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유망한 축구소년이 있었다.
이동준....,
한때 촉망받는 축구선수였다.
강동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99년 청소년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릴 정도로 장래가 창창했다.
최태욱, 이천수, 김병채, 최원권 등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태극 마크를 단 이동준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많은 대학교에서 관심을 가졌다.
이동준에게는 보장된 미래가 있었다.
그는 의외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다소 소박하다면 소박한 목표였다.
그의 꿈은 고려대도 연세대도 아닌 자기 아버지가 나온 한양대에 입학하는것이 꿈이었다.
여러 대학에서 그의 입학을 수소문하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의 목표는 확고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첫 번째 시련이 찾아왔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99년 6월, 당시 이동준을
지도했던 스승이 막 창단한 A대학교 감독으로 가면서부터였다.
이 감독은 고등학교를 떠나면서 이동준과 이 팀의 주장 등 두 명으로부터 A대학교 입학 서류에 도장을 찍게 했다.
“당시 지도자분들은 정말 무서웠거든요. 겁이 나 도장을 안 찍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후에 일이 그렇게까지 커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죠.”
그의 첫 번째 시련은 이렇게 찾아왔다.
연말이 되고 원서를 쓸 시기가 다가왔다.
그를 원하는 대학은 많았지만 결국 지난 6월 반강제로 찍은 도장이 문제였다.
“계약했으니 무조건 와야 한다”는 게 A대학교의 입장이었다.
한양대를 마음에 품고 있던 그는 이제 막 창단하는 지방대학교에 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도 만류했다...
거기 가면 넌 성공 못한다고...,
아버지께 꼭 한양대에 가 인정받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다니 상심이 컸다
대학 진학을 거부하다
이동준에게는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고등학교 측에서도 “A대학교가 아니면 원서를 써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동준이 대학교에 가 축구를 하려면 무조건 A대학교에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 이동준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대학교 입학을 포기하고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은 것이다.
2000년 당시 K-리그 드래프트는
이영표, 김남일, 이관우, 김대의, 심재원 등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쟁쟁한 선수들이 몰렸다.
“6순위로 강동고등학교 이동준을 지명하겠습니다.”
이동준은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지명을 받았다.
바로 ‘명문’ 안양LG였다.
당시 이동준은 김동진, 최태욱, 박용호, 최원권, 김병채와 함께 이른바 ‘안양의 독수리 6형제’라는 별명으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입단 첫해부터 그에게 많은 기회가 주어질 리는 없었다.
당시 안양은 최용수와 정광민, 안드레, 신의손 등 K-리그 최고 수준의 기량을 가진 선수들의 대활약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이동준은 군대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돌아와 자리를 잡는 게 좋겠다는 판단으로 입대 신청서를 넣었다.
당시 상무 정원의 한 자리가 운 좋게 비어있던 터라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2001년 2월, 안양과의 계약을 종료하고 곧바로 상무에 입대했다.
상무 시절 1년차에 상무는 실업 리그에 참가했고 2년차 때는 프로 2군리그에 나섰다.
지금처럼 상무가 K-리그에 참가하지 않던 시절이라
그에게는 K-리그 무대에 나설 기회가 없었지만 이운재, 박진섭, 이민성 등 걸출한 스타들이 그와 한솥밥을 먹었다.
하지만 상무 제대를 앞둔 그는 돌아갈 팀이 없었다.
당시 2년 2개월이던 군 생활을 끝마치자 이미 K-리그 구단은 모든 선수 등록이 완료된 상황이었다.
이미 리그가 시작한 2003년 4월, 그는 예비역 병장이 됐다.
다른 팀은 이미 모든 선수 수급이 끝난 상태,,,,
갈 데 없이 방황하는 나를 당시 안양 코치였던 이영진 선생님이 도와주었다
바로 새로운 보금자리는
서울시청이었다
그의 두 번째 시련, 팀 해체
당시 서울시청은 실업 팀 중에서 강팀으로 손꼽혔지만 이동준은 입단하자마자 곧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실업 리그 우승도 그가 이끄는 서울시청 몫이었다.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비록 실업팀이었지만 동료들과 지도자들이 사람 대 사람으로 끈끈히 이어져 있는 팀이었다
고민 없이 공을 찰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입단하고 6개월이 흐르자 또 다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바로 팀 해체였다.
