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법정-
[금강경]은 온갖 명칭과 겉모양에 팔리지 않는 사람만이 진리를 볼 수 있다고 설파한다.
들어가는 말
"당신의 종교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은 꼭 어느 특정종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질 때만이 성립할 수 있는 질문이다.
제1명제: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종교는 더더욱 신앙의 대상이 아니다.
종교는 꼭 믿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어리석은 것이다. 생각해보자! 여기 어떤사람이 눈사람이 땡볕 아래서 절대 녹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하자! 그 믿음이 그에게 있어 매우 소중한 것이었고 확고한 것이었다 한들, 눈사람을 땡볕에 놓고 보니 녹더라는 현상의 분석보다 더 강렬하고 보편적인 믿음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그에게 눈사람은 녹지 않는다는 믿음이 성립되었다 하더래도, 또 그와 같은 믿음이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공유된다 하더래도, 결국 눈사람이 땡볕 더위 속에서 녹는다는 사실은 매우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사실로서 보다 일상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믿음들이 더 강렬한 믿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는 믿지 않아도,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냥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부활)는 것을 믿어야만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 그냥 살아가고 있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13장;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즉 사랑이란 부분적인 앎에서 전체적인 앎으로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부분적으로 알 때보다는 온전하게 전체적으로 알 때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괴팍한 남편일지라도 전체적으로 알고 이해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가? 사는가? 꼭 죽을 것인가? 죽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인가? 죽으면 못 살아나는 것인가? 죽었다가도 살아 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모든 질문이 결국 부분적 앎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온전한 앎이 올 때에는 이러한 부분적 앎이 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이더 오어 (either-or, 이것 아니면 저것) 의 질문이 다 폐하게 되는 것이다. 왜 꼭 종교가 신앙이 되어야 하는가? 종교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단순한 지식이 될 수도 있고, 종교가 하나의 고정된 믿음체계나 교리체계를 신앙의 대상으로 강요하는 것만이 종교라고 생각하는가? 나 도올은 말한다. 종교는 신앙이 아니다.
제2명제: 종교의 주제는 신이 아니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가 될 수 있다.
대개 상식적으로 신神(=God)을 말하는 경우, 신은 초월적인 존재자가 되어야만 하고, 초월적인 존재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곧 바로 믿음 즉 신앙Faith의 대상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이 존재자이고 그것이 초월적이라고 하는 생각은, 신은 우리의 상식적 감관에는 포착되지 아니하며 그의 언어.행동방식이 우리의 상식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상식에 기초한 합리적 이성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이성을 초월하는 비합리적 신앙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생각을 전제로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바로 신앙과 이성의 이원론적 대립이라고 하는 서양 중세철학의 케케묵은 전형적 개념의 짝의 본질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꼭 믿음이어야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할 때 이러한 이원적 대립은 근본적으로 해소되어버리고 또 신앙의 대상으로서의 신의 존재가 종교의 필요충분조건일 필요가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신이란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한다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그린 털보아저씨의 모습일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신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매우 우매한 질문이기 때문에 나는 구차스럽게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또 그러한 질문을 진지하게 내가 인정한다고 할 때는 나는 그러한 질문에 방편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모든 대답을 예비하고 있지만, 너무 갑자기 결론을 내리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기 때문에, 나의 구업口業은 여기서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토끼뿔은 몇 그램이냐?" 하고 누가 다짜고짜 물을 때, (애시당초 없는) 토끼뿔의 중량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하면서 세월을 낭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길거리에서 한 옛친구를 만났는데, 그가 다짜고짜 "요즘은 마누라 안 때리냐? Did you stop beating your wife?" 라고 나에게 묻는다면, 마침 내가 평소 마누라를 패던 사람이라면 이 질문은 대답이 가능할 수 있어도 근본적으로 내가 마누라를 팬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전혀 "응," "아니" 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판단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전제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신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가 이러한 문화적 전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혀 다른 문화의 언어게임 속에서 살고 있을 때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대답을 할 필요를 근원적으로 느끼지 않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신은 하나냐? 둘이냐?"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질문들은 "당신은 요즈음도 부인을 때리십니까?" " 술 끊으셨습니까?" 와 동일한 류의 질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신은" 이라는 주부主部속에는 이미 "신의 존재성"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질문은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은" 이라는 말은 이미 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전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신은 존재하는가?' 와 같은 무의미한 토톨로기(동어반복)가 되어버릴 뿐이다. '까만 새는 까만가?' 라는 질문에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것은 누구든지 상식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2024/4/4, 22:47
저녁이 깊어 둘만의 데이트를 갖고 온 쩡과 사위, 그리고 아내와 로아와 밤의 산책을 했다. 그토록이나, 겨울 내내, 기다림에 겨웁던 벚꽃이 무더기 무더기 휘황하게 환한 조명 아래에서 신비한 색깔로 촤아아아~ 펼쳐지고 있었다. 정말 꽃의 향연이랄 수 있는 현대 벚꽃대로 아래. 로아는 왼발을 얹고 잘도 오른발로 밀면서 탄다. 그 폼이 여간 능숙하다ㅎ 4월 20~21일의 포천 '푸른하늘펜션' 에서 초딩 나드리가 있어 오늘 쩡이와 협업하여 그림을 두 장 초딩단톡에 올렸다. 박영배가 총무 실력 좋다!고 칭찬하였고, 거기에는 범석이가 총동문회장이라 배려가 새겨 있기도 하다. 금일 집자 시작. 낮에 불법으로(소장이 안전교육 감) 자전거 타고 계양도서관에 갔다. 終.
24/4/5, 금욜 06:13 오랜만에 새벽에 일어나 금강경을 집자한다. 요즈음 새벽이 되면 가슴이 아프다. 심장의 이상은 아닌 것 같고 역류식도염일까? 아내는 병원 가보라는데 미적거리고 있다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사랑'이었다면 이것은 곧 '사랑은 존재하는가?' 라는 명제로 환원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전지전능한 아저씨' 였다면, 그 질문은 '전지전능한 아저씨는 존재하는가?' 가 될 것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이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이었다면, 그 질문은 곧 '내 운명을 관장하는 힘은 존재하는가?' 라는 명제로 환원될 뿐이라는 것이다. 신이라는 주어의 술부적 기술Description될 때만이 그 맥락에서 구체적이고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 보통사람들은 이런 말을 알아듣는다 해도, 이런 엄밀한 철학적 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냥 "하나님," "하느님"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보통(은)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무엇인지 규정할 필요도 없이 그냥 믿으라는 것이다. 도대체 뭘 믿으라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신은 어떤 전지전능한 유일한 절대자, 우주의 시공 속의 모든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관장하는 절대자라는 어떤 막연한 "초월신=유일신" 이라는 생각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절대자가 있으니 믿으라는 것이다. 절대자가 있다는 것(존재)과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당위는 도대체 어떠한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믿음의 대상으로서 神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일신' 즉 하나밖에 없는 신을 고집한다.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있을 수 없는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믿는 신만이 우주 전체에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신이라는 것이다.
(제22대 총선 국회의원과 비례대표 사전투표를 갓 다녀 왔다. 계산3동사무소. 참관인들이 나래비 앉아 있는 게 인상 깊다. 왜 내 아내에게는 저런 알바할 기회가 없는 걸까?ㅎㅎ 투표하러 엘베를 타는 얼굴들이 비장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선거관련하여 패찰을 목에 걸고 봉사하는 젊은이들이 나름 지나쳤을 때 뒤를 돌아보게 만든다.)
유일무이하게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든 타 존재를 배제한다는 뜻이 된다. 이렇게 되면, 모든 타 존재를 배제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스피노자의 말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쉽게 말하면 우주에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은 우주 전체 그 자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유일신임을 자처하는 모든 신들이 이름을 가지고 또 어떤 한정된 모습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존재한다'는 뜻은 저기 있는 저 나무나 의자처럼 '실체로서 서 있다'는 뜻이다. 그럼 과연 신이란 우주 밖에 있거나 우주 내에 있는 어떤 물체인가?
우리는 대표적 예로서 야훼, 혹은 여호아 하나님, 혹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들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모두 한결같이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주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하나님이라고 강변한다. 이 말에 거슬렸다간 뼈도 못추리는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 하나님 당신께서 당신이 유일무이한 신이 아니라 타 신이 존재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무엇이었든가?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Yor shall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여호와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 의미는, 많은 신들이 있는데 딴 신들은 섬기지 말고 나만을 섬기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해석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언명이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 자신이야말로 다신론자이신 것이다.
너희는 다른 신을 예배해서는 안된다.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출애굽기 34:14)
신.구약성경이 모두 잡신을 존재론적으로 전제한 위에서 성립한 유일신을 말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내 말은 아무리 위대한 성서신학자라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은 곧 여호와 하나님 당신의 말씀에 대한 거역일 뿐이다. 유일신관은 곧 성서를 부정하는 불경이다. 우리가 신을 존재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도출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신이 존재자인 한 그것은 많은 존재 중의 일자일 수밖에 없다. 야훼래야 그것은 역사적으로 잡신을 물리친 만신萬神일 뿐이다. 이러한 야훼의 유일신화는 유대민족사에 있어서 다윗왕조의 성립과 궤를 같이 한다. 즉 '지상에서의 통일왕조의 성립'과, '잡신의 통일'의 일치현상은 모든 인류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화현상인 것이다. 정치권력의 통일과 신적 권력의 통일은 상응하는 것이다.
부뚜막에는 조왕신(부뚜막신)이 있고, 툇마루에는 성주대감이 있고, 장독대에는 항아리신이 있고, 돼지우리에는 돈신이 있다.
나는 말한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신학이 진정햐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신神의 학學'(신에 관한 배움) 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신학이 만약 신의 학이라면 그것은 신의 족보학, 신의 전기학에 불과한 것이다. 실상 모든 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의 現今의 수준이, 아무리 정교한 레토릭을 가장해도 세계적으로 족보학.전기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신학이 아니다. 종교는 철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문학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예술일 수도 있는 것이요, 종교는 과학일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종교가 신학이어야만 하는가?
기독교나 그 유사한 아류의 초월신관은 그런 주장을 편다. 그러나 세계종교사에 있어서, 종교학에 있어서, 그런 편협한 규정은 불교의 엄존으로 말미암아 수정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불교는 분명히 지구의 엄청난 인구가 신앙으로 삼고 있는 고등종교이다. 그것은 종교로서 현실적으로 엄존하고 있다. 그런데 불교는 신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단언하건대 불교는 무신론인 것이다. 무신론이 어떻게 종교가 될 수 있는가?
여기 우리는 불교가 무신론이라는 테제를 보다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무신론'이란 신이 없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이 없다' 라는 말은 신이 있는데 없다 가 된다. 다시 말해서 신이 있는데 그 존재성이 부정된다는 뜻이므로, 신이 없다고 말하는 순간에 곧 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세속적 의미에서 무신론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불교는 무신론이 아니다. 불교를 굳이 무신론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근원적으로 신이 존재와 비존재라고 하는 인간의 영역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하는 맥락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신의 실체성 즉 존재성이 근원적으로 성립할 수 없으므로 역시 무신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무신론'이라는 용어를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신이 없이도 얼마든지 종교는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종교는 심리학, 철학적 성찰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모두 종교적 주제와 만나게 된다. 어찌 신만이 종교의 유일한 통로라 말할 수 있으며, 어찌 신만을 종교의 유일한 주제라 말할 수 있으랴!
제3명제: 종교는 제도가 아니다.
대강 '제도적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나 개인 홀로만의 행위가 아니라, 개인들의 집단으로서의 행위를 전제로 한다. 대강 인간의 제도라는 것은 인간집단의 어떤 기능 유지를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이다.
종교는 원래 인간 개인의 내면의 욕구에 의하여 생겨난 것이고 또 궁극적으로 나의 내면의 구원이라든가 평온이라든가 해탈이라든가 고통의 벗어남이라든가 하는 매우 사적인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도 생각해보면 혼자 있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인간은 사회적 군집생활을 하게 되어 있는 종자인 것 같다. 그러니 종교생활이라는 것도 자연히 군집생활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 같다. 종교는 인간의 사회생활의 제 형태 속에 내재하며, 사회적 형태의 존속을 위하여 필요하게 되는 제 요소, 건물, 조직, 규약, 경제 등등의 요소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를 생각할 때 종교적 제도를 부인할 수는 없다. 절깐을 부인할 수 없고, 교회를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교가 제도와 공존하고, 종교가 제도 속에 내재한다고 해서, 그 제도가 곧 종교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08:11, 아침집자 終.)
제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유위적有爲的 세계의 총칭이다. 무위無爲란 스스로 그러한(自然)것임에 반해 유위란 인간이 만든다man-made 고 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제도라는 것은 대개 약속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제도란 인간이 사회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방편적으로 만들어내는 모든 약속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가정.집.학교.입시.선거.정부부처조직이 다 약속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규율이나 규칙, 법률이나 율법 이 모두가 다 약속인 것이다.
이러한 약속 체계에 있어서 우리가 흔히 사회제도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가장 본질적인 제도가 인간존재 그 자체에 내장되어있다. 그 제도란 바로 '언어言語'라는 것이다. 언어야말로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만들어낸 가장 본질적인 약속체계인 것이다. 인간의 언어가 제도인 이상, 인간의 언어 또한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제도가 곧 종교가 아니라면, 언어 또한 곧 종교가 아닌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의 말씀이나, 불타의 말씀이 곧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나절깐이 곧 종교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을 적어놓은 『성경』이나, 불타의 말씀을 적어놓은 『불경』이 곧 종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결국 종교의 제도적 측면의 유지를 위해서 요구된 언어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의 설법시기와 장소를 AD 30~33년 갈릴리의 어느 시골로 잡는다고 한다면, 예수의 말씀은 그 순간에 듣는 사람의 고막을 울리고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을 문서로, 언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그렇게 가시적 형태로 보존했어야 할 어떤 제도적 요구가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한 제도적 요구가 없었다면 성경이라는 언어체계는 존속했을 이유가 없다. 물론 불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교회가요구한 것이고, 불경은 절깐이 요구한 것이다. 교회가 있기 전에 성경이 있었고, 절깐이 있기 전에 불경이 있엇던 것은 아니다. 교회.사찰이라는 종교제도의 발생 이전에는 오직 예수와 불타의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은 어떤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말씀대로 어떤 고정불변한 절대적 실체적 사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성경』이나 『불경』이야말로 종교의 가장 깊은 본질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사람들에게, 나의 이러한 논리는 너무도 급작스레 짧은 지면에서 直言되기 때문에, 의아스럽거나 충격으로 와 닿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상식적인 이야기다.
『원불교교전』이 20세기 초를 산 전라도인 박중빈이라는 각자覺者의 말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또 원불교교전의 성립이 원불교라는 종단의 성립 이후의 사건이라는 사실 또한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원불교교전의 성립은 원불교라는 사회적 제도의 자내적 요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교전 편찬내용이 역사적 제도적 요구의 변천에 따라 변천되어가는 것 또한 아주 평범하고 진실한 사실이다. 불교나 기독교나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 교전에는 오로지 초기집단을 구성한 인간들의 행위가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행위는 말로 다 나타낼 수가 없는 것이다.
