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하순. 한창 가을이 깊어지고 들녘은 벌써 가을걷이로 빈들만이 쓸쓸하게 여행객의 마음을 그리움에 젖게 하였다. 영등포역 근처에서 이른 점심을 먹고 여수 엑스포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12시 8분 예정된 시간에 출발을 하여 바람을 스치며 달리는 열차는 그동안 코로나로 쌓였던 잡념과 묵은 찌꺼기를 한꺼번에 씻어 내리는 것 같이 시원하다. 남으로 남으로 거침없이 달리는 열차! 기차를 타본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래도 옛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새록새록 뇌를 자극한다. 푸른 가을 하늘이 유난히도 투명하고 먼 산의 초록이 알록달록 채색 옷으로 변신을 하는데 객차에 몸을 실은 나의 눈은 주변을 살피며 감상하기에 쉴 틈이 없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기차가 느리기도 하거니와 연착하는 것이 예사롭고 한 겨울에는 객실에 난로를 피워서 추위를 달래던 시절의 모습이 아련히 머리를 스쳐간다. 50년의 세월이 세상을 이토록 급변하게 하였는가 하는 의아심을 지울 수 없고, 소용돌이치는 변화 속에 그래도 작은 역할을 하였다는 자부심으로 지금까지 견뎌 왔고 자식들이나 후배들에게도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오늘의 발전을 이루게 된 것이 70~80대의 부모님과 선배들의 피와 땀이 맺은 고귀한 결실이라고~~~~~~~~~~
옛날에는 연착을 밥 먹듯이 하던 것이 지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제 시간에 도착을 하여 남도의 땅 끝 구례구역에 내리니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다.
구례구역은 시내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어서 마을버스나 택시를 타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기에 택시를 타고 가면서 시내와 떨어진 이유에 대해서 물었더니 기사가 하는 말씀이 당시 유림들이 괴물 같은 존재가 한가롭고 조용하며 깨끗한 지역을 오염시킨다는 이유로 반대를 하여 어쩔 수 없이 남원에서 직선으로 바로 오지 못하고 곡성을 거쳐서 돌아오게 되었으며 덕분에 곡성이 좋아졌다는 설명을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하였다.
구례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리자마자 근처를 둘러보니 숙박할 곳이 금방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어 조금 걸어서 찾아 간 곳이 XX 모텔이다. 방 두 개를 정하고 짐을 푼 다음 잠시 쉬었다가 모텔 주인이 추천해 주는 근처의 작은 식당에서 생선구이 모둠 3인분과 갈치조림 2인분을 시키니 식탁이 금방 푸짐하게 차려졌다. 기차 안에서는 음식물을 전혀 먹을 수가 없어서 꼬박 4시간이 넘도록 입이 쉬고 왔더니 출출하던 차에 푸짐한 생선구이가 입맛을 한층 돋우어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하였다. 호남의 먹거리 인심이 좋은 것은 다 알려진 진실에 수수한 밥상이지만 맛은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가을 저녁은 금방 어두워지고 낮선 객지, 작은 읍내의 밤은 더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코로나로 거의 2년간은 여행도, 단체 모임도 못하다가 모처럼 여행을 오니 기분이 한층 들뜨는 느낌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예술놀이에 취하여 놀다보니 벌써 밤12시. 다음 날의 산행을 위해서 잠자리에 들었지만 쉬 잠이 들지 않아서 한참 뒤척거리다가 언제 잠이 들었는지 깜박 한 숨을 자고 시계를 보니 정각 5시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다시 눈을 감고 누웠다가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 보니 6시. 바로 일어나서 기도하고 이불을 갠 다음 세수를 하고 6시30분경에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에서 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7시30분경에 버스 터미널로 가니 차 시간이 한 시간 이상이나 남아서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8시40분 버스를 탔다. 혹시 가을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을까 걱정이 되어 서둘러 일찍 나와서 기다렸는데 사람들은 10여 명밖에 없고 차는 대형버스라 걱정과는 달리 텅텅 빈 채 썰렁하게 제시간에 출발하여 40분 정도 걸려서 9시20분에 노고단 1,100고지인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을 하였다.
