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조돌변(一朝突變 : 변신과 약탈로 지속 침구의 조건을 상시화한다)
왜구의 얼굴은 야누스적(的)이다. 왜구는 동아시아 해역에서 오랫동안 ‘교역의 종사자’를 자처해 왔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해로로 운반되는(실어 날라지는 – 옮긴이 잉걸. 아래 ‘옮긴이’) 재물을 약탈하는 ‘약탈의 주역’으로 활동해 왔다. 그러면서 동아시아 교역 질서를 교란시키는 기생집단으로 암약해(‘어둠 속에서 날고 뛰어’ → 세상에 알려지지 않도록 이면에서 활동해 : 옮긴이) 왔다. 왜의 이중적인 얼굴은 여기에 있다.
해적 활동을 경제적 측면에서 해석하고자(풀이하고자 – 옮긴이) 하는 시도는 일본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 측은 왜구에 대해 “(서기 – 옮긴이) 11세기 이후 경제적 교역권으로 동아시아 세계가 형성되었는데, 이를 질서화하고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한 기구가 없어 ‘해도(海盜[바다의 도적. 배를 타고 바다를 다니며 다른 배를 덮쳐서 재물을 빼앗는 도둑 – 옮긴이])’가 표면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해적의 경제 행위에 초점을 맞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이 학설에서는 – 옮긴이) 왜구들의 침구/약탈/살인 등(같은 – 옮긴이) 반 인륜적 행위는 희석되거나 지워진다.
일본에서 11세기는 전통적으로 세토 내해(구슈/시고쿠/혼슈 사이에 끼어있는 일본열도의 내해 – 옮긴이)의 해적들이 동아시아 해상으로 나가 본격적으로 활동한 시기였다.
11세기 ‘다이라 기요모리(平 淸盛[평 청성 – 옮긴이])’ 시기에 이르러 해적활동에 관한 기록이 사라진 것은 (일본이 – 옮긴이) 송(宋)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고 교역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다이라는 내해의 유통을 독점하기 위해 해적 약탈의 위험성이 없는 안전한 해상 교통로를 유지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의 중앙 귀족이나 사사(社寺. ‘신사[神社]와 절[寺]’을 줄인 말 – 옮긴이)에게 그는 최대의 ‘교통 독점을 노리는 해적’이었다. 그로 인해 여타의(그 나머지 – 옮긴이) 해적들은 모두 그의 통솔 하로(아래 – 옮긴이) 편입된다. 이처럼 산발적이고 소규모인 해적을 흡수/통합함으로써 군소(群小.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여러 – 옮긴이) 왜구의 약탈행위가 상대적으로 통제된 면은 있다.
일본의 자정적(自淨的) 통제가 왜구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러나 12세기 중반에 접어들면 상황은 일변하기 시작한다. 세토 내해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일본 해적들이 점차 일본열도를 벗어나 활동영역을 해외로 확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일본 측 자료인 『 금석물어집( 今昔物語集 ) 』 ( 서기 12세기에 만들어진 책이다 – 옮긴이 )에도 항해하는 선박을 탈취하고 선적된 물품 약탈과 선원 살해 등 해적 행위를 한 것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 고려사 』 에 나타나는 기록으로는, (서기 – 옮긴이) 1223년 5월 왜구가 금주를 침입한 사건이 … (중략) … 왜구의 출현으로는 첫 번째 공식 기록이다.
이후에도 왜구는 계속 출현하는데, 1225년 4월 왜선이 경상도 연안 마을에 출현하였고( 『 고려사 』 ), 다음해 정월에도 같은 도 지역에 침구했다( 『 고려사 』 ). 계속해서 침구 행위는 이어져 1227년 4월에는 금주를, 5월에는 능신현(能神縣)에 또 출현했다( 『 고려사 』 ). 이와 같이 1223년부터 일본 ‘해상 무사단’(사실은 왜구, 그러니까 왜국 해적 – 옮긴이)은 고려(후기 고리[高麗] - 옮긴이)를 지속적으로 침구했다.
( 왜구가 후기 고리에 쳐들어오기 시작한 지 쉰 한 해 뒤에야 후기 고리 – 몽골 연합군이 일본을 침략했으므로, ‘왜구는 단순히 먹고 살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후기 고리 – 몽골 연합군의 일본 침략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후기 고리를 친 것이다.’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 옮긴이 )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해상 무사단’은 ‘마쓰우라’당이었다. 이들은 규슈(九州[구주 – 옮긴이])를 벗어나 원거리 항해를 통해 고려 또는 중국(남송[南宋] - 옮긴이)을 대상으로 약탈을 감행했다.
13세기부터 이들은 성격이 확연히 바뀌게 되는데, 이전의 역할이었던 ‘일본 내해의 교역자’, ‘유통의 주역’, ‘일본 (안에서만 활동하는 – 옮긴이) 해적’등과 같은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동아시아의 약탈자’, ‘동아시아 질서의 교란자’로 대변신을 꾀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인 ‘일본발(發) 동아시아 왜구’의 등장이었다.
