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관론(絶觀論)
<절관론>은 1900년 돈황 막고굴에서 발견된 선종(禪宗)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모두 필사본으로 전해졌는데, <절관론>은 일찍이 실전됐다가 1900년에 돈황에서 다시 발견된 것이다.
저자에 대해서는 보리달마(菩提達磨, ?~536?) 혹은 우두법융(牛頭法融, 594~657) 등의 몇 가지 설이 있다.
달마를 저자로 보는 측은 이름조차 아예 <보리달마절관론>이라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우두법융의 저서로 입을 모으고 있으며,
<절관론>이라는 이름은 우두법융의 법을 계승한 후대인들이 그렇게 붙여 부른 것이라고 본다.
절관(絶觀)이란
마음을 일으켜 어떠한 법상(法相)을 관(觀)함이 없는 수행이고,
무공용(無功用)이며
무작의(無作意)의 행(行)이다.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행(不起心)이 아니라
마음이 본래 일어남이 없음을 요지(了知)하는 행(心不起)이다.
쓸데없이 마음을 일으켜 상(相)을 만들어놓고 이러쿵저러쿵 하지 말라는 말이다.
마음이 본래 공적(空寂)해서 지(知)함도 없고 견(見)함도 없으며 분별함이 없다.
이를 요지하니 그대로
절관(絶觀)이며,
심행처멸(心行處滅)이고,
언어도단(言語道斷)이며,
무수지수(無修之修)이다.
이 법은 달마대사로부터 육조 혜능(慧能) 및 후대에 이르기까지 선종의 공통된 심지법문(心地法門)이다.
4조 도신(道信, 580~651) 대사 문하에 직계 제자인 5조 홍인(弘忍)이 ‘동산법문(東山法門)’을 선양한 것 이외에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제자가 있었으니, 우두선(牛頭禪)을 창시한 우두법융(牛頭法融)이다.
<절관론>은 그의 저서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돈황본 <절관론>의 저자와 성립 과정은 오랫동안 논란이 돼왔다.
저자로 알려진 우두법융과 문헌의 관계 및
우두법융을 선종사에서 도신의 계승자로서의 위치에 관한 전승 계보는 후대에 구성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우두혜충(牛頭慧忠, 683-769)과 학림현소(鶴林玄素, 688-752)의 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우두종은 북종에 대한 비판의식을 표방하는 동시에 신회(荷澤神會, 670~762)의 남종선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남종이나 북종과 다른 우두법융이 독자적인 보리달마의 계승자로 등장했다.
<절관론>의 성립은 법융과 도신의 관계가 창작되고,
보리달마에서 도신에 이르는 계보에 법융으로부터 우두혜충⋅학림현소에 이르는 우두종 6조의 계보가 연결돼
우두종이 달마선의 정통으로 도식화되는 시기에 가능했다. 특히 혜충의 제자 불굴유칙(佛窟遺則, 751-830)은
무물(無物)의 사상을 주장했고,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실린 그의 전기에서 남종 및 북종과 다른
독립된 우두학과 불굴학의 존재를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절관론>의 성립에 관여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우두법융(牛頭法融)은 수나라 때(595년) 명문가의 출신으로 양질의 문화적 교육을 받았으며,
속성은 위(韋)씨로서, 윤주연릉(潤州延陵) ― 현재의 강소성 단양(江蘇省丹陽)사람이다.
그는 세속 경서를 통달하고, 어느 날 문득 <대반야경>을 접하고 반야진공의 묘지를 깨닫고 감탄해 말하기를,
“유교 도교 세속경전은 구경법이 아니며 반야정관(般若正觀-지혜와 선정)은 세간을 벗어나는 항로이다”라고 했다고
<속고승전(續高僧傳)>에서 전한다.
수나라 때인 612년 강소성(江蘇省) 모산(茅山)에 들어가서
삼론종 승려인 경법(炅法) 스님에게 머리를 깎았다. 모산은 당시 삼론종의 중요한 수행처였다.
우두법융은 도신의 방계로서 우두선을 창립했으며 6대까지 전승이 이루어졌다.
