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생존(生存)의 법칙
(1)
황산(黃山) 현현교……
광마 좌숙야는 투실투실한 살덩이를 긴 의자에 눕힌 채, 느긋하게 하오(下午)의 망중한(忙中閑)을 즐기고 있었다.
그 앞에는 흑백쌍귀가 무릎 위에 책을 펴놓기는 했는데, 책을 읽는지 낮잠을 자는지 모를 자세로 앉아 있었다.
좌숙야의 입가에 우러나오던 흐뭇한 미소가 싹 가셔지면서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다시 강호에 나온 이래, 애초의 계획 가운데 팔할은 이뤄졌거나 성사 단계에 있다.
천하의 가장 막강한 힘, 황제를 등에 업었으니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허나 그의 마음속에 한 줄기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모르지는 않았다.
하나는 금황독존의 존재이며, 다른 하나는 무림맹을 필두로 한 정파무림의 존재였다. 자신은 이미 칼을 뽑아 들었는데 상대방은 잠자코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다.
수족을 잘라도 눈 하나 껌벅이지 않고 칼을 뽑아들 생각을 않고 있는 것이다.
"힘이 없어서 굴종한다는 뜻이 아니면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는 얘긴데……."
좌숙야는 자기도 모르게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백의귀동 장우사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좌숙야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보이기 싫어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다……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그건 그렇고……."
그는 몸을 반쯤 일으켰다.
"물의 새로운 이치에 대해 생각해 보았느냐?"
"그……그게……."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봐 흑백쌍귀는 똑같이 애매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들의 나이 이미 백삼십에 가까운데 아직까지 책을 붙들고 있으라니……
"나이를 먹으니 자꾸 졸려서……."
흑의귀동 장우화는 제 딴에는 변명이라 생각하고 말을 꺼냈으나 백의귀동 장우사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좌숙야가 눈살을 찌푸렸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사부 앞에서 나이를 운운하다니, 아무리 그들이 나이를 먹어도 사부보다 세상을 오래 살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좌숙야는 크음! 헛기침을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평생 물의 이치를 무공에 대입해왔다…… 물처럼 대자연의 법칙을 완벽하게 설명해 주는 건 없어…… 내가 너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던가?"
흑백쌍귀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골백번은 더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얘기를 해주었는데 아직도 이치를 못 깨우쳤냐고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무공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의 이치를 어기지 않으며, 흐르는 물이 안 가는 곳이 없이 다 스며들면서도 만물과 다투지 않듯 강한 것은 비켜가고 약한 것은 삼켜버려야 한다. 부드러움 속에도 강함이 있으니 물은 높은 것은 깎아내고 낮은 것은 평평하게 메운다. 적을 상대할 때도 이와 마찬가지다. 강함만으로, 혹은 부드러움만으로 상대해서는 안 된다."
흑백쌍귀는 지루해서 하품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좌숙야는 진지하기만 했다.
"물은 자신을 담는 어떠한 그릇의 모양에도 순응하며 스스로를 변화시킨다…… 물은 생명의 근원인 동시에 무공의 근본인 게야…… 무식한 놈들은 물의 부드러움 속에 모든 걸 파괴시킬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는 걸 모른다. 다시 말해서 물이라는 건……."
하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은 아무리 강해봐야 결국 물에 불과하다! 그러니 더 이상 떠들 필요가 없어!"
좌숙야는 나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다. 물은 결국 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린 더 이상 쓸데없이 떠들 필요가……."
하다가 인상을 쓰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흑백쌍귀는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어린아이처럼 쿡쿡! 웃었다.
창문 앞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독마 순우창이 서 있었다.
좌숙야는 버럭 화를 내려다가 그를 보고는 입맛만 쩝 다셨다.
"그래…… 또 자네였군.……."
그는 육중한 거구를 이끌고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독마 순우창 앞으로 다가가며 위엄 있게 말했다.
"어디 오늘은 이유를 좀 들어볼까? 요즘 계속 인상을 쓰면서 내게 시비를 거는 이유가 뭔가?"
순우창은 고개를 돌려 흑백쌍귀를 쳐다봤다.
자리를 피해달라는 뜻이다.
좌숙야는 고개를 끄덕였고 흑백쌍귀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쪼르르 방을 빠져나갔다.
순우창은 그의 시선을 피해 창쪽으로 돌아섰다.