서울시는 달랑 팩스 한 장을 보내 잘나가던 서울시청 축구단을 해체시켰다.
선수들은 추운 겨울 거리로 나가 축구팬과 서울시민에게 탄원서를 돌리는 등 백방으로 뛰었지만
이미 한 번 결정난 사항은 번복되지 않았다.
2003년 겨울은 이동준과 서울시청 축구단 선수들에게 무척 추웠다.
그렇게 그의 행복은 6개월 만에 끝났고 그는 또 새로운 팀을 찾아 떠나야 했다.
이동준의 두 번째 시련이었다.
서울시청을 나온 이동준은 2004년을 앞두고 에이전트로부터 희소식을 들었다.
K-리그 구단 중 이동준을 유심히 살펴보던 부산이 그와 계약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산 구단에서 연락이 왔다는 에이전트의 말을 듣고 가계약까지 했다.
다시 K-리그로 돌아갈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 하지만 당시 K-리그 구단들은 선수단 규모를 줄이고 2군을 없애는 등 몸집 줄이기에 들어간 상황이었다.
또한 에이전트의 말만 믿고 기다리는 상황이었지만 부산 구단은 좀처럼 선수단 소집일을 미루고 있었다.
“보통 K-리그 구단은 1월 초면 훈련을 시작하는데
외국인 감독 포터필드가 맡고 있던 부산은 1월말이 되어도 소집일을 통보하지 않는 거였다.
이미 다른 팀은 선수 수급이 모두 끝났는데 또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직 정식 계약이 아닌 가계약만 맺은 상황이라 또 공중에 붕 뜬 신분이 될 수도 있었다.”
결국 그는 서울시청 시절 선배의 도움으로 또 다시 새로운 팀에 입단하게 됐다.
바로 고양국민은행이었다.
승격 거부로 세 번째 시련을 맛보다
고양국민은행 시절 그는 확실한 오른쪽 풀백 자리를 꿰차 팀의 고공행진을 이끌었다
. 당시 K2리그에는 그의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오른쪽 측면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안정된 수비와 날카로운 공격력, 활발한 오버래핑까지 갖춘 그는 K2리그 최고의 선수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이때쯤 서서히 한국 축구에 승격제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동준에게는 다시 K-리그에 올라갈 한 가닥 희망이 생긴 것이다.
2006년, 이동준과 국민은행 선수들은 전의를 불태웠다.
K2리그가 내셔널리그로 재편되면서 우승팀에 K-리그 승격 기회를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K-리그 구단과 계약해 다시 그 무대로 올라가는 것도 좋지만
나를 인정해 주는 팀에서 즐겁게 축구를 하면서 모두 함께 K-리그로 올라가는 꿈을 꿨다.
의욕이 넘쳤고 진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던 시절이었다.
이동준은 2006년 내셔널리그 개막전 인천한국철도(현 인천코레일)와의 경기에서 개막 첫 골을 뽑아내면서 의지를 불태웠다.
결국 국민은행은 이 해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K-리그 승격 1호라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듯했다.
국민은행 선수들은 열광했고 그라운드에서 눈물을 흘렸다.
물론 이동준도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
하지만 그에게 이 우승은 세 번째 시련의 시작이었다.
당시 국민은행이 은행법 등을 이유로 K-리그 승격을 거부한다는 공식 발표를 내놓은 것이다.
이동준의 K-리그 도전은 또 다시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세 번째 시련이었다.
“처음에는 배신감도 느꼈다.
차라리 처음부터 올라간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선수들과 팬들을 모두 속인 거잖아요.
챔피언 결정전 2차전이 끝날 때까지 선수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우승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었죠.
앞만 보고 달려와서 목표를 이뤘는데 정상에 서니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힘든 것보다 그냥 허탈했어요. 허탈했어요.”
꿈을 위해 라이벌 구단으로
이동준은 낙담했다.