초조 법융-지암(智岩)-혜방(慧方)-법지(法持)-지위(智威)-혜충(慧忠) 등이며,
일반적으로 우두선은 6대 이후 당 말에 이르러서 점점 쇄락했다고 보고 있다.
우두선은 8세기까지 전승 됐으며,
학림사의 현소(鶴林寺 玄素, 668~752)
경산사 법흠(徑山寺 法欽, 714~792)
조과도림(鳥窠道林, 741-824)등은 매우 활발하게 우두선을 선양했다.
우두법융은 수년간 우두산에서 반야공종(般若空宗)을 연구했으며,
정관년간(貞觀年間, 627~649) 4조 도신 대사가 멀리서 보고
그 산에 기이한 사람이 있음을 알고는 몸소 찾아갔다.
그럼에도 우두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태연자약하게 바위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도신 대사가 물었다.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마음을 관(觀)합니다.”
“관(觀)하는 것은 누구의 마음이며, 그 마음은 또 어떤 물건인가?”
그러자 우두 스님은 말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하고는
이에 벌떡 일어나 절을 하고 제자의 예를 갖추고 가르침을 청했다.
그래서 조사가 다음과 같은 설법을 해주었다.
“대저 백천 가지 묘한 법문은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고,
항하의 모래같이 수많은 묘한 공덕은 모두가 마음자리에 있다.
일체 선정과 온갖 지혜가 모두 본래부터 구족하고
신통과 묘한 작용이 모두 그대의 마음에 있다.
번뇌와 업장이 본래부터 비었고,
온갖 과보가 본래부터 갖추어 있다.
벗어날 삼계도 없고 구할 보리(菩提)도 없으며,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非人]의 성품은 같은 것이다.
대도(大道)는 비고 넓어서 생각과 분별이 끊겼나니,
이러한 법을 그대가 이제 이미 얻어서 더는 모자람이 없으므로,
부처와 다름이 없고, 더 이상 성불할 다른 법 따위는 없다.
그대는 다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자재하되 관행(觀行)도 짓지 말고,
마음을 모으지도 말고, 탐(貪)⋅진(瞋)⋅치(癡)를 일으키지도 말고,
근심을 품지도 말라. 완전히 텅 비어 걸림이 없고 뜻에 맡겨 자재하니,
온갖 선을 지으려 하지도 말고, 온갖 악을 지으려 하지도 말라.
다니고, 서고, 앉고, 누울 때와 눈에 띄고 만나는 인연이
모두가 부처의 묘한 작용이어서 즐겁고 근심 없는 까닭에 부처라 하느니라.”
그리하여 완전히 눈이 열리게 되면서 옥의 티 같은 번뇌가 몽땅 없어지고 모든 상(相)이 영원히 없어지니,
그때부터 제대로 된 공부 경지를 만난 것이다.이렇게 도신이 우두산에 이르러서 법융과 만났으며,
서로 법기임을 알아봤고, 법융은 비로소 도신으로부터 인증을 받았다고 한다.
도신이 법융에게 말하기를
“달마로부터 전해온 의법(衣法)은 다만 한사람에게 전할 수밖에 없어서 이미 홍인에게 부촉을 했다,
스스로 자립하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4조 도신이 법융에게 법을 전한 후에 바로 쌍봉산으로 돌아갔으며,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 법융 선사 법석은 늘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후 만년에 우두법융은 남경 우두산(牛頭山) 유서사(幽棲寺) 북쪽에 토굴을 짓고 수년을 지냈으며,
함께한 대중이 100명이 넘었다.
우두산 불굴사(佛窟寺)에 장경각이 있었는데,
도서(道書) 불경사(佛經史)와 의방도부(醫方圖符) 등 칠장(七藏)이 있었다.
법융은 불굴사 장경각 관리자 허락을 받고 8년 동안 장경을 열람하고,
각각의 책 중에서 중요한 정수를 베껴서 유송(劉宋) 초 유서사로 돌아가 깊은 연구 끝에
우두선(牛頭禪)의 깊은 선리 이론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법융은 금릉(南京) 우두산 유서사(幽棲寺)에서 우두종(牛頭宗)을 창종했다.
한편 우두선은 법융이 불굴사 장경각 칠장경서(七藏經書)를 정독하면서
도학(道學)의 영향으로 노장화(老莊化) 현학화(玄學化) 사상의 특색을 지니게 됐다고 말하고 있다.
