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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천주교 공동체의 경북 언양(彦陽)지역을 중심으로본 청도 구룡 공동체의 신앙생
자료출처 :- 천주교 언양성당 信仰傳來二百年史 http://church.catholic.or.kr/unyang/200year/history.htm
자료생성 :- 2013.08.04
자료옮김 :- 임충섭(쿠웨이트 정부치과병원, 독도KOREA홍보위원, 독도천연보호구역지킴이, 1문화재1지킴이)
제 3장 언양지역의 신앙 공동체 발달
註 ; 언양읍(彦陽邑)은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속해 있으며 읍 소재지이다. 언양이란 이름은 언양의 진산인 고헌산의 '헌'자를 '언'자으로 발음하여 따서 만든 이름이다. 본래 언양은 고려, 조선 시대에 울산 도심과는 다소 구분되는 권역을 이루어왔다. (쿠웨이트 임충섭 요한바오로)
1. 개관
한국 천주교회 200년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전반 1세기는 이 땅에 교회의 토대를 굳히기 위해 온갖 시련을 겪어야 했던 박해시대였으며, 후반의 1세기는 자유로운 신앙 활동이 외적으로 보장되어 교회의 발전이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던 자유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창립과 더불어 시작된 무수한 박해들은 "고대 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하더라도 19세기의 한국 천주교신자들이 겪었던 만큼의 시련과 형고(刑苦)를 겪었다고 잘라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개인과 가족의 모든 것을 바쳐야하는 대단히 참혹한 것이었다.이러한 박해는 천주교가 전래될 당시 역사적인 배경과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천주교 신앙 자체가 갖는 사회지배 이념과의 차이점 등의 요인이 빚어낸 것이었다. 나아가 순수한 종교적인 요인뿐 아니라 조선 후기 사회의 정치, 사회적인 상황과 연결되어 박해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거듭되는 박해로 강산이 악형과 학살의 피로 물들어 갔어도 반대로 교회는 기적적인 발전을 보였다. 이 기적적인 발전을 가능하게 한 것 중의 하나가 박해를 피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신앙생활을 하는 신앙 공동체의 형성이었다. 일반적으로 '교우촌'(敎友村)이라고 불리는 신앙 공동체는 한국의 전통적인 공동체인 가족이나 친족을 중심으로 한 혈연 공동체, 또는 마을이나 고을을 중심으로 한 지연 공동체와는 달리 신앙을 중심으로 모인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선조들은 신앙을 키우고 실천하면서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고 모진 박해에도 굴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장에서 살펴볼 언양 지역의 신앙 공동체 역시 박해의 과정에 따라 확산 또는 약화 되었으며, 언양지역을 기준하여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신유박해에서 정해박해까지의 기간(1801-1827)을 보면 1801년의 신유박해로 오한우는 순교하고 김교희는 가정을 이끌고 간월산 불당골로 피신함으로써 언양지방의 첫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한편 신유박해로 탑곡으로 유배된 강이문에 의해 탑곡에서도 작으나마 신자촌이 형성되었고 또한 강이문에 의해 신자가 된 예씨 청년이 그의 가족과 그가 권하여 신자가 된 5,6세대와 함께 정착한 상선필(예씨네골)에도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언양에서는 내간월산 불당골, 탑곡, 상선필 등 세 곳에서 신자촌이 형성되어 서로 연락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던 중 1815년 을해박해로 충청도, 경상도 등의 지방에서 신자들이 피신을 와 이곳 3군데 신자촌에 정착함으로써 이 신자촌들은 더욱 커졌고 확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827년의 정해 박해로 인하여 간월 신자촌까지 유린되어 김교희 가정은 경주지방으로 피신하게 되어 신앙 공동체가 약화되었다.
또 정해박해에서 경신박해까지의 기간(1827-1860)을 보면 1839년에 일어나 기해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탑곡, 상선필을 거쳐 간월과 대재에 우거하였다. 이때 김교희의 아들 김상은은 대재를 거쳐 국내 유일의 천연 석굴인 죽림굴에 있었으며 1840년경 충청도와 영남 각처에서 피신온 신자들이 움막집을 짓고 토기, 옹기, 숯을 구우면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로
인해 대재 또한 간월과 같은 큰 규모의 신자촌이 되었다. 또한 최양업 신부 의 전교 활동으로 내와,하선필 등지에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어 언양지방의 신자들은 활발한 전교 활동과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860년의 경신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고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간월공소는 불태워져 버리고 대재 역시 공소기능을 살실하게 되어 언양지역 공동체는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경신박해에서 문호개방의 시기(1860-1886)는 앞의 두 시기와는 반대로 침체기를 맞은 후에 신앙의 자유로 활기를 찾게되는 과정을 거친다. 즉 1866년 이후 거듭된 병인박해로 간월과 대재는 1868년에 해체되었으며, 간월과 대재가 해체되자 이곳의 신자들은 더 깊은 산골인 안살티로 모여 들어 살게 되었고 다른 곳에 피신했던 신자들도 박해가 심해지자 이곳으로 모여 새로운 신자촌을 형성하였다. 그후 이들은 사기점으로 장소를 옮겼다가 다시 박해가 끝날 무렵 현재의 살티공소로 옮겨와 정착하였다.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전국적인 박해가 점점 수그러들고 어느 정도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보장되기 시작하자 산 속에 숨어 지내던 신자들이 마을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
2. 신유박해에서 정해박해까지 (1801-1827)
1) 폐허화된 초기교회
신앙선조들의 자발적인 강학 모임과 이승훈을 비롯한 지도자들의 세례, 그리고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여러가지 노력은 한국 천주교회 공동체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였으며 이러한 발전은 중국인 주문모 신부의 입국과 활동으로 이어져 한국교회의 성장에 초석이 되었다.
그러나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 정책을 써왔던 정조가 죽고(1800) 그뒤를 이은 순조와 정순왕후의 섭정으로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마침내 전국적인 규모의 박해로 확산되었고 초기 교회에 엄청난 해악을 초래하였으니 이것이 1801년의 신유박해로 이어졌다. 이 박해로 인해 주문모 신부와 초기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 순교하였으며, 살아남은 신자들도 산간벽지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후 폐허화된 교회를 재건하려는 신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계속되었으니, 정하상,신대보를 비롯한 새로운 지도자들은 수시로 북경을 내왕하고 밀사를 파견하여 북경 주교에게 선교사의 파견과 그 지속적인 보장을 요청하였다. 또한 1811년,1825년 두차례에 거쳐 로마 교황에게도 서한을 보내 그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한편 신유박해 때 반포된 척사윤음(斥邪綸音)은 그후에도 천주교 탄압에 대한 법적인 근거가 되어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잦은 박해를 일어나게 하였다. 특히 1814년 전국에서 기근이 들고, 이러한 상황에서 교우들의 재산을 노린 일부 백성들의 탐욕과 중앙의 지시없이 시작된 지방 관청의 탄압으로 을해년(1815)에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큰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가 외형상으로는 그 이듬해에 종결되었지만 100여명의 교우가 체포되고 그중 30여명이 순교하였으며, 살아남은 교우들도 재산을 약탈당하고 피신하는 신세가 되었고, 특히 경상도와 강원도에 형성되어 있던 많은 교우촌이 파괴되었다.
1827년(정해)에 천주교인 밀고사건으로 또 한 차례의 박해가 일어났으니 전라도 곡성에서 시작된 이 박해는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 상주(尙州)의 교우촌, 충청도와 서울 일부 지역으로 연결되어, 4개월 동안 500여명의 교우들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15명만이 옥사또는 처형으로 순교하였으며 나머지 많은 이들은 배교한 뒤 석방되거나, 아니면 유배되었다.
이러한 신유박해(1801)부터 정해박해(1827)까지의 한국 교회사는 경상도지역 및 언양지역의 교회사와 신앙 공동체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1801년부터 1827년을 한 단위로 구분되는 이 시기는 이 장에서 살펴볼 경상도 및 언양지역의 교회사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신유박해(1801)와 을해박해(1815) 때 조선 전역과 경상도의 신앙공동체가 탄압과 박해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언양지역의 신앙 공동체는 크게 확산되었다. 반대로 정해박해(1827)는 전라도 전역과 경상도,충청도,서울의 일부에만 약간의 피해를 끼쳤으나,언양의 여러 신자촌은 큰 피해를 입어 뿔뿔이 분산되며 약화되는 대조적인 현상을 가져왔다.