(24/4/5, 금욜 21:58 오늘은 1초소 뒤 가로등 전선을 매립, 2동 18라인 뒤 가로등 전선 매립을 하고 쉬었다. 어제 전주임은 말했다. 오늘못하면 내일하고... 1동과 2동 사이의 물고임 벽돌 작업을 힘들게 했다고 하소했을 때 적절한 그녀의 조언에 힘입은 바 있다. 그리고 그 전날 물탱크 청소가 끝나고 나서 웬 등치 좋고 코 큰 놈이 나타나서, 페인트를 후끼로 칠하고 있었는지 코 옆에 페인트가 묻어 있다. 자기가 7~8년을 이곳에서 근무했는데, 공업계통에서 일을 하였기 때문에 계단 안전대를 했고, 저수조 내려가는 뚜껑을 제작했으며, 소장과는 별도로 전혀 관계가 없잖냐고 말하며 그렇게 일하다 보니 입대의가 끝나고 나면 내 뒷예기를 했는지 말이 나더라~~ 그래서 한번 여소장을 콱 박아버리고 그만 뒀다. 그런 얘기를 들으며 맞장구치고 있었는데 어느 미친년이 느즈막히 합류하더니 "요새 일하는 사람들은 일도 안하고 뭐하는지 모르겠다"며 말틈에 끼여드는 게 아닌가. 나는 다른사람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려드는 것을 외면하고 자리를 피하면서 기분이 슬슬 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일하여 왔는지 이년에게 설명해봤자 의미없음을 간파한 자리에 만든 공허감의 부피 말이다. '열심히 일하다가 나만 피곤하고 다치면 누가 알아줄까?' 아마도 그런 보신주의가 내게 끼어드는 결정적 요인을 그년이 제공한 게 틀림없다. 오늘 만난 어떤 할매는 고맙다면서, 아마도 1동 107호가 아닐까? 충청도 딸을 둔 할머니. 비가 안샌다고 하면서 꼼꼼하게 일을 잘해 준 덕분이라고 감사의 말씀을 주지 않았던가. 놀이터쪽에서. 이제부터는 가능하면 주민 눈에 띠지 말고, 이동하면서 전화도 가능하면 하지 말고, 말도 가능하면 주민과 섞지 않고 어떤 사명감에 불타서 몸 힘든 거 잊고 일하지 말고 여유롭게 받는 만큼보다 조금 적게 적당작당히 일하자고 결의해보는 것이다. 내 기술로 이 정도 일하면 삼백은 넘게 받아도 많은 건 아닐 것이다.
벚꽃이 팝콘처럼 터지는 가로를 걸어서 퇴근했다. 덥다고 느껴지는 하루. 야한 예기는 내일을 위한 미끼며 지천수는 기다리며 따르되 능동적이라는 걸 기억하자. 오늘 집자 終.
24/4/6, 토욜 06:26 진달래능선 출발 전
종교의 언어적(제도적) 측면을 총칭하여 '교리'라고 부른다. 그러나 교리가 곧 종교는 아니다. 불교의 교리가 곧 불교가아니며, 기독교의 교리가 곧 기독교가 아닌 것이다. 교리敎理란 곧 敎의 理요, 교의 리란 곧 교회조직이 요구한 리인 것이다. 교회가 없다면 교리가 필요할 이치가 없는 것이다. 교리는 어느 경우에도 종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교리는 반드시 종교조직이라는 이해관계와 얽혀있다. 인간의 사회조직이라는 것은 이해가 발생시키는 배타관계로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교리는 인간세의 이해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여 온 인류의 종교사는 바로 이 교리간의 충돌과 분쟁의 역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적 이해관계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도 화평한 듯이 보이는 깊은 종교심성의 인도인들이건만 항상 종교분쟁으로 나라가 갈라지고 지도자의 암살과 전쟁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모두 이 교리간의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종교를 곧바로 교리라고 이해한다면 종교는 중상, 모략, 전쟁, 암투, 암살, 음모, 살상 등등의 단어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 가장 큰 죄악을 저질러온 것이 바로 종교요, 종교간의 분쟁인 것이다(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을 본다). 인간세의 전쟁의 대부분의 명분이 바로 이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의 종교란 곧 교리인 것이다. 그것은 제도화된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다. 종교는 교리 이전의 그 무엇이 아니면 아니 되는 것이다. 종교를 교리라고 이해하게 되면 다른 종교를 가진 아버지와 아들이 싸움을 하게 되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알목하게 될 뿐이요, 더 크게는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게 될 뿐인 것이다. 경經에서 종교를 찾는다고 하는 생각은 가장 진실된 생각 같지만 실상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영원히 꿰뚫어볼 수 없는 우매한 자들의 유치한 소견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경의 그릇된 절대성을 유포한 민족이 바로 유대민족이요, 유대민족의 그러한 종교문화는 그들의 민족사적 특수 상황과 운명에서 기인될 것일 뿐이다.
자아! 한번 다시 생각해보자! 종교란 믿음이 아니요, 종교란 하느님이 아니요, 종교란 제도도 아니다. 종교란 성경도 아니요, 말씀도 아니요, 교리도 아니요, 인간의 언어도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종교란 무엇이란 말인가?
종교란 무엇인가? 바로 나는 여기에 대답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의 입을 열어서는 아니된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아닌' 또 하나의 종교를 말해버리거나, 나 자신이 하나의 종교를 만들거나, 또 하나의 제도를 만드는 죄업을 쌓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한다.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여기 바로 내가 『금강경』을 說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내가 발견한 유일한 종교에로의 해답이다.
종교란 무엇인가? 침묵할지어다. 구태여 나의 구업口業을 빌리지 않아도 금강경이 그 질문에 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면 그것은 나 김용옥의 소견이 되어버리고 만다. 금강경이란, 어떤 종교조직의 교리경전이라기보다는 두 밀레니엄 동안 한강의 모래알 수만큼의 한강들에 가득찬 모래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여 온 진리체계인 것이다. 나의 설법은 나 개인의 독단이 되기 쉽다. 그러나 금강경의 설법은 그 아무도 범접할 수 업는 역사의 축적된 진리의 氣가 설법하는 것이다. '나'는 침묵하지만, 금강경은 침묵하지 아니한다.
금강경은 불교를 말하지 아니한다. 그것은 기독교든, 불교든, 이슬람교든, 유교든, 도교든, 모든 敎(제도)를 통틀어 그 이전에 敎가 소기했던 바의 가장 궁극적 진리에 대한 몇 가지 통찰을 說하고 있을 뿐이다. 금강경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통찰이다!
나는 독자들이 금강경이 설하는 몇몇의 통찰에 감입됨으로서, 불교도든 기독교도이든 이슬람교도이든 유교도이든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구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답의 구성을 위하여 나는 금강경 이상의 좋은 레퍼런스(참고서)는 없다고 단언한다.
21세기 인류의 과제는 첫째, 자연과 인간의 슬기로운 공존
둘째, 모든 종교.이념간의 배타의 해소
셋째, 학문의 생활화이다.
인간세의 화평을 저해하는 가장 큰 요소가 바로 이 '종교'라는 문화현상이었다. 종교가 인류를 구원한다고 선포하면서 종교야말로 죄악에 대한 평화로운 해결이라고 선전하면서 종교야말로 사랑과 자비와 은혜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인류를 억압하고 잔악한 살상을 자행하는 명분이 되었으며,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무지하게 만드는 모든 끔찍한 죄악의 온상이 되었으며, 질투와 배타의 저주의 원천이 되어왔다는 이 인류사의 파라독스야말로 더 이상 감내할 수 없는 無明의 소치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종교라는 제도를 말해서는 아니 된다. 이제 우리는 종교 그 자체를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다.
종교를 나의 주관적 믿음의 체계로서 접근하거나, 신의 권위나 이름으로 접근하거나, 제도나 규약의 이해로서 접근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나의 마음에 화평을 가져온다고하는 종교가, 나의 고통을 덜어준다고 하는 종교가 어찌하여 서로 알목하고 배타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저주해야만 하는가?
06:55, 아침 집자 終. 추울발하자~~ 김밥사고 그럴려면
24/4/7, 23:38 11시에 양주에 있던가! 목초지??ㅎ 불과 몇 시간전에 들른 곳인데도 이름을 잊었네. 그곳 입장권을 5000원을 내고 들어가니 목련이 한낮의 뜰을 밝히고 굵디 굵은 소나무는, 아직도 근력을 씨근씨근 숨쉬며 근육을 키워가는 중이었다. 송림 숲에 들어가자마자 로아가 "쉬마려요!" 하였고, 진달래가 수다를 떠는 그늘을 지나 남자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쉬를 시켰다. 아! 튤립은 이국 땅 멀리에까지 와서 아직 만개를 꿈꾸고 있고 저수지 바닥은 비닐을 깔았는데 부분부분이 들떠서인가 깨끗하고 편안하지 않게 보였다. 그리스 조각을 닮은 하얀 석상은 공사를 진행하고 있어서 입장료를 반이나 깍아 주었고 벚꽃이, 버드나무의 진록색이 햇볕에 긴머리를 말리고 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심학산의 개성만두에 갔는데, 아아! 김치 만두도 만두지만 배추김치의 품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요. 싱싱한 배추가 갓 익어 만두에 싸 먹으면 세상에 그처럼 확고하게 행복한 것을. 어디가서 이런 맛을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내에게 감사하고, 단무지에도 감사하다. 그리고
신세계는 프로방스 근처 산에 기대어 있었는데, 그곳 산비탈의 짓다 만 아파트 골조가 눈에 띠었다. 누가 계획했던 멋진 꿈이 저렇게 방치되면서 세월에 바래이고 있는 걸까? 나는 쇼핑이 끝나고 주차장을 향하면서 문득 그곳을 방문하고 싶어서 "저 곳에 우리 갔다올까? 꼭 나물이 있을 것 같아." 라고 넌지시 물었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받아주지 않았다. 소소가 24만원짜리 블랙야크 트레킹화를 선물하다.
거기에서 이서방을 조인했고 그네들은 고양으로 가야하므로 헤어지다. 졸린 눈을 치뜨고 턱을 받치며 간신히 자유로를 달려 귀로에 들었다. 그리고 여덟시가 넘어 한시간 자고 나서 '메디슨카운티의 다리'를 반나마 더 보다가 끄고 서재에 앉았다. 클린트이스트우드와 메릴스트립 주연의 영화. 아프리카 까지 두둥실 떴다가ㅎㅎ 그러한 표현의 40대 딸에게서 여자의 환상과 꿈을 엿본다. 이태리에서 초딩교사를 하다가 결혼하여 미국 아이오와에서 사는 중년의 여자는 매일의 평범한 삶이 사실 행복하면서도 어렸을 때 꾸던 꿈은 아니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친다. 거기 네오그래픽에 사진 기사로 있는 남자가 오고, 때마침 남편과 아이들은 소 품평회를 떠나고 홀로 된 여인이 그 남자와 사랑을 엮는 스토리다. 그는 네셔널지오그라피의 사진 기자이고 나는 아파트의 관리주임이다. 여자에게 어필하는 게 당연히 미약하다. 그것은 극복해야 할 그 무엇이다ㅎ
24/4/11, 목, 20:59 22대 총선이 어제 끝났다. 18:00가 되자 출구조사를 발표했는데 와아~ 민주당 압승이 아닌가! 파란 상의의 민주당이 환호하는 가운데에는 이재명과 선대위원장을 맡은 ㅇㅇㅇ 그리고 이해찬(많이 늙었다) 이 앉아 있었고 2열에는 서영교와 정청래가 보였다. 반면에 국힘당은 코를 빠뜨리고 충격을 먹은 표정들이 되고 말았다. 검사출신 한동훈도 검은테 안경 속에서 창백한 모습. 놈의 그 모습을 보니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사람들을 잡아 넣는 기술자의 눈에 모든 게 범죄자로 보일 것이었고 실제로 그게 검사들의 삶이었다. 그런데 정치의 최고권자가 검찰출신이 대통령이 되니 근 1년 넘게 정적 이재명을 엮어 넣을려고 경제고 민생이고 보안이고 죄다 내팽겨쳐지고 말았다. 세상은 지금 괴상망측하게 변하고 말았다. 서울대에 9번 재수해서 들어갔다는 대통령, 서울대 출신들은 이제 다시는 대통령 되긴 틀린, 국민들에게 똥밟힌 신세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어제 소성막걸리를 한병 사 먹었다. 자축하고자 함이었쥐~ 멍게는 오래 뜸들이다가 먹어야했었지만...ㅎ 그러나 내가 정치 외곬은 아닌가!? 우려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게 판명되었다. 완전 압승이다. 야당이 총선에서 이렇게 이겼다는 게 그만큼 윤대통령이 정치를 못한다는 반증이다. 국힘의 선거비상대책위원장인 한동훈은 검사처럼 따지고 들고 비틀어대고 조소했다. 반대로 이재명은 점잖케 유세를 하는 게 눈에 띄었다. 그러니까 아이가 악에 바쳐서 민낯으로 덤벼드는 꼴이었으니 정치 초년생이 값비싼 경험을 한 거 였다. 대충 민주당 175석 국힘 108석 새로운미래 1석 개혁신당 3석 조국혁신당 12석 무소속1석
희한하게도 선거 막바지에 민주당의 김준혁 막말 폭탄, 이대 김활란총장이 미군에게 여학생 성접대 했다고. 유튜브 방송 2년전의. 그뿐인가?? 이황이 누구인가! 경상도 유림의 종조를 자지의 지존이라고 개소리를 해댄 놈을, 그런데 그런 놈이 당선됐잖유 허~ 거 참 하여간 그 파동으로 인해 초접전 지역의 민주당 인물들이 20여명 쯤을 떨어졌을 것이라고 이해찬의 개탄이 있었다ㅜㅜ
각설하공
그런데 요즈음 더욱 희한한 사태는 萬敎를 통섭해야 할 불교가 매우 배타적인 의식에 사로잡혀 간다는 것이다. 스님ㄷ들이 불교만이 구원과 해탈의 유일한 길이라고 아집상을 틀고 앉아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배타주의적 환경과의 접촉에서 반사적으로 형성되어간 병폐라 할 수 있다.
배타排他는 결국 排自이다. 남을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배척하는 것이요, 나를 배척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옹졸하고 졸렬하고 치졸하게 오그려 붙이는 것이다. 배타를 통해 나를 확장한다는 것은 일시적인 성과를 거둘지 몰라도 나의 축소와 소멸을 초대할 뿐이다.
21세기 조선의 기독교는 결코 20세기의 팽창주의 추세를 유지할 길이 없다. 만약 그러한 팽창주의적 확대만을 모색한다면 기독교는 이땅에서 불운한 역방향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개인적으로 만난 인도의 한 현자의 말을 나는 생각한다. "종교란 본시 사람의 수만큼 각기 다른 종교가 필요한 것이지요. 종교에 대해 일원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훌륭한 종교의 교사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제각기 다른 종교의 형태를 발견해주는 것입니다. 마치 옷이 사람마다 그취향과 색각모가 크기가 모두 다르듯이......"
『금강경』에 대하여
조선의 불교, 가장 많이 독송하고 암송하고 낭송하고 인용하는 소의경전을 꼽으라 하면 그 첫째로 『반야심경般若心經』이 꼽히고, 그 둘째로 『금강경』이 꼽힌다.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이야기하면 임제臨濟류의 선禪을 적통으로 하는 선종禪宗중심의 역사이고 보면, 선종에서거의 유일하게 소의경전으로 삼는 것이 『금강경』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금강경이야말로 선종의 기초경전인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다.
