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장 처형(處刑)
불야궁(不夜宮).
가히 천하제일의 색향(色鄕)이라 부를 수 있는 곳이다.
불야궁의 밤은 밤이 아니다. 불야궁은 밤이 되어야 깨어나는 곳이다.
불야궁에도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불야궁 도처에 밝혀진 궁등(宮
燈)의 불빛이 수면을 떠도는 해파리 마냥 표류하고 있었다.
세차게 뿌려지는 빗줄기라 하더라도 불야궁의 유혹으로 모여드는 사람들
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불야궁의 유혹 가운데 가장 큰 유혹은, 운(運)이 좋다면 하룻밤 사이 강
호제일의 거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운만 좋다면!
마작(麻雀)이란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도박일 것이다.
마작은 네 가지로 이루어진 도박이다.
상(床)과 주사위, 점봉(點棒 : 일명 주마), 그리고 여러 가지 모양의 패
(牌)…….
마작은 자패(字牌)와 수패(數牌)로 나누어지는 두 가지 패로써 하는 도박.
자패는 사풍패(四風牌)와 삼원패(三元牌)를 말하며 수패란 만자(萬子), 색
자(索子), 통자(筒子)의 노두패(老頭牌)와 중장패(中張牌)로 이루어져 있
다.
솔직한 사람은 대륙의 문명이 번성하지 않게 된 이유를 마작 때문이라
한다.
마작은 그만큼 인간의 밤을 잡아먹고 정신을 잡아먹는 도박인 것이다.
숭스(順子)니, 뿅(倂 : 병)이니, 또이쓰(對子)이니, 사방에서 거친 호흡 섞
인 목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마작의 승부는 화료(和了)가 되어 올림조패를 끝맺음하게 됨에 따라 일국
(一局)이 끝맺게 된다. 그리고 올림조패의 형태에 따라 판수와 점수를 계
산하여 승부를 가리게 된다.
일판짜리인 문전청(門前淸), 평화(平和), 단요구, 일색이순(一色二順), 삼색
동순(三色同順), 일기통관(一氣通貫)을 잡는다면 이기고도 별 흥이 나지
않을 것이다.
대대화(對對和) 따위의 이판패를 쥔다면 탄성이 일어나리라.
문전순전대요(門前純全帶要) 삼색동각(三色同刻)은 삼패의 패이고, 소삼원
(小三元)과 혼노두(混老頭)는 사판의 패이다. 그리고 오판의 패는 청일색
(淸一色)의 패이다.
하나, 모든 사람은 만관(滿貫)을 노리며 마작을 하기 마련.
천화(天和), 지화(地和), 인화(人和), 대삼원(大三元), 구련보등(九蓮寶燈),
사희화(四熹和), 청노두(淸老頭)…….
그 자는 운이 좋은 자였다.
그 자는 좌석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일명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고
도 하는 구련보등(九蓮寶燈)을 만들어 판을 휩쓸더니, 이제는 더 무서운
십삼요구패(十三要九牌)를 만들었다.
그가 녹일색(綠一色)의 만관패(滿貫牌)를 제칠 때에는 그와 더불어 세 판
거듭 마작을 하던 이대인(李大人)이란 자의 얼굴이 시꺼매졌으며, 그가
십삼무고(十三無高)의 패를 만들어 내자 모든 사람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기세야."
"놀라운 솜씨인데? 꾼은 아닌 것 같은데 호오, 정말 대단하군."
"이런 기세라면 오늘 밤, 천만금은 따 가지고 나가겠군."
사람들은 그가 마작하는 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꾀죄죄한 옷차림, 머리카락은 봉두난발이다.
불야궁에 자주 출입하는 사람은 대부분 얼굴이 알려져 있는 바, 그는 초
면의 도박사였다.
한데, 정말 억세게도 운이 들어맞고 있는 것이다.
마작은 넷이 하는 도박이다. 그러나 승자는 하나가 생기기 마련.