"우리가 함께 생활한 지도 근 백이십 년이 가까워지는군.……."
독백처럼 나직이 읊조리는 소리였다.
좌숙야도 고개를 끄덕이며 야릇한 미소를 보였다.
"허어…… 이 사람! 이제 봤더니 세월의 흐름에 취했던 게로군."
순우창은 지난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린 그 긴 세월동안 온갖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어. 어떠한 역경에도 흔들린 적이 없었지. 심지어 그 무서운 교주를 상대로 싸울 때도 말이야."
좌숙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들끼리 있을 때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특히 교주의 죽음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인생의 쓴맛을 보게 한 최초의 실패였기 때문이다.
"대체 뭘 말하려는 건가?"
순우창은 음울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글쎄…… 자네에겐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난…… 지금 매우 불안하고 초조해".
좌숙야는 멈칫하더니 곧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껄껄껄! 대소(大笑)를 터뜨렸다.
"자네 말대로 우린 최악의 상황에서도 흔들린 적이 없었네! 헌데 모든 걸 이룬 것이나 다름없는 지금에 와서 뭐가 불안하다는 건가?"
그 역시 전연 걱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순우창과 다른 점이 있다면 좌숙야는 함부로 타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뿐, 아무리 백이십 년 동안 너나없이 지내 온 벗일지라도 말이다.
좌숙야는 순우창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친구야, 무림의 절반 이상이 우릴 따르고 있어! 게다가 황제도 우리 편이거늘 무엇이 두려운가?"
그 말은 순우창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신의 믿음을 확고히 다지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순우창의 얼굴에 깔린 그늘은 쉬 가시지 않았다.
좌숙야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걱정 따위는 약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어지는 특징이 있다고 믿었다.
좌숙야는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것보다…… 난 요즘 우리 세 사람이 무림을 완전히 장악한 뒤, 반대편에 선 자들에게 내릴 피의 보복을 생각 중이네."
그는 순우창의 턱 아래 바싹 얼굴을 들이밀고 속삭이듯 말했다.
"보이지 않나? 그 경외와 공포에 사로잡힌 눈동자들이……."
좌숙야는 곧 허리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었다.
순우창은 무뚝뚝하게 그의 웃음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다 웃었나? 단리확은 어떻게 되었지?"
좌숙야는 피식 웃었다.
'이 친구는 다 좋은데……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 사람을 귀찮게 한단 말야!'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벼 대수롭잖게 말했다.
"상처는 아직도 심하지만 이젠 움직일 정도가 되는 모양이야. 지금 부하들이 그를 이곳으로 호송 중일세. 치료를 받느라 반 년 간이나 염산지부에 처박혀 고생했지만 그는 정말 큰일을 해냈어. 종천로 그놈을 제거한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좌숙야는 말이 나온 김에 아주 불안감의 씨를 말리고 싶었다.
"좌현영이 죽은 후 유일한 눈에 가시였던 종천로마저 사라졌으니 이제 우릴 막을 존재는 없네!"
순우창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상대가 종천로라면 단리확이 중상을 입은 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아."
"그런데……?"
"단리확의 부상은 환상진 때문이지. 그 점이 좀 이상해."
"……?"
좌숙야는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럴 때의 순우창은 무서울 정도로 치밀했다.
어쩌면 좌숙야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그 이상함 때문이지 않을까?
순우창은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꾹꾹 힘을 주어 말했다.
"종천로의 최대 무공은 만공모사야……! 그런데도 그는 왜 죽을 때까지 만공모사를 펼치지 않았을까? 만약 그가 만공모사를 펼쳤다면…… 단리확은 절대 살아서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거야!"
"쯧쯧…… 자넨 단리확이 살아난 게 그리도 불만인가?"
좌숙야는 혀를 차며 이렇게 얘기하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어딘가 불안함이 내재 돼 있었다.
순우창은 흐음! 신음을 토하면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종천로가 만공모사를 펼치지 않은 이유를 풀어내고야 말겠다는 듯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좌숙야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좋아 좋아, 정 궁금하면 훗날 저승에 가서 종천로의 멱살을 잡고 직접 물어보게. 왜 만공모사를 펼치지 않았느냐고 말이야!"
그쯤에서 생각을 접고 싶었지만 순우창은 여전히 심각하기만 했다.
