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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序]가 韓國佛敎에 미친 影響
전 해주 / 동국대 교수
차 례
1. 머리말
2. [都序]의 韓國傳來와 刻板
3. 知訥의 [都序] 수용과 普照禪
4. 講院敎育에 미친 [都序]의 影響
5. 맺음말
1. 머리말
[禪源諸詮集都序](이하 [도서])는 圭峰宗密(780~841)이 53세(太和 7년, 833)이후에 저술한 것으로서 鎌田茂雄, [宗密敎學の思想史的硏究], (東京大學出版會, 1975) p.68.
[선원제전집]에 대한 自序이다. 이는 당시의 敎三敎와 禪三種을 융회하여 敎禪一致를 주장하고 頓悟漸修의 수행법을 천명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경덕전등록] [景德傳燈錄, 「終南山圭峰宗密禪師」, 大正藏51, p.306上.
에서는 종밀이 [都序]를 지은 인연을 ‘선학자와 교학자가 서로 헐뜯고 다투는 것을 보고 선원제전을 저술하였다’고 하면서 도서의 첫머리 내용을 소개하였다. 거기에는 종밀이 돈오가 점수에 도움이 되는 것을 드러내고 조사의 말이 부처님의 뜻에 부합됨을 증명하려 한 의도가 언급되어 있다. 종밀의 사후에 [도서]를 필사(857)하여 후대에 전한 裴休는 [도서]의 서문에서 ‘여러 종파의 문하에서 제각기 익힌 바에 따라 국집하여 서로서로 공격하기를 일삼으므로 圭峯大師가 오래도록 탄식하고 그 때를 당하여 잠자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교3교로 선3종에 맞추어 교와 선을 회통시켰다’ [禪源諸詮集都序叙], 大正藏48, p.398 中.下.
고 한다.
도서는 唐나라 大中 11년 정축(857)에 배휴에 의하여 필사되었고 후에 錢塘 嚴明의 男인 嚴楷勾에 의해 開板되었다. 배휴는 필사한 [도서]를 金州 延昌寺의 老宿에게 주었다. 노숙은 50년 후인 大梁 乾化 2년 壬申(912)에 唯勁 선사에게 전하였고 유경은 [도서]를 호남으로 갖고 돌아갔다. 그 후 23년이 지난 갑오(934)에 유경은 본서를 契玄에게 수여하고 계현은 그것을 閩으로 갖고 돌아갔다. 또 22년이 지나 갑인(현덕 원년, 954), 을묘(현덕 2년, 955)에 계현은 본서를 가지고 吳越로 들어가 서사하여 유포시켰다고 한다. 후에 錢塘 嚴明의 男인 嚴楷勾에 의해 開板되었다. (화암사판 송판간기, 조계종교재편찬위원회, [도서], 교육원, 1998, p.151).
이를 송판이라 하며 그 후로도 중국에서 수차 간행되었다. 全海住, 「선원제전집도서에 대한 고찰 1 -- 한국 유통본 도서의 문헌학적 고찰 --」, [불교학보] 34,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 1997), p.233.
그런데 [도서]는 한국에 전래되어 중국보다 더 많이 수십 차례 각판 되었으니, [도서]가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짐작케 한다. 종밀 당시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었던 普照國師 知訥(1158~1210)의 선사상 확립에 큰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승려교육을 전문으로 한 강원의 이력과목으로 채택되어 한국불교의 향방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특히 지눌의 [도서]수용에 초점을 맞추어 [도서]가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자 한다.
2. [都序]의 韓國傳來와 刻板
[도서]가 언제 한국에 전래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도서]의 판본과 주석서 및 [도서]의 인용서 등을 통하여 추정할 뿐이다. [도서]의 조선 판본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花巖寺 판본이다. 화암사 판은 1493년(弘治 6年, 癸丑, 성종24년)에 전라도 高山地 佛名山 화암사에서 重刻된 것이다. 그 이전 중국에서는 송판을 위시하여 遼板․元板 등 수차례 각판되었다. 화암사본에 송판간기가 있으므로 화암사본은 중국에서 제일 먼저 판각된 송판을 저본으로 중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도서]는 그 보다 훨씬 전에 전래되었으니, 고려시대 지눌이 [도서]를 인용하고 依用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눌은 [법집별행록절요]에서 [선원집] 또는 [선원제전집서]의 종밀설을 인용하여 자신의 선사상을 확립시켜 갔던 것이다.
화암사판(1493년) 이후 1938년 卍商會本의 활자본이 나오기 이전까지 각판된 회수는 현재 확인된 것으로 약 30회에 달한다.
밝혀지지 않은 판본까지는 고려하지 않더라도 [도서]의 각판이 매우 잦았음을 볼 수 있다. [도서]는 [서장]․[선요]․[절요] 등과 함께 조선시대 강원의 四集 과목으로 선정된 이후 사집교재가 함께 각판된 경우도 많다.
