 반영하는 작가의 의식은 자녀를 대상으로 한 증여에 천착한다.
생각을 뒤집는다. 부숴버릴 테다. 내 곳간 따위 이제 헐어내야겠다. 아이들이 짓고 아이들이 일구며 채워가라고. 벽도 지붕도 없으니 자물쇠도 필요치 않다. 비록 금수저, 은수저가 아닐지라도 최선으로 산다면 부끄러울 게 없다고. 계주에서도 주자가 바뀔 때는 배턴을 주고받거나 맨손 터치를 한다. 움켜쥔 주먹 펼쳐 보이리라. 생명이 생명으로, 삶이 삶으로, 맥이 맥으로 이어지면 될 일이다. 기근 들지 않나. 불나지 않나. 도둑 들지 않나 지켜가면서 자신만의 곳간을 스스로 꾸려보라고.
-윤석희의 〈곳간 헐어내다〉 중에서
이성의 관점에서 보면 욕망의 근원은 결핍이다. 욕망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바라는 마음이며, 무언가를 소비하려는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결핍이 없는 존재는 욕망하지 않는다. 욕망은 본능적인 욕구에서부터 인정의 욕구에 이르기까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작가는 곳간을 비워내는 일을 계기로 자신과 자녀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찰한다.
많은 물건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는 유목민들은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덜하다. 그래야만이 이동성과 유목민으로서의 존재감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목적에 방해되는 소유의식을 걷어낸다면 불필요한 내부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차원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유는 여행 이후의 삶으로도 확장되어 마음의 에너지를 구축하게 된다.
〈곳간 헐어내다〉에서는 작가가 자신의 곳간을 비우는 과정에서, 빈 몸으로 와서 가는 것이 삶의 실체임을 직시한다. 나아가 모으고 채워 남겨주는 행위의 무용함을 자각한다. 그동안 자신도 모르게 소유 양식에 길들여진 삶을 통찰하여 존재 양식으로 이행하는 서술의 과정에서 보편적 공감성을 확보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트랜드는 동시대인들의 삶의 양식을 반영한다. 근래에는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건만 갖추고 사는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생각의 전환은 삶의 변화를 가져온다. 작가는 자신이 쌓아올린 곳간을 허물기로 한다. 비워 쌓아둘 것이 없으니 자물쇠도 무용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은 생의 순환 고리로써의 세대교체다. 작가의 의식 전환은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삶에 대한 통찰이야말로 후대에게 이어줄 정신적 유산이 아닐까.
- 백남일의 〈소유의 득실〉
작가가 소장한 다양한 소품은 종류와 그 양이 실로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 그것을 수집할 때의 열정을 다른 분야에 기울였다면 그 방면의 대가가 되었으리라 여길 정도다. 고물상 리어카의 도움까지 받아 많은 물품들을 비워내니 가벼워졌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었다. 물욕을 경계하라는 불가의 가르침을 실감할 정도다.
한때 취미로 모은 퇴색한 넥타이핀만도 십여 개가 넘었다. 각종 기념 메달은 또 무엇에 쓰려고 이리도 정성스레 수집했던지, 마치 아이들이 갖고 놀던 딱지를 연상케 했다. 우표수집 스크랩북은 2권하고도 미처 정리하지 못한 우표는 책갈피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금싸라기 시간을 헛되이 보낸 부질없는 소치였음을 깨닫게 된다. 그 열정과 의욕을 학문이나 이재理財에 쏟았으면 대가大家 아니면 갑부가 되었을 게다.
- 백남일의 〈소유의 득실〉에서
학창 시절, 작가는 오매불망 그리던 삼천리 자전거를 선물로 받았다. 소원을 이룬 기쁨도 잠시, 내리막길에서의 자전거 사고는 깊은 흉터를 남겼다. 자전거를 탐하지 않았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부상이었다. 작가는 흉터가 자전거라는 물상에 집착했던 과욕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자책한다.
