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 장. 民之饑(민지기)
- 백서본 제40장
남회근 : 노자가 처했던 비참한 시대
장치청 :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주춘재 : 삶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이 현자다
톨스토이 : 백성들이 불복종하는 이유
오강남 :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 수탈정치의 종식
도올 김용옥 : 인민의 굶주림은
여운 이준호 : 삶에 집착하지 않기에 존귀하다
남 : 남회근(1918~2012) 근래 20~30년 대만에서 국사 대접을 받은 분으로 장개석과 장경국의 국사
장 : 장치청(1959~) 중국 고전 연구의 권위자. 북경중역국학원 원장. 북경중의약대학 경영대학원 원장.
주 : 주춘재(1957~) 화가, 작가. 중국문화보급과 전세계 대중화에 앞장섬.
톨 : 레프 톨스토이(1828~1910) 러시아 소설과, 사상가.
오 : 오강남(1941~) 캐나다 리지아나대학교 명예교수, 종교학자.
김 : 도올 김용옥(1948~) 철학자, 사상가.
여운 이준호 : 야매 한학자, 지식 노가다꾼, 빅히스토리 연구가.
75. 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백성들의(民之) 굶주림은(饑)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上)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처먹기(食稅之多) 때문이다(以). 이런 연유로(是以) 굶주리는 것이다(饑). 백성들의(民之) 질서 잡기 어려운 것은(難治),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上之) 지나치게 지배하려 들기(有爲) 때문이다(以), 그런 연유로(是以) 질서를 잡기 어려운 것이다(難治). 백성들이(民之)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輕死),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삶을 추구하기(求生之厚) 때문이다(以). 그런 연유로(是以) 삶에 애착이 없는 것이다(輕死). 대저 오로지(夫唯) 삶에 집착하지 않으므로(無以生)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자는(爲者), 이토록(是) 현명하기에(賢於) 삶이 존귀한 것이다(貴生).
The people suffer from famine because of the multitude of taxes consumed by their superiors. It is through this that they suffer famine.
The people are difficult to govern because of the (excessive) agency of their superiors (in governing them). It is through this that they are difficult to govern.
The people make light of dying because of the greatness of their labours in seeking for the means of living. It is this which makes them think light of dying.
Thus it is that to leave the subject of living altogether out of view is better than to set a high value on it.
民之饑(민지기), 以其上食稅之多(이기상식세지다), 是以饑(시이기).
남 :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위정자가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이므로, 이런 까닭에 굶주리는 것이다.
장 :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윗사람들이 받아먹는 세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굶주리는 것이다.
주 :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은 위에서 세금을 많이 거두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심한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이다.
톨 : 국가의 세금이 너무 많고 무거우면, 백성들이 굶주린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고통의 원인이다.
오 : 백성이 굶주리는 것.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먹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굶주리는 것입니다.
김 : 백성이 굶주리는 것은 그 윗사람이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처먹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굶주리게 되는 것이다.
여운 : 백성들의(民之) 굶주림은(饑)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上)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처먹기(食稅之多) 때문이다(以). 이런 연유로(是以) 굶주리는 것이다(饑).
民(백성 민/면) - 백성, 사람, 민심, 노예, 어둡다, 다스림을 받는 사람, 어리석음, 잠자다.
之(갈지) - 가다, 끼치다, 쓰다, 사용하다, 이르다, ~의, 에, 와, ~과, 이에, 을, 그리고, 만일.
饑(주릴 기) - 주리다, 굶다, 흉년이 들다, 凶年.
以(써 이) - ~써, ~로, ~가지고, ~때문에, ~까닭에, ~인하여, ~하여, ~함으로써, ~하기 위하여.
上(윗 상) - 위, 윗, 앞, 첫째, 옛날, 이전, 임금, 군주, 높다, 올리다, 드리다, 오르다.
食(밥 식/사) - 밥, 음식, 제사, 벌이, 생활, 생계, 먹다, 먹이, 기르다, 양육하다.
稅(세금 세/탈/열) - 세금, 구실, 거두다, 세내다, 벗다, 풀다, 기뻐하다, 기쁨, 수의, 바꾸다.
多(많을 다) - 많다, 낫다, 더 좋다, 뛰어나다, 많게 하다, 두텁다, 늘어나다, 넓다, 크다, 남다
是(이 시) - 이, 이것, 여기, 무릇, 이에, 옳다, 바르다, 바로잡다, 다스리다.