흑의를 걸친 괴청년은 마작을 시작한 지 두 시진도 아니 되어서 이 날,
불야궁에 모인 반 이상을 쓸어 담을 수 있었다.
"잘 되는군."
그는 가끔가다가 한 마디씩 말을 꺼냈다.
그의 얼굴은 밀랍인형처럼 희었다.
그는 지금 청노두(淸老頭)의 패로 세 명의 도박사를 사색으로 만들어 버
렸다.
불야궁에 온 모든 강호유협(江湖遊俠) 공자대부(公子大夫)들의 이목은 자
연스럽게 그에게 집중이 되었다.
보통 사람은 따기보다 잃기 마련. 그리고 잃은 돈을 찾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불야궁에 와서 또다시 거금을 잃고 낙심천만해 하기 마련이다.
한데, 그는 따고 또 따는 것이다.
그의 앞에는 전표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그가 두 시진 만에 딴 금액은 오십사만 냥에 달한다.
불야궁에 와서 도박을 한 사람치고 단시간에 그렇게 많이 딴 사람은 하
나도 없다.
"운이 좋아."
"꾼은 아닌데, 대단해."
"와아… 또 땄다."
환호하는 사람들, 그들은 불청객이 불야궁의 돈을 휩쓸어 가는 걸 은근히
좋아하고 있었다.
불야궁 쪽에서는 도박의 귀신이라 할 수 있는 도박사들을 대거 고용하여
그들로 하여금 불야궁에 멋모르고 온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텅 비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기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규방, 한 여인이 거울을 바라보며 화장을 하고 있다. 그녀는 붉은 연지를
입술에 바르고 있었다.
그녀는 거울을 통해 집사를 바라봤다.
요염하고 음탕한 눈빛이다. 그리고 모멸감에 가득 찬 눈빛이었다.
"그 자의 정체는?"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신수서생(神手書生)과 환영귀(幻影鬼), 그리고 무
영객(無影客)이 모조리 패배당했습니다. 속이는 것도 아닌데, 운이 기가
막힙니다."
집사는 땀을 후줄근히 흘리며 말했다.
"얼마나 따 갔느냐."
"현재 칠십만 냥을 돌파했습니다."
"그, 그렇게 많이?"
여인은 그제야 신형을 틀었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사납게
소리쳤다.
"황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불야궁을 세웠지 황금을 퍼 주기 위해 세운 것
이 아니다."
"죄, 죄송합니다… 궁주."
"빠드득! 젖비린내도 가시지 않는 삼류 도박사에게 만금을 잃다니, 어서
그녀를 불러라."
"수란낭자(水蘭娘子) 말씀입니까?"
"호호호… 내 휘하의 도박사 가운데 가장 쓸 만한 아이라면, 그 아이 하
나이지."
여인은 그렇게 말한 다음에 다시 신형을 틀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나이 든 흔적이 약간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얼마나 관능(官能)적인 얼굴
인가?
'한시빨리 옥천산에 들어가야 한다. 소문에 듣자면 사륵 나으리가 산호부
인에게 빠져 있다는데,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산호부인, 꼬리가 아홉 개
달린 여우 같은 계집. 감히 흑묘아(黑猫兒)의 자리를 빼앗고자 하다니…
….'
그녀는 흑묘아였다. 그녀는 사륵의 정부였으며, 오랫동안 불야궁을 이끌
고 있었다.
그녀는 거의 매달 백만 냥의 거금을 옥천산에 보내고 있기에, 옥천산 연
환마교에서는 그녀를 금적부인(金積夫人)이라고 칭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위치는 나날이 신장되고 있었다.
흑묘아는 연환마교에서 알아주는 여마두이다. 그녀는 외단에서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녀가 책임지고 있는 불야궁은 외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 중 하나였다.
"불야궁이 돈을 잃는다는 건 말도 안 돼. 호호! 그 놈이 누구인지 모르나,
솜씨가 대단한 놈임에 틀림이 없어. 하지만 그 놈 자신을 생각해 모조리
잃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흑묘아의 볼에는 흰 분이 덕지덕지 처발라졌다.