이들 [都序]의 諸本 중 龍興寺本 (숙종년간, 1694)을 제외하고는 모두 화암사본과 같은 송판본 계통인 것으로 추정된다. 용흥사본만 일본의 [대정신수대장경]과 같은 明藏本 계통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용흥사본에만 유일하게 명장본에 보이는 「無外惟大序」(大德 7年, 1303)가 있기 때문이다.
[도서]의 주석서로는 7종이 헤아려진다. 霜峯淨願(1621~1709)의 [禪源諸詮集都序分科], 雪岩秋鵬(1651~1706)의 [科評], 晦庵定慧(1685강원교재의 간행에 관한 연구 -- 사미과와 사집과를 중심으로 --」, 청주대, 1992년 석사학위청구논문, p.110.~1741)의 [科記(着柄)], 蓮潭有一(1720~1799)의 [科目竝入私記], 그리고 雪竇有炯(1824~1889)의 [禪源溯流[ 등이 전하고 있다. 碧巖覺性(1575~1660)의 [禪源諸詮集圖中決疑]와 [連註]가 있었음도 목록에 보인다. 全海住, 앞의 글, pp.238~240.
[도서]가 우리나라에서 얼마만큼 많이 연구되고 유통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으며, 목판 인쇄의 발달에도 공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3. 知訥의 [都序] 수용과 普照禪
위와 같이 조선시대에 [도서]의 각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도서]가 누구에 의해서 언제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단지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도서]가 크게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으니, 지눌의 선사상 형성에 매우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定慧結社를 제외하고 지눌이나 普照禪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정혜결사 운동의 기본적인 이론인 定慧雙修가 보조선의 특징적인 기본 골격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보조가 주창한 정혜쌍수는 돈오점수의 수행법에 입각한 것이다.
조선불교통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보조비 「昇平府曹溪山松廣寺 佛日普照國師碑銘幷序」, [朝鮮佛敎通史]에서도 보이듯이 일반적으로 보조선은 지눌이 대중의 수행지도를 위한 방편으로 시설한 惺寂等持門․圓頓信解門․徑截門의 3문으로 설명되고 있다. 삼문에 의한 보조선의 체계는 일시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보조 자신의 수행과정에서 체험한 세 번의 證入을 기반으로 하여 단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지눌이 43세때 송광산 길상사(조계산 수선사)에서 정혜결사의 도반들과 본격적으로 정혜결사의 방법으로 수도에 임한 것은 지눌이 41세때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통하여 경절문의 심연을 체험
한 뒤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눌이 25세 되던 해인 1182년 정월에 개성 보제사 담선법회에서 10여인의 도반과 함께 장래에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정혜결사를 맺고 수행에 전념하자고 약속 한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그후 33세 되던 1190년에 본격적인 결사를 위해 정혜결사문을 지어 반포하였으며, 후에 수선사를 본격적인 결사도량으로 삼았던 것이다. 지눌은 53세(1210) 때 수선사에서 입적할 때까지 11년동안 조계선 선양에 노력하였다. 따라서 정혜쌍수는 지눌의 전 생애를 통해서 보조선을 특징지우는 중핵이 된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지눌의 이념과 사상은 그의 저술에 담겨 전해졌다고 하겠으니 지눌의 현존 저술은 다음의 9종이 있다. [韓佛全]4, pp.698上~869下. [念佛要門] 1권을 지눌의 저서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상당록] 1권, [법어가송] 1권, [목우자 시집] 1권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96년, p.109)
[看話決疑論]
[圓頓成佛論]
[勸修定慧結社文] 1권 33세 (1190년) 作
[修心訣] 1권 미상 (41세 이후)
[眞心直說] [진심직설]의 撰者를 [한불전](제4권, p.715)에서 知訥이라 한 것은 [전서]의 편찬자가 補入한 것이며, 成化己丑刊(1469, 서울대 소장)의 「眞心直說序」에는 古德禪師로만 되어 있다.
1권 미상
[誡初心學人文] 1권 48세 (1205년) 작
[六祖法寶壇經跋] 1편 50세 (1207년) 작
[華嚴論節要] 3권 50세 (1207년) 작
1권 미상 (50세 이후 작,
입적 후 유고 발견)
1권 미상 (만년 작,
입적후 유고 발견)
[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 1권 52세 (1209년) 기술
이중에 [육조법보단경발문]과 [화엄론절요]를 제외한 7종의 선서에 인용된 문헌과 인명은 총 115개 항목에 이르며, 그 인용 회수는 모두 518회이다. 이를 선서별로 나누어보면 [권수정혜결사문]에는 36개 항목에 총 61회, [수심결]에는 9개 항목에 총 15회, [진심직설]에는 49개 항목에 총98회, [계초심학인문]에는 [반야심경] 1회, [간화결의론]에는 23개 항목에 총50회, [원돈성불론]에는 14개 항목에 총 69회, 그리고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에는 59개 항목에 총 224회를 인용하고 있다. 인용 항목별로 보아 가장 많이 인용된 것은 경전류에서는 [화엄경]이 18회, 논소류에서는 이통현의 [화엄론] 57회, 그리고 선적류에서는 규봉종밀이 75회로서 가장 많다. 인용문헌과 회수는 임영숙, 「지눌의 찬술선서와 그 소의 전적에 관한 연구」, [서지학연구] 창간호, (서지학회, 1986년). pp.262-267 을 참조한 것이다. 그런데 임영숙은 규봉종밀이 57회 인용되어 있다고 하나 그 언급된 회수는 75회에 달한다.