세금(稅金, Tax)은 주권(主權)이 누구에 있느냐에 따라 그 쓰임과 용도가 다르다. 현대 민주주의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기에 세금은 복지비용 등과 같이 소득의 공평한 재분배에 그 목적성을 갖는다. 그러나 왕조시대에는 주권이 왕과 특권계층이 소유한다. 그래서 왕권(王權)이라고 한다. 짐이 곧 국가요, 주인인 시대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4세(1638~1715)가 한 말로 유명하다. “L'État, c'est moi.” 주권이 왕권인 시절에 세금은 왕권을 유지하기 위한 유지비용으로 사용된다. 그러기 때문에 왕과 귀족들이 사치가 심하면 심할수록 백성들에게 착취하는 세금은 강제로 빼앗아 징수하는 수탈(收奪)이 된다. 왕가가 전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백성들의 삶은 그야말로 곡소리가 난다.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한 원인도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과도한 세금과 기근에 있었다. 18세기에 들어와서 혁명 전야까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1714), 미국 독립 전쟁(1775~1783)을 비롯한 여섯 차례의 큰 전쟁에 참여했다. 참전의 결과는 프랑스의 국익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재정만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말년에 국가 재정은 위기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후 더욱 심각해지고 만성화되어 갔다. 또한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의 폐지(1685)와 위그노 추방은 프랑스 산업 발전에 심각한 악재로 작용했다. 귀족 계급은 성직자와 함께 봉건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18세기에는 여러 그룹으로 갈라져 있었다. 군대에 복무하는 군인 귀족과 법무에 종사하는 법조 귀족이 대표적인 귀족이었지만, 일부 귀족을 제외하고 거의 상당수의 귀족은 궁정(宮廷)에 빌붙어 영지 경영에 관심을 갖지 않고 나태한 생활을 보냈으며,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막대한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절대왕권 제도와 절대왕권 제도를 지지하였던 귀족들 대부분 재정적 곤란에 처해 있었다. 그들은 농민을 더욱 착취하여, 농촌을 거의 황폐화로 만들었다. 프랑스에서 자본가 계급인 부르주아가 발전하려면 사회적 대변혁이 불가피하였다. 계몽 사상가들은 이와 같은 결함이 된 사회 제도를 맹비난하면서 합리적인 사회 제도의 출현을 선동했다. 당시 프랑스는 계몽주의 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와 백과전서파인 볼테르로 알려진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 등 사회계약론이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것을 국민이 공감하여, 당시의 사회 제도(구체제)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되었다. 부르봉 왕가 정부, 특히 국왕 루이 16세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점진적인 개혁을 목표로 했지만, 특권 계급과 국민과의 괴리를 채울 수 없었다. 프랑스 혁명은 이런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모순에서 발생하였다. 구체제 하에서는 인구의 2% 정도밖에 안 되는 제1계급인 성직자와 제2계급인 귀족은 전체 토지의 40%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면세 등의 혜택을 누리는 등 주요 권력과 부와 명예를 독점하였다. 인구의 약 98%를 차지하던 제3계급(평민)은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제3계급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삼부회가 있었지만 175년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정치에서 배제되었다. (위키백과)
“백성들의(民之) 굶주림은(饑)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上) 세금을 너무 많이 받아 처먹기(食稅之多) 때문이다(以). 이런 연유로(是以) 굶주리는 것이다(饑).”
民之難治(민지난치), 以其上之有爲(이기상지유위). 是以難治.
남 : 백성들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위정자가 인위적으로 다스리므로, 이런 까닭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장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들이 제멋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다.
주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윗사람들이 함부로 간섭하고 제멋대로 굴기 때문이다.
톨 : 만약 정부가 백성들을 극도로 어렵게 하면 백성들은 불복종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불복종의 이유이다.
오 : 백성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 윗사람이 뭔가를 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김 : 백성이 다스리기 어려운 것은 그 윗사람이 너무 유위적인 것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다스리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여운 : 백성들의(民之) 질서를 잡기가 어려운 것은(難治),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 上之) 지나치게 지배하려 들기(有爲) 때문이다(以), 그런 연유로(是以) 질서를 바로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다(難治).
難(어려울 난) - 어렵다, 꺼리다, 싫어하다, 괴롭히다, 물리치다, 힐난하다, 삼가다, 우거지다.
治(다스릴 치) - 다스리다, 질서가 잡히다, 고치다, 배우다, 견주다, 돕다, 정사, 저치, 정도.
有(있을 유) - 있다, 존재하다, 가지다, 독차지하다, 많다, 넉넉하다, 소유.
爲(위할 위) - 하다, 이루다, 만들다, 위하다, 다스리다, 되다, 바꾸다, 길들이다, 삼다, 속하다.
노자 정치철학의 핵심인 무위(無爲)와 (有爲)를 구분해야 한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爲’를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달려있다. 나는 위를 동물행동학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서 가축화(家畜化, Domestication)의 뜻인 길들인다는 의미로써 사용하였다. 실제로 ‘爲’는 코끼리를 길들이는 '파잔 행위'를 뜻한다. 동물이 본능적으로 가진 야생성인 공격성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몸과 정신을 지배하는 행위이다. 인간의 도덕심은 스스로 자기를 길들이는 자발적 절제심과 인내심이다. 자기 내면의 공격성과 폭력성을 자발적으로 다스리는 개인의 능력이다. 지배(支配)는 내가 타인인 남과 집단을 복종시켜 다스리는 것이다. 개인의 도덕심이 자발적인 자기 길들이기라면 지배는 강압적으로 타인과 집단을 복종시켜 다스리는 것이다. 결국 지배는 유위(有爲)에 해당한다. 지배와 복종은 차별을 전제로 하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이 된다.
