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25)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0구간 (상주보→낙단보) ① [상주보-죽암리-중동교-낙단보]
2020년 10월 17일 (토요일) [독보(獨步) 21km]▶ 백파
☐ [상주보]→ (중동) 강변축구장→죽암리→ 간상리→ (신암리)→ 중동교(도강)→물량리→ [낙단보]
* [상주]→ 도남면 [상주보](10:00) (상주시 중동면 오상리)→ 중동 강변축구장→ 강창나루 공원-[강창교]→ 죽암리 직선 제방길→ 간상리→ 신암리(59번 국도)→ 중동교(도강)→ 낙동면 물량리→ 직선의 제방길→ 산을 넘고→ 30번 고속도로(당진-상주-영덕) 교각→ 낙동강역사이야기관→ 낙단보 수상레저센터→ [낙단보]→ 낙동(면)→ [상주]
* [상주 병성동(-승천원)] ←서쪽에서 병성천 ←북천 합류(내서면, 외남면→ 상주 경유) * 북천 [흥암서원]
* [상주 중동면 우물리] ←동쪽에서 위천 ←쌍계천 합류(군위-위천 팔공산 / 의성-남대천) * [인각사] * [김수환 추기경 생가]
상주보에서 강창교까지
☆… 낙동강 상주보(尙州湺)는 상주시 도남동과 중동면 오상리 사이에 건설된 낙동강 보(湺)이다. 오늘의 트레킹은 낙동강의 서안의 도남동에서 상주보를 건너, 중동면 오상리에서 낙동강 동로(東路)의 강둑을 따라서 걷는다. 낙동강을 오른쪽에 두고 걷는 길, 강안은 너른 둔치로 이루어져 있어 강물은 멀리서 흐른다. 바이크로드는 자동차가 다닐 정도로 너르다. 상주보에서 강창교까지는 3.4km, 동쪽(왼쪽)은 너른 들판이고 오른쪽은 강의 둔치, 수변공원이다. 거기에 중동강변축구장도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강 건너편(상주시 성동리)에는 병풍산(366m)이 강안을 따라 이어져 있다.
상주의 병성천과 북천
그런데 시야에 들어오지는 않으나, 강 건너편 상주보 아래(병성동)에서 병성천이 낙동강에 유입된다. 병성천은 상주의 남서쪽, 공성(면) 영오리 백두대간 산록에서 발원하여 상주로 흘러드는데, 상주시 복룡동에서 북천(北川)과 합류하여 동쪽으로 낙동강에 유입된다. 북천은 상주시 서쪽에서 남으로 뻗어내리는 백두대간 산봉산-무지개산-안심산-백학산 산곡에서 발원한 여러 갈래의 물줄기가 상주시 내서면 신촌에서 합류하여 동쪽으로 흘러 상주 시내의 중심을 관통하여 복룡동에서 병성천에 합류한다. 그러므로 상주시의 중심 시가지는 북천과 병성천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다. 경북선(상주역-옥산역) 철도와 3번 국도가 병성천 유역을 따라 이어지고, 상주에서 내서-화령-보은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가 북천을 따라 이어진다.
상주 흥암서원
☆… 흥암서원(興巖書院)은 영남 지역에 있는 ‘기호 학맥’의 중심 서원이다. 상주시 연원동 769번지(연원1길 34)에 있다. 상주시의 서쪽 상주 내서-화령-충북 보은으로 통하는 25번 국도 북천 앞에 위치해 있다.
☆… 낙동강 도남서원(道南書院)이 퇴계학을 중심으로 한 영남(嶺南) 사림의 중심서원이라고 한다면, 상주의 흥암서원(興巖書院)은 영남지역에 있는 기호(畿湖) 학맥을 잇는 대표적인 서원이다. 1702년(숙종 28) 기호학파 송준길(宋浚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그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상주(尙州)는 역사적으로 경상북도 북서부의 중심 도시였다. 전형적인 농촌 기반의 도시이지만 요즘은 대구, 대전, 청주 등은 1시간 정도면 오갈 수 있는 사통팔달 교통의 요지이다. 상주의 대부분은 낙동강(洛東江) 수계에 속하지만, 백두대간의 화령 서쪽 지역은 금강(錦江) 수계이며 화북면 일부는 한강(漢江) 수계로 들어간다. 속리산 정상 천왕봉이 그 삼수봉(三水峰, 세 곳으로 물길이 갈라지는 정점)이다. 이곳 상주시 연원동 고즈넉한 마을에 영남지역의 기호 학맥을 이어온 흥암서원(興巖書院)이 있다. 흥암서원 앞으로 흐르는 북천은 상주시 복룡동에서 병성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된다.