이제 그는 20대 중반에 접어든 나이였다
. 팀을 우승까지 시켜놓고 승격 자격을 얻었지만 이를 거부한 팀에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K-리그 한 구단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 구단과 연락을 취하면서 또 다시 K-리그 입성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에이전트로부터 연락이 왔다.
에이전트는 수화기 너머로 말을 이었다.
“울산현대미포조선 최순호 감독이 널 데려가고 싶대.”
“최고 연봉 대우를 해 주겠다.
우리 팀을 함께 우승으로 이끌고 같이 K-리그에 올라가자
.” 최순호 감독은 이동준을 직접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동준은 뜻을 굳혔다.
최순호 감독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고 또 다시 꿈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하지만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부모님을 설득해야 했고 이후 국민은행 관계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국민은행과 미포조선은 상호간 이적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라이벌 관계라 이동준의 이적 결심은 후폭풍을 일으킬 것이 분명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부모님은 처음엔 “네가 돈 때문에 팀을 배신할 수 있느냐”면서
한사코 이동준의 이적을 만류했지만 결국 아들의 뜻을 굽힐 수가 없었다.
“저에게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내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걸 위한 선택이라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부모님도 결국은 아들이 꿈을 위해 어려운 선택을 한 것에 대해 이해하셨고 저를 지지해 주시기로 했어요.”
하지만 문제는 역시 소속팀 국민은행이었다.
이우형 감독에게 덜컥 말하기가 너무 두려웠다.
이전까지 유례가 없던 미포조선으로의 이적을 이해해 줄 수 있는지 무서웠다.
이우형 감독을 찾기에 앞서 고민 끝에 팀 동료들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이동준은 두려웠지만 동료들은 선뜻 이동준을 응원했다.
“(김)종현이 형이 그러더라고요. 주저 없이 가라고. 너를 손가락질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용기를 줬어요.”
그는 동료들에게 힘을 얻고 이우형 감독을 찾았다.
“울산미포조선으로 가고 싶습니다.”
이우형 감독을 찾은 이동준은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우형 감독도 살짝 당황스러워했지만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래. 더 이상 널 붙잡을 명분이 없구나. 가서 잘 해라. 그리고 우리 팀에서 꿈을 이루지 못해 감독으로서 미안한 마음 뿐이다.”
그렇게 그는 내셔널리그 최고 대우를 받고 국민은행에서 라이벌 팀인 미포조선으로 이적하게 됐다.
2007년 초의 일이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시련
그는 국민은행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K-리그 승격 의지와 재정을 보유한 미포조선으로 향했다.
축구를 시작하고 집과 멀리 떨어진 적은 처음이라 이적 초기에는 우울증 증세도 겪었지만
이미 그의 실력은 내셔널리그 정상급이었다.
역시 미포조선에서도 붙박이 오른쪽 풀백 자리를 꿰차고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역시나 그의 팀은 또 다시 리그 1위를 질주했다.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 상대는 친정팀 국민은행이었다.
“기분이 남달랐어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이만큼 더 성장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는 기분 좋게 친정팀을 상대로 첫 골을 어시스트하면서 미포조선을 이끌었다.
하지만 하늘은 또 다시 그를 외면하고 말았다.
“경기 도중 충돌을 겪고 실려 나왔어요.
그런데 별로 통증이 없어서 다시 금방 그라운드로 들어갔죠.
그게 화근이었어요. 들어가자마자 다시 부딪혔는데 다른 부상과는 느낌이 다르더라고요.”
그는 경기를 다 끝마치지 못하고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정밀 검사를 받는 도중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십자인대 부상만 아니어라.’
하지만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의사가 말했다.
“왼 무릎 십자인대 파열입니다.
축구선수니까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자칫하면 축구를 못하게 될 수도 있는 큰 부상입니다.
재활을 한다 해도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찾아온 네 번째 시련이었다.
병상에 누워서 몇날 며칠을 울었다.
“포기하고 싶었어요. 어쩌면 이렇게 나한테는 불행만 찾아오는 건지 하늘이 원망스럽더라고요.