묵화에 열중인 작가의 아내는 액자 수집을 즐긴다. 취미를 넘어 수집광이다. 그녀가 가져다놓은 액자를 다시 내다 버린다. 아내의 눈을 피해 물건을 다시 버리는 일은 새로운 갈등을 유발할 소지를 안고 있다.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는 저장강박증의 사례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소유에 대한 믿음은, 물상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들에게 물건은 단순한 물상이 아니라 중요한 관계의 대체물이거나 결핍의 보상이 된다. 현대인들의 과잉 소유와 저장은 불안감이나 공허감과 무관하지 않다.
작가는 소유와 함께 부여된 권리와 의무에 대해 생각하며 ‘버리다’의 어원에 천착한다.
‘버리다’의 어근語根은 ‘벌’이다. 이는 팔 또는 손의 뜻을 지닌다. 버린다는 건 내 수중에 든 획득물을 방기放棄하는 행위이다. 허공을 훨훨 날아다니는 날짐승은 먹고 남은 것을 몸에 지니는 법이 없다. 배고프면 그때그때 벌레 따위를 잡아먹고, 배부르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여유를 지지배배 노래 부르며 생의 열락을 찬미한다.
한데, 인간은 배부르면 부를수록 곳간에 욕심을 비축하는 데 여념이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은 닫는 사슴을 보고 얻은 토끼를 잃기 다반사다. 그래서 가진 것에 만족할 줄을 모르고 늘 없는 것에 연연하기 때문에 인간의 비극은 끊이지 않는다. 소유한다는 건 권리와 함께 의무가 부여된다는 사실을 결코 망각해선 안 되겠다.
- 백남일의 〈소유의 득실〉에서
소유는 자유가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어떤 대상을 소유할 때, 그것이 무엇이든 상대가 누구이든 내가 소유하고 붙잡는 것은 아니다. 내가 소유한다는 것은 착각일 뿐, 실은 자신이 소유당하고 붙잡히는 것이다. 대상으로부터 자유롭고 싶거든 그것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만 한다.
〈소유의 득실〉에서 작가는 물상의 노예가 되었던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들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먼저 그것들을 풀어준다. 정리가 필요한 것은 집 안을 채운 물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지 모른다. 결미에서 작가는 소유야말로 자기를 구속하는 올가미라는 생각에 이른다. 이렇듯 자신의 경험을 의미화하여 소유와 존재를 통찰하여 보편적 공감에 도달한다.
김용순의 〈꽃향유가 핀 작은 액자〉
욕망이란 생산적인 활동을 이끄는 동력일 뿐 아니라 생산적인 능력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꽃향유가 핀 작은 액자〉에는 김용순 작가가 은퇴 이후, 물질적 사회적 욕망을 내려놓고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이 담겨 있다. 작가가 송년 모임에서 받은 캘리그래피 액자에는 보랏빛 풀꽃 몇 송이와 “누군가의 꿈이 되는 삶을 살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문구는 작가에 누군가의 꿈은 물론, 가족의 꿈도 이루어주지 못했던 시절을 불러온다.
두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의 꿈이 되려고 애썼지만, 오히려 그들의 꿈에 걸림돌이 된 경우도 없지 않다. 큰애가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학업을 계속하고자 했을 때 도움이 못 됐었다. 비싼 학비와 체류 비용 문제는 아무리 계산을 거듭해도 당시 형편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꿈을 접고 돌아오는 딸을 공항으로 마중 가서 보니 그 발랄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늘진 얼굴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장시간 비행으로 멀미가 났을 뿐이라고 억지로 웃어 줄 때 같이 웃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었다. 작은애에게도 꿈길을 마냥 응원해 주지는 못했다. 학문의 길에서나 직업을 선택할 때 집안 사정을 감안해서 꿈으로 가는 지름길을 두고 우회하는 눈치가 역력했지만,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김용순의 〈꽃향유가 핀 작은 액자〉에서
경제적 지원이 절실했던 시절에 그들에게 꿈이 되어주지 못했으나, 부모로서 그들이 잠시 한숨을 고르는 의자가 되어주고 싶었다. 당시 지켜보던 부모의 마음이 닿았는지 그들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다.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작가는 자신의 욕망을 비워낸 조촐한 터에 타인을 위한 의자를 내주고 싶다.