흥암서원(興巖書院)은 숙종 42년(1718년)에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숙종 시대 퇴계학의 주류 지역인 상주에, 기호 학맥의 잇는 송준길을 배향하는 서원이 설립된 것은, 무엇보다 서원에 배향된 동춘당 송준길(宋浚吉)이 상주의 대학자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 들어와 공부하였고 또 그의 사위가 되었으므로 학문적인 친밀한 관계와 개인적인 삶을 통하여 상주지역에 그 문명이 널리 알려진 내력도 있다.
고려 말에 송나라의 정주학(程朱學)이 들어오고, 유교를 건국이념으로 한 조선조 건국과 더불어 유교적 학풍이 적극적으로 장려되면서 조선은 유교의 학술문화가 발전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전후하여 많은 역경을 거쳤던 유학자들은 정치사회의 현실에 참여하는 처지에서만 아니라 산림에 은거하여 학문과 지조를 돈독히 하며 후학을 지도하는 일에 큰 가치를 두기 시작했다.
당대 기호 학맥의 중심인물은 이이(李珥)·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세 사람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영남학파와 쌍벽을 이루며 강학을 펼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 흥암서원(興巖書院)이다. 송준길(1606~1672)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뛰어난 학문과 바른 행실로 추천을 받아 관직에 올랐으며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가르침을 받은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에 밝았던 인물이었다.
서원의 강당은 ‘진수당(進修堂)’, 강당의 후면에 좌우로 동재인 ‘의인재(義仁齋)’와 서재인 ‘집의재(集義齋)’가 있다. 서원의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와는 그 배치가 다르다. 유생들의 숙소로 사용되던 의인재 뒤편에 집의재가 있다. 강당의 후원에 내삼문(內三門), 그 안에 흥암사(興巖祠)가 있다. 마당을 지나 걸어가면 어필비각(御筆碑閣)이 있다. 1716년 숙종이 직접 써서 내린 '興巖書院' 어필비(御筆碑)를 보관하기 위한 누각이다.
☆… 사당 '흥암사(興巖祠)'는 송준길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곳으로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경북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원군 철폐령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훗날, 험난한 일을 당하기도 했다. 한때는 흥암서원이 상주고등학교 교실로 사용되기도 하고, 6.25 사변 때는 인민군이 군용 건물로 사용했다고도 한다. 서원의 장판각인 활자목을 불 때는 데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현판들은 사정사정해서 태우지 않고 보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송준길(宋浚吉)
송준길(宋浚吉, 1606년 12월 28일~1672년 12월 2일)은 조선시대 후기의 문신·성리학자·정치가로서 송이창, 김장생, 정경세, 김집의 문인으로, 조선 유교 주자학(朱子學)의 대가(大家)였다. 사헌부 대사헌을 지냈으며,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시호는 ‘문정공’이다.
송준길(宋浚吉)은 1606년(선조 39) 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과 어머니 광산 김씨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한성부 정릉동(서울 정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정릉, 외가인 김은휘의 집(정동댁)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金長生)·신독재 김집(金集) 부자가 태어난 곳으로, 송준길의 출생까지 합쳐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9세에 아버지 송이창(宋爾昌, 1561년∼1627년)의 지도를 받아 유학에 입문하고 공자, 주자, 율곡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11세가 되던 해에 송이창의 외사촌 아우인 송갑조의 아들 송시열이, 송이창의 문하가 되어 한 집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하였고, 18세 때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이이, 성혼, 송익필의 문인(門人)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송시열의 조부와 송준길의 조부는 광주 이씨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다. 그래서 송시열과 송준길은 가계 상 13촌이지만 진외가 쪽으로는 6촌 재종간이다. 송시열은, 나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13촌숙(寸叔)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春兄)’이라 불렀다. 송준길은 우암 송시열과 함께 문명이 널리 알려지면서 ‘양송(兩宋)’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송준길은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아주 총명하고, 특히 글씨를 잘 썼다. 사람을 매혹시키는 재주 등을 두루 갖췄으므로 스승 김장생은 일찍이 그가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1624년(인조 3)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김장생과 김집의 문하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인조 때 학행으로 천거되었으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보고, 소현세자 사후에는 세자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인조의 눈밖에 났다.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송시열과 함께 김장생의 아들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때 윤선거(尹宣擧) 등을 만났으며, 남인계 선비들과도 두루 사귀어 윤휴, 윤선도(尹善道) 등과 만나 토론, 담론하며 교분을 쌓았다.
송준길은 노론·소론이 분당되기 전에 사망하였으나 사실상 그가 이끌던 문인들은 그의 사후 노론을 형성하였다.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을 주장하였으며, 제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과 함께 주자의 성리학과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 때 기년복 설을 주장하였다.