2) 경상도 지역의 신앙 태동
제 1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시대 경상도 지방은 유학이 발달한 곳으로서 어떤 다른 사상이나 이념이 수용되기 힘든 지방색이 강한 곳이었다. 그러나 신유박해의 영향으로 타지방에서 살아남은 신자들이나 그 가족들이 경상도의 안동,영양,청송,진보 등 여러 곳으로 이주하였으며, 이들은 경상도 지역으로 귀양을 온 강이문(언양, 1794),이학규(김해, 1801),신흥권(고성, 1801),김노(진해, 1801),이치운(거제, 1801),정약용(장기, 1801)등의 유배자들과 함께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어나갔다. 물론 위의 내용들은 지금까지의 기록으로는 확인될 수 없는 것으로써 1815년의 을해박해와 1827년의 정해박해와 관련된 기록에서 유추된 것이며, 타지역의 박해로 피신해 온 신자들이 경상도의 산간지방으로 이주함으로써 복음의 씨앗이 경상도에 뿌려졌다는 가설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황사영 자신이 배론으로 가기 전에 예천(禮泉)에 들렀다는 기록이나, 윤우열이 경남 하동(河東)에 있는 천주교인들의 부락을 찾아 조처해 주기를 바라는 상소등에서 이미 경남 지방에 까지 천주교가 전파되어 있음을 알 수 있으며1) 특히 다음 단락의 언양지역의 신앙 공동체 발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최근의 여러 기록과 증언이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이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편 을해박해 당시의 교우촌 분포를 살펴보면 박해의 시발지인 청송 노래산(老來山)의 교우촌과 영양 고을의 곧은장에서 김경서(프란치스코)가 이룬 일월산중의 교우촌, 안동 우련밭의 산곡(山谷)에서 김종한(안드레아,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이 이룬 교우촌, 진보 교우촌, 청양고을 교우촌 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 이렇게 을해박해 때 청송, 진보, 일월산, 우련밭에서 잡혀온 신자들은 경주와 안동진영을 거쳐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그 숫자는 100-200명이라고 전한다. 관변측의 기록으로는 대구감영의 이송자는 33명이고 그중 26명이 질병과 굶주림으로 옥사하고 나머지 7명은 참수당했다고 나타난다.3) 이때 순교했던 이들의 대부분은 충청도 출신으로서 경상도 동북부 산간 지역인 청송,진보,영양,안동 등지로 피신하여 살던 신자들이었다.
을해박해 이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소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내려와서 경주,울산,기장,영양,동래 등지로 이주하였다. 박해후 경상도 지방은 평온을 되찾았으며 사방으로 흩어진 신자들이 착실한 신앙생활을 한 결과 여러 신앙촌이 꾸준히 커나갔다. 또한 한국 교회도 교회 재건 운동과 성직자 재영입운동을 폈으며, 여러 문헌에서도 매우 밝고 활기차며 자유롭던 당시의 교회상황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827년(정해) 전라도 곡성에서 신자끼리의 말다툼으로 시작된 밀고사건이 박해로 연결되어 전라도뿐 아니라 경상도와 충청도, 서울 일부에까지 확대되었다. 정해박해는 그해 2월부터 3개월동안 계속되어 5월에 신자들의 체포가 종식되었으나, 그동안 전라도의 모든 신자촌과 상주,안동,순흥 등의 경상도 신자촌, 단양 고을의 충청도 신자촌이 습격을 받았다.
이때 약 500명의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나 거의 모두가 배교하여 풀려났고 15명만이 옥사또는 참수 순교하였는데 이는 그중 반수 가량이 예비신자에 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많은 신자 중에서 신부에게 한두 번의 성사를 받은 사람이 겨우 4,5명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4)
3) 간월 신앙 공동체의 형성
한편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제 갓 복음의 씨가 떨어져서 자라기 시작한 언양지방에도 신유박해(1801)의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쳤다. 그 결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복음 전파에 힘쓰던 이 지방의 첫 신자인 오한우(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다니다가 경상도와 충청도 지방의 경계지점인 충청도 어느 곳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고 문종이에 얼굴을 가리어 물을 뿌리는 백지사치명(피안살수형)을 당하여 순교하였다.5) 그후 그의 시신은 순교한 곳에 가매장 되었다가 20년이 지난 뒤에 그의 아들이 언양으로 이장했다고 한다.6) 그리고 박해가 심해지자 그와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김교희(프란치스꼬) 가정도 언양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산골의 내간월산 밑의 불당골로 피난을 갔으며, 또한 남은 오한우(베드로)의 가족들도 이곳 내간월에 이사를 와서 살았다. 그리하여 이들의 가정을 중심으로 이곳 내간월에 최초의 새로운 신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7)
한편 신유박해(1801)중에 언양지방에는 주문모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서 입교한 강이문이 귀양을 왔으며 8) 그는 곧 탑곡으로 옮겨졌다. 또한 이곳에서 얼마 멀지않는 장기현(포항부근)에는 정약용이 귀양을 왔었다.9) 그런데 이때 경주 사람인 예씨 청년이 정약용을 찾아 갔더니 정약용이 그를 탑곡에 유배되어 있는 강이문을 소개하였다. 강이문을 통해 신자가 된 예씨 청년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이웃과 친척들을 권면하였고 그 결과 5,6세대가 입교하여 이들은 탑곡 인근의 깊은 산골인 상선필로 이주하여 살면서 신자촌을 이루었다. 한편 언양으로 귀양온 강이문과 예씨 청년의 개종에 관한 내용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헌상의 기록을 보면 아래와 같다.
"동남쪽에 있는 도(道)의 저 안쪽에 떨어져 있는 한 교우집단에서 오늘 행해지고 있는놀랍고 좋은 일을 대강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섭리의 손으로땅에 뿌려진 겨자씨입니다. 1801년 한 신자가 굉장히 큰 산들로 다른 지역과 떨어져있는 이 먼 지방에 귀양을 갔습니다. 그는 열심하고 능력이 있는 신입교우였습니다. 그의 의젓하고 규칙적인 행동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에게로 쏠렸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때에는 그의 돌봄으로 개종한 집안하나 밖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집안이 하나밖 에 없었습니다.나중에 첫 번째 집안이 또 다른 가족을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열매가 빨리 익지는 못했습니다.10)"
"한 젊은이가 그의 고향에서부터 걸어서 여러 날 걸리는 간월이라는 마을에 독특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끌려 그곳의 회장을 만나러 와서 이거룩한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청했습니다. 회장은 그의 뜻에 의심을 품고 그의 소망을들어주기를 거부하고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은 채 돌려보냈습니다. 젊은이는 얼마후에 다시 공격을 시작해서 회장에게 다시 자기 마음이 진실함을 증명하기 위해 전력 으로 노력했습니다. 쓸데없는 노력이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쫓겨갔다가 세번째 다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회장은 젊인이의 재촉에 못견디기도 했지만, 또 이 사람이 진리를 찾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천주교의 기본 교리를 설명해주며 조그마한 신심서 와 기도서와 교리문답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이 예비신자는 너무나 기뻐하며 그에게 필요한 책을 직접 베꼈습니다. 그런 다음 이 귀중한 보물을 보유하게 되어, 집으로 돌 아가서 무엇보다도 먼저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과 온 가족을 자기가 방금 받은 진리의 은혜에 참여시켰습니다. 그후에 그와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은 모두 천주교의 본분을 충분히 자유롭게 지킬 수 없는 고향 읍내를 떠나 간월 가까이에 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
제가 마지막으로 성사를 집행하러 갔을 때 이 사람은 세례 받을 준비를 완전히 갖춘6명을 데리고 왔고, 자기 마을에 경당을 세우고, 내년에는 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잘 준비가 된 모든 가족을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대여섯 가족이 사는 또 다른
마을 하나도 같은 모양으로 개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11)"
이렇게하여 이곳 상선필에도 새로운 교우촌이 형성됨으로써 신유박해 후에 언양지방에는 내간월 불당골과 탑곡, 상선필 등 세 곳에서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들은 주로 농사를 짓거나 옹기와 숯을 구우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한편 1815년에 이르러 일부 백성들의 탐욕과 지방 관청의 탄압으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을해박해로 말미암아 경상도 여러 지역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즉 박해 당시 도망을 했거나 관가에 체포되었다가 일시적으로 배교를 하고 풀려난 신자들도 모두 사방으로 흩어져서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어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신자들이 청송의 이웃 고을인 영천지방과 청도지방과 경주지방 및 언양지방의 깊은 산골로 숨어 들어서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었다. 즉 많은 신자들은 당시 경주지방 관할에 속했던 이곳 탑곡과 예씨골(상선필) 교우촌을 거쳐서 간월산 밑의 간월 교우촌으로 피난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앞서 본 바와 같이 이미 1801년 신유박해 때 경주 김씨의 김교희(프란치스꼬) 가정과 순교자 오한우(베드로) 가정 등이 피난와서 살고 있던 간월에 새로이 이들 신자들이 많이 모여 들어 이제 간월 교우촌은 더욱 커졌고 확실한 신앙 공동체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2) 그리하여 을해박해 이후에도 충청도와 경상도 동북부 지방인 청송, 진보, 영양 등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피신하여 상선필을 거쳐서 내간월 불당골에 정착함으로써 언양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더욱 커졌다.10)
그러나 정해년(1827)에 접어들자 전라도지역에서 신앙이 약한 신자들의 자백에 의해 정해박해가 시작되었고 이 박해의 불길은 이웃인 경상도 지방까지 번져 왔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신대보가 상주 잣골에 숨어 있다가 체포되어 전주감영으로 끌려 갔으며 또한 그해 4월 말경에는 상주 고을의 4-5군데 13) 신자촌이 습격을 받았다. 멍애목 신자촌에서(문경군 풍로면 명전리) 박보록과 박사의 부자가 체포되고 앵무당(상주군 화북면 평조리) 신자촌에서는 김사건과 안군심을 비롯하여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또한 순흥이 고을 곰직이(봉화군 불야면 오전리)에서는 이재영이 체포되었다. 한편 순교자 김범우의 먼 친척인 김언우는 스스로 안동진영에 자수하였다.