도박장 창 밖으로 폭우발이 내린다.
바람이 세게 불어 창이 떨어질 듯 흔들거린다.
그러나 누구도 뇌우(雷雨)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좌중의 시선은 밀랍처럼 흰 뺨을 지닌 청년과 초록색 궁장을 걸친 요녀
사이의 표구 놀음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난 수란(水蘭)이라고 해요. 호호! 아무도 귀하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기에
제가 나선 겁니다."
"훗훗… 꽤 많이 땄는지라 일찍 일어날 작정이었는데, 또다시 돈을 잃어
준다니… 반갑군."
"호호호… 자신만만하군."
"모든 도박에 자신이 있지. 후후, 마작에서 날 꺾지 못한다면 주사위로
덤벼도 좋아."
"호호호… 귀하의 이름이 뭔지 모르겠군요. 이 정도 솜씨라면 강호계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인물일 텐데……."
"영무선생(影無先生)!"
청년은 천천히 주사위를 들었다. 그는 금상자를 앞에 두고 있는데, 상자
뚜껑이 열리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전표 다발이 가득 들어 있었다.
주사위 도박은 도박 중의 도박이다. 그것은 단시간에 승부가 나는 도박이
다.
수란은 색녀(色女)이며 또한 도박사이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영무선생
을 바라봤다.
영무선생의 얼굴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는데, 그 사이로 흘
러 나오는 침울한 눈빛이 왠지 낯익었다.
"승부를 빨리 내고 싶나요?"
"물론. 훗훗, 난 밤을 사랑하는 인물. 밤새 내내 도박을 하며 지새기에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단 말야. 두 판으로 승부를 내자."
영무선생의 눈빛은 수란의 얼굴에서부터 흘러내려 봉긋하게 일어난 가슴
과 꽈악 졸라매어진 허리께에 이르렀다.
'음탕하기는…….'
수란은 상대가 자신의 육체를 노리고 있다는 걸 여인의 육감으로 깨달았
다.
그녀는 교태로운 몸짓을 하며 주사위 통을 흔들어 댔다.
"불야궁은 신용이 있는 도박장. 운이 좋아 만 관을 딴다 하더라도, 딴 말
을 하지 않아요."
"알아. 그러하기에, 다른 데 가지 않고 불야궁에 온 거야."
영무선생은 팔짱을 끼었다.
수란은 주사위 통을 흔들었다가 세 개의 주사위를 한꺼번에 쏟아 내었다.
주사위의 숫자는 육(六), 육(六), 육(六)…….
수란은 배시시 웃었고, 영무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사위를 던졌다.
그가 만들어 낸 숫자는 육(六), 이(二), 삼(三).
그는 패배한 것이다. 그는 딴 돈의 반을 한 판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운이 따르지 않았어!"
영무선생은 거금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놀란 눈치가 아니었다.
'대단한 배포야. 호호! 물론 속으로는 끙끙 앓고 있는 것이겠지만,호호!
겉보기나마 냉정한 게 대단한 도박사로군!'
수란은 생긋 웃는 가운데, 한 다발이 넘는 전표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영무선생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번에는 제가 먼저 주사위를 굴리겠다는
신호를 했다.
그는 주사위 통을 건성으로 흔들어 대다가 뿌려 댔으며, 주사위 세 개가
또르르 구르다가 멈추어 섰다.
일(一), 이(二), 삼(三)…….
가히 최악의 숫자가 아닌가?
점수가 많이 나는 사람이 이긴다고 할 때, 그는 도저히 이기지 못할 점수
를 갖게 된 것이다.
"운이 나쁘군, 젠장!"
그는 팔짱을 끼며 의자에 몸을 깊이 파묻었다.
수란의 볼에는 보조개가 깊이 패였다.
'재간을 부리지 않아도 이기겠군. 호호호! 일(一), 일(一), 일(一)의 숫자가
나올 수는 없을 테니까.'