지눌의 저술에 보이는 이러한 인용항목과 회수만으로도 지눌의 선사상에는 선교가 함께 중시되어 있으며 교중에도 화엄교가 으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지눌이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자각하고 [華嚴論節要], [韓佛全]4, p.768上. 世尊說之於[卽爲敎 祖師傳之於心卽爲禪 佛祖心] 必不相違.
선교를 함께 닦도록 하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禪嚴一致이고 華嚴禪이라고 간주되는 것도 까닭이 있는 것이다. 全海住, 「義湘 性起思想이 普照禪에 끼친 영향」, [韓國佛敎學]14, (韓國佛敎學會, 1989年), pp.143-170. [義湘華嚴思想史硏究], (民族社, 1993年), pp.225-254.
그러한 지눌의 선사상에 있어서 규봉종밀의 저술과 사상이 결코 간과될 수 없음도 알 수 있다.
규봉종밀 75회는 세부적으로 규봉종밀 43회, [법집별행록] 18회, [선원제전집] 14회의 인용회수를 합한 것이다. 규봉종밀 43회의 내용도 [법집별행록]과 [선원제전집] 혹은 그 외의 문헌에서 언급한 경우이다. 그 세부 인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권수정혜결사문] : 규봉종밀 1회, [법집별행록] 1회, [선원제전집] 1회,
[수심결] : 규봉종밀 2회
[진심직설] : 규봉종밀 2회
[절요] : 규봉종밀 38회, [법집별행록] 17회, [선원제전집] 13회
[권수정혜결사문]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본격적인 정혜결사를 위한 글이다. [수심결]은 修心의 방법으로 돈오점수를 강조한 것이며, [진심직설]은 수심의 내용인 眞心에 대한 것이다.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이하 [절요])는 규봉종밀의 [법집별행록]에 대하여 지눌이 절요하고 사기를 붙인 것이다. 이는 지눌의 마지막 저술로 알려져 있고 조선시대 강원교육의 교과목으로 선정되었다. 이상 4편은 지눌의 저술중 돈오점수의 정혜쌍수를 가장 잘 드러낸 대표적인 저서이다.
그리고 [법집별행록]과 [선원제전집] 또한 규봉종밀의 선교일치․돈오점수 사상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저술이다. [법집별행록]은 북종․우두․홍주․하택의 종지를 촬요하고 특히 하택의 법을 별행한 것이다. 교선일치의 내용은 [도서]와 유사하다. 여기서 지눌은 규봉종밀의 [법집별행록]과 [선원제전집]의 선교일치․돈오점수설을 받아들여 자신의 돈오점수․정혜쌍수론을 완성시키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종밀과 지눌은 둘 다 선승이었지만 그들의 체험은 직접 불교전적을 접한 결과였다. 종밀은 道圓禪師 문하에서 출가하였으나 [원각경]과 [청량소초]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지눌의 경우는 사굴산파에 속하나 [육조단경]과 [화엄경] 및 [통현론], 그리고 [대혜어록] 등에서 깨달음의 전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불교전적이 종밀과 지눌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당시의 불교계의 심각한 불화가 불교교리 연구와 선수행을 분리시키는 점이라고 인식하였음도 자연스런 일이라고 간주된다.
지눌은 [권수정혜결사문]에서, 먼저 모름지기 心性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空한 줄을 信解하고 그 앎을 의지하여 수행함이 어떠한가? 밖으로는 律儀를 지니면서도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을 닦으면서도 애써 누르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악을 끊음에 있어서 끊되 끊음이 없고, 선을 닦음에 닦되 닦음이 없어야 眞修 眞斷이 된다. 만일 이와 같이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서 만행을 함께 닦으면, 어찌 이를 한갓 침묵만 지키는 癡禪이나 다만 문자만 찾는 狂慧에 견주리오?