이렇게 정해박해의 피해는 경상도 북부지방뿐 아니라 경상도 전역의 교우촌에 확산되었으며 이곳 간월 교우촌에도 모든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짐으로써 간월 교우촌은 약화되었다. 특히 김교희(프란치스꼬)의 가정은 박해를 피해 여러 곳으로 피난을 다니다가 경주지방의 아화 모량리에 정착하여 살다가 1834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14)
3. 정해박해에서 경신박해까지 (1827-1860)
1) 조선교구 설정과 교회의 발전
계속되는 박해로 한국 천주교회는 그 위세가 크게 약화되어 위기를 맞게 되었다.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순교하였고, 더욱이 주문모 신부마저 치명하자 한국교회는 이후 35년간 목자없는 교회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비참과 곤경 가운데서 남아있는 신자들은 다시금 교세를 키우기 위해 힘썼으니 사제를 영입하고자 북경에 연락을 하는가 하면 북음 전파를 위해 산간 벽지로 동분서주하였다. 그리하여 1831년(순조 31년)에는 북경교구로부터 분리되어 정식으로 조선대목구가 설정되었고 유방제,모방,샤스탕,앵베르 주교 등의 외국 선교사들이 차례로 입국하여 전교한 결과 교회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권 쟁탈이라는 정치적 배경과 결부되어 다시금 크나큰 박해를 받아야 했으니 이것이 1839년을 전후해서 일어난 기해박해였다. 이 박해는 1815년과 1827년의 국지적인 박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가져다 주었으며, 특히 서울과 경기도에서 그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 박해로 인해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던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되었고, 교회재건에 크게 기여하고 있던 정하상, 유진길 등의 유능한 지도자를 잃게 되었다. 기해년의 박해 이후 한국 천주교회는 재차 사제 영입운동을 펼쳤으며, 마침내 1845년에는 한국인으로서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귀국으로 교회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함께 귀국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더불어 교회 재건을 위해 힘썼으나 이들 역시 이듬해 붙잡혀 순교의 길을 가야 했으니 정부의 박해 손길이 아직은 거세었던 것이다.
다행히 이 병오박해로 현석문,임치백 등 8명만이 순교하였고 그후로는 천주교 탄압에 강경하였던 풍양 조씨의 몰락으로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정부의 비교적 온건한 정책 속에서 교세를 키워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전반적 정책과는 달리 지방에서는 산발적인 박해가 일어나 탄압을 받았으며, 특히 1859년 말부터 1860년 8월에 거쳐 소수의 지방관리가 조정의 허락없이 서울과 지방의 신자촌을 급습함으로써 경신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조정의 반대와 장본인들의 파면,투옥된 신자들의 석방으로 9개월 간의 박해는 종식되었으나 기해박해와 병오박해의 어려움 속에서도 활성화되었던 경상도및 언양지방의 신앙 공동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2) 선교사들의 경남지역 선교
신유박해 이후 교회 재건 운동과 사제영입운동에 힘입어 조선대목구로 분리 설정된 한국교회는 모방(1836), 샤스땅(1837)신부를 맞아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으며, 이중 샤스땅 신부는 남쪽 지방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지방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15) 샤스땅 신부는 1837년 홍병주와 홍영주(한국 천주교회 초기 지도자 중 한명인 홍낙민(바오로)의 2대손) 형제를 회장으로 임명하여 칠곡 신나무골 신자촌에 얼마동안 머물면서 성사를 집행하고 형제 회장으로 하여금 대구와 인근의 신자들을 돌보고 병자들을 방문케하고 또한 예비자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신나무골이란 말은 바로 당시에 샤스땅 신부가 회장들과 함께 나무 밑에서 움막을 치고 은신했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라고 한다.16) 또한 그는 청도 구룡공소와 경산 모래골 공소 등 선의산을 넘어 다니면서 경북 내륙지방의 교우촌을 순회하였고 언양과 밀양 등지의 신자촌들도 돌보았다. 나아가 그는 경상도 남쪽 지방인 부산 지방 부근의 신자촌에서도 열심으로 포교 활동을 하였다.17)
그러나 이렇게 프랑스 선교사들에 의해 활발하게 퍼져갔던 선교열도 1838년에 경상도 지역에서 박해가 시작되면서 크게 저하되고 교회는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박해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1838년 8월 꽤 심한 위기가 반도의 남쪽에 있는 교우촌을 뒤흔들어 놓았다. 40명가량 신자들이 붙잡히자, 다른 교우들은 추수할 것을 버려둔 채 도망을 하였다.그 지방의 수령은 이 사건이 예기치 않았던 규모로 확대되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그가 내렸던 무모한 명령을 후퇴하고 잡힌 신자들을 거의 다 놓아 주었다. 그러나주민 100명 이상이나 다른 도(道)로 이사하게 만들자 이 사실을 알게 된 감사는 크게 노하여 그의 감영에 수령과 포졸들과 옥에 갇힌 채로 있던 신자 6,7명을 소환하였다. 밀고자는 귀양을 보내고 수령은 꾀많은 돈을 쓰고서야 무사히 되었다. 한편 신자들은 옥살이나 배교의 택일을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불행히도 그때 신자들은 일시 배교를 하고 석방되는 사람들이 많았다."18)
기해박해(1839)가 일어나기 1년 전에 발생한 이 박해로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위의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100여명 이상의 신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여 이주하였다. 그리하여 거의 모든 신자촌이 유린되었고 살아남은 신자들은 피신한 뒤였기에 정작 이듬해의 기해박해 때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경상도 교회의 피해는 적었다. 당시의 피해 상황을 보면 밀양의 단장과 웁실및 칠곡 신나무골 등지의 신자촌이 파괴되거나 없어졌고 반면에 칠곡의 한티와 언양의 간월공소 등은 새롭게 형성되거나 재건되었다. 이 때 순교자로는 1836년 김해진영에서 체포되어 대구에서 순교한 박대식(라우렌시오)와 1827년 상주에서 체포되어 13년 동안 대구감영에 갇혔다가 1839년 순교한 박사의(안드레아),김사건(안드레아),이재항(안드레아) 등이 있다. 한편 이 무렵에 부산 동래의 두구동에 살면서 불교를 열심히 심봉했던 최세영(시몬)이 불교의 진리를 더욱 깊이 깨닫기 위해서 인도로 건너가서 3년동안 수학 한 후에 귀국하는 중에 청주에 들렀다가 서양신부를 만나서 다시 2년간 교리를 배워서 영세 입교한후에 귀국하여 1837-8년전부터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다가 1839년 위의 기해박해를 만나서 부산 동래산성의 금곡으로 이사를 갔다(증언 22. 박만선).기해박해의 폭풍이 지나간 후 다시 평온을 되찾은 교회는 병오박해(1845) 때에도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9명의 순교로 박해가 일단락됨으로써 경상도 및 여타 지역에 큰 피해는 없었다. 더구나 1849년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1861년 죽을 때까지 12년간을 충청,전라,경상도를 맡아 열심히 포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이 지역은 꾸준히 교세를 확대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1860년에 일어났던 경신박해는 여러 요인으로 9개월만에 종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상도 지역에 많은 피해를 끼쳤다. 많은 신자집단이 완전히 무너졌고, 신자들의 마음이 식어졌으며, 믿음도 약화되었고,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이 배교하여 신앙을 버렸던 것이다. 외적인 피해 상황을 보면 17명의 신자가 체포되었고 그중 3명은 석방되고 2명은 서울로 압송되고 1명은 대구감영으로 이송되었으며 10명은 경주감옥에 갇혔다. 이때 칠곡 신나무골과 한티에도 많은 신자들이 피난갔으나 포졸들이 급습해서 신자촌이 완전히 유린되었다.