걸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모든 걸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또 다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동준 부상 이후에도 승승장구하던 미포조선이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또 다시 승격을 거부한다는 소식이었다.
팀을 바꿔 2년 연속 챔피언 자리에 오른 이동준은 두 번 모두 승격에 실패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의 다섯 번째 시련은 이렇게 찾아왔다.
승격 거부만 세 번 겪은 이동준
‘이렇게 K-리그 가기가 힘든가.
이렇게 올라가기가 힘든가. 이제는 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이렇게 될 바에는 그냥 국민은행에 남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또 다시 일어섰다.
걷기도 힘든 무릎으로 다시 공을 차는 날까지 재활에만 매달렸다.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고 그에게는 그를 아끼는 부모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활에만 무려 7개월을 쏟아 부으면서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왔다.
2008년 7월이 되어서야 그는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2008년 시즌 이동준은 팀 경기력에 큰 보탬을 주지 못했다.
재활로 전반기를 날려 먹었고 후반기 들어서도 아직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은 탓에 주로 교체 멤버로 경기에 나섰다.
하지만 그의 팀은 또 다시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세 번째 K-리그 승격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다 이번에도 미포조선은 K-리그를 외면했다.
이동준은 3년 연속 우승 팀 선수가 되고도 승격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냥 그때는 그러려니 했어요. 뭐 처음보다는 승격 거부에 대한 충격이 덜했죠.”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셈이었다.
내셔널리그는 그의 여섯 번째 시련과 함께 결국 이듬해 승격제도 자체를 폐지하고 말았다.
그에게는 또 다른 도전이 필요했다.
이미 세 차례나 승격 거부의 주인공이 된 이동준은 슬럼프에 빠졌다.
에이전트를 교체하고 중국 진출을 노렸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예 축구를 그만두고 미국에 가 공부를 할 생각까지 했다.
내셔널리그 전반기 선수 등록 마감일인 2009년 7월 31일이 되기 며칠 전까지 그는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마감 시한이 다가왔고 일에 진척이 없자 이동준은 초조해했다.
이렇게 가다간 몇 개월 아예 운동을 쉴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강릉시청 박문영 감독에게서 전화가 왔다.
“일단 강릉으로 와서 이야기 좀 하자.”
사상초유의 4년 연속 우승
그는 내셔널리그 선수 등록 마감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극적으로 강릉시청 유니폼을 입었다.
“강릉시청 상황도 그다지 좋지 않았고 저의 상황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서로 돕자는 데 공감대를 형성했죠.
저는 언제나 제가 있는 위치에서는 최선을 다할 자신이 있었거든요.
그게 어디든 저에게는 중요치 않아요.
” 실제로 이동준은 이적하자마자 또 다시 강릉시청 상승세에 일등공신이 됐다.
그리고 또 다시 믿기지 않는 일을 일궈냈다.
강릉시청의 내셔널리그 우승을 이끈 것이다.
2006년 국민은행,
2007년과 2008년 미포조선,
그리고 2009년 강릉시청까지 그는 가는 팀마다 우승 트로피를 선물하는 놀라운 역사를 썼다.
지난 시즌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도 결승골을 넣고 팀의 1-0 승리의 주역이 되기도 했던 그는
이번 시즌 강릉시청 소속으로 역시나 팀을 리그 1위로 이끌고 있다.
이번 시즌까지 우승컵을 들어 올린다면 무려 5년 연속 우승을 차지한 선수가 된다.
그는 한국 축구의 어두운 면을 모두 경험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연으로 엮인 엘리트 체육의 피해자가 됐던 그는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울시청의 마지막 선수이기도
했고 제도적 문제로 파장을 일으켰던 승격 거부도 무려 세 차례나 겪었다.
선수 생활이 끝날 위기의 부상도 경험했다.
하지만 그는 그때마다 오기로 일어섰고 또 다시 새로운 꿈을 위해 도전했다.
한국 축구의 어두운 과거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공을 찬다.
이동준의 축구 인생, 시련과 도전
이동준은 지난 날을 떠올리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비가 무척 많았어요. 항상 기대 끝에는 실망이 있더라고요.