1649년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원두표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그들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조선이 청나라의 압력을 받자, 그도 사퇴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658년(효종 9년) 사헌부 대사헌·이조참판 겸 성균관 좨주를 거쳤다. 이후 그는 학문을 가르쳤고, 그의 문하에서 민유중, 황세정, 남구만 등을 배출했다. 제자 중 눈 여겨 본 민유중를 사위로 삼았고, 후에 이들 사이에서 인현왕후 민씨와 민진원, 민진후가 태어난다. 민유중의 둘째 딸이 왕비(인현왕후)로 낙점된 것이다. 그 뒤 벼슬길에 여러 차례 천거되었으나 그때마다 번번이 사퇴하였다.
그 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 김수항과 함께 서인 논객으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서인 온건파를 이끌며 남인에 대한 강경 처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윤선도의 상소 이후 한때 윤선도의 구명운동을 펴기도 했다. 당색은 서인(西人)으로, 율곡 이이(李珥)를 사숙하였고, 김장생, 김집의 문하생이며, 남인학자 정경세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그를 사표(師表)로 받들었다. 우목 정경세는 영남의 유학자 중에서도 예학의 대가로 알려진 인물로, 퇴계 이황의 제자인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다. 송준길(宋浚吉)은 우복 정경세의 사위이며, 인현왕후의 생부인 민유중은 송준길의 사위이다. 처수(계배(繼配)의 처남댁)는 이의활의 딸로, 이언적의 증손녀다. 남인의 영수 허적과는 먼 인척간이며, 고종의 명성황후에게는 7대 외조부가 된다.
1672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66세. 송준길은 '터럭 한올이라도 틀리면 내가 아니다'라며 평생 초상화를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어록해 語錄解』 『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 등이 있다.
죽암리 제방 … 그리고 중동교
☆… 강 건너 상주의 흥암서원을 생각하면서 걷는 길은 중동면 죽암리 제방 바이크로드. 강안의 강창나루 공원에 이어 강창교를 지났다. 그리고 계속 강변길이 이어진다. 강창교에서 3.1km 지점에서 제방길을 벗어나, 좌측의 산록의 밭길을 따라 들어가 야산을 넘는다. 거기 중동면 간상리 마을 앞 들판에서 우회전하여 신암리 59번 도로에 이른다. 낙동강에서 한참 들어온 지역이다. 이곳 59번 국도(‘상주다인로’)에서 상주 낙동(면) 방향으로 우회전하여 낙동강 중동교를 건넌다.
위 천
☆… 중동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의 제방 길 바이크로드로 들어가 강안을 따라 걷는다. 이제 낙동강은 좌측에서 흐른다. 강안의 둔치가 있어, 강물이 동쪽의 강안을 따라 흐르는데, 낙도강 건너편 강안에 위천이 유입된다.
위천은, 동쪽의 낙동정맥과 낙동정맥 주왕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려온 팔공산 지맥의 모든 산곡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의성군 비안면 장춘리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에 유입된다. 위천은 군위(軍威)에서 내려오는 위천에 의성(義城)에서 내려오는 쌍계천이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유입되는 지천이다.
위천의 본류는 군위군 고로면 학암리 팔공지맥 아미산에서 발원하여 군위호-고로(면)를 거쳐서 의흥-우보를 경유하여 효령면 병수리에서 남천과 합류한다. 남천은 팔공산(1,192m)부계 동산리 산곡과 가산(903m)의 산곡에서 각각 발원하여 내려오는 물줄기가, 효령면 장기리에 합류하여 내리다가 효령면 병수리에서 위천에 합류한다. 이 위천은 군위(읍)을 경유하여 내려오는 구절양장의 물길인데,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쌍계천과 합류한다. 쌍계천은 의성군 춘산면 금오리 팔공지맥 어봉산 산곡에서 발원하여, 가음(면)-금성(면)을 거쳐 흘러내리는 물줄기인데, 의성군 사곡면 공정리 낙동정맥 산곡에서 발원하여, 의성(읍)을 경
유 내려온 남대천이 의성군 봉양면 구산리 금산서원 앞에서 쌍계천에 합류한다.
[군위(軍威)] — 인각사, 일연대사 그리고『삼국유사(三國遺事)』
☆… 위천의 강역은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의성군과 군위군의 생활의 터전이요, 전통문화가 발달한 고장이다. 특히 위천의 군위(軍威)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고장이다. 고려시대 초기 일연(一然) 스님이 군위의 인각사(麟角寺)사에서 『삼국유사』를 간행한 것이다. 인각사는 군위군 고로면 아미산의 산중호수 ‘군위호’에서 흘러내려온 위천의 강안에 자리하고 있다.
