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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하나 스크랩 [아프리카] 뒤죽박죽 이집트 여행 8(수크 & 룩소르 신전 제1탑문과 오벨리스크)
┏☆뜀도령™☆┛ 추천 0 조회 118 08.01.22 14: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뒤죽박죽 이집트 여행 8(수크 & 룩소르 신전 제1탑문과 오벨리스크)

 

 카르나크 신전에서 벗어난 우리의 뱃속은 신호를 계속 보냈다. 모두들 배가 고픈 모양이다. 그런면에서 나는 아무때나 먹는 나쁜 습관의 덕분에 괜찮았지만 모두가 원하는 식사를 위해서 이동했다.

 

2007.12.30 17:50 Time Snack(패스트푸드점)

 

 룩소르 신전의 뒷편인 수크거리에 도착했다. 이 곳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먹을곳을 찾지 못하던 우리는 죽어도 맥도널드는 가기싫고해서 바로 옆에 있는 Time Snack이라는 패스트푸드점에 가게 되었다. 별기대를 하지않았는데 저렴한 가격에 꽤괜찮은 양으로 우리의 민생고를 가볍게 해결해주었으며, 발코니(?)에서 바라본 룩소르 신전과 도로의 모습을 즐기기엔 딱 좋은 곳이었다.

 

 

 

 시장입구다. 왠지 중국풍이란 느낌이 들었는데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살포시 웃는 모습을 보니 식사가 무난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런 표정 절대 나오지않는다. 코렐리 형

 

 뭐, 난 한끼 때웠으니 마냥 좋을수밖에...뒷 편엔 한국대학생들이 모여있었다.

 

 우리나라 피자맛보다 짜긴하지만 맛나게 먹었던...

 

2007.12.30 18:50 EL-SOUK

 

민생고를 해결한 우리는 다시 느긋하게 시장거리를 구경했다. 이 곳 시장은 현지인들을 상대하는 시장이라기보다는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류의 시장이어서 약간은 실망했지만 나의 에너지원인 맥주를 파는곳을 드디어 발견하게 된다.

 

 

 

2007.12.30 19:30 룩소르 신전(Luxor Temple)

 

 

"끝없는 모래사막 가운데 나일강이 푸른 띠를 그어놓은 듯하다. 나일강 주위로 우거진 나무들, 농경지, 현대적 호텔이 아름답다. 바자르는 늦은 밤까지 오색 불을 켜고 봄의 축제를 벌이고 있는 듯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고요한 강물 위로 미끄러지듯 떠다니는 펠루카, 그리고 카르낙 신전이 있는 곳이 고대 이집트의 수도 테베다"

이것은 필자가 룩소르에 대한 소감을 쓴 것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머가 그의 시집 「일리아드」9편에서 고대 이집트 최대도시 테베를 묘사한 구절이다. 호머가 본 그 당시의 테베와 오늘 필자가 보는 룩소르가 크게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테베란 말은 그리스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고 고대 이집트인들은 우아세트라고 했다. 이 말의 아라비아어 알 수르가 변음되어 룩소르로 불려진다. 

룩소르 신전은 제18대 왕조 아멘호텝 3세가 카르나크 대신전의 부속 신전으로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둘째 탑문(Pylon)에서 남쪽 부분 즉 행렬 통로 열주실, 아멘호텝 3세 안뜰과 대기둥실을 포함하여 지성소까지 건설했다. 그리고 투탕카문과 호렘 왕이 통로 열주실의 외벽을 쌓아 그 내부를 마감하고 행렬 통로 열주실의 기둥에 파라오와 아몬신을 찬양하는 상형문자를 새겼다. 그 후 람세스 2세가 여기에 덧붙여 첫째 탑문과 그의 안뜰을 건설하여 65m 폭에 260m 길이의 룩소르 신전을 완공했다. 그는 신전의 첫 관문인 첫째 탑문 앞에 자기 석상과 오벨리스크를 한 쌍씩 세웠다. 그 후 850년이 지나서 제30대 왕조 넥타네보 1세가 첫째 탑문에 연이어 넥타네보 광장과 카르나크 대 신전까지 3km의 '스핑크스 참배길'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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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출처]   이봉규「이집트 피라미드기행」 중에서 

 

  룩소르 신전 야경

 

 매표소다. 입장료가 인상된듯한...

 

 40L.E. 역시나 비싸다. 세.간.다에 나온 가격의 딱 2배다.

 

 측면에서 바라본 제1탑문 입구. 왼쪽은 오벨리스크 하단부와 기단이 있고 오른쪽에는 없어진 오벨리스크 기단부만 남아 있으며, 가운데 람세스 2세 석상과 석상 좌대에 연꽃과 파피루스꽃을 나일강의 두 하피 여신이 묶고 있는 부조다. 이것은 람세스 2세가 상,하 이집트를 통일했다는 뜻을 새긴것이란다.