무위(無爲)는 상대적으로 인간이 자연선택에 의해 선택 진화되어온 도덕심을 신뢰하여 지배하지 않는 것이다. 질서(秩序, order)는 인간의 도덕심과 이타심 그리고 자비심이 발현될 때 스스로 그러하게 지켜지는 인간 고도의 메타인지에서 나오는 자발적으로 규칙을 지키는 능력이다. 노자는 인간의 본능과 본성을 구분하여 제대로 파악한 것이다. 두들겨 패서 강압적으로 세우는 질서는 비인간화에 기인한 불평등 사회의 계급적 질서 속에 나온다. 북한이라는 불량국가 미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자발적 질서에 의해 스스로 질서를 세우지 않는 강압적 통제 국가이기 때문이다.
“백성들의(民之) 질서를 잡기 어려움은(難治),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上之) 지나치게 지배하려 들기(有爲) 때문이다(以), 그런 연유로(是以) 질서를 바로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다(難治).” 난치(難治)에 대한 해석을 질서를 잡기가 어렵다고 번역하니 뜻이 더욱 통한다. 국민은 통치와 지배의 대상이 아니다. 섬김과 배려의 대상이 되어야 함이고 통치자는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民之輕死(민지경사), 以其求生之厚(이기구생지후), 是以輕死(시이경사).
남 : 백성들이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그 위정자가 삶을 두터이 하기를 구하므로 이런 까닭에 죽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장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들이 지나치게 풍요로운 삶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주 : 백성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윗사람들이 지나치게 탐욕스러워서이다. 자신들의 삶이 백성들의 죽음보다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톨 : 백성들이 너무 강하게 생을 찾으면 죽음을 가장 쉬운 일로 바라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백성들이 죽음을 무시하는 태도의 이유이다.
오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입니다.
김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그 윗사람이 너무 그 사는 것을 후하게 구하여 백성이 그들을 봉양하는 데 허덕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하므로 죽음을 가벼이 여기게 되는 것이다.
여운 : 백성들이(民之)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輕死),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삶을 추구하기(求生之厚) 때문이다(以). 그런 연유로(是以) 삶에 애착이 없는 것이다(輕死).
輕(가벼울 경) - 가볍다, 가벼이 여기다, 업신여기다, 천하다, 빠르다, 가벼이.
死(죽을 사) - 죽다, 생기가 없다, 활동력이 없다, 죽이다, 다하다, 목숨을 걸다.
求(구할 구) - 구하다, 빌다, 청하다, 탐하다, 취하다, 모으다, 묻다, 부르다, 종말.
生(날 생) - 나다, 낳다, 살다, 기르다, 서투르다, 싱싱하다, 만들다, 백성, 선비(벼슬 않는).
厚(두꺼울 후) - 두텁다, 후하다, 두껍다, 짙다, 진하다, 지극하다, 친하다, 우대하다.
인간의 깊숙한 본능에 자리한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인 본능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단, 폭력성의 유무다. 대표적인 유형이 식물을 길들이는 농사다. 우리는 풀을 길들여서 먹이활동을 하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다. 개미 중에서도 농사를 짓는 250종의 가위개미 등이 있다. 개미가 농사를 시작한 것이 무려 6,000만 년 전이니 1만 년 전에 농사를 시작한 사피엔스와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고조선의 후예인 우리는 척박한 땅을 개간하여 부지런히 농사짓는 민족이다. 카레이스키는 강제 이주 정책으로 1937년에서 1939년 사이, 스탈린은 고려인이 일본군의 Spy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고려인 지도자 500명을 체포하고 그중 40~50명을 숙청하여 처형하였고 연해주에 살던 172,000명의 고려인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과 우즈베키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당시 소련의 극동지역 위원장이었던 ‘리우시코프’는 1937년 8월 하바롭스크에 머물면서 스탈린의 지령을 받고 강제 이주 정책을 추진했는데, 접경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간첩의 소지가 있으니 일본인과 접할 수 없게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강제 이주 정책을 건의했다고 한다.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추방 및 유배되었고, 이주 도중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이주민들은 협력하여 관개 시설을 설치하였고, 척박한 땅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한국어 사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다음 세대는 한국어를 거의 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위키백과)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1878~1953)은 인류 역사에서 히틀러 이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을 학살한 ‘조지아의 인간 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은 내가 싫어하는 코털 난 침팬지이다. 7살 때 걸린 천연두로 사경을 헤맸을 때 그냥 죽었으면 인류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지배에는 평화적인 지배와 폭력적인 지배가 있다. 이 둘 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 안에 원초적인 본능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 위에 있는 놈들이(其)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삶을 추구하기(求生之厚) 때문이다(以).”
독일계 미국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과 인문주의 철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S. Fromm, 1900~1980)은 그의 저서 『파괴란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을 정의했다. “인간은 살인자라는 점에서 동물과 다르다. 인간은 자기 종족인 동료를 아무런 생물학적, 경제적 이유도 없이 죽이고 괴롭히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 만족감을 느끼는 유일한 영장류일 것이다.”
