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추가마골 김오겸 회장
▶ 김오겸 회장의 성공 신화
노력은 값진 것
경기도 양주의 송추에 위치하고 있는 송추가마골은 신관과 본관을 합하여 약 2500평이 넘는 국내 단일 식당으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다.
취재진이 송추가마골을 찾았을 때 내부와 외부에서 바라봤던 그 아름답고 화려한 인테리어와는 달리 송추가마골의 사무실은 아담한 편이었다. 건물의 한켠에 검소하게 사무실을 꾸려 놓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소박하면서도 실용적인 김오겸 회장의 마음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늘 적극적으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는 성격인지라 김 회장은 바쁜 스케줄로 인해 어디에서 전화가 올지 몰라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사실상 경영에서 손을 털었는데도 이렇게 바쁩니다. 그야 저를 잘 알고 믿어주시니까 다들 그러시는 거겠죠. 경영이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실 제가 사업을 시작할 당시 만해도 누구나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만 농촌에서 태어났던 저에겐 뭐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냥 농사짓는 것 밖에 없지요. 하지만 저는 보다 새로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가 이런 식당을 보유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에 다소 의아해 하거나 놀라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김오겸 회장의 꿈속에는 더 넓고 큰 송추가마골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충남부여에서 자라 고교를 마칠 때까지 논산으로 학교를 다닌 그는 자신이 농촌에 남아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농사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친구들 역시 그렇게 동화되어 비슷한 길을 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히 취직을 해야 할 곳이 없자 막막했던 그는 우연히 길을 걷다 공고를 보았다. 특별한 학력이나 기술이 없어도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도 가능한 것이었다. 그렇게 77년도 설치 기술을 배워서 럭키금성사(현 LG)에 입사한 그는 특판 본부에 배치되었다. 일단 자신이 가진 역량 안에서 최선을 다하며 하나둘씩 능력을 발휘해 나아갔다. 노력 덕분에 그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았고 그의 솜씨를 일찌감치 눈여겨보던 현대로 스카우트되어 사우디아라비아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뛰어난 능력 때문인지 그의 대우도 남들이 하루 일당을 4불을 받으면 그는 5불을 받을 정도였다. 더구나 젊은 나이에 현장 팀장이라는 직책까지 그에게 맡길 정도라니 그는 업계에서 유능한 인재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절실함 속에서 이뤄낸 내일
그렇게 1980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하기 전까지 김 회장은 남들보다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 중동파견근무에서도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그동안 열심히 땀 흘려 일한 대가가 고작 600만원인가 하는 생각에 회의가 들었다.
1976년 당시 중동에 불어 닥친 건설호황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엘리베이터 기술자로 일했지만 귀국시 가슴에 품고 온 돈으로는 가족의 삶이 더욱 나아지리란 보장이 없었다.
나날이 커가는 자식들과 힘들게 가정을 일구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자 오직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들었고 앞으로는 일상적인 직장생활보다는 사업을 해야 돈을 벌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 돈을 가지고 마땅히 장사를 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 당시에도 장사를 하기엔 600만원이라는 금액은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한참 동안을 고심했던 김 회장은 어느 날 내려간 고향집에서 잠이 들었다.
한참 누워있는데 잠결에 잠시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자주 가던 응암갈비! 그래 일단은 적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좋겠구나!’ 이마에 한줄기 땀방울과 함께 섬광처럼 사업 아이템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느낌이 오묘한 것이 마치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크지 않은 규모에 적은 비용으로도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응암갈비에 찾아가 주인에게 음식의 비법을 전수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응암갈비 사장은 그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였다. 그럴수록 김 회장은 절박함 심정에 3일을 지겹도록 쫓아다니며 응암갈비 사장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결국, 버티다 못한 응암갈비 사장은 승낙을 했지만 조건으로 전수비 30만원을 요구했다.
뭐든지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처럼 전수비를 내고 그는 일주일 동안 응암갈비에 머무르며 먹고 자면서 하나부터 열가지 사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배웠다. 어느 음식점이나 비밀에 붙인다는 양념작업까지 직접 보며 세세하게 기록하고 공부를 하면서 낮에는 갈비를 칼로 저미는 연습을 하였다.
단기간이었지만 응암갈비의 기술을 전수 받은 그는 이제 장사를 시작할 가게를 얻으려고 했다. 그러자 응암갈비 사장이 또다른 조건으로 내놓은 것은 ‘서울에는 장사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
할 수없이 그는 고향에서 인접한 대전으로 내려가 두어 달 발품을 팔면서 가게 터를 찾아 다녔다. 하지만 마땅히 장사를 할 만한 자리가 나타나지 않자 서울로 올라와 응암갈비 사장에게 장사를 할 가게를 알아봐 달라고 말했다.
