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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재와 주제의 상관성 / 엄현옥
문학작품 속에서 소재素材는 작품의 근간이 되는 재료다. 어떤 형태로도 가공하지 않는 1차적인 재료다. 제재題材는 여러 소재 중에서 선택한 재료로 주제主題를 드러내기에 적합한, 중심 소재를 말한다. 소재를 가공한 2차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소재와 제재는 구분이 모호한 경우도 있으나 구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제는 작품 속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심내용이다. 소재와 제재는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동원되는 모든 재료이며 작품에 동원된 소재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다. 주제는 모든 문장의 내용이 수렴된 글 전체를 아우르는 핵심적인 생각이다.
소재와 제재는 작품의 대상으로 작용한다. 일상에 산재하는 소재는 작가의 눈에 의해 발굴되어 그 진가를 획득한다. 기이한 소재를 포착하는 것만이 최선은 아니다. 평범한 소재일지라도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빚어내느냐에 따라 작품의 깊이가 달라진다.
소재를 선택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은 첫째, 주제를 살리는 데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구체적이어야 한다. 셋째, 신빙성이 있는 것이어야 한다. 넷째. 참신하여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너무 전문적인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왜냐 하면 수필은 어디까지나 문학작품으로 독자에게 미적 감동을 주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손광성의 수필쓰기》을유문화사. 2008.p249)
혹자는 수필을 일컬어 삶의 낙수落穗라고 일컫는다. 일상에서 건진 이삭이라는 의미다. 탈곡이 끝난 논바닥에서 벼이삭을 알아보는 이는 그것을 줍는다. 이삭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수필이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글이라 하여 작가의 모든 체험이나 대상이 소재가 될 수는 없다. 일상에서 건진 소재들 중에서 글감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 문학적 형상화를 거칠 때 작가의 의미부여는 빛을 발하게 된다.
수필은 단순한 소재의 나열이 아니다. 소재를 하나로 꿰는 작가의 통찰력이 필요하다. 지난 호의 작품 중 소재와 주제의 긴밀한 상관성을 담아낸 작품들을 살펴보자.
- 최연실의 〈씨감자〉
많은 문학 작품 속의 어머니는 숭고한 희생으로 표상된다. 어머니의 한恨의 정서가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지 않을지라도 내면으로 파고들면 역사적 트라우마trauma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 어머니의 삶도 피난길로 이어진 한국전쟁이 아니었다면, 그렇듯 파란만장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었으리라. 〈씨감자〉에서는 1960년대 전후 한국문화의 지층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작가의 어머니는 감자 꽃 필 무렵에 세상을 떠났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독립운동을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중국 천진에 정착했다. 고학력의 어머니는 결혼 전 국군병원의 타이피스트로 근무하다가 피난길에 올랐다. 작가가 전하는 어머니의 삶은 가족을 위한 굴곡진 희생의 연속이었다. 어머니가 떠난 후 당신의 삶을 홀로 그리는 작가의 섬세한 응시는 슬픔의 미학으로 집약된다. 생전 어머니의 마음을 읽기에 작가의 곡진한 마음이 더해 사모곡은 애잔하다.
팔순을 넘긴 어머니는 연로하셨음에도 타인의 도움 없이 규칙적인 일상을 이어갈 정도로 정신력이 남달랐다. 그런 어머니가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은 두세 번 발을 헛딛는 사고 때문이었다.
조부모의 울타리였던 어머니는 층층시하의 혼처 자리를 한사코 마다하곤 조실부모한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리고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살림집을 옮겨 다녔다. 지병으로 일찍이 예편한 아버지는 일시불로 연금을 받아 사업에 뛰어들었지만, 그것마저 사기로 다 날리자, 아버지의 기침병은 더 심해졌다. 끝내 아버지가 집에 들어앉게 되자 녹록치 못한 살림 형편 때문에 어머니가 가장의 짐을 지게 됐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 마흔을 갓 넘었을 때다.