선禪이란 본시, 중국의 당대에나 내려와서, 이전의 일체의 교학불교를 부정하는 데서 생겨난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의 아주 래디칼한 토착적 운동이고보면, 선禪은 문자로 쓰인 모든 경전을 부정하는 일종의 반불교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선은 불교라고 말하기보다는 중국인들의 어떤 시적詩的 영감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금강경이 항상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마치 금강경이 선종의 대표경전인 양 착각되어온 소이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중국선禪의 실제 개조라 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인 혜능慧能, 638~713의 삶의 이야기와 『금강경』에 얽혀있다 함이다.
혜능의 속성은 노盧씨요, 그 본관은 범양笵陽이었다. 그의 부친, 행도行瑫는 무덕 연간에 좌천되어 영남嶺南으로 유배되어 신주(광동성 신흥현) 의 백성이 되었다. 3세 때에 부친이 돌아가셨다. 후에 혜능은 노모와 함께 남해南海로 이사갔고 거기서 밑창이 째지라 가난한 살림을 이끌게 되었다. 혜능은 나무꾼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다. 일자무식 노동자였던 것이다.
(22:12, 이만 집자를 마치고자 한다. 고추나물을 한줌 뜯어 와ㅎ 아내가 삶아 상에 올렸는데 나물맛이 그저 그랬다. 들기름과 고추장이 빠져서 그랬구나! 한다. 오늘 포천 푸른하늘펜션 관련 임원단톡에서 녹양역 만나는 시간과 시장 보는 거 등등의 의견 나누었다. 5동 앞베란다 느티목을 조금 커다랗게 파이를 만들었다. 풍성한 그리메를 만들고도 싶어졌어. 그리고 적목련에 붙은 덩굴을 제거하며 가슴이 아프다는 선생님과 말을 트고. 수요일인 어제 총선으로 쉬어서인지 일주일이 가뿐하다. 모임 진행과 관련하여 의견 잘 냈다고 부질없이 어깨에 힘주지 말고 겸허하게 친구들을 대할 것이며 스비의 뭐랄까? 공독차지 그런 포지션도 잊어버리고 그놈의 바탕이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자. 지금의 이 지점에서의 내 조금 약오르는 현상을 젊을 때는 노골적으로 표출했었다. 그건 나의 약점이 아닐 수 없다.)
24/4/12, 금욜 06:33
혜능은 그여관까지 다 배달을 해주고 그 손님에게서 돈을 받았다. 그리고 여관 문밖을 나서려는데 바로 문깐 방에 묵고 있던 어느 손님이 경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경전의 내용이 귀에 쏘옥 듥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 경이 바로 문제의 『금강경』이었고, 문제의 구절은 「장엄정토분」, 제 오절에 있는 '응무소주이생기심 應無所住而生其心(반드시 머무는 곳이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이라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나무꾼 혜능은 그 구절을 듣자마자 마음이 활짝 개이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바로 선가의 개조開祖들이 소의경전으로서, 이 『금강경』이라는 경전을 중시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육조六祖 혜능의 출가의 동기가 바로 이 『금강경』에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혜능이 득도성불한 후에도 이 『금강경』을 계속 설파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금강경과 선종은 떼어 놓을래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금강경이 선종의 대표경전인 양 착각되어 온 두 번째 이유, 금강경은 '반야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반야 사상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반야라는 것을 공통으로 표방하는, 기독교의 『신약성경』이 쓰여지기 시작한 1세기, 같은 시기에, 초기 불교승단에서 불꽃같이 타오른 새로운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아주 쉽게 말하면, 반야사상의 성립, 즉 반야경의 성립이 곧 대승불교의 출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출발과 대승불교의 출발은 거의 같은 시기에 같은 언어문자권(희랍어-산스크리트어)내에서, 아주 비슷한 혁신적 생각을 표방하면서 인류사에 등장한 일대종교운동이었던 것이다. 요즈음의 세계사상계에서는 이 양대 종교운동을 같은 문화권 내에서 같은 사상축을 표방한 운동으로 본다.
소승 아라한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으로 원시불교의 팔정도를 든다면, 대승보살에게 주어지는 실천덕목은 '육바라밀'이라는 것이다.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여섯 덕목을 말한다. 앞의 5바라밀은 최후의 지혜바라밀을 얻기 위한 준비수단으로 요청되는 것이다. 바로 이 지혜바라밀, 즉 혜지의 완성, 그것을 우리가 반야(쁘라기냐의 음역)라고 부르는 것이다.
1) 보시布('보'라고 치니 안나와서 '포'라고 치니 나왔다)施란 요새말로 하면 '사랑'이요, '베품'이다. 내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눔'이다.
2) 지계持戒란 계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삶의 도덕성이요 일정한 삶의 규율성이다. 조갑지에 꽉물리면 곤란해도 살짝 스치는 김에 담구었다 빼면 안될 것도 없다, 아니 그 물건을 작두로 짤라버리면 어떠할까? 율사님의 사생활에는 과연 흠잡을 구멍이 없을까?
3)인욕忍辱이란 욕됨을 참는 것을 말한다. '용서'를 의미한다. 나에게 욕을 퍼붓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원망이나 복수의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된다. 모기를 때려 죽여야 할까? 그대로 인욕해야 할까?
4)정진이란 올바른 삶의 방향으로 흔들림 없이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오로지 구부림 없이 불도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5)선정禪定이란 명상에 의한 정신의 집중과 통일을 말한다. 인도인은 요가, 중국인은 조식調息 도인道引으로 그리고 후대에는 좌선坐禪으로 발전.정착한 것이다.
여섯 번째의 바라밀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반야 즉 지혜란 무엇인가? 바로 여기에 대한 대답이 곧 『금강경』이란 서물을 구성하는 것이다. 금강경은 곧 『금강반야바라밀경』의 약칭이며, 금강경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라는 것을 최초로 명료하게 규정한 대승운동의 본고장인 것이다.
(07:59, 곧 여덟시. 이제부터는 기타를 만나는 시간ㅎ 푸른하늘펜션 모임이 불과 일주일과 이틀이 남았다. 나 출근시간은 집에서 08:35, 서해그린3차 정문에 도착하는 시간은 08:50. 아침집자 終.)
24/4/12일 13:17, 사무실. 전주임 연차 씀. 오전에 5동 1라인의 외곽의 슬러지를 제거. 강상기씨가 들어가서 파냄. 김영안씨 볼미어터져 늑장부림. 그래서 이곳에서는 멀티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줌. 본인도 알고 있다고 하였슴. 조그만 단체에는 꼭 이런 류의 양아치가 있게 마련임. 크게 언성을 높이지 않은 것은 나의 노회함임. 아침의 집자를 이어 간다.
반야경으로서 우리는 현장玄奘이 칙명을 받들어 조역詔譯한 『대반야경』을 꼽는다. 그것은 16회 600권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서물이다. 제9회 권제577에서 「능단금강분」이라는 한 챕터를 만나게 된다. 이 챕터에 실린 「능단금강분』의 내용이야말로 우리가 말하는 『금강경』과 일치하는 것이다. 즉 600권 중의 577권에 자리잡고 있는 서물이 바로 우리에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 『금강경』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현장의 『대반야경』 이전에 독립경전으로써 한역된 『금강경』이 있었는가? 물론 있었다! 쉬엔짱(현장, 602~664)이라고 하는 역사적 인물은, 『대반야경』을 위시하여 유가사지론, 섭대승론, 유식론, 구사론 76부 1,347권에 이르는 방대한 역경사업(62세 밖에 못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반에 걸쳐 논의되어야 할 문제인 것이다.
그는 하남성 낙양의 사람! 그가 살았던 시기는 수당교체의 난세였다. 장안.성도 각지에서 스승을 구하고, 열반경, 섭대승론, 소승의 제론에 통달했으나 의문이 끊이지 않았다. 몸소 직접 산스크리트 원전에 기초하여 그 뜻을 철저히 고구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찬 27세의 청년, 독력으로 만난을 각오하고 장안을 출발하여 구도행의 걸음을 내친 것이 정관 3년(629)! 간난신고를 무릅쓰며 신강성 북로를 뚫고, 서투르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북인도로 들어가 중인도의 나란타사寺에까지 이르렀다. 그곳에서 계현(529~645) 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착.세친계의 유가유식의 교학을 배웠다. 인도 각지의 불적을 방문하고, 불상.불사리를 비롯하여 범본 불경 657부를 수집하여, 파미르고원을 넘고 천산남로남도를 통하여 장안에 도착한 것이 정관 19년(645)! 그의 나이 43세! 당태종은 너무 기뻐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가 62세로 세상을 뜨기까지 19년 동안 홍복사, 자은사, 옥화궁에서번역한 그 방대한 사업이 오늘 『대장경』의 위용의 골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여행기인 『대당서역기 』가 명대에 희곡화된 것이 바로 '서유기'!
현장 이전의 번역을 '구역舊譯'이라고 부른다. '구역'의 대표로서 우리는 후진後秦 구마라집(350~409년경)과 진陳 진체(499~569)를 꼽는다. 그렇다면 신역이 구역보다 더 정확하고 우수한가? 반드시 그렇게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사계의 정론이다. 나 역시 신역이 구역의 아름다움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통 『금강경』이라 부르는 것은 현장역본을 저본으로 삼지 아니한다. 역사적으로 금강경으로 유통되어 온 것은 바로 최고역이라 할 수 있는 꾸마라지바鳩摩羅什의 역본이다. 다시 말해서 신역이 아니라 구역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금강경』이라고 부르는 텍스트는 라집의 역본,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양梁나라의 소명태자(501~531)가 삼십이분으로 분절하여, 각 분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가 바로 『벽암록』 제1칙의 주인공, 달마와 초면하고 '몰라'(불식不識)의 일화를 남긴 그 유명한 대보살 황제, 남조불교의 극성盛시대를 연출한 양무제(464~549)의 장자였다. 이름은 소통, 자는 덕시, 태어난 다음해에 바로황태자가 되었고 인품이 총명하고 인애롭고 호학의 일도一道를 걸었다.
내가 여기서 강해하려는 금강경은 물론 라집이 역한 금강경이다. 이 라집의 가장 정본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있는 『고려대장경』판본이다. 그리고 사계의 가장 정밀한 판본으로 통용되고 있는 일본의 『대정대장경』
...24/4/12, 18:58, 계산삼거리 산 쪽의 악기점에서 줄감개 가격이 오천원. 구멍을 넓히고 해야해서 집에 왔지만 번잡해서 되가지 않았다. 오늘 길에 태습이, 내가 귀찮게 생각 된 초안을 잡아달라고 하자 자기가직접 올린다고 했다. 그 말을 겸허히 받아들이기로 한다. 여자남자 공히 1박2일에 십만원은 좀 과하지 않나? 회장인 영배가 좀 쓰거나 수석이 좀 쓰거나 어쨌뜬 좀 일주일 여 앞두고 회비 십만원에 장소도 별로 편하지 않은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 회기에는 총무로서의 책임감이 있어서 열심히 했지만 지금 그때의 열정이 나는 없다. 도무지 윤기 잃은 열정을 얻따 쓸 것인가! 그럴바엔 태스비가 하든 ㅇㅈ가 하든 건숙이가 하든 해야 옳다고 결론짓는다. 진작의 내 생각이다. 하지만 그 놈도 참 희한하긴 하다ㅎㅎ
일본의 '대정대장경'도 바로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통탄스러운 것은 조선조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모든 금강경이 이 정본인 우리 『고려대장경』본을 거의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금강경』 강해는 고려대장경 판본을 최초로 사용한 우리말 『금강경』이라는데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고려대장경』이라 하는 것은, 현종 때 새긴 초조대장경판(1011~1087)과 제2차 의천대장경판(1092~1100)이 1232년(고종19) 몽고군의 침입으로 불타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 등을 중심으로 고종 23년(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하여 16년 만에 재조, 완성한 것이다. 고종38년, 1251년에 완성. 고려대장경은 정확하게 말하면 "고려제국대장도감판"이라 해야 옳다. 우리의 『금강경』은 1238년(무술)에 조조된 것이다.
1960년 내가 당시로서는 폐찰이 되다시피 쇠락하였던 고찰, 천안의 광덕면에 자리잡고 있는 광덕사에서 승려생활을 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계통을 밟아 정식 출가를 한 것은 아니었다. 머리 깍고 승복 입고 염불을 외우며 승려와 구분 없이 지냈으니 출가인과 다름이 없었다.
불교학개론강의를 듣고 불교를 몸소 체득하고 싶어 출가승이 되었건만, 나는 '반야심경'이란 그냥 아무런 의미도 되지않는 그냥 염불용의 기호체계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구멍 숭숭 뚫린 판잣대기로 이어붙인 시원한 똥숫간에 앉아 있는데, 밑 닦으라고 꾸겨놓은 휴지쪽 한 장에 『반야바람밀다심경』이 현토를 달이 뜻이 통하도록 해석되어 있는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꾸부린 가랭이가 완전히 마비되도록 하염없이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휴지쪽에서 튀어나오는 의미가 내 몸뚱아리에 헤아릴 수 없는 모종의 전율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1
어느 대선사와의 만남이 계기가 된 것도 아니요, 석학의 열띤 강의속에서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싱그러운 호도닢 향기바람이 구수한 분뇨에 배어 태고의 토담의 정취를 한층 더 짙게 만들어 주는 바로 그 측간의
2024/4/15, 21:40 아내는 저녁 내내 밥을 지어 쩡이네와 나를 먹였다. 소소가 가져왔다는 속초강정, 분홍 쏘세지, 김치지개, 두릅과 다래순으로 석식을 마쳤다. 쪽파(퇴근하면서 계산시장에서 5천원에 샀다)를 다듬어 열무김치를 만들고 설겆이에 이어 주방을 쓸고 닦는 모습을 본다. 그 모습이 하도 존경스럽고 나같지 않아서(깨끗하게 하려고 하는 마음이) 궁디를 만져 준다. 살집은 의외로 말랑하여 촉감에 남았는데 근육이 사라졌는가 싶다ㅋㅋ
어제 일요일 585고지의 계곡은 정말 무더울 정도였다. 나무에 보자기를 걸치고 잠을 청하였는데, 얼마나 됐을까? 바람에 벗겨지자 햇볕이 쏘아들어 더이상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하는수 없이 잠을 포기하고 계곡 청정수에 몸을 넣었다 다시 바위로 와서 몸을 바람에 날렸다. 가재가, 난 죽어서 부르튼 모습으로 보았지만 손으로 잡아서 보니 살아서 막 가위를 매칭시키고 있는 거 아닌가! 엄청나게 크고 사나운 두 발갈퀴에 물리면 아마도 피가 나리라. 아! 깊은 계곡 상류에는 아직도 가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새삼 이 세상이 예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는 안도를 한다. 꽃같이 생겨 누운 산벚나무꽃이파리는 어쩜 그리도 해맑은가! 나는 그계곡을 오팔오계곡이라고 부를 것이다. 오팔오 고지는 나 병사 때에 자대와 파견부대를 잇는 지름길의 산이다. 사방댐 비슷하게 설치한 콘크리트 구조물, 물을 끌어 가는 호스의 터진 사이로 물이 삐쳐나오고, 그것을 잇대어 어떠케든 물길을 터 주어보려고 시도하던 나의 노력은... 그러나 실패가 분명함은 꽤 아래로 내려와서 손으로 배관의 온도를 측정하고 나서의 유추다. 발을 식히고 나물을 뜯어간 어떤 남자의 흔적을 보며 놀랐다. 돌각담을 뒤덮은 다래순을 따던 태양의 사위어듬이여! 환타와 바나나우유를 먹으며 귀로에 들던 구리-ㅇㅇ고속국도와 양주휴게소에서의 쪽잠 30분의 개운함이여!