3) 간월공소의 발달과 해체
정해박해(1827)이후부터 경신박해(1860)까지의 언양지역의 교회상황은 발전기와 침체기로 나눌수 있다. 전자는 정해박해 이후 조선교구설정(1831)과 외국인 선교사들의 입국, 기해박해(1839)로 인한 타지역 신자들의 이주, 그리고 최양업 신부의 활동(1849-1861), 간월공소 건립(1858) 등의 요인에 의해 언양지역의 신앙공동체가 크게 활기를 띠었던 시기이다. 반면 지역적으로 발생한 경신박해 때에 언양의 여러 교우촌은 크게 약화되었다. 먼저 정해 박해(1827)가 끝나고 조선대목구로 설정(1831)된 한국교회가 선교사를 맞이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동안 경상도 지역도 평온한 시기를 맞으며, 교세확장을 위해 노력하였고 특별한 박해나 탄압도 없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해박해(1839) 이전의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가 남쪽 지방을 순회하며 전교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내외적인 요인에 힘입어 꾸준한 발전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1838년에 일어났던 경상도 지역의 박해는 기해박해(1839)의 서막으로서 경상도 지방의 거의 모든 신자촌들이 피해를 입었고 칠곡 신나무골에서 얼마간 머물면서 은신전교를 하던 샤스땅 신부와 홍병주,홍영주 형제 회장들도 도로 자기 고향인 충청도 내포지방 애사을로 갔으며, 그중 홍병주는 그곳에서 기해박해를 맞아 체포되어 이듬해 순교하였다.19) 한편 언양지방에서는 일년 뒤에 불어 닥친 기해박해(1839)로 말미암아 큰 혼란이 일어나고 많은 신자들의 이동이 있었다. 즉 박해가 일어나자 충청도와 경북 일원에서 교난을 피해서 여러 세대가 신나무골,진목정,탑곡,예씨네골(상선필)을 거쳐서 간월과 대재(죽림굴,현 상북면 이천리)에 우거(寓居) 했다. 그리하여 죽림(대재,죽령,죽림굴)공소는 간월공소와 같은 큰 규모의 공소가 되었다. 또 이때 일부 신자들은 양산의 범실(범곡,달밭골,월전),동래,기장,김해,삼랑진,정승골,가인 등지로 1,2세대씩 분산해서 피난을 하였고 탑곡 예씨네골(상선필),진목
정 등지의 신자들은 추격하는 포졸들에게 쫒겨서 간월과 죽림공소로 피난와서 살게 되었다. 박해가 끝난 뒤 1842년경에는 위의 간월과 죽림공소에서 피난을 했던 진목정, 탑곡 신자들중 일부가 고향으로 되돌아 갔다.
또한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1846)도 언양지역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1845년부터 시작된 다블뤼 신부와 그후의 최양업 신부의 간월공소 방문과 성사집행 등으로 언양지역 신앙열기를 크게 활성화시켰다.
"그래서 1837년 우리 동료들이 그 곳에서 성사를 집행했을 때 거기 있던 약간의 신자들이 다른 신자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종교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 교우집단과 가까이 있으려고 이사를 했습니다. 1839년에 박해가 아무 곳도 빼놓지 않았으므로 모두가 흩어졌습니다. 그러자 어디에 발을 붙일지 모르게 된 이들 가족중의 한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가 평온을 찾아냈습니다. 자기 의무에 충실하고 성사도 받게 된 열심으 로 가득찬 이 가족은 그의 신앙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하기는 사람들이 그 가족이 왜 이사를 갔었는지를 잘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친척들에게 다음에는 친구들에 게 천주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즉시 새로운 집단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신자들과의 연락은 이따금씩 밖에는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은 마음으 로 찾는 이에게는 천주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매일같이 이 작은 양떼는 수효가 증가되고 열심이 더해졌습니다. 그래서 1845년에 우리가 그 곳에 갔을 때에는 신자들 이 많은 중심지에 가까이 가려고 이사를 간 다른 많은 사람들을 빼고서도 예비 신자가 벌써 150명 가량이나 있었습니다. 8일내지 10일 동안 길을 걷는 것을 이 열심한 신입 교우들은 무서워 하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그들이 사는 산골에 갈 수가 없자 그들은 1846년에 2,30명씩 내게로 왔는데 그 중에는 여자도 몇명 있었습니다. 마치 딴 세상에 서 온 것같은 이 형제들을 혹 내가 느낀 인상이 감동된 그들의 마음 속에는 한층 더 강 렬했습니다. 그 먼 지방의 본 바탕 성격인 것같이 생각되는 놀랄만큼 순박한 이 착한 사람들이 다정스런 마음씨에다 깊은 신앙과 몹시 굳센 정신을 곁들여 가지고 있었습니 다. 그들은 나를 다만 천주의 사신(使臣)으로만 보고 그들의 행복을 나타내는 눈물을 줄 곧 흘리고 있었습니다." 20)
위의 서한 내용을 통해 1845년 이후 다블뤼 안 신부(후에 주교가 됨)를 비롯하여 최양업 신부가 이곳에 와서 성사를 집행하고 포교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지방의 온 고을이 거의 천주교 신자촌이 되었으며 그뿐 아니라 이러한 언양지방의 상세한 포교활동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서한중에 1857년에 로그레조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는 그 무렵에 입교하여 범실공소를 설립한 남주견 가정의 입교에 관한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어떤 젊은이가 그의 읍내에서 여러날 걸리는 간월이라는 동네에 일반 종교와는 다른색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것을 알아 보려고 직접 그곳의회장을 찾아와 그 좋은 교리를 가르쳐 주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회장은 그의 본뜻을 모르기 때문에 진리를 가르쳐 주기를 원치 않았고 모른다고 핑계하고 그대로 돌려보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회장을 찾아가 그의 믿음의 진실함을 증명하려고 온갖노력을 기울였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젊은이는 다시 한번 거절당하고 세번째 또 찾아왔습니다. 마침내 회장은 젊은이의 재촉과 그 사람의 진실성에 확신을 갖게 되어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설명해주고 기본교리서와 기도서와 교리문답을 주기까지 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바라던 진리를 알게 되었고 필요한 책들을 직접 베꼈습니다. 이렇게대단히 귀중한 보물을 얻은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가까운 친구들과 친척과 온 가족에게 같은 진리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곧 그는 모든 사람들과 같이 천주교의 본분을자유롭게 지킬 수 없는 장애 때문에 고향을 떠나 간월 가까이로 이사 왔습니다. 내가 지난번 공소를 보러 갔을 때 이 사람은 영세 준비가 아주 잘된 6명의 어른을 강당으로 인도했고 또 내년에는 그의 집안을 모두 영세준비를 시키고 또 그의 마을에 강당을 세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섯 가족이 사는 또 다른 마을도 같은 모양으로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21)
위에 나타난 남주견의 가정은 처음에 경남 의령에서 살다가 천주교 진리를 받아들인 후에는 다른 몇 세대의 가정과 함께 간월공소 부근인 양산 범실(양산군 양산읍 호계리)에 이사와서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였고 이후 1866년 병인박해 때는 박해를 피해서 청도 구룡공소에 피신해 갔다가 다시 범실과 살티공소에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언양지방, 특히 간월공소에 신자수가 크게 늘어 나자 마침 이 지방의 어떤 고마운 외교인이 새 강당의 건축을 위해서 헌금함으로써 1858-1859년 사이에는 간월공소의 새 강당을 짓고 촛대 등 화려한 장식품도 장만하였다. 이 새 강당은 전국적으로도 가장 훌륭한 강당이 되고 신자들은 이 새 공소에서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1859년 10월에 최양업 신부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간월이라는 공소에는 교우들이 상당히 많으나 모두 가난하여 강당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어떤 외인이 와보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집꼴이 이래서야 쓰겠는가?'고 말하며 자기가 하나 지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그 외인은 자기 비용으로 훌륭한 강당을 지어 주었고 장식품으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이곳만큼 훌륭한 강당은없을 것입니다." 22)
비록 정부당국의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지만 아직도 일반인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서 천주교를 질투하거나 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그때 어떤 외교인이 선뜻 성금을 내어 교회건축을 하게 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며 한편 이것은 그 당시 언양지방의 좋은 신앙의 분위기를 말해 주고 있다.