수란은 주사위 세 개를 통에 쓸어담은 다음에 방긋 웃어 가며 통을 흔들
어 댔다.
상대는 완전 체념 상태이다. 통을 뿌려 대는 것으로 한 판 승부는 마감되
리라.
통이 뿌려지고 주사위 세 개가 굴렀다.
주사위는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구르다가 멈추어 섰다.
그리고 한순간, 수란의 얼굴은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저, 저럴 수가?"
"와아… 영무 선생이 이겼다."
"엄청난 끗발이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영무선생은 완패 상황에서
역전을 시킨 것이다.
세 개의 주사위는 똑같은 점을 허공에 들이대고 있었다.
일(一), 일(一), 일(一)…….
"후후… 운이 억세게도 좋군. 내가 이기다니……."
영무선생은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모든 걸 다 걸고 하는 주사위 놀음에서 우습잖은 역전승을 거두어
버린 것이다.
수란은 영무선생이 전표를 백여 장 거두어 가는 걸 보며 얼굴이 샛노래
졌다.
도박사가 되어 돈을 잃는다는 건 치욕일 뿐더러, 이 상황에서 돈을 더 잃
게 된다는 건 목숨과 직결되는 일이다.
'할 수 없다.'
수란은 더욱 요사한 웃음을 흘려 내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한 운수이십니다. 호호호! 오늘 밤은 정말 당하지 못하겠습니
다."
수란은 어깨 위로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
어 내리며 요염한 자태를 취했다.
영무선생은 전표를 세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수란의 눈은 녹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어떠십니까? 오늘 밤, 소녀와 일배주(一杯酒)를 나누어 보심이……?"
"떠, 떠나야 하는데……."
"호호… 밤이 너무 아름답지 않습니까? 호호! 불야궁 역사상 하룻밤 만에
가장 많은 돈을 딴 영무선생에게 술 한 잔을 권해 드리고 싶군요."
수란의 눈빛은 더욱 밝게 타올랐다.
영무선생은 멍한 표정이 되었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은 오늘 밤으로 영무선생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사
라진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수란과 더불어 불야궁의 환락굴(歡樂窟)로 접어든 사람치고 살아나온 사
람이 없다.
수란은 흡정녹취안(吸精綠翠眼)이라는 사교마안공을 써서 영무선생의 정
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번쩍-!
하늘이 새파랗게 물든다.
억세게 운이 좋은 영무선생은 도박장을 벗어나 화원으로 접어들었다.
수란은 그를 부축하고 있는 바, 영무선생은 음욕을 이기지 못하는 듯 손
을 수란의 옷가슴 속으로 덥석 찔러 넣었다.
"수밀도 같구나. 탱탱하고 말랑말랑한 게……."
"흐응!"
수란은 간지러움을 느끼고 몸을 뒤틀었다.
콰르르르릉-!
순간, 뇌전 소리가 화원을 뒤흔들었다.
영무선생은 수란의 젖가슴을 떡 주무르듯이 하면서 화원을 가로질렀다.
화원 가에는 석옥이 한 채 서 있었다.
수란은 석옥 앞에 이르렀을 때, 손가락을 퉁겨서 영무선생의 혼수혈을 점
했다.
"나쁜 놈! 혼 좀 나 봐라!"
수란은 욕설을 토하며 영무선생의 몸뚱이를 석옥 안에 내던졌다.
석옥 안은 썩은 냄새에 뒤덮여 있었다.
석옥 안에는 십여 명의 남자가 머물러 있는 바, 그들의 옷은 피고름에 뒤
덮여 있었다.
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는 사람도 있으며, 열 손가락의 손톱이 모조
리 빠진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얼굴 가죽이 반 정도 벗기어진 상태였
다.
영무선생은 석옥 바닥에 주저앉았으며, 수란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까르르 웃어제꼈다.
광기 서린 웃음소리가 중인의 고막을 자극하는 가운데, 석옥 안을 지키고
있던 자가 수란에게 철편(鐵鞭)을 건네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수란낭자!"