새벽 3시 20분에 주유를 하고 계양을 출발하여 오가리 밀성박씨촌을 지나 가파른 산을 향했다. 두릅이 앙증맞게 그 싹을 내뻗었고 그 얼마쯤 후에 흰 1톤 트럭의 도착으로, 숨가쁜 도망질ㅎㅎ 가지친 다른 능선에 도착해 쉬면서 먹던 과자와 흙먼지 조심조심하며 멧돼지를 조심하던 능선의 비탈 끝, 계곡에 형성된 나무의 자태, 잣나무 숲을 뚫고 어림짐작으로 하산하여 그 때에야 나물꾼들 두엇을 만나며 풀어지던 긴장... 아마도 내 봄은 이래야 자유롭다 하리라. 늙어 죽을 때까지 건강하여 이렇게 자유롭게 산을 타고 들을 밟자고 맹세를 하였다. 열오른 몸을 식히러 관음산 지하도로 가서 알탕을 했다. 처음은 춥고 나중은 전혀 춥지 않은 계곡알탕. 올라오다가 흙육덕을 밟아 떨어지던 위험ㅎ 그 지하도 끝의 영평천 가생이엔 산괘불꽃이 노오랗게 군락을 이루며 "건강만세!"를 소리높여 외치며 이생을 찬미하고 있었다.
마루바닥에 떨어져 있던 휴지쪽 한 장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의 전율이 나의 인생에 '불학佛學'이라고 하는 인류지혜의 보고를 맞아들이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언젠가 내 손으로 그것을 상세히 파헤쳐 보리라고 결심하면서 마비된 다리를 어루만져 가면서 그 뒷깐을 절룩절룩 걸어나왔던 생각이 난다. 그 '언젠가'가 삼십여 년의 세월을 소요하게 될 줄이야!
내가 다음으로 접한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수뜨바』라고 불리우는 『금강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금강경』은 비교적 짧은 글이기는 했지만 반야심경처럼 압축되어 있지도 않았고, 우선 나에게 아무런 '논리적인' 사색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바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말으니 반복이 심했고, 따라서 아주 진부하고 상투적인 말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마디로 아무런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금강경은 '대중을 위한 용속한 경전'일 뿐 학문적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는 유치한 책이라고 덮어버리고 말았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은 그 성립시기가 약 3세기 정도의 세월을 격한다. 반야심경은 금강경에비해 분량이 극소한 것이지만, 그 내용은 금강경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개념과 논리적 결구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경은 원시불교의 아주 소박한 수뜨라의 형태, 즉 '여시아문'으로 시작하여 '환희봉행'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소박한 붓다설법의 기술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반야심경은 성격이 전혀 다르다. 반야심경은 이미 이러한 초기 대중운동이 당대의 최고의 식자들에게 소화되면서 집필되기 시작한 모든 철학적 논서의 개념들을 소화하고, 그것을 압축하여 놓은, 실생활적 설법이 아닌 철학적 논설이다. 따라서 반야심경의 진정한 이해는 용수龍樹의 『중론』 서書와 같은 삼론三論의 논지라든가 반야경계열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공空사상에 대한 역사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의 전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반야심경이, 금강경에서 표방하고 있는 사상내용의 4세기 동안의 개념적이고 논리적인 전개를 압축해놓은 것이라고 한다면, 금강경은 반야심경의 모든 가능성을 포섭하고 있는 비개념적. 비논리적 배태胚胎와도 같은 것이다.
금강경은 고졸古拙하나 참신하기 그지없고, 소략하나 세밀하기 그지없고, 밋밋하나 심오하기 이를 데 없다. 개념과 개념의 충돌의 벌판에서 논리의 창칼을 휘두르는 호전의 만용을 즐기었던 동승, 도올이 그러한 고졸한 청신의 맛을 흠상하기에는 너무도 어렷던 것이다. 삼십년의 세월이 흘러서야 겨우그 일단의 모미를 씹게 될 줄이야!
(22:36, 기타를 계산삼거리에서 공촌동 방향으로 300매터 쯤의 'ㅇㅇㅇ창조' 라는 상호에 맡겼는데, 주인은 윗복개천에 술먹으로 가 있고 그래서 옆의 편의점에 맡겼다. 줄감개1과 멜빵 볼트1 그리고 육각볼트로 수평 좀 봐주라고 부탁했다. 자전거로 귀로에 들면서 영배랑 통화했다. 그는 초딩동창 회장. 포천하늘아래펜션에서 기타 같이 연주해보자고 처음 꺼냈다. 옥부회장의 아이디어라고 하면서. 처음엔 뜨악하면서 모가 있냐, 반주기 있냐?던 그도 마침내 동의를 표방했다. 태습에게는 이 말 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에게 어떤 말을 하면 불편하게 부정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내 본능이 의식했던 모양이다. '명길 친구! 미안하네..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내가 자네보다 못나서 그러하니 이해하시게' 이런 메시지를 그에게서 받았다. 내 대답은 '앗지룰 몬말하나시키' 다 사람마다 장점이 있고 약점이 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사람마다 다아 쓸 것이 있고 못 쓸 것이 있다가 아닐까? 이왕지사 앞의 표현이 훨 포용적인 언사일테다. 태스비의 장점은 다방면의 능력이고, 단점은 말이 다변이고 전쟁시엔 같이 할 수 있으나 평화시엔 함께 할 수 없다는 그런 느낌을 가졌다. 타인의 공을 가로채 자기화하려는 그런 양태. 내 단점이 왜 없으랴? 내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이제는 나는 타인을 질투하지 않고 그의 높은 점을 인정하고, 내 못남을 앙알앙알이며 체하지 않을 만큼 마음수양이 되어 있다. 오늘 집자 終.)
24/4/23, 화욜 07:59
"나는 행복하구나!" 라고 부지불식 느낀다. 여섯시 쯤에 눈 떠 조금 치대다가 반쯤에 일어나 지금까지 밥 먹고, 틱톡을 보고, 김고은 시구를 본 후 일본의 유명한 여자 시구인의 매력적인 미소를 만났다. 일본 여자들의 콘텐츠는 어딘가 우리네와는 다른 역동적이고 섹시미가 농후하면서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러고났는데도 아직 여덟시가 아닌가! 지금부터는 김용옥 선생의 금강경강해를 집자하려고 하는 것이다. 왼 귀 상부의 점의 기묘한 울림이랄까, 간지러움이랄까, 세상을 온통 그쪽의 감각에 쏠리게 만드는 그것은 진짜 암은 아닐까? 어제는 일요일 그저께와 그끄저께는 포천의 '푸른하늘펜션과 산정호수'에 다녈왔다.
태섭이가 지금 이후부터는 동창회에 안 나타나겠다고, 경조사엔 온다고 하며 칩거에 들어갔고, 그 사연은 술판이 무를익을 즈음 다음주 제천의 행사에 많이들 참석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조금 지지부진하게 이야기가 길어지자 고광원이가 한마디 불쑥 던졌고, 그 다음에 유인춘이가 또 감정을 얹어 던졌고, 정빈이가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전달하였으나 이내 둘의 고성다툼이 전개되었고, 정숙이가 아주 맑은 가을계곡의 깨끗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쟤는 자기의 말이 왕인 애야~"
다음날 제네시스 안에서 습이를 다독이던 일이며, 이 사태를 당하며 비로소 습이가 아직 거기에 이르지를 못했구나! 범석이와 인춘이 광원이는 나와는 한단계쯤의 차이로 그들이 앞서겠지만 별 차이는 없고, 습이는 그들과 최소한 3단계 아래에 미칠뿐이라는 것을 오감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나는 책을 많이 읽어서 삶에 도움이 되는구나! 새삼 이번 여행에서 범석이를 재발견하는 쾌거를 이뤘다. 그는 한마디로 사감이다. 사감은 모든 정황을 꿰뚫고 있으며 아우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가 조금 불편했었구나. 왜? 내가 어떤 경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돌아오는 일요일날 아마도 제천에 못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쯤에는 친구들에게 많이 참석해달라는 말을 해야만 한다. 그게 내 역할이고 그것을 범석이는 예의주시할 거였다. 그것은 형식이며 피해갈 수 없는 절차이다.
그런데 나도 못가면서 무슨 예길 어떻게 펼쳐 주어야 할까?
우리가 일반적으로 經(수뜨라)이라고 부르는 원래의 최초의 의미는 "구슬을 꿴 스트링, 코드" 라는 것인데 이것은 바라문교에서 설교의 내용을 짧은 문구로써 간결하게 압축시켜 암송에 편리하게 만든 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금강경』은 문자화되기 전에 구전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은 보고 분석해야 할 철학서가 아니라, 듣고 즐기고 깨달아야 할 음악이요, 한 편의 시詩인 것이다.
금강경은 제일품으로부터 전체의 절반에 해당되는 제십육품까지가 하나의 단락을 형성하고, 제십칠품으로부터 제 삼십이품까지가 또 하나의 큰 단락을 형성한다. 전반의 주제를 후반에서 반복하고 있는 인상을 받는다.
구마라집의 수제자 승조는 전반은 중생공衆生空을 설한 것이요, 후반은 법공法空을 말한 것이라 했고, 지의와 길장은 이를 중설중언으로 간주하고, 전반은 전회중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후회중을 위한 것이며, 또 전반은 이근을 위한 것이요 후반은 둔근을 위한 것이라 했던 것이다.
나는 금강경이 바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과 같은 음악적 구성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강경은 그것을 다 암송하는 자들에게만 들리게 되어 있는 명심포니 중의 명심포니인 것이다. 금강경은 외워야 한다. 금강경은 생활속에서 느껴야 한다. 금강경은 그 향기 속에 취해 있을 때만이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묘미는 곧 간결한 주제와 그 반복의 묘미인 것이다.
금강경은 워낙 심오하고 워낙 근본적이고 워낙 철저한 '무아'의 주제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그 주제는 끊임없이 변주형식으로 반복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인지될 길이 없다. 그것은 번쇄한 개념의 나열이 아니라 득도의 환희를 불러일으키는 신의 부름이다. 아~ 위대하도다! 금강의 지혜여!
소명태자가 이에취해 그 유명한 분절을 창조했다면, 나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이 금강경의 향기에 취했던 자로서, 두 얼굴의 사나이, 총명과 예지로 번뜩이는가 하면 탐욕과 음험한 살육의 화신인 사나이, 경세치용의 명군인가 하면 조선의 역사를 부도덕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나이, 수양대군 세조를 서슴치 않고 들겠다.
(終, 08:34 행복하게 하루의 들판으로 나아가자~ 어제 소장과 2동 옥상방수를 하면서 물었다. 동대표님들 내 예긴 안하던가요. 없었어요. 경비들 예길 자주 하더라구요. 인사를 할 때 다음부터는 회장에게 공손히 먼저먼저먼저 하자! 전주임은 말했다. 11월달에동대표들 잘 선출해야 할텐데... 그렇치 않으면 그만둘 수도 있어요. 난 그 말의 행간을 잃는 능력이 있다. 그렇구나!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조급하지 않쿠나!)
24/4/24, 08:21 집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ㅜㅜ(반납시간) 이렇게 늦게서야 컴에 앉는 소이는 무엇이냐?ㅜㅜ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에 <금강경언해> 등의 불경국역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 <월인천강지곡>이니 <석보상절>이니 하는 우리말로 이루어진 위대한 불교서사시가 창작되었다는 사실, 또 인류 역사에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우리민중 자신의 불교음악인 <영산회상곡>이 작곡되었다는 사실 등등은, 억불숭유 정책을 추구하는 유교이념국가인 조선에서 왜 언문과 불교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등장했는가에 대한 절묘한 역사의 틈새를 엿보게 하는 것이다.
세조실록 권 32, 10년갑신2월8일 條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공조판서 김수온, 인순부윤 한계희, 도승지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금강경을 譯하게 하였다"
국역은 주로 한계희가 한 것이라 하고 효령대군과 판교종사인 해초 등의 승려에게 교정케 하였다 한다. 애사哀史의 주인고아 단종, 사육신 등 세조의 잔악한 칼날에 베임을 당한 수없는 원혼의 피맺힌 한을 압구정 앞을 흐르는 도도한 한강물에씻어보내기라도 할 셈이었나?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조선초의 고승 함허당 득통기화의 <금강경오가해설의>를 든다.
(벌써 08:34가 되었넹ㅜㅜ 출근하장ㅋㅋ 힘을 내자 명길아 왜 이렇게 골골하면서 아픔질하니?? 아침에 일어날 때 식은땀이 흥건했었는데 푸욱 자서인지 머리통 왼쪽의 아픈게 많이 나아졌다. 이게 암일수도 있겠구나 싶다. 설사 암이라 해도 담담히 받아들이려 한다. 생사가 동전의 양면이 아니겠는가!)
16:27, 주소장 오후 반차. 바깥은 화안함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설할 뿐이다. 본 강해는 나 도올의 실존적 주석이다. 나는 도올서원 제12림에서 금강경을 강의할 때 기본적으로 금강경 라집역 고려본과 산스크리트 원문 이외는 읽지를 않았다.
금강경은 범본이 엄존한다. 금강경은 범본의 번역서이다. 그러나 우리가 금강경을 말할 때는 결코 범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금강경이라는 인식을 형성해온 것은 라집의 금강경이다. 그리고 그 의미체계는 범본과 무관한 독자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본은 오직 우리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장판이 유일한 것이다. 그것이 한문으로써 이해되어온 금강경의 절대적 기준이다.
대강 19세기 중엽 이후, 즉 186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오렌지강 상류지역에서 대량ㅡ의 다이아몬드가 발견되고부터의 일이다. 다이아몬드의 찬란함을 느끼게 해주는 것은, 들어간 빛이 하부로 새지 않고 상면으로 다시 나오게 고안된 58면의 브릴리언트 커트라고하는 특수 연마방식이 개발된 후의 사건이므로, 그것도 17세기 말 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다.
흑연은 벌집모양의 6면체 평면결합이 중첩되어 있는 방식인데, 다이안몬드는 정삼각형 4개를 합쳐놓은 것과 같은 정삼각 뿔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원자가 등거리의 4개의 원자와 결합하고 있는 입체적 방식이다. 따라서 트리흑연이 쉽게 마멸되는 반면, 다이아몬드는 놀라운, 아니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체로서는 가장 강도가 높은, 경성gardness을 과시하게 되는 것이다.
1955년 제너랄 일렉트릭에서 1평방인치에 60만~ 150만 파운드의 압력과, 750~2750도섭씨의 고온의 조건을 만들어 다이아몬드를 합성해내는데 성공하였고, 오늘날은 약 1억캐럿량의 인조다이아몬드가 제조되어 공업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연상태에서 킴벌라이트 암석 속에 들어 있는 다이아몬드는 최소한 지하 120km 이상의 깊이의 압력에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이 대개는 화산폭발시에 자상으로 밀려나와 형성된 1차 광상이나 2차 광상에서 채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희귀한 광물이 역사적으로 인도에서만이 채취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금강경의 올바른 번역은 벼락경 즉 벽력경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청천벽력처럼 내려치는 지혜! 그 지혜는 인간의 모든 집착과 무지를 번개처럼 단칼에 내려치는 지혜인 것이다.
현장이나 의정은 '능단금강반야'라는 표현을 썼고, 급다는 '금강능단반야'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는
'무엇이든지 능히 자를 수 있는 금강과도 같은 지혜' 라는 뜻이다.