“백성들이(民之) 목숨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輕死), 그런 연유로(是以) 삶에 애착이 없는 것이다(輕死).”
夫唯無以生爲者(부유무이생위자), 是賢於貴生(시현어귀생).
남 : 대저 오직 삶에 대하여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 것, 이것이 삶을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현명하다.
장 : 무릇 삶을 지나치게 위하지 않는 사람이 삶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보다 낫다.
주 : 삶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만이 삶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현자이다.
톨 : 이것이 바로 생을 찾지 않는 자가 생을 찾는 자보다 현명한 이유이다.
오 : 삶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 삶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보다 현명합니다.
김 : 대저 오로지 사는 것에 매달려 있지 않은 무심한 지도자가 사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지도자보다 억압받는 백성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슬기로운 지도자이다.
여운 : 대저 오로지(夫唯) 삶에 집착하지 않으므로(無以生)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자는(爲者), 이토록(是) 현명하기에(賢於) 삶이 존귀한 것이다(貴生).
夫(지아비 부) - 지아비, 남편, 사내, 장정, 선생, 저, 대저, ~도다,~구나, 다스리다, 많다.
唯(오직 유) - 오직, 다만, 바라건대, 이, 응답하다, 예, 누구, 때문에, 비록 ~하더라도.
無(없을 무) - 없다, 아니다, 아니하다, 말다, ~하지 않다, 무시하다, ~관계없이, ~막론하고.
是(이 시) - 이, 이것, 여기, 무릇, 이에, 옳다, 바르다, 바로잡다, 다스리다.
賢(어질 현) - 어질다, 현명하다, 좋다, 낫다, 더 많다, 넉넉하다, 존경하다, 두텁다, 착하다.
於(어조사 어) - ~에, ~에서, 어조사, 기대다, 따르다, 가다, 있다, 탄식하다.
貴(귀할 귀) - 귀하다, 지위가 높다, 중요하다, 귀중하다.
내가 추구했던 공부는 결국 인간이 왜 도덕심을 진화시켰을까? 자연은 왜 인간에게만 도덕적 본성을 진화하도록 허락했을까? 이 어려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것만이 노자의 도덕경을 만나고 역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영장류학자들을 통해 600만~700만 년 사이에 침팬지와 보노보 그리고 제3의 침팬지인 인간의 공통 조상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와 분화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대형 영장류 사촌들과의 공통점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평화가 공존하는 야누스적인 본능을 보았다. 또한 그들과 다른 점은 바로 강력한 인간의 도덕심과 이타심 그리고 자비심이다. 그리고 그 도덕심 안에 인간의 가장 강력한 절제심과 인내심이 있다. 절제와 인내가 주는 중용의 맛과 멋은 인간을 미련과 집착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물질의 소유에 대한 미련과 집착, 계급과 서열에 대한 미련과 집착, 사람에 대한 미련과 집착, 삶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끊어내야 만이 “대저 오로지(夫唯) 삶에 집착하지 않으므로(無以生)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자는(爲者), 이토록(是) 현명하기에(賢於) 삶이 존귀한 것이다(貴生).” 스스로 삶이 현명해지니 더욱 존귀하고 존귀해 도리어 오래가는 법이다.
한글비교역주 참고 문헌
남회근 노자타설(老子他說) 상·하 – 번역 설순남
남회근(Nan Huai-Chin, 南懷瑾, 1918~2012) 선생을 소개한다. 본문에는 [남 : ~ ]으로 표기되었다. 부·키 출판사에서 2012년 초판 출판되었다. 1987년 남회근 선생의 『노자타설(老子他說) 상·하』본으로 ‘남회근 저작선 5’의 시리즈물이다.
남회근 선생은 중국의 승려, 종교학자, 작가이다. 현대 중국에서 존경받는 영적 스승인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 불교 부흥의 주요 세력으로 여겨졌다. 1918년 절강성 온주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서당 교육울 받으며 사서오경을 읽었다. 17세에 중국 항주 국술원에 들어가 각 문파 고수들로부터 무예를 배우는 한편 문학, 서예, 의약, 천문 등을 익혔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사천(四川)으로 내려가 장개석이 교장으로 있던 중앙군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으며 사회복지학을 공부하였다. 교관으로 일하던 시절 선생에게 영향을 준 스승 원환선(袁換仙, 1887~1966)을 만나 삶의 일대 전환을 맞는다.