"호호… 오랜만에 몸을 풀어 보는군."
수란은 사요한 눈빛을 흘리며 채찍을 번쩍 쳐들었다.
채찍은 흑사(黑蛇) 마냥 꿈틀거리며 영무선생의 목덜미를 휘어 감고자 했
다.
영무선생의 목에서 핏물이 튀어오르려는 찰나, 불현듯 하이얀 손 하나가
허공으로 쳐들리더니… 채찍 가운데를 덥석 거머쥐었다.
"예절이 없기는 예전과 마찬가지구나."
"흐윽… 넌 의식을 잃지 않았군?"
수란은 사색이 되어 철편을 힘껏 잡아당겼다.
철편 가운데를 거머쥔 사람은 영무선생이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는 키가 꽤 큰 편이었다.
"날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 너는……?"
수란은 아무리 힘을 써도 철편을 끌어당길 수 없었다.
그녀가 일으키는 내공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진흙소 마냥 스르르 녹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영무선생은 머리카락을 뒤로 빗어 넘겼다.
매우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는 엷은 미소를 입가에 흘리는데, 미소가 짙
어지는 가운데 입가의 모습이 조금 달라졌다.
한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매가 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눈썹은 검은빛에서 흰빛으로 빠르게 물들어 갔다.
"이제 날 기억하느냐?"
"으으, 너는… 냉혈살흔(冷血煞痕)!"
수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순간 그는 채찍을 슬쩍 퉁기어 냈으며, 채찍은 토막토막 끊어진 채 수란
의 포동포동한 젖가슴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풍만한 육봉(肉峰)은 찰나적으로 짓이겨졌다.
뭇남자들을 유혹하던 봉긋한 그녀의 가슴이 피떡으로 뭉개어졌으며… 수
란의 몸뚱이는 빠르게 퉁기어 나가, 수란에게 채찍을 건네 주었던 자의
몸뚱이와 부딪쳤다.
수란의 몸뚱이는 엄청난 힘으로 그 자의 몸을 후려쳤으며, 그 자는 단말
마의 비명 소리를 내며 상체가 뭉그러졌다.
백무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수란의 혈도를 제압하여 무공을 폐쇄하는 정도로 처형을 마치려 했
는데, 내공을 제어하지 못했는지라 수란의 가슴이 뭉개어져 버린 것이다.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문 밖으로 걸어 나갔으며, 방 안에 있던 불야궁의
죄수들은 사색이 된 가운데 환호성을 터뜨리며 뒤따라 밖으로 뛰어나갔
다.
폭우 속, 불야궁은 일 인에 의해 무덤 속처럼 고요해지기 시작했다.
백무영을 가로막으려 하는 자는 백무영이 슬쩍 흔들어 대는 팔에서 퉁기
어지는 격공진기(隔空眞氣)에 의해 잇달아 쓰러져 버렸다.
백무영의 내가공력은 자신도 측량하기 힘들 정도로 심후해졌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그가 시전하는 진기가 그의 잠력에 비해 삼분지일
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흑묘아는 잔(盞)을 손에 쥐고 있었다.
잔에는 호박색 액체가 찰랑 담기어 있다. 그녀는 붉게 물든 손톱이 달린
손가락 두 개로 단약 하나를 집어 들었다.
단약의 빛은 손톱 빛깔처럼 짙붉었다. 단약의 크기는 매실(梅實)만한데,
잔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포말을 일으키며 융해가 되었다.
"좋은 약이야. 묘강(苗疆)에서 얻은 것이지."
흑묘아는 침상 쪽을 향해 걸었다.
침상 위에는 나이가 어린 미소년이 누워 있었다.
이제 나이 열여섯 정도, 살결이 몹시 흰 소년이다.
소년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흑묘아는 소년을 상대로 음욕을 풀고자 하는 것이다.
"호호호… 날 겁내지 마라. 오늘 밤을 통해 네게 환락의 맛을 알려 줄 테
니까."
"제… 제발……."
