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활검사도(活劍死刀)
1
장경각에서 두문불출하는 적무강. 애틋한 감정을 확인한 이후에도
그들 사이에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자신들의 마음을 확인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안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강해진다는 것.
이미 적무강은 마음을 굳힌 상태다. 서문아는 그런 적무강을 말리
려 했지만 그의 마음이 요지부동임을 깨달은 이후 생각을 달리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그의 뒤를 받쳐 주려는 것이다.
남자가 가려는 깅레 방해물 따위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
해서는 우선 자신도 강해져야 했다. 때문에 적무강이 장경각에서 달
마삼검과 씨름하고 있는 동안 그녀 역시 수련에만 열중했다.
강해지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그들을 보며 남궁성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말 똑같은 사람끼리 만났군. 형님도 그렇지만 형수님마저 저리
무공광이라니."
환골탈태를 한 이후로 미모를 가렸던 자잘한 흉터가 사라지면서 백
옥같은 피부를 가지게 된 서문아였다. 덕분에 거처를 지키는 무승들
이나 사미승들로부터 선녀가 하강했다는 소리마저 듣고 있었다. 비록
뺨에는 희미하게 자상이 남아 있었지만 더 이상 그녀의 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가 결코 무림삼미(武林三美)에 뒤
지지 않는 미모를 가졌다고 칭송했다.
그런 서문아가 무공에 열중하자 그녀를 지켜보던 무승들은 물론 남
궁성마저 자극을 받았다.
도저히 여인이 펼친다고 볼 수 없는 강맹한 창술, 낭창낭창 휘어지
는 창끝에 실린 파괴력은 대단했다.
원래 봉술의 원조는 소림이라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날을 제거한 봉을 무승들의 무기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천 년 이상을 갈고닦아 온 봉술은 강호의 여타 절기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때문에 서문아는 무승들에게 비무를 요청해 창술을 겨뤘다.
일취월장이라는 말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말이었다. 환골탈태 이
후 겉모습만 변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공 역시 무섭게 증진돼 있었
다. 덕분에 예전에는 내공이 딸려 펼치지 못했던 초식까지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남궁성도 서문아와 비무를 했다가 혼쭐이 난 기억이 있었다. 비록
절기를 펼치지 않았지만 서문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본
다면 실전에서 맞붙는다면 그 누구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다.
지금도 서문아는 남궁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십팔나한 중 한 명인
백인과 비무를 하고 있었다.
타타타타!
창과 봉이 부딪치며 대나무 터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옷
자락을 날리며 표표히 움직이는 서문아의 모습과 강맹한 백인의 모
습은 여러모로 비교가 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은
왠지 잘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남궁성은 바위에 누워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며 누룽지를 씹
었다. 주방장에게 갖은 애교를 떤 덕에 얻어 낸 그의 간식이었다.
"흐흠~! 맛있네. 눈도 즐겁고. 그나저나 저 아가씨는 언제까지 저
렇게 훔쳐볼 건지."
남궁성의 눈이 향한 곳, 담 위에 드리워진 아름드리 나무 위에 조
그만 인영이 앉아 있었다.
마치 고양이 같은 눈으로 서문아와 백인의 비무를 훔쳐보는 여인
이었다. 그녀는 묘한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조용히 사라졌다.
적무강과 서문아, 그리고 남궁성은 은밀히 산문을 나섰다. 그렇다
고 해서 소림을 떠나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소림에만 있
다 보니 갑갑하기도 했고 필요한 물건도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여
인인 서문아는 따로 필요한 물건이 많았다. 소림에서는 구할 수 없는
노릇이기에 오랜만에 바람도 쐴 겸해서 등봉현으로 나들이를 나선 것
이다.
그들은 대로가 아닌 오솔길을 택해 내려왔다. 불사로 인해 많은 사
람들이 소림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이 일반 백성일 테지
만 그래도 십자성의 밀정들이 섞여 있지 않으리란 법은 없기 때문이
다. 그래도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적무강이 머리를 헝클면 알아
볼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문아 역시 환골
탈태를 함으로써 예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미모를 뿜어낸다는 것
이다. 때문에 그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없었다.
오솔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때문에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 아니면
타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반 백성들은 이 길의 존재를 알아도
탈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들은 한적하게 산을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런데 형수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형님은 무엇 때문에 산을 내
려가시는 겁니까?"
남궁성은 서문아에게 거침없이 형수라고 부르고 있었다. 서문아의
얼굴이 발개지면서 그러지 말라고 말렸으나 남궁성은 개의치 않고
그녀를 형수라고 불렀다. 서문아가 적무강을 바라보며 구원의 눈빛을
보냈으나 그 역시 희미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결국 서문아는 남
궁성의 짓궂은 호칭을 고개를 저으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적무강은 잠시 서문아를 바라보다 말했다.
"도를 하나 마련하려고 한다."
"에? 형님에겐 생사도가 있잖아요. 그런데 무슨 도가 또 필요합니
까?"
"이 녀석은 너무 살기가 짙어 절에서 사용하기에는 어울리지 않
아. 그리고 앞으로 강호에 나갔을 때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하게 새
로운 도가 필요해."
남궁성의 눈빛이 신중해졌다.
"형님, 무슨 생각이십니까?"
"때가 되면 알게 될 거야."
"형님?"
남궁성의 얼굴에 떠오른 의혹이 더욱 짙어졌다. 적무강은 결코 아
무런 생각 없이 행동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철저한 계산과 함께
자신의 역량을 가늠한 후 움직였다. 그렇기에 이제까지 일련의 사건
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남궁성은 이번에
도 적무강이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문아 역시 적무강을 바라보며 침중한 눈빛을 했다.
소림에서의 일이 해결되면 적무강은 다시 강호로 나갈 것이다. 그
리고 다시 피의 길을 걸을 것이다. 지금의 휴식은 단지 준비하기 위
한 시간일 뿐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
만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일단 저 고집스러운 남자가 한 번 마음을
먹은 이상 그 누구도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상념, 그러나 당사자인 적무강은 여전히 편안한 얼굴이
었다. 지금은 휴식을 위한 시기, 그리고 준비하기 위한 시기. 그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금 담소를 나누며 가파른 길을 내려갔다. 그때 오솔길
을 올라오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였다.
남청색의 도복에 남화건을 쓴 세 명의 사람들. 그리고 소매에 그
려진 구름 문양과 학 문양.
'무당파의 제자들!'
남궁성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소매에 구름과 학 문양을 새겨 넣고
다니는 도사들은 무당의 제자들밖에 없었다. 구름 속에 노니는 학처
럼 고아한 도인들, 그것이 세인들이 평가하는 무당이었다.
그들은 곁눈으로 적무강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전혀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겉모습만으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좁은 오속릭에서 한쪽으로 피하며 서로를 지나쳐 갔다.
순간 적무강과 중년 도사의 눈길이 마주쳤다. 강인한 턱 선과 짙
은 눈썹, 그리고 사자코를 지닌 중년의 도사. 그의 눈빛은 마치 호랑
이 같아서 보는 이의 심령을 절로 제압할 정도였다. 그러나 적무강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의 눈길을 받아 냈다. 순간 중년 도사의 눈에 이
채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들은 묵묵히 서로를 지나치며
자신의 길을 갔다.
적무강과 일행의 모습이 사라지자 도사들 중 잘 벼려진 검과 같은
기도를 풍기는 청년이 입을 열었다.
"범상치 않은 일행이군요. 그중 왼쪽에 있던 남자는 남궁가의 자
제 같더군요.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여인 또한 범상치 않았습니다.
저 정도의 미모에 기도라면 이미 강호에 이름이 알려졌을 텐데 누구
인지 모르겠군요."
"소림에 들어가면 물어봐야겠군요. 아무래도 소림의 객인 듯한데."
제자들의 말에 중년 도사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그러나 이내 그
는 몸을 돌려 오솔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고요한 듯 보였지만 실상은 패기로 뭉쳐 있
는...... 누구인가? 젊은 나이에 저런 눈빛을 가질 수 있는 남자
가......'
비록 머리를 헝클어트려 진면목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는 적무
강의 안광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무당 제일의 고수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무당의 장문인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무림의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진무각주인 청송
진인을 택할 것이다.
무당의 수많은 절기 중 오직 하나 유운검(流雲劍)만을 익힌 도인.
태극검(太極劍), 대라검(大羅劍), 대환검(大幻劍), 매화검(梅花劍)
등 상위 검법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오직 유운검 하나만을 익혀 최고의
경지에 이른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의 사형과 사제들이 태극검, 매
화검 등에 매달릴 때도 그는 오직 유운검 하나만을 익혔다. 그리고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었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절대 끊이지 않고 한 번 펼쳐지면 무당산의 구
름마저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전설의 검호가 바로 중년 도
사였다.