인각사(麟角寺), 삼국유사의 산실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팔공산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 절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속전(俗傳)에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하였다고 한다.경북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613-
그 뒤 1307년(충렬왕 33)에 일연(一然 : 普覺國師)이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당시 이 절은 크고 높은 본당(本堂)을 중심으로 하여 그 앞에 탑, 좌측에는 회랑, 우측에는 이선당(以善堂) 등이 있었고, 본당 뒤에 무무당(無無堂)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과 2동의 요사채 뿐이다. 중요문화재로는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인각사보각국사탑과 비(麟角寺普覺國師塔─碑)가 있다. 이 탑비는 1153년(의종 7)에서 1155년 사이에 사승(寺僧) 죽허(竹虛)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병화로 글자의 훼손이 심하여 알아보기 어렵다. 그 밖에도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정조탑(靜照塔) 앞에는 높이 1.5m의 석불이 있으며, 절 앞에 만월당(滿月堂)과 청진당(淸眞堂)의 석종형 부도가 있다
1)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일연(一然)은 고려시대의 뛰어난 학승(學僧)이자 선승(禪僧)이다. 1206년(고려 희종 2)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까지 살다간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경주 인근 장산군(章山郡, 현 경상북도 경산시) 삼성산(三聖山) 아래에서 출생하였으며, 속명은 김견명(金見明), 자는 회연(晦然),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일연이 살다간 시대는 최충헌과 최우가 집권하던 무신정권기에서 몽골과의 긴 전쟁 끝에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던 시기에 걸친 때로, 국내외 정세 변동이 급격했던 시기였다.
몽골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232년에는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 중이던 ‘초조대장경판’이 전소되어 이후 재조대장경 판각사업을 실시되기도 하였다. 불교계 내부적으로는 무신정변 이후 선종(禪宗)을 중심으로 교단이 꾸려지고 결사운동이 활발한 시기이기도 하였다. 일연은 화두를 중심으로 참선하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자로서의 면모와, 대장경 판각사업에 참여하고 각종 저술을 편찬하는 학승(學僧)의 모습을 두루 갖춘 걸출한 승려로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특히 그가 남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오늘날까지 소중한 고대사 자료로 중시되고 있다.
2) 일연(一然)의 활동과 저술
9살 때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한 일연은 여러 절들을 유력하며 수행하였는데, 교단 내에서 구산문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라 할 정도로 뛰어난 자질을 보인다. 22세에 응시한 승과(僧科)에서 장원에 해당하는 상상과(上上科)로 급제하였다. 이후 승계는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에 이르고 78세에 국존(國尊)으로 책봉되며 입적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다.
일연은 84세에 인각사(麟角寺)에서 입적하였다. 이에 충렬왕은 보각(普覺)의 시호와, 정조(靜照)라는 탑명을 내렸으며 인각사에 그 부도와 비가 건립되었다. 일연이 비는 중국의 명필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모아 새긴 집자비(集字碑)였는데, 후대 사람들이 그 글씨를 얻기 위해 탁본을 많이 하면서 비신의 결락과 훼손이 심하다. 그러나 탁본이 많은 만큼 비문 전체의 내용을 재구성하여 알 수 있다.
일연은 특히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화록(話錄)』 『게송잡저(偈頌雜著)』 『조파도(祖派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乘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염송사원(禪門拈頌事苑)』등이 그것이다. 이 중 현존하는 것은 『삼국유사』와 『중편조동오위』 뿐이다. [사진] 일연스님 [사진]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一然)의 『삼국유사』는 한 마디로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지금까지 전하는 수많은 책 중 가장 연구 성과가 많은 자료 중 하나이다. 『삼국유사』와 관련된 많은 관심의 결과 관련 연구가 2천 건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다양한 성과가 축적되어 왔다. 애초에 찬자가 일연이 맞는가부터 논란이 있었는데, 현재는 일연이 이 책의 저술을 위하여 일찍부터 자료를 모았으며, 본격적인 집필은 70대 후반의 만년에 이루어졌다는 데에는 대체로 동의하고 있다.
현존하는 『삼국유사』의 판본은 시기적으로 1394년경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선초본(鮮初本)과 1512(중종 7) 경주에서 중간(重刊)된 본으로 크게 대별되며, 그 소장처에 따라 선초본 6종, 중간본 11종 정도가 알려져 있다.
선초본은 모두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한 두 편만 남은 잔본의 형태로 전하고 있으며, 중종 연간에 중간된 본과 대비하여 일명 ‘고판본(古版本)’이라 칭하고 있다. 중종 연간에 중간된 본은 이른바 ‘정덕본(正德本)’으로 불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하며, 여러 종이 완질로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고려대, 일본 천리대(天理大) 등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다.