1942년 25세에 원환선이 만든 ‘유마정사’에 합류하여 수석 제자가 되었고, 스승을 따라 근대 중국 불교계 중흥조로 알려진 허운(虛雲, 1840~1959) 선사(先師)의 가르침을 배웠다. 불법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중국 불교 성지 아미산에서 폐관 수행하면서 대장경을 독파하였고, 이후 티베트로 가서 여러 종파 스승으로부터 밀교의 정수를 전수 받고 수행경지를 인증받았다. 1947년 고향으로 돌아가 절강성 성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문연각 사고전서와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을 열람하고, 이후 여산 천지사 곁에 오두막을 짓고 수행에 전념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49년 봄 대만으로 건너가 문화대학, 보인대학 등과 사회단체에서 강의하면서 수련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동서학원을 창립하였고, 1988년 홍콩을 거주지를 옮겨 칠 일간 참선을 행하는 선칠 모임을 이끌며 교화사업을 하였다. 1950년대 대만으로 건너간 후부터 일반인과 전문가를 대상으로 유불도가 경전을 강의하며 수많은 제자를 길렀고,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40여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하여 동서양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선생의 강의는 유불도를 비롯한 동양사상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깊은 수행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엄중한 가르침, 철저히 현실에 기초한 삶의 자세, 사람을 끌어당기는 유머를 두루 갖춘 것으로 정평이 있다. 2006년 이후 중국 강소성 오강시에 태호대학당을 만들어 교육사업에 힘을 쏟다가 2012년 9월 29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부키 – 2013년 1월 8일 초판
번역 - 설순남
서울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경사회과학원에서 방문학자 자격으로 수학했으며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성결대학교 등에서 강의하였다. 저서로 『황준헌 시선』이 있고, 옮긴 책으로 『대학 강의』 『맹자와 공손추』 『노자타설』 『맹자와 양혜왕』 『약사경 강의』 등이 있다.
2. 장치청 『도덕경 완전해석』 - 번역 오수현
두 번째로 소개할 장치청(張其成장기성, Zhang-Qicheng, 1959~) 교수로 본문에는 [장 : ~ ]으로 표기되었다. 중국 고전 연구의 권위자이자 역학과 중의학 분야의 석학이자 대중적인 양생 전문가로도 유명하다. 북경중역국학원 원장과 북경중의약대학 경영대학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북경대학·청화대학 특별 초빙교수로 강의하고 있으며, 중국 관영 방송 CCTV, 북경 TV 등에서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학문의 대중화 작업에도 힘쓰고 있다.
국가급 무형문화 유산 명의 ‘북송의 장일첩(張一帖, 1130~1200)’ 가문의 제15대 계승자로, 훈고학의 대가 베이징중의학대학 교수 첸차오천(錢超塵, 1036~2022)과 역학의 대가 베이징대학 철학과 주보쿤(朱伯崑, 1923~) 교수에게 사사했다. 1992년 중국 최초로 『역학대사전』, 『역경응용대백과』 등을 편찬했고, 《역도주간》을 창간하여 유교, 도교, 불교, 의학과의 융합적인 차원에서 ‘역(易)’에 접근하고자 했다. 2003년부터 북경대학에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고전 강의를 시작했으며, 멘토제 서원을 세워 ‘중국학의 지혜를 적용한 경영모델’ ‘오행을 통한 인재관리 시스템’을 제시했다. 국가급 석사 교재 『중국전통문화개론』을 편찬하는 등 현재까지도 국학 5대 경전 『주역』, 『논어』, 『도덕경』, 『육조단경』,『황제내경』을 강연하는 ‘고전멘토’로 활동 중이다. 2009년에는 “현대 국학의 선두 주자” 중 하나로 선정되어 “국학 연구의 일인자”로 칭송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주역 완전 해석』,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논어 완전 해석』, 『육조단경 완전 해석』, 『황제내경 완전 해석』, 『역경 양생 대도』, 『유가 양생대도』, 『불가 양생대도』, 『도가 양생대도』, 『주역 인생 지혜』 등 다수가 있다. (yes 24 작가소개)
판미동 - 2022년 2월 7일 1판 1쇄 찍음
옮긴이 - 오수현
숙명여대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중국 산동과기 직업전문대학 한국어과 교사, ㈜효성, KELLEY ASSOCIATES를 거쳐 현재는 바른번역 소속 출판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는 『주역 완전해석』,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자치통감: 천년의 이치를 담아낸 제왕의 책』, 『주역에서 경영을 만나다』, 『나의 최소주의 생활』, 『나는 왜 작은 일에도 상처받을까』, 『시의 격려』, 『세포가 팽팽해지면 병은 저절로 낫습니다』, 『오늘, 뺄셈』, 『중국은 무엇으로 세계를 움직이는가』, 『비즈니스 삼국지』 , 『똑똑한 리더의 공자 지혜』, 『똑똑한 리더의 노자 지혜』 외에도 다수가 있다.
3. 주춘재 『만화 도덕경』 - 번역 박영재
세 번째로 소개할 분은 저우춘차이(周春才 1957- ) 선생이다. 본문에는 [주 : ~]
1957년 중국 베이징에서 출생한 화가이자 작가로 오랫동안 중국문화의 연구와 대중화에 전념해왔다. 서양 문화와 비교를 통해 과학과 철학을 포함한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새롭고 참신한 해석을 전개해 내외의 주목을 모았다. 만화를 넘어서는 풍부한 내용과 생동감 있는 작품 이미지로 광범위한 전문가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십여 개의 언어로 작품이 번역 출판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예기 : 모두들 알지만 아무도 안 본 사서오경》, 《만화 주역》, 《만화 논어》, 《만화 노자》, 《만화 장자》, 《화설 황제내경》 등이 있다. (yes 24 작가소개)
가갸날 - 2021년 8월 10일 초판
번역 박영재
고려대학교와 타이완 정치대학교 동아시아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하였다.