누군가의 꿈이 되어주고자 한 작가에게 마침 그 뜻을 펼칠 계기가 찾아온다. 퇴직 후 찾은 장애인복지관 현관에 놓인 낡은 의자는 쓰임새가 다양했다. 다리가 불편한 분들이 신발을 벗을 때 몸을 받쳐주고 편마비 장애인들의 지팡이와 가방을 대신 받아주는 유용한 의자였다. 작가가 그들의 삶에 수필이라는 의자 하나를 놓아주자 다짐했다. 그들이 가파른 일상에서 한숨을 고를 수 있도록 배려한 의자는 단순한 의자 이상의 의지처가 되었다.
그들은 내가 바라고 고민한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읽고 쓰는 일을 꾸준히 하여 이제는 글도 제법 써낸다. 한 자 한 자 혼으로 눌러쓴 한 편 한 편에는 장애라는 아픔을 하나 더 안고 살아야 하는 그들의 정화된 희로애락이 녹아있어 어떤 명수필 못지않은 감동을 준다. 그런 글을 공모전에 보내어 수상 소식을 받아올 때도 있다. 연말에는 한 해 동안 쓴 글들을 책으로 엮는데 복지관에서는 가족까지 초대하여 출판기념 사인회를 열어 준다. 이름 석 자를 쓰는 데도 긴 시간과 많은 품을 들여야 하는 그들 얼굴에 웃음이 비칠 때마다 나는 코끝이 매워 오는 것을 참느라고 애를 먹는다.
- 김용순의 〈꽃향유가 핀 작은 액자〉에서
작가는 욕망의 대상을 선회하여 그것을 장애인복지관의 문우들에게 투영한다. 그들에게 수필이라는 의자가 되어주었듯이, 세상에는 기꺼이 자리를 내준 빈 의자들이 곳곳에 있기를 바란다.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는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의자가 필요하다. 이정록 시인은 사는 게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라는 어머니의 말을 빌어 의자라는 물상을 바탕으로 한 따뜻한 배려와 교감의 시구를 남겼다.
〈꽃향유가 핀 작은 액자〉에서 작가는 서두의 작은 액자에 적힌 문구라는 소재를 상징적으로 배치했다. 개인적인 체험에서 출발했으나, 작가만의 주관적 체험에 머무르지 않고 인간 삶의 보편적 영역으로 확대했다. 의자는 은퇴 후 조촐하게 비워낸 작가의 삶에서,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한 유의미한 장치다.
- 이치운의 〈짠맛, 익숙함을 깨우다〉
욕망은 부도덕하거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물길을 인위적으로 바꿀 수 없듯이 욕망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차단할 수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의 흐름은 자본주의적 장치로부터의 탈주하는 것을 참된 의미의 혁명이라고 보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짠맛, 익숙함을 깨우다〉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각 현상으로 서두를 연다. 바닷물의 짠맛에 익숙해지면 사람들은 점차 감각이 무디어져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삶에서의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진다. 이러한 익숙함은 과거에 느꼈던 만족감과 감동을 희석시킨다. 인간이 갈망하던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은 점차 수그러들기 마련이다. 때론 익숙함에 젖어, 본연의 가치가 사라진 것이 아님에도 더 이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익숙함으로 인해 무디어진 많은 것들의 의미에 대해 더 이상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 가까이에 있어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안도감은, 의지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에너지를 희석시킨다. 욕망은 새로운 타자와 마주쳐서 그것을 연결하려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힘을 의미한다. 자신의 주변에서 만나는 특정한 연결 관계만을 고수한다면 욕망의 기존의 틀에서 축소되고 만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익숙해짐으로 인해 본연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시기가 언젠가는 오게 마련이다.