한편 천리대 소장본은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의 수기가 남아있다 하여 일명 ‘순암수택본(順菴手澤本)’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1916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경성의 한 서점에서 구한 것을 후에 텐리대에 기증한 것이다. 이 본은 낙장 없이 전 5권이 모두 갖추어진 완질본으로, 무라카미 요시오(村上四男)는 이를 ‘이마니시본(今西本)’으로 명명하고 현존하는 최고(最古) · 최선본(最善本)으로 평가하였으나, 이 본은 후대에 가필과 윤필(潤筆)이 된 개악본(改惡本)이라는 평이 제기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미 교감의 저본으로 널리 사용되어 왔다.
『삼국유사』의 체재는, 고판본의 경우 완질을 갖춘 경우가 없으나 정덕본이 낙장 없는 완질로 남아있어 그 체재를 알 수 있다.(5권 9편) 권과 별도로 왕력(王歷) · 기이(紀異) · 흥법(興法) · 탑상(塔像) · 의해(義解) · 신주(神呪) · 감통(感通) · 피은(避隱) · 효선(孝善)의 편목을 갖추고 있다.
〈왕력(王歷)〉은 삼국 · 가락국 · 후고구려 · 후백제 등의 연표이다. 〈기이(紀異)〉는 고조선~후삼국의 역사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와 같은 사서에 누락된 신이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흥법(興法)〉은 우리나라의 불교 수용과 전개에 대한 내용, 〈탑상(塔像)〉은 탑과 불상에 관한 내용, 〈의해(義解)〉는 주로 신라의 고승들과 관련된 내용, 〈신주(神呪)〉는 신라의 신이한 승려들에 대한 내용, 〈감통(感通)〉은 불교와 관련된 감응의 내용, 〈피은(避隱)〉은 초탈고일(超脫高逸)한 인물의 행적과 관련한 내용, 〈효선(孝善)〉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불교적인 미담 등을 수록하였다.
『삼국유사』의 찬자(撰者)와 관련된 기록은 권 5의 처음에 나오는 문구를 통해 알 수 있다. “국존 조계종 가지산 아래 인각사의 주지 원경충조대선사 일연이 찬하다.(國尊 曹溪宗 迦智山下 麟角寺 住持 圓鏡冲照大禪師 一然 撰)”—『三國遺事』卷5
『삼국유사』는 한국 고대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료로, 고대의 역사, 지리, 문학, 종교, 민속, 사상, 언어, 미술, 고고학 등과 관련하여 총체적 문화유산의 보고라 평가할 수 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삼국유사』는 기존 역사책에서 누락된 것들을 수록하고 있다.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다수 포함하나 순수한 불교사서로만 보기는 힘들며, 신이한 내용을 다수 포함하고 있으나 설화집이라고 볼 수도 없다. 『삼국유사』는 “古朝鮮[王儉朝鮮]”으로부터 시작한다. 국조 단군의 건국이야기다.
신이하거나 신앙과 관련된 내용 때문에 그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하나, 『삼국유사』의 특성상 내용의 전거를 밝혀 인용하는 역사 서술 방식을 보이고 있어 자료 자체를 부정하기도 힘들다. 특히 『삼국사기』 등이 반영하지 않은 고기(古記) 내용을 그대로 싣고 있고, 그 원전사료들은 현재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가치 있게 여겨진다.
특히 불교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태도는 기존 사서들과 달리 불교사관(佛敎史觀)을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삼국유사』속 향가(鄕歌)나 이두 표기가 우리나라 고대어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기도 하다. 아울러, 최초로 단군신화를 수록하여 우리의 국조(國祖)가 단군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이는 민족사의 자주성을 견지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불교를 중심으로 우리 역사를 엮어낸 승려 일연(一然)」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 한국의 위대한 인물) 참조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
☆…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145년 인종의 명령에 따라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8명의 사관들과 함께 저술하였다. 신라·고구려·백제 삼국 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의 체제는 중국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전체(紀傳體) 형식을 이용하여〈본기〉28권,〈연표〉3권,〈지2)〉9권,〈열전3)〉10권 등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기〉에는 고구려·백제·신라의 정치, 천재지변, 전쟁, 외교 등에 대한 내용이 차례로 담았다. 단군신화가 없고.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먼저 건국되었다고 쓰고 있다. (사실, 삼국 중 신라가 가장 나중에 건국되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김부식은 대대로 높은 관직을 차지한 막강한 문벌 귀족으로, 평양에서 봉기한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했다. 신라를 삼국의 중심에 놓고 유교적 입장에서 서술했다.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일연(一然, 1206~1289)이라는 개인이 쓴 것이다. 단군의 고조선건국이야기[檀君神話]를 시작으로 우리 주체의식을 가지고 집필한 것이다. 〈왕력편〉에서 가락국, 후삼국에 대해 쓰고 있는데, 이 중 〈가락국기〉는 가야에 대한 유일한 기록이다. 특히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속·신앙·노래·설화·생활·전설 등과 고구려·백제의 비문들·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절이나 탑에 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자료의 과학적 객관성이 결여되었다는 지적을 받지만, 당시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향가(鄕歌) 14수는 역사적, 문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
☆… 빙계서원은 명종 11년(1556년) 김안국(金安國), 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웠다. 본래 장천 위에 세웠다. 선조 9년(1576년) 장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선조 33년(1600년)에 학동 이광준이 춘산면 빙계리 빙산 사구터에 이건하면서 빙계서원(氷溪書院)으로 개칭하였다.