돈황의 동남 쪽 천불동사원에서 발견된 코오탄語의 '금강경'은 '금강과도 같이 단단한 업業과 장애를 자를 수 있는 지혜' 라는 의미로 제명을 해석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자른다는 것인가? 우리는 보통 불교의 교의를 고苦. 집集. 멸滅. 도道 라는 사성체로 요약해서 이해한다. 인생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것, 산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온갖 집착을 일으키는 인연의 집적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모든 집착을 끊어버려야 하고, 그 끊는 데는 방법이 있다.
고苦는 오인吾人의 소지所知요, 집集은 오인의 소단所斷이며, 멸은 오인의 소증所證이요, 도는 오인의 소수所修이다.
잘 먹어야 하고, 색色도 충족되어야 하고, 좋은 학교에 가야 하고, 좋은 회사도 취직해야 하겠고, 사장도 되어야 하겠고, 교수가 되어 학문도 이루어야겠고, 결혼도 잘해야겠고, 자식도 훌륭하게 키워야겠고, 자선사업도 히야겠고, 죽을 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죽어 후세에 이름도 남겨야겠고...... 끝이 없다.
'반소사음수飯疏(트일소)食飮水(거친밥을 먹고 물을 마신 뒤에 팔을 베고 누웠으니 그 가운데도 즐거움이 있도다) 로 만족하고, 색골 환상도 다 끊어버리고, 결혼할 생각도 아니하고 정남정녀로 늙고... 다 벼락을 치듯 끊어버리자! 이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인가? 벼락은 과연 어디에 내려쳐야 하는 것일까?
子曰(자왈) 飯疏食飮水(반소사음수)하고 曲肱而枕之(곡굉이침지)라도 樂亦在其中矣(낙역재기중의)니 不義而富且貴(불의이부차귀)는 於我(어아)에 如浮雲(여부운)이니라.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친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뚝을 굽혀 베더라도 즐거움이 이 가운데 있으니 의롭지 못하며 부유하고 귀한 것은 나에게 뜬 구름과 같으니라” 하시다.
(전주임의 남편이 서울에서 제과빵을 사 와서 그걸 먹게 되었는 바 내 몸이 어딘가 편치 않아서 인지 깨맛나는 크림이 영 게름칙하고ㅎㅎ 그렇다. 근무시간에 이렇게 왔다가 빵을 주고 가는 남편이 흔한 스토리는 아니다. 17:15, 가 되어 그만 집자하고자 한다. 오늘은 24/4/24, 수욜. 정빈이가 고민된다고 전활했다. 신뢰문제가 있기로 잘 선택하라고 했다. 그는 하오현에서 노체고개까지 한북정맥을 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포천의 밤에 제천행을 찬성했던 것이다. 정숙이가 전화 왔다. 금숙이와 흥규는 통화를 한번씩 하나봐요. 우리도. 많은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원도 홍천 서석에 함 같이 가요~ 이번 주 일요일 제천 비봉산 행사에 나는 아내가 No!를 해서 못간다. 돈도 엄꼬ㅋㅋ)
(퇴근. 20:01
제1도에서는 벼락이 집착의 고리를 끊어도 '나'가 여전히 존재한다.
제2도에서는 벼락은 집착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떨어진다. '나'가 무화無化되고 공화空化된다. 나가 없어지면 곧 대상도 사라지고 집착이라는 고리도 존재할 자리를 잃는다.
'소승'은 뭐고, '대승'은 뭐냐?
소승은 작은 수레다! 그럼 대승이란 무엇이냐? 큰 수레다! 그럼 소승이 좋은 거냐 대승이 좋은 거냐? 사실 '히나'라는 의미에는 단순히 싸이즈가 작다는 물리적 사실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렬.옹졸'이라는 가치판단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마하'의 의미에는 상대적으로 '크고 훌륭하고 장엄하다'는 의미가 들어가 있다.
남방불교는 소승불교고, 북방불교는 대승불교다.
과연 불교와 같이 추상적인,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구원의 정신세계를 더듬는 종교적 세계에 소승과 대승이라는 확연한 구분의 기준이 가능할까? 누런 까샤야를 걸친 미얀마의 스님들은 모두 소승불교인이고, 회색의 가사를 걸친 조선의 스님들은 모두 대승불교인인가? 우리가 흔히 불교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나, 모두 소승이니 대승이니 하는 개념들을 무비판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향이 있는데, 이 개념이야말로 실로 불교를 이해하는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일대 편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소승이라는 말 자체가 대승이라는 말보다 수백 년 후에 생겨났다. 즉 대승에게는 소승이 존재하지만, 소승에게는 소.대승의 구분근거가 근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남방에 가서 당신은 소승이냐고 물으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유태인들에게 가서 '구약'을 운운하는 것과 똑같은 바보짓이다. 유태인들에게 '구약'은 없다. '바이블'이 있을 뿐이다.
불교사적으로 '소승'이란 주로 '부파불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대승이란 이 부파불교를 근원적으로 비판하고 나온 어떤 혁신적 그룹의 운동을 규정하는 말이었다.
소승= 아라한= 팔정도八正道
대승=보살=육바라밀
그런데 이러한 도식적 이해 자체가 불교의 근본교의의 이해를 그르치게 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싯달타라고 하는 어떤 실존인물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는 나 도올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평상적인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대 또한 인간이라면 여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싯달타라는 인간은 그의 삶의 어느 시점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을 얻었고, 그로 인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깨달음의 감화를 던지는 훌륭한 인물이 되었다.
아예 집을 떠나 전문적으로 승가에 상주하는 사람들을 비구.비구니라 불렀다.
가정을 유지하면서 집에서 승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우바색(신사).우바이(신녀)라고 불렀다.
이 출가이중과 재가이중을 합쳐 사부대중이라고 부른다.
싯달타 사후 불교는 아쇼까 (268~232BC) 라는 마우리아 왕조 제3대의 명군, 전륜성왕을 만나 크게 그 세를 펼쳤다. 그러나 세의 확대가 불교승단 내부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오게 된다. 이미 보수적인 상좌부와 진보적이로 자유주의적인 대중부의 분열이 생겼고, 이후 이 양대파의 세부적인 분열이 가속화되어 우리가 통칭 '부파불교'라고 부르는 시대가 연출되게 되는 것이다. 소위 '소승'으로 규정되는 대표적인 종파가 바로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라고 하는 아비달마 교학불교인 것이다.
사실 나도 밖에 돌아다닐 때 누구와 식사를 하게 되면 대강 상대방이 식사값을 치르는 상황이 많은데, 내가 꼭 얌체라서기보다는 평소 때 내가 많이 베풀고 살기 때문에 그냥 편하게 얻어먹을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부파불교시대에는 인간이 도달하는 최고의 성자의 경지가 아라한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아무리 수도를 해도 붓다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부파불교시대에, 즉 서양에서는 '그노시스(영지)'를 추구하는 지혜운동이 요한복음 사상의 배경을 이루는 것과 동시대에 바로 불교종단 내부로부터 이러한 아라한의 독주.독선.독재의 편협성을 타파하고 누구든지 즉 출가자나 재가자나를 불문하고 곧바로 불타가 될 수가 있다고 하는 대중운동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로 이들 새로운 진보세력이 이 성문.독각의 이승에 대하여 새롭게 내걸은 일승이 바로 '보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새 포도주는 새 푸대에 담아야 한다! 이 새 포도주를 우리가 보통 대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대승이란 보살운동이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모든 산 자!' 그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아라한이 승가라는 제도의 보호를 받는 특수한 디시플린의 출가자에 국한되었다면 보살은 출가자, 재가자, 가르치는 자, 가르침을 받는 자를 가리지 않는다. 즉 보살에는 승.속의 이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교적 세계와 세속의 세계의 근원적 구분이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차별주의여! 가라! 떠나가라!ㅎㅎ
소승이 자기 일신만의 구원을 추구하는데 반하여 대승은 일체중생과 더불어 구원받기를 원하는 자, 즉 소승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자기 혼자만 타는 일인용 보트를 타고 저어가는데, 대승은 많은 사람과 피안으로 같이 가기 위해서 큰 수레, 큰 배가 필요한 자, 그 자가 곧 대승이다!
나는 이러한 규정을 '보살'에 대한 이해를 아주 그르치게 만드는 망견 중의 망견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홀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암자나 낙도의 로빈슨 크루소라 할지라도 나 혼자만이 해탈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해탈의 길에는 인간과의 '관계'가 절연될 수가 없는 것이다.
둘째, 부처가 될 수 있는데 부처가 아니 되고 보살노릇한다는 말도참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설이다. ...부처가 곧 보살이요, 보살이 곧 부처다. 지장보살이 어찌 부처가 아닐 수 있으리요! (북한산 동쪽 사면의 도선사에서 보았던 지장보살의 시커먼 얼굴이 문득 떠오른다. 지옥에 빠진 인간들을 구제하는 게 목적인 지장보살이라니!)
이러한 보살의 사회성에 관한 논의는 인도사상의 회향 개념에서 발전된 것이다.
제1의 회향이란, 선근善根을 자기의 행복 추구로부터 자기의 '깨달음'의 추구로 방향전환하는 것이다.
제2의 회향이란, 곧 나의 선근을 자기의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곧 타인의 깨달음과 행복으로 돌리는 것이다.
제2의 회향은 제1의 회향의 전제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제1의 회향은 무상정등각을 얻는 것이요, 제2의 회향은 그 얻은 무상정등각을 타인의 깨달음으로 전위시키는 것이다.
(오늘 이만 집자 終. 현재시간24/4/24일 수욜 21:09
눈이 조금 피로하다. 과로하지 말아요~~ 오래 써야 하니깐ㅎ)
25일 08:12,
아라한의 팔정도의 궁극에는 정정正定이라고 하는 관조적인 삼매三昧(새벽매)가 자리잡고 있다. 보살의 육바라밀의 궁극에는 바로 반야 즉 지혜, '쁘라기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1의 회향의 완성은 바로 이 반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이 반야를 획득한 자에게만이 제2의 회향이 가능케 되는 것이다. 이 반야를 최초로 명료하게 제시한 경전이 바로 이 『금강경』이라는 희대의 지혜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금강의 지혜 즉 반야란 무엇인가? 그것이 곧 부처의 삼법인三法印중의 가장 궁극적 법인이라 할 수 있는 '제법무아諸(모두제)法無我'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가장 보편적인 규정인 것이다. 금강경이야말로 '무아'의 가장 원초적 의미를 규정한 대승의 가르침인 것이다.
내가 많은 중생을 제도한다고 하는데 보살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내가 있지 아니하다고 하는 아상我相의 부정, 금강경에서 말하는 사상(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의 부정에 곧 그 보살의 원초적이고도 진실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절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신은 절하는 마음자세를 잃어만 간다. 한국의 스님들이 자신을 보살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보살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한국의 승려들은 모두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 아무개 스님이 아니라, 아무개 보살로 모두 그 이름을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ㅋㅋ (이 주장은 조금 더 나갔다고 본다ㅎ) 그래야 비로소 대승이 되는 것이다.
대승의 기준은 '큰 수레'가 아니다. 대승의 기준은 '무아'일 뿐이다. 무아의 반야를 실천 못하는 자, 남북을 無論하고, 동서를 莫論하고, 고금을 勿論하고 다 소승일 뿐인 것이다! 어찌 소승.대승이 고정된 함의나 대상을 가질 수 있으리오.
오현스님은 다짜고짜 나에게 이와같은 제안을 하시는 것이었다.
"인류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만한 지혜의 책을 여기 백담에 앉아 쓰시오. 백담사가 만해 이래 텅 비었소이다. 도올선생이 여기 오신다면 내가 無今禪院을 통채로 내드리리다. 여기와서 무금선원 방장이 되시오. 그리고 도올총림을 만드시오!"
문둥이는 샘나게도 밥을 곧잘 얻었던 것이다. ...문둥이라는 전염병환자를 사람들은 공포스럽게 생각했기 때문에 미리미리 밥을 주어 쫓아내곤 했던 것이다.
"부화가 치밀어 견딜 수 있어야지요. 에이 비러먹을 중 때려치고 문둥이나 될란다!"
배고픈 오현스님은 진실로 문둥이가 되기로 작심했다. 그리고 그 문둥이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 문둥이와 같이 한 깡통에 밥을 비벼먹고 추울 때는 추운 동굴 한 거적지 속에서 껴안고자고 뒹굴었다.
"처음에 이 문둥이는, 요놈 사미승, 맛 좀 봐라! 너 정말 문둥이 될래? 하고 참으로 날 문둥이로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오현스님이 진실로
(08:35, 여보 시간 넘었어~~ 終)
24/4/26, 08:10 '푸른하늘펜션'을 대비한 여러곡 이어서 연주하기를 안해도 되어 속 편하구나! 누군가의 앞에 나가서 연주한다는 것은 그만큼 프로가 되어야 하는 거구나. "하안거는 그냥 그대로 둔다 하더래도 동안거 3개월만이라도 스님들을 선발하여 나하고 집중적으로 불경을 공부하게 하는 새로운 制를 設합시다! 3개월 동안만이라도 용맹정진 스타일로 독서하고 토론하면서 정진하면, '무無'字 하나 들고 있는 것보다는, 천만 개의 간화가 쏟아질 것이외다."
(나는 도올의 이 말에 굉장히 많이 비웃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평생을 깨우침에 사로잡혀 정진 해 온 중들과 금강경을 용맹정진 독서한다고?? 개가 웃을 일 아닌가? 중들이 금강경을 모를까봐서?? 참으로 중들의 수준을 얕게 보는 처사가 아닐 수 없고 유치하다고 꼬집지 않을 수가 없다. 가끔 도올에게서는 이런 객기를 볼 수 있다. 일반인 상대로는 그 말이 가당하지만 산속에서 불도를 닦는 중들한테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 아니고 뭔가! 이 말을 오현스님이 듣고 아마도 둘 사이의 어떤 합의는 금이 갔다고 믿는다. 좌선 없이 어찌 득도에 이를 수 있을까? 언어로, 글자로 공부는 할 수 있겠지만 깨침은 그런게 아니라고 알고 있다.)
(아니나다를까?ㅋㅋ)
이날 나는 다음날의 일정 때문에 백담을 떠나와야 했다. 바람이 쌩쌩 스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또 뭔 쓸데없는 업을 지으려구. 너 같은 속인이 뭘 또 콧대 높은 스님들까지 교육한다구래! 그런 네 아상이나 지우려무나!'
(그러면서 아래에 이런 말을 남겨 놓았네~ 확실히 오현스님과 견해 차가 있었다는 증좌를 남겨 놓았다고 느껴진다)
금강경은 선禪이 아니다. 금강경을 선으로 접근하는 모든 주석을 나는 취하지 않는다.금강경은 오로지 대승의 출발이다. 대승됨의 최초의 기준이요, 최후의 기준이다. 만약 선이 금강경과 그의취가 부합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직 선이 '대승'의 정신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
姚(예쁠요)秦천축삼장구바라집 역
무술세고려국대장도감봉칙조조
제1분 법회의 말미암음
1-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비구들 천이백오십인과 더불어 계시었다.
如是我聞. 一時, 佛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俱.
1-2. 이 때에, 세존께서 밥 때가 되니 옷을 입으시고 바리를 지니시고 사위 큰 성으로 들어가시어 밥빌으셨다.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舍 衛大城 乞食.
1-3. 그 성 안에서 차례로 빌으심을 마치시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오시어, 밥 자심을 마치시었다.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오늘은 금요일, 그런데 일이 많다. 하수도 준설과 관련한 현설이 있을 예정이고 세대 방수 공사를 해야한다. 그런데 몸이 영 시원찮다. 자꾸 나아지기를.. 아내는 세종병원 감염내과에 가서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따르리라.