- 최연실의 〈씨감자〉에서
급변한 현대 사회는 가족의 개념과 형태를 변화시켰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 〈씨감자〉의 발단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시작된 어머니의 고난이다. 어머니는 미군 PX 물건을 판매했으나, 가족의 생계유지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머니에게는 가족의 생계 해결을 위한 씨감자가 절실했다. 그 후 보험 외판원 일을 시작했으나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못했던 성품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어머니는 한 달 동안 보험 일을 해도 아기 주먹만 한 씨감자 한 개를 만들지 못했으니 감자 수확은 언감생심 꿈이나 꾸었을까. 보다 못한 아버지가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처가 보험회사에 다니게 됐다며….” 아버지마저도 뒷말을 잇지 못했던 걸로 기억된다. 보험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물건을 나름 상품화시켜 고객을 확보하는 일이었기에 씨감자는 어머니, 자신이었다
- 최연실의 〈씨감자〉에서
중학생이 되었을 때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어머니를 만났다. 작가는 고개를 숙이며 모른 채 지나쳤다. 귀가한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작가에게는 그 일이 마음의 부채로 남아있다. 그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한 채 스스로 씨감자를 자처한 어머니에게 또 하나의 아픔을 안겨드린 것이다. 어느 날 작가는 과일을 사들고 친정에 갔다. 그런 딸에게 어머니는 반가움을 표현하기보다는 알뜰하게 살라는 말만 강조할 정도로 자식의 안위를 걱정했다.
궁핍을 견디며 가족만을 건사해 온 어머니가 떠난 후 유품을 정리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에게 무언가를 남기려고 했을까.
아끼느라 입지도 않고 고이 모셔둔 내복과 속옷들과 미국에 큰 언니를 만나고 오면서 품에 안고 왔던 버버리 가방 두어 개가 축 늘어진 채 앉아 있다. 가방 속에는 써 보지도 못한 달러가, 씨감자가 땅속에 숨어 있다. 이제야 햇빛을 본다. 자식들 손에 감자 한 알씩 쥐었다.
- 최연실의 〈씨감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힘든 직업은 어머니라는 말이 있다. 이렇듯 모성애를 향한 찬사의 바탕에는 어머니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통념이 존재한다. 당시 고등교육을 받았던 어머니는 자신의 자존감과 야망을 버리며 숭고한 목표를 추구해야 했다. 여기에서 가족공동체를 책임지는 것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보다도 더 유의미한 가치였으리라.
어머니의 희생으로 점철된 시간은, 화자가 경험한 파편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씨감자〉에서 유년의 세밀한 묘사와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작품의 주된 정서로 작용한다. 작품에 담긴 서정성은 지난 시절에 대한 회상을 입체적 풍경으로 환치한다. 이는 작가가 그 시절을 수용하는 방식이며 〈씨감자〉가 추구하는 서정성과 맞닿은 지점이다.
이 작품에서 씨감자가 상징하는 것은 가족을 위한 어머니의 희생이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와 자녀 교육을 위해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가정 경제의 책임자가 되어 보험고객을 확보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어머니는 떠났다. 당신이 떠난 후에 남겨진 달러는, 자식들 손에 안겨 씨감자의 의미로 기능한다. 나아가 어머니의 절제와 희생이 숭고한 가치로 가시화된다.
작가는 매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씨감자를 통해 어머니의 희생을 떠올린다. 씨감자는 자신의 헌신을 토대로 가족의 생계와 내일을 기약해야 하는 어머니의 책임감을 상징하는 대상물이다. 씨감자의 존재 이유는 다음 해에 다시 감자를 생산하기 위함이다. 번식을 위해 선별한 감자는 다음 해의 수확을 보장한다. 씨감자라는 일상의 소재를 매개로 어머니의 삶의 철학과 가치관을 되짚어보게 하는 작품이다.
김사랑의 〈도꼬마리〉
그가 탑승구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그 순간부터 허기증이 생겼다. 얼마나 세월을 보내야 허기증이 생기지 않을까? 헤어짐은 만남의 시작이지만 매번 몌별은 힘들었다.