라고 권하고 있다. 이 구절은 지눌이 왜 정혜결사를 주장하였는지, 그 핵심 이념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당시 불교계의 수행 법이 어떠하였는지, 참 수행 법은 무엇인지가 담겨 있는 말이다. 지눌은 당시의 수행 병폐를 광혜와 치선이라고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수행자가 선정이나 지혜, 선이나 교에 치우쳐 서로 상대를 비방하고 있으니 그러한 선자를 치선, 교학자를 광혜라고 혹평하면서 선교를 회통시키려 한 것이다. 지눌은 구산선문중 사굴산계의 선사였으나 남종뿐 아니라 교종에도 부처님의 교법을 한 순간에 깨달아 한꺼번에 증득하는 이치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선이나 교에 치우치지 않는 것이 선정과 지혜를 아울러 닦는 정혜쌍수의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다.
종밀도 [도서]에서 ‘헛되이 침묵만 지키는 癡禪이나 단지 문자만을 찾는 狂慧를 비판하고 종밀 자신은 경전연구와 선수행, 혜와 정을 겸한 수행 방법을 취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처럼 지눌은 바른 수행 법은 선정과 지혜 다시 말해서, 선과 교를 겸수해야 하며 계는 그 바탕이 되므로 계․정․혜 三學을 함께 닦아 가는 것이 결사임을 보이고 있다. 그러한 정혜쌍수․선교겸수의 내용은 돈오에 의한 점수이다. 心性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가 본래 空한 줄을 信解하고 그 앎을 의지하여 수행하는 돈오점수인 것이다.
그러한 지눌의 선사상은 기본적으로 종밀이 [도서]에서 분류한 五種禪중 最上乘禪의 돈오점수설에 입각하고 있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규봉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치를 통틀어 결론지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도서]를 인용하고 있다.
“이 性이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서 부처와 다름이 없음을 頓悟하고 이에 의하여 닦으면 그것을 최상승선이라 하고 또 여래청정선이라 이름한다. 만약 생각 생각마다 닦아 익히면 자연히 점차 백 천 삼매를 얻을 것이니 달마 문하에서 계속해 서로 전하는 것이 바로 이 선이다“ 고 하였으니 돈오와 점수의 뜻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아서 하나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修心訣], [韓佛全]4, p.711中. [節要]([韓佛全]4, p.749下)에서도 “규봉은 또 [선원집]에서 돈오점수를 밝혔는데 그 이치는 매우 자세하다”고 하면서 [도서]의 최상승선설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눌은 그 도에 들어가는 문으로 돈오점수를 천명하고 있다.
대저 도에 들어가는 데는 문이 많지만 요약하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와 돈수는 최상의 근기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 하나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여러 생 동안 깨달음을 의지하여 닦아서 차츰 익혀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듣는 즉시 깨달아 한꺼번에 모두 마친 것이니, 실로 말하면 이 또한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근기이다. 그러므로 이 돈오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의지한 길이며 과거의 모든 성인은 먼저 깨닫고 뒤에 닦지 않은 이가 없으며 그 닦음에 의하여 증득한 것이다.
라고 돈오점수를 강조하며, 규봉종밀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는 이 돈오점수의 이치를 깊이 밝혀 말하였음을 다시 비유로 소개하고 있다. 즉, 얼음이 언 못이 온전히 물인 줄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는 것처럼 범부가 곧 부처인 줄 깨달으나 법력을 빌어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풍족히 흘러 물을 대고 씻는 공덕을 나타내는 것처럼 망상이 다하면 신령스러이 통하여 신통광명의 묘용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종밀은 [도서]에서 선전을 익힘에 경론을 관련시키는 열 가지 所以를 밝히는 가운데 아홉째로 悟修頓漸을 언급하고 있다. 오수돈점에 대한 여러 주장가운데 돈오점수를 교선일치와 연결시킨 것이다.
돈오점수는 解悟이니 해가 몰록 솟아남에 서리와 이슬은 점차 녹으며, 아이가 태어남에 사지와 六根을 몰록 갖추나 자라면서 점차 志氣와 功業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지눌도 이어서 그런데 깨달음이 이미 돈오라면 어찌 점차 닦을 필요가 있으며, 닦음이 점수라면 어찌 돈오라 하는지, 자문자답으로 돈오점수의 뜻을 다시 밝히고 있다.
돈오란 한 생각에 마음의 빛을 돌이켜 제 본성을 보면 성에는 원래가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이 본래부터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 모든 부처님과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음을 알므로 돈오라고 한다. 점수란 비록 본래의 성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비롯함이 없는 습기는 몰록 버리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에 의해 닦되 점차 익혀서 공이 이루어지고 성인의 태를 길러 오랫동안을 지나 성인이 되므로 점수라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남과 다름이 없으나 그 힘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법 세월을 지낸 뒤에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
이 점수는 비록 뒤에 닦는다고 하나 망념이 본래 공하고 심성이 본래 깨끗한 것임을 먼저 단박 깨쳤으므로 악을 끊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다. 이것이 眞修 眞斷이라고 한다.