"구파일방과 육문오가 중 몇 곳이 힘을 합치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좌숙야는 하품을 하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그따위 오합지졸들이 모여 뭘 할 수 있겠나?"
"금황독존까지도 무시할 텐가?"
"……."
"놈은 좌현영, 지 애비와 닮은꼴이야. 잔혹하고 비정한 데다 매우 강하지!"
좌숙야가 묘한 웃음을 흘렸다.
"ㅋ! 놈이 혈음신장을 익힌 건 사실이지만 그게 만능은 아니야."
순우창의 얼굴은 얼음장같이 싸늘했다.
"잊었나? 놈이 어떻게 태어났는지를…… 놈은 하늘의 저주와 악마의 숨결이 탄생시킨 존재야. 게다가 백 년 간 숨어있던 현현교의 생존자들을 끌어 모아 좌엽선 교주의 신화를 되살리려 하고 있네."
좌숙야는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자네에게 내 한 가지만 묻겠네. 옥구전이라는 무공을 아나?"
순우창은 흠칫 놀랐다.
좌숙야는 웃음기가 싹 가셔진 얼굴로 순우창의 얼굴을 정시했다.
"토번에서 만들어진 전대미문의 무학…… 죽음을 동반한 아홉 번의 탈태환골을 통해 신의 전능을 얻는다는 옥구전 말일세."
순우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옥구전을 내가 어찌 모르겠나. 백 년 전 좌엽선 교주가 바로 그 옥구전을 얻어 연성을 시도한 적이 있었어. 헌데 갑자기 왜 그 말을……?"
좌숙야는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흐흐…… 천하에 무서울 게 없었던 그가 왜 옥구전을 연성하려 했는지 아나? 바로 혈음신장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어. 혈음신장의 상극이 바로 옥구전이야."
순우창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네……지금 그 옥구전을 연성한 자가 있다고 말하는 건가?"
좌숙야는 고개를 돌려 창 너머로 시선을 던지며 희미한 소리로 말했다.
"있지…… 그것도 바로 금황독존의 그늘 속에……."
순우창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 인간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좌숙야는 창가로 다가가 조각 구름이 떠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머금었다.
'흐흐! 금황독존…… 넌 아직 햇병아리에 불과해…… 단리확의 목은 네놈에게 주겠다…… 흐흐! 네놈이 단리확의 목을 거둔 것에 고무되어 있을 때…….'
좌숙야는 고개를 돌려 순우창을 쳐다보며 물었다.
"보름이 며칠 후지?"
"보름?"
순우창은 뜬금없는 질문에 어리둥절해 하다가 곧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칠 일 후가 되겠지."
좌숙야는 씨익 웃었다.
"칠 일 후라…… 그때쯤이면 거추장스런 장애물들도 대충 치워졌을 테고…… 좋아! 오너라. 금황독존! 지옥의 문 안으로……."
(2)
잡초가 우거진 벌판 위에는 처참하게 박살난 채 뒤집어진 마차가 있다.
그 주위에는 수십 마리의 말과 무사들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 쓰러져 있었다.
"내 평생의 꿈이 두 가지 있었어…… 어릴 적부터 평생을 통해 이룩하고 싶은 두 가지 꿈이……."
금황독존의 목소리는 부서진 마차 뒤에서 들려왔다.
"흐흐흐! 그 중 하나가 바로 삼좌존을 모두 내 발로 밟아 죽이는 거야. 내 발 아래서 세 개의 두개골(頭蓋骨)이 차례로 부서지는 소리를 거의 매일 환청처럼 들으며 살아왔지."
금황독존은 누군가의 머리를 밟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현현교 삼좌존 중의 한 명인 단리확이었다.
당하는 자의 얼굴 한쪽은 회(灰)를 바른 듯 말라붙은 피가 두껍게 덮여 있었으며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졌고 몸은 밧줄에 단단히 결박당한 상태였다.
"헌데 바로 지금 그 세 번 가운데 하나의 순간이 찾아온 거야."
단리확은 부드득! 이를 갈았다.
"부상 중만 아니었어도……젖비린내 나는 네놈에게 당하진 않았을 것을…… 이놈! 어서 죽여라!"
금황독존은 씨익 웃었다.
"물론 죽여야지. 할아버지가 당신들의 배신으로 죽었고…… 내 아버지도 당신들에게 당했는데 내가 살려 줄 리가 있겠어?"