※칠장경서(七藏經書)---칠경(七經)을 말함. 일곱 가지 주요 경서(經書)로서,
시경ㆍ서경ㆍ역경ㆍ예기ㆍ악기(樂記)⋅춘추⋅논어를 말한다.
우두법융의 <절관론>은 공허로 도의 근본으로 세우고,
나를 잊고 정을 잊어버리는 것을 수행으로 삼고,
무심하게 공부하는 것을 방편으로 삼았다.
이러한 경지는 장자(莊子)에서 나온 것이며,
아울러 남방의 불교(혜능 계통) 색채가 풍부하다.
법융은 깨달음을 얻자 우두산 유서사 북쪽 바위의 석실에 은거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많은 새들이 꽃을 물어다가 그에게 바쳤다고 한다.
――― 다음은 절관론의 일부임(옮겨온 글)―――
만약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일 것이다.
무릇 대도(大道)는 텅 비었으되 꽉 찼으며,
깊고 높으며 적막해 마음으로는 알 수 없고, 말로는 나타낼 수 없다.
이제 두 사람을 임시로 내세워서 유일한 진리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 해보겠다.
스승의 이름은 입리(入理)이고, 제자의 이름은 연문(緣門)이다
.(스승과 제자간의 대화형식을 빌어 즉심(卽心)과 무심(無心)사상을 제시했다)
입리 선생이 묵묵하게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연문이 갑자기 선생에게 물었다.
“심(心-마음)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안심(安心-평안한 마음)하는 것입니까?”
입리 선생이 답했다.
“너는 마음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네, 또한 억지로 마음을 편안하게 쉬려고 해서도 안 된다.”
(역주 ― 마음을 세움(立心) ; 마음이 흔들림 없고 맑은 거울처럼 깨어있는 상태를 말함)
문(제자) : 만약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도를 배웁니까?
답(스승) : 도란 마음으로 알 수 없는데, 어떻게 (도가)마음에서 생길 수 있겠는가?
문 : 만약 마음으로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답 : 아는 것이 있다면 곧 마음이 있음(有心)이고, 마음이 있다면 곧 도(道)에 어긋난다.
아는 것이 없으면 곧 무심(無心)이고, 그대로가 참된 도(眞道)이다.
문 : 모든 중생에게 실제로 마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답 : 모든 중생에게는 실제로 마음이 없다.
단지 무심(無心) 안에서 억지로 사물 가운데에 마음을 일으켜서 망상이 생긴 것뿐이다.
문 : 무심(無心)이란 어떠한 물건입니까?
답 : 무심(無心)은 곧 무물(無物-아무것도 아님)이며, 즉 비법(非法-비현상적인 것)이고, 진도(眞道-참된 도)이다.
※무심(無心)이란 마음이 없다는 소리다. 이때 마음은 망상심을 가리킨다.
진심이 드러나면 망상심은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진심(眞心)이 망념(妄念)을 여읜 것을 무심이라 한다.
무심을 자세히 설명한 것은 <능엄경>이며,
무심은 익히는 것이 아니므로 배울 수 없다.
오직 자증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무수지수(無修之修)라야 한다.
※비법(非法)---제법(諸法)이 무성(無性) 무상(無相)하여 분별을 영원히 떠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문 ; 중생의 망상을 어떻게 해야 멸(滅)할 수 있습니까?
답 : 망상이 실제로 있다고 보거나 망상을 없앨 수 있다고 본다면, 모두 망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역주 ― 망상은 원래부터 생겨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없앨 것도 없다는 뜻, 無生法忍)
※무생법인(無生法忍)---무생법인은 불생불멸의 경지를 말한다.
‘무생(無生)’이란 모든 현상은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여러 요소들이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데
불과할 뿐 실존적인 그 무엇이 생기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고정된 실체, 실존적인 존재가 있어야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이 성립되겠는데,
연기법이 적용되는 무아(無我)의 세계에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면 생길 것도 없는 것이다.
문 : 부도(不道)한 행(行)을 하는 것은 도리에 맞는 일입니까,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까?
