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천불보전 빗반자
연꽃 형상, 화엄경속 연화장세계
해남 대흥사 빗반자 조형미 걸작
소재다양·장대한 스케일 연꽃띠
“조형의 본질은 연화장세계 구현”
해남 대흥사 천불전 천정과 빗반자
연화장세계, 연꽃 속 불국토
여름날이 기다려지는 것은 연지(蓮池)의 연꽃 세상 때문이다. 연꽃의 미학은 ‘향원익청(香遠益淸)’에 있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는 뜻이다. 성리학의 토대를 마련한 염계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設)〉에서 “나는 유독 연꽃을 사랑한다. 늪에 피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고 꼿꼿하게 깨끗이 서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함부로 가지고 놀 수는 없다.”고 표현했다.
한 송이 연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구조가 오묘하다. 연꽃의 밖은 바람과 물이 있다. 꽃잎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꽃잎 안에는 노란 수술들이 찬란한 금빛 숲을 이룬다. 금빛 숲 속에 연자방이 있다. 연자방의 육질엔 연자, 곧 연꽃 씨앗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있다. 연자방은 연꽃 씨앗의 둥지다. 씨앗은 하나의 세계다. 연꽃 안에 청정한 세계가 있다. 연꽃 중심에 세계종(世界種)이 있다.
이 상황 묘사를 연꽃 외부에서 중심으로 한 겹 한 겹씩 동심원으로 표현해보면, 바람-물-꽃잎-수술의 숲-연자방-연자로 이어지는 나이테 형상을 그릴 수 있다. 형상은 〈화엄경〉 ‘화장세계품’에서 묘사하는 연화장세계와 다르지 않다. 연화장세계는 한 송이 커다란 연꽃 속에 담겨 있는 청정 불국토다. 그 세계는 진리 자체인 법신 비로자나불께서 헤아릴 수 없는 공덕장엄으로 이룬 세계다. 연화장세계는 대연화 안에 일체의 국토와 뭇 생명, 만유를 품는다. 80권본 〈화엄경〉 ‘화장세계품’에서 보현보살은 연화장세계를 8, 9, 10권 세 권에 걸쳐 세세하게 설명하신다. 압축하면 이렇다.
“이 화장장엄세계해는 비로자나부처님께서 지난날 수많은 세월 동안 보살행을 닦을 때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해의 부처님을 친견하였고, 낱낱 부처님 계신 세계마다 큰 서원을 닦아서 깨끗하게 장엄한 것이다. 이 화장세계는 수미산 티끌 수의 풍륜(風輪)이 받치고 있다. 맨 밑에 있는 풍륜은 이름이 평등하게 머뭄(平等住)이고, 풍륜은 그 위에 수미산 티끌 수만큼 많다. 수많은 풍륜 중에서 맨 위에 있는 것은 훌륭한 위엄의 빛으로 충만한 수승위광장(殊勝威光藏)으로 보광마니장엄향수해(普光摩尼莊嚴香水海)를 받치고 있다. 이 향수해에 큰 연꽃이 있다. 대연화 안에는 청정하고 견고한 금강륜산(金剛輪山)이 한 바퀴 둘러싸고, 화장장엄세계해가 그 복판에 있다.”
풍륜-향수해-대연화-세계종의 구조
연화장세계의 맨 아래에는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가 있다. 향수해 안에 한 송이 커다란 연꽃이 만발한다. 연꽃 속에 금강륜산이 둘러싸고, 내부에 불국토 세계종이 중중무진을 이룬다. 연화장세계는 풍륜-향수해-대연화-금강륜산-세계종의 구조로 중중무진하다. 보현보살은 게송을 통해 천차만별의 세계종들은 중생들의 업에 따라 차별적인 모습을 갖는다고 말한다. 가만히 살펴보면 경전 속 연화장세계는 여름날 연지에 핀 한 송이 연꽃 형상 그대로다. 〈화엄경〉의 설명에 따라 연화장세계를 한 폭의 그림으로 완성한 불화가 예천 용문사 ‘화장찰해도’(1896년)이다. 한 폭의 불화에 연꽃 속 불국세계를 표현했다. ‘화장찰해도’는 나이테처럼 겹겹의 동심원 형상으로 화장세계를 그린 불화다. 일종의 평면도 시점이다.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1770년)의 경우 불화 하단에 측면도 시점으로 화장세계를 표현했다. 하얀 파도가 일렁이는 향수해 위에 가로로 장대하게 펼쳐있는 붉은 연꽃을 그린 후 연꽃 위에 111개의 불국 세계종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한 구도로 그렸다.