- 김사랑의 〈도꼬마리〉의 결미
〈도꼬마리〉는 공항에서 아들과의 헤어지는 장면을 결미 부분에 배치했다. 아들과의 작별은 한두 번이 아니건만 작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다. 작가는 평소 하늘의 비행운만 바라봐도 한국을 떠난 아들이 그립다.
아들은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외국행을 결심했다. 무사히 정착하여 시민권까지 취득했으나 작가는 그간의 노고와 고충을 짐작하기에 늘 안쓰러운 마음뿐이다.
어느 날 고향 묵밭에서 도꼬마리가 옷깃에 딸려왔다. 우연한 일이었겠지만 차마 휴지통에 버리지 못한 것은 씨앗이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따라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다. 계절이 바뀌면 식물들은 앞다투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매단다. 그들은 열매에 가시가 돋은 도꼬마리를 경계하며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 제 고향에서야 비바람 맞으며 근심 없이 쑥쑥 자랐을 것이다. 터를 옮긴 도꼬마리는, 주변에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그것을 피하거나 떼어내기 일쑤였다.
시골에서는 흔하다. 온통 날카로운 가시라서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단지 고향에서 딸려왔다는 이유 하나로 묻어주고 가끔 들어다 봤을까? 그녀는, 멀리 있는 그가 도꼬마리 열매처럼 외로웠을 거란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정착을 하며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부호와 문장을 만들고 또 지웠을까, 이제는 그 나라 시민권을 취득하였고 여유가 생겨서 현재 발목까지 차오르는 만족한 생활이라 했다.
- 김사랑의 〈도꼬마리〉에서
도꼬마리는 외래 수종이지만 우리 땅에 토착화된 식물이다. 열매를 지키기 위해서인지 열매가 익으면 가시로 중무장한다. 작가는 평소 영상통화에서 아들의 음성에 떨림은 없는지, 미세한 것들까지 주의를 기울인다. 그가 뿌리내린 이국땅에서 무엇엔가 흔들려 실금이라도 날까봐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옷깃에 붙어 따라온 도꼬마리처럼, 언젠가는 그리움에 사무쳐 날아올 것을 믿는다. 작가에게 아들의 부재 의식은, 아들의 심연 어딘가에 자리할 귀소歸巢의 갈망을 넌지시 내비친다.
작가는 도꼬마리에서 아들이 타국에서 안착한 사실과의 상관성을 포착한다. 사람들이 눈길도 주지 않고 자칫 스쳐버릴 만한 식물이 타지에서 실한 뿌리를 내렸다. 아들도 시민권을 얻고 정착에 성공했다. 김사랑은 도꼬마리라는 소재를 의미화하여 주제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독창적으로 대상을 분석하고 해석한다. 나아가 아들이 정착하기만을 바라며 노심초사하던 모성은 작가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도꼬마리와 아들의 타국 정착의 연관성은 일반화 단계에 도달한다. 소재의 탐색과 아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면서 보편성과 미학적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한다. 나아가 공감의 진동과 가동의 폭이 확장된다.
문학은 인간의 삶과 체험을 소재로 하며,수필쓰기는 소재를 해석하는 행위다.이 작품에서 도꼬마리라는 구체적 소재는 작가가 의도한 주제와 자연스럽게 부합한다. 도꼬마리는 작품의 중심 개념과 유기적인 상징으로 작용하여 주제 구현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김정숙의 〈소리와 통하다〉
술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이어져 왔다. 술 빚는 일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이기에 술에 대해서는 나름의 경지에 올랐다. 빚는 과정은 물론 음주에도 어느 정도의 도가 텄다. 작가가 경험에 의하면, 음주는 오감이 활발하게 반응하는 신비한 효능이 있다. 원근법이 파괴되거나 무중력의 우주를 걷는 듯한 신기함에 더해 용기까지 솟는다. 거기에 더해 눈물도 풍년이 든다.