마치 벌레라도 짓이기는 듯 금황독존은 단리확의 머리를 밟고 있는 발을 천천히 비틀었다.
"으으윽……!"
그가 발을 비틀자 그 힘에 의해 머리가 땅바닥에 비벼졌다. 머리가 빠개지며 골수가 땅을 뚫고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 단리확의 낯빛이 하얗게 질려갔다.
금황독존은 잠시 발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짐짓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아아……! 슬픈 일이야! 현현교의 그 위대한 삼좌존 중 한 명이 내 발 아래 눌려서 이렇듯 비참하게 죽어가야 하다니……."
단리확의 얼굴은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한 가지만 묻겠다.…… 내가 이곳으로 오는 건 극비였거늘…… 어찌 알아냈느냐?"
금황독존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야 영감……."
단리확은 비참한 심정으로 웃었다.
"크크크……! 백오십 년을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힘으로 살아온 내가…… 너 같은 애송이의 발아래서 삶을 접어야 하다니……."
금황독존은 안색을 싸늘하게 일변시키면서 매서운 안광을 폭사시켰다.
"그래 맞아…… 참으로 기막힌 일이지. 허나 그렇게 기막힌 운명이 될 수 있는 게 바로 운명이야."
다시 발에 힘을 주어 비틀었다.
콰드득!
그의 발 아래서 뼈가 갈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났다.
"잘 가게, 늙은이!"
단리확은 비명도 지를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눌렸고, 땅과 맞댄 얼굴 한쪽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쩌저적……!
뼈가 갈라지며 한 덩이의 뇌수와 피를 땅 위에 질펀하게 쏟아놓았다.
"크하하하하!"
금황독존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좋아……아주 좋아…… 내가 이런 상황을 좋아한다는 걸 용케 알았군.…"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십여 명의 인영들이 있었다.
금황독존은 조금도 거리낌 없이 말을 계속했다.
"적당한 긴장 속에 적당히 배어있는 죽음의 냄새…… 사실 가끔씩 이런 것들이야말로 일상의 권태를 씻어주는 훌륭한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지."
말을 하면서 자신을 에워싸는 자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그의 눈길이 관자놀이에서 턱까지 길게 베인 칼자국의 사내에게서 멎었다.
마릉(磨陵)……
온몸이 살기로 똘똘 뭉쳐져 있는, 독마 순우창이 가장 아끼는 놈이다.
"우리가 좀 늦었군."
마릉은 음산한 미소를 뿜어내면서 말했다.
"하지만 늦지 않은 일도 있지…… 바로 네놈을 죽이는 것…… 좌현영과 종천로에 이어 네놈까지 이 자리에 묻음으로써
백 년을 넘게 지속해 온 현현교의 분열이 완전히 종식된다는 것……!"
금황독존은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묻어? 이거 몰랐군. 너희들 중에 내 목을 가져갈 만한 놀라운 고수가 숨어있다는 얘긴데……?"
마릉은 톱과 같이 생긴 기형도(奇形刀)를 뽑아들었다.
"아무리 강해본들 네놈 역시 피와 살로 만들어진 인간이 분명할 터!"
그것이 신호인 듯 놈들이 옆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놈들은 좌우로 몸을 흔들며 빠르게 움직였다. 오른편으로 다섯, 왼편으로 다섯, 지휘하는 자는 가운데에 선 마릉이다.
"네놈의 목을 잘라 현현교의 제단에 바치겠다."
마릉이 외쳤고, 금황독존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쓸데없이…… 말이 길었군."
푸슝!
금황독존이 가볍게 손가락을 말았다 튕기자 오른쪽 두 명의 미간에 밤알만 한 구멍이 뚫렸다.
"커억!"
놈들은 어떻게 손을 쓸 사이도 없이 구멍에서 피를 뿌리며 뒤로 넘어갔다. 그 사이로 다른 두 놈이 칼을 앞으로 치켜세우고 빠르게 덮쳐들었다.
쉐에엑!
두 개의 칼이 다가오기 전에 금황독존은 귀찮다는 듯 소맷자락을 옆으로 홱 젖혔다.
푸드득!
유성과 같은 빛줄기가 두 놈을 향해 뻗어나갔고……
츄칵!