문제는 이들의 행위가 시간이 지나갈수록 더욱 대담해진다는 점이다. 1298년 중국 배(사실은 몽골제국 원나라의 배 – 옮긴이)가 원나라(몽골제국 – 옮긴이)에서 귀항하는 도중에 난파되자, 일본인들이 7척의 배로 ‘선당(船黨)’을 구성해 당선(그러니까, 서기 1298년에 난파된 원나라의 배 – 옮긴이)에 선적된 모든 물품을 약탈해 가는 해적 사건을 일으킨 것( 『 청방문서[靑方文書] 』 영인 6년[ 서기 1298년 ] 6월 29일 )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선당’이란 배의 무리, 즉 선단을 의미한다(뜻한다 – 옮긴이). 왜구의 해상활동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기 각 섬의 포구에 거주하는 거주민들은 이미 집단화되어 선단을 구성하고 통일적으로 무리를 지어 활동하고 있다. 또 『 청방문서 』 에는 규슈의 영주인 ‘지두’ 세력이 고려를 대상으로 약탈했다는 일본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왜구는 ‘흥리왜인’처럼 상업을 하는 상왜(商倭)의 일면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 본질은 약탈/살인 등 잔인한 행동을 일삼는 침구 집단이었다. 상왜는 한일 간 국교가 단절되어 통교가 불가능하거나 무역 왜인으로서 활동이 불가능할 때에는, 왜구집단으로서 인접 국가를 침입하여 인명 납치, 약탈 행위를 자행했다. 어제까지 ‘무역 왜인’을 자처하던 자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하루아침에 왜구로 돌변했다. 그러다 국교가 정상화되면 다시 무역 상왜로 활동하기도 했다. 합법과 무법/비법(非法. 불법 – 옮긴이)/불법을 넘나들며 상행위와 약탈 행위를 반복적으로(되풀이해서 – 옮긴이) 실시해 온 것이다.
왜구가 극성을 부리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이는 문명이 대륙에서(또는 반도에서 – 옮긴이) 열도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방증해 주고 있는데(방증해 주는데 – 옮긴이), (왜국[倭國]의 – 옮긴이) 전국시대에는 특히 철(鐵 : 쇠 – 옮긴이), 초석(硝石. 질산칼륨. 흑색 화약[검은 화약]의 원료들 가운데 하나다 – 옮긴이) 면포(綿布. 무명[천의 일종] - 옮긴이) 같은 물품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쇠로 창칼과 화살촉과 갑옷을 만들고, 초석과 다른 재료들을 섞어서 화승총[조총]에 쓸 화약을 만들며, 면포로 군선의 돛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옮긴이).
일본은 은을 수출하고 이 같은 물건들을 얻고자 했는데, 문제는 이런 물품이 평화적 교역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는 데 있었다(특히, 초석은 다른 동아시아 나라들도 ‘전략물자’로 여겨, 그 나라들은 초석의 유통을 통제하고 감시했다 – 옮긴이). 어떤 물건은 교역보다 약탈이 더 효과적이었다.
또한 약탈은 교역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는 물품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고, 교역에는 지불 대가가 필요했지만 약탈은 전혀(조금도 – 옮긴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특히 철, 초석, 면포와 같은 물건은 군사적 목적으로 쓰일 수 있어 점차 수요가 증대되었다(늘어났다 – 옮긴이). 이제 약탈은 물품 획득의 주요수단이 된다.
또한 14 ~ 15세기 왜구의 경우에는 가장 큰 약탈 대상물이 ‘사람’이었는데, 사람은 교역을 통해서 얻을 수 없었다(후기 고리나 근세조선이나 다이 비엣[한자로는 ‘대월(大越)’] 제국이나 명나라가 자기 나라 백성들을 노비나 노예로 파는 짓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옮긴이). 이제 일본(왜국[倭國] - 옮긴이)으로서는 특유의 일탈적 방법을 동원하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약탈은 일본인(왜인[倭人] - 옮긴이)이 생각하기에 물품과 인력 획득의 ‘가장 적절한 수단’이었다.
이제 그간 숨겨왔던 왜구 근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때가 되었다. 이들은 확대된 동아시아 해상에서 ‘무장 상인’과 ‘왜구’ 사이를 오가며 1인 2악역으로 노략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침구를 통해 약탈적 방식으로(약탈‘이라는’ 방식으로 – 옮긴이) 다른 나라와 접한 결과, 왜(倭)는 하나의 ‘학습 효과’를 얻게 되는데, 즉 약탈에는 ‘거래비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왜구들의 이 같은 인식은 근대 일본 육군 군인으로 (서기 – 옮긴이) 1931년 남만주철도 폭파 사건을 조작해 (이른바 – 옮긴이) 만주사변(만주 침략 – 옮긴이)을 일으킨 ‘이시하라 간지(石原 莞爾[석원 완이 – 옮긴이])’의 주장과도 궤를 같이 하고 있다. 그는 「 우리의 국방의 방침 」 이란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은) “한 푼도 돈을 내지 않는” 방침 하에(아래 – 옮긴이) 전쟁을 수행해야 하고, 그렇게 되면, 20년 내지 30년(이 넘어도 – 옮긴이)도 계속해서 전쟁할 수 있다.”
전쟁광적 태도도 인류사적 죄악이지만, 약탈을 근거로 전쟁을 치르겠다는 ‘근대 왜구식’ 사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왜구의 ‘약탈적 사고’는 1,2차 대전 시기 일본이 전쟁을 통해 계속 침구할 자원을 끌어 모으는 과정과 완벽히 중첩된다.
일본이 지닌 ‘왜구관(倭寇觀. 왜구의 관점 – 옮긴이)’은 오랜 기간 동아시아 세계에 크나큰 위협으로 작용해 왔고, 지금도 엄연히 진쟁 중에 있다(진행 중이다 – 옮긴이).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가 지금 일본 극우주의의 근간을 이룬다.
약탈로 남의 물건과 인명을 탈취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범죄 행위지만, 이들(왜국의 왜구들 – 옮긴이)에게 ‘약탈적 사고’는 그저 일상적인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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