청송진인과 함께 이곳에 온 젊은 도사들은 바로 청송진인의 제자
인 고운과 고엽으로 고운이 사형이었다. 고운은 청송진인의 뒤를 이
을 것이 확실시되는 인재로 한 자루의 검이라는 칭송을 받는 무당 제
일의 기재였다. 고엽 역시 그보다 뒤지긴 하지만 기재로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다.
무당에서는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해 청송진인을 책임자로 내보냈
고, 청송진인은 다른 무당의 제자들은 눈가림용으로 대로를 통해 들
어오도록 하고 자신과 직계제자들은 오솔길을 택해 올라왔다. 그러
던 중 적무강과 일행을 보게 된 것이다.
그의 제자들은 서문아의 미모와 남궁성의 기품에 가려진 적무강의
존재를 간과했지만 청송진인은 적무강의 본질을 어느 정도 궤뚫어 보
았다. 그러나 그는 굳이 그런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이들도 그런 안목을 키우게 될 터. 그나저나 그의 사
문이 어디인지 궁금하군.'
소림에 머물고 있다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청송진인은 그리
생각하며 소실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적무강은 산을 내려오면서 방금 전에 만났던 도인에 대해 생각했
다.
'도인답지 않은 강맹한 기도, 그에 걸맞은 자신감과 실력. 왜 무당
을 그리 추어올려 주는지 알겠군.'
적무강은 나지이 중얼거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봉현에 들어서자 북적거리는 인파가 그들을 반겼다.
"와우~! 이거 정말 대단한데요. 성도도 아닌데 이리도 사람이 많
다니."
"소림이라는 이름의 힘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군요."
남궁성의 말에 서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남궁성 역시 진중한 표
정으로 수긍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표정을 바꿨다.
"우선 뭣 좀 먹고 일을 봅시다. 이제가지 풀만 먹었더니 신물이
넘어오려고 합니다."
소림에 들어온 이후 이제까지 육류라고는 하나 섞이지 않은 산사
의 음식만 먹었기에 남궁성은 무척이나 초췌한 상태였다. 본인 말로
는 아사 직전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가 속세의 음식에 얼마나 굶주렸
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자."
"에? 형님이 이곳에 아는 곳이 있어요?"
"후후!"
"거참! 또 숨기는 겁니까? 하여간 비밀투성이라니까!"
남궁성은 투덜대면서 적무강의 뒤를 따랐다. 서문아가 '풋'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뒤따랐다.
적무강이 일행을 안내한 곳은 에전에 한 번 온 적이 있는 고죽루
였다. 그러나 남궁성과 서문아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마침 식사 시간
이 지난 지라 주루 안은 한산했다. 적무강과 일행은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적무강이 자리에 앉자 곽부종이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는 별다른
표를 내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대신 어린 점소이가 다가와
주문을 받았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점심으로 먹을 만한 것 좀 몇 가지 갖다 주도록."
"아~! 난 돼지고기 볶음과 고기만두 좀 줘. 그리고 오리 구이도
한 마리 주고."
"알겠습니다."
적무강의 말에 남궁성이 급히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말했다. 그
러자 적무강과 서문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긴 한 달 이상을
절에서 지낸다면 누구라도 저렇게 변할 것이다.
그때 곽부종의 전음이 적무강의 귓가에 들려왔다.
<무슨 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이곳의 상황을 알고 싶은데......>
적무강은 표를 내지 않고 차분하게 전음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곽
부종 역시 계산대에 앉아서 장부를 정리하는 척하며 전음을 보냈다.
<하하! 역시 철두철미하군요. 뭐, 특별히 숨길 것도 아니니 말씀드
리지요. 현재 이곳에는 십자성에서 보낸 것으로 보이는 간자들과 정
체를 알 수 없는 또 다른 부류의 간자들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아무
래도 상황으로 보건대 그쪽은 천왕성의 간자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그들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겠소?>
<잠시 후에 저희들이 조사한 명단을 넘겨 드리지요.>
<고맙소!>
<하하! 별말씀을. 다 돈 받고 하는 일인데......>
곽부종이 장부를 덮고 일어났다. 그리고 주방 안쪽을 향해 소리쳤
다.
"야, 이놈들아! 손님들 배고파 돌아가시겠다. 빨리 음식을 내오너
라!"
적무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는 물이 든 잔을 들며 다시 전
음을 펼쳤다.
<참, 만형통은 어찌 되었소?>
<그놈도 무사히 호북성을 빠져나갔지요. 나중에 사천에 가시면 한
번 찾아보십시오.>
<사천?>
현재 십자성과 천왕성이 부딪치는 곳이 바로 사천이었다. 때문에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곳도 사천성이었다. 그런 곳에 만형통이 갔다
니 뜻밖이었다.
<정보 상인에게 있어 가장 호기는 전쟁이 일어나는 때입니다. 그리
고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야말로 도약하기에 최적의 장소입니다. 아마
도 지금쯤 이리 준비해 둔 새로운 신분으로 사천성에서 일을 벌이고
있을 겁니다.>
<그의 신분은?>
<그는 지금......>
곽부종의 설명이 길게 이어졌다. 적무강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러자 곽부종이 말했다.
<꽤 오래전부터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신분입니다.>
<알겠소.>
그렇게 그들의 은밀한 대화는 끝을 맺었다.
잠시 후 적무강의 탁자 위로 음식이 나왔다. 점소이가 쟁반을 받
쳐 들고 음식을 내려놓았다.
"와아~! 고기다, 고기!"
오리 구이와 돼지고기 볶음 향기에 남궁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
고 허겁지겁 젓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점소이의 팔이 적무강의 가슴을 은밀히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적무강은 짐짓 모른 체하며 젓가락을 들었다.
"그럼 맛있게 드십시오."
점소이가 인사를 한 후 물러갔다.
남궁성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입에 쓸어 담으며 말했다.
"이거, 정말 맛있네요. 향기도 끝내 주고. 정말 살 것 같다. 정보
상인입니까?"
"눈치 챘느냐?"
"이 집, 보기보다 좋은데요. 제대로 요리할 줄 알아요. 조금 전에
형님이 아무 말 없을 때요."
괜히 그가 남궁세가 제일의 기재로 불리는 게 아니다. 그는 적무강
이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의심을 했고, 한동안 말을 하지 않던 적무
강의 태도에서 확신을 가졌다.
남궁성은 음식을 삼키며 알아듣기 힘들게 말을 섞었지만 서문아는
그의 말뜻을 헤아리고 뜻밖이라는 눈빛을 했다. 설마 이토록 허름한
주루가 정보 상인이 있는 곳일 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
나 그녀는 표를 내지 않고 차분히 젓가락을 놀렸다.
적무강은 음식을 먹으며 전음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이에 두 사람
도 내색하지 않고 음식을 먹으며 경청했다.
2
식사를 마친 후 그들은 만등가로 향했다.
우선 서문아가 입을 만한 옷과 그녀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샀다. 그
런 후에 그들이 향한 곳은 만등가의 철방이었다.
"이곳엔 뭣 때문에 온 겁니까?"
남궁성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사실 적무강의 과거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일 것이다.
적무강은 간단히 대답했다.
"도를 하나 만들려고. 그리고 몇 가지 더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그런데 여기서 필요한 것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봐도 별
로 신통치 않아 보이는데요."
남궁성의 말에 서문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죽었다 깨도 모를 것이다. 적무강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훌
륭한 장인 중 한 명이었고, 그가 원하는 것은 만들어진 도나 물건이
아니라 질 좋은 쇳덩이뿐이라는 것을.
서문아의 생각대로 적무강은 진열된 무기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
다. 대신 그는 철방 안으로 들어가 장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살펴보았
다.
깡깡깡!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후끈한 열기. 무척이나 그리운 느낌이었다.
생각해 보면 적무강이 제일 행복했었던 때는 쇠를 두드릴 때였다. 그
저 한 덩이의 쇠에 지나지 않던 광물을 자신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
들고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만큼 행복한 일도 없었다. 그에게 있어 마
음의 고향이란 어쩌면 쇠가 타는 냄새가 나는 철방일지도 몰랐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무기라면 밖에 있는데......"
"무기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을 구하시려 합니까? 보다시피 저희는 그저 시골의 허
름한 철방에 지나지 않아 대단한 물건들은 없습니다. 밖에 있는 도와
검도 그저 구색을 맞추기 위해 놔둔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양질의 쇳덩이입니다."
"쇠를요?"
늙은 장인이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적무강을 바라봤다. 그러자
적무강이 웃으며 말했다.
"저도 얼마 전까지 장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쇠를 조금 다룰 줄 압
니다."
"아~! 그렇습니까?"
그제야 늙은 장인의 얼굴이 펴졌다. 무식한 무인들일 줄만 알았는
데 쇠를 다룰 줄 아는 장인이라니 반가운 것이다. 늙은 장인의 웃음
에 적무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어떤 재료를 씁니까?"