술을 빚어 본 나는 우리 술을 좋아한다. 막걸리라 부르면 격이 떨어져 보이고 전통주라 하면 고리타분한 옛것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만들어지는 조화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 맛을 즐기지 않을 수 없다. 햇볕에 법제法製한 누룩과 백세百洗한 쌀을 쪄 고두밥을 만들고, 깨끗한 물과 사람의 정성을 더해 술은 시작된다.
술이 익을라치면 쌀알들의 울컥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찬방饌房에 홀로 앉아 항아리에 귀 기울인다. 처연한 가을 저녁이나 달빛조차 썽그리한 초겨울 밤. 스스로 끓는 소리를 듣고 있자면, 나 또한 속을 비우고 울어 버리고 싶다.
그 음은 가늘지만 독을 뚫고 나오고, 기복은 있으나 요란함이 없다. 백색 소음처럼 세상에 묻혀있어 듣고자 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리 들린다. 마음을 휘젓고 들뜨게 하며, 애타게 한다. 바다가 내는 파도소리 같더니, 이내 땅을 자잘하게 적시는 빗소리로 바뀐다.
-김정숙의 〈소리와 통하다〉 에서
작가는 술을 빚으며 소리와 교감交感한다. 효모가 발효될 때면 무수한 기포들이 발효액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과정에 집중한다. 침침한 항아리 안에서 술이 익어가는 소리는, 작가가 언젠가 골목에서 우연히 듣게 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를 닮았다. 해조음이거나 빗소리로 들기기도 한다. 전통주가 발효되는 특유의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그것 특유의 매력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던가. 그것들이 빚어내는 맛도 일품이리라.
바닥서부터 끓어 색과 향기와 희열을 품은 술과 마주한다. 잔을 향해 숨 가쁘게 떨어지는 나를 유혹하는 소리, 첫 잔에 취한다. 두 번째 잔부터는 제법 무게 있는 소리가 난다. 넋두리를 받아주는 친구와 전화도 하고 텔레비전 속 드라마에 끼어들기도 한다. 마지막 잔은 들릴 듯 말 듯 그 소리도 아쉽다. 굽이굽이 새겨진 아픔 슬픔 외로움도 언젠가 한편의 인생으로 익어가겠지. 나만의 공간, 낭만을 즐기는 시간, 휴식의 한잔. 치유의 술.
-김정숙의 〈소리와 통하다〉 에서
이제 작가는 건강 문제로 술을 자제하는 편이다. 담담하거나 허전한 날이면 작가를 다독이던 술 익는 소리가 그립다. 세상의 모든 술은 발효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넓은 의미에서 발효는 미생물과 균 등이 인간에게 유용한 물질로 변하는 과정을 말한다.
한동안 멈추었던 술 빚기를 다시 하기로 했다. 마트에는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춤된 술은 많다. 하지만 내 술이 익어가며 들려줄 사연이 궁금하여 부리나케 쌀을 씻는다. 약간의 흥분에 떨림이 더해진다. 기억 속 취기가 벌써 알싸하게 코끝을 간질인다.
-김정숙의 〈소리와 통하다〉 에서
〈소리와 통하다〉에서 작가가 일관되게 탐색한 것은 술이 익어가는 소리다. 작가가 한동안 멈췄던 술을 다시 빚게 된 것도, 그 소리 때문이다. 공산품인양 상품화하여 판매되는 술이 제아무리 많아도, 그것들이 익어가는 과정에서 토해내는 은밀한 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발효가 시작된 술은 매순간 다른 소리를 들려준다. 작가는 술 빚는 방법에서 삶의 술법術法을 터득한 것일까. 발효를 기다리는 것, 인내하는 것, 귀 기울여 듣는 법…. 오랜 소리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그 결과 독을 뚫고 나오는 발효음에 매료된다. 쌀알들의 울컥거리는 소리와 바다가 내는 파도소리, 땅을 자잘하게 적시는 빗소리로 들린다. 제조 과정의 발효 소리는 술을 빚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소리다. 작가는 어느덧 귀명창의 경지에 오른 듯하다.