미소년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양주(揚州) 출신의 서생. 친구들과 더불어 강호 유람을 나섰다가 불
야성의 무사에게 잡혀 인질이 된 것이다.
흑묘아는 연환마교의 힘을 믿고 패륜무도한 짓을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
있었다.
그녀는 동남(童男)을 정욕의 대상으로 희생시켜 가면서 불사마녀공(不死
魔女功)을 연성해 가고 있었다.
"이 술을 마셔라.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흑묘아는 잔을 내밀었다.
포말을 일으키는 호박색 술에서는 지독한 향기가 흘러 넘쳤다.
향기를 한 모금만 빨아들인다 하더라도 정신이 얼떨떨해질 정도이다.
"집으로 보내 주세요."
"남자가 울면 보기에 좋지 않아. 이 술을 쭉 마셔 봐. 기분이 몹시 즐거
워진다."
흑묘아는 음탕한 표정을 지으며 침상 가로 바짝 다가섰다.
소년은 아래턱을 덜덜 떨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는 술을 먹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체념하는 표정으로
잔을 건네 받고자 했다.
순간, 그는 누군가 안으로 들어서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는 낡은 흑포를 걸치고 있는데, 키가 꽤 큰 편이었다.
"어엇?"
소년이 입을 따악 벌릴 때에야 흑묘아는 제삼의 인물이 방 안으로 들어
섰다는 걸 알고 신형을 급박히 틀었다.
"어떤 놈이 감히 궁주의 거처로 들어서느냐?"
"훗후……!"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자는 몹시 매력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
다.
검미봉목(劍眉鳳目), 그리고 강이한 육체, 허름한 흑포를 걸치고 있기는
하되 그의 준미함은 뭇여인의 가슴을 울리게 할 만하다.
'쓸 만한 몸이야.'
흑묘아는 갑자기 숨을 멈추었다.
절세미남자의 얼굴은 어디에선가 본 듯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분명히
초면이었다.
"넌 누구지?"
"나는… 수란이 보내서 왔소."
"호호… 수란이 보냈다고? 호호! 그럼 나와 더불어 합환(合歡)의 즐거움
을 맛보기 위해 왔구나. 호호호! 사실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와 더불어 밤
을 밝힌다는 건 몹시 싱거운 일이지. 운우지락(雲雨之樂)은 가르치며 얻
을 수 있는 게 아니지. 그건 완벽한 기교를 알고 있는 남녀 간에 얻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쾌락이지."
흑묘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사이, 미끈하게 생긴 청년은 금색의 융단
이 깔린 바닥에 더러운 발자국을 찍으며 흑묘아 앞으로 다가섰다.
흑묘아는 음욕을 이기지 못하고 숨결이 가빠지는데, 문득 그녀의 피부로
차디찬 기운이 저미어 들었다. 흑묘아는 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답게 미
세한 살기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살기를 품고 있군. 빠드득! 설마, 수란… 그년이 날 시해하려고 자객을
보냈단 말인가?'
흑묘아는 잔을 꽈악 쥐며 청년을 쏘아봤다.
청년은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으며 점점 가깝게 다가섰다.
그리고 걷는 가운데, 그의 얼굴 모습이 점차적으로 변화가 되었다.
가장 큰 특징은 눈썹이 백설처럼 희어졌다는 것이다.
흑묘아는 기겁을 하며 두 걸음 뒤로 미끄러져 나갔다.
흰 눈썹, 일그러진 입매, 퇴영적인 미소.
그건 한때나마 전설에 가까운 살명을 날렸던 살인마의 특징이 아니던가?
"넌… 냉혈살흔!"
흑묘아는 그제야 백무영을 기억해 냈다.
백무영은 제 얼굴로는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알고 과거 역
용하고 있던 모습으로 변체환용(變體換容)을 한 것이다.
"흑묘아 덕에 좋은 구경을 했지."
"으으, 새를 타고 떠나갔다고 들었는데……."
"흑묘아, 무릎을 꿇어라!"
"무, 무릎을?"