오감五感도 예외가 아니다. 익숙해지면 무디어진다. 강한 냄새의 경우 처음 맡았을 때와 달리 시간이 지나면 무디어져 계속해서 인지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듯 감각기관은 항상 존재하고 접촉하고 있음에도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한다.
익숙한 것에 길들여지면 욕망이 사라진다. 사그라진 욕망은 무감각하거나 만족을 몰라서가 아니라 의욕이 없어서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하고 싶어 하는 의지나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다. 매일 같은 일이 반복이 되면 지치고, 만사가 귀찮아지고, 몸이 무거워진다. 일상이 익숙해지면 관찰력 또한 무뎌진다. 낯선 곳을 여행을 하는 이유도 익숙함에서 벗어나기 위함일지도 모른다. 늘 다니는 골목, 늘 타고 다니는 버스나 지하철, 늘 먹는 음식은 너무 익숙해 설레는 감흥이 없다.
-이치운의 〈짠맛, 익숙함을 깨우다〉 중에서
작가는 익숙함에 가려져, 대상의 본연의 가치를 간과하는 것을 경계한다. 대상의 겉모습에 감추어진 인식을 일깨우기 위한 작가만의 방식은 익숙한 것에서 짠맛 찾아내기다. 어떤 맛을 상반된 욕망의 대립과 타협하는 과정으로 볼 때, 그 맛이 강하고 진할수록 좋은 것은 아니다. 간단치 않은 맛의 방정식에서 작가가 내린 처방은 짠맛 처방전은 단순한 맛을 넘어 열망이 사라진 탄력을 잃은 일상에 변화를 안겨줄 것이다.
만사가 무덤덤해지려고 할 때, 사는 일에 회의가 밀려올 때 익숙함에 삶을 점령당하고 있다는 징후일지 모른다. 그 징후에서 벗어나려면 미지근한 맛보다 짠맛이 필요하다.
짠 맛이 어디 소금뿐이겠는가
-이치운의 〈짠맛, 익숙함을 깨우다〉 중에서
익숙함은 타성에 젖은 태도를 유발한다. 타성에 젖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거나 변화를 두려워하면 익숙함에 잠식당한다. 미지근한 인생의 맛에서 벗어나기 위한, 짠맛에 의한 미뢰의 자극은 긴장을 유발하고, 익숙함에서의 탈출구가 될 수 있다.
삶의 본질로써의 욕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욕망은 우리 존재의 자체를 의미한다. 내 삶의 가치 표현이기도 한 욕망은 지나치게 억제하거나 배척할 대상이아니다. 살아 있다는 증거로써의 욕망은 무엇인가를 갈망하는 마음 상태다. 〈짠맛, 익숙함을 깨우다〉는 경험과 현상의 기록을 벗어나, 인간의 감각과 그것에 익숙해진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장치로서 짠맛이라는 미각을 설정한다. 익숙함에서 탈피하기 위해 내가 찾아내야 할 맛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한복용의 〈몬스테라와 같이〉
작가가 방에 들인 식물은 ‘몬스테라’다. 화원을 경영한 적이 있기에 기르는 방법도 이미 알고 있다. ‘몬스테라’는 외양이 독특한 식물이다. 아래로 주먹만 한 잎 두 장이, 위로는 두 배쯤 큰 또 다른 잎이 다른 높이에서 자라났다. 특이한 것은 잎맥을 사이에 둔 위쪽의 잎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칼집을 내놓은 것도 아니다.