〈소리와 통하다〉는 술을 소재로 했으나 술에 대한 주변의 이야기보다는 그것의 발효과정에 집중한다. 그 과정에서 저마다 부글거리는 소리를 떠올린 작가는, 술을 앉히고 나서 며칠 후부터 들었던 경험을 소환한다. 술과 소리의 관계로 확산되는 과정을 통해 작가만의 사유와 상상이 내적 의미로 나아간다. 〈소리와 통하다〉에 담긴, 작가에게만 들리는 술의 독창적인 소리는 독립적인 소재를 넘어 작품의 주제로 승화된다.
-김은옥의 〈복권〉
작가는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작가가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떠났기에 당신에 대한 회한은 남달랐다.
당신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서랍을 여니 주택복권이 가득 쌓여있었다. 그 시절 아버지가 일주일 동안 마음조이며 기다렸을 종잇조각이었다. 옛날식 복권은 조잡해 보이는 숫자의 나열이 아닌 아버지가 간절히 염원했을 희망의 실체였다.
아버지는 복권을 왜 모았을까. 당첨순위에 들지도 못하고 버려질 수밖에 없는 한갓 종이에 불과한 것을 말이다. 아마도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의 인생을 보상 받고 싶었을 게다.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는 수단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거듭된 사업의 실패로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시간에서 뭔가를 의지하고 한 톨의 희망이라도 찾고 싶은 마지막 끈이었다. 한동안 난 멍하니 복권을 만지면서 바라봤다. 복권 한 장을 사서 당첨되면 사업을 다시 시작할 거라는 계획으로 일주일을 보냈을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낙첨된 복권을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은 한 순간이나마 희망을 주었던 흔적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닐까.
-김은옥의 〈복권〉에서
한국인의 정서는 복福이란 단어와 밀접하다. 저마다 생각하는 복의 의미는 각각일지라도 그것을 염원하는 마음은 다르지 않으리라. 사람들이 복권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의 기대 심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버스 정류장 부근의 복권 판매처는 복권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은 기대 심리에 부풀어 그것을 구매한 이들은 짐짓 무표정하다.
아버지가 복권에 의지하게 되기까지는 짐작되는 사연이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스스로 삶을 마감할 결심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미수에 그치고 어머니에게 발각되었다. 그 후 어머니는 아버지의 주머니를 뒤지곤 했으나, 작가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예민했던 청소년기였기에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득찼다. 아무리 어려운 현실일지라도 식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다행히 아버지는 그 일을 중단하고 대신 복권을 사셨다. 복권을 사온 날은 며칠 후면 당첨될 거라고 확신하며 들떠 있었다. 누가 그 마음을 알았을까.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처절한 마음을 하늘은 알았을까. 신은 아버지의 거듭된 낙오에 작은 희망을 주고 싶었는지 간간히 소액이 당첨되었다. 그게 오히려 끝없이 꿈을 꾸게 만들었다. 부질없는 희망이 잦아들면 잿속에 숨어있던 작은 불씨처럼 다시 피어올랐다. 시시포스처럼 끝도 없는 시도와 반복이 아버지의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숨죽여 보고 있는 우리도 나름의 공범자였다. 그게 된다면 지금의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내 방을 갖는게 소원이었기에 희망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보다 손에 들려진 복권을 바라봤으니까. 저렇게 열심히 사면 언제인가는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원이 우리 가족을 이끌었다.
-김은옥의 〈복권〉에서
아버지가 다시 일어서리라는 의지로 복권에 매달렸던 것은 자신만의 궁여지책이었다. 절망 속에서 부여잡은 지푸라기였으며 힘겨운 현실의 탈출구였다. 아버지 손에 들린 복권은 아버지 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의 염원이었다. 만일 복권 당첨이 현실로 된다면, 온 가족이 고생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작가에게는 자신만의 방이 생길 터였다.