4. 러시아 최초의 완역본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 - 최재목 역주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러시아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영어: Lev Nikolayevitch Tolstoy, 1828~1910) 러시아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본문에는 [톨 : ~ ]로 표기.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사상가이다. 도스토옙스키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손꼽힌다.
1828년 9월 9일, 러시아 남부의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톨스토이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2살과 9살 때 각각 모친과 부친을 여의고, 이후 고모를 후견인으로 성장했다. 어린 시절에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고, 16세가 되던 1844년에 까잔 대학교 동양어 대학 아랍·터키어과에 입학하였으나 사교계를 출입하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다 곧 자퇴해 1847년 고향으로 돌아갔다. 진보적인 지주로서 새로운 농업 경영과 농노 계몽을 위해 일하려 했으나 실패로 끝나고 이후 3년간 방탕하게 생활했다. 1851년 맏형이 있는 카프카스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1852년 문학지 [동시대인]에 처녀작인 자전소설 중편 「유년 시절」을 발표하여 투르게네프로부터 문학성을 인정받기도 하였다. 1853년에는 『소년 시절』을, 1856년에는 『청년 시절』을 썼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당시 전쟁 경험은 훗날 그의 비폭력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크림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1856)를 써서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이듬해 잡지 『소브레멘니크』에 익명으로 연재를 시작하면서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작품 집필과 함께 농업 경영에 힘을 쏟는 한편, 농민의 열악한 교육 상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학교를 세우고 1861년 교육 잡지 [야스나야 폴랴나]를 간행했다. 1862년 결혼한 후 문학에 전념해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등 대작을 집필, 작가로서의 명성을 누렸다. 1859년에 고향인 야스나야 폴랴나에 농민학교를 세우는 등 농촌 계몽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였으며 농민학교를 세웠다.
34세가 되던 1862년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하여 슬하에 모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볼가스텝 지역에 있는 영지를 경영하며 농민들을 위한 교육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1869년 5년에 걸쳐 집필한 대표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873년에는 『안나 카레니나』의 집필을 시작해 1877년에 완성했으며, 1880년대는 톨스토이가 가장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던 시기로 알려져 있는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크로이체르 소나타』,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 등의 작품이 쓰인 시기도 바로 이때이다.
그러나 이 무렵 삶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며 정신적 위기를 겪었다. 그리하여 1880년 이후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재산 제도와 러시아 정교에 비판을 가하고 『교의신학 비판』, 『고백』 등을 통해 ‘톨스토이즘’이라 불리는 자신의 사상을 체계화했다. 사십대 후반 정신적 위기를 겪으며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를 천착하면서 작품세계의 분수령이 되는 『참회록』(1879)을 내놓았고, 정치, 사회, 종교, 사상적 문제들에 관해 계속해서 저술하고 활동했다. 또한 술과 담배를 끊고 손수 밭일을 하는 등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하며, 빈민 구제 활동도 했다.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고, 중편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과 『크로이처 소나타』(1889)를 통해 깊은 문학적 성취를 보여주었으며, 말년까지도 『예술이란 무엇인가』(1898)와 『부활』(1899) 등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그 자신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귀족이었으나, 『바보 이반과 그의 두 형제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 땅이 많이 필요한가?』, 『세 가지 질문』 등의 집필을 통해 러시아 귀족들이 너무 많은 재산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다수의 민중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음을 비판하는 문학 활동을 하여, 러시아 귀족들의 압력으로 『참회록』과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의 출판 금지를 당했다.
하지만 독자들은 필사본이나 등사본으로 책을 만들어서 몰래 읽었고, 유럽, 미국, 아시아에 있는 출판사들이 그의 작품을 출판하여 외국에서는 그의 작품이 유명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극단적인 도덕가가 되어 1880년 이후에 낸 일련의 저술에서 국가와 교회를 부정하고, 육체의 나약함과 사유재산을 비난하는 의견을 발표했다. 저작물에서 개인의 이득을 취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저작권을 포기하는 선언을 했고(1891), 1899년 종교적인 전향 이후의 대표작 『부활』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 출간되자마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도 번역되었으며, 출판으로 인한 수익은 당국의 탄압을 받던 두호보르 교도를 캐나다로 이주시키는 데 쓰였다.
1901년 『부활』에 러시아 정교를 모독하는 표현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종무원(宗務院)으로부터 파문을 당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왕성한 집필 활동을 통해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1886), 『크로이처 소나타』(1889),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 『부활』(1899) 등을 계속해서 발표했다. 사유재산과 저작권 포기 문제로 시작된 아내와의 불화 등으로 고민하던 중 1910년 집을 떠나 폐렴을 앓다가 현재 톨스토이 역이 되어 있는 아스타포보 역장의 관사에서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임종 때 아내를 보기를 거부한 톨스토이의 마지막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 왜 사람들은……”이었다.