생태계에 우연은 없다. 식물학자들은 이 식물의 습성에 대해 과다할 정도로 정연한 논리를 펼친다. 잎에 큰 구멍이 필요한 이유는 위쪽 부분의 잎이 자신의 몸을 갈라 아래쪽에 햇빛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란다. 구멍 같은 걸 굳이 만들지 않아도 이미 잘 자랄 텐데, 헌신을 실천한다고? 그것도 식물이?
이 식물의 모습에 담긴 의미에 끌린 작가는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시인을 떠올린다. ‘에즈라 파운드’다.
몬스테라를 보면서 나는 미국의 시인 에즈라 파운드를 떠올린다. 그는 열다섯 살 때 유럽을 여행하면서 이탈리아의 문화유산에 매료되었다. 그때 시인이 되기로 결심했고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뒤에는 아예 유럽으로 건너갔다. 부유했던 그는 베네치아와 런던, 파리 등지를 주유하면서 엘리엇, 예이츠, 조이스 등을 도와 그들이 문학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헤밍웨이는 파운드가 문인들을 “잡지에 소개하고, 감옥에서 꺼내 주고, 돈을 빌려 주고, 연주회를 알선해 주었다.”고 알리며 “병원비를 대신 내고 자살하지 못하도록 설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 한복용의 〈몬스테라와 같이〉에서
작가에게는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존재가 되고자 했던 계기가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오기 어려웠을 때, 손을 내민 누군가의 헌신이 있었다. 이제 작가는 누군가에게 ‘몬스테라’가 되고 ‘에즈라 파운드’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의 헌신으로 누군가의 재능을 북돋아 줄 수 있다면, 문학의 꽃이 개화하는 것을 지켜보고자 한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암흑 속에서 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걸어 나온 때가 있었다. 그가 내게 준 도움은 몬스테라나 에즈라 파운드가 건넨 헌신과도 같았다. 몬스테라의 ‘헌신’을 가슴에 담았다. 주변을 둘러보고 재능 있는 사람을 찾아내 키워내는 일은 타고 나야 한다. 내게 온 기회를 조금 나누어주는 마음도 여유가 없으면 힘든 일이다. 자신의 본분을 지키며 주위를 살피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 한복용의 〈몬스테라와 같이〉에서
작가가 누군가의 ‘몬스테라’가 되기를 바라지만, 인간이기에 초심으로 일관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결정한 삶의 방향일지라도 실제 행하다 보면 욕망이 불쑥 고개를 내밀 것이다. 한복용 작가가 자신의 초심과 욕망을 견제하는 방식은 대단한 사회적 거대담론이나 도덕적 이야기가 아니다. 왼손이 모르게 무언의 헌신을 실천할 뿐, 자신의 욕망에 대해 스스로를 경계한다.
욕망은 특정한 주체와 대상이 없이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하고 기능하며, 인간의 삶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인간은 그로인해 매 순간 자신과의 갈등을 겪는다. 그렇다면 선택해야 한다. 자신만의 좌표를 선택하고 그것을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삶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다. 작가는 매순간을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기울인다. 그로 인해 타인의 시선에 의한 행복이 아닌, 바로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복을 증식시킨다.
철학자 스피노자가 말한 ‘생산하는 욕망’이라는 어구에는 목적어가 없다. 이는 특정한 대상과 무관하게, 끊임없이 뭔가를 생산하는 인간 욕망의 속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욕망은 특별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기제가 아니다.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다.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변화의 급행열차에 올랐다. 급류의 소용돌이가 우리를 희롱할지라도 욕망을 덜어낸, 작가만의 셈법이 빛난다. 그로 인해 금년 봄은 유난히 포근할지니,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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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잎에 큰 구멍이 필요한 이유는
위쪽 부분의 잎이 자신의 몸을 갈라
아래쪽에 햇빛을 나누어주기 위해서란다."
제가 생활원예나 원예치료 강의를 할 때
식물도 "배려"를 한다고 곧잘 이야기 하지요.^^
홍윤선 지부장님, 늘 수고 많으십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