"시골에 좋은 재료야 있겠습니까? 그저 쇠라도 좋은 것 쓰겠다는
생각으로 신철(薪鐵)을 쓰고 있습니다. 정철(精鐵)을 쓰면 좋겠지만
이런 시골에서 정철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고 해서 일부러 정련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신철 한 근을 정련하면 정철 너 냥이 만들어진다. 쉽게 말하면 신
철의 정화를 추출한 것이 정철이라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정철을
추출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고되고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일이라서 일
반 철방에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때문에 정철을 가지고 있
는 철방은 무척 드물었다.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신철 좀 구할 수 있겠습니까?"
"돈만 준다면야 얼마든지 드릴 수 있지요."
"그럼 신철 백 근만 부탁드립니다."
"아이쿠! 그렇게나 많이요?"
"그것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적무강의 미소를 본 늙은 장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마침 얼마 전에 들어온 좋은 신철이 있으니 그것을
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화로는 있습니까? 물건을 만들자면 화로가
필요할 텐데."
"물론입니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가지고 나올 테니까."
늙은 장인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남궁성이 다가와 말했다.
"아니, 형님! 화로가 어디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소림에도 사람을 따로 두어 계도나 선장 등을 만드는 조그만 철
방이 존재한다. 단지 그 규모가 작고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 알지 못
할 뿐이다."
"그래요?"
"네가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누구도 철방의 존재에 대해서는 심
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나 역시 철방에서 일을 하지 않았다면 그
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적무강의 말에 남궁성이 수긍했다. 사실이 그렇다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늙은 장인이 젊은 장정 두 명과 같이 나왔다. 젊은 장정들
은 서로를 마주 보고 낑낑대며 나무상자를 들고 나왔다.
쿵!
나무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에 들은 게 모두 신철입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어디십니까? 이
것을 갖가려면 힘이 꽤 들 텐데요. 정 가져가기 힘들면 마차라도 불
러 드리겠습니다."
"됐습니다. 가져가는 것은 제가 알아서 할 겁니다. 값은 얼마나 쳐
드리면 되겠습니까?"
"값이라고 해 봐야 그저 쇳덩이일 뿐인데요. 그냥 재료값이나 주십
시오. 은 두 냥이면 되겠습니다."
"하하~! 남는 게 너무 없지 않습니까? 은 서냥을 드리겠습니다. 이
익을 남겨야 철방도 운영하실 게 아니겠습니까? 이것 받으시고 혹여
다음에 제가 또 오게 된다면 좋은 철 좀 주십시오."
"아이쿠! 이렇게나 많이......"
늙은 장인이 황송해 했다.
사실 무인들에게 무기도 아닌 쇳덩이를 판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걸려 많이 부르지 못했는데 알아서 더 값을 치러 주니 황송한 것이
었다.
적무강은 미소를 지으며 나무상자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메고 밖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적무강 일행은 다시 소림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내려갈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오솔길로 올라왔다.
거처에 돌아오니 그들이 나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조요하던 곳에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남궁성이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 우리가 보았던 무당파의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우
리 거처의 옆 건물을 무당파에게 내준 것 같습니다."
"음!"
"하지만 건물이 독립돼 있기 때문에 주의만 하면 지내는 데는 별
무리가 없을 겁니다."
"알았다. 우리는 무당파와 별 상관없이 시간을 보낼 것이다. 그러
니 혹여 문제가 생긴다면 네가 알아서 처리해."
"알겠습니다.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남궁성이 자신의 가슴을 쾅쾅 치며 호언장담했다. 적무강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너희 가문에서 다른 사람은 오지 않느냐?"
"원래는 아버지가 오시려 했는데 다른 일이 생겼답니다. 때문에
저한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전서를 보내오셨습니다. 뭐, 그런 이유로
남궁세가에서는 저 혼자입니다. 젠장! 그래도 누가 뒤를 받쳐 줘야
체면이 사는데 혼자서 뭘 하라는 것인지....... 쩝!"
남궁성이 입맛을 다셨다.
다른 문파들은 모두 제자들을 대동하고 장로급 이상의 인물들이
오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세가에서는 딸랑 남궁성 혼자였다. 그러니
남궁성이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그러나 남궁성의 엄살이 말 그대로 엄살임을 아는 적무강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구파의 회합이 언제지?"
"뭐, 불사에 맞춰 가지게 되니 아무래도 모레쯤이 아닐까 생각합
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불사에 모아질 때 모처에서 은밀히 회합을
하겠죠."
"그럼 이틀의 시간이 있군. 알았다. 이제부터 나는 소림의 철방에
있겠다. 특별한 일이 있으면 그곳으로 오라구."
"알겠습니다. 그러죠. 참!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습니다."
"뭔데?"
"무공 말입니다, 형수님 말로는 소림의 장경각에서 무공을 익히신
다고 하던데 진전은 있으신 겁니까?"
"후후!"
적무강은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남궁성의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또, 또, 저 웃음! 하여간 자신에 대한 것은 하나도 대답하지 않으
려 한다니까."
"미안하다. 하지만 아직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처지라서 말이야."
"쳇! 하여간 음흉한 것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남궁성은 머리를 박박 긁으며 투덜거렸다. 그에 서문아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이 적무강을 향했다. 그러자 적무강이 어색한 웃음을 지
으며 말했다.
"앞으로 피곤해질 테니 좀 쉬어요. 난 철방에 갈게요."
"알았어요."
적무강이 쇠가 든 상자를 어깨에 걸머지고 자리를 떴다.
서문아는 한참 동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거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히 실마리를 찾았을 거야.'
그녀는 적무강이 달마삼검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냈다고 생각
했다. 어쩌면 그것은 맹목적인 믿음인지도 몰랐다.
소림승과 적무강은 태생부터가 달랐다.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소림
승과 파괴와 살육의 무공을 익힌 적무강. 어쩌며 그들은 달마삼검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림승들이 놓친
그 어떤 부분을 적무강은 발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본인이 말
을 하지 않으니 그의 성취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서문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남궁성이 그녀의 뒤를 따르며 외쳤다.
"어라? 형수님은 무언가 아는 것 같은데 혼자만 알지 말고 좀 말
해 줘요. 도대체 형님 어떻게 된 겁니까? 옛날보다 더 강해진 건가
요?"
"나도 몰라요. 그 사람은 나에게도 그런 사실은 말하지 않으니까
요."
"에이, 설마요!"
"후후!"
"엑! 웃음마저 형님을 닮아 가는 겁니까?"
남궁성의 목소리만이 공터에 울려 퍼졌다.
장생원은 일선에서 은퇴한 장로들이 모여 참선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소림 방장과 같은 원자배라 할지라도 특별한 직책이
없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은퇴한 장로들이 모여 있는 장생원이야말로 소림 최후의 보루였
다. 이곳에는 특별히 경계를 서는 무승도, 진법도 펼쳐져 있지 않
다. 그래도 이곳에는 그 누구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마당을 쓸거나 불상을 닥으며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노승들이
실상은 절정의 고수들이었다. 만약 소림에 특별한 일들이 생긴다면
그들이 나설 것이다.
지금 장생원에서는 소림과 무당의 은밀한 회합이 이루어지고 있었
다. 다른 장소도 많았지만 이곳이야말로 소림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
였기 때문이다.
원광대사가 청송진인을 맞았다.
"아미타불!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청송진인."
"무량수불! 한 십 년 만인 것 같습니다. 그간 평안하셨는지요?"
두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비록 거리가 멀어 왕래가 잦지는 않았지만 소림과 무당의 사이는
매우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십 년 전에 이미 만난 기억이
있었다.
청송진인이 자신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며 말했
다.
"이 아이들은 저의 제자인 고운과 고엽이라고 합니다. 아직 부족
함이 많은 아이들입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립니다."
"허허~! 정말 대단한 기재들을 제자로 두셨군요. 무당의 앞날이
밝습니다."
원광대사가 고운과 고엽을 보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무당의 제자 고운이라 합니다. 소림의 방장님을 뵙습니다."
고운과 고엽이 포권을 취했다.
원광대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등 뒤에 있는 사람들을 소개
했다.
"아미타불! 이 아이는 저의 제자인 백선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있는 아이는 무비라고 합니다."
"오! 그럼 이분이 차기 소림의 방장으로 지명되었다는 백선 스님
이시구려. 그리고 이분이 수대 만에 탄생했다는 철혈나한이구려. 반
갑소!"
원광대사의 등 뒤에 조용히 서 있던 백선과 무비가 인사를 했다.
"무당 제일의 고수이신 청송진인께 인사를 드립니다. 불초 말학
백선이라고 합니다."
"아미타불! 무비라고 합니다."
"어허! 반갑소. 내 소문은 많이 들었다오."
청송진인이 흐뭇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어른들의 인사가 끝나자 제자들끼리 인사를 했다. 앞으로
소림과 무당을 이끌어 갈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미리 안면을 터놓고
친하게 지내는 것이 앞날을 위해서라도 좋았다.