여기서 頓悟의 내용인 ‘본래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은 ‘비고 고요하며 신령스럽게 아는 지혜의 마음(空寂靈知之心)’이다.
지눌은 성이 스스로 신령스러이 아는 영지가 바로 우리의 청정한 마음의 본체이며, 삼세 제불의 깨끗하고 밝은 마음이며, 또한 중생의 본원각성이라고 한다. 이 비고 고요한 마음이 성인이라 해서 더 많은 것이 아니고 범부라 해서 더 적은 것이 아니다.
마음의 본체는 일체 중생이 본래부터 가진 부처의 성이고, 또 모든 세계가 발생한 근원이라는 것이다. [眞心直說], [韓佛全]4, p.717上.中. 지눌은 공적영지의 진심을 [진심직설]([韓佛全]4, pp.715下-723下)에서 10가지로 자세히 밝히고 있다. 진심을 밝힘에 있어서도 지눌은 종밀의 견해를 많이 따르고 있다. 예를 들면, ‘마음이란 깊고 비었으며 묘하고 순수하며 빛나고 신령하고 밝아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면서 가만히 삼제에 통한다. 가운데도 아니고 밖도 아니면서 시방에 두루 사무친다’고 한 규봉종밀의 말을 인용하여 진심의 묘체를 밝히고 있다. 또 진심의 所往을 밝히는 곳에서는 ‘일체 중생이 모두 신령스러이 밝은 깨달은 성을 갖추어 부처와 다름이 없으므로 만일 그 성이 곧 법신임을 깨달으면 본래 生함이 없거늘 무슨 의탁할 곳이 있겠는가’라는 규봉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방세계가 오직 한 진심이라 온몸으로 수용하므로 따로 의탁할 곳이 없다’고 하는 등이다.
[도서]에서는 공적영지를 “제법이 꿈과 같음을 모든 성인이 한가지로 설하시니 망념이 본래 고요하고 塵境이 본래 空하다. 공적한 마음이 신령스러이 알아 어둡지 않으니 곧 이 공적한 지혜가 너의 진성이다” 고 하며 이 “知의 한 글자가 衆妙의 門”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지눌은 이러한 공적영지의 眞心과 돈오점수 그리고 정혜쌍수의 관계를 다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일 법과 이치를 말한다면 이치에 들어가는 천가지 문이 모두 선정과 지혜 아님이 없다. 그 강요를 들면 自性 상의 본체와 작용의 두 가지 뜻이니 앞에서 말한 바, 비고 고요함과 신령스러이 앎(空寂靈知)이 바로 그것이다. 선정은 본체이고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에 즉한 작용이므로 지혜가 선정을 여의지 않고, 작용에 즉한 본체이므로 선정은 지혜를 여의지 않는다. 선정이 곧 지혜이기 때문에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기 때문에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만일 이와 같음을 깨달아서 고요함과 앎에 맡김으로써 선정과 지혜가 둘이 아니게 되면 그것은 단박 깨치는 문에 들어간 이의 선정과 지혜를 겸하여 닦는 것이 된다고 한다. 돈오후 점수의 법이 정혜쌍수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지눌은 깨달은 뒤에 닦는 법문 가운데 정혜를 等持하는 이치를 문답으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위와 같이 지눌의 선사상은 종밀이 [도서]에서 밝힌 교선일치․돈오점수 그리고 공적지에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눌은 [도서]의 교선일치를 그대로 수용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눌은 종밀선을 비판적이고 선택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지눌이 처한 역사적 상황이, 종밀이 직면했던 상황과 다소 일반적인 유사성도 띄지만 거기에는 또한 중요한 차이점도 개재하고 있다.
종밀이 [도서]를 저술하게 된 주된 이유중의 하나는 8세기말 9세기초의 중국불교계를 분열시킨 여러 가지 복잡한 분파를 극복하려는데 있었다. 첫째는 교학자나 경전 주석가와 선수행자들 사이의 분열이며, 둘째는 선 자체의 여러 대립적 종파사이의 분열이다. 종밀은 그것을 禪經一致와 宗敎一致로 화해시키고 있다. .
선3종 교3교의 종과 교를 ‘국한시켜서 보면 모두 잘못이지만 회통시켜서 보면 모두 옳다’ 는 종밀의 말은 불교내의 모순을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론을 간결하게 보인 것이다. 그러나 종밀의 판선은 판교가 내포하는 것과 똑같은 양면성을 드러내었으니, 즉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분파적인 성격이 그것이다. 여타의 선종들은 종밀이 속한 하택종보다 열등한 것이 되어 버렸다고 간주되기도 한다.
