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장 소림혈풍(少林血風)
-1
①
하후성의 모습은 무척이나 수척해져 있었다.
그것은 독고황으로부터 무형무혼천절수에 의해 내공이 소실된 후
필연적으로 오는 결과일는지도 몰랐으나 또한 단순히 그 때문만도
아니었다.
그는 매교랑이 아이를 낳은 열흘 후부터 근 한 달 간을 자신의 처
소에 틀어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골몰해 있었다.
지금 그의 앞에는 관동삼괴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하후성은 드디
어 입을 열었다.
"삼괴, 그 동안 내가 구결(口訣)로 전수해준 무공을 모두 연성했
는가?"
대괴 시천공이 공손히 대답했다.
"네, 주인님. 덕분에......."
하후성은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오늘 내가 그대들을 부른 이유를 아는가?"
이번에는 시천지가 반문했다.
"주인님의 깊은 마음을 어찌 저희들이 추측하겠습니까?"
하후성은 탁자 위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그들에게 주었다.
"이것을 보아라."
관동삼괴는 의아하여 종이를 받아 바닥에 펴보았다. 종이에는 복
잡한 도형이 무수히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회곡(無回谷), 즉 이 장원 주위에 설치되어 있는
구구무회멸멸대진(九九無回滅滅大陣)의 도해다."
관동삼괴의 안색이 일제히 굳어지자 하후성은 무겁게 말했다.
"그대들은 내일 밤 이 무회곡을 탈출해라."
"아!"
"소림사로 가서 내가 이곳에 갇혀 있음을 알려야 한다."
시천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뜻을 알겠습니다."
하후성의 말투는 아까보다 더욱 어두웠다.
"명심(明心)해라. 이 구구무회멸멸대진은 이른바 죽음의 절진(絶
陣)으로 최소한 이 진 속에서 너희 세 명 중 두 명은 죽을 것이
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서는 진영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관동삼괴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으나 이괴 시천수가 먼저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옛부터 미인(美人)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죽고, 참다운
무사는 진정한 주군(主君)을 위해 죽는다고 했습니다."
대괴 시천곡도 결연한 어조로 부언했다.
"저희 삼형제의 목숨은 이미 주인님께 맡긴 것입니다. 어찌 이제
와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삼괴 시천지 또한 주먹을 움켜쥐었다.
"구구무회멸멸대진이 제아무리 무섭다 해도, 또 저희 삼형제가 그
곳에 뼈를 묻는 한이 있다 해도 저희는 기필코 주인님의 뜻에 따
르겠습니다."
하후성은 만면에 격동을 일으켰다.
"고맙다, 삼괴."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이루 형언키 어려운 괴로움이 함께 떠오르
고 있었고 이를 아는 듯 시천공이 말했다.
"염려 마십시오. 주인님. 비직들은 목숨을 걸고 임무를 완수하겠
습니다."
그리고 그들 삼괴는 모두 예를 갖춰 하후성에게 삼 배(三拜) 했으
며 하후성은 잔뜩 충혈된 눈으로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후성은 비록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내심 자책과 고통으로
처절히 부르짖고 있었다.
'삼괴, 미안하다. 그러나 대의(大義)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
니... 너희가 가는 길은 바로 사지(死地), 단 한 명도 살지 못한
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는.......'
밤이었다.
무회곡(無回谷)이란 이름 그대로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는 계곡이던가?
누가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무회곡에 설
치되어 있는 구구무회멸멸대진이 그것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천연
적인 기암괴석(奇岩怪石)을 바탕으로 펼쳐져 있는 가공할 절진(絶
陣).......
게다가 무서운 절정고수 팔십 일 명이 진 속의 요지를 지키고 있
었으니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새라 할지라도 이곳을 빠져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무회곡의 밤.
나삼의 미녀는 밤하늘에 총총히 뜬 별을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가
슴을 달래고 있었다.
등불에 육체의 굴곡이 은은히 비쳐보이는 묘한 차림새로 서있는
여인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하우물(天下羽物)로 이름이 드
높았던 백화미였다.
그녀의 마음은 지금 온통 기대와 흥분, 그리고 사랑의 감정으로
설레고 있었다.
'그 분이 오늘밤 나를 불렀다. 그 분이... 그 분이.......'
사실 지난 수 개월 동안 하후성은 백화미를 한 번도 단독으로 부
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밤 그가 백화미를 은밀히 자신의 처
소로 불렀고 그 부름을 전달한 사람은 관동삼괴의 첫째인 시천공
이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 분이 나를 부른 이유는.......'
백화미의 고혹적인 양 뺨은 도화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쨌든 좋다. 단지 그 분이 나를 불렀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나는 더없이 기쁘니까.'
하후성의 처소였다.
"성랑(星郞)."