"자리에 앉으시지요. 차가 식겠습니다."
"하하하! 그러지요."
원광대사와 청송진인이 자리에 앉고서야 제자들도 정해진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래, 오시는 길이 불편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소이다."
"무량수불! 저희가 불편할 게 무에 있겠습니까? 단지 천하의 인심
이 피폐해진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더군요."
"아미타불!"
"사천성에서 십자성과 천왕성이 격돌하는 바람에 인근 성에까지
그 여파가 미치고 있습니다. 상인들은 사재기에 들어갔고, 물건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있습니다. 관에서도 이번 일에 신경을
바짝 곧추세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때문에 백성들만 고달파지고
있습니다. 지금은 단지 인근의 성에 국한된 문제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천하 전체가 혼란에 빠질 것이 분명합니다."
일개 무림문파들이 격돌하는 여파가 천하를 흔들고 있었다. 때문에
관에서도 일련의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단지 사천성의 일개
총타에서 부딪친 것이 이 정도인데 본격적으로 그들이 부딪친다면 얼
마나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인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아미타불! 천기의 흐름도 심상치 않소이다. 이대로 두고 본다면
필경 천하에 큰일이 생길 것이오."
"저희 장문인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울러 이 말씀을 전
하라 하셨습니다. 무당은 소림의 결정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고.
더불어 이제 산문을 열어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 고마운 말씀이시구려."
십자성과 천왕성의 등장으로 입지가 좁아진 것은 소림만이 아니었
다. 무당파를 비롯한 구대문파 전체가 강호에서의 주도권을 잃었다.
때문에 그들은 이번 기회를 빌려 강호의 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했다.
그리고 잃어버린 주도권도 다시 가져오고자 했다.
"다른 문파들도 무당처럼 협력을 해 준다면 좋겠소만."
"그들 역시 상황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힘을 모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소림과 무당이 힘을 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원광대사와 청송진인은 앞으로 소림과 무당이 나아갈 방향과 당장
눈앞으로 다가온 구대문파의 회합을 어떻게 이끌어 나갈 것인지 의
논하기 시작했다
3
마침내 소림에서 불사가 열리는 아침이 밝았다.
이제까지 굳게 닫혀 있던 소림의 산문이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소
림으로 들어왔다. 무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엄격한 선발을 거쳐 소림
으로 들어왔고, 조정에서도 대신들을 보내 불사를 지켜보았다. 수십
년 만에 열리는 소림의 불사에 강호는 물론 조정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백성들은 소림의 장문인인 원광대사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지만 그
는 사람들 앞에 딱 한 번만 모습을 드러냈을 뿐, 더 이상 모습을 나
타내지 않았다. 대신 장생원에서 움직이지 않던 장로들이 대거 모습
을 드러내 불사를 진행해 나갔다.
밖에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불사가 진행되는 동안 소림의 심
처에서는 강호의 운명을 건 구대문파의 회합이 열리고 있었다. 대부
분의 제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경내에 마련된 자리에 앉
아서 불사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번에 파견된 구대문파의 핵심 인
사들은 은밀히 빠져나와 구파의 회합에 참여했다.
십팔나한과 나한전의 무승들이 철통같이 경계를 하는 가운데 구파
의 회합이 시작됐다.
소림에서는 장문인인 원광대사가 홀로 참석을 했고 무당에서는 청
송진인이 참석을 했다. 또한 곤륜에서는 무운자(舞雲子)가 자리했고,
화산파에서는 해연진인이, 공동파에서는 풍운쌍도(風雲雙刀) 관무외
가 참석을 했다. 종남파에서는 장문인 하원도의 사제인 종남삼절(終
南三絶) 만상지가 참석을 했다. 또한 점창파와 청성파, 아미파에서
도 중요 인물들이 왔다. 그들은 모두 자파의 장문인들로부터 이번 회
합에 필요한 전권을 부여받은 인물들로 그들의 결정이 곧 그들이 소
속된 문파의 결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오늘의 회합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책임자들이 대동한 각 문파의 제자들은 따로 자리를 가졌고, 이 자
리에는오직 단 아홉 명만이 자리했다.
원광대사가 구대문파의 인물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이렇게 불원천리 마다하지 않고 와 주신 것에 대해 진
심으로 감사드리외다. 모두 한집안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니 서로에 대
해 별달리 소개를 하지 않아도 모두 아실 것이라 믿소. 때문에 곧바
로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무량수불!"
"음!"
원광대사의 말에 각파의 장로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가볍게 눈인사
를 했다. 실로 오랜만에 열리는 회합인지라 그들의 얼굴에는 반가운
빛이 떠올라 있었다.
십자성이 중원 무림의 중심으로 우뚝 선 지 벌써 삼백 년. 그동안
소림을 비롯한 구대문파들은 제대로 기를 펴지 못하고 오로지 힘만
기르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제야 어느 정도 자신들의 힘에 자신을
가지고 회합을 열게 되었다.
"아미타불! 모두들 십자성과 천왕성이 격돌한 사실은 알고 계실 겁
니다. 지금 사천성에서는 그들의 싸움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습니
다. 아직 양측의 진짜 전력이 투입되지 않은 상황인데도 사천성의 민
심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이 입는 피해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
다. 아마 그 점은 사천성에 계시는 아미파와 청성파에서 더욱 잘 아
시리라 봅니다."
"그렇습니다. 현재 사천성의 곳곳에서는 살인, 방화, 약탈이 일어
나고 있습니다. 두 거대 문파의 격돌 때문에 살림이 어려워진 탓이
지요. 저희 아미파나 청성파에서도 일단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지
만 뚜렷한 대응 방안은 없는 상태입니다. 아미타불!"
대답을 한 이는 아미파의 혜심사태였다. 이에 청성파의 장로인 철
연자가 보충 설명을 했다.
"천왕성에서는 계속해서 사천에 전력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아무
래도 사천에 교두보를 마련하려는 모양입니다. 십자성 또한 사천성
을 잃게 되면 바로 코앞까지 뚫리기에 전력을 다해 그들을 막고 있
습니다. 또한 당문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현
재 아미파와 저희 청성파는 전화에서 한발 비켜나 있지만 언제까지
지금의 평화가 유지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음!"
혜심사태와 철연자의 말에 중인들이 침음성을 흘렸다.
일단 다른 문파들은 모두 전화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상황이었지
만 청성파와 아미파는 전투가 한창 벌어지고 있는 사천성에 적을 두
고 있었다. 때문에 언제 그들에게 전화의 불길이 미칠지 아무도 모르
는 상황이었다.
"아직 천왕성은 전력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십자성
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그들의 성향 또한 중
도를 표방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지만 문제는 천왕성입니
다. 천황성은 마도를 표방하기에 앞으로 어떻게 나올지 짐작할 수 없
습니다. 더구나 우리들은 그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공동파의 관무외가 우려를 토해 냈다. 사실 중원에 있는 문파들은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전장 가까이 존재하는 청성파, 아미파,
공동파, 곤륜파가 느끼는 위기감이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
다. 언제 자신들의 문파에 불똥이 미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이었다.
일단 말이 터져 나오자 다른 문파에서도 현 시국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원광대사는 그들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말의
대부분은 며칠 전 청송진인과 의견을 나누었던 부분들이었다.
한참 설왕설래가 오간 후 공동파의 관무외가 입을 열었다.
"이미 문제점은 모두 제기된 듯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의 대응 방
식에 대해 논의해 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이렇게 문제점만 이야기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
다. 이제부터 해결책을 찾아봅시다."
"그렇습니다."
한번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구파의 책임자들은 이제까지 자파에서
정리해 두었던 방안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수많은 대책이 흘
러나왔다. 십자성을 어떻게 견제하고 천왕성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현실적인 방안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명분을 놓고 격
론이 벌어졌다.
한 개의 문파만 움직여도 세상의 관심을 받는 것이 구대문파이다.
일단 그들이 움직이면 십자성과 천왕성의 견제가 들어온다. 천왕성
이야 중원에서 떨어진 청해성에 자리를 잡아 좀 덜하다 하지만 십자
성에서는 분명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십자성이 움직이면 관 역시 움
직일 것이다. 지난 삼백 년의 세월 동안 그들이 조정과 맺은 인연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추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정
과 십자성 양측이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명분이 필요했다.
구파의 책임자들은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십자성이 천하에 별다른 피해를 입힌 것이 없기에 쉽게 움직일 명분
을 찾기는 힘들었다. 십자성은 패도를 숭상하고 걸었지만 함부로 움
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화산파의 장로인 해연진인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직이 방만해지면 여러 가지로 잡음이 생기게 마련인데 십자성
은 아직까지 그런 조짐이 전혀 없습니다. 그들의 내부는 통제가 무척
잘되어 정보를 알아내기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아~!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방대한 세력을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데 반해 우리의 경우는 이렇
게 모여서 의견을 취합한 후에야 겨우 움직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아미타불!"