귀족의 아들이었으나 왜곡된 사상과 이질적인 현실에 회의를 느껴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추구했다. 그는 고귀한 인생 성찰을 통해 러시아 문학과 정치, 종교관에 놀라운 영향을 끼쳤고, 인간 내면과 삶의 참 진리를 담은 수많은 걸작을 남겨 지금까지도 러시아를 넘어 세계적인 대문호로 존경받고 있다. 인간과 진리를 사랑했던 대문호 톨스토이. 그는 세계 문학의 역사를 바꾼 걸작들을 남긴 소설가이자 인도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사상에까지 영향을 준 ‘무소유, 무저항’의 철학을 남긴 사상가였다. 톨스토이의 작품만이 지닌 문체와 서사적 힘은 지금 보아도 여전하다. 특히 소설 속 아름다운 풍경 묘사와 이야기의 서사성, 섬세한 인물 심리 묘사 등이 돋보이며, 오늘날까지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로 인정받고 있다. (yes 24 작가소개)
그러나 그가 『노자, 도덕경』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최초로 러시아어 완역서『노자, 도덕경』을 남겼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톨스토이는 말년에 부처와 불교, 노자와 공자에 심취하였다. 특히 그는 『노자, 도덕경』의 ‘도道’와 ‘무위(無爲)’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무위사상은 바로 그의 무저항, 박애, 비폭력 평화주의와 공명하는 것이었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어로 된 『노자, 도덕경』 완역본을 희망한지라 여러 차례 번역을 시도하였다. 마침 모스코바 대학에 유학 와 있던 일본인 고니시 마스터로를, 그의 지도교수인 그로트(톨스토이 친구)를 통해서 만나, 1892년 11월부터 1893년 3월에 걸쳐서 『노자, 도덕경』의 러시아 역을 완성한다. 이것이 러시아 최초 완역 『노자 도덕경』이다. (본문 중)
21세기문화원 - 2021년 1월 20일 1쇄 인쇄
역주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교수. 일본 츠쿠바筑波대학원에서 문학석사·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동안 하버드대 · 도쿄대 · 베이징대 · 라이덴대 등에서 연구하였다.
‘한국양명학회장’ 및 ‘한국일본사상사학회장’을 지냈다. 전공은 동아시아 양명학 비교(동아시아사상사비교)이며, 저·역서와 감수한 책으로는 『톨스토이가 번역한 노자, 도덕경』, 『근대 일본의 양명학』, 『나는 나대로 살았다 어쩔래』(제8시집), 『풍수 환경학』, 『불교 도상학』 등 50여 권이 있다.
5. 『오강남 풀이 도덕경』
종교학자 오강남(1941~) 교수님이시다. 82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존경하는 스승이시기도 하다. 본문에는 [오 : ~ ]로 표기.
현재 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University of Regina) 비교종교학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연을 하고 있다. 더불어 ‘종교너머, 아하!’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캐나다 맥매스터(McMaster) 대학교에서 「화엄華嚴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에 관한 연구」로 종교학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그동안 북미 여러 대학과 서울대·서강대 등에서 객원교수, 북미한인종교학회 회장, 미국종교학회(AAR) 한국종교분과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노장사상을 풀이한 『도덕경』, 『장자』, 종교의 이해와 분석을 담은 『예수는 없다』, 『세계종교 둘러보기』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종교 너머, 아하!』가 있으며, 최근 인생과 종교에서의 깨달음을 담은 『움켜쥔 손을 펴라』,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를 펴냈다. 번역서로서는 『종교다원주의와 세계종교』,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귀향』, 『예언자』, 『예수 하버드에 오다』, 등이 있다.
현암사 – 개정판 2010년 3월 15일
6. 도올 김용옥 역주 『노자가 옳았다』
도올 김용옥(金容沃, 1948~)선생은 대한민국의 철학자, 종교학자, 사상가, 한의사,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광산. 호는 도올(檮杌)이다. 본문 [김 : ]으로 표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천안 대흥동에서 광제의원을 운영한 집안의 6남매 중 막내로 자랐다. 초등학교를 천안에서 졸업하고, 보성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고려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였고, 한국신학대학교 신학과에서 수학한 후 고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72년 9월 중화민국으로 가서 국립 타이완 대학 철학연구소에서 2년간 수학하면서 〈노자 "자연" 철학에서의 "무위" 의 기능(老子「自然」哲學中「無爲」之功能)〉이라는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일본으로 가서 1977년까지 도쿄 대학 대학원 중국철학과에서 수학하며 〈왕선산의 동론(王船山の動論)〉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7년에 미국으로 가서 펜실베니아 대학교 동방학과 대학원과 하버드 대학교 동아시아어문학과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는데, 하버드에서 〈왕부지王夫之의 철학, The Philosophy of Wang Fu-zhi(1616~1692)〉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0년에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한의학과에 입학하여 한의학사학위도 취득하였다.