“돈 냄새가 풀풀 나는 곳을 찾아가봐”
그 말 한마디를 가슴에 품고 그는 응암 갈비가 있는 응암동 주변을 빼고는 여러 군데를 다녔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장사를 해본 적이 없는 그가 단번에 돈 냄새를 맡는 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수도권지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보니 저절로 밑천도 조금씩 떨어져갔다. 그러던 중, 처가로 가는 버스 안에서 성수시장 골목에 많은 사람들로 가득 찬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 ‘저기다! 돈 냄새가 나는 곳이 바로 이런 곳이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곧장 버스에서 내린 성수시장의 골목은 처음 시작하는 초보 장사꾼인 그가 보아도 돈 냄새가 풀풀 나는 절묘한 자리였다.
1980년 당시, 서울의 대표적인 공장지대였던 성수동은 주변에 상가가 별로 없었고 노동자들이 고단한 일과를 마치고 퇴근 후에 술을 한잔 할 만한 곳이 부족한 곳이었다.
“한달이 넘도록 숙소로 가는 길에는 항상 어김없이 성수동을 지나가도 어떤 느낌이 없었는데 그날따라 응암갈비 사장님이 말한 ‘돈냄새’가 나는 거예요.
그때 ‘바로 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성수역 근처에 일본식 전병(센베이)을 팔던 열 평 규모의 가게를 소개 받았다.
보증금 300만원에 권리금 30만원, 월세 30만원으로 그가 가지고 있던 창업자금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김 회장은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약을 했다.
이제는 사업을 시작하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기쁨이 만연했다.
그러나 막상 개업 날이 다가오자 여러 가지 인테리어나 시설비 때문에 돈이 부족하였다.
김 회장은 당시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소주 한 짝과 고기 30근을 사고 가게를 시작했다.
가게 명은 ‘마포갈비’로 정했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첫날부터 장사는 호재를 부르기 시작했고 가게는 사람들을 가득 찼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전날 매출로 소주 두 짝과 고기 60근을 샀으며 역시 사람들로 만원사례였다. 하루에도 밀려드는 손님들로 인해 하루는커녕 일 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시간이 지나갔다.
일단 저질러 본다
하루가 다르게 번창하여 성수동에서 마포갈비를 성공시키고 우이동으로 넘어왔던 김오겸 회장. 그러나 이때부터 그에겐 시련이 닥쳐온다.
지인의 소개로 찾아온 우이동에서 빚을 얻어가며 ‘우이동갈비’를 시작했다.
이제 밀려드는 손님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그의 판단과는 달리 인적이 드문 곳에 장사가 잘 될 일은 만무할 일이었다.
점점 파리가 날리기 시작하자 김 회장은 무엇인가 잘못 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그때는 자포자기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여러 납품 업체 사람들이 오면 정말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빚을 내어 차린 식당이라 가슴이 타들어갔죠.”
그렇게 망연자실 넋을 놓고 있던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주변의 지인들이었다. 한때 자신의 인근에서 큰 갈비집을 하던 성수동의 수원갈비집 사장이 조상희라는 주방장을 소개 시켜주었다. 주방경력이 화려한 조상희 주방장은 만날 때부터 그에게 사장의 방식과 자신의 방식 중 하나를 고르자고 말했고 조상희 주방장의 음식에 승복하였다.
그렇게 하나둘씩 다시 시스템을 리마인드 시켜나가면서 하나둘씩 손님이 불어나기 시작 했고 개업 6개월 만에 우이동 갈비집은 인근에서 가장 유명한 집으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변화하고 배우면서 나날이 발전한다는 생각에 그는 배움을 주저하지 않았고 더 나은 방식이 있으면 따랐고 그것을 터득하려 하였다.
그렇게 우이동에서 10여년을 보낸 그는 마침내 새로운 도전을 시작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날이 발전하는 우이동을 바라보며 더 이상 이곳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새롭게 시작을 선포한 그는 의정부에 근접한 양주의 송추에 가게를 짓기 시작했다.
그때 지으면서 가마골이라는 이름도 얻었다고 한다.
“우이동은 발전하면서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니까 주차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먹는 장사는 주차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더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송추를 보게 되었죠. 지금의 가마골자리가 예전에 숯가마터였답니다.”
급한 성격이라 이번에도 1억 5천 만원을 빌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변에 상권이 형성되지 않아 장사를 하는 것은 무리로 보였다.
교통 또한 불편하지만 그는 오히려 가게를 넓혀 하천 너머에 있던 주차장 자리에다가 신관까지 만들어 버린다. 감히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다.
몇 차례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지만 김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고 사업은 날로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2001년에는 의정부시에 건평 500평의 가마골 분점과 최근 2006년 초에는 양주시 덕정점까지 오픈을 했다.