한편 일부 지방관리의 탐욕에서 시작되어 9개월만에 종식된 경신박해(1860)는 전국의 다른 지방과는 대조적으로 언양 지역의 신자촌에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즉 이때 간월공소는 불타버렸고 최양업 신부는 간월공소에서 순회전교를 하다가 박해를 만나 죽림굴에서 몇달간 숨어서 피신하는 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또 간월의 교우촌은 언양과 경주포졸들의 합동작전으로 열심한 신자였던 오치문(吳致文 1804-1861, 오한우(베드로)의 3대손)은 순교를 했고 김상은(야고보, 김교희(프란치스꼬)의 아들)와 아들 김영제(베드로,1827-1876)는 투옥되었다. 김영제는 간월골에서 허인백(야고버)와 이 도마와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었으며 허 야고보와 이 도마는 다시 울산 장대로 압송되어 그곳에서 처형되었고 김영제는 경주에서 서울로 이송되어 수감되는 동안 심한 주뢰형의 고문을 받아 종지뼈가 떨어져 나가는 등 9개월 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때마침 국가에서는 경사가 있어 죄수를 방면해주는 특사로 김영제는 감옥에서 풀려나 경북 '자인골'로 내려와 3년간 살다가 간월골에 살고있던 신자들이 이미 피신하고 있던 살티로 찾아가서 3년을 살다가 종지뼈가 떨어져나간 고통으로 인하여 1875년에 끝내 순교하였다. 또 순정공소의 김베드로도 대구 약영시에 갔다가 체포되서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그리고 김해가 고향인 허인백(야고보)는 언양으로 이사와서 살다가 이 박해(1860)을 만나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관가에 끌려갔으나, 돈을 내고 형벌만 받고 풀려 나왔고 그후 병인박해(1868) 때 다시 체포되어 순교를 했다. 이러한 경신박해(1860)의 언양지역 상황은 아래와 같은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서도 잘 나타난다.
"예수 마리아 요셉
죽림굴에서 1860년 9월 3일 리보아 신부와 르그레조아 신부에게
공경하올 신부님들
먼저 두 분 신부님들에게 공동편지를 보내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이 편지를 두 분뿐아니라 모든 신부님들에게 보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박해의 풍파로한 모퉁이에 갇혀서 신자들과 아무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들의 생사도 모릅니다. 이 편지도 중국에까지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박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포졸들이 사방으로 파견되어 신부님들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내 지방에서 17명이 체포되었는데, 남자가 14명, 여자가 3명입니다. 남은 신자들도 그의 다 그들 지방에서 쫓겨나 집과 전답과 가산을 전부 빼앗겼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동네에서 잡힌 신자들은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가정물건들은 포졸들이 약탈했거나 불에 타 없어졌습니다. 신자 친척이나 신자 친구들을 피신시켜 주었던 외교인들도 신자들과 같은 운명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동리의 주민들이 신자들 때문에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 신자들로 하여금 아무 데도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결의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신자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잡아 가둘 수도 없고, 다 재판에 회부할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 포졸들을 여기저기 파견하여 신자들을 혼란케하고 또 외인들을 충동하여 신자들을 적발하게 합니다. 이 방법이 신자들에게는 더 가혹하고 더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체포된 17명 중 3명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왜 석방되었는지 원인을 알 수 없으나 아마 배교한 것 같습니다. 2명은 서울로 압송되었고, 1명은 대구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는데, 요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열심한 여신자가
하나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을 가르쳐 천주교에 나오게 인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노파는 체포되어 용맹히 신앙을 증거한 후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습니다. 10명이 경주감옥에 갇혀 있는데 3명은 문초를 당할 때 용감히 신앙을 증거하고, 지금까지 감옥에서 고초와 굶주림과 병고로 고생하며 함구합니다. 그들 중 16세 된 소년이 있는데, 옥사장에게 간청하여 아버지와 같이 형장에 나가게 해달라고 애원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습니다. 24세된 동정녀가 있었는데, 교리에 밝고 열심하여 모든 신자들 중에서 출중하므로 일반의 존경과 흠모를 받아왔습니다. 항상 마음으로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를 원하더니 자기 부친과 다른 신자들이 체포될 때 포졸들한테 가서 자기도 같은 신자이니 잡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친과 다른 신자들의 만류로 다른 집으로 피신하였습니다. 거기서 포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포졸한테 가서 잡혀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이 동정녀가 가르치며 선생처럼 지도한 두처녀를 묶어가지고 가다가 여인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없었으므로 저들을 관가로 데려가지 않고, 처녀들을 농락하고 나서 다른 데 팔려고 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린 세 처녀들은 놓아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저들은 주님의 특별한 은혜로 놓여 났습니다. 동정녀의 이름은 아가다였습니다. 아가다의 부친과 오빠가 감옥에 갇혔고, 집도, 갈 곳도 없어 방황하다가 마침내 내게로 왔습니다. 너무나 고생을 많이 하여 탈진한 몸으로 병석에 누워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둘러있던 신자들과 같이 임종경의 마지막 말마디를 끝내자 아가다는 운명하였습니다. 박해전에는 천주교에 대한 인기가 상승하여 사방의 많은 외교인들 중에서 예비자들이 속출하므로 큰 위안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내 지방에서만도 예비자 수가 거의 1,000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어떤 동네는 전체가 문답과 경문 배우는 데 경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박해로 모든 외교인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없애기 위해 무장하고, 동리마다 신자들을 추방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 대한 인기는 몰락하고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자들은 실망하고, 많은 이들이 적어도 겉으로는 배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까지 굳세게 용맹히 신앙을 지킨 신자들까지도 마음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특히 젊은 과부나 처녀들은 더욱 큰 위험에 놓여 있습니다. 벌써 한 신자 과부가 외인한테 겁탈을 당하였고, 남편이 감옥에 갇힌 젊은 부인 한 사람과 처녀 한 사람도 겁탈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저들이 아직은 몸의 순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들은 신자 처녀들을 할 수 없이 외인과 정혼시켰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겁탈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조선교구 사제 최 토 마 올림" 23)
한편 위의 서한집에 나타나는 김 아가다는 김상은(야고보)의 딸이며 오빠는 김영제(베드로)를 가리킨다. 최 신부의 서한 내용과는 달리 후손들은 김 아가다가 최 신부의 일을 돕고 죽림굴에서의 피신 생활동안 그 뒷바라지를 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김 아가다는 최양업 신부가 죽림굴(간월산 일대)에 은신하여 전교하고 있을 때 3개월 동안 최 신부와 함께 동굴에서 기거하며 식사 빨래를 해드리면서 정보 연락도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최 도마 신부는 짚신을 삼았으며 교우들이 이것을 팔아 양식을 구하
여 생계를 마련해 고달픈 생활을 이어갔다. 이러던 어느날 김 아가다는 장질부사(염병)로 병사하자 최 신부는 직접 시체를 솔가지로 덮어 굴앞에 뉘어두고 패장을 세워놓고 어디론가 떠나가버렸다. 며칠후 교우 3명이 굴을 찾아와서 그의 시체를 발견하고 간월
골 집으로 옮겨와 3개월 동안 외변을 한 후 매장하였다."24)
4. 경신박해에서 문호개방까지 (1860-1886)
1) 격동기의 한국교회
이 시기의 한국사와 교회사는 세계사의 흐름과 변화에 큰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세계사는 제국주의 시대라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다. 즉 구미열강이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한 미개발국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시대이며, 이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국가 간에 알력과 전쟁이 발생하는 시기였다. 한국은 1870년대 중반기까지도 구미열강의 세력권 밖에 있었으나, 점차 일본과 구미열강 그리고 러시아의 대외침략 정책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게 되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대원군은 자신의 봉건지배 체제로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와의 절연 속에서 보수적인 쇄국정책을 취하였으며, 그 후에 집권한 민 씨 정권은 아무런 대비 없이 문호개방에 응함으로써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됨과 동시에 가까운 일본의 상품시장과 식량공급 기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구미열강에 대한 문호개방을 앞두고 국내의 정치세력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로 나뉘어 갈등을 일으키면서, 갑신정변(1884), 갑오개혁, 독립협회 결성 (1890)과 애국계몽 운동 등으로 근대화를 위한 시도를 전개해 나갈 때, 일반 백성들은 정치세력의 무관심과 억압에 대항하여 1894년의 갑오농민전쟁과 같은 무수한 농민항쟁과 민란을 통해 사회개혁을 부르짖었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 교회사는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시작된 병오박해가 국내 세도정치 세력의 강력 책과 구미열강의 통상요구 등과 맞물려 확대되었고 대원군의 집권(1863)과 러시아의 남하정책 및 중국의 북경조약(1860)등 국제정세로 인해 1866년 병인박해가 발생함으로써 수많은 신자들이 투옥, 순교하였다. 이때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1868)과 신미양요(1871) 등으로 인해 천주교에 대한 일반인과 정부의 입장은 더욱 강경책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러한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박해는 대원군이 실각하게 되는 1873년에 겨우 종식되었고 교회활동은 구미 열강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힘입어 묵인되어 갔으며 마침내 1886년 한불수호 통상조약에 의해 음성적인 선교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가, 1889년 교민조약을 통하여 법률적으로 신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되었다.