복권을 남기고 아버지는 떠났다. 당첨되지 못한 그것들은 한갓 종이뭉치로 전락했다. 작가는 이승을 떠난 아버지의 유지를 기억하려는 듯 복권을 버리지 못한다. 작가가 아버지에게 선물한 잠옷 역시 비닐 포장 그대로다. 자신이 아버지 노릇도 못했다는 생각에 딸이 선물한 옷을 차마 입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회한은 유족에게 통증으로 남았다.
아버지에게는 질곡 같은 인생의 뒤안길 너머 그래도 살아야겠다는 희미한 소망이 있었다. 사는 시간들을 자학하면서도 살아보고 싶은 가느다란 생명의 끈을 기진기진 이어나갔을 것이다. 복권은 핍절한 그의 삶을 의미했고, 한없이 궁핍한 시간의 강을 건너는 나룻배였다. 흐르는 강물 따라 가다 보면 어느덧 기슭에 닿아 희망의 땅을 디딜 수 있는 날을 기다린 건 아닐지. 비록 채 당첨되지 못하고 서랍 속에 들어갈지라도 그분에게는 유일한 삶의 비책이었다.
-김은옥의 〈복권〉에서
자식과 부모는 생의 일정 부분을 공유하지만, 죽음 앞에서 이별할 수밖에 없다. 〈복권〉은 버거웠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개인사에 머무르지 않았다. 경제적 안정과 그로 인한 행복에 대한 기대심리가 담긴 복권은 작품의 주제를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복권은 비단 아버지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실낱같은 희망이었다. 아버지가 그토록 집착했던, 가족의 염원이 담긴 복권은 당시 가족의 삶을 드러내는데 최적의 제재로 작용한다. 궁핍했던 그 시대를 버티기 위해 필요했던 삶의 장치였다. 〈복권〉에서 등장한 ‘복권’은 작가가 의도한 주제와 잘 부합하여 주제구현에 도달한다. 나아가 울림과 공감의 폭이 확장된다.
-최계순의 〈아버지의 훈장〉
이어지는 사부곡은 〈아버지의 훈장〉 이다.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보낸 택배 상자가 도착했다. 상자에 태극기가 그려진 상자에 담긴 아버지의 서훈敍勳은 ‘6·25 무공훈장’이다. 영예로운 훈장과 증서를 택배로 받은 경우는 드문 일이다. 그것도 아버지가 떠난 지 40년이 지난 이후 받은 훈장이다. 작가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참호 속에서 목숨을 걸고 참전했다. 그러나 당신 생전에 그 말을 꺼낸 적이 없다. 이 점이 가족서사의 발단이다.
수많은 전우가 쓰러져 목숨을 잃은 전선에서 싸웠던 아버지가 참전 사실을 말하지 않은 까닭을 늦게야 알았다. 두 살 터울의 형제가 모두 전쟁에 참전했다. 휴전이 되고 아버지는 제대하여 집으로 돌아왔지만, 생사를 모르는 돌아오지 못한 동생 때문이다. 할머니는 돌아오지 않는 작은아들을 위해 밤낮으로 정화수 떠 놓고 비손을 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할머니 앞에서 당신만 살아 돌아온 죄스러움에 꺼낼 수가 없었다.
(중략) 그래서였구나, 아버지와 할머니는 크게 한번 웃는 모습조차 볼 수가 없었다. 두 분 모두 몸은 뼈에 가죽을 도배한 듯 바짝 말랐고 어깨는 늘 축 처져 있었다. 그런 아픔을 가슴에 담고 살자니 몸도 마음도 지쳤으리라. 그런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너 살 동생을 남겨두고 어머니가 다시는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났으니 아버지의 고통은 한계를 넘어섰으리라.
