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길 따라(4)
(2022년 8월 13일∼15일)
瓦也 정유순
남북으로 흘러 경상도와 전라도를 나누는 섬진강을 건너 한참을 달리면 전남 장흥 땅의 억불산이 손짓한다. 억불산(億佛山, 517m)은 바위 모양이 부처가 서있는 모양을 닮아 수많은 부처들이 있다는 의미다. 능선은 서쪽으로 이어져 광춘산에 이르고 그 앞으로 탐진강이 흐른다. 장흥의 명산으로 손꼽히며 특히 편백나무가 많기로 유명하다. 정남진 천문과학관, 편백숲 우드랜드 등이 있다.
<장흥 억불산>
재미있는 전설이 담긴 억불산 며느리 바위는 어린애를 업은 여자 형상 같기도 하고, 스님이 합장하고 기도하는 부처 모습의 형상 같은데 실제로 가까이 가보면 그 웅장함이 하늘을 찌를듯하다고 한다. 억불산의 끌림에 산 아래에 있는 장흥읍 평화리 상선약수마을의 풍경 속으로 빨려든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송백정(松百井)과 무계고택이 기다린다.
<송백정>
송백정(松百井)은 정자가 아니라 연못이다. 아담한 연못 주변을 50여 그루 배롱나무가 에워싸고 있다. 수령 100년이 훌쩍 넘는 배롱나무는 서울에서 본 배롱나무와는 아예 다른 종 같다. 꽃은 둘째 치고 우람한 나무 형상부터 압도적으로 다가온다. 매끄럽고 두툼한 줄기가 이리저리 꺾인 모습이 근육질 남성의 팔뚝을 보는 것 같다. 붉은색 일색인 여느 배롱나무 꽃과 달리 송백정에는 분홍, 보라, 연보라, 하얀 꽃 등 4색이 어우러지는 것 같다.
<하얀 꽃 배롱나무>
꽃이 만개한 배롱나무 숲에 가려진 호수 면에는 이미 진 꽃잎들이 연못을 뒤덮어 자미호(紫薇湖)를 이뤄 또 다른 멋을 보인다. 자미(紫薇)는 배롱나무의 또 다른 이름이다. 호수에는 가시연, 어리연 등 연꽃들이 꽃송이가 만개한다. 바람이 세게 불어 꽃이 많이 지는 날에는 연못 자체가 분홍빛으로 물든다고 한다. 배롱나무는 한 번 핀 꽃이 한 달 이상 그 모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한 나무에서 세 번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는 것이다.
<송백정 수면 위의 낙화>
송백정은 130년대 도쿄유학을 마치고 돌아 온 독립 운동가이자 2대와 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영완(高永完, 1914∼1991)씨가 고향집 앞 연못을 정원으로 꾸며 누구나 감상할 수 있게 했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을 만들고 소나무와 배롱나무, 동백나무로 조경한 정원은 우리 고유의 우주관인 원방각(圓方角) 형태를 보여준다. 원(○)은 하늘, 방(□)은 땅, 각(△)은 사람을 가리키는 천지인(天地人) 사상이다.
<송백정>
송백정 옆에는 전남 문화재자료(제161호)로 지정된 <무계고택(霧溪古宅)>이 있다. <장흥 고영완가옥>으로도 불리는 이 고택은 고영완의 조부께서 1852년에 전형적인 남도식 <一>자 목재가옥으로 언덕에 삼단으로 축대를 쌓아 지은 집이다. 고택 마당에는 석등과 각종 유물이 있는데, 원래 ‘정화사(淨化寺)’가 있던 절터였다. 고씨 조상들이 집 앞에 연못을 만든 것도 억불산과 절이 내뿜는 강한 기를 억누르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무계고택 입구>
경사가 급해 건물은 3단으로 나누어 구성하였다. 제일 아랫단에 대문과 하인방을, 그 다음 단에 마당·창고·관리사를 두고, 맨 위 단에 본채와 양옥을 배치하였다. 안채는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무계(霧溪)는 고영완의 호이고, 지금은 팔순의 그의 장남이 거주하고 있다. 고택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다시 돌아 나와 장남이 거주하는 살림집 문을 통해 마당으로 들어갔다.
<무계 고영완 고택>
<무계 고택 석등>
고택을 나오면 맹종죽과 왕대가 경쟁하듯 숲을 이룬다. 맹종죽(孟宗竹)은 관상용으로 중국 삼국시대에 효자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竹筍)을 얻어 어머니에게 드린 고사에서 연유한다. 죽순을 식용하고 크게 자라지만 재질이 무르기 때문에 세공용으로는 쓰지 못한다. 왕대의 죽순은 식용하거나 약용하며, 줄기는 탄력성이 좋고 세공이 쉬워 건축 및 죽세공재로 사용한다.