법당 건축은 연화장세계
평면도와 측면도 시점의 연화장세계는 불화의 회화양식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표현기법이다. 입체로 구현한 연화장세계도 있을까? 있다면 어떤 조형원리로 구현하였을까? 한국산사 법당 건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연화장세계다. 한국의 전통목조건축이 가진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는 공포구조에 있다. ‘공포(栱包)’라는 개념은 가로 세로 빗살로 서로 포개 엮은 받침목 꾸러미라는 의미다. 가로 부재 ‘첨차’와 세로 부재 ‘살미’를 서로 단단히 결구해서 쌓아올린 모습을 갖는다. 공포는 건축의 외형에 위엄과 아름다움을 살려내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둥 위에서 지붕의 하중을 골고루 받아내는 역학적 기능을 한다. 공포의 살미는 처마 밑에서 건축 바깥으로 우아한 곡선으로 뻗친다. 강한 생명력이 발산하는 형태다. 대부분 생명력 왕성한 초록 넝쿨로 장식하고, 연꽃이나 연봉을 새긴다. 법당의 처마와 추녀는 사방 둘레가 커다란 연꽃 세계다. 연꽃 장엄 내부에 부처님의 세계가 있다. 법당 자체를 연화장세계로 조영했다. 그런 특성은 한국산사 법당조영에서 보편적으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서남해안 법당 빗반자에 조영한 연지세계
몇몇의 법당에선 법당 내부에서도 화엄의 연화장세계를 구현하는 데 온갖 정성을 쏟는다. 통상 서남해안지역에서 그 같은 경향이 많다. 해남 대흥사 천불전, 나주 불회사 대웅보전, 부안 내소사 대웅보전, 고흥 금탑사 극락전, 남해 용문사 대웅전, 논산 쌍계사 대웅전,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 등이 그런 사례다. 법당 내부 사방 가장자리에 길게 빗반자를 가설해서 빗반자를 연꽃으로 장엄하는 특별한 형식을 보여준다. 빗반자 장엄에 등장하는 공통의 소재는 X자로 꼰 쌍연봉과 물고기, 거북 등 수생생물들이다. 빗반자가 연지(蓮池) 세계이다. 특수하게는 남해 용문사 대웅전에서처럼 연꽃 밭에서 놀고 있는 동자나 봉황, 용을 조영하기도 한다. 천정 빗반자에 물고기가 유영하는 연지를 조영하는 원리에는 물의 기운을 불어넣는 목적성도 있다. 물의 기운으로 목조건축에 치명적인 불의 기운을 다스리려는 화마에 대한 결계의 방편이다. 하지만 조형의 본질은 연화장세계의 구현에 있다. 빗반자 내부 법당 중심부에 연꽃과 불보살의 상징 범자로 조영한 불보살세계를 펼쳐 두었기 때문이다.
대흥사 천불전 빗반자 연꽃 조각은 걸작
법당 내부 빗반자에 연속하는 연꽃 띠를 조영한 곳은 전국에 열 곳 정도이다. 필자는 그 중에서 조형미를 갖춘 걸작으로 해남 대흥사 천불전의 빗반자를 손꼽는다. 조형의 아름다움과 소재의 다양성, 연속하는 연꽃 띠의 장대한 스케일, 치밀한 조각구성과 배치, 풍부한 서사 플롯 등으로 단연 돋보인다.
천불전은 1811년 화재로 소실한 것을 1813년에 새로 지은 법당이다. 다성(茶聖)이라 부르는 초의 선사의 스승 완호 대사가 중건했다. 중건 후 1817년 승려 장인 44명이 참여하여 경주 기림사에서 불석으로 천불을 조각해서 해남으로 모셨다. 모셔오는 과정에 큰 바람을 만나 일본 근해를 표류하다 천신만고 끝에 대흥사로 돌아온 불상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다.
빗반자는 천불전 내부 천정 사면에 모두 빠짐없이 조영했다. 후면이라고 건너뛰거나 형식적으로 대충 조각하는 일은 없다. 후불벽이 없는 천불전 건축의 특성을 고려한 산물이기도 하다. 어느 위치든 한 결 같이 조각 밀도와 소재 구성이 치밀하다. 빗반자 연꽃 띠는 X자로 꼬인 쌍연봉 형태로 연속하며, 이어져 법당 천정 사면을 둘러쌌다. ‘사경변상도’에서 부처님의 세계 가장자리를 금강저의 띠로 둘러싸서 신성 영역으로 결계하고 있는 원리와 유사하다. 쌍연꽃 띠는 무려 4중으로 두텁고 조밀하다. 4중의 꼬인 쌍연꽃 띠는 나주 불회사 대웅보전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조형 밀도에서 차이가 뚜렷하다. 불회사 조형은 헐거울 정도로 느슨하다. 조형에 생명력 있는 박진감을 불어넣는 긴장의 모멘텀을 찾기 어렵다. 천불전의 빗반자 조형엔 긴장감 있는 생명력으로 활기차면서 초등학교 운동장처럼 명랑하다. 뭔가 왁자지껄하다. 그런 분위기는 상생의 조화로운 활력에다 시의적절한 자리에 먹이사슬 관계의 조형을 파란처럼 툭 던져 놓음으로써 얻는 긴장 효과에서 나온다.
입체로 조각한 연화장세계
천불전의 꼬인 쌍연꽃 띠는 평균 폭 1m에 대략 사방 총 23m 길이로 장대하다. 쌍연꽃마다 물고기, 개구리, 거북이, 게를 빠짐없이 조각했다. 수생생물뿐만이 아니다. 유심히 살펴보면 물고기를 사냥하는 다리 넷 가진 포유류 짐승도 있다. 수달 형상을 닮았다. 게다가 초현실적인 불사약을 찧고 있는 옥토끼도 등장한다. 어린아이 그림처럼 천진난만하다. 조형 내면에 동화 줄거리가 흐른다. 조형에 밴 심상은 가식 없이 순수하고 맑다. 연꽃 띠의 세계는 청정하고 맑은 심성의 세계를 보여준다. 형상에 그림자 따르듯이 대연화 내부에 청정한 세계가 깃든다. 연꽃 띠 내부는 청정 불국토의 세계다. 천정 중앙 우물반자 칸칸이 팔엽연화문을 새겼다. 팔엽연화문은 불국 세계종의 표징이다.
대흥사 천불전 천정 가장자리에 쌍연봉 띠로 이은 대연화의 목조각이 있다. 대연화가 둘러싼 법당 중심부엔 천불이 현현하셨다. 법당건축 가구구조로 ‘대연화 속 세계종’ 개념인 연화장세계를 입체적으로 완성했다. 고개 아프도록 우러러야 마침내 우리에게 오는 앙시도 시점의 한국산사 목조각 걸작이다.
천불전 빗반자의 X자 꼬인 쌍연봉과 다양한 생명 목조각
순천 송광사 〈화엄경변상도〉 하단 연화장세계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