답 : 만약 합당하다거나 합당하지 않다고 본다면, 이 또한 망상을 떠나지 못한 것이다.
문 : 적절한 때가 되면 망상을 떠나게 됩니까?
답 : 조금도 때가 돼 그렇게 될 수가 없다.(역주 ― 깨달음은 시간의 경과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는 뜻)
문 : 무릇 성인(聖人)이란 마땅히 어떠한 법을 끊고, 어떠한 법을 얻어야 성인이라 하는 것입니까?
답 : 일체법(一切法)도 끊음이 없고, 일체법이 영원한 것으로 보지도 않으며, 일체법을 얻는 바도 없나니, 이를 성인이라 하느니라.
문 : 만약 (일체법을) 끊음도 없고, (일체법을) 영원한 것으로 보지도 않으며,
(일체법을) 얻는 바도 없는 자라면 범부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답 : 같지 않다. 모든 범부는 망상하고 있기에, (일체법을) 끊을 바가 있다고 망상하고,
(일체법을) 얻은 바가 있다고 망상하기 때문이다.
문 : 지금 범부는 (일체법을) 얻는 바가 있는데, 그렇다면 얻는 바 있음과 얻는 바 없음은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답 : 범부들은 얻은 바 있으니 곧 허망한 것이요.(*이원화 결과는 허망한 꿈),
성인은 얻은 바 없으니 곧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일원화이므로 새지 않음-無漏)
허망한 이(범부)는 말로 같다거나 다르다고 하지만,
허망하지 않은 이(깨달은 성인)는 다르다거나 다르지 않다거나 하는 것도 없느니라.
문 : 만약 다름이 없다면, 성(聖)이란 이름을 어떻게 세울 수 있습니까?
답 : 범(凡)과 성(聖)은 둘 다 이름이라, 이 가운데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니 곧 차별이 없다.
이를테면 "거북의 털" 또는 "토끼 뿔"이라는 말과 같다.
(역주 ― 거북의 털, 토끼 뿔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상상의 이름으로만 있는 것임. 따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므로 이들 간에 아무 차별도 없으며
모두가 공/空임. 범부가 분별망상하는 모든 법도 또한 이와 같이 실체가 없이 이름뿐이므로 공하다는 뜻.)
문 : 만약 성인(聖人)이 거북의 털과 같다면, 곧 (성인도) 당연하게 없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며,
그렇다면 지금 이 사람(今人)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답 : 나는 거북에게 털이 없다고 말했지, 거북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문 : 털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비유한 것이고, 거북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비유한 것입니까?
답 : 거북은 도(道)에 비유한 것이고,
털은 나(我-개인에고)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에 성인(聖人)은 무아(無我)를 깨달아 도(道)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문 : 만약 이와 같다면, ‘도(道)’는 마땅히 있다 할 것이고, '나'는 마땅히 없다 할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유(有)와 무(無)가 있는 것이라면 어찌 무(無)의 이견(二見 - 두 가지 견해)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답 : '도'는 있는 것이 아니고, '나'는 없는 것이 아니다. 왜 그런가.
거북(道)은 이전에 없었다가 지금 있게 된 것이 아니니 있다고 할 수 없고,
털(我, 에고)은 이전에 있다가 지금 없게 된 것이 아닌 까닭에 없다 할 수 없다.
도(道)와 나(我)의 있고 없음도 이 비유로 알 수 있을 것이다.
문 : 무릇 도란 한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각자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모두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수행을 성취해야 얻어지는 것입니까?
답 : 모두 네가 한 말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가.
만약 한 사람만이 얻는 것이라면, 도(道)는 두루 어디에나 있는 것이 되지 못할 것이다.
만약 여러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도(道)란 다함이 있을 것이다.
만약 각자 따로따로 얻는 것이라면 도(道)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될 것이다.
만약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든 가르침은 쓸모없는 것일 것이다.
만약 본래 있는 것이라면 만행(萬行 - 여러 가지 수행방편)은 쓸모없이 시설된 것이다.
만약 수행을 성취해야 얻어지는 것이라면 조작된 행위가 되니 참된 것(眞)이 아니게 된다.