08:34, 아침칩자 終.)
(금욜 저녁, 19;39 지금쯤 보장산 임도에는 취나물이 쉐어가고 있을 것이고, 옥계리에는 가시오가피가 또한 쉐어가기 직전일 것이다. 내가 그 생각을 넌지시 전했더니, 당신은 좀 쉬셔야 해요. 당신때문에 요며칠 사는 게 말이 아니에요. 불안해서. 그래! 이 책도 집자하고 주역책도 보면서 효성동 뒷산을 올라도 좋으리! 오늘 아내와 세종병원에 가서 홍진경 감염내과 과장을 만났다. 그녀는 내 아픈쪽 머리를 뒤적거리더니 감염의 징조인 붉은 색조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후 오후에 조금씩, 아니 대가리 왼쪽(내가 바로 앞을 보고 섰을 때의 기준) 통증이 조금씩 시나브로 옅어지는 것을 경험했다. 퇴근무렵엔 거의 정상이 되었다. 금일 3-508호 민원 때문에 608호, 병상의 할머니는 고관절이 부러졌다며 간병인의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팬티부분을 끌어내리며 내게 보여주고 나는 그 손길을 따라 뼈마디 튀어나온 부분에 손을 대고 가볍게 만지고있었다. 가뜩이나 육덕 좋은 할머니의 가슴께에 슬쩍슬쩍 눈이 가더라만. 순간 근자에 느껴지지 않았던 하초에 불기운이 솟는 걸 기쁘게 음미하였다. 늙은이의 틀니가 빠져버린 조글조글한 입술을 바라보면서도 이런 욕망을 느끼다니 나는 변태인가봐?
1-4. 옷과 바리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심을 마치시고, 자리를 펴서 앉으시거늘.
이 장면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번뜩이는 금강의 지혜가, 너무도 일상적이고 평범한 하루의 일과 속에서 說破되었다고 하는 사실의 파라독스(逆說:언뜻 보면 일리가 있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모순되어 있거나 잘못된 결론을 이끌거나 하는 논증이나 사고 실험 등을 일컬음)다. 가장 일상적인데 가장 벼락 같은 진리가 숨어있다고 하는 긴장감을 이 붓다의 행동은 보여준다. 의발을 거두어둘이고, 발을 씻고 자리를 깔고 앉는 이 모든 평범한 의례가 바로 금강의 지혜에 번뜩이는 자가 바로 금강의 지혜를 설하려는 그 순간에 묵묵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부처님과 그의 제자 1,250명이 사위성을 갔다 왔다고 하는 신체적 행위가 나족으로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것이다. 맨발로 2km를 걸어 갔다 왔다면 그 발이 누구나 더러울 것임은 뻔한 노릇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큰스님 정도만 되어도 이러한 행위는 분명 행자 소관이었을 것이다. 당대의 부처세존의 위치는 만인의 사표가 되는 지존의 자리였다. 부처는 자기 발을 자기가 씻은 것이다. 우리는 초기불교의 건강한 모습, 각자의 건강항 모습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모두가 스스로 조용히 자기 발을 씻는 것이다.
죄Sin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업(karma)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행위Deed인 것이다. 행위란 본시 유형이 아니고 무형의 것이다. 도둑질은 그 순간만 모면하면 형체도 없이 사라진다. 거짓질도 그렇고 간음질도 그렇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존재(마음)속에 죄로, 업으로 쌓인다.
성철스님의 돈오돈수 논의로 인하여 불교계에 돈頓(조아릴돈) 과 漸(점점점) 이라는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되었다. 무명의 업을 씻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점교가 되는 것이고 시간이 걸릴 필요가 없이 일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돈교가 되는 것이다.
유식종唯識宗에서는 無始(비로소시)以來의 種子의 훈습에 의한 아라야식의 업을 전환시키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릴 뿐아니라 각고의 요가수행이 필요하다고 본다. 유식종을 유가종瑜伽宗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전식성지轉識成智를 위하여 엄청난 요가의 고행을 요구하기 때문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정통불교론은 돈의 입장보다는 점의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여기 부처님께서 '발을 씻으셨다' 한 것은 단순히 걸식으로 더러워진 맨발을 물로 씻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세례의 전형적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금강경을 설하기 이전에 당신 자신의 모든 죄업을 씻으신 것이다. 부처에게 어찌 씻을 죄업이 있을까보냐? 그러나 나는 말한다. 역사적 불타는 인간이었을 뿐이다. 아무리 해탈한 자라 할지라도 매일 매일 죄업을 짓고 사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그는 매일 발을 씻어야 하는 한 인간이었을 뿐이다. (뭐가 죄업인가요? 도올씨 매일 매일 무슨 죄업을 짓고 산다고 그러세요? 도올씨 더더구나 정등각을 깨친 붓다가 걸식을 다녀와서 발을 씻었을 뿐인데 그걸 무리하게 자꾸 의미부여를 하자니까 이야기가 이상하게 삼천포로 빠지잖아욤 나도 왜 삼천포를 이 싯점에 데리고 왔는질 몰겠넹ㅋㅋ 에~~ 이냥반. 막 나가는 뭔가가 있어서 탈이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어째서 '심령의 가난'이 연민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축복의 대상이 된단 말인가? 이 의문을 1999년 여름 도올서원 12림에서 금강경을 강의하면서 비로소 풀게 되었다. 여기 가난한 것의 주어로써 쓰여진 '마음'에 해당되는 단어는 '프뉴마'이다. 바람, 목숨, 영혼, 유령, 마음의 상태 등의 함의를 지닌다. 프뉴마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결여'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가난하다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서 줄 것이 없다는 것'이다. 뿌루샤(사람을 뜻하기도 함), 즉 인간존재의 결여인 것이다. 프뉴마의 가난은 프뉴마의 결여를 말한다. 그것은 곧 '아상我相의 결여'를 말하는 것이다. 내어 줄래도 내어 줄 마음이 없는 것이다. 보일래야 보일 마음이 없는 상태, 이것이야말로 '무아'인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무아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여 복이 있도다" 함이다.
선현기청분 제2
2-1. 이 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편으로 걸쳐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손을 모아 공경하며, 부처님께 사뢰어 말하였다.
時 長老 須菩提 在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수보리는 불타의 십대제자의 일인으로 보통 만다라 그림 속에서는 부처의 좌방상열중, 대목걸련과 대가섭의 사이에 자리잡는다. 사실 싯달타는 강원도 감자바위 '촌놈'쯤 되는 사람이요, 수보리는 서울의 부유한 문물을 다 향유한 사람이라 보면 된다(ㅋㅋ 믿거나 말거나). 無쟁諍(간할쟁)제일, 공양제일,색상제일,해공解空제일이라는 칭호를 볼 때 우리는 금강경 드라마의 두 주인공의 설정이유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 조금도 한쪽이 기울지 않는 것이다. 최고의 진리는 고수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께(도올의 고집일 것이다ㅋㅋ)임일 수밖에 없다.
일어섰다고 해서 뻣뻣이 치솟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손을 공손히 모아 절하고 어른께 여쭙는 모습은 지금 남방에 가면 그냥 그대로 목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예법이다.
2-2. "희유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시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하여 주십니다.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희유希有는 '참으로 드물게 있는 세상의 존귀하신 분이시여!'의 뜻이 될 것이다(만고희유 라는 말을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서 익히 들었다 ). 호칭으로 부를 때는 '세존'이라는 말을 쓰고, 구체적인 문장의 주어로 쓰일 때는 '여래'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라집이라는 탁월한 번역자의 숙달된 맛에서 생겨난 것으로 산스크리트어 원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 善은 잘well의 뜻의 부사로서 동사를 수식한다. 한자의 고어를 모르는 자들이 '선'이라는 글자만 보면 무조건 현대어의 선.악의 선goodness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글자는 그러한 도덕적을 전제로 한 글자가 아니다. '잘 돌아가면 선이고 잘 안돌아가면 악'일 뿐이다.
선.악의 구분이 본시 없는 것이요, 그 구분근거는 '잘'이라는 부사적 근거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불교가 중국인들에게 쉽게 습합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중국인들의 언어에 내재하는 이런 생각의 틀 때문이었다. 우리말은 대부분이 원래의 우리말이 아니요, 서양말에 우리말의 발음적 외투만을 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깊게 깨달아주기 바란다.(좋은 지적이어서 귀를 경청하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사실은 여기 비로소 최초로 '보살'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긴장감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다.
"지금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보호해주시고, 잘 격려해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여기 해석에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보살의 의미이다. 왜 여기 보살이라는 말이 등장했는가? 바로 이 금강경의 기자는 방금 탄생산 대승보살의 혁명운동의 대변자로서 수보리를 내걸었다. 여기 수보리는 부처님께로부터 직접 확약을 보장받고 싶은 것이다. 수보리가 최초로 불타에게 던진 말은 대승보살운동에 대한 불타의 보호.지지.격려의 확약에 대한 인증이다.
운거영웅불자모 運去英雄不自謨(운이 가니 영웅이라한들 어찌해 볼 도리 없다!) 녹두 전봉준이 형틀의 이슬로 사라지기 전에 남긴 최후의 일언이다.
2-3. 세존이시여! 선남자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냈으면, 마땅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오리까?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뇩 多羅三먁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선남자선여인'은 양가집 청년. 양가집 규수 정도의 의미가 정확히 대응된다. 그리고 암암리 대승보살이 다 죽어가는 늙은이들의 운동이 아니라, 생기팔팔한 젊은이들의 운동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반야심경 덕분에 우리 귀에 많이 익은 단어다. '아뇩다라'는 부정과 보다 높은의 합성어인데, '보다 높은 것이 없는'의 뜻이다. '무상無上'으로 번역된다.
삼먁은 보통 형용사로서 '완벽하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나누어지는데 여기에는 '같이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한역하여 정편, 정등正等이라 하는데 '두루두루 간다', '두루 미친다'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삼보리는 각覺, 正覺의 뜻이다. sam은 '함께', '완전한', '같은' 의 뜻이 있으며 접두사 역할을 한다. 매우, 아주, 철저하게, 완전하게, 아름답게의 뜻이 있다. 한문번역에서 '삼三' 자 때문에 '셋'이라는 양수개념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과는 전혀관계 없는 sam의 음역이라는 것을 항상 상기하는 것이 좋다.(22:30, 점점 깊어지는 금요일 밤. 나는 술과 여자가 있는 불타는 밤 대신에 단촐하고 단정한 정신으로 금강경강해를 집자하고 있다. 조금씩 뭔가 점점 멀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침대에 갈 시간이 다가옴을 느낀다. 아늑한 기분이 되어간다. 5층에서 벽을 깨며 바라본 아래에서 마주친 공회장의 작은 얼굴. 그의 액션에서 순간 고생이 많구나! 라는 위로와 지금은 어찌 도와줄 수가 없다는 의지를 읽었다. 그것으로 됐다. 終.)
24/4/27 토욜 07:40 얼마만이더라~ 한달은 훨 넘겼을 것이다. 어제 할머니의 고관절을 본 후인 오늘 새벽 뒤로돌아~ 라는 내 목소리에 아내는 순순히 따랐다. 하초가 불붙었다는 것은 생기를 되찾았다는 방증. 갖은 용을 쓰면서 그것의 핵폭발을 이끌어내려했으나 폭발력은 역시 미약하여 내심 실망스러웠으나 그것으로도 세상은 훈훈한 것이 되었다. 계란을 들기름 얹어 마시고 얼핏보니 주방에 쥐포가 있어서 한마리 구워 먹었다. 구수하다. 내일이면 제천 비봉산인데 갈 수 없다는 것이 걸린다. 갈 수만 있다면 3만원 플러스 2만원이면 하루 잘 놀고 범석이 눈도장 찍을 수ㅋㅋ 있을 터인데 어떻게 안될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뇩耨(김맬누)多羅三藐三菩提 언덕아, 김멜누(뇩), 그물라, 멀묘(막), 보살보, 끌제(리) 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요 '무상정편지無上正編知'이다. 발심發心은 '더 이상 없는 바른 깨달음을 향하는 마음을 낸다' 고 하는 뜻이다. 그러한 발원을 하는 모든 선남선녀들이 곧 보살인 것이다. 보살은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인가?
'주住'는 내가 여기 '살다'로 번역했지만, '마음을 둔다'는 뜻이다. 내 마음을 어디에 어떻게 두어야 하는가? '항복기심降伏基心'은 산스크리트어 원문에는 '마음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의미가 너무 밋밋해서 중국인의 가슴에 퍼뜩 쉽게 와 닿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과의 갈등구조로 그 뜻을 정확히 노출시킨 것이다. '마음을 항복받는다' 라집 한역의 파워는 이러한 직설적 스밈에 있다. 외국인인 그는 중국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이해한 천재였다.
2-4.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좋다! 좋다! 수보리야! 네가 말한 바대로, 여래는 뭇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뭇 보살들을 잘 부촉해준다. 너 이제 자세히 들으라! 반드시 너를 위하여 이르리라. 선남자 선여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먹으면, 마땅히 이와 같이 살 것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하리라."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諸菩薩 善付囑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여汝'는 너 이다. 이 글자는 중국고어에서 매우 친근감을 나타내는 '너'이다. '청聽'은 능동적으로 내가 들을 때만 쓰는 말이다. 그에 비하여 '문聞'은 듣는다가 아니라 '들린다'이다. 여시아문은 정확히 번역하면, '내 귀에 이와 같이 들리었다'이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 들린 대로 들은 것이다.
"너 이제 들으라!" 어떻게 듣는가? 그 어떻게를 나타내주는 부사가 곧 '체諦살필체' 인 것이다. 자세히, 명료하게의 뜻이며 '진실하게'의 뜻도 있다.
2-5.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즐겁게 듣고자 원하오니이다."
唯然世尊! 願樂欲聞.
'유연'은 단순한 "예唯'라는 대답의 음사音寫에 '연然'을 붙인 것이다. 이 예는 붓다의 선포에 대한 보살들의 긍정이다. "그러하옵니다."
'욕문欲바랄욕聞'의 욕은 '욕한다'라는 동사라기보다는 영어의 be going to에 해당된다. '~하고자'이다.
대승정종분 제3
3-1.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되: "뭇 보살 마하살들이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
佛告須菩提: "諸菩薩摩訶薩, 應如是降伏其心.
(2024/4/27, 토욜 15:55 집자 終. 아내와 벌판 어딘가로 가자고 합을 맞춤. 아침 합방 이후로 지금까지 다시 살아남. 복숙씨가 몸이 쉬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충고하자 오뚜기부대출신이라고 농담함ㅎ)
21:14, 정빈이는 지금 도마봉에 도착했을까? '도마치봉' 정상석이 있는 사진을 하나 올려줬넹. 자유에는 고독이 따른다고, 참으로 멋찌다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까는 또 한북정맥을 타면서 '저번에 참석 못한 이들은 참석을 추천합니다.' 라고 초딩 단톡에 올렸넹ㅎ 아무튼 그는 신뢰보다는 자기 길을 걸어갔다. 누구도 정빈이를 탓하지는 않으리라. 왜 범석이의 총회장 첫회 여행에 참석해서 그를 빛내주어야만 하는가! 더구나 지금 우리는 64세다.