팀 해체와 승격 거부를 겪으면서는 한국 축구의 시스템을 원망하기도
했고 큰 부상을 당했을 때는 몸이 말을 안 들어 미칠 것만 같았죠.
축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참 많았는데 어느덧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은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축구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합니다.”
그는 이제 30대가 됐다.
원치 않던 대학행을 거부하고 드래프트에 도전하던 꿈 많은 10대
축구선수는 한국 축구의 많은 풍파를 몸으로 겪고 이제 이만큼 나이를 먹
었다.
이동준을 ‘비운의 축구선수’로 만든 건 결국 우리의 열악한 축구 환경이다.
이동준은 “다시는 나 같은 축구선수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학연과 팀 해체, 승격거부 등 경기 외적인 문제로 상처를 받는 축구선수는 이제 없어야 한다.
축구선수는 축구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한국 축구계가 해야 할 일 아닐까.
또한 이동준의 축구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지만 수차례 좌절을 맛보고도 포기를 모르는 그의 정신은 충분히 박수쳐 줄만 하다.
마지막으로 전하는 이동준의 메시지 또한 그래서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저는 언제가 자신 있어요. 올해도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해 5년 연속 우승이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이루고 싶어요.
2012년에 다시 승격제 도입을 추진하는 걸로 아는데
제 인생에 있어서 네 번째 승격 거부를 당한다고 해도 또 다시 그 꿈에 도전할 겁니다.
지금까지도 이렇게 일어섰는데 한 번 더 못할 것도 없죠.”
출처=김현회 기자 칼럼
http://sports.news.nate.com/view/20100924n04491
첫댓글 한국축구의 안 좋은 면은 다 겪으셨네ㅠㅠ..
박지성선수 자서전 읽었을때도 허정무감독님 아니면 진짜 어떻게 됐을지... 진짜 운이 중요한가봐 ㅠㅠ 이동준 선수 힘내세요! 승강제 실시되서 인생 꽃피실 거임 ㅠㅠ
진짜 이동준 선수 기억하고 있어야지ㅠㅠㅠ승강제 꼭 실시됐으면ㅠㅠ
ㅠㅠ힘내세요ㅠㅠㅠㅠ
이런일이 있는지 몰랐는데....정말 한국축구의 문제점이다
이렇게 실력있는 선수를..............
ㅠㅠㅠㅠㅠ 이동준선수 힘내세요
아씨 ㅠㅠ보면서 줠라 눈물폭발
헐;;;;;;;;;;;;;;
눈물없인 읽을 수 없는 글ㅠㅠㅠㅠㅠ 힘내세요!!! 내리막길이 있다면 오르막길도 있다잖아요! 이제 오르막 인생이 올꺼예요!!!
자꾸 시련이 찾아왔다고해서 철렁 철렁 가라앉는 기분 ㅠㅠ
쭉빵글보다가눈물나긴처음이네.....
아진짜눈물없이못보겠다ㅠㅠㅠㅠ이동준선수힘내세요!!!!
아..헐....ㅠㅠㅠㅠㅠㅠㅠ슬프다ㅠㅠㅠㅠ
어쩌다가 이동준선수한테만 불운이.. ㅠㅠ
글쎄요 과연 이런 한국축구 시스템의 피해를 본 사람이 이동준 선수 한 사람 뿐일까요?.?
찡하다...힘내세요!!
마음이 아프네요... 참 우리나라 k리그 환경이 참 열악하다는걸 참ㅠㅠㅠ여기서 깨닫네요
힘내세요.. 보는내내 소름이 돋고 그랫네.. 진짜
이동준선수! 화이팅이예요 ㅠㅠ 언니 이거 스크랩해도되죠? ㅠㅠ진짜 아 소름
네 스크랩 해가셔도 됩니당
ㅠㅠㅠㅠㅠ정말슬프다
난 고양kb승격 되길 바랬는데--
ㅠㅠㅠㅠㅠ승격하지도 못할거면서 뭐냐 팬들 희망고문임?????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