"훗후… 난 너보다 우위에 있지. 넌 내가 함백의 지시에 따라 마교 제자
가 되었다는 걸 알 텐데?"
"미, 미친 소리! 넌 마교 제자가 아니다."
흑묘아의 낯빛은 가관이었다.
썩은 돼지간의 빛깔이 이러할는지?
붉으락푸르락거리는 얼굴은 보기에도 구토가 날 정도였다.
"넌 날 잘 안다 여겼는데……."
백무영은 일부러 지독한 살기를 흘려 보냈다.
흑묘아의 몸뚱이는 빙굴에 빠진 듯한 한기에 사로잡혔다.
백무영은 극천빙극단(極天氷極丹)을 먹은 이후, 내공을 운용할 때마다 엄
청난 한기를 일으키게 되었다.
"난 무자비한 편이야. 자비심이 별로 없지."
하이얀 치열이 드러난다.
한순간 흑묘아는 그가 정말 아름답다 여겼고, 또한 가장 차갑다 느꼈다.
그녀는 겁을 집어먹고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땀을 흘리면서 무릎을 꿇었
다.
백무영은 그제야 흡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계집이란 자고로 남자에게 순종을 해야 보기 좋은 법이야. 후훗, 내 앞
에 무릎을 꿇는 자태가 사랑스럽구나."
"부, 부디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모두 시켜서 한 일에 불과합니다. 전 죄
가 없습니다."
흑묘아는 뜨거운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백무영은 그녀의 풍만한 육체에 눈독을 단단히 들인 듯, 음탕하고 사악한
표정을 지었다.
"넌 아름다워. 그리고 난 미인(美人)을 사랑한다. 마음이 통한다면 오늘
밤, 함께 즐길 수 있다."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흑묘아는 저항하겠다는 마음을 포기한 듯 보였다. 그녀는 사지를 덜덜 떨
며 두 손을 높이 쳐들었다. 찰랑찰랑 고인 술잔이 백무영의 가슴께로 쳐
들려진다.
"이 술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저의 주인으로 섬기겠습니다."
"푸하핫… 비 오는 밤, 절세미녀가 주는 한 잔의 술이라… 좋아, 난 운치
를 사랑하지. 피와 낭만은 비슷한 것이지. 푸하핫……!"
백무영은 사악하게 외치면서 잔을 건네 받았다.
그의 입술께로 잔이 다가갈 때, 흑묘아의 입가에는 회심의 빛이 떠돌았
다.
백무영은 잔 가득한 술을 단숨에 마셨다. 그리고 그는 빈 잔을 내던지며
한 걸음 더 다가갔다.
순간, 흑묘아는 퉁기듯 일어나며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호호호… 넌 속았다. 그 술은 망혼미백단(亡魂迷魄丹)이 타여진 술이다."
"망혼미백단?"
백무영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흑묘아는 허리에 차고 있던 연검(軟劍)을 끌러 내며 사요한 눈빛을 번뜩
거렸다.
"냉혈살흔… 호호호! 사륵 나으리는 네 몸에 엄청난 현상금을 걸었지. 호
호호! 넌 두 번에 걸쳐 나를 즐겁게 하는구나. 네가 나의 포로가 된 이
상, 나의 위치는 산호부인을 능가하게 될 것이다. 호호호! 요조숙녀 행세
하고 있는 그 암캐와 네가 배가 맞은 사이라는 걸 알고 있다. 호호호! 네
놈이 옥천산에 잡혀 가서 그 사실을 실토하는 즉시 산호부인, 그 암캐 같
은 계집은 서 있을 땅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흑묘아는 산호부인에게 엄청난 질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냉혈살흔을 제압하여 그와 산호부인이 간통한 사이라는 걸 밝혀,
산호부인의 아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다.
"산호부인을 제명할 생각보다, 오늘 밤 고통 없이 죽어 가는 걸 기도하는
게 나을 텐데… 천한 계집!"
백무영은 역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흑묘아는 그의 가슴 삼대요혈에 검을 그어 대다가 사색이 되었다.