대학교수, 철학자, 사상가, 언론인, 한의사, 연출가, 시나리오 작가, 희곡 작가, 극단의 단원 등 다양한 정체성으로 활동하였다. 동, 서양 철학과 종교사상까지 다양한 학문적 탐구와 저작 활동을 벌였다. 1982년 9월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철학과 부교수가 되고 1985년 9월에는 동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다. 1986년 양심선언(‘한국의 오늘을 사는 한 지성인의 양심선언’)을 하며 고려대학교 교수직을 사퇴한 후 여러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등을 강의했다. 1988년 무렵부터 방송 강연에 출강하였다.
그는 문화계에서도 몇 가지 활동을 했다. 악서고회(樂書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국악을 콘템포러리 뮤직으로 승화시키는 다양한 기초작업을 하였다. (1984년 3월~1987년 12월). 한국의 전통음악을 이끄는 대표적 주자, 백대웅, 김혜숙, 박범훈, 송방송, 이성천, 권오성, 최종민, 이보형, 양승희 등이 참여했다. 이후 한대수와 록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도도회(檮濤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한국화 교수들과 그 대학 출신 화가들(이종상, 김병종, 김호득, 장상의, 심현희, 장혜용, 이민주 등)과 정기적인 활동을 했다. (1988년 6월~1999년 6월)
영화와 연극 활동도 했는데 대중의 사랑을 받는 마당극으로 유명한 극단 ‘미추’를 손진책, 김성녀와 함께 창단(1986년 8월)하여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키는 많은 연극 작업을 했다. 《시간의 그림자》, 《그 불》 등을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987년에는 잠시 영화인 심포지움을 만들어 유현목, 김수용, 임권택, 이장호, 김호선, 하명중, 정지영, 박광수, 이두용, 황기성 등과 활동했다. 이후 임권택의 《장군의 아들》, 《개벽》, 《취화선》의 대본을 썼고, 특히 《취화선》은 2002년 55회 깐느영화제 감독상을 획득하였으며 《개벽》에서 타이틀롤을 맡은 이덕화는 본인(김용옥)이 진행자로 활동 중인 KBS 2TV 《도올학당 수다승철》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취화선》과 《왕의 남자》의 자막은 직접 영역했다.
유기화학자 친형 김용준과 함께 신과학운동 세미나를 주도하고, 대우재단지원 과학사상연구회(科學思想硏究會)를 설립했다. (1984년 3월~1990년 2월) 한국의 대표적인 과학자, 과학사상가들(조순탁, 이성범, 장회익, 김두철, 서정선, 신중섭, 이봉재 등)이 참여했으며 이후 꾸준히 과학과 철학이라는 학술지를 출간했다.
1989년에는 한국사상사연구소(Korean Institute of Classical Studies)를 세워 한국고전 최초의 일자색인인 《삼국유사인득》을 출간했다. 이 작업은 후에 제자 김현 교수의 방대한 《조선왕조실록》 전체 한글번역 프로그램인 CD-ROM작업으로 이어져 한국학의 신기원을 세웠을 뿐 아니라, 한류의 원류인 사극 드라마들의 희곡작업의 근간을 이루었다.
1993년에는 도올서원을 세워 15기에 걸쳐 3,000여 명의 학생을 배출해 한학의 배경을 가진 우수한 인재들이 이 사회에서 활약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민족문화추진회의 한국고전국역사업을 지원하였고, 그 기관은 이후 한국고전번역원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에는 태권도철학세미나를 개최하여 무술의 본질과 태권도 문화의 세계화를 논하였다. 유병관, 양진방, 김영선, 김용범, 최의정, 임신자, 바비 클레이튼(Bobby Clayton), 스티븐 카프너(Steven D. Capener) 등이 참여했고 이 세미나의 결과물로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를 집필, 출간했다. 이 작업의 정신과 성과는 이후 무주 태권도공원으로 이어졌다.
한의대 졸업 후 ‘도올한의원’을 개원하여 2년간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는데 중앙일보에는 《도올고함(檮杌孤喊)》이라는 칼럼을, 중앙선데이에는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신발굴 성서자료)를 연재하였다. (위키피아)
통나무 – 2020년 10월 9일 출간
마지막으로 영어 번역본을 실었다. 아마도 그의 번역본을 영국의 위대한 철학자인 화이트헤드와 그의 제자인 노벨 문학상 수상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이 읽었다. 러셀은 1920년 북경대학에서 1년간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의 실존철학자 카를 야스퍼스(1883~1969),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등이 읽었다. 아마 수많은 서양의 지식인들이 작은 분량의 동양고전을 접하고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청나라 말에 선교사로 왔다가 중국 고전의 깊은 뜻에 놀라 일부 청나라인들의 도움을 받아 중국 고전을 영문으로 번역한 제임스 레게의 영문본을 찾아 옮겨 보았다.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영국의 언어학자, 선교사, 생물학자, 번역가이다. 그는 중국 고전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한 초기 번역가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Legge는 말라카와 홍콩에서 런던 선교사 협회 (1876-1897)의 대표로 봉사했으며 영국 옥스퍼드대학 최초의 중국학과 교수 (1875-1879)였다. Max Müller와 함께 그는 기념비적인 동양의 신성한 책 시리즈를 썼다. (위키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