-최계순의 〈아버지의 훈장〉에서
작은아버지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할머니에겐 평생 기다려야 할 아들이었으며, 아버지에게는 지울 수 없는 아픔이었다. 아버지는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돌아왔다는 안도감도 누리지 못했다. 어머니의 고통을 견디는 일도 쉽지 않으리라. 술로 그 세월을 버텼던 아버지는 이순을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아버지의 훈장〉에는 엄연한 사실이었음에도 가시화될 수 없었던, 작은아버지의 전사와 그로 인한 암울한 가족사의 심층이 담겨있다.
작은아버지의 전사를 알지 못했던 작가는, 그로 인한 아버지와 할머니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의 수훈을 계기로 그분들의 삶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유도 모른 채 아버지를 원망했던 딸에게 남겨진 회한은 뒤늦은 애도뿐이다. 국가유공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은 아버지의 귀한 희생이 담긴 명예롭지만 아픈 호칭이다.
대부분의 가족 서사는 별도로 분리해도 완결된 이야기 한 편을 구성할 수 있을 만큼 고유한 이야기 줄기를 형성한다. 작품에 산재한 이야기는 개인사에 한정하지 않고 역사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당대인들의 실존적 삶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렇듯 개인의 삶은 거시사微視史의 어느 지점에 맞닿아 역사 속에 그 흔적을 남긴다. 거친 시대를 살았던 아버지의 삶 속에는 한 나라의 정치 사회적인 역사가 부분적으로 투영되어 개인의 역사를 이룬다. 작가는 뒤늦은 아버지의 훈장 서훈을 통해 아버지 개인의 업적과 상흔은 물론 그늘이 드리워졌던 가족사에 대해 수긍하게 된다. 〈아버지의 훈장〉에 담긴 비극적인 가족사는 개인의 역사를 뛰어넘어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대다수 우리 민족은 잊고 싶은 가족사와 역사를 품은 채 살아간다. 한국전쟁과 분단의 근현대사를 관통해오며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로 남아있는 사건들을 수습하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가족사를 쓸 수 없으리라. 사회 구조에 의한 희생자로서, 개인사와 가족사의 복원은 나아가 역사의 복원이고 가족들의 치유로 나아갈 것이다.
-양희용의 〈6905〉
수필의 주요 화소話素는 작가가 직접 경험한 삶의 이야기다. 삶의 직접 경험은 작가에 의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로 연결된다. 작가의 이야기는 전개되는 과정에서 대상과 인물이 유기성을 갖기 마련이며 이야기의 요체는 특정한 의미를 지향한다. 수필 속 화자의 사유와 행동은 작가의 개념체계에 의해 작동되고, 그 개념체계는 작가의 세계관을 담아낸다.
혹자는 모든 존재에 의식이 있다고 여긴다. 양희용은 자동차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격체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6905’는 작가가 오랜 시간 탑승한 승용차의 넘버다. 18년째 타다보니 이제 폐차를 앞두고 있다.
저는 울산의 현대자동차라는 명문가에서 태어나 대도시 부산으로 시집온 지 18년째입니다. 조선 시대 양갓집 규수처럼 정략결혼에 의해 지금의 주인 남자를 만났습니다. 세상에 별 남자 없다는 중매쟁이의 수완에 넘어가 몇몇 친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향하는 탁송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제가 조립되면서 꿈꿔왔던 좋은 집안의 멋진 남자는 아니었지만, 간소하게 혼례식은 올렸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저를 한산한 이면도로로 데리고 갔습니다. 저의 앞머리와 뒷머리를 올려주고 거추장스러운 비닐 옷을 벗겨주었습니다. 돗자리에 몇 가지 음식과 물품을 준비한 후, 혼례주를 한 사발 부어 초례상을 차렸습니다. 저에게 큰절을 올리더니 막걸리 한 모금을 마셨습니다. 남은 술을 저의 가슴과 바닥에 뿌리며 안전운전과 무사고를 비손했습니다. 그의 지극정성에 감복하여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소박한 의례를 마치자마자 우리는 서로의 몸과 마음을 허락했습니다.