두 놈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머리가 땅 위에 떨어져 데구르르 구르고 목에서 분수 같은 피를 뿜으며 몸통이 쳐들어가는 가속도로 인해 앞으로 몇 걸음 더 나아가다가 썩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순식간에 네 명을 처리한 것이다.
마릉은 두 눈을 부릅뜨고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쳤다.
"한꺼번에 쳐랏!"
일곱 개의 칼이 그물망처럼 빈틈없이 금황독존의 요혈(要穴)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가슴과 얼굴을 노리고 짓쳐들어오는가 하면 반대방향에서 그의 등을 찌르고 들어왔다.
금황독존은 반쯤 누운 자세에서 그대로 몸을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칼들이 허공을 베고 지나가는 순간, 그는 몸을 틀면서 두 손을 짧고 빠르게 휘둘렀다.
그를 공격했던 일곱 놈은 모두 자신의 옆구리로, 또는 목과 가슴으로 싸늘한 기운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단지 그렇게 느꼈을 뿐이었다.
쩍! 쩌억……!
한 놈의 몸이 가슴을 기준으로 아래위로 분리되었다. 다른 놈은 정수리에서 사타구니까지 일직선으로 갈라졌다. 어떤 놈은 어깨에서 옆구리까지……
모두 그렇게 간단하고 쉽게 몸이 두 조각으로 양분된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빨라 미처 공포를 느낄 사이도 없었다.
공포는 오히려 살아남은 마릉이 느꼈다.
'도……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금황독존은 등을 돌렸고, 그의 귀에는 여러 조각의 살덩어리가 투둑!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마릉을 쳐다봤다.
"이젠 너만 남았어!"
마릉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죽일 수 없다면 같이 죽음을!"
폭풍노도처럼 천지를 휩쓸 듯 가공한 기세가 구름처럼 일어나며 마릉의 기형도와 몸은 그대로 혼연일체가 되어 날카로운 한 줄기 검기로 날아갔다.
그러나 그의 칼은 공기만을 갈랐을 뿐이다.
'이럴 수가!'
흠칫 놀라는 마릉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삼좌존을 버리고 내 발등에 충성의 입맞춤을 하겠다면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네만……."
"닥쳐라, 놈!"
마릉이 다시 짓쳐 들어가는 순간, 눈 앞에서 광채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헉!"
그의 가슴에 금황독존의 일장이 틀어박혔다.
마릉의 신형은 마치 바람에 날아가는 가랑잎처럼 풀풀 날아가 십여 장 뒤의 아름드리 거목을 부러뜨렸다.
금황독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릉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이상하단 말야. 권주가 꿀처럼 달고 벌주가 독약처럼 쓰다는 건 코흘리개도 아는 얘긴데…… 왜 너희들은 그걸 모를까?"
마릉은 억지로 비틀비틀 일어서긴 했지만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지독한 충격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니 가슴팍에는 붉은 장인(掌印)이 아로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선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혀……혈음신장……?"
마릉은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전대 교주 좌엽선의 혈음신장을 다시 보게 되다니……
금황독존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십성(十成) 중 일성(一成)을 못 채운 혈음신장이지. 조만간에 나머지 하나를 더 채워 완벽한 혈음신장이 만들어지면…… 그 날이 곧 좌숙야와 순우창의 제삿날이 될 테고……."
마릉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삼좌존은 이미 신과 같은 분들이시거늘…… 네놈 따위가 감히……."
금황독존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맞아, 그들은 확실히 강해. 백 년 전에도 무적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
일순 그의 미소가 섬뜩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와 마주치지 않았을 때의 고리타분한 전설일 뿐이야."
금황독존은 오른손을 척 치켜들었다.
"이제 남은 두 놈도 내 눈에 띄면 예외 없이 이렇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그가 살짝 손을 흔들었고, 마릉은 자신의 눈앞으로 그의 손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손은 엄청나게 커졌다.
'허억! 모……몸을 움직일 수 없어…….'
그 손은 마릉이 움직일 수 있는 행동반경을 완전히 제압했다.
촤!
그의 왼팔이 마치 두부살이 뭉개지듯 흔적도 없이 소멸되었고 피는 그 다음에 콸콸 뿜어져 나왔다.
금황독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두 늙은이에게 전해. 그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내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말이야."
마릉은 흔적도 남지 않은 왼팔을 내려다보며 전율을 일으켰다.