그런데 지눌에 있어서 당시 불교계가 갖는 주요위기는, 선종내의 복잡한 분파적 성격이라기 보다 선을 교학 특히 화엄에서 분리시키는 상호 적대감과 불신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특히 지눌은 화엄을 가장 많이 인용하였으며, 당시 화엄가가 이해한 법계연기의 입장을 여래출현의 性起로 대치하여 선교가 둘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그 방법으로 의상의 「法性偈」에 보이는 성기사상과 전간전수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지눌은 종밀과는 달리 서로 다른 선종들 사이의 종파간의 심각한 대립에 직면하지는 않았다. 더욱이 지눌 당시에는 하택계는 이미 거의 소멸되었고 청원행사계의 다른 선종들과 더불어 홍주계가 선종의 대표세력으로 대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눌이 하택과 종밀을 제일 좋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입장의 차이는 어떻게 극복되고 있는 것인가? 지눌은 [절요]의 저술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목우자는 말한다. 하택신회는 知解宗師로서 조계의 적자는 되지 못하였으나 깨달아 아는 것(悟解)이 높고 밝아서 의심을 결단하고 이치를 분별하는 일이 분명하였다. 규봉 종밀이 그 뜻을 이어 받들었으므로 그의 [별행록]에서도 그것을 부연하고 밝혀 환희 보게 하였던 것이다. 이제 교에 의하여 마음을 깨달으려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번거로운 말은 줄이고 요긴한 강령만 뽑아 내어 관행의 귀감으로 삼는 것이다.
[절요]는 지눌의 마지막 저술이다. 그는 입적하던 해에 교에 의해서도 깨달을 수 있다는 자신의 이념을 견지하고 그 방법을 종밀의 [법집별행록]에 의거하여 소개한 것이다. 여기서 하택은 지해종사로서 조계의 적자는 되지 못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종밀은 하택의 법손임을 자랑스러이 생각하고 하택이 내세운 空寂知를 선교일치와 돈오점수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지눌은 공적지를 靈知로 이해하고 돈오점수․정혜쌍수에 연결하였으나 하택을 지해종사로 간주하였다. 이는 지눌과 종밀의 입장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점의 하나이다.
이처럼 지눌은 하택신회가 후세의 禪宗史에서 한낱 지해종사에 불과한 자라는 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하택종을 선의 정맥으로 간주하는 종밀의 법집별행록을 간추리고 자신의 사기를 달았다. 그것은 첫째로 신회의 깨달음이 높고 밝으며 판단과 선택이 명쾌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법집별행록]에서 제시하고 있는 종밀의 사상은 교를 통해서 마음을 깨달으려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관행의 귀감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눌은 당시의 상이한 선종들을 화해시키려는 종파내적 문제를 다루어야 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결과적으로 종밀의 판선을 조금도 이용하지 않았다. 종밀이 선원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 도서를 지었다고 한 것에 비해, 지눌은 敎에 의하여 마음을 깨달으려 하는 사람을 위해 觀行의 귀감을 삼고자 [절요]를 지은 것이다. 지눌 역시 [도서]와 [별행록]에서의 선3종의 회통방법을 도입하여 그의 돈오점수 수행법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규봉종밀이 교와 선을 동등히 다루면서 교선일치를 주장하였다면 보조는 선3종을 회통하는데 있어 교를 도입하여 선교겸수를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종밀의 사상을 수용함에 있어서 지눌이 갖게 되는 더 큰 문제점은 하택계의 史的 전승을 이어받은 종밀의 타 선종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그의 사상의 전체적인 틀로부터 분리시키기가 그리 쉽지 아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눌은 선3종에 대한 종밀의 비판을 융회시킬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지눌은 [절요]에서, 또 관행하는 사람이 비고 신령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의리에 걸려 있을까 걱정하기 때문에, 맨 끝에 본분종사들의 경절문의 언구를 간략히 끌어와 지견의 병을 씻어버리고 몸을 빼어낼 살 길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라고 하여 다시 지해를 타파하고 경절문을 시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눌은 [節要]에서 다음과 같은 등의 내용을 인용하면서 지해를 타파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대혜선사는 말하였다. 규봉은 이를 일러 靈知라하고, 하택은 知의 한 글자는 온갖 묘한 이치의 문이라 하였으며, 黃龍 死心叟는 知의 한 글자는 온갖 재앙의 문이라 하였다.”([韓佛全]4, p.764上) “육조는 대중에게 말하였다. 어떤 물건이 있는데 위로는 ..... 신회가 말하였다. 모든 부처의 근원이며 이 신회의 불성입니다 ...... 너는 다만 지해종도 밖에 되지 못할 것이다.”([韓佛全]4, p.764中)
본분 종사들이 단련하는 깨달음의 문에서는 그 영지마저 없애는 것이 가장 묘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런데 지눌은 이것이 종밀의 숭상하는 바는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 그러나 말에 의해서만 이해하면 지해의 속박을 받아 쉴 때가 없을 것이므로 요즈음 납승의 문하에서 말을 떠나 깨달아 들어감으로써 지해를 아주 버리는 사람들을 위해 출신활로를 알게 하려한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종밀과는 유사하지만 또 다른 상황속에 처해 있었던 지눌은 그의 선사상을 구축함에 있어서 종밀 사상을 비판적이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지눌은 한국선의 전통속에 자리한 돈오점수라는 보조선의 특징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조선은 분명 [도서]와 [법집별행록]에 담긴 종밀의 교선일치․돈오점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4. 강원교육에 미친 [도서]의 영향
지눌에 의해서 주목된 [도서]는 조선 시대 강원교육이 이루어질 때 강원의 사집과 이력과목 강원, 강당, 이력과목에 대해서는 종범, 「강원교육에 끼친 보조사상」, [보조사상]3, (보조사상연구원, 1989), pp.74-75와 「강원의 교육체계와 개선방향」, [강원총람],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1997), p.60 등에 그 출처와 용어의 개념 등이 설명되어 있다.