2) 경남지역의 급속한 복음 전파
경신박해 이후 병인박해가 일어나기 전까지 한국 교회는 꾸준히 발전을 하고 있었다. 다블뤼 주교 는 1864년 여름까지 전교하다가 충청도로 전입되고, 그 후임으로는 경상도 서부 지방을 담당했던 깔레 신부 와 충청도 동북부를 담당했던 리델 신부 가 임명되어 경상도를 나누어 맡게 되었다. 그중 깔레 신부는 경상도 북부의 산협 지대를, 리델 신부 는 경상도 북부 일부와 남부 일대를 맡았다.25)
그러나 병인년(1866)에 접어들면서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해 9월의 병인양요로 인해 교회는 많은 순교자를 내었으며 경상도에서는 북부의 대구, 문경, 상주 그리고 남부의 진영, 진주 등에서 많은 이들이 순교하였다. 경상도 남부 지방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모두 3명으로 진영에서 교살당한 김사집(金士執, 필립보)과 진주에서 참수당한 정찬문(鄭燦文, 안토니오), 그리고 진주 포졸에게 체포되어 매를 맞고 순교한 구 다테오 등이었다. 그들은 모두 경남지방 출신으로서 이미 그 지방에 전파되었던 천주교의 교리에 이끌려 입교한 후 신앙생활을 하던 중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한편 박해가 치열해지자 그해(1866년) 7월에는 그동안 피신해 있던 페롱 신부 와 깔레 신부, 리델 신부 의 합의결정에 따라 이 박해의 상황을 중국에 알리고 외부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리델 신부 가 배로 조선을 탈출하여 천진으로 가서 당시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인 로즈(Roze)제독에게 조선에서의 박해상황을 알리게 되었다. 그 결과 그해(1866년) 10월(음 8월) 로즈(Roze)제독이 군함 7척을 거느리고 강화도를 점령하여 프랑스 선교사들의 처형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위 '병인양요'가 일어남으로써 농사철에 잠시 중단되었던 박해가 재차 시작되었고 이렇게 정치적인 사건과 맞물려 확대되었던 병인박해로 한국교회는 12명의 선교사 중 9명이 순교하고 나머지 3명도 조선을 떠나게 되어 다시 성직자 없는 공백기를 맞이하였으며, 신자들도 박해를 피해 산간벽지로 피신해야했다. 그리고 1868년 4월(음)에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한 이른바 '옵페르트(Oppert)사건'으로 다시 박해가 일어났으며 이때 나라에서는 가장 처참하고 극렬한 방법으로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였다. 또 1869년과 1870년에는 박해가 잠시 잠잠해졌다가 1871년 소위 '신미양요'로 다시 박해가 치열해졌으며 7년간의 이 박해는 1873년에 대원군이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그동안 천주교 신자는 8,000-20,000명이 순교를 했으며 경상도 지방에서도 1차 박해 때는 밀양 명례리에 살다가 체포된 신 마르꼬(이냐시오)와 김해 되실 사람인 김 베드로, 다른 김씨(본명, 성명 미상)가 그해(1886) 2월 15일에 대구에서 순교했으며,26) 밀양 백산(밀양읍 하남읍 벽산리)출신인 오 야고보가 그해(1866년 3월 15일)에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또한 송이야기도 그해(1866년) 9월경에 대구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진주에서는 같은 해 3,4월에 정대길이 순교를 하였는데 그는 본시 김해 유하면 관동 사람으로 그해 3,4월에 본음 포졸에게 잡혀 진주로 가서 순교했다.27)
그 후 선교사가 다시 입국하여 교세의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으나 천주교 탄압의 기운은 여전하였다. 이때 대구에서 온 이윤일(의서, 요한)과 또한 그와 함께 상주옥에 갇혔다가 대구에 와서 치명한 문경 한실공소의 김 회장 형제 28) 그리고 프랑스인 신부 3명과 평신도(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이 체포되었다. 또한 그뿐 아니라 본래 동래지역의 이요한 회장은 가족인 아들, 이 방지거, 부인 박 마리아, 조카 이 베드로, 교우 차 방지거, 양 말띠노, 옥 발바라 등과 함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기장으로 피난을 가서 3년 동안 살다가 울산으로 이사를 와서 피신하였으며 동래 포졸에게 잡혀 통영으로 이송되어 가서 그해(1868년) 8월 14일에 8명이 함께 순교하였다. 이 무렵에 동래 사람인 다른 옥 발비라도 1868년에 잡혀서 이들과 함께 순교를 했다.
그 후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을 비롯하여 조선이 외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이 점차 유리하게 전개될 수 있었지만, 완전하게 보장된 활동의 자유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 경상도의 남부지방을 담당했던 선교사는 로베르 신부 이었는데, 그가 이곳을 담당한 것은 1882년 이전부터였다. 다음에 있는 1883년의 '교세통계표'(敎勢統計表)에 이곳 신자들에 대한 성사 집행의 결과가 자세히 나타나 있다.
"로베르 신부 에게 위임했던 경상도 지역은 금년에 특은을 받았습니다. 1,777명의 사규 고해성사자 외에도 215명의 성인들이 새로 탄생했습니다. 특히 이 지역에서 감탄할만한 것은 구 교우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뚜렷한 현상입니다. 로베르 신부 도 19세 내지 22세 젊은이들 150명으로부터 고해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외교인들 중에서도 아주 많은 개종의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215명의 성인 영세자 외에 384명의 예비자들이 있습니다. 외교인들 자녀의 임종 대세자의 수만도 250명이며, 이들 중에서 216명은 그들의 부모들과 아직 우상 숭배의 어둠 속에 잠겨있는 동족을 위해 전구(轉求)하러 하느님 곁으로 갔습니다."