바로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자동차도 넉넉히 다닐 수 있는 넓은 길이다. 길은 좋지만 비탈진 길을 계속 걷는 것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계속되는 같은 경사도에 같은 모양의 길을 걸으니 지루한 느낌이 들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변화가 그리워지는 길이다. 그렇게 한 시간 가량 가니 평평한 길로 빙글빙글 돌아서 가느냐 아니면 계단이나 가파른 지름길로 가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가 앞에 놓이니 서로 의견이 다른데 한 번은 지름길로, 한 번은 완만한 길로 가다 보니 노고단 대피소. 대피소는 잘 지어진 별장 같은 건물에 밥을 할 수 있는 시설도 갖추어지고 넓은 공간에 쉴 수 있도록 의자도 있고 단체로 온 아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컵라면을 먹느라고 야단이다. 조금 더 가니 노고단 고개다. 넓은 공간에 돌탑도 있어서 처음에는 노고단 정상인 줄 알고 소리를 치며 좋아했는데 돌무더기와 주변 모습이 정상과 흡사하여 깜박 속은 것을 알고는 잠시 쉬었다가 정상으로 가려고 하니 입구에서 예약을 해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하며 핸드폰으로 예약하는 방법이 자세한 설명과 함께 벽에 붙어 있는데 우리 같은 노인들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젊은 직원에게 그냥 하라고 했더니 척척 하는 것이 고맙기도 하고 예약하는 제도가 귀찮기도 하였지만 덕분에 무사히 예약을 하여 10여 분 더 올라가서 전망대에 도착하니 구례 벌판과 섬진강이 한 눈에 보이고 지리산 비경의 제일로 치는 노고단 운해가 장관이다. 다시 조금 더 가서 드디어 정상에 도착하였다. 티브이에서 보던 돌탑이 있고 큰 돌에 노고단(老姑檀)이라고 쓴 푯말이 우리를 반겨 주는 듯하여 힘차게 손을 뻗으며 사진을 찍으니 잠시 개선장군이나 된 듯 참으로 기분이 좋은 순간이다. 한참을 둘러보고 사진도 찍으며 즐기는 중에 시계를 보니 11시20분이다. 등산하는데 두 시간이 걸린 셈이다.
꼭 40년 전 1981년 우신고등학교에 오던 첫 해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전임 학교 선생님들과 4명이 남원에서 백무동 계곡을 따라 지리산 정상 천왕봉으로 등산하던 일이 머리를 스쳐간다. 멀리 28km 거리에 천왕봉(1,915m)이 보이고 바로 옆에 반야봉(1,732m)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3대 봉우리 중의 하나인 노고단(1,105m) 정상에 서는 것은 퇴직 후 시작한 나의 산행 13년의 큰 매듭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고 우산회의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셈이라 가슴 뿌듯함을 감출 수가 없다.
아침에 버스를 타고 올 때는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가 흐리고 답답하였는데 기사님의 말대로 산에 올라오니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는 듯 너무 화창하고 밝은 햇살이 마음과 몸을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주는 것 같아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하루다. 노고단의 가을 하늘이 너무 푸르고 아름다워서 눈이 호강을 하였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며 추억 담기를 하니 가슴으로 파고드는 신선함은 직접 체험을 해보지 않고는 실감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며칠 전에 갑작스런 한파로 나뭇잎이 얼어서 그대로 말라버리는 바람에 아름다운 단풍을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여운으로 남는다.
노고단의 유래를 보니 옛날 지리산 산신령 할머니 노고(老姑)가 있었는데 그를 위한 단(檀)을 쌓은 곳이라는 데서 노고단이 생겼다고 한다. 그만큼 신령스런 곳이라고 하겠다.
하산 길에 조금 넓고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간 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40분 정도 예술놀이를 즐기다가 천천히 내려 오다보니 올라 갈 때와는 전혀 다르게 힘이 거의 들지를 않고 계속 내려가기만 하니 조금 지루하기는 하지만 아주 쉽게, 그리고 금방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두 시가 조금 지난 시간. 아직 버스 시간은 한 시간 30분이 남았는데 너무 일찍 내려오고 보니 예술놀이를 좀 더 하고 올 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주차장 옆 테크 계단 양지 바른 곳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보다 한참 젊어 보이는 어떤 분이 여기서 버스를 타느냐고 하여 그렇다고 하고는 올 때는 사람이 몇 명 안 되고 같이 타고 온 분이 아니라서 여기까지 올 때는 어떻게 왔느냐고 했더니 서울 동서울 터미널에서 성삼재까지 오는 버스가 있어서 밤에 고속버스를 타고 성삼재 주차장에 새벽3시에 내렸다는 것이다. 해돋이를 보기 위해서 구례에서도 3시에 가는 버스가 있는데 서울에서도 그 시간을 맞춰서 버스가 온다니 놀라운 일인 것 같았다. 노고단에서 일출을 보고 반야봉까지 갔다가 왔다며 그럼 식사를 어떻게 했느냐고 하니 집에 굴러다니는 떡 조각을 가지고 와서 먹었다며 전국의 100대 명산을 찾아서 거의 매일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진정 자유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시40분 버스를 타고 4시20분경에 구례터미널에 와서 역시 택시를 타고 구례구역으로 가니 기차 시간과 딱 맞게 되어 잠시 기다려 4시40분 여수에서 오는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와서 영등포역에 내리니 20시10분이다. 구내식당에서 김밥과 우동으로 저녁을 먹고 1박2일의 노고단 산행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각자 집으로 돌아왔다.
코로나의 소용돌이로 2년을 휘둘리며 지내가다 모처럼 가을 여행으로 지리산 노고단 산행을 하게 되어 참으로 의미 있고 즐거운 여행으로 누린 행복을 가슴에 새기며 다음을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