"독에 당하지 않았군!"
기겁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검화(劍花)가 피어났다.
표화영롱검(飄花玲瓏劍)!
영롱히 떠오르는 검화 속으로 흰 손이 쳐들렸다.
흰 손은 한 자 정도 단선(單線)을 끌었으며, 순간 흑묘아의 목젖에서 피
한 방울이 퉁기어졌다.
천돌혈(天突穴)에 미미한 지인(指印)이 찍히며 혈화(血花)가 피어나는 것
이다.
섬전 같은 일 식 가운데 흑묘아의 전신이 뻣뻣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손에 쥐어졌던 흑마녀검(黑魔女劍)이 스르르 미끄러져 계단에 굴
러 떨어졌다.
"제… 제발……!"
흑묘아는 앞으로 고꾸라지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화장기 짙은 얼굴이 피에 물들기 시작한다.
백무영은 그녀의 천령개(天靈蓋)를 후려치려 하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겁에 질린 눈빛이 그를 보고 있었다.
흑묘아의 색동(色童)이던 소년이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백무영은 그를 힐끗 보다가 손을 내렸다.
'어린 친구 앞에서 사람 죽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건 어른이 할 일이
아니지.'
"그 계집을 죽여 주십시오. 제 친구가 많이 죽었어요."
소년은 얼른 침상 아래로 뛰어내렸다.
백무영은 탄식을 하며 눈길을 허공에 돌렸다.
"이십 년 간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마도가 천하를 장악하는 가운
데, 너무나도 많은 비극이 벌어졌다. 나는 피로 혈채(血債)를 씻을 작정을
하고 있지. 그러나… 이 밤, 더 이상의 피를 흘린다는 건 죄악이라는 생
각이 드는구나."
백무영은 남달리 강한 살기를 지니고 있다.
그가 지닌 살기는 천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한 천살성(天殺星)의 기운이
다.
다만 그의 살기가 절정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척수에서 기이한 청기
(淸氣)가 일어나며 살기를 억제시키는 것이다.
그 기운은 창궁법사(蒼穹法師)가 죽기 전에 전한 금단선공(金丹禪功)의
정기(正氣)였다.
"제발… 제발……!"
흑묘아는 같은 말을 계속 외치고 있었다.
백무영은 그녀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공포스러운 나머지, 미쳐 버리고 만 것이다.
'미쳐 버린 여인을 죽인다는 건 죄악이다.'
백무영은 애써 살기를 자제했다.
그는 방 안을 둘러보다가 탁자 위 수북한 밀지를 보게 되었다.
흑묘아는 밀지를 읽다가 운우의 환락을 누리고자 했던 것 같았다.
백무영은 탁자 쪽으로 다가가 밀지를 읽기 시작했다.
밀지 안에는 그를 경악시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낙양쾌화림(洛陽快花林)을 접수하는 일은 계획에 따라 추진이 될 것임.
그리고 축융곡(祝融谷)으로 떠나간 일천마영(一千魔影) 또한 임무를 완수
할 것으로 보임.>
한 장의 밀지에는 그러한 글이 적혀 있었다.
또 한 장의 밀지에는 더욱 엄청난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신비세력이 준동(蠢動)하기 시작한 바, 그들은 관산검맹보다 더욱 큰 세
력으로 여겨짐.
그들은 천마궁(天魔宮)으로 자칭하고 있음.>
백무영은 그 중 낙양쾌화림이 언급된 밀지를 거머쥐었다.
그 곳에는 그가 잊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다.
그는 그 여인을 다시는 만나지 않을 작정을 하고 있었다.
한데, 그 여인이 위기에 빠져 있다면…….
'사마백봉(司馬白鳳)… 악의 연못에 피어난 연꽃 같은 여인.'
비가 심하게 내린다.
백무영은 한 장의 밀지와 더불어 과거의 묘한 인연의 덫 속으로 걸려들
기 시작하는 것일까?
<4권에 계속>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