으로 선정되어 교육적으로도 중요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국에서는 종밀의 [도서]가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한 것 같다. [도서]에 대한 주석서도 전하지 않는다. [도서]가 사집과목으로서 강원교육의 이력과목으로 편성되고 주석서가 편찬되는 과정을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사자전승의 법맥은 采永集錄, [西域中華海東佛祖源流]([韓佛全]10, pp.100上-128下) 등을 참고하였다.
① 지눌이 정혜결사를 조직하여 선교겸수․돈오점수의 선사상을 펴다. 지눌이 [도서]를 인용하고 [절요]를 지어 수행자로 하여 금 여실언교에 의하여 지견을 바로 갖게 하다.
② 碧松智嚴(1464-1534)이 초심자를 지도하는데 있어서 먼저 [선원 집]과 [별행록]으로써 여실지견을 세우게 한 다음에 [선요]와 어록으로 지해의 병을 제거하고 깨달음의 활로를 지시하다. 「碧松堂大師行蹟」, [三老行蹟], [韓佛全]7, p.753下 註9).
벽송지엄은 선교겸수의 수행가풍을 지닌 벽계정심의 法嗣이다.
③ 芙蓉靈觀(1485-1571)과 敬聖一禪(1488-1568) 등이 선교 양풍을 크 게 드날리다. 靈觀과 一禪은 智嚴의 제자이다.
④ 淸虛休靜(1520-1604) 이후 도총섭제가 생기어 선교 양종의 일을 총섭하다. 휴정은 영관의 제자로서 휴정 이후 승가교육제도는 선교를 겸수하되 교를 방하하고 선을 참구하도록 하다. 「淸虛堂集序」, 韓佛全7, 658下-659中.
⑤ 霽月敬軒(1544-1633)이 학인에게 [도서]․[절요]로 결택하게 하 다. 경헌은 휴정의 제자이다. 「虛閑居士敬軒大師碑銘幷序」, [朝鮮佛敎通史] 上, pp.489-491.
⑥ 詠月淸學 (1570-1654)이 [도서]등 이력과목의 낱낱 제목에 게송 을 읊다. 사집이라는 용어가 詠月淸學의 영월당집(1656년 간 행) [詠月大師文集], [韓佛全]8, pp.234中-235中.
에서 처음으로 보이다. 청학도 휴정의 제자이다.
⑦ 碧巖覺性(1575-1660)이 [선원제전집圖中決疑]를 짓다. 각성은 영 관의 2세이고 浮休善修(1543-1615)의 제자이다.
⑧ 鞭羊彦機(1581-1644)가 [편양집] 「경판후발문」(1647, 백운암 간 본) [韓佛全]8, p.255中.
에 용복사에서 선원 등을 모았다고 한다.
⑨ 楓潭義諶(1592-1665)에게 청허대사의 高足인 청련원철이 사집을 가르치다. 「楓潭義諶大師비문」, [朝鮮金石總覽]下, p.963.
義諶은 彦機의 제자이다.
⑩ 霜峰淨源(1621-1709)이 [선원제전집도서分科]를 짓다. 정원은 의 심의 제자이다.
⑪ 月潭雪霽(1632-1665)와 月渚道安(1638-1715)이 성총과 함께 강원 이력과목을 정비하다. 설제와 도안도 의심의 제자이다.
⑫ 雪岩秋鵬(1651-1706)이 [선원제전집도서科評]을 짓다. 추붕은 도 안의 제자이다.
⑬ 栢庵性聰(1631-1700)이 크게 講經에 전업함으로써 마침내 강원이 력 제도가 완비(대교․사교․사집․사미과)되어 오늘에까지 전 하고 있다. 성총은 각성의 2세이고 慕雲震言(1622-1703)의 제자 이다.
⑭ 晦庵定慧(1685-1741)가 [선원집도서科記]를 짓다. 정혜는 각성의 3세이다.
⑮ 강희18년 기미, 1679년에 간행된 [금강경오가해] 「후발문」(운흥 사간)에 사집 등을 인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⑯ 蓮潭有一(1720-1799)이 [선원집도서과목병입사기]를 짓다. 유일 은 설제의 3세이다.