금강경은 바로 이 제3분에서 정점을 형성한다. 이 제3분을 읽는 초심자는 아마도 허망한 스모오 경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이 분을 넘기게 될 것이다. 겨우 이 한마디였다니! 그러나 바로 이 분에서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심령의 체험을 할 수 없다면 그대는 아마도 금강경을 덮어야 할지도 모른다. 먼 훗날 그러한 체험이 다시 나에게 다가올 때까지 금강경 읽기를 미루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종은 들이키는 순간에 곧바로 취하지 않는다. 들이키는 순간에는 맛이 없다. 그러나 취기는 서서히 달아오르게 마련이다.
3-2. "존재하는 일체의 중생의 종류인, 알에서 태어난 것, 모태에서 태어난 것, 물에서 태어난 것, 갑자기 태어난 것, 형태가 있는 것, 형태가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 지각이 없는 것, 지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 이것들을 내가 다 남김없는 온전한 열반으로 들게 하여 멸도하리라."
"所有一切衆生之類, 若卵生 若胎生, 若濕生 若化生, 若有色 若無色, 若有想 若無想, 若非 有想 非無想, 我皆令入無餘 涅槃而滅度之.
'소유所有'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는 '있는 바'의 뜻인데, 백화문에서는 이 자체로 '일체'라는 뜻이 된다. '일체'라는 것이 다시 나오므로, 나는 이것을 '존재하는' 으로 번역하였다.
여기 '중생衆生'이란 것은, 현장(스님)은 '유정有情'으로 번역했던 바로 그 말이다. 흔히 좁은 의미에서 중생은 인간만을 가리킨다. 그러나 윤회의 범위를 생각할 때, 중생은 인간에만 국한될 수 없고 정확하게 '살아있는 모든 것'이며, 요새 말로는 '생물生物' 에 해당된다. 그렇지만 생물 중 식물은 제외되는 것 같으며 동물 만을 지칭하는 것 같다. 우리말의 '짐승'이 '중생'에서 전화된 것이다.
'멸도'의 '멸' 은 '불을 끈다'는 의미요, '도'는 '건네다' 즉 제도한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고해의 강물을 건넌다, 즉 구원한다는 뜻이다. 멸滅이란 '끔'이다. 무엇을 끄는가? 그것은 불을 끄는 것이다. 욕망.갈애의 불이요, 곧 연기의 불이요, 곧 윤회의 불이다. 그 불을 끈 상태를 우리는 '열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열반은 바로 '불의 꺼짐' 이다.
(22:41, 토요일의 밤이 제법 깊다. 14:00 갈림길에서 편하게 집자를 택하고, 그리고 동쪽벌로 산책을 나갔다가 방풍나물.두릅나물을 뜯어와 저녁은 채소를 곁들였다. 번호가 매겨진 작은 밭들, 구청에서 신청하라고 게시하고 연락을 받으면 추천당일 나간다고 하였다. 돈은 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내일 새벽에는 계양산을 오르리라고 기운을 낸다. 지금 정빈이는 포천 도마치봉에서 숙영중이다. 그의 무탈한 도성고개까지의 구간종주를 응원한다. 금일 집자 終.)
24/4/28, 10:21 방금 손흥민이 밤사이에 리그 3위 아스널을 꺽었는데, 골을 3개 넣었다는 것이냐? 멀티라는 것이냐?ㅋㅋ 정말 신나고 아찔하고 흥분되고 쌀 지경이다ㅋㅋ 새벽 4시반에 시계 맞춰놓고, 집을 나가면서 보니 05:08분, 연무정 위로 올라가니 정자가 있는 그곳을 진입 못하게 바리케이트를 쌓았고 목하 공사중이었다. 도로를 많이 넓히는 중이었던 것이다. 머얼리 관악산이 구름위로 기대어 솟아 있었다. 북한산의 오른쪽 부위가 붉은 것으로 보아 얼마 안 있으면 해 뜨리라! 과연 팔각정 뒤의 솟구친 전위봉을 오르니 아! 지평선에서 조금 솟은 붉은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넔을 잃고 햇님을 숭앙하였다. 계양산 오르는 듬직한 두 남자의 뒤를 이어 흰모잘 쓰고 물병을 든 키 큰 처자가 나를 추월해 올라갔다. 하느재에 이르자 사람들은 꽤 늘어났다. 물병 든 젊은 처자가 경인교대가 보이는 전망대에서 쉬러 빠지고 나는 계속 일정하게 오른다. 바로 그 곳에서 만난 남자는 거무테한 얼굴과 뚱한 몸체에서 끊임없는 빗방울을 솟구치고 있는데 뭐랄까 더러워 말섞고 싶지 않는 기분 있지? 바투 본격적인 비탈길의 소나무숲은 지나 이윽고 한 고비 우측으로 틀어 평탄한 곳에 이르면 그곳이 제2의 전망대라 칭할 만 하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해 돋는 아침 풍경은 정말 장관이다. 관악산에닿기 전 올록볼록한 산군들이 정겹기 그지 없어서 몇 컷 찍었다. 그렇게 잠시 쉼을 가진 후 계단 끄트머리까지 꾸준히 올라이윽고 한 텀 쉬엄쉬엄 땅을 밟은 후, 계단을 두 세번 꺾으며 올라가면 거의 정상부에 도착한다. 초록나뭇잎 사이로 뻗치는 붉은 빛살아! 내 건강 되살려다오! 오늘 제천 비봉산 케이블카를 양덕 동문에서 봄소풍가는데 결국 저번의 1박2일도 그러려니와 몸이 일주일 여 아팠던 관계로 아내의 말에 꼬리를 내렸던 것이니.. 그리고 실제로 아! 나는 과연 이대로 죽을 운명인가.. 그런 느낌도 미상불 없지 않았으니 지금 굉장한 건강을 되찾았음에도 건강이 요원하고 두려운 건 사실이다. 그런 한편으로 이렇게 건강해진 것을 보면 내가 아직은 죽을 때는 되지 않았고, 올 봄에서 지금까지 홍삼액을 세번째 먹고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기억하면서 내 건강이 결코 나쁘지 않음도 기정사실이긴 하다고 자신감이 붙는다. 헬기장에 도착하였고 코 앞이 정상부. 두칸 씩 올라가는데 웬 검은 실루엣이 정상부의 플랫에 본인이 먼저 닿을려는 조짐을 보이며 나를 추월하였다. 0.001초 그가 빨랐을 것이다. 제엔장할! 겹벚꽃과 서리내리면 달콤맵싸한 열매의 꽃이 피어 있고 짙은 분홍의 병꽃이 정상 바위틈에서 건강하게 청춘을 자랑한다.
乾坤一戱場
人生一悲劇
건곤은 하나의 연극무대
인생은 하나의 비극일뿐
ㅡ方東美
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R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인생이란 걸어가는 그림자
자기가 맡은 시간만은
장한 듯이 무대위서떠들지만
그것이 지나가면 잊혀지는
가련한 배우일 뿐,
인생이란 바보가 지껄이는 이야기,
시끄러운 소리와 광포로 가득하지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이야기.
ㅡ멕베드
'무여열반'이란 생명의 불이 꺼지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죽음이다. 나 도올에게도 분명 죽음에의 갈망이 있다. 순간 순간 죽음이라는 미지의 환상이 엄습한다. 인간 존재는 사실 타나토스Thanatos적 본능 속에서 산다. 그것은 에로스와 동시적인 강렬한 본능이다. 소승적 수도승들은 분명, 멸절의 철저성을 강조했고, 그 강조는 분명 '번뇌의 온상인 육체의 멸절' 에까지 이르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진정한 해탈은 죽음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성철당의 '돈오돈수'도 그의 죽음에서 완성되었을 뿐이다. 이제 그는 침묵할 뿐인 것이다.
판본의 문제인데 우리 해인사판에는 가끔 '무無'가 "무无' 로 되어 있다. 판본을 중시하여 판본모습 그대로 배인排印한다.
3-3.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 없는 중생들을 내 멸도한다 하였으나, 실은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다."
如是 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 得滅度者
바로 여기까지가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어다의 내용을 부연설명한 것이다. 즉 보살의 마음가짐의 내용을 설한 것이다.
(10:56, 잠시 집자 쉰다. 눈이 가물가물 해. 안방에서 들려오는 티비소리가 시끄럽지는 않고, 그렇다고 조용하지도 않는 그런 오전의 풍경소리. 산에 갔다 왔으니(오랜만이긴 하다) 피곤도 하겠지. 終.)
(4/28 일요일 12:23, 한숨자고 일어남. 바로 이 3절의 내용이야말로 대승정신의 출발이며, 바로 금강경이 벼락경이 될 수밖에 없는 전율의 출발인 것이다. 바락같이 내려친 대승의 종지. 그런데 그것은 무엇인가?
사실 여기 붓다의 결론이 너무 쉽게, 너무 퉁명스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당혹감을 느끼기에 앞서 별 느낌이 없는 무감각 상태로 서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붓다는 불타가 추구해온 자비의 삶에 대한 전면부정을 하고 있다.
(집자 종ㅎ 13:10 포 아티스트)
24/4/29, 월요일 08:16 범석이가 제천 봄소풍 후기 사진을 몇 장 올린 것을 아침에 일어나서 본다. 보면서 느낀 점, 다 큼직하고 어여쁘다. 7회는그에 비교하면 어떤가. 좀 떨어진다 싶다. 새삼스러워지는 마음. 어제저녁 칠용에게서전화가 왔는데, 작은아버지 돌아가셔서 길병원 온다고.. 친구 얼굴도 보고, 조문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와 금강경을 이야기하면서, 금강경을 읽고 길을 헤멜것 같다고 말하자 그가 '잘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윤회의 굴레를 계속하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는 많은 중생들을 구원할려고 하였다. 아니! 나는 구원하였다. 나는 그들과 더불어 웃고 울고, 같이 위로하고 애통해 하고, 모든 방편을 동원하여 가르치고 또 동고동락하였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윤회의 굴레의 아픔을 벗어버릴 수 있도록 멸도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나 붓다의 실존적 깨달음은 별도의 길을 열어주었다고 하는 자비행에 있지 아니하였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멸도의 길을 열어준, 그 '열음'의 혜택을 입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실로 나는 아무도 멸도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앟았던 것이다. 아니! 구원을 받아야 할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자비의 삶은 무의미한 것이었는가? 그렇다! 그것은 나의 인식 속에서 전면 부정되어야 할 사태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붓다가 붓다 자신의 자비로운 삶을 부정하는 태도에서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윤회의 공포' 이 것은 비단 불교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도문명에서 윤회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관의 기본틀이다. 윤회 없는 삶이란 없다. 윤회란 한마디로 내 삶의 행위가 행위 자체로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업이 되어 시간 속에서 영속된다는 것이다. 이 생사의 끊임없는 고리를 이어가는 업은 나의 삶의 도덕적인 행위(의 원천이)다. 선업은 선과를 낳고, 악업은 악과를 낳는다.이것은 회피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윤회는 하나의 사실이다. 윤회 속에는 인간의 구원의 여지가 없다. 윤회의 영속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업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시이래無始以來의 以後無終의 영속일 뿐이다. 산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비극!
해탈이란 이 윤회의 굴레로부터의 벗어남을 의미한다. 업karman 과 윤회와 해탈, 이 세 가지는 인도문명의 기본골격이었다. 그러나 윤회로부터의 해탈, 그 복음의 소식은 붓다의 시대를 벗어날수록 특정한 수도인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리고, 아라한들의 고행에 가리어 버렸다. 뭇 중생들은 오직 해탈의 가능성이 없는 윤회의 굴레를 굴리고 있었을 뿐이다.
불타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가 금강경에서 깨달아야 할 정종법인인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것이다. 불교의 핵심은 삼법인이 아니요, 바로 '제법무아'라는 일법인日法印인 것이다.
(08:33, 오늘 아침 집자 終. 할머니와 손녀의 조곤조곤한 대화가 티비소리와 섞인 그런 아침)
(08:08, 윤화백의 작은아버지가 별세하셔서 길병원 장례식장에 다녀 오다. 서로 불화하여 이혼얘기가 오갔고, 숙모가 전라도인이며, 그런데 그 딸은 참 단정하고 고요하며 선이 고왔다. 부부간의 문제를 누가 평가할 수 있는가! 많은 인원은 아니지만 적당한 조문객들이 있어서 고인의 삶이 조명되어졌다. 포교사복을 입고 금강경을 한글로외우고 있던 윤을 보았다. 여주에 5월 11일 올래면 오시라고 하였으나 워낙 거리가 멀었다. 윤의 아내가 인사하러 테이블로 오셨고, 그녀가 내민 듯한 손을 내밀어 잡았다. 잠시 후 그녀가 산행을 그렇게 많이 한다는 생각을 뒤늦게 떠올렸다. 당뇨가 있어서 시골밭을 일구어서인지 얼굴이 조금 탔고, 주름이 수평으로 고르게 난 칠용이다. 숙모를 떨떠름하게 생각한다.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친근한 그 어떤 것도 없는 여인은 지금 심사가 어떨까? 열살 정도의 층하가 있다고 하였다. 오늘 출상이고 화장한다고 한다. 길병원을 벗어나니 시청 앞에 금색으로 아름답게 탑이 조명되어지고 있었다. 소나무의 멋스러움. 부처탄신일이 5월 15일이라고 알았다.
제법무아란 무엇인가? 그냥 '모든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법法을 크게 두 카테고리로 나눈다. 하나는 작위적으로 만든 유위적 법(존재)이요, 하나는 인간이 조작한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한 무위적 존재다. 전자를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후자를 無位法이라 한다.
우리가 제행무상이라할 때의 제행諸行의 行은 곧 유위법의 통칭인 것이다. 즉 만들어진 모든 것은 덧없다는 것이다. '덧없다'는 것은 불변하는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항상됨이 보장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법諸法의 법은 제행의 행과는 달리, 유위법과 무위법 모든 것을 총괄하는 말이다. 유위법이든 무위법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我가 없다'. 이것이 곧 '제법무아의 본뜻인 것이다. 그런데 '我가 없다 함은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하는 我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나'가 아니다. 我란 무엇인가? 그것은 매우 철학적이고도 추상적인 불타의 논리적 깨달음에 속하는 것이다. 평상적으로 '내가 없다'는 그런 상식적 논의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我라는 것은 곧 '실체substance를 말하는 것이다. 실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래에sub 놓여진 것stance이다. 즉 현상의 배후에 현상의 존속을 가능케 하는 자기동일체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여기 책상이 있다' 고 할 때 참으로 우리가 책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곧 책상을 실체화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즉 책상을 책상이게끔 하는 고정불변의 존재가 책상의 자기동일체로서 책상 속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책상의 자기동일체를 바로 우리가 '아我' 라고 부르는 것이다.