<맹종죽>
대나무 숲을 돌아 뒤로 가면 장흥위씨(長興魏氏)의 사당인 회주사(懷州祠)가 있다. 위씨(魏氏)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필고(畢高)의 후예(後裔) 필만(畢萬)이 진(晋)나라 헌공(獻公)의 참승(參乘)으로 곽·적·위 세 나라를 멸(滅)한 공(功)으로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르고 위지(魏地)를 봉토(封土) 받으면서 지명(地名)에 따라 위씨(魏氏)로 성(姓)을 바꾸니 그가 시조(始祖)다. 회주사 안에는 강당으로 사용하는 백산재(栢山齋)가 있으며, 전라남도 지방문화재(제272호)로 지정되었다.
<장흥 위씨 회주사>
욕심 같아서는 억불산 까지 가보고 싶은 마음이나 강진의 백련사가 갈 길을 재촉한다. 편백나무 가로수 옆으로 탐진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서울 광화문을 기점으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정남진 장흥은 맑은 바람과 투명에 가까운 물, 초록의 명산이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예술의 고장이다. 정남진 토요시장은 최고 품질의 한우와 솔내음 가득한 표고 등 무공해 농수산물이 가득한 고장으로 알려졌다.
<탐진강 너머 장흥읍내>
약 30여분 달려 도착한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에 있는 만덕산백련사다. 만덕산(408m)에 있으므로 만덕사(萬德寺)라고도 하고, 신라 말인 839년(문성왕 1) 무염(無染)이 창건하였으며, 근래에 이름을 고쳐 백련사(白蓮社)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였기에 원묘국사 요세(了世)에 의해 사찰의 교세는 확장되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억불정책으로 승려들은 천시되었고 백련사는 퇴보하기 시작했다.
<만덕산백련사일주문>
또한 남해안 일대는 고려청자와 곡물(穀物) 약탈을 목적으로 자주 출몰하는 왜구들에 의해 점점 폐사될 지경으로 내몰렸고 사찰은 명맥만 겨우 유지하게 되었다. 1170년경 주지 원묘(圓妙)에 의해 중수되기도 했지만, 본격적인 중수는 조선 세종 때인 1426년 주지 행호(行乎)가 2차 중수를 하면서 백련사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효령대군은 왕위를 세종에게 양보하고 전국을 유람하던 중 백련사에 와서 8년 동안 기거하였다.
<백련사 해탈문>
이곳에서 약1㎞ 떨어진 곳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유배 살이 하던 다산초당이 있어 오솔길이 나있다. 이 길은 다산과 혜장(惠藏) 그리고 초의(草衣)선사가 시와 다도(茶道)로 교류하며 사색하던 숲이며, 철학의 길이고 구도의 길이다. 초의선사는 혜장의 제자로 24살의 나이에 24살이나 연상인 다산을 이곳에서 만나 학문을 배우는 제자가 되었고 다도를 가르치는 스승이 되었다.
<백련사 대웅전>
그리고 다산은 백련사에서 혜장과 하룻밤을 보내며 유교대가와 불교대가가 만나 서로 스승과 제자가 되어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랬다. 자생 차(茶)나무가 많은 만덕산의 별명이 다산(茶山)인데 정약용의 호가 되었다. 백련사는 천연기념물(제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 절을 에워싸듯 1,500여 그루가 자라고 있다. 동백꽃이 지고 여름이 오면 배롱나무가 그 빈자리를 달래준다. 그 중 천불전 앞 배롱나무는 다산과 혜장이 생전에 우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연리목이 되어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백련사 배롱나무>
<천불전 앞 배롱나무 연리목>
절에 갈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옛 조선의 영향권에 있는 곳에서는 사찰의 주 전각을 왜 대웅전(大雄殿)으로 하고, 그 주변에는 삼성각(三聖閣), 산신각(山神閣), 칠성각(七星閣) 등 우리 전통 신앙의 보조 전각들이 왜있는지 궁금하다. 그리고 대웅전 창호에는 치우천황[(蚩尤天皇) 또는 자오지환웅(慈烏支桓雄)]의 화상(畵像)인 귀면(鬼面)이 그려져 있는 이유는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치우천황은 오래 전부터 ‘전신(戰神)’또는 ‘병기의 신(兵主神)’으로 숭배되어 왔고, 2002년 월드컵대회 때 국민응원단 <붉은 악마>의 공식 깃발이었다.
<백련사대웅전 귀면문양>
<백련사 앞 강진만>
※ 5편은 진도 운림산방, 나주 도래마을, 화순 만연사가 이어집니다.
https://blog.naver.com/waya555/222858407333
첫댓글 송백정의 낙화, 무계고택의 한 컷, 멀리 달려간 백련사,,,
한 곳 한 곳 모두가 명품이였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