백화미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러자 즉시 안에서 착 가라앉
은 하후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화미."
그녀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궁등이 밝게 밝혀져 있는 방 안
에서 하후성은 탁자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그는 맑게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시오. 화미."
백화미는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하후성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
덕분에 하후성은 환한 궁등 아래에서 나삼을 통해 그녀의 폭발적
인 마력을 지닌 육체의 굴곡을 완연히 볼 수 있었다.
"웬일로 이 밤에 저를 부르셨나요?"
정염이 담긴 백화미의 두 눈이 그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곧 물처럼 고요한 하후성의 눈길을 대하자 움찔하고 말았
다. 타올랐던 마음은 이내 식어버렸고 하후성의 담담하면서도 신
중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요."
백화미는 울컥 가슴이 저려 왔다.
'과연... 이 분은 오늘밤 나를 원한 것이 아니었구나.'
그녀는 이제까지의 모든 기대가 일시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을 느
꼈으나 입술을 잘근 물었다.
"어떤 부탁인가요?"
하후성의 얼굴이 갑자기 엄숙하게 변했다.
"화미. 나는 이 무회곡을 벗어날 것이오."
"그, 그건!"
"그러기 위해서는 화미의 힘이 필요하오."
백화미는 불현듯 입가에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성. 당신은 진정... 조금도......."
그러나 곧 그녀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그녀의 눈은 매서우리만치
진지하게 반짝였다.
"성, 제가 어떻게 무엇을 하란 말인가요?"
하후성은 그녀를 주시하며 말했다.
"내일 밤 이곳을 탈출하여 다가오는 중양절(重陽節)에 이것을 악
양에 있는 악양루의 현판에 꽂아 주시오."
그는 품 속에서 한 자루의 검은 색 화살을 꺼냈다. 그것은 길이가
한 뼘밖에 되지 않았으나 웬지 모를 섬뜩한 느낌을 주고 있었고
화살의 날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었다.
<현천령(玄天令)>
백화미는 그 화살을 바라보며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현천령은 과거 하후성이 숭산의 태실봉에 있는 승불폭 뒤의 동굴
에서 만난 적미천존(赤眉天尊) 여적성에게서 얻은 것이었다.
하후성은 현천령을 탁자에 꽂으며 말했다.
"이것을 악양루의 현판에 꽂으면 십 일(十日) 안으로 찾아오는 사
람이 있을 것이오. 그때 그들에게 내가 처한 상황을 모두 알려 주
시오."
"그것... 뿐인가요?"
"그렇소."
"단지... 그것뿐인가요? 저를 부른 이유는?"
"그... 렇소."
백화미의 안색이 처연해지는가 싶더니 그녀의 눈에는 삽시간에 이
슬이 맺혔다. 그러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시 한 번 입술
을 잘근 물었고 갑자기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지극히 요염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성. 그렇다면 저에게도 부탁이 있어요."
하후성은 가슴이 뜨끔하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②
백화미는 서서히 몸을 돌렸다.
스르르르.......
그녀가 한 바퀴 돌자 그녀의 몸에 걸쳐져 있던 한 겹의 나삼은 가
벼운 음향과 함께 벗겨져 나갔고 그녀는 완전 나체가 되어 밝은
궁등 아래 섰다.
하후성의 눈이 크게 부릅떠지는 것을 보며 백화미는 불타는 음성
으로 말했다.
"이것이 저의 부탁이에요."
하후성은 그 순간 분명히 보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강렬한 정열
의 불꽃과 함께 서글픈 애정이 자학하듯 마구 뒤엉키는 것
을.......
그리고 백화미의 폭발적인 유혹을 불러 일으키는 나신이 단지 한
송이의 서글픈 꽃으로 보인 것도 그때였다.
활짝 피었으나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이내 스스로 져버릴 꽃, 그것
은 찬란하도록 아름답지만 산중에서 무심히 지는 달을 소원하며
슬픔의 피를 토하고 있었다.
마침내 하후성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다가갔다.
"화미......."
백화미의 나신이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고 그녀는 입을 열어 물었
다.
"성. 마지막으로 물어볼 말이 있어요."
하후성은 다가가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당신의 마음 속에는 이 화미가 들어설 공간이 조금도 없나요? 나
백화미는 영원히 당신을 사랑할 자격이 없나요?"
하후성의 두 눈 끝이 파르르 떨렸고 백화미의 두 눈에는 최후의
간절한 열망이 어렸다.
그녀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성, 거짓이라도 좋아요. 저를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면 화미
는... 화미는... 죽어도 좋아요!'
하후성은 손을 들어올려 매끄러운 곡선을 그려내린 백화미의 가녀
린 어깨를 잡았다. 그는 백화미가 전율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
다.
하후성의 입이 떨어졌다.