서원은 전학후묘의 배치로 동재 학이재(學而齋), 서재 시습재(時習齋) 신문, 사당 숭덕사(崇德祀), 강당 명교당(明敎堂), 빙월루(氷月樓), 전사청(典祀廳), 주소(㕏所, 주방)의 건물이 있었는데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5년(1868년)에 철거되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았다가 지역 유림의 공의를 모아 2006년에 복원하였다.
아, 김수환(金壽煥) 추기경
☆… 위천으로 유입되는, 군위읍에서 2.8km 떨어진 용대리 신안천 앞 언덕에, 김수환 추기경이 유-소년시절 살았던 생가(生家)가 있다. 군위군에서는 그곳을 테마공원으로 조성하고, 지역의 유서 깊은 유적지로 가꾸고 있다. 군위군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이 어린 시절을 보낸 실질적 고향으로서 생가를 복원하여 '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 공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추기경의 정신적 유산을 잘 이어나갈 수 있도록 다양한 기념사업 등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홍보한다.
낙동강에 유입되는 군위의 위천은, 역사적으로나 나 개인적으로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군위는 우리 민족사의 귀한 보물인 삼국유사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또 20세기 한국현대사의 격동기에 만인의 사표가 된 김수한 추기경이 지독한 가난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은 나에게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이므로 더욱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
☆… 나는 1979년 계성여자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계성’은 바로 명동대성당 영역 안에 있는 학교이고, 당시 계성여고 재단 이사장이 김수환 추기경이었다. … 1982년 9월 8일, 추기경님이 집전하신 학교개교기념 특별미사 때, 나는 추기경님에게 세례를 받았다. 내 이마에 두 손을 얹으시고 나 ‘스테파노’(나의 세례명)를 축도해 주셨다. 스테파노는 추기경님의 영명(靈名)이기도 했다. 그때 영세미사 강론 때의 말씀, “하느님은 여러분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 ‘하느님의 꿈’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십시오!” … ‘하느님의 꿈’,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 언제나 마음속에 살아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일 년 뒤에 추기경님으로부터 견진성사도 받았다.
☆… 이후, 나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을 마음의 큰 스승으로 모시고 교직 생활을 했다. 특별한 은혜가 아닐 수 없다. 추기경님은 평소 주석하시는 주교관이 학교와 연해 있어 학교 교정이나 성당 주위를 자주 산책 하시고, 학교의 특별한 행사나 명동대성당 미사에서 자주 뵈면서 지냈다. 늘 온화하신 표정에 은은한 미소, 따뜻한 손길, 말씀은 부드러우나 거역할 수 없는 경건함을 지니고 있었다. …
¶ 47세 때 세계 최연소이자 동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추기경에 임명된 김수환 추기경은 평생을 두고 “사랑하라, 용서하라!”는 말씀을 스스로 실천하신 성자의 길을 걸었고, 특히 ‘민주화 운동’에는 정의와 용기로 대처하여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지학순 주교가 연루되어 경찰에 구금되었을 때, 추기경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고 면담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1980년 12·12사태 때는 실권자 전두환 소장이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인사 차 찾아오자 “서부 활극을 보니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이 정권의 뿌리는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 총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면전에서 직언을 했다.
1987년 6월 학생들이 군부정권 체제를 반대하며 거리에서 데모하다 경찰에 쫓기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을 때, 그들을 품어안고, 학생 데모대를 연행하려고 찾아온 경찰 간부들에게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밟고 넘어 가시오. 다음에는 신부를 넘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수녀들을 밟아 넘어야 합니다!”면서 단호하게 대응하여 학생 연행을 막은 일도 있었다.