⑰ 雪竇有炯(1824-1889)이 [禪源溯流]를 짓다.
이상과 같이 고려중기 보조국사가 정혜결사를 조직하고 돈오점수의 강설을 주장한 후로부터 그의 [절요]와 [초심] 및 종밀의 [도서]가 강학 과목으로 되었다. 그후 조선조 벽송지엄(세조-중종)이 최초로 교과과정을 편성하여 초학을 가르치는데 먼저 [도서]와 [절요]로 여실지견을 세우게 하였다. 부용영관과 청허휴정이 벽송의 뜻을 이어 선교겸수의 학풍을 완비하였다.
휴정의 제자인 영월청학이 [도서] 등 이력과목에 낱낱이 게송을 읊어 그 대의를 드러내었다. 제월경헌도 [도서]․[절요]로 결택하게 하고 청련원철도 풍담의심에게 [도서]를 가르쳤다. 벽암각성․상봉정원․설암추붕․회암정혜 등이 [도서]에 주석을 가함으로써 [도서]를 학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인조-숙종 때 청허의 3대손인 월담설제와 월저도안 및 상봉정원과 부휴의 4대손인 백암성총 등의 노력으로 강원제도와 이력과목을 확정하였다. 이처럼 오늘날과 같은 선교겸학의 강원제도의 유래는 고려중기 보조국사에서 시작하여 17세기 인조-숙종 때 완비된 것이다. 그후로도 연담유일․설두유형 등에 의하여 [도서]는 계속 주석되어 왔으며 [도서]의 화암사판이 1493년에 중각된 이래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30회 가량 각판된 것도 강원교육에 있어서 [도서]의 위치를 짐작케 한다.
[도서]는 고려시대 뿐 아니라 조선시대 강원교육을 통해서 승려들이 선과 교에 대한 확실한 견해를 세우게 하는데 지속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강원의 설치이유가 바로 선교겸수에 있음을 볼 때 더욱 그렇다. [도서]와 절요의 논지가 경절문의 조사선을 선양하는 [서장]이나 [선요]와는 다른데도 불구하고 한가지로 사집과목이 되어 사집반에서 지금도 같이 수학하고 있는 것이다. [도서]는 중국의 조사선과는 다른 한국선을 형성시키는데 [절요]와 함께 여전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겠다.
5. 맺음말
이상과 같이 규봉종밀이 지은 [도서]가 한국불교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보았다. [도서]는 고려중기 보조국사 지눌이 즐겨 인용한 이래로 한국에서 크게 유통되었다. 지눌이 [도서]의 교선일치․돈오점수설을 자신의 돈오점수․정혜쌍수의 선사상에 도입하여 중국의 오가 7종 선풍과는 다른 한국선문의 선풍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도서]에서는 선과 교만이 아니라 선종내에서도 각 종파가 서로 국집하여 다투고 있음을 모두 화해시키고 있다. 그리하여 선3종과 교3교를 서로 배대시켜서 교선일치를 주장하면서도 화엄교를 중심으로 하는 顯示眞心卽性敎에 배대되는 直顯心性宗을 최우위에 놓았고 직현심성종 중에서도 홍주종을 비판하고 하택종을 최우위에 놓았다. [도서]에서 종밀이 강조한 하택종의 깨달음과 수행방법은 공적지를 내세운 돈오점수였다.
지눌의 경우는 선종내에 다른 견해를 지닌 종파가 갈라져 서로 다투는 상황은 아니었으며 선과 교, 교중에서 특히 화엄교와 서로 갈등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지눌은 선과 교의 둘을 화해시킴에 있어서 선학자와 교학자가 치선이나 광혜에 떨어지지 말고 여실언교에 의해 바른 수행을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입장에서 공적영지를 깨닫고 悟後漸修를 강조하는 돈오점수의 선사상을 천명한 것이다. 悟後의 점수법으로 정혜결사를 통한 정혜쌍수의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지눌은 종밀과는 달리 하택종을 홍주종보다 우위에 놓는 선판의 입장은 취하지 아니하였다. 지눌은 다시 지해에 떨어지지 않도록 경계하면서 경절문의 수행법을 시설하였다. 그러한 지눌의 선수행과 교육이념은 지눌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정비된 강원교육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조선시대 승가교육을 위한 강원제도가 정비되면서 [도서]는 이력 과목중 사집과 교재로 채택되었다. [도서]는 지속적으로 선교겸수의 선교통합적인 한국선풍과 학풍을 진작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본고에서는 [도서]가 보조선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도서]에 담긴 종밀의 사상이 지눌의 보조선과 다른 점에 대해서는 세밀히 살피지 못하였다. 돈오점수를 중심으로 한 종밀과 지눌 사상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연구에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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