"화미. 나는 결코 무정(無情)한 사내가 아니오. 내가 그 동안 그
대에게 냉정하게 대한 이유는 오직 나로 인해 그대가 불행해질까
봐 그런 것뿐이었소. 만약 내가 다시 삶을 찾을 수만 있다면...
영원히 그대와 함께 살 것이오."
"아아!"
백화미라 이름 붙여진 외로운 들꽃(野花), 그녀는 이제야 자신의
개화(開花)가 헛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손길을 향
해 다가가는 그녀는 희열의 탄성을 발하며 전신을 떨고 있었다.
"성랑!"
그녀는 격렬하게 하후성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진정으로......."
"화미......."
하후성은 백화미의 육체가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느꼈
고 그로 인해 그의 잠자던 남성의 욕망은 거센 불꽃을 일으키며
점화되었다.
그는 백화미의 육체를 번쩍 안고 침상으로 걸어갔으며 잠시 후에
는 그녀의 터질 듯이 풍만한 젖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아!"
백화미는 두 손으로 하후성의 머리칼을 움켜쥐며 온 몸의 뜨거운
열을 주체하지 못한 듯 마구 떨었다.
이윽고 하후성 또한 스스로의 옷을 벗어던졌다. 그러자 단단한 그
의 육체도 적나라하게 궁등 아래 드러나며 힘찬 남성의 상징이 여
인의 굴복을 요구하듯 몸을 일으켰다.
두 남녀의 육체는 서로를 뜨겁고 격하게 탐닉했다. 기실 그 동안
얼마나 원했던가?
천하우물의 요녀(妖女), 게다가 마(魔)와 순정의 양면성을 가진
희대의 미녀 백화미는 이제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천하에서 오직 단 한 사람 만의 사랑의 포로가 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갖 미태와 폭발적인 뜨거운 정염을 풀어 놓
고 있었다.
백화미의 전인미답의 육체를 마음껏 오가던 하후성의 입술과 혀,
손길의 애무는 극점에 달했다.
"아... 학!"
백화미의 육체는 드디어 비등점으로 치달아 올라 강렬한 육향을
발산시켰고 사나이의 몸을 뱀처럼 휘감은 채 몸부림쳤다.
사나이의 입술은 여인의 곳곳의 보루를 점차 무너뜨리더니 마침내
성문(城門)을 힘껏 파고 들었다.
"아학!"
여인은 굴복의 신음을 발했다. 두 남녀의 신음은 곧 합일(合一)되
어 끝없이 비등했고 완벽하게 합쳐진 두 육체는 끝없이 서로의 살
(肉)을 혼입하며 뜨겁고 긴 항해를 시작했다.
침상은 열풍(熱風)에 휘말렸다.
백화미는 다소곳이 하후성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도화빛이 은은히 어려 있어 한결 더 매혹적이었으
나 이제까지와는 달리 흡족하고 양순한 모습이었다.
하후성은 그녀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무회곡에 설치되어 있는 구구무회멸멸대진은 구구팔십일로(九九
八十一路)의 지로(支路)가 어지럽게 얽혀 있는 절진 중의 절진이
오. 그리고 이곳의 팔십일로는 모두 사문(死門)으로, 생문(生門)
은 단 한 곳도 없소."
백화미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러나 생문을 만들 수는 있소. 이미 관동삼괴로 하여금 절진 속
으로 들어가도록 했소. 그들은 팔십일로를 지키고 있는 고수들과
처절한 악투를 전개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필히 절진을 지휘하는
천로와 지로는 팔십일로를 구로(九路)의 사진(死陣)으로 전환시켜
단숨에 관동삼괴를 죽이려들 것이오. 그때......."
하후성은 탁자에 놓인 한 장의 종이를 백화미에게 보여주며 설명
했다.
"이것은 화진법(和陣法)을 설명한 도해요. 구구무회멸멸대진은 십
종이 넘는 각종 진법이 배합된 것이나 이곳의 대종은 바로 구 궁
(九宮)으로써, 구 문(九門)을 모두 사문(死門)으로 만든데 이 진
법의 무서움이 있소."
"아!"
"그러나 여기에 화진법을 인도하면 구 궁을 십 절(十絶)로 바꿀
수 있소. 이렇게 진법에 변화를 주면 구 사문(九死門)에 일 생문
(一生門)을 가하게 되어 그쪽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이오."
백화미는 탄성을 발하는 한편 감탄과 존경의 시선으로 하후성을
응시했다.
"어쩌면... 성랑의 머리 속에는 그렇게 많은 학문이 들어 있나요?
마의 절진을 바꾸어 놓다니, 이건 그 누구도 상상조차 못할 일이
에요."
그러나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모든 것이 천기사숙님께 배운 것이오."
"그랬군요."