문 : 구경(究竟)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답 : 일체의 한량(限量-헤아림)과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문 : 범부에게는 몸이 있어서 또한 견문각지(見聞覺知)함이 있고,
성인도 몸이 있어서 역시 견문각지 함이 있는데, 이 양자가 어떻게 다릅니까?
답 : 범부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의(意-의식)로 안(知)다. 성인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의(意)로 아(知)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체의 한량(限量, 분별의식)을 떠난 까닭이다.
(역주 ― 육근/六根에 의한 감각의식은 주관과 객관대상으로 나누어진 상태이며, 의식에 의한 분별의식임.
중생의 개별적인 견문각지는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의 이원화로 분리돼 허망한 인식상태이지만,
성인의 견문각지는 전체가 하나라는 일원적인 관점에서 펼쳐지므로 경계의 헤아림과 분별을 벗어나 있는 각지/覺智 상태임)
문 : 무슨 까닭에 경 가운데서 반복해서 설하기를, '성인은 견문각지(見聞覺知)함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답 : 성인에게는 범부(주객 이원화)의 견문각지함이 없는 것이지, 성경계(聖境界-비이원적인 비춤)가 없는 것이 아니다.
(성경계는) 분별을 떠난 것이다. (역주 - 성경계/聖境界 ; 절대본체의 자연적인 비춤의 경지)
문 : 범부의 경계가 있는 것입니까?
답 : 본래 실제로는 없으나, 다만 허망하게 분별하고 집착해서 전도(轉倒-거꾸로 봄) 됐을 뿐이다.
문 : 성인이 보는 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고, 성인이 아는 것은 생각(意)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까?
답 : 법체(법체-절대본체)는 보기 어려우나 만물은 알 수가 있다. 저 현광(玄光-절대본체에서 직접 비추는 순수의식)이
사물을 비추되 비추는 자의 비춤이 없고, 음양(밝음과 그림자)으로 사물을 감지하되 감지하는 자의 생각(意)이 없는 것과 같다.
문 : 도는 구경(究竟)의 어디에 속해 있는 것입니까?
답 : 구경에는 속하는 곳이 없다. 허공이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도(道)가 속해 있는 곳이 있다면
막힘이 있고 장애가 있을 것이며, 주인이 있고, 의지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문 : 무엇이 도의 근본이며, 무엇이 법(法)의 쓰임새(用)입니까?
답 : 허공이 도의 근본이고, 삼라만상이 법(法)의 쓰임새(用)이다.
문 : 이 가운데 누가 조화(造化-마음대로 부림)하는 것입니까?
답 : 이 가운데 실로 조화(造化)하는 자가 없다. 법계(法界)의 성품이 스스로 그러하다.
(역주 ― 이 우주의 운행은 어떤 특정한 주재자의 신이 없으며, 모든 것은 그 자체의 움직임에 의해
저절로 흐르는 것임. 즉, 무위자연의 "있는 그대로" 흐름임)
문 : 중생의 업력(業力)으로 인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답 : 범부가 업을 받는 것은 업의 굴레에 묶여 있기 때문이며 자체의 인(因)은 없는 것이다.
어찌 바다를 뚫고 산을 쌓으며 천지를 안치(安置)할 필요가 있겠는가.
문 : 대체로 듣기로는 성인(보살)은 의생신(意生身-존재의식의 뿌리, 존재 핵점)이 있다 했는데,
어찌 신통력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답 : 범부에게는 유루(有漏)의 업이 있고, 성인에게는 무루(無漏)의 업이 있어 거기에 비록 뛰어나고
열등한 차이는 있으나 이것이 자연의 도에 인(因)한 것은 아니다. 까닭에 <능가경>에서 설하길,
‘갖가지 의생신(意生身, 意成身), 나는 이를 심량(心量-마음 그릇)이라 하네’라고 했다.
(역주 ― 심량/心量은 마음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임)
※의생신(意生身)---의생신은 의성신(意成身), 여의신(如意身), 의신(意身)이라고도 하는데,
어머니의 태를 거치지 않고 뜻에 따라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문 : 이미 공(空)이 도(道)의 근본이라 했으니 공(空)이 부처님이 아니겠습니까?
답 : 그렇다.(공이 부처다)
문 : 만약 공(空)이 그와 같다면(도의 근본이라면), 성인께서는 왜 중생으로 하여금
공(空)을 염(念)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불(佛, 부처)을 염하라 하십니까?