변화는 내일을 창조 한다
한때 막막하게 현실을 바라보며 농사를 짓고 살 뻔했던 그는 이제 전국 최대 규모의 식당의 주인이 되었다.
지금도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면 26년 전 장사를 시작한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사람들이 저에게 성공했다고 말하지만 저도 사실 그 과정에서 좌절감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누구나 쉽게 살고 싶죠. 하지만 어려운 게 현실이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절 가만 놔두지 못했습니다.”
외식업계에서는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그는 남들이 봐도 성공한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겐 더 큰 꿈이 있다.
언젠가 개인으로서 팔도음식타운을 만들어서 전국의 유명한 음식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이다. 규모는 일반인이 생각하는 상상이상이다.
늘 친절한 서비스와 뛰어난 사업수단을 가지고 있는 송추가마골.
그런 가마골의 수장인 김 회장은 언제나 변화하기 위해서 늘 공부하는 그는 연세대 외식산업고위자과정을 이수 했을 만큼 배움에도 앞장서고 있으며 직원들에게 배운 내용을 토대로 가마골에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제는 아들인 김재민 사장이 전반적인 경영을 하고 있지만 전국의 소문난 맛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벤치마킹하는 일을 게을리 해본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인근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쌀 포대나 식료품을 사서 보내고 가진 것을 나눠주는 베품을 아끼지 않는 김오겸 회장.
이것저것 재지 않고 소탈하게 남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려는 그의 품성에서 진정한 부자의 덕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출처] 이 세상에 내게 넘지 못할 산은 없다-송추가마골 김오겸회장 |작성자 테마파크
http://blog.naver.com/pihno1?Redirect=Log&logNo=13001325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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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식산업의 뉴 리더들] 김오겸 '송추가마골' 대표
"좋은 서비스서 좋은 맛 나오죠"
직원들에 수시로 고객만족·위생교육등 실시
최고품질 식재료만 사용 양념갈비맛 차별화
납품업체에 전액 현금결제로 '상생'도 적극
외식산업의 규모가 매년 커지고 있다. 지난 2003년 국내 외식산업의 규모는 약 44조원으로 90년보다 2.6배나 성장했다. 외국계 외식 브랜드는 물론 국내 대기업들도 앞 다퉈 외식업에 뛰어들고 있다. 음식점 창업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명예퇴직자가 늘고 청년실업의 대안으로 음식점 창업을 고려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식업만큼 경쟁이 치열한 업종도 드물고 실제로 실패율도 높다. 음식장사를 더 이상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는 얘기다. 서울경제는 국내 외식산업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고, 예비 창업자들이 벤치마킹할 만한 음식점 경영 노하우를 전하기 위해 ‘외식산업의 뉴 리더들’ 시리즈를 연재한다.
“송추가마골은 도저히 벤치마킹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분 좋은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습니다. 맛과 서비스에 정성을 기울이면 성공할 수 있거든요.”
경기도 양주시에 위치한 갈빗집 ‘송추가마골’을 운영하는 김오겸(사진) 대표는 올해로 음식장사 경력이 26년째다. 70년대 후반 엘리베이터 기술자로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면서 번 돈 600만원을 종잣돈으로 서울 성수동에 ‘마포갈비’를 차린 것이 지난 80년. 이후 우이동, 송추로 자리를 옮겨가며 사업을 확장해 현재 송추, 의정부, 양주 덕정리 등에 4개의 점포를 운영하는 ‘음식 부자’가 됐다.
특히 송추 본점은 본관과 신관을 합쳐 연면적이 2,000평이 넘는 초대형 음식점으로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 수준이다. 규모뿐 아니라 직원들의 서비스 수준은 국내 대형 할인점에서도 벤치마킹 해 갈 정도로 우수하다. 양주시장이 직원들에게 수시로 “송추가마골 만큼만 하라”고 강조할 정도라고 하니 서비스 수준을 짐작할 만하다.
김 대표는 “음식업은 맛과 메뉴개발, 청결, 시설, 물류시스템, 서비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하면 안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의 서비스 마인드”라고 강조했다. 고객을 최우선시하는 정신만 있다면 음식 맛도 좋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송추가마골은 음식점이라기보다는 거대한 학습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달에 서너 차례, 많게는 예닐곱 차례 직원들에 대한 교육이 이뤄진다. 직원들의 근무 연수에 따라 나눠 자체 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해외 연수, 외부 연수기관에서 실시하는 프로그램에도 참가한다. 매장 직원들은 수시로 고객만족(CS) 교육, 위생교육을 위한 미팅에 참가해야 한다.