"내일 밤 그대는 동(東)으로 들어가서 서(西)로 나가시오."
"네."
"반드시 중양절 날 악양루 현판에 현천령을 꽂는 것을 잊지 마시
오."
백화미는 궁금한 듯 물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오나요?"
"그렇소. 그들은 이제껏 강호에 한 번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무서운 제 삼의 세력이오. 그들이라면 이 무회곡을 능히 파괴시킬
수 있을 것이오.“
"아아!"
백화미는 다시 한 번 탄성을 발하더니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하후성의 품으로 파고 들었다.
"성랑. 저에게 입을 맞춰 주세요."
하후성은 빙긋 웃으며 그녀의 꽃잎같은 입술 위에 자신의 입을 맞
추었다. 꿀같이 달콤한 입술이 하나로 협쳐지며 달콤하고도 향기
로운 타액이 오고갔다. 한참 후에야 백화미는 입술을 떼었다.
"그럼, 성랑......."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방을 걸어나갔다. 그러나 그녀가 문을 여는
순간 하후성은 그녀를 불렀다.
"화미."
그녀가 돌아다보자 하후성은 담담히 말했다.
"사랑하오."
"아!"
백화미의 하얀 얼굴에 갑자기 주르륵 두 줄기 옥루가 흘러내렸다.
그녀는 담뿍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뒤 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마음은 온통 찬란한 행복감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밤
하늘의 별도 그녀의 심정을 아는 듯 더욱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
다.
한편 하후성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롱한 별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으며 기이한 신태가 어리는 얼
굴로 그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고 있었다.
'이제 침착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천기(天機)는 뜻한 자에게 내려
진다. 황. 올해가 가기 전에 너와 나는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
다.'
③
호수는 고요했다.
오직 정적뿐.......
그러나 그 호수에 한 개의 돌멩이를 던져 보라. 한 차례 파문이
고요한 호수를 삽시에 흔들며 수 없는 물결을 그려내지 않겠는가?
무림천하(武林天下).
가공할 마(魔)의 집단인 수라궁의 개파대전 이후 일 년 반 동안
무림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무림사상 일찌기 이토록 고요했던 적
은 없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죽음의 그림자가 전 중원을 뒤덮
기 시작했음을 누가 알겠는가?
소림사(少林寺).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하며 면면히 그 맥을 이어 내려온 대소림사
의 불심각(佛心閣)에는 소림 삼성승(少林三聖僧)이 대좌하고 있었
다.
천심(天心), 천뢰(天雷), 천기(天機), 세 고승은 이미 오랫 동안
그런 상태로 앉아 있었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창문을 통해 천공(天空)이 보였다. 천심선사
는 천공을 응시하며 나직히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드디어 암천(暗天)의 천혈성과 오대마성이 죽음의
핏빛을 뿌리누나. 엄청난 혈하(血河)가 전 중원을 적실 것이로
다."
그 말에 천뢰와 천기의 얼굴에 어두움이 떠올랐고 천심은 탄식하
며 말을 이었다.
"적은 너무나 무섭다. 일찌기 무림사상 이렇게 강한 마성은 없었
다."
그는 눈을 내리감고 있는 천기선사에게 물었다.
"천기사제. 느끼는 점이 있는가?"
천기는 눈을 뜨고 천공을 살피더니 암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미타불.... 핏빛 그늘이 소림을 덮고 있습니다. 소림의 좌(坐)
는 바로 무원성(武元星)입니다. 그런데 무원성을 천혈성의 혈기
(血氣)가 뒤덮고 있으니 이는 곧 소림혈겁(少林血劫)의 조짐입니
다. 천 년 이래 가장 무서운......."
그 말에 갑자기 천뢰선사가 눈을 부릅떴고 그의 고리 눈에서는 무
서운 분광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놈이 감히 소림을 공격한단 말인가!"
그의 분노성은 불심각 전체를 쩌르릉 울렸다.
"노납이 당장 그 놈들의 숨통을 끊어 놓겠소!"
천뢰는 커다란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 쥐었으며 천심선사가
불호를 외우며 나무랐다.
"아미타불.... 천뢰사제, 자네의 화성(火性)은 아직까지 조금도
억제되지 않았군."
천뢰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호흡이 거친 것으로 보아 그
의 격분은 가라앉지 않은 것같았다. 그를 보며 천심선사는 내심
중얼거렸다.
'어쩌면... 천뢰의 저 화성이 필요할는지도 모르지.'
그는 다시 천기선사에게 물었다.
"천기사제. 혈겁의 조짐이 보인다고 했는가? 그렇다면 그들은 언
제쯤 소림에 당도하겠는가?"
천기선사는 탄식했다.
"내일 밤입니다."