답 : 우인(愚人)에게는 부처를 염불하라 하고, 도심(道心)이 있는 자에게는 공(空)을 염(念)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몸이 실상(實相-空)임을 관찰하도록 한다. 불(佛)을 관(觀)함도 또한 그러한다.
실상(實相)이란 곧 공(空), 무상(無相)을 말한다.
문 : 대도(大道)는 오직 사람에게만 있습니까? 또한 초목에도 있습니까?
답 : 대도는 두루 없는 곳이 없다.
문 : 도(道)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두루 어디에나 있다면), 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가 되고,
초목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안 되는 것입니까?
답 : 무릇 죄가 있다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모두 정(情)에 따르고 현상에 의거한 것으로 정도(正道)는 아니다.
다만 사람이 도리에 체달(體達)하지 못하고 나의 몸이 있다고 망립(妄立)해서, 죽였다는 마음이 있게 되고,
업을 맺게 되니 곧 죄라고 하는 것이다. 초목을 죽이는 것이 죄가 안 된다는 것은 초목은 정(情)이 없는 까닭이며,
(초목은) 내가 있다는 생각이 없는 까닭이다. 죽이는 자가 그러한 분별망상이 없다면 죄와 무죄를 논할 바가 없는 것이다.
무릇 무아(無我)를 체달한 이는 자기 몸뚱아리를 초목과 같이 보아, 몸이 베는 것을 숲이 베는 것과 같이 본다.
문수보살이 구담(석가모니)에게 칼을 대들고, 앙굴마라가 석가모니에게 칼을 들고 덤벼든 것은 이들 모두 도에 합치한 것이며,
똑같이 무생(無生)을 증득해 (몸뚱아리가) 환화(幻化)이고 허망한 것임을 깨달아 안 때문이니 유죄와 무죄를 논하지 않는 것이다.
문 : 만약 초목도 도에 합치하는 것이라면 경에서 왜 초목의 성불에 대해서는 기록돼있지 않고,
단지 사람의 성불에 대해서만 치우치게 설하고 있는 것입니까?
답 : 단지 사람에 대해서만 설한 것이 아니라, 초목에 대해서도 또한 설했다. 까닭에 경에서 말하길,
‘한 티끌 가운데 일체법이 함께 갖추어져 있다’고 했고, 또 설하길,
‘일체법 또한 그러하고, 일체 중생 또한 그러하다’라고 했다. 그러하니 차별이 없는 것이다.
문 : 이와 같이 필경에 공인 도리라면, 마땅히 어디에서 구할 것이며 마땅히 어떻게 증득할 것입니까?
답 : 마땅히 일체의 색(色-현상) 가운데서 구할 것이며, 마땅히 그대 스스로의 말에서 증득해야 할 것이다.
문 : 어떻게 색(色-현상) 가운데서 구하며, 말(語) 가운데서 증득한다는 것입니까?
답 : 공(空)과 색(色)이 합일(合一)되는 것이고, 말(語)에서 불이(不二)를 증득하는 것이다.
문 : 만약 일체법이 공(空)이라면 성인은 통하는데 범부는 왜 막히는 것입니까?
답 : 범부는 망동(忘動)하는 까닭에 막히고, 성인은 일체가 돼있기 때문에 통한다.
문 : 이미 사실 공(空)이라면 왜 훈습(薰習)이 돼야 하고, 만약 이미 훈습이 됐다면 어찌 공(空)을 이룰 수 있습니까?
답 : 무릇 망(妄-무지)이라 하는 것은 불각(不覺) 중에 홀연히 생기(生起)해 훈습되는 것이나,
그 공(空)이라는 것을 논하건대 그 체(體)에는 일법(一法)도 없는데 훈습을 받는 것이다.
문 : 만약 진실로 공(空)이라면 일체 중생이 반드시 도를 닦지 않아도 응당 자연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답 : 일체 중생이 만약 공(空)의 이법(理法)을 깨우쳤다면, 사실 도(道) 닦는 것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단지 공(空)을 깨우치지 못해 스스로 미혹(迷惑)이 생기는 것이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