이 1884년의 보고서에 기록된 전교의 결과는 분명히 급속한 복음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무렵 블랑 보좌주교는 로베르 신부 가 담당하고 있는 경상도 지역의 교세 확장을 위하여 한명 내지 두 명의 선교사를 상주시킬 필요성을 느끼고, 로베르 신부 로 하여금 이 지역을 전담시키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까지 로베르 신부 는 강원도 원주(原州)의 부엉골(지금의 경기도 廬川群 康川面 釜坪里)에 상주하면서 먼 지역에까지 전교 순회를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85년에 로베로 신부 는 부엉 골을 떠나 경상도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다. 경상도의 신자가 계속 증가하고 새로운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주하게 되자 블랑 주교는 그를 경상도 전담 선교사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게 된 로베르 신부는 복사로 이호연(李浩然, 베드로)을 동반하고, 1885년 말 경에 대구 근처인 칠곡의 신나무 골로 이주하여 은둔 생활을 시작하였다.29) 신나무 골에 정착한 그는 근처의 한티(지금의 칠곡군 東明面 得明洞)와 새방골(新坊谷, 지금의 대구시 서구 上里洞과 竹田洞 일대)로 두루 다니면서 열심히 전교 활동을 하였고, 또한 경상도 남부에서도 성사를 집행하였다. 이로써 경남 일대에 흩어져 있던 신자들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니, 당시 경남의 진주, 함안, 창원, 김해, 밀양, 양산, 기장, 언양, 경주, 청도, 경산, 삼가 등 남부 일대 전역에 퍼져있던 신자들이 점차 증가하였다. 로베르 신부 는 그 당시 경상도 지역의 신자들이 얼마나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신앙면에서 모두가 신입교우들인 그들은 대개 열심합니다. 특히 외교인들을 개종시키는 데 감탄할 정도로 열성적입니다. 그들은 그로 인해 때때로 입게 될 수 있는 피해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다고 찾아 온 어떤 외교인은 자신의 영세 준비도 채 끝나기 전에, 서둘러 자기 아내나 이웃 등 측근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정도입니다. 간혹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용기를 잃지 않으며, 다른 아는 교우들을 찾아가 상의하는 한편, 그들의 충고를 받아들여 집안에 있는 미신적인 물건들을 불태워 버리고, 죄지을 기회가 될 만한 사람들과는 설사 그들이 부모일지라도 관계를 끊기도 합니다. 그렇게 해도 문제의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에는 다른 곳으로 이사해 가는데 그때는 반드시 교우 촌으로 갑니다.30)"
한불조약이 비준된 이듬해, 즉 1888년 6월 12일에는 정식으로 프랑스 공사 플랑시가 서울에 주재하게 되자, 숨어 다니면서 전교를 하던 프랑스 선교사들도 차차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맞이하여 로베르 신부 는 큰 도시로 전교를 확대시키기 위한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이나 여타의 개항지와는 달리 경상도 지방은 여전히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 섣불리 행동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우선 대구에서 가까운 새방 골에 초가집 하나를 매입하여 장차 대구로 진출할 터전을 삼았다. 그리고 위험을 피할 수 있는 밤을 이용하여 대구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다. 이렇게 대구 시내로의 진출을 도모하는 가운데서도 로베르 신부는 지방의 공소들을 방문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경북 뿐 아니라 경남 일대의 공소들도 여전히 그의 방문을 받을 수 있었다. 더욱이 그는 처음으로 거제도까지 건너가서 성사 집행을 하였으며 여기에서 많은 예비 신자들을 얻게 되었다.31) 로베르 신부 는 1889년 초까지 경상도의 전 지역과 충청도, 전라도 일부까지의 넓은 지역을 혼자 담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던 중 험한 산중에서 폐렴에 걸려 고생 끝에 겨우 건강을 회복한 적도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러 그는 젊은 신부를 동반자로 맞이함으로써 그동안의 고통을 나누어 갖게 되었는데, 그 신부가 곧 훗날 부산본당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되어 활동하게 될 죠조(Jozeau, 趙得夏) 신부였다. 죠조 신부는 1889년 2월 16일에 서울에 도착한 후 잠시 한국말을 배우다가 3월 12일 이전에 경상도 지역의 담임 신부로 차정되어 로베르 신부와 함께 신나무 골에서 체류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까지 약 1년 여 동안을 생활하면서 전교 활동에 힘썼다. 이때 그가 담당했던 지역은 경상도 북부 지방으로, 전교 결과 그는 성인 영세자 72명과 외교인 자녀 임종 대세자 308명을 낼 수 있었으며, 전체 1,214명의 신자 중에서 863명에게 사구고해를 주고 769명에게 영성체를 줄 수 있었다. 경남 지방은 여전히 로베르 신부 가 담당하여 전교 활동을 하였다.32)
3) 죽림굴과 안살티의 신앙 공동체
한편 이곳 언양 지방에도 박해의 회오리바람이 불어 닥쳐서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에 많은 피해를 입혔다. 먼저 간월 교우 촌이 완전히 파괴되고 또한 신자들은 죽림이나 안살티, 두서, 두동 및 멀리 청도 구룡과 경산 자인 골로 피난을 떠났다. 즉 이때 언양 지방에서는 신자들의 친척이나 다른 외교인의 밀고로 신자들의 재산도 몰수당했으며 그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위의 살티와 구룡(청도) 등지의 깊은 산골로 도망을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경주 사람 김보윤(로무알도)은 이 교난을 만나 간월공소로 피난을 갔다가 죽림공소로 가서 거기서 다시 원동을 거쳐 영도섬에 정착했으며 그 후 1891년 죠조 신부와 함께 부산 본당설립의 주역이 되었다. 그리고 김사집은 마산 방면으로 피신 갔다가 진영포교에게 잡혀서 고문으로 일시 배교했다. 그러나 다시 배교한 것을 후회하고 진영 포졸에게 자수하여 감금당하고 1867년 5월에 진영에서 순교했다. 또한 범실공소의 남주견 3형제 중 1명은 의령으로 피난을 갔고 1명은 양산으로 갔으며 남주견 본인은 청도, 경산, 자인 큰골로 피난을 갔다가 후에 언양 안살티에 정착을 했다. 그리고 범실공소의 강씨 두 형제는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그리고 지난 1860년 경신박해 때 잡혔다가 풀려난 허인백도 다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김종륜(루가), 이양등(베드로)와 함께 죽림공소에 피신해 있다가 다시 범굴을 찾아서 가족들을 옮기고 자신들은 목기 만드는 일을 하다가 체포되어 그해(1868년) 5월에 경주진영으로 끌려갔다가 8월 14일에 울산 장대에서 3명이 모두 함께 순교를 하였다.33) 또한 이때 이기수 신부의 증조부인 이 루도비꼬는 울산군 웅촌면 금단에 살다가 박해를 만나서 위의 3인 순교자와 함께 체포되어 관가에 끌려가다가 도중에 풀려나서 간월로 잠시 들렀다가 다시 안살티로 피난을 했다. 또한 이때 언양 율동(청양면 율리)에 살던 월성 이씨인 이기수 형제는 죽림으로 피난을 갔다가 그 곳에서 포졸들에게 잡혀서 울산 장대에서 교수형을 받아서 순교하였으며 그 후 그 후손들은 밀양 가북으로 왔다가 다시 박해를 피해서 정승 골로 갔다가 박해 후에 가북으로 다시 돌아와서 살았다. 이렇듯 언양 지방은 경신박해(1860년)와 병인박해(1866-1873)로 말미암아 많은 신자 촌이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박해 후에 피난 갔던 신자들이 다시 안살 티로 모여들어서 새로운 큰 신자 촌이 이곳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편 1877년 9월에 리델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한 로베르 김 신부는 처음엔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신학생을 가르치다가 1882년부터는 경기도 지평 고시울에서 전교를 하면서 경상도 지방도 함께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883년에는 강원도 원주 부흥 골로 옮겨 가서 복음을 전파했는데 교세 통계표(1882-1883년)에 의하면 이 사이에 로베르 신부는 1차로 경상도의 각 지방을 순회 전교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가 순회 전교한 신자촌의 교세현황은 다음과 같다.34) < ( )은 신자수>
칠곡 신나무골(48), 한티(39), 상주의 사설(116), 군위의 여진(69), 경산 모개골(31), 청도 구룡(60), 경주의 우중골(57), 새태골(67), 진목정(21), 선필(82), 밀양의 양천(27), 정성골(32), 기장의 남락(139), 김해의 노루목(40), 창원의 잉애터(24), 함양의 동천(71), 논실(39), 밤대(12), 진주의 소촌(78), 단성의 능구지(21), 삼가의 황개(23), 언양의 살티(38). 이렇게 김신부는 경상도에만 25개의 공소에서 940명에게 판공성사를 주었으며, 그때 신자 수는(경상도) 1,568명이었다. 이 통계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미 병인박해(1866-1873) 때 언양 지방의 간월과 죽림 신자촌은 완전히 파괴되어 없어졌으며 대신 이 박해 중에 청도 구룡 등 사방으로 흩어졌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어서 살티 공소와 선필에 신자 촌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언양 지방에는 다시 교회 재건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한편 이때 로베로 신부는 우리 경상도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일부 전라도 일부 등지까지 혼자서 험하고 먼 길을 걸으면서 43개 신자 촌을 방문하고 판공성사를 준 결과 과로로 쓰러져 장티푸스에 걸려서 8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의식을 겨우 회복한 후 그는 40일 동안의 기도와 신자들의 병간호로 겨우 회복되었는데 그때 신부의 병환을 치료해 준 한의원은 당시 언양 지방의 탑곡 공소에 살던 박 회장이었다고 한다.35) 또한 그 무렵 1884년에 언양 지방에 범실공소와 반곡공소가 새로 설립되었다.