천심, 천뢰의 얼굴이 일시에 굳어졌고 천심선사는 침중하게 불호
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천기. 자네는 지금 당장 수라궁에서 돌아온 정혜
(丁慧)를 위시한 범천승 십이명과 장경각의 모든 경전(經典)을
조사동으로 옮기게."
천기선사는 그 말에 대뜸 천심의 뜻을 짐작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그는 눈을 내려감은 채 연신 불호를 외웠고 그가 타고 있는 사륜
거가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격동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천뢰선사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으며 그의 두
눈에서는 화광(火光)이 충천하는 듯했다.
천심선사는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소림은 영원하네. 그 누구도 소림을 무너뜨리지 못 하
네. 아무리 험한 난관이 닥치고 마풍(魔風)이 불어와도 소림은 영
원할 것이네."
천심선사는 천공을 우러러 보았다. 그는 천공의 한가운데, 오대마
성과 천혈성의 반대 쪽에서 희미하게 깜빡이는 성좌에 시선을 던
졌다.
'아미타불.... 현수(玄修).... 천기를 짚어보니 너는 반 년 후에
나 금제(禁制)가 풀리겠구나.......'
밤(夜).
밤은 안식과 평화의 상징이어야 하거늘 모든 음모는 밤에 펼쳐진
다. 그리하여 밤은 때로는 처절하고 공포스러운 혈겁(血劫)의 상
징이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소림사가 있는 숭산 소실봉을 유령처럼 오르는 인물
들이 있었다.
천(千)... 이천(二千)... 아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동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 많
은 숫자가 움직이는 데 나뭇잎 하나 바스락대는 소리조차 없다
니.......
그들은 하나같이 가공할 무공의 소유자들인 것이었다.
현정(玄正).
그는 소림사의 지객원주(知客院主)였다.
소림 외가무공(外家武功)의 일인자이기도 한 그는 소림 칠십이절
예 중 나한기공(羅漢氣功)을 십이 성 익혀 전신에 창칼이 들어가
지 않는 금강불괴지신이었다.
그는 지금 한 그루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 합장하고 있었는데 그
나무는 보리수, 곧 부처가 득도했다는 나무였다.
그는 염주를 굴리며 계속 염불을 외웠다. 그는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지극히 엄숙한 표정이었으며 그의 등 뒤에는 삼십 명의 중년화
상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었다.
현정대사는 문득 입을 열었다.
"정유(丁有)."
"네, 사부님."
등 뒤에서 한 중년화상이 대답했다.
"해탈이란 무엇인고?"
선문(禪問)인가? 그러나 이런 시각, 이런 상태에서 선문을 하다니
뭔가 모순이 느껴졌다.
"허허허.... 수많은 대답이 있겠지. 그러나 노납은 그것을 단지
무(無), 그 하나로 보고 싶구나."
스스스스.......
어디선가 극히 경미한 음향이 울리더니 그것은 사방으로부터 좁혀
들기 시작했다.
'왔구나.'
현정대사는 내심 이렇게 부르짖었으나 여전히 담담한 신색으로 다
시 입을 열었다.
"불제자의 몸으로 해탈에 오르는 것 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
냐?"
그러자 갑자기 심금을 뒤흔드는 교소가 들려왔다.
"호호호...! 화상. 네가 진정한 해탈을 얻고 싶다면 내가 시켜 주
겠다."
이와 함께 보리수 아래에 유령처럼 한 흑의인영이 나타났는데 그
녀는 바로 수년 전 소림사로 현오대사를 찾아왔던 흑의미부 단혜
령(段慧令)이었다.
현정대사는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합장했다.
"아미타불.... 여시주. 두 번째 뵙는군요."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단혜령의 차가운 말과 함께 그녀의 일 장(一掌), 흰 옥수가 뻗어
졌고 빛이 번뜩이더니 무시무시한 한기(寒氣)가 현정을 향해 몰아
쳤다.
"빙백마유공(氷魄魔幽功)!"
현정은 부르짖으며 승포를 떨쳤다.
펑---!
"으윽!"
두 사람의 경력이 부딪치자 회오리가 일며 현정은 신음과 함께 뒤
로 육 보나 뒤로 밀려 나갔다.
"호호호호...! 나 흑영마후(黑影魔后) 단혜령이 과거 소림에서 쓴
무공은 본신 무공의 반도 되지 않는다. 오늘은 진정한 무서움을
비로소 보여주겠다!"
그녀는 갑자기 허공을 향해 외쳤다.
"얘들아! 쳐라!"
"와아...! 죽여라!"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일시에 터졌다.
슈슈슉---! 꽈르릉... 펑!
드디어 무시무시한 대혈전이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수백 명의 흑
의인들이 덮쳐와 삼십 명의 화상들을 공격했고 창(槍), 검(劍),
도(刀), 필(筆)....... 모든 무기가 난무했다.