"악……마……! 네놈은 이미…… 인간이…… 아니로구나.……"
(3)
소림사……
석비룡이 있던 어두침침한 석실 안에서 설혜는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볕이 잘 드는 방을 권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울고불고 하는 데야……
설혜는 자몽원에서부터 안고 있던 아이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에게 끊임없이 뭐라고 중얼거리며 얘기를 했고, 때를 맞춰 가슴을 풀어 젖도 먹였다.
석비룡은 그 모습을 보면서 치미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어쩜 착하기도 하지……."
설혜는 아기인형을 살포시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백약(百藥)이 무효(無效)였다.
십 년 전 겁탈을 당할 때의 충격이 가시기 전에는 제 정신이 돌아올 수 없었다.
석비룡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아! 설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어디서부터……
모든 일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인 매듭을 찾을 수 없었다.
훅! 후욱!
가슴 속에서 들끓는 분노를 삭이느라 이를 악물고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끼이익!
석실 문이 열리고 희미한 빛이 안으로 비쳐 들어왔다.
"석 공자! 그를 발견했네."
홍우선사의 목소리였다.
석비룡은 고개를 돌렸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가 찾는 사람…… 무극탑신 설고웅……."
반가움에 석비룡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지금 설고웅을 찾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방금 개방에서 연락이 왔네."
고개를 끄덕였지만 홍우선사의 안색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석비룡은 그것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하고 다급하게 물었다.
"그곳이 어딥니까?"
"호남성(湖南成) 단서평원(端緖平原)에서 북쪽으로 이동 중이라고 하더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요. 제가 가서 그 녀석을 데려오겠습니다."
홍우선사가 석비룡의 팔을 붙잡았다.
"쉽지 않을 걸세. 개방의 제자들이 그를 데려오려다 크게 다쳤다고 하네."
"예?"
생뚱한 표정을 짓는 석비룡에게 홍우선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오십 년 전 홀연히 실종된 불문삼성(佛門三聖) 세 분의 무학을 한 몸에 지닌 위인일세. 소림의 대장로였던 천률선사의 미증유한 내공과 불조암(佛祖庵)의 주지스님이었던 가엽존자께서 불문육대신공을 하나로 집대성한 사라신공(紗羅神功)……
그것도 모자라서 거기다 검의 최고봉에 올랐던 천검법왕(天劍法王)의 만겁천검(萬劫天劍)까지 익히고 있는 불가사의한 위인을 무슨 재주로 데려오겠다는 건가?"
석비룡은 뜻하지 않은 말에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그 녀석이 말한 세 명의 사부가 바로 불문삼성이었단 말인가?'
홍우선사는 더욱 무거운 탄식을 토하며 다음 말을 이었다.
"거기까지도 좋다고 치세. 사라신공이 극성에 도달할 때 나타나는 천공대흡력(天空大吸力)까지 연성하였으니…… 자네의 능력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휴우! 웬만해야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천공대흡력……? 모든 힘을 체내로 흡수한다는 뜻입니까?"
홍우선사도 자세히 설명을 하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예전에 가엽존자의 하시던 말씀을 얼핏 들은 적이 있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접신(接神)의 경지로 들어선다는 사라신공 최후의 단계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흡수하여 체내에 축적시키는 윈리를 근간으로 하며 그 단계가 끝나면 불멸불사의 능력을 가진다고 들었네. 가히 달마조사(達磨祖師)의 신위에 비해서도 과히 뒤지지 않을 것이라고……."
석비룡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렇다고 놈을 찾았는데 이곳에 앉아있을 수만은 없잖습니까. 방장님께서 설혜를 잘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석비룡은 그 말을 끝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행여 그를 만나더라도 필히 몸조심하게!"
홍우선사가 소리치며 석문 밖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석비룡은 보이지 않았다.
* * *
설고웅의 움직임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발각되었다.
우선 그의 외모부터가 특이했다.
구척도 더 되는 키에 어른이 양팔을 벌려도 닿지 않을 것 같이 넓은 가슴,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엄청나게 큰 머리였다. 바위 하나가 그대로 목 위에 달려 움직이는 것 같은……
장님이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이 흔들리며 쿵쿵! 소리가 나기 때문이다.
더구나 길 위에는 그의 커다란 발자국 모양이 진흙 위라도 걸어간 듯 푹푹 아로새겨져 있었다.