2009년 2월 16일 선종(善終)하시자, 추모 행렬이 명동성당부터 삼일로, 퇴계로 4가, 명동역, 명동역 골목을 잇는 3㎞가 넘는 행렬을 이루었고, 3~4초간의 조문을 위해 평균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1990년 김수환 추기경은 장기 기증에 서약했는데, 2009년 선종 후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고 이를 접수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약력]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2월 1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할아버지(김보현)은 1866년 천주교 병인박해 때 논산군 연산에서 순교(殉敎)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김영식)는 유복자로 태어나서 어릴 때 박해를 피해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1895년 경상도 칠곡군 장자골 옹기굴 신자촌에 정착하고 어머니(서중하)와 혼인을 했다. 부부는 8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 김동환과 막내 김수환이 천주교 성직자가 되었다.
나이 네 살 때 가족이 모두 군위(軍威)로 이주했다. 김수환 어린이는 군위보통학교 1학년 때 병석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 어머니 서중하 여사는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다. 김수환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었다. 돈을 벌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머니의 깊은 신앙심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군위보통학교 5학년 때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여, 소년 김수환은 성유스티노신학교 부설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졸업 후 성유스티노신학교를 거쳐 서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청년 김수환은 천주교 장학생으로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1944년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 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김수환은 상지대학에 복학했고, 1946년 12월에 귀국하여 서울 성심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했다.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김수환 신부는 대구 대교구 안동천주교회 주임신부가 되었으며, 1955년 대구 대교구 김천황금성당 주임신부 겸 성의중학교와 성의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56년 7월 독일 뮌스터대학교에 유학,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주간 『가톨릭시보』사장에 취임했다.
1966년 마산 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 29일 김수환 주교(主敎)가 되었다.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大主敎)가 되었다. 1969년 김수환 대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樞機卿)이 되었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시노두스] 한국 대표를 지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을 은퇴하였다.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의 어린 시절, 군위의 생가(生家)
☆… 약력(略歷)에 의하면, 군위(軍威)는 김수환 추기경이 1925년 네 살 때, 군위의 용대리의 ‘옹기골’로 이사하여 대구로 다시 이사하기까지 6년 동안 살았다. 군위보통학교 1학년 때 병환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후 혼자서 옹기를 구워 팔아서 가난한 생계를 꾸리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최근에 이충렬이 펴낸 『아, 김수환 추기경·1』에 나온 저간의 어려운 사정을, 1인칭 화법으로 정리해 본다.
… “(내가) 세 살 때, 큰아버지가 장사를 하다가 파산을 했다. 빚보증을 섰던 부모님과 누나네는 옹기전과 초가집을 빼앗겼다. 큰집은 만주로 야반도주했고, 부모님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구미 부근 선산으로 떠났다. ― 아버지는 상심이 컸고 해수병이 깊어졌다. 이때 큰 형은 돈을 벌겠다며 일본으로 떠났고, 둘째형은 옹기 일을 배우러 큰 누나네가 있는 신나무골로 갔다. 선산에서의 생활은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옹기를 이고 장터를 다니셨다. 때로는 장터 구석에서 국화빵을 구웠다. 그러나 어머니가 버는 걸로는 네 식구의 입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때 큰 누나네가, 옹기가마가 있고 천주교 신자들이 제법 살고 있는 ‘군위군 용대리’로 이사를 갔다. 우리 가족도 따라갔다. 내가 네 살 때였다”(김수환,「어머니, 우리 어머니」《샘이 깊은 물》, 1985.11월 창간호) 참조
군위에서 뮤지컬로 살아나는 고 김수환 추기경
☆… 2020년 11월 21일 경북 군위군 삼국유사교육문화회관에서 고 (故) 김수환 추기경(1922~2009년)의 사랑과 나눔정신을 조명한 창작 뮤지컬「밥처럼 옹기처럼」이 공연되었다. 매일신문 주최, 군위군·경상북도 후원으로 마련된 공연은 2회(오후 2시, 5시) 모두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좌석 간 거리 두기와 철저한 방역을 통해 진행됐다. … 이날 공연에는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조환길 천주교대구대교구장, 이상택 매일신문 사장, 김영만 군위군수, 류규하 대구 중구청장, 심칠 군위군의회 의장과 군의원, 우동기 전 대구시교육감 등이 함께 했다.
뮤지컬「밥처럼 옹기처럼」은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 서서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고 ‘서로 밥이 되어주라’며 사랑을 몸소 실천한 김수환 추기경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작품이었다.