결국 여러 장로들도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무당
파의 청송진인이 결국 입을 열었다.
"무량수불! 한 가지 방도가 있소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그러자 청송진인이 나직하
게 도호를 외우며 말을 이었다.
"혹시 십자성의 웅풍대라고 아십니까?"
"웅풍대라면 저번에 천왕성과의 격돌 후 도마와의 충돌에 의해 몰
살당했다는 조직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이 웅풍대라는 조직이 만들어지고 해체되는 과
정이 무척 흥미롭습니다."
청송진인의 말이 이어질수록 각파의 장로들의 눈빛이 빛이 났다.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원광대사는 나직이 불호를 외웠다. 지금 청
송진인의 이야기는 미리 그와 상의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사실 소림이 이제까지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 바로 명분을 찾
아내는 것이었다. 조정과 십자성이 꼼짝할 수 없는 명분. 그리고 소
림은 그것을 적무강과 서문아에게서 찾아냈다. 이미 십자성 내부의
문건을 확보한 상태에다 웅풍대의 부대주인 서문아가 이곳에 있다.
웅풍대에 편입되면서 억울하게 죽은 명문가의 자제들도 있었고, 서
문아의 경우처럼 폐기 처리된 존재도 있었다. 원광대사와 청송진인은
바로 이 점을 문제 삼아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들이 움직인다면 억울
하게 죽은 웅풍대원의 가문도 움직일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명확한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더구나 서문아를 추적하면서 십자성에서 보인
잔혹성과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전대의 거마들이 동원된 점, 그것만
으로도 충분히 쟁점화를 삼을 수 있었다. 우내육마라는 거마들이 십
자성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난받을 만한 일인 것
이다.
청송진인은 그 점을 명확히 설명했다. 그의 설명이 끝난 후 화산
파의 해연진인이 불신의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그 웅풍대의 부대주가 있단 말이오? 그리고 우내
육마가 동원된 것이 확실하오? 우내육마가 정말 확실하다면 그 웅풍
대의 부대주가 어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이오?"
그의 말에 다른 문파의 장로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이 아는 우
내육마는 결코 웅풍대의 부대주 따위에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
런 존재였다면 지난 세월 공포의 존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 눈에 불신의 빛이 떠오를 무렵 종남삼절 만상지가 입을
열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청송진인의 말은 사실입니다. 분명 우내육마
는 죽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어찌 아신단 말이오?"
"그들이 죽은 곳이 바로 종남산이기 때문입니다. 종남파의 제자들
이 그들의 시신을 직접 확인해쏘, 그가 우내육마를 죽이는 것을 목도
했습니다. 원한다면 그 아이 중 하나를 불러 줄 수도 있소이다. 이번
불사에 같이 참여했으니까."
"음!"
만상지의 말이 끝나자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종남파의 장로가 하는 말이다. 그들이 아는 만
상지란 인물은 결코 헛소리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한순간 침묵이 장내를 지배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화산파의 해연진인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분명 웅풍대의 부대주라는 여인이 우내육마를 죽인 것
이오?"
"그들을 죽인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그가 누구란 말이오?"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청송진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자 청송진인이 곤
란한 얼굴로 원광대사를 바라봤다.
원광대사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는 강호에 도마라는 별호로 알
려져 있습니다."
"음!"
"그렇다면 얼마 전에 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도마의 여인이
바로 웅풍대의 부대주라는 말씀입니까?"
강호에 믿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남자. 여인을 등에 업고 십자성
의 천라지망을 거의 열흘 가가이 조롱한 남자. 그가 바로 도마였다.
하지만 그는 회음현의 구룡소에서 결국 생을 마감했다고 알려져 있
었따. 그런데 도마의 여인이 바로 웅풍대의 부대주라니? 이것은 전
혀 의외의 사실이었다.
"도마와 웅풍대의 부대주 모두 지금 소림에 있소이다."
"어허~! 이런 기사가.'
"하나 도마는 천하의 마두가 아닌가요? 그가 십자성의 천라지망을
돌파하면서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 자가 삼백이 넘어간다는 소문이 있
던데......"
아미파의 혜심사태가 미간을 찌푸렸다.
도마(刀魔).
단지 별호만으로도 살기가 물씬 풍긴다. 불가의 인물인 혜심사태는
단지 별호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빠졌다. 때문에 그에 대한 반
감이 절로 생겨났다.
원광대사가 말을 이었다.
"그가 천하의 마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여인을 위하여
수천 리 사선을 넘어온 것은 확실하오. 그는 천왕성의 무인들과 사투
를 벌였고, 십자성의 천라지망 역시 혼자의 힘으로 돌파했소. 그리고
자신의 여인을 이곳 소림으로 데려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내육마도
그의 손에 쓰러졌습니다."
"무량수불!"
"음!"
"그와 웅풍대의 부대주가 명분을 만들어 줄 것이외다. 그러니 우
리는 그들이 만들어 준 명분을 헛되이 하지 않게 힘을 모아야 합니
다."
"과연 그들이 우리를 위해 명분을 만들어 줄까요?"
화산의 해연진인이 원광대사를 바라봤다.
"그의 입으로 약속했소이다. 그는 자신이 한 말을 결코 번복하지
않는 사람이오."
"그를 믿을 수 있습니까? 혹여 그가 십자성의 간자라면? 그래서 이
모든 게 십자성의 계략이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조금 더 신중해야 합니다. 도마라는 자는 그
출신 성분부터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어찌 믿겠습니까? 아
미타불!"
해연진인의 말에 혜심사태가 동조했다. 그리고 몇 명이 더 그들의
말에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원광대사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들 앞에서 어찌 달마삼검의 약속을 내뱉는단 말인가? 달마삼검
의 약속은 소림의 치부였다. 때문에 절대 외부로 유출할 수 없는 사
실이었다.
청송진인도 예상 밖의 반응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한편으
로는 도마의 존재가 궁금했기에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도마라는 자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고 싶습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후의 일을 논의합시다. 일단은 그것이 순
서인 듯싶습니다."
해연진인과 혜심사태의 말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
을 바라보는 원광대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미타불! 또다시 이들의 자존심이 고개를 들었구나. 지금은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는 것만으로도 힘든 시기이거늘 어찌 이리 자
존심만 내세운단 말인가?'
열흘 동안 단지 혼자의 힘으로 십자성을 농락한 남자, 더구나 그
의 손에 의해 쓰러진 자의 면면을 보자면 입이 딱 벌어질 수밖에 없
다. 어쩌면 지금 이들은 자존심이 상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들이 하
지 못한 일을 해낸 남자가 있다는 것이.
어쩌면 그들의 폐쇄성이, 자존심이 구대문파의 몰락을 가져온 것
일지도 몰랐다.
결국 원광대사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은 그를 만난 후 결정합시다."
"좋습니다."
"그리하지요."
그의 말에 대부분의 장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이리도 단결하기가 힘이 들어서야...... 적 시주가 우리를
어째 생각할 것인가? 정말 난감하구나.'
하지만 지금 당장은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4
적무강은 소림사의 한쪽에 마련된 철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원
래 소림사에서 쓰는 물품들을 만들고 보수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었
기에 철방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원래는 철방일 역시 참선의 한 방편이었으나 일과 참선을 동시에
진행해 나가는 것이 워낙 힘들어 철방 일에 자원하는 승려들이 거의
없는 형편이었다. 때문에 지금은 소림에서도 외부에서 거의 모든 물
품을 들여오고 어쩔 수 없을 때만 화로에 불을 지펴 가끔 사용하고
있었다.
적무강이 들어왔을 때 역시 철방의 화로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때문에 적무강은 불을 살리고 쇠를 정련하는 작업을 모두 혼자서 진
행해야 했다. 워낙 익숙한 일이었기에 적무강은 별 무리 없이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신철을 두드려 정철을 뽑아냈고 원하는 모양으로 형태를 잡
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정철을 뽑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깡깡깡!
이제까지 조용하던 철방과 소림에 그의 망치질이 울려 퍼지기 시
작했다.
적무강의 눈은 반개해 있었다. 마치 부처의 눈처럼 반개한 그의
눈은 그가 만드는 길쭉한 형태의 쇳덩이에 집중돼 있었고, 그의 의식
은 마음속 깊은 곳에 침전되어 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생사구류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달마삼검에 반발하여 태어난 지옥의 도법이다. 달마삼검이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활검(活劍)이라면 생사구류도는 증오와 살기
를 바탕으로 한 살도(殺刀)이다. 원류는 달마삼검이지만 생사구류도
는 달마삼검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났다.
생사구류도를 만든 적무강의 조상이 조사동에 갇혀 있는 십수 년의
세월 동안 그는 달마삼검에 대한 증오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자신을
이토록 지독하게 핍박한 소림에 대한 분노로 지독한 반발심을 가졌
다.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생사구류도에 담겨 있었다.