"크억!"
한 화상은 순식간에 전신에 열 가지의 병기가 꽂혀 거꾸러졌고,
다른 한 화상은 머리가 박살나는가 싶더니 목이 베어지고 다시 온
몸이 열 동강이 나 날아갔다.
펑---!
무시무시한 수십 줄기의 장풍이 또 다른 한 화상을 혈육덩이로 만
들었다.
"아미타불---!"
현정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느끼며 처절하게 불호를 외웠다. 그
는 전신에 나한기공을 일으킨 다음 금강복호신권으로 흑의인들을
쳤다.
꽈르르... 릉... 펑!
"크...아...악!"
금광이 번쩍이자 한꺼번에 십여 명의 흑의인들이 날아갔으나 날카
로운 교성이 그 사이로 울려 퍼졌다.
"호호호호...! 돌중. 너의 상대는 본 마후다!"
우--- 웅---!
흑영마후 단혜령의 한 쌍 옥장이 새하얀 기류를 발출시켰다.
펑---!
막 신형을 돌리던 현정은 정통으로 가슴에 장력을 맞았다.
"우욱!"
그의 입에서 피보라가 뿜어지는 찰나, 그는 단번에 십여 걸음을
물러났으나 쓰러지지는 않았다. 소림의 저력에 근간을 둔 그의 정
신력 때문이었을까?
단혜령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지독한 중! 십 성(十成)의 빙백마유공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다
니.......'
그러나 현정의 몸은 더이상 그의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그는
가슴에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며 처절하게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불존이시여, 자비를......."
그의 전신이 갈라지며 피가 터졌다. 결국 그는 고목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이를 본 단혜령은 비로소 날카로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그러면 그렇지. 마종문의 오대좌상(五大坐上)중 하
나인 나 흑영마후의 장력을 맞고 쓰러지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보리수 아래에는 끔찍한 혈하
(血河)가 흐르고 있었고, 삼십 명의 화상들은 전멸해 있었다.
반면에 흑의인들의 시체는 백여 명도 더 되었으나 단혜령은 눈 하
나 깜짝하지 않고 싸늘하게 외쳤다.
"가자!"
휙! 휙! 휙......!
수백 명의 흑영은 앞으로 화살처럼 쏘아 나갔다.
④
천 년 소림에 드디어 가공할 대혈풍이 몰아쳤다.
불사지존(不死之尊) 백리극을 위시하여 그의 부인이자 과거 이백
년 전 천마교(魔魔敎)의 교주였던 벽안마희(碧眼魔嬉) 냉소군(冷
素君), 그리고 오대마성(五大魔星), 즉 마종문의 오대좌상 중 세
명인 흑영마후 단혜령, 수라혈신 석기량, 제천마검(制天魔劍) 방
천극(方天戟) 등이 직접 소림으로 쳐들어왔다.
그밖에도 백팔십 명의 초절정의 대마두들과 삼천 명에 달하는 마
종지문 고수들이 동시에 소림사를 공격했다.
영원한 중원의 맥(脈)인 소림은 이제 드디어 최후를 맞이하는 듯
했다.
우르르릉---! 꽈--- 앙----!
소림사의 웅장한 건물 사방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불길이 하늘
로 치솟고 사방에서 엄청난 함성이 울렸다.
"와--- 아--- 아---!"
수라궁의 삼천 명 고수들과 소림의 천 명 승인들 사이에서 공전의
대혈전이 벌어졌다.
피가 튀고 살이 찢겨 난비하는 가운데 처절한 비명이 꼬리에 꼬리
를 물었다.
아수라(阿修羅)의 지옥계(地獄界)가 현신하는 듯했다.
이곳이 어디인가? 소림사, 바로 천 년 불문(佛門)의 성지가 아니
던가. 그러나 하룻밤 사이에 소림사가 완전히 지옥(地獄)으로 변
했다면 세인들은 믿을 것인가.
"아미타불... 크 아...악!"
비명이 잠시도 쉬지 않았고 피가 성스러운 불전(佛殿)을 물들였
다.
불문이 금하는 최대의 계율인 살계(殺戒)도 이날 밤 만큼은 지켜
질 수 없었다. 아니, 살계를 가장 처절하게 파계(破戒)한 날이 바
로 이 날이었다.
불사지존 백리극.
희대의 대마존인 그는 수중의 불사마검(佛死魔劍)을 높이 치켜든
채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핫핫핫핫......!"
소실봉 전체가 그의 마소(魔笑)에 뒤흔들렸다.
백리극의 발 아래에는 수십 명의 소림사 승려들의 시체가 참혹하
게 뒹굴고 있었고 수계원주 현암대사와 법화각주 현귀대사의 잘려
뒹구는 수급에서는 무서운 불(佛)의 분노가 이글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수백 명의 흑의인들이 사방에서 소림의 승려들을
닥치는 대로 주살시키고 있었다.