 

 나 홀로 오벨리스크를 바라보면서 왠지 씁쓸해졌다. 내 나라것임에도 불구하고 돌려받지 못하는

국력을 생각하면 거시기해진다. 예전 프랑스에 갔을때 콩코드 광장에 우뚝  쏟아 있었던것이

이 곳에 있어야할 것임을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또한 람세스 2세신상 역시 4개 였으나 2개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제1탑문과 오벨리스크

 

람세스 2세가 신전 첫째 탑문과 안뜰을 건설했다. 65M 폭의 탑문은 오늘날 콘크리트 블록보다 3~4배 정도 큰 점토벽돌로 조적되었다. 그냥 구운 점토 블록 벽면 위에 부조그림이 양각되어 있는데 왼쪽 벽에 있는 부조는 이집트 군대와 지휘본부, 그리고 오른쪽 벽면에 있는 부조는 유명한 카데쉬 전투장면이다. 람세스 2세가 시리아를 원정하여 두 말이 끄는 전차 위에서 히타이트군을 무찌르는 파라오의 용감무쌍한 모습을 그렸다.

히타이트 인들은 기원 전 1900~1200년 지금의 터키 남부에 있는 아나톨리아 하투샤를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와 아시리아와 함께 중동 3대 제국의 하나로 그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피트 카니스 왕이 히타이트 왕국을 건설한 이후 아나톨리아 반도와 북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평원까지 세력을 확장한 오리엔트 최강국이었다.

기원전 1300년 경 히타이트군대는 이집트 람세스 2세와 지금의 시리아 중부 카데쉬에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일대의 패권을 놓고 전쟁에 돌입했는데 1차전에서 이집트가 대승을 거두었다. 람세스 2세는 나일강변 아비도스에 신전을 건설하고 벽면에 이 사실을 자세히 기록했다.

그러나 2차전(기원 전 1296년)에서는 히타이트군대가 역정보를 흘려 이집트를 대파한다. 이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람세스 2세는 잘못된 정보를 갖고 적을 공격하다가 완전 포위되어 큰 위기에 봉착한다. 그 때 태양신 '라'의 구언을 얻어 불세출의 리더십을 발휘해 마지막 승리를 얻는다. 이 전투가 끝나고 히타이트의 하트 실리스 3세와 이집트 람세스 2세 사이에 인류 최초로 평화 조약이 이루어진다.

탑문 앞에 람세스 2세의 15.5m 높이의 거대한 석상이 네메스 머리 수건에 상,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왕관을 쓰고 입구 양쪽에 앉아 있었다. 위의 붉은 왕관은 하 이집트를, 아래 흰 왕관은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데 두 개를 겹친 것은 상,하 이집트 통일 왕국을 의미한다. 람세스 2세의 석상은 몸과 얼굴에 상처가 심했다. 이 신전을 복원할 때 손을 보긴 하였지만 온 몸에 상처투성이고 오른쪽 석상의 얼굴은 전면이 부서져 누군지 구별할 수 없게 됐다. 19세기의 화가 데이비트 로버트가 이곳을 방문하고 그린 그림을 보면 모래가 복부까지 덮여 있었는데 석상 뒤판과 왕관에 심한 금이 갔고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파라오의 앞 이마에 있는 코브라는 왕을 수호하는 우아제트 여신의 상징인데 여신의 힘을 작용했는지 그것에는 아무 훼손이 없었다.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좌상 양쪽으로 작은 핑크색 입상 2개씩 4개가 탑문에 붙어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른쪽의 왕비 네페르타리의 석상만 온전하고 딸 메리트 아몬의 석상은 훼손이 심하다. 왼쪽 하나는 람세스 2세 아들의 석상인데 두상만 받침대 위에 얹어놓았고 다른 것은 빈자리다. 오벨리스 왼편 땅 바닥에 석상 파편들을 모아 놓았다. 그것은 탑문을 등지고 섰던 람세스 2세 아들 석상의 몸체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전의 방햐은 북쪽이다. 카르낙 신전을 바라보고 건설해서일것이다. 피라미드 장제전은 항상 동쪽을 향하고 있는데 카르낙 신전은 나일강을 바라보는 서향이고 룩소르 신전은 북쪽이다.

탑문 앞에 오벨리스크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는 고대 이집트 핫셉수트 여왕 이후 태양신앙의 상징으로 세운 기념비다. 그리스어로 작은 꼬챙이를 뜻하는 오벨리스코스에서 유래됐다. 하나의 거대한 석재로 만들며 단면은 사각형이고 위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며 끝은 피라미드 모양의 사각뿔이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이를  Tekhen이라 했는데 보호, 방어와 비슷한 뜻이다. 뾰족한 돌기궁으로 먹구름에 구멍을 내어 언제 신전 위로 비바람을 몰고 올지 모르는 악의 세력들을 물리치는 것이다. 정사각 기단 위에 정 사각 탑신이 위로 갈수록 조금씩 작아지다 정점에서 사각추로 끝맺고 그 꼭지에 베누새를 얹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솟대 위에 난 새를 얹어 사람의 뜻을 하늘에 하늘의 뜻을 인간 세상에 전하도록 한 것과 꼭 같다.