서비스만 좋다고 고객들이 일부러 외진 곳까지 멀리서 찾아올 리 없다. 음식점의 기본인 맛 관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송추가마골의 주 메뉴인 양념갈비는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개발한 양념 방식으로 여타 양념갈비와 뚜렷하게 차별화 된다. 식재료도 최고 품질의 제품만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상추에 이물질이 나올까 봐 10년 전부터 일반 제품보다 서너배 가량 비싸지만 수경재배로 키운 것만 사용한다.
김 대표는 조만간 20여개 협력업체 사장들을 불러모아 간담회를 진행할 계획이다. 가격은 비싸더라도 최고 품질의 식자재를 납품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그는 “납품업체들에게 전액 현금결제를 해주고 있다”면서 “아무리 오랫동안 거래했다고 하더라도 품질이 떨어지면 그 즉시 거래를 중단 한다”고 말했다. 유별나다는 말을 듣더라도 납품업체와의 상생은 결국 고객만족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김 대표는 음식업 성공 조건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음식점 경영을 만만하게 보고 쉽게 차리지만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고객들은 금방 외면한다”면서 “공기밥 하나라도 제대로 제공한다는 자세로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연 송추가마골이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의 송추가마골을 만들어낸 김 회장의 성공 노하우는 무엇일까?
김오겸 송추가마골 회장
1952년생으로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났다.
1970년대 후반 엘리베이터 기술자로 사우디아라비아 젯다 아파트 현장에서 근무했다. 일년간 해외현장 근무로 벌어들인 600만 원으로 식당을 열었다. 1980년 서울 성수동에서 마포갈비를 시작으로, 서울 우이동의 우이동갈비, 서울 인근 송추유원지에 송추가마골을 연달아 열었다. 1993년에 문을 연 송추가마골은 1999년 1월 본관 개·증축, 2004년 5월 송추별관 신축으로 국내 최고의 시설, 최고의 규모, 최고의 매출을 올리는 갈빗집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송추에 두 곳, 의정부에 한 곳, 양주시 덕정리에 한 곳 등 네 개의 식당을 갖고 있다. 송추가마골은 2006년 1월 농림부에서 HACCP(식품위해요소중점관리기준) 인증을 받는 등 위생관리에 철저한 식당으로 명성을 드높이고 있다.
출처
http://economy.hankooki.com/lpage/industry/200606/e2006060415350048110.htm
▶ 송추가마골 김오겸 회장의 성공전략
1. 직원들을 만족시켜라.
김 회장은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직원들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직원 스스로 직장에 만족해야 질 좋은 서비스가 나오고 좋은 서비스는 자연스럽게 매출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지론이다. 직원들의 애사심을 키우기 위해 이벤트를 열어 상금을 지급하고 단합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업계에서 이직률이 가장 낮은 직장으로 만들었다.
2. 철저한 교육만이 살 길이다.
김 회장은 “우리의 벤치마킹 대상은 일반 음식점이 아니라 호텔”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이 같은 자신감은 바로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서비스 교육’ 때문이다. 지금도 송추가마골에서는 일반 직원은 하루 두 차례, 간부급 직원들은 2주에 한 번씩 외부 강사를 통해 전문적인 서비스 교육을 받는다. 신관 3층에 직원교육장이 따로 있을 정도이다.
3. 고객만족경영을 펼쳐라.
우선 테이블부터 다르다. 8명이 앉을 수 있도록 설계된 테이블에는 다리가 두 개뿐이다. 이는 손님들이 식사를 할 때 걸리적 거리지 않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이다. 또한 테이블에는 벨이 없다. 이는 손님이 부르기 전에 미리 찾아간다는 서비스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국내 식당으로는 처음으로 에스컬레이터 설치, 특급호텔 버금가는 화장실 등 손님들로 하여금 대접받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4. 감동을 주고 감성을 자극하라.
1층 대기실 곳곳을 꽃과 그림으로 장식하여 마치 화랑에 온 기분을 느끼게 하고, 송추가마골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출렁다리는 “송추가마골은 단순히 식사만 하는 곳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편안함을 얻는 곳”이라는 감성을 자극하는 마케팅을 시행한다.
5. 최후의 승부처는 제품의 질이다.
아무리 서비스가 좋아도 음식의 맛이 좋지 않다면 최고가 될 수 없다. 송추가마골은 소금, 간장, 김치는 물론 고기에 이르기까지 생산지가 확실한 최고의 재료만을 엄선한다. 또한 철저한 위생관리로 농림부로부터 HACCP 인증을 획득하였다. “내 가족이 먹는다는 생각으로 만든다.”는 김 회장의 철칙이 고스란히 지켜지고 있다.
출처 : 김오겸 회장의 자서전 『 송추가마골 김오겸 회장의 성공신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