백리극은 문득 외쳤다.
"혜령(慧令)."
"네! 대종사님."
흑영마후 단혜령은 표표히 그의 앞에 떨어졌고 백리극은 청수한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명령했다.
"고수들을 데리고 장경각으로 가라. 장경각에 있는 모든 경전을
태워버려라! 장경각의 경전은 소림의 혼(魂)이다. 그 혼을 태워버
리지 않으면 언젠가 소림은 되살아난다. 알겠느냐?"
"네!"
흑영마후 단혜령은 몸을 빙글 돌렸으며 다음 순간 그녀와 백여 명
에 달하는 흑의인들은 화광이 충천하는 불전 사이로 날아갔다.
장경각(藏經閣).
이곳은 소림의 혼이 담긴 수만 권의 불경과 무학(武學)의 비경이
간직된 곳이다.
휙! 휘... 익!
흑영마후 단혜령과 백여 명의 흑의인들은 마침내 장경각에 당도했
다.
꽈꽝!
그들에 의해 흑단목으로 만든 장경각의 문은 일시에 박살이 났다.
그러나 장경각에 뛰어든 그들은 곧 텅빈 서가(書架)를 보며 입을
딱 벌렸다.
"아? 단 한 권의 경전도 없다!"
과연 장경각은 단지 텅 빈 건물에 불과했을 뿐, 그 많던 경전을
하나도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단혜령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이... 이제 보니 이 중놈들이 경전을 모두 옮겼구나!"
그녀는 수하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 자들이 경전을 옮겼다면 어디로 옮겼겠는가?"
과거 수라궁의 독혈당(毒血堂) 당주였던 오독비마 구우령이 대답
했다.
"단좌상(段坐上). 소림에서 가장 은밀한 곳이라면 조사동(祖師洞)
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 바로 그곳이다!"
단혜령의 입가에는 싸늘한 미소가 얼음가루마냥 흩어졌다.
"조사동으로 가자!"
제천마검(制天魔劍) 방천극, 그는 마종문 오대좌상의 한 명이었
다.
그러나 평생 마도의 비전인 사검(邪劍)만을 익힌 그는 과거 이백
년 전 불사지존의 오른팔 격으로 만일 검법(劍法)만을 따지면 불
사지존과 쌍벽을 이룬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사검 아래 소림의 승려 백 인 이상의 피가 흩뿌려졌다.
"제천삼십육사(制天三十六邪)!"
그는 사검을 휘두르며 외쳤다.
"넷!"
시산혈하의 도륙장에서 삼십 육 명의 괴노인들이 일제히 대답 했
는데 그들 역시 모두 한결같이 사검을 든 채 모두 전신이 피로 젖
어 있었다.
"나를 따르라. 대웅전(大雄殿)을 공격하겠다!"
"넷!"
이윽고 방천극과 그의 직계수하인 제천삼십육사는 불전 사이로 날
아갔다.
대웅전(大雄殿).
중원 어느 곳의 사찰에도 대웅전은 있다. 그러나 소림사 대웅전의
규모는 상상을 불허하는 것으로써 이른바 소림의 천여 명 승인들
이 동시에 아침 불공을 드릴 수 있다는 엄청나게 큰 곳이었다.
"아미타불......."
대웅전 앞 뜰에는 소림의 현 장문인(掌門人)인 현공대사(玄空大
師)를 비롯하여 선좌원수인 현광(玄光)과 계도원주 현각(玄覺),
그리고 현자 항렬의 장문인 호법인 사대금강(四大金剛)과 항마십
불(降魔十佛)이 선두에서 백여 명의 승려들을 거느리고 우뚝 서
있었다.
휙! 휙! 휙......!
허공에서 떨어지는 수많은 흑영들은 바로 제천마검 방천극과 제천
삼십육사를 위시한 이백여 명의 흑의인들이었다.
"아미타불.... 걸음을 멈추시오!"
현공대사의 불호성이 묵직하게 대웅전을 울렸다.
"너는 누구냐?"
방천극이 으스스하게 외쳤다.
"아미타불.... 빈승은 현공이오."
방천극은 움찔했으나 곧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하하하하...! 네가 바로 대소림의 장문인인 현공이냐? 좋다,
현공! 나 제천마검 방천극이 오늘 너의 목숨을 접수하겠다."
그는 뒤이어 날카롭게 외쳤다.
"제천삼십육사!"
"넷!"
"모두 죽여라! 대웅전의 기둥을 뿌리째 뽑아라!"
불사지존 백리극의 불사마검이 세심원주(洗心院主) 현진대사의 가
슴을 꿰뚫고 있었다.