탑신은 중앙부를 엔타시스로 물갈기했고 거기에 상형문자로된 명문을 음각했는데 태양신을 찬송하고 왕을 찬양하며 전승을 축하하는 내용이다.

이 오벨리스크는 B.C. 16세기 핫셉수트 여왕이 창안한 이후 왕권을 상징하고 마법적인 수호신으로 신성시 되었으며 그 후에는 하나의 예술품으로 발전되었다. 단순명쾌하고 직관적이며 철학적 비례의 조화를 가미했다. 람세스 2세 석상 앞에는 원래 25m 높이의 오벨리스크 둘이 서 있었다. 오벨리스크는 둘씩 짝을 지어야 마법의 힘을 발휘하여 신전을 보호한다. 그런데 지금의 왼쪽의 것 하나 뿐이다. 오벨리스크 사방 표면엔 선명한 상형문자가 깊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금으로 덮인 각추부는 세상의 첫 아침에 태초의 바다 위로 솟아오른 태양신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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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오벨리스크는 프랑스 파리로 옮겨가 콩코드광장 가운데 세워져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공군을 편성하고 배에 막 오르려 하는데 부인 조세핀이 "당신이 이집트에서 개선하고 돌아올 때 조그마한 오벨리스크 하나를 선물로 가져오세요."하고 부탁했다. 그러나 장군은 아내의 요구를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넬슨 제독에게 알렉산드리아 동쪽의 아브키르 해전에서 독특히 당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수도 파리 한복판에 오벨리스크를 세우는 것은 나폴레옹의 소원이었고 나라의 명예를 생각해 그 후 이집트와 물밑 교섭이 이루어졌다. 교섭 당사자는 참 우습게도 상형문자를 해독한 쟝 프랑솨 샹폴리옹이었다. 그는 언어학자이면서 나폴레옹과는 개인적으로 각별한 사이였다. 이 때문에 정치적 압박을 받아 일찍이 수명을 다했는지 모른다. 그는 나폴레옹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함인지 영락없이 훼손되어가는 4000여년 전의 걸작품을 보호하려 함인지 알 수 없으나 격에 맞지않게 사업가로 변신하여 파샤 알리와 흥정을 했다. 그는 당시로는 거금인 30만 프랑에 프랑스 왕 루이 필립에게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오벨리스크를 파리에 보내기로 알리의 약속을 받아냈다.그런데 이를 눈치 챈 영국 찰스 10세가 보낸 테일러 남작이 알렉산드리아에 상륙하여 오벨리스크를 가로채는 협상에 들어갔다. 이에 프랑스는 알리가 보내주기로 한 약속을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이집트에 투자한 경험이 있는 건축 기술자 쟝 바티스트 아폴리네르 레바를 급히 프랑스로 보내 프랑스로 오벨리스크를 운송하는 책임을 맡겼다. 지금 파리 콩코드 광장 한 가운데 서 있는 오벨리스크는 죠세핀이 말한 '조그마한'것이기는 커녕 엄청난 크기다.

이 오벨리스크가 나일강을 내려와 지중해를 건너 파리까지 오는데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는지 그 사연이 지금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 기단에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건축기술자 레바가 이 오벨리스크를 운반하기 위해 특수 선박 룩소르 호를 건조해서 1831년 4월에 툴룽을 떠났다. 그 값비싼 화물을 싣고 이집트를 떠나 40일 뒤 툴룽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셰르부르를 거쳐 파리에 도착한 것은 1833년 12월 말이었다. 그는 설계와 시공까지 맡아 3년 뒤 1836년 10월 25일에 콩코드 광장 한 가운데 이를 반듯하게 세웠는데 오벨리스크를 구경하러 콩코드 광장에 운집한 200만 파리쟌을 경탄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오벨리스크는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건조물이된 것이다.

한 나라를 통치하는  파샤도 3,300년 전의 문화재를 외국에 선물로 주는 정도일진데 일반 주민들이야 문화재라는 관념이 있을 리 없다. 오벨리스크를 주고 프랑스 왕으로부터 답례로 받은 시계는 현재 카이로 동쪽 시타델의 성채 안에 이쓴 알리 모스크 경내에 설치되어 있으나 고장난지 오래다.

 

[펌 출처]   이봉규「이집트 피라미드기행」 중에서 

 

[룩소르 신전 열주회랑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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