단천혈에서 혈폭풍으로 이어지는 전삼식과 후삼식은 모두 그가 소
림에 대한 증오로 만들어 낸 것이다. 때문에 자비가 없고 펼치면 펼
칠수록 살기가 치솟아 올랐다. 소림에 대한 분노가, 그리고 증오가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적무강은 심상대법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생사구류도의 후삼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초는 바로 심상
대법일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없는 컴컴한 동혈 속에서 무공을 익히기 위해 만들어 낸
심상대법, 자신을 관조하고 상대를 관찰하며 단지 머리만으로도 무공
을 익히게 만들어 낸 희대의 기공. 몸이 철저하게 망가진 상태에서
적무강의 조상이 만들어 낸 무공이다. 육신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기
에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심상대법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제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단지 우연히 한 번 본 것뿐이었다. 하지
만 그것이 인연이 되었는지 달마삼검을 덜컥 깨닫고 말았다. 그러나
속가제자라는 이유로 그는 갖은 핍박을 받고 폭주를 했다. 그의 손에
죽은 승려만 물경 수백. 그 대가로 그는 단전이 완전히 폐쇄된 채 차
가운 조사동에 갇혀 있어야 했다. 그 모두가 단지 달마삼검을 익혔다
는 이유에서였다.
그 상태에서 그는 화륜심결을 만들어 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극단의 방법이 필요했다. 일반적인 심법이나 소
림의 심법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방법. 그렇게 화륜심결이 만들어
졌다.
극양의 기운으로 몸의 폐쇄된 혈맥을 뚫고 단전을 달궈 다시 살리
기 위해. 그렇게 그는 조사동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어두운 암흑
속에서 살기 위해.
소림은 그에게 회개를 강요했지만 그는 싸우는 것을 택했다. 그렇
게 세월이 흐르고 그는 마침내 생사구류도의 전삼식과 중삼식, 화륜
심결을 완성할 수 있었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처럼 메말랐던 단전에 다시 극양의 힘이 모
여들고 근육에 활기가 돌아왔다. 그리고 언제드니 자신을 둘러싼 족
쇄를 파괴할 힘을 얻었다. 그 역시 그렇게 조사동을 나서려 했다. 그
리고 소림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려 했다. 싸우다 죽더라도 도저히 그
들을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자신을 내려
다보던 부처의 상이 그를 붙잡았다.
미소를 짓는 듯 마는 듯 연민을 안고 있는 부처의 얼굴이 그의 가
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무시를 하고 싶었다. 부처의 상을 파괴
하고 조사동을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부처의 입가에 맺힌 옅은 미소
가 그를 끝내 붙잡고 말았다.
결국 그는 다시 조사동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소림에서 풀어 주기
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다시 생사구류도의 후삼식을 만들었다.
깡깡깡!
비록 몸은 망치질을 하고 있었지만 적무강의 의식은 완전히 분리
되어 있었다.
심상대법이 펼쳐졌다.
비록 얼굴을 모르는 조사이지만 왠지 그의 형상이 뚜렷하게 떠올
랐다. 그리고 그의 고행도.
주르륵!
적무강의 눈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의 아픔이, 그의 고행이, 그의 마음이 시공을 초월해서 고스란히
그의 마음속에 전달되었다. 적무강은 자신이 겪은 일처럼 그의 아픔
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가 후삼식을 만들 때의 감정이, 사신과 같았던 그의 마음속에
찾아온 한 줄기 자비심이, 그의 심정의 변화가 자신이 겪은 일 같았
다.
"후삼식은 자비를 근간으로 하는 도법."
깡ㅡ깡깡!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수라가 되기 위한 도법."
깡깡깡ㅡ가앙!
"나를 버려 남을 구하기 위한 도법."
적무강의 망치질이 뚝 멈췄다.
그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렇다. 그것이 생사구류도이다. 난 오직 초식에만 집착했었구나.
중요한 것은 생사구류도를 펼치는 마음이었어."
그것은 깨달음과도 비슷했다.
조사의 당시 심경이 이해가 되자 생사구류도에 대해서도 이해가
되었다. 마치 엉킨 실타래가 실 끄트머리를 잡은 것만으로 술술 풀리
는 것처럼 신기한 체험이었다.
단지 이성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초식이 살아 잇는 생명체처럼 그
의 마음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신을 망가트린 소림을 위해 무신 마광도를 막아서던 그의 심정
이 이해가 되었다. 그를 막기 위해 생사도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사
랑을 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그가 겪었을 절망감이 모두 이해
가 되었다. 아니, 가슴속 깊숙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적무강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만일 삼백 년 전의 조상이 지금
이 자리에 있어 그를 본다면 아마도 똑같은 미소를 지을 것이다.
적무강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망치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깡깡!
그의 망치질에 따라 쇳덩이가 형체를 잡아 갔다.
순도 높은 정철이 생명력을 얻어 완만한 곡선을 가지고 있는 환도
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치이익!
미리 준비해 둔 지장수에 환도를 담그자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빨
갛게 달아올랐던 환도가 어느 정도 식자 적무강은 다시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을 시작했다.
쇠를 두드리는 게 아니다.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
엇다. 그리고 자신의 무공을 반추하며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있었다.
소림에서는 달마삼검을 삼성 이상 익힌 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조상은 너무나 쉽게 깨달았다. 왜 그런 것일까? 책자를 보는 순간 적
무강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면을 보고자 해서는 절대로 안 되
는 검법이 바로 달마삼검이다. 아마도 소림 승려들은 달마삼검에 숨
겨진 오의를 깨달으려 했겠지. 그러나 달마삼검은 순박한 성품으로
있는 그대로를 전력으로 익힐 때 진정한 위력이 나온다. 결국 시조와
소림 승려들의 차이는 달마삼검을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굳이 달마삼검이 아니더라도 일흔 두 가지에 이르는 최고의 절기를
가진 소림과 단지 말단 속가제자에 불과했던 적무강의 시조의 차이는
풍족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그리고 무언가르 파고들려는 자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받아들이는 자와의 차이였다.
적무강은 눈을 반개한 채 망치질을 계속했다.
그는 수없이 망치질을 하고 다시 지장수에 담가 식히기를 반복했
다.
그렇게 이틀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단지 이틀에 불과했지만 그
시간은 적무강이 자신을 돌아보고 생사구류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환도 또한 완성이 되었다.
적무강은 환도에 화려한 문양을 새겨 넣었다. 수수한 형태를 갖추
고 있는 생사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모습이었다. 본래 그
는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이번에 만드는 도만큼은 화려하
게 만들었다.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은 날을 세우고 도신에 광을 내는 일이었다.
적무강은 심혈을 기울여 숫돌에 날을 갈았다. 만족스럽게 날이 세워
지자 거울이 무색할 정도로 반들반들하게 광을 내었다.
5
마침내 손잡이만 빼놓고 도신이 완성되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화려한, 도가 아니라 마치 예술 작품을 보는 듯
한 명품이 완성되었다.
적무강은 도를 조심스럽게 들어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이 정도면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기억하겠군."
그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적무강은 손잡이를 만들기 위해 다시 손을 놀렸다. 준비해 둔 손
잡이에 막 손을 가져가는 순간 그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뻗었던
손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미타불!"
원광대사의 모습이 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의 뒤에는 가지각색
복장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심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모습에서 적무강은 그들이 구대문파에
서 파견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미타불! 방해를 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구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적무강의 말에 원광대사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이분들은 모두 구대문파에서 나온 분들이오. 이분들이 모두 적
시주를 보고 싶다고 하여서......"
단순히 얼굴을 보는 것으로 소림의 방장이 저리 난처할 이유가 없
었다. 비록 회의석상에는 없었지만 적무강은 무슨 이야기가 나온 것
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소협이 바로 강호에서 도마라고 불리는 것이 맞는가?"
화산파의 해연진인이 앞으로 나섰다. 도가의 장로치고는 성격이 급
하다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바로 해연진인이었다. 때문에 적무강을
보자마자 앞으로 나선 것이다.
윗옷을 벗은 채 상체를 고스란히 드러낸 적무강. 그러나 그뿐. 그
어디서도 그가 무공을 익혔다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화산파의 해연진인뿐 아니라 다른 장로들 역시 신경을 써서 적무
강을 살펴보았지만 그에게서 내공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다.
무당파의 청송진인이 심유한 눈으로 적무강을 바라보았다.
'벌써 자신을 안으로 감추는 경지에 이른 것인가?'
이미 한 번 마주쳤던 사이다. 때문에 그는 적무강을 기억하고 있
었다. 그때도 무공을 익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듯 완벽하게 자신을
감출 정도의 경지는 아니었다. 그런데 단지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이
제는 자신마저도 그가 무공을 익혔는지 확신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
하게 자신을 감추고 있었다.