특히 올해 공연은 2019년 지난해 초연(初演)에 비해 한국사의 격동기에 종교를 넘어 사회의 큰어른으로서 약자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추기경의 모습을 잘 살려냈다는 평을 받았다. 관람객 박종국(칠곡군) 씨는 "그늘진 곳에서 빛이 되어준 추기경님의 생애를 뮤지컬로 만나 감동이 더했다"며 "오늘따라 그 분이 더욱 그립다"고 소감을 전했다. —「매일신문」(2020.11.22.)
낙동면 물량리 제방 길
☆… 59번 국도의 중동교를 건너자마자 좌측의 제방(낙동면 물량리)을 따라 걷는다. 건너편, 동쪽의 강안에서 위천을 받아들인 낙동강은 그 방향을 정남(正南)으로 향하여 흐른다. 그러나 낙동강의 흐름을 눈으로 확인할 수가 없다. 낙동의 낙단보가 물을 가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안의 둔치가 넓다. 낙동 중동교에서 낙단보까지 6.0km이다. 제방 길의 오른 쪽에는 나각산이 있다.
나각산(螺角山)
☆… 경상북도 상주시에는 낙동강 제1경 경천대도 있지만, 유일하게 ‘낙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상주시 낙동면에 위치한 ‘나각산’(240m)이 있다. 낙동리에서 바라본 산의 모습이 마치 소라[螺]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정상에서 낙단보와 낙동강의 절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정상에 있는 전망대와 30m 출렁다리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의 풍경이 아름답다.
☆… 중동교에서 물이 가까이 있는 강안을 따라 걷다가, 당진-영덕간 고속도로(30번)-‘상주낙동강교’ 교각아래를 지나고 나면, 강안에 가파른 산이 내려와 길이 없으므로, 산을 넘어 뒷골의 산자락 밭길을 따라 내려간다. 상주이야기박물관 앞을 지나면 곧 강안의 길로 들어선다. 고속도로 교각 밑에서 낙단보까지 2.5km이다. 저물녘 상주 낙동(면)의 강안에 건설된 낙단보에 이르렀다.
낙단보(洛丹洑)
낙단보는 ‘자연은 이롭게, 사람들은 즐거운, 생명이 유익한 생태 환경 조성’이라는 주제의 ‘이락지천(利樂之天)’을 콘셉트로 설계되었다. 낙단보는 총 사업비 13조 9000억 원을 투입해 2009년부터 시작된 4대강 살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낙동강에 조성된 8개 보중 상류 4번째에 위치한 보이다.
경상북도 상주시와 의성군 일대에 농업용수와 생활용수를 확보하고 낙동강 하천정비를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상주시 낙동면 낙동리와 의성군 단밀면 생송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주변으로 야생초화원, 자갈침수못 등 생태공원이 있다.
2009년 11월에 착공되었으며 공사비 1,845억원이 투입되어 2011년 11월에 완공되었다. 총 길이는 286m로 144.4m인 고정보와 141.6m인 가동보로 이루어져 있으며 3개의 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보의 높이는 11.5m이며 저수 용량은 3,430만 톤이다. 보의 좌안에는 통합관리센터와 1,500kw급의 소수력 발전기 2기가 설치되어 연간 1,472만kwh의 전기를 생산한다. 보의 위로는 길이 141.6m의 공도교가 설치되어 있다. 낙단보 주탑은 그 강안에 있는 관수루의 모습을 본 따서 시설한 것이라고 한다.
낙단보를 공사하는 중에 고려 전기 때 제작된 마애불 좌상이 발견되었으며 일명 낙단보 마애불로 불리는 마애불상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32호로 지정되었다. 인근에 낙단교, 낙단대교, 낙동강대교, 상주낙동강교가 있다.
☆… 오늘은, 상주보에서 낙단보까지 걸었다. 상주보를 출발하여 낙동강 동로의 죽암리 제방을 따라 강창교를 지나서 걷다가, 야트막한 야산을 넘어 간상리를 경유, 신암리에서 59번 도로에 임하여 상주 방향의 중동교(낙동강)을 건넜다. 중동교에서 낙동(면) 물양리 제방 길을 걷다가 산길을 넘어 30번 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지나, 다시 야산을 넘어 뒷골의 산기슭 길을 따라 내려와 오늘의 포인트인 낙단보에 도착했다. … 단조로운 제방 길, 그리고 무연한 야산을 넘고, 적막한 동네 앞를 지나 자동차가 쌩쌩 다리는 국도와 다리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낙동강의 지천인 상주의 병성천(북천)의 흥암서원과 군위의 위천 연변에 자리한 삼국유사의 인각사, 김수환 추기경님의 생가 등 유적지를 심고(審考)할 수 있어서 특별한 의미와 보람을 느낀다. 총 21km를 걸었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