"크... 윽! 아미타불......."
현진은 검에 꿰인 채 눈을 부릅뜨며 불호를 외웠고 이를 본 백리
극은 광소를 터뜨렸다.
"핫핫핫핫...! 대소림이 이것밖에 안 되는가?"
현진은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떨어뜨렸다.
"아미타불...! 그러나 소림은 영원...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이오....... 윽!"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고개를 꺾었다.
"으하하하하...! 무너지지 않는다고? 천만에. 해가 뜨기 전에 소
림은 끝장날 것이다."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천둥소리와도 같은 외침이 울려왔다.
"불사지존! 노납이 너의 모든 흉계를 끝장내 주겠다!"
"누구냐?"
백리극은 그 웅장한 외침에 흠칫 놀라며 외쳤다.
휘--- 잉!
바람이 불었고 그와 동시에 백리극 앞에 육중한 체격의 노승이 한
명 떨어져 내렸다.
"노납은 천뢰(天雷)다!"
다시 천둥같은 음성이 불사지존의 귓청을 진동시켰고 백리극은 자
신도 모르는 사이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소림사상 최강의 고수라는 마애천불(魔涯天佛) 천뢰가 바로 너
냐?"
"그렇다!"
그러나 백리극은 이내 광소를 터뜨리며 비웃었다.
"으하하하하...! 네가 노부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천뢰는 마치 천 개의 쇠종이 부딪치는 듯한 웅후한 음성으로 말했
다.
"물론이다! 소림무학은 중원무학의 총본산으로 그 누구도 소림무
학을 이길 수 없다!"
"으하하하...! 너의 사조인 지원(知元)도 내 앞에서 그런 오만한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찌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천로선사는 노성을 터뜨렸다.
"닥쳐라, 백리극! 받아라---!"
천뢰의 양 손이 합장하자 번갯불 같은 섬광이 뻗었고 백리극도 뒤
질세라 양 소매를 떨쳤다.
꽝--- 꽝--- 꽝----!
엄청난 폭음이 터지며 그들 사이의 땅이 움푹 파여 흙더미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윽!"
"억!"
두 사람은 다급성을 지르며 각기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으나 그들
은 서로 경악하고 있었다.
'과... 과연 불사지존이구나! 이렇게 무공이 강하다니.......'
'이... 이럴 수가? 진정 놀랍다. 이백 년 전 지원이 살아있다 해
도 이 정도는 되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의 눈은 무섭게 불타오르며 서로를 노려 보았고 마침내 백
리극은 불사마검을 치켜들었다.
"좋다! 소림 사상 최강의 고수와 사도 사상 제일인자인 나 불사지
존 중 누가 위인가 가려보자!"
꽈-- 르-- 릉--- 콰르르-- 릉---!
두 사람이 맞부딪치자 다시 경천동지할 굉음이 울렸다.
벽안마희(碧眼魔嬉) 냉소군.
그녀는 불사지존을 대신해 마종지문 최강의 고수들인 혈황백마(血
皇百魔)들을 독려하며 소림사 전체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퍼-- 펑-- 콰르릉---!
"아미타불! 크윽!"
수라혈신 석기량도 옆에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으나 혈황백마만
해도 얼마나 가공할 마의 집단인가?
혈황백마는 바로 불사지존과 벽안마희가 공동으로 마공사공(魔功
邪功)을 연성시켜 무려 백 년 간에 걸쳐 손수 키워온 무서운 마두
들이었다.
이들 혈황백마가 전개하는 혈황백절파천절진(血皇百絶破天絶陣)은
너무도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었고 천하에 그 누구도 그 공포의
절진을 막을 수가 없었다.
"크크크크크......!"
"으아--- 악!"
실로 엄청난 대혈풍(大血風)이 소림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수라혈신 석기량은 아수라장 속에서도 꼿꼿이 대항하고 있
는 소림의 승려들을 바라보며 내심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과연 대소림이다. 마종지문의 전 힘을 쏟았는데도 이렇게 끈질기
게 버티어 내다니!'
그러다 그는 흠칫 놀랐다. 그것은 혈황백절파천절진의 서쪽 일 각
이 갑자기 붕괴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크--- 아악!"
오륙 명의 혈황백마가 쓰러지는 것이 눈에 들어옴과 동시에 천지
를 진동하는 불호성이 들렸다.
"아- 미- 타- 불----!"
그것은 백여 명의 눈썹이 새하얗게 센 노승(老僧)들이 동시에 내
지른 사자후였다. 그들의 등장은 벽안마희를 비롯하여 수라혈신,
그리고 혈황백마를 모두 대경하게 만들었다.
백팔나한대진(百八羅漢大陣)! 드디어 천 년 소림의 정화(情華)인
소림사 백팔나한진이 발동된 것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