이렇게 해서 로베로 김 신부는 1884년과 1885년에도 계속해서 강원도 원주 박흥 골에 머물면서 경상도 지방에 순회전교를 하였다. 그러다가 1885년 12월 말에는 블랑 백주교의 명에 따라 경상도 칠곡 신나무 골(경북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23번지)의 열심한 신자인 이 이전(안드레아)댁에 안착하였고 경상도 지방의 사목을 위한 대구본당을 창립하고 첫 본당신부가 되었다.36)
대구본당이 설립된 후에도 로베로 김 신부는 이 호연 복사와 함께 더욱 열심히 경상도 전역과 전라도 무주 등 일부 신자 촌을 두루 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886년에는 우리 경상 남부지역인 함안의 토뫼(57), 논실(26), 밤대(14), 진주의 비라실(22), 소촌(65), 창원의 골내리(7), 곡목(36), 김해 노루목(30), 밀양의 정승골(38), 영천의 원랑(18), 청도의 구룡(48), 자인의 큰골(23), 하양의 북동(7), 경산의 모개골(17), 경주의 내와(45), 진목정(34), 우중골(30) 등에서 판공성사를 주었다. 이때 언양 지방의 신자들도 경주의 내와 혹은 진목정, 우중골 및 밀양의 정성 골로 가서 판공성사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해(1886년) 김 신부는 1,700여명의 신자들에게 사구성사를 주었고 또한 158명의 성인들에게 영세를 주었다.
또 그 이듬해인 1887년에는 김 신부가 34개 공소를 순방하고 1,000여명일 신자에게 사구성사를, 68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그때 경상도 지방에는 큰 흉년이 들이닥쳐서 많은 희생자가 났으며 설상가상으로 콜레라가 도내 전역에 만연되어 경상감사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거나 병을 앓았다. 그러나 이 어려운 때에 신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병자들의 간호와 죽은 이들의 장례식을 헌신적으로 치러줌으로써 많은 외교인들이 임종대세를 받고 사망했으며 또한 장례 후에 그 집안사람들이 모두 교회에 입교하는 사례가 퍽 많았다.37) 한편 1888년 언양 지방에서는 본당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어서 박해시대 때부터 많은 순교자를 내고 경상도 남부지방의 신앙의 요람지인 이곳에 본당이 설립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강력히 그 추진운동을 폈다. 이때 앞장서서 추진한 이는 언양 공소 회장인 박우양(가브리엘)과 선필회장인 김문익(안드레아)이었으며 신자들은 회비를 거출했다. 당시의 언양 지역과 인근 지역의 교우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해 노루목(37), 동래지역 범대(16), 절영도(15)), 동대(14), 언양읍(28), 살티(26), 내와(18), 선필(38). 이러한 당시의 교세현황으로 보아 마땅히 이곳에 본당이 설립되는 것이 타당한 것이었다. 이렇게 개화기의 언양 지역 신앙 공동체는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발전을 이루었고, 이것이 부산 본당의 설립과 경남 지역 교회의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5. 순교의 결실, 신앙의 자유
개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 천주교회사는 피어린 박해의 기록으로 시작되고 있다. 교회가 창설 초기부터 실천해온 신분의 귀천, 성별의 차대, 직업의 차별 등을 초월하는 평등과 사랑을 나누는 생활은 당시 주선 후기의 반상 체제(班常體制)를 무너뜨리고, 가부장 중심의 가족 제도를 흔들리게 하고 국왕에 대한 충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외부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숱한 탄압과 박해가 교회를 엄습하였고, 악형과 학살의 피를 흘리며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였다.
그러나 거듭되는 박해도 신자들의 신앙심을 꺾기는커녕 교회 발전의 계기가 되었으니 박해가 거듭될수록 교회의 신도 수는 배가되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비바람 속에서 모진 일을 숱하게 당하면서도 마침내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과 같이 무수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교회는 힘차게 자라났던 것이다. 더욱이 박해의 시련 속에서 상당 기간 동안 의지해야 할 성직자도 없이 외롭고 버려진 상태에서 교회는 빛났던 것이다. 하느님 대전에 혈제(血祭)로써 신앙을 증거하고 기꺼이 숨져간 숭고한 순교 정신은 살아남은 신자들에게 고귀한 교훈이 되었으며, 믿음을 갖지 않는 외부인에게는 경탄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죽음 앞에서 천국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확신하고 자신만만하게 칼날이나 곤장 아래서, 또는 밧줄에 매달려 순교한 그 정신은 우리 교회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한국교회뿐 아니라 이곳 언양 지방의 신앙 공동체를 낳게 하고 확산시키는 밑거름이 된 것이다. 이러한 언양 지방의 순교 선조들의 희생은 신앙의 자유를 가져오게 하였고, 이제 교회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맞게 되었다.
註; 1) [사학지의], p159 및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上, p559
이기경, [벽위편] 한국교회사 연구자료 제 9집 (서광사, 1978) p437
이상 [부산교구 30년사] p54에서 재인용
김옥희, "경남지방 천주교 전파와 동래 순교자", [교회와 역사] p4
3) 마백락,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대건출판사, 1989), p102
4)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下, 최석우, 안응렬, p184
5) [부산교구 30년사], p511
6) 해주 오씨 문중의 오탁근씨 증언
7) 해주 오씨 문중과 경주 김씨 문중의 구전에서 전함. 청취자 박만선
8) 유홍렬, [한국교회사] 上, 가톨릭출판사, p132
9) 이만채 편, [천주교전교박해사] (벽위편), 김시준 역, 국제고전교육협회,1984, p247
한편 정약용은 1801년 4월 8일에 이곳으로 귀양왔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자
1802년 12월 10일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지를 옮겼다.
10) 달레, 앞의 책 下, p291-292
11) 같은 책 下. p267-268
12) 을해박해 이후에 활성화되었던 간월공소의 상황은 경주 김씨의 문중 구전에서 전해진다.
13) 달레, 앞의 책 中, p167
14) 마백락, 앞의 책, p714
15) 샤스땅 신부는 1837년 1월에 조선에 입국하여 1839년 9월 2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할 때까지 주로 경상도 남부지방의 전교를 담당하였다.
16) 신나무골에 대해서는 한국교회사연구소의 [교회와역사] 103호( 년)에 실린 윤광선
(영남교회사 연구소장)의 "대구교회의 요람지, 신나무골"에 잘 나타나 있다.
17) 마백락, 앞의 책, p184
18) 달레, 앞의 책 中, p379
19) 윤광선, 같은 글 참조
20) 달레, 앞의 책 下, p291-192
21)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 p187
22) 같은 책, p243
23) 같은 책, p243-251
24) 증언자 경주 김씨 문중 김광식(김 아가다의 2대손), [부산선교 90년사], p61 참조
25) 김구정, [천주교 경남 발전사], p27
26)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2
27)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63
28)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번호 187
29) [부산교구 30년사], p91-92
30) 같은 책, p93
31) 같은 책, p105
32) 같은 책, p108
33) 병인박해 치명 명단 817-825번
34) 마백락, 앞의 책, p327
35) 박회장은 병인박해 때 밀양 양촌에서 탑곡으로 피신해 왔으며 병인박해 때 순교한 김종
륜(루까)의 집에서 거처하였다. 박회장은 박문선 신부의 증조부이다.
36) 마백락, 앞의 책, p352
37) 같은 책,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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