'설마, 그새 무공이 증진되었단 말인가?'
청송진인의 눈이 반짝였다.
적무강은 잠시 해연진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해연진인이 더욱 크
게 말했다.
"내 말이 안 들리는 것인가? 내 자네가 도마가 맞는지 묻고 있네."
그제야 적무강이 입을 열었다.
"남들이 그렇게 부르더구려."
"허~! 부르더구려라......."
아직 서른도 안 된 자가 반어체로 말하자 해연진인의 인상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적무강의 시선은 너무나 담담했
다.
사실 적무강을 아는 사람들은 그의 반응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그의 성격은 대나무 같아서 누르면 누를수록 반발을 하니까.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해연진인으로서는 충분히 분통 터질 만한 일이었
다.
그는 화산파의 장로로서 천 명이 넘는 화산파에서도 열 손가락 안
에 들어가는 위치였고, 또한 강호인들 역시 화산파의 장로라고 하면
어느 정도 양보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때문에 항상 공경을
받던 그가 서른도 되지 않은 애송이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그럼 자네가 우내육마를 죽인 것이 맞는가?"
"그것도 맞소."
"정말 자네의 실력으로 그들을 죽였단 말인가?"
"맞소!"
적무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목숨을 걸었고, 그 덕에 우내육
마를 죽일 수 있었다.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원광대사의 말이 사실로 드러나자 해연진인과 혜심사태의 얼굴빛
이 변했다. 우내육마라면 자신들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괴물들이
기 때문이다. 그런 자를 눈앞의 젊은이가 죽였다니. 더구나 그들이
보기에 적무강은 무공을 하나도 익히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
면 눈앞의 청년은 자신들의 이목을 속일 수 있을 정도의 고수란 말
인가? 그것은 쉽게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자신도 모르게 해연진인이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믿을 수 없다."
"당신들이 믿거나 말거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오. 그런데 이곳까
지 찾아온 목적이 무엇이오? 보다시피 난 바쁘오."
적무강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혜심사태가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너는 예의도 모르느냐? 우리는 구대문파의 장로들이다. 어른을 대
할 때는 공경을 다해라."
"아~! 그렇군요. 하지만 그쪽도 그렇게 예의가 바른 것 같지는 않
군요. 별다른 용건이 없으면 이만 물러가 주시겠는지요?"
"이익!"
적무강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때 청송진인이 앞으로 나섰다.
"난 자네가 명분을 만들어 준다는 말을 듣고 왔네."
"흠!"
"무척 고마운 말이네. 그런데 난 지금 그것보다 자네와 싸우고 싶
네."
청송진인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싸우고 싶었다. 이미 십여 년 전부터 제대로 된 비무를 못해
봤다. 더구나 최근에 깨달은 검법을 펼쳐 볼 상대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적무강을 보자 호승심이 끓어올랐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어 갔다.
이에 혜심사태를 비롯한 장로들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같은 장로급
의 인물이지만 청송진인의 존재감은 그들과 차원이 달랐다.
실질적인 무당의 제일인, 무당 제일의 검사가 바로 청송진인이다.
그런 그가 기세를 내뿜자 자신도 모르게 밀린 것이다.
순간 해연진인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가 자신의 발을 바라봤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나 있는 그의 왼발.
그와 청송진인은 같은 배분이다. 그런데 기세에서 밀렸다는 사실이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먼저 저자의 실력을 확인하겠소. 청송진인께서는 빈도에게
양보를 해 주시구려."
"해연진인?"
"이번 한 번만 이해해 주시구려."
그가 청송진인 앞으로 나섰다. 이에 청송진인이 서늘한 눈으로 해
연진인을 바라봤지만 이미 그는 완고한 등을 보이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는 적무강을 쓰러트림으로써 청송진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
해 보이려 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원광대사가 나직하게 불호를 외웠다. 그는 해연진인을 말리고 싶
었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도 힘의 역학은 분명 존재하기에 그럴 수 없
었다. 여기에서 힘의 우위를 확실하게 해야만 별 잡음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그는 적무강의 무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
고 싶었다. 우내육마를 죽였다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 아니
었기에 실감이 나지 않았다.
청송진인이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적무강을 바라봤다.
적무강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어렸다.
"아! 이거, 내가 너무 우습게 보였나 보군."
아무나 검을 겨루자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닌데 말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구대문파가 움직일 명분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
신에게 검을 겨루자고 한다.
"하지만 한 번 쯤은 상관없겠지."
그가 방금 전에 만든 도를 잡았다.
손잡이도 없이 오직 몸체만 있는 도였다. 손잡이를 끼워 넣는 부
분을 잡았기에 손에 상처가 생기지는 않지만 그것은 화산파의 장로
인 해연진인을 충분히 우습게 보는 태도였다.
"감히 나를 상대로 그런 만들다 만 도 쪼가리를 든단 말이냐?"
해연진인이 적무강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러자 적무강이 도
를 든 채 그를 향하며 말했다.
"당신도 참 피곤한 사람이구려. 멋대로 도전해 놓고 멋대로 화를
내다니......"
"당신? 이......놈!"
해연진인의 수염이 푸들푸들 떨렸다.
나이도 어린 놈이 감히 평대를 하다니. 지금 이 순간 해연진인은
눈앞의 청년이 도마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자신
의 사질들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린 애송이로 보일 뿐이었다.
해연진인이 분노에 몸을 떨거나 말거나 적무강은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걸어갔다.
촤ㅡ앙!
해연진인이 검을 뽑아 들었다. 순간 적무강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싶은 순간 어느새 해연진인의 앞에 나타났다.
"헛!"
순간 해연진인이 기겁을 했다. 그가 기척을 감지하기도 전에 나타
난 적무강의 모습 때문이다.
휘류~!
해연진인은 급히 매화검을 펼쳐 냈다. 마음을 먹은 순간 이미 그
의 검에서는 한 떨기 매화가 피어나고 있었다. 그의 제자들이 보았
다면 그야말로 눈부신 대응이라고 칭송할 만한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해연진인의 검은 허공에 딱 멈춰 있었다. 그가 피워 올리
던 매화는 이미 사그라진 채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구파 장로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전
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으로도 도대체 적무강이 언제 어떻게 움
직였는지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르르~!
해연진인의 미간에서 멈춰 있는 도첨, 화려한 문양이 보였다. 그러
나 해연진인은 문양을 감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비록 기습이긴
했지만 자신이 채 대응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리 알았다
하더라도 피할 수 있다고는 자신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것이 그를
비참하게 했다.
"어, 언제?"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적무강의 시선
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해연진인의 등 뒤에 있
는 청송진인을 보고 있었다.
"이 내가 일초지적도 안 된단 말이냐?"
해연진인의 말에 적무강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언제 검을 뽑아 보았는지 모르지만 난 얼마 전까지도 생
사를 건 사투를 벌였소. 그리고 난 지금도 매일 사투를 벌이고 있소.
나 자신과......"
여전히 그의 눈은 해연진인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해연
진인을 절망케 했다.
"비......겁하다!"
"뭐가 말이오?"
"비무에 기습을 하지 않았느냐?"
"훗!"
대답 대신 적무강은 싸늘한 웃음을 피워 올렸다.
비무? 자신은 이제까지 비무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비무
는 오직 그의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졌고 처음 겪은 실전에서 살인을
했다. 그리고 이제까지 그의 손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처음 실
전에서부터 지금 이 자리까지 그는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상대는 자신을 우습게 봤고,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 그 차이다. 그
차이가 메워지지 않는 이상 해연진인은 영원히 자신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대비를 해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원한다면
한 번 더 덤벼도 좋습니다."
"으으음!"
잔혹할 만큼 냉정한 적무강의 말. 해연진인은 반박할 수 없었다.
마음은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었지만 피부에 올라와 있는 소름이 적
무강의 말이 사실이라고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적무강이 도를 거뒀다. 그래도 해연진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마
음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이제 진인 차례입니다."
그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사실 청송진인과 싸우고 싶어 해연진인에게 최선을 다했다. 이번
에 얻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팔황보를 펼쳤다. 그의 몸이 한 자루의
잘 벼려진 도처럼 움직였다. 그것은 자신조차 예상치 못한 현상이었
다.
자신조차 자신이 어디까지 깨달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확인
하고 싶었다. 청송진인이라면 의문을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미 한 차례의 만남에서 적무강은 청송진인이 한 자루의 검이라는 것
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검이라면 자신은 도이다. 자신의 도가 어디
까지 통할지 알고 싶었다.
청송진인이 앞으로 나섰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고검이 들려 있었
다.
그는 해연진인이 적무강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
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일초지적밖에 되지 않을 줄이야. 오랜만에
피가 끓어올랐다.
청송진인이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무당의 청송이라고 하네."
"적무강이라고 합니다."
적무강이 포권을 취했다.
해연진인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그것은 적무강이 청송진인을 인정
한다는 증거였다.