-양희용의 〈6905〉에서
인용문에서와 같이 〈6905〉는 폐차를 앞둔 승용차가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이른바 ‘전지적 6905 시점’이다. ‘6905’ 관점이라는 참신하고 자유로운 형식은 주제를 심화하는데 적절하게 기능한다. 전문을 통해 작가는 소실점 밖으로 페이드아웃 되고 ‘6905’와 독자 간 소통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6905〉에서는 자동차의 독백으로 들리는 것은 작가 자신의 심적 고백이다. 거기에 더한 빠른 서사 진행으로 독자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저 빠져들 뿐이다.
작가는일상의 경험을 자신만의 개성적인 형식에 담아낸다. 자동차가 출고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고사 지내는 장면이나 절차에 어긋남 없는 초례醮禮 장면도 실감나게 묘사했다. 동고동락을 함께한 자동차를 보내고, 신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주인과의 헤어짐은 기정사실이다. ‘6905’는 그 상황을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이렇게라도 이야기를 풀어내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듯하다.
작가는 자동차라는 대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다. ‘6905’의 심사를 진솔하게 토로할 수 있는 일관성은 대상에 대한 신뢰와 관심이다. 자신과 자동차와의 서사를 통해 인간사의 애환과 관계의 소중함을 드러낸다.
저를 향한 주인의 사랑은 일편단심이지만 제가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이의 안전하고 즐거운 노후 생활을 위해서입니다. 저의 심장을 비롯한 내부기관 전체에서 알 수 없는 이상 반응이 계속 나타납니다. 1년 가까이 입원과 퇴원이 반복되면서 엄청난 치료비가 발생했지만, 끝까지 저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습니다. 주치의가 오랜 숙고 끝에 한 달이라는 시한부 판정을 내렸을 때, 그이는 하늘만 바라보며 애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쌓아 온 추억과 애정을 돌아보기 위해 마지막 섬 여행을 나선 것입니다.
-양희용의 〈6905〉에서
인간은 자신의 심신과 사회적 삶의 쾌적함을 위해 물질적 기기를 가까이 두고 소중히 관리한다. 그것은 애착으로 발전한다. 차주인 작가 친구의 교통사고로 덩달아 떠나버린 차를 묘사하며 인간이 생래적으로 겪기 마련인 회자정리會者定離를 받아들인다. 모든 만물은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이치를 이미 깨달았기에 주인과의 이별도 순리로 받아들인다. ‘6905’의 입장에서 보면 한계 상황이지만, 폐차를 앞두고 잠기기 마련인 슬픔의 정서를 내비치는 신파는 없다. 담담하고 명랑하게 슬픔을 극복한다. 긴 세월 동안 맺어진 건강한 관계의 견고함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인식을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동안 무사무탈했던 차주와의 동행에 감사할 뿐이다. ‘6905’ 뒤에 숨은 대상에 대한 연민과 깊은 이해가 인상적이다.
저는 못생긴 외간 남자의 손에 끌려 폐차장으로 갔습니다. ‘6905!’는 찌그러지면서 몸뚱이는 고철로 분해되었지만, 여러 가지 용품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무엇으로 환생하든 그이를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양희용의 〈6905〉에서
〈6905〉의 결미 부분이다. 결미에 서사의 확장은 환생을 통해서라도 주인과의 재회를 염원한다. 작가가 상상력은 상식적인 서술 한계를 넘어 헤어짐 그 이후의 세계를 염원한다. 이렇듯 작가의 통찰력은 주제가 분명한 수필로 완성된다.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그릇만큼 자동차로서의 삶을 누린 자동차가 인격체인 것처럼 느껴져 생동감이 전해진다. 새롭다는 것은 세상에 없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우연히 지나칠 만한 상황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수필은 단순한 에피소드나 독자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의미한 개인사의 나열이 아니다. 수필이 자유로운 형식의 글인 만큼 작가 나름의 구성 전략을 통해 수필의 문학적 기능을 상기해야 한다. 나아가 작품을 통한 미적 울림과 공감은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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