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호남지역에서 의진을 규합하여 일군과 투쟁을 벌이는 한편 가렴주구를 일삼던 지방관, 일본의 위세를 믿고 횡포하던 친일관리, 일진회원, 친일부호, 헌병보조원, 경찰 등의 횡포를 징계했다. 세금 징수원을 위협하여 친일 내각의 납세를 거부하게 하는 대신에 면장이나 동장을 시켜 마을마다 군수전(軍需錢)을 배정하되 도세로서 공평하게 가산에 따라 분배, 징수했고 해산 군인을 빙자한 무뢰배, 가짜 의병을 칭하고 살인, 약탈, 강간, 방화를 자행하던 자들을 처단함으로써 일시적이나마 민생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선생은 수 차례에 걸쳐 헌병보조원, 순경, 일진회원, 세금징수원, 친일부호, 가짜 의병들을 상대로 경계하는 격문을 보냈으며 이들을 토왜(土倭)로 규정하고 회유하기도 위협도 하여 그 직을 그만 두도록 하거나 가산을 몰수하고 체포해서 다스리기도 했으며 심한 자들은 총살로서 징계하였다.
한편 1908년 일제는 일본군, 헌병보조원, 경찰 등을 포함하여 11,000여 명의 병력으로 의병을 토벌하더니 1909년에는 일본 본토에서 임시 파견된 약 2개 여단의 병력을 더 투입하고 4~5월 사이에 한국 주둔 헌병대의 천안 및 영산포 분견대의 관할 하에 45개소의 임시파견소를 증설하는 한편 43,000여 명의 한인 무뢰배들을 헌병보조원이라 해서 분산 배치시키고 의병토벌과 정보수집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의병들의 활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동년 3월 영광 오동과 덕흥 전투에서 일군 수비대와 헌병대에 연패를 당한 뒤에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겨우 탈출하였으나 의병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어 거의 전투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더욱이 5월에 들어서자 농번기로 인해 주변 농민들의 참여가 부진해져 의병의 활동은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최후의 방편으로 부대이동을 결심하고 새로운 항전기지를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만주로 정하고 부하들에게 북상하자고 권고하였으나 가족의 생계문제 등 많은 난관이 있어 동의하는 자가 없었다. 더구나 순종황제의 의병 해산령이 당도하자 선생은 사세가 다했음을 판단하고 마침내 의병을 해산하기로 결심하여 동년 5월 영광 오동촌에서 부대의 지휘권을 호군장 박영근에게 넘겨주고 선생은 후사를 도모하고자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