결론적으로 단서평원이 비록 넓기는 했지만 석비룡이 그를 찾아내는 데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설고웅의 뒤를 미행했다.
마을입구에 쿵쿵! 발소리도 요란하게 들어섰으나 마을사람들은 벌써 그가 온다는 것을 알고 모두 집을 비운 다음이었다.
석비룡은 개방의 거지들에게서 들은 얘기가 실감났다.
'지난 몇 달 간 단서평원 일대를 헤집고 다닌 그의 존재에 관해 인근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옥야차(地獄野次)가 현세에 나타난 것으로 믿고 있을 정도예요.'
설고웅은 전염병이 돌고 간 뒤처럼 텅빈 마을 한복판에 장승처럼 우뚝 선 채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그의 눈이 반짝였다.
음머어……!
외양간에 묶인 황소 한 마리가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퍽!
그의 발길질 한 번에 돌담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설고웅은 주저하지 않고 황소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집채만 한 크기의 황소도 설공웅의 앞에 서자 비루먹은 망아지쯤으로 보였다.
위기를 느낀 걸까?
황소는 도살장이라도 끌려가는 듯 지레 겁을 먹고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양간 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설고웅이 꼬리를 잡고 휙 당기자 황소는 마치 조그만 강아지처럼 맥없이 쑥 끌려나왔다.
음머…… 음머어……
황소는 살려달라는 듯 큰 눈망울을 애잔하게 떨며 울어댔다.
설고웅이 양손을 쭉 뻗어 황소의 뿔을 콱 움켜잡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그의 허리를 툭툭 쳤다.
설고웅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마치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어떤 놈이냐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그의 등 뒤에 선 사람은 석비룡이었다.
"대두아(大頭兒)! 이 형님이다. 못 본 사이에 머리도 몰라보게 커졌지만 식욕은 더욱 왕성해졌구나!"
석비룡은 환하게 웃으며 설고웅을 안고 등을 툭툭 두드렸다. 그래봐야 거목에 붙은 매미 정도나 될까, 설고웅의 다리를 안고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설고웅은 깜짝 놀란 듯 펄쩍 뛰어 일 장쯤 뒤로 물러섰다.
"야! 너 왜 그래? 설마 이 형님을 몰라보는 건 아니겠지?"
석비룡은 짐짓 화가 난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재롱을 부리길 바란 것은 아니지만, 멀찌감치 물러서다니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말이다.
잠시 생각을 하는 사이에 설고웅은 갑자기 홱 돌아서더니 쿵쿵 뛰기 시작했다.
쾅! 콰쾅!
웬만한 것은 그의 몸이 닿기도 전에 거칠 것 없이 박살났다.
커다란 전각이며 기둥이며 비석이며 할 것 없이 그대로 그의 발아래 짓밟혔다.
석비룡은 즉시 설고웅의 뒤를 쫓았다.
"야 임마! 너 대체 왜 그래? 자꾸 미친 척할 거야!"
하지만 설고웅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설혜의 일만 해도 골치가 지끈지끈 아픈 판에 의형제라고 하나 있는 놈이 이렇게 속을 썩이다니…….'
속을 끓이는 참에 설고웅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녀가…… 가까이 있어…… 선녀가……."
"뭐라구?"
석비룡은 그의 옆에 바싹 따라붙으며 다시 물었다.
설고웅의 눈빛은 흰 광채로 번뜩였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연신 중얼거렸다.
"선녀가……날 부르고 있어……선녀가 위험해…… 도와줘야 해……."
석비룡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 쓴 듯 우뚝 서버리고 말았다. .
'저런 눈빛은 뇌파극이 쥐나 까마귀를 부를 때 보여주곤 했는데…… 꼬락서니를 보건데 저 놈도 어떤 영적인 힘과 연결된 것 같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는 아직도 선녀를 못 잊고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점이다.
"선녀에게 가야해…… 선녀가 도와달라고 말하고 있어……"
멀리 사라지는 설고웅을 쳐다보며 석비룡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녀석 순정은 남아 있어서……."
그리곤 빙긋 웃으며 선심이라도 쓰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사랑하는 아우가 가는 곳이니 어찌 지옥인들 마다하리?"
설고웅의 느린 걸음이라면 조금도 급할 게 없다는 듯 휘적휘적 팔자걸음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