"내가 아는 것은 오직 유운검 하나라네. 다른 저리는 배워 본 적
도 없고 알지도 못하네."
"저의 절기는 생사구류도 하나입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절기는 배
워 본 적이 없습니다."
"좋군!"
청송진인의 입가에 만족스런 웃음이 떠올랐다. 같은 길을 걷는 무
인, 이런 자라면 자신의 모든 절기를 쏟아 부어도 후회가 없을 것이
다.
그들이 공터의 중앙에 서자 일동이 모두 숨을 죽였다.
청성파의 철연자가 망연히 서 있는 해연진인을 부축해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 상처는 쉽게 치유되기 힘들겠구나. 단 일초라니......'
화산파의 장로로서 권위와 자존심이 무너졌다. 그것도 같은 구대문
파의 장로들이 보는 앞에서. 이 치욕과 상처는 아마 평생을 그를 따
라다닐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나서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아마 자
신이 나섰다고 하더라도 해연진인과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형환위(以形換位)였을까, 아니면 다른 절기였을까? 그 돌진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적무강이 해연진인을 향해 달려들었을 때 환영이 생겨났었다. 그
것은 말로만 듣던 이형환위를 펼칠 때 일어나는 현상과 비슷했다. 하
지만 그 돌진력은 이형환위라고 보기에는 무언가 미심쩍었다. 그러
나 그것이 무슨 절기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지켜보면 알겠지. 그래도 청송진인이라고 하면 무림의 최고수 중
한 명이 분명하니까.'
철연자는 신중한 눈으로 공터를 바라봤다.
청송진인이 고검을 뽑아 들자 차가운 가을바람 같은 기운이 풍겨
나왔다.
그의 모습은 마치 날카로운 한 자루의 검 같았다.
원광대사가 청송진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청송 도우는 이미 신검합일(身劍合一)을 뛰어넘어 검
즉아의 경지에 올랐구나."
검즉아(劍卽我).
검이 나이고, 내가 곧 검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따로 초식이 필요하지 않다. 원하는 순간 적재
적소에 원하는 대로 검을 움직일 수 있고, 그것이 곧 절대적인 초식
으로 탈바꿈한다. 검강이나 이기어검과는 또 다른 검의 경지가 바로
검즉아의 경지였다.
적무강은 청송진인을 보며 한 줄기 흘러가는 구름을 느꼈다. 자유
롭고 고고하며 그 누구도 잡을 수 없는 구름. 하지만 기세가 일변해
먹구름이 되면 검의 폭우를 몰고 오리라. 그러나 겁이 나지는 않았
다. 오히려 자신의 성취를 알아보기 위한 최적의 상대라고 생각했다.
탕ㅡ!
적무강은 자신이 만든 도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러자 맑은 소리
가 멀리 퍼져 나갔다. 비록 미완성의 도이지만 어떤 무기와 부딪쳐도
쉽게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청송진인의 안색이 변했다. 단순하게 도를 튕긴 것에 불과했지만
도명에 실린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명이 청아하면서도 길게 울렸다. 더구나 그 소리가 끊이지 않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그것은 적무강이 도명에 내공을 실었다는 이
야기나 마찬가지였다.
청송진인의 입가에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원래 선배 된 자로서 삼초식을 양보해야 하나, 자네는 그럴 필요
가 없을 것 같군. 이해해 주겠는가?"
"고맙군요."
그들의 대화에 장로들이 놀랐다. 무당의 자존심이라는 청송진인이
눈앞의 새파란 애송이를 자신과 동등한 상대로 인정을 한 것이다. 그
러나 장로들이 놀라건 말건 청송진인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시작해야겠군. 보는 사람들이 지겨워할지도 모르니."
"그렇군요."
청송진인과 적무강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원
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다.
서로의 무기가 서로의 미간을 향해 있었다.
청송진인은 적무강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젊은 나이에 이 정도의 기세라니. 앞으로 강호는 이 젊은이
에 의해 좌우되겠구나.'
단지 도첨이 미간을 향한 것뿐인데 미간이 뚫어질 듯이 아파 왔다.
서로 간의 거리가 오 장 이상이나 떨어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이전까지 누구에게도 느껴 보지 못한 기세였다.
순간 청송진인이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름이 흘러가는
듯한 부드러운 걸음걸이, 이것이 바로 무당의 수많은 신법 중에서도
일절을 이루는 유운신법이었다. 본래 유운검과 유운신법은 이름만
비슷할 뿐 전혀 별개의 절기였으나 청송진인은 두 절기를 한꺼번에
익히고 조화를 시켰다. 때문에 원래부터 하나의 절기였던 것처럼 두
절기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본래 유운검은 열여섯 가지의 초식으로 이루어졌었으나 내 나이
가 들어감에 따라 점점 초식을 잊어버리게 되었네. 그래서 기억하고
있는 초식만 정리하게 되었는데 모두 다섯 초식이라네. 나는 내가 새
로 만들어 낸 초식에 따로 이름을 붙였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 첫
번째 초식인 유성세(流星勢)라네."
슈우!
순간 청송진인이 적무강을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였다. 일체의 군
더더기 하나 없이 곧게 뻗은 그의 검. 초식명 그대로 유성처럼 적무
강을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적무강은 차분한 눈으로 도를 휘둘렀다. 그러자 무형의 기
세가 일어나며 청송진인의 유성세를 막아 냈다.
파파팟!
형체도 흔적도 없이 일어난 단천혈의 기운이 유성세와 충돌하면서
불꽃이 튀었다.
순간 적무강이 대지를 박찼다. 동시에 청송진인 역시 적무강을 향
해 움직이면서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먹장구름이 몰려오듯 그렇게 청송진인의 몸이 확대되었다.
엄청난 기세가 담긴 그의 모습, 폭풍우 같은 바람이 적무강을 향해
밀려들었다.
후두두둑!
청송진인의 검이 분열을 일으켰다. 은색으로 빛나는 그의 검은 마
치 하늘에서 폭우가 쏟아지듯 적무강을 향해 내렸다.
이것이 바로 유운검의 두 번째 초식인 폭우세(暴雨勢)였다.
비가 되어 내리는 검기를 보며 적무강은 차분히 눈을 빛냈다. 깨
달음을 얻은 후 그의 눈빛은 예전보다 차분해지고 더욱 냉정해졌다.
적무강의 손에서 미완성의 도가 움직이며 지옥에서 늑대들이 뛰쳐
나오는 듯한 기세를 뿜어냈다.
수십, 수백 마리의 늑대가 뛰쳐나오며 검기의 폭우를 하나하나 분
쇄해 나갔다.
웅웅웅!
도가 운다. 그러나 생사도와 같이 피를 부르는 울음소리가 아니었
다. 고통에 겨워서, 자신의 몸에 주입되는 적무강의 내력에 몸이 못
견뎌 우는 것이었다.
'역시 재질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더 이상 내공을 주입하면 도가 부서지고 말 것이다. 아무리 잘 정
련해도 일반적인 쇠의 한계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적무강
자신에게 족쇄가 채워진 것이다.
퍼버버버벅!
그러나 적무강의 도기는 청송진인의 기운을 모두 사그라트렸다.
적무강의 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기가 어떻다는 등의 우
는 소리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번엔 적무강이 먼저 공격을 했다.
씨잉!
그의 도가 낭창 휘어지는가 싶더니 청송진인의 미간을 향해 눈부
시게 뻗어 갔다.
티티팅!
빙폭설이 펼쳐질 때 일어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위의 공기마
저 얼어붙게 만드는 적무강의 빙폭설에 청송진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유운검의 삼초식인 폭풍세(暴風勢)를 펼쳐 냈다
콰콰콰쾅!
연신 폭음이 터져 나왔다.
빗살처럼 몸을 움직이며 서로 한 수를 교환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원광대사를 비롯한 장로들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적무강이 청송진인을 맞이해 이와 같이 대등하게 싸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들이 청송진인과 싸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
음을 던져 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렇게 가공할 만한 검세에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본래 유운검법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표표한 검술이었는데 지금 청
송진인이 펼치는 유운검은 마치 한여름에 일어난 거대한 폭풍과도 같
았다. 세상을 뒤엎는 먹장구름과 같이 청송진인은 움직였다. 그가 움
직이면 폭풍이 일고, 폭우가 쏟아졌다.
그 누구도 저런 검세 앞에선 살아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적무강은 달랐다. 그는 너무나 가볍게 폭우 속을 거
닐었다. 전력을 다한 것 같지 않은데 오히려 청송진인을 압박하는 모
습을 보였다.
'부끄럽구나, 부끄러워!'
결국 해연진인이 남몰래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
도 자신이 저들을 이길 확률은 없어 보였다. 우물 안 개구리인지도
모르고 청송진인에게 승부욕을 느낀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그를
상대로 추호의 위축됨이 없는 적무강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