'저기 저 꽃은 예쁘다!' 아주 그럴듯한 말처럼 들린다. 이런 말을 할 때 우리는 마치 저기 저 꽃이 있고, 그 있는 꽃이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구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기 꽃이 있고 그 꽃은 아름다움을 소유한 상태로 있다? 과연 그런가! 내일 보면 어떨까? 시들어버렸다. 어저께는 어땠는가? 피지도 않았다. 그럼 이 순간에는 어떠한가? 과연 저기 저 꽃이 있는가? 그럼 과연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그것은 나의 마음의 상태인가? 내가 저 꽃을 감지하는 순간의 나의 느낌인가? 그것은 실체성이 있는가? 과연 저꽃은 아름다운가? 저기 저기 저 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름답다고 느낀 그 순간에 그 느낌의 대상으로서의 무엇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무엇은 존재가 아닌 나의 느낌을 담아낸 어떤 물체의 조합이었다. 그 물체의 구성요소를 불교에서는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아침집자 終. 08:33
(재집자 4/30일 13:24 소장任 교육 감. 오온五蘊(쌓을온)붓다의 무상정등각의 최후의 깨달음은 바로 존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말을 '제법은 무아',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다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의 포효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는 없다! 그 나가 없다고 외치고 있는 붓다라는 아我조차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윤회와 무아의 모순',
'무여열반의 뜻' : ‘무언가 남음이 없는 열반’을 뜻한다. 오직 부처만은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든다. 환생(還生)하지 않는 적멸(寂滅)에 드느냐 들지 못하느냐의 차이를 가진다. ‘증득’과 ‘환생’ 유무(有無)가 일련의 반열반과 무여열반을 가르는 기준이 된다는 뜻이다. 열반이란 생명・욕구[欲求=慾心]・무명[無明=無智=無智慧] 등으로부터 발생하는 온갖 번뇌를 계(戒)・정(定)・혜(慧) 수행을 통해서 끊어 없애버린 상태이거나 그 안으로 진입하여 듦을 말한다. 다만, 여기에서 부처님처럼 무아관(無我觀)을 증득한 육신의 죽음을 통해서 윤회의 사슬로부터 온전히 벗어나는, 다시 말해, 부동(不動)・무상(無想)・무욕(無慾)・무소유(無所有) 등을 실현함으로써 다음 생명을 부여받지 않는 영원한 쉼[止=息]을 무여열반 곧 거룩한 해탈, 온전한 적멸, 온전한 열반이라 한다.
(이시환 문학세계에서 모셔 옴)
生도 무아다. 死도 무아다. 그렇다면 열반에도 열반이라고 하는 고유의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생사의 윤회의 지멸止滅이 곧 열반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보살들이 추구하는 삶은 무엇인가? 윤회의 현실이 곧 열반이라고 하는 생각의 회전이다. 이 생각의 회전은 또 무아의 부정의 부정, 부정의 끊임없는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열반이 생사의 고리 밖에는 잡을 것이 없다. 열반이 자리잡을 수 있는 그 실체적 자리가 근원적으로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생사가 곧 열반이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 이 사상은 곧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고 하는 '번뇌즉보리'의 과감한 생각으로 비약하게 되는 것이다. 번뇌 자체가죄가 아니요, 번뇌 그 자체가 중생구원의 자비로 化하는 것이 곧 대승이다!
인간 붓다는 선포한다. 붓다인 그대 보살들이여! 그대들은 반드시 이와 같이 마음가짐을 지닐지라: "나는 헤아릴 수 없고, 셀 수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구원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구원이란 근원적으로 그 뭇 중생들에게 존재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 나는 아무도 구원한 바가 없다. 나의 구원의 삶, 그 자체가 성립불가능한 것이었다."
도올은 이 지점에서 마가복음 15:33~34를 눈물을 흘리면서 항상 읽는다고 고백한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의 이 외침은 바로 자기의 삶이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삶이라고 하는 자각의 '전면부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곧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아상我相의 전면부정이다. 예수는 또 외쳤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 23:24) 바로 이 알지 못함, 이것은 곧 인간의 무명의 윤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예수의 무여열반이었다. 이것은 바로 그의 인간됨의 완성이었고, 신의 아들됨의 성취였다. 예수의 십자가는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죽음의 실현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윤회가 곧 열반이라는 대승적 삶의 승리였다(무슨말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어요~ 아자씨)
십자가에 못 박힌 붓다의 최후의 말은 무엇이었을까?"나는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뭇 중생들을 구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았다."
3-4. 어째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이나 인상이나 중생상이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何以故 須菩堤 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보살의 의미규정은 이 한 절에 완료되고 완성된다.이것이 바로 대승의 종지인 것이다.
24/5/3, 금요일 08:18 폰을 놓고 go to home... 5동 1~3라인 배수관막힘을 영주설비에서 땅파고 있었고 지반장의 휴게실 등 2개를 소켓으로 갈고 갈비집 옆 저렴상회에서 10와트 두개를 사고 차 키를 steal하려고,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아 이윽고 두번씩이나 왕복해야 하였고 지에게 부탁하며 점심을 사노라함을 끝내놓고 그 즈음에 1-617호의 벤츄레이터 껀으로소장에게 짜증을 냈던 건 누구였을까?! 착하고 열심한 소장을 얕잡아 보는 내 언투에는 분명 잘못된 것이 있다. 타인이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 최대한 예의 바르고 정중하게 굴자. 오늘 일하면 5월 5일 어린이날 끼어서 사흘 연휴다. 조금 마음을 쉬면서 안정을 되찾자!
아상我相이란 나라는 생각이다.
인상人相이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이다.
중생상衆生相이란 내가 살아 있는 생명체, 저 죽어 있는 돌보다 더 위대하다는 자만감이다.
수자상壽者相이란 시간의 존속을 가지는 모든 존재로 확대되어 나간다.
우리말의 짐승(즘생)은 곧 '중생衆生'의 변형태라고 한다. 앞서 말했듯이 중생은 유정有情을 통칭하며 유정의 개념에서는 식물의 외연이 빠진다. 우리말에 '중생'이 상말로 쓰일 때는 '짐승'의 의미가 내포된다.
즉 '중생상'이란 즘생같은 삶을 영위하는 뭇 인간들이다. 거기에 대비되어 나타나는 것이 곧 수명과 복락을 구유한 고귀한 존재인 '나'이다. 相은 현장의 번역대로 곧 '상想'이다. 이것은 실재가 아니요 곧 생각인 것이다. 아가 있고, 중생이 있고, 수자가 있다는 생각, 그 모습이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보살승에 오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문둥이! 십자가는 무아!
(08:33, 곧 출근시간이다. 마음을 평정하게 하면 세상에 평화롭지 않을 일이 무엇인가! 마음이 출렁거림이 문제다. 수억 수십억의 날들이 똑 같이 운행하는 하루, 오늘은 무엇으로 내 마음이 흔들릴까? 안흔들리고 하루를 보낼 수 있을까?)
(20:02, 108동 203호 베란다 문 밑의 타일 세조각을, 어제 사위와 열을 맞추어 기본 틀을 잡고 오늘 오후에 몰래 회사에서 나와 실리콘을 쐈다. 비록 흠집하나 없이 완벽하게 쏘진 못하지만 내겐 최선을 다한 붙임작업임에랴~ 그리고 아침에 출근할 때, 아내 새벽에 응가 마려워 조금 눗고나서는 영 잠이 오지 않는 거 있지. 마음이 평화로우면 눕기만 하면 잠이 드는 나이지만 마음에 조금이라도 파도가 일면 잠도 파도가 된다. 오늘 새벽에도 그러하였다. 그러나 다행히 한숨 푹 자고 일어났고 06:10 얹저리, 머리는 말끔하게 개어 있었다. 아침에 오랜만에 집자를 조금 하였고, 기타 60에 놓고 6현을 총 1회 운행하고 나서 회사엘 나갔다. 아침볕이 참 좋았고 출근하여 주소장에게 화해의 악수를 나누고~ 전주임에게는 조금 낯설더라. 오후도 늦은 17:00에 1동 617호 같이 가서 벤츄레이터와 흡입.토출 환풍기를 연기로 확인하였고 그 일의 처리야 어쨌든지간에 주소장과 원만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내일과 모래 그리고 글피까지 연달아 사흘연휴에 돌입한 금요일 저녁이고. 나는 요즘 쩐이 없다. 경기통장에서 90을 빼내어 여행비에 썼으니 이번달에 30을 입금하였고, 아내와 약속한 5만원 정기예금을 빼면 십여만원 안팎이 총 재산이므로 연휴 사흘을 집에서 책보면서 규율있게 보내려고 하였는데 아내는 내일 드라이브 하자고 한다. 나 좋아해야 하나 싫어해야 하나. 나물 캐러 가기도 이젠 늦었고 그렇다고 딱히 가보고 싶은 곳도 없다.
묘행무주분 妙行無住分 제4
4-1. 이제 다음으로 수보리야! 보살은 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
復次 須菩堤! 菩薩於法應無所住, 行於布施.
여기서의 '행行'은 '보시'를 가리킨다.
대승불교에서의 '묘妙'는 '진공묘유眞空妙有' 라 할 때의 묘와 항상 의미적으로 상통해 있는 글자며, 그것은 통속적 인식을 벗어난, 즉 지혜의 인식을 거친 후에 회득되는 상식의 세계를 의미한다.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다.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 다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할지니라.”
여기서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그리고 이슬과 번갯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찰나생멸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섬진강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한다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마곡보철 선사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데, 스님은 어째서 부채질을 하고 계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바람의 본질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아는지 몰라도,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이치는 모르고 있구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사는 아무 말 없이 부채질을 계속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空)에 떨어진 것이다. 더위는 본래 없다. 그러나 더운 현상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부채질을 해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부채질을 떠나서 바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
'무주無住'라는 말은 '부주처열반不住處涅盤'이라는 대승의 개념에서 도출되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생사가 곧 열반이고, 번뇌가 곧 보리라고 한다면, 대승보살에게 있어서의 열반은 생사윤회 속에 내재하는 것이지만 그 윤회 속에서 사는 방식이 반드시 '무주' 즉 일정한 데 머물거나 안주하거나 집착하거나 함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이 말을 들으니 함경도에서 생을 마감한 경허선사가 생각나누나!).
'복차復次'는 '또 다음으로'의 뜻인데 문맥을 살려 '또'를 '이제'로 바꾸었다.
4-2.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고, 성.향.미.촉.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보시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所謂不住色布施 不住聲香味觸法布施. 須菩堤! 菩薩應如是布施 不住於相.
종교가 실제적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측면이 심하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세에서 끊임없이 그 조직이 유지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 보시의 기능 때문일 것이다. 보시는 '준다'는 뜻이다. 보시는 '삼시'로 나뉜다. '財시', '법시', 셋째가 '무외시無畏施'인데 이는 두려움을 제거시켜 주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대승의 인식론으로 들어가게 되면, 주는 자도 공空이요, 받는 자도 공空이요, 주고 받는 것도 공空이다. 따라서 보시의 가장 본질적 여건은 내가 보시를 행한다고하는 나의 相의 해소다. 한마디로 티나지 않게 보시를 해야하는 것이다.
공 가운데(空中)에는 색성향미촉법이 없어서 무색성향미촉법입니다.
공 그 자체에, 즉 공 가운데에 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 없다는 뜻입니다.
空에는 그 어떤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空입니다.
어떤 실체라고 여길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空이 아닙니다.
안 = 감각기관 = 眼耳鼻舌身意
밖 = 감각대상 = 色聲香味觸法
眼 : 色 = 눈은 빛깔/형체를 대하고,
耳 : 聲 = 귀는 소리를 대하고,
鼻 : 香 = 코는 냄새를 대하고,
舌 : 味 = 혀는 맛을 대하고,
身 : 觸 = 몸은 감촉을 대하고,
意 : 法 = 뜻은 생각꺼리를 대한다
출처: https://kydong77.tistory.com/12851 [김영동교수의 고전]
4-3.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何以故? 若菩薩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21:31, '나라야마 부시코' 라는 영화가 갑자기 보고싶어 지었다. 일본판 고려장 같은 것인가 보다. 그 영화를 보려면 천상 티비에서 돈 내고 보아야만 한다. 금요일 집바 終.)
(24/5/4, 06:50 연휴의 시작ㅎ 창밖으로 차소음이 오직 시끄러울 뿐. 안남초등학교일까? 노랗고 적황색의 건물이 계양산이 동쪽으로 흘러내린 야산을 배경으로 햇볕에 반짝이고 있다. 저~번 포천 펜션 때 벚나무 밑에 파킹해 놓은 때문으로 때가 낀 나의 펠리녀를 닦으로 가야하나? 집자해야 하나? 그런 고민 아닌 고민 하면서 연휴를 시작한다. 잠자리에서 눈을 떠 옆에 아내가 편안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모습, 어제 밤 '나라야마 부시코' 의 충격을 받았던 아름다운 색조의 4계와 자유로운 性의 나눔 그리고 고려장의 가슴아픈 이야기가 꿈속에서도 이어지고 었었다.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에, 불교와 무관하게 성립한 중국의 지혜의 書인 『노자』 제7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原文)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非以其無私邪(야)?, 故能成其私.
久=오랠 구. 長久=길고도 오래 됨. 所以=이유, 까닭. 且=또 차. 이 차, 아직 차, 만일 차. 非=아닐 비, 나무랄 비.
邪=삐뚤어질 사, 바르지 못할 사. 간사할 사, 그런가 야. 의문사 야. 非~~邪?=~것이 아니겠는가?
1)하늘과 땅은 드넓고도 항구하다. 하늘과 땅이 이렇게 드넓고 항구하는 이유는, 스스로 자기만 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능히 항구한 것이니라.
2) 그러므로 성인(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을 뒤로 물리지만 오히려 앞서게 되고, 몸을 밖에 두어(내버려두어)도 그 몸이 간직되고 존중되나니,
3)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에)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게 되느니라.
우리가 사는 이 천지(天地, 우주)는 참으로 장구(長久)하다. 그 안에는 수없는 만물들이 어우러져서 살고 있고, 한편으로는 모두 자기의 삶을 위하여 애쓰고 경쟁하면서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 같이 열심히 애쓰지만 장구(長久)하지 못한 데 반해서 하늘과 땅은 스스로 자기의 생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장구할 수 있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자기의 생(生)에 대해서 애쓰거나 경쟁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려고 애쓰는 것이 결국은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인데 노자(老子) 특유의 역설(逆說)법이면서 현실적인 말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남 앞에 나서서 잘난 체 하지 않고 자신을 뒤로 물림으로써 오히려 앞에 서게 되고, 스스로 삶의 경쟁에서 한 발짝 밖으로 물러서 있음으로써 결국은 자신을 보존하고 지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존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사사로움이 없어서 삶의 그 치열한 경쟁에서 빠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로움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능히 사사로움을 이루는 결과를 가져 오게 되니 참으로 역설적이 된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많이 빼앗으려고 다투고, 더 많이 소비하려고 하고,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 싸우고 하는 것이야말로 결국은 그 삶이 피폐해져서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치를 아는 사람은 남 앞에 잘났다고 나서지 않고, 사리사욕을 내세우지 않으며 남보다 뒤에 서서 남에게 양보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경쟁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나를 내세우지 않고 양보하면서 여유있게 사는 것이 결국은 그 사람의 인생을 살찌우고 빛나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나 다만 그렇게 되려면 세상 이치에 밝아서 그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잘 사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런 확신을 가지려면 나름대로 자신을 닦는(수(修))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위이 원문 이하는 '바람의 나라'에서 귀한 말씀 모시고 온 것임)
상기 도올의 설명은 좀체로 처음 노자의 이 말씀을 접한 사람에게는 낯설고 낯설다. 눈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아 도올의 직설적 한자 해석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나 많은 글자를 이 Part 속에 집어 넣었기로 컴터가 옳게 작동하지 못하고 번거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깔아 놓은 분파가 보이지 않게 되고, 글자도 작아져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의례히 집자를 하다보면 페이지의 글자가 오바로 인하여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걸 익히 보아 왔다. 이것은 다른 페이지를 만들라는 시그널이다. 꽉찼어요~~ 그런ㅎㅎ 그래서 도올의 금강경 강해 198페이지에서 이만 종료하고 다음 part 를 만들어 새롭게 집자를 시작하기로 한다.
(2024/5/4, 토요일 08: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