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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가 주목한 수필집|⑭】-배대균《풍력 발전기》(2015, 선우미디어)
동경과 방랑의 꿈, 그 문학적 형상화 / 백남오
1. 배대균 수필가에 대한 단상
배대균 수필가는 문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 명사다. 1935년생인 선생은 지금도 매일 오전 9시에 출근하여 오후 6시 30분까지 백 여 명의 환자를 진료할 만큼 건강하다. 1962년 부산일보에〈노처녀의 마음〉이란 글을 발표하면서 사실상의 문학 활동을 시작하였지만, 1991년《한국수필》을 통하여 정식 등단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동안《생각나는 사람들》,《배가 산으로 간다》,《필름 97》,《5월에도 피지 않는 나무》,《6번째의 편지》,《Out of word》,《풍력 발전기》,《꿈속의 꿈》등 8권의 수필집을 냈다. 《의문의 강》《폭스중대 최후의 결전》《장진호전투》《마산 방어전투》《마산 방어전투 속의 함안전투》《창녕 방어 전투 실화》등의 번역서를 펴냈고,《마산 방어전 루트를 찾아서》를 써서 군사전문가로서의 위상과, 인류문화 연구서《한국인의 문신》을 집필한 인문학 연구자이기도 하다. 웬만한 전업 작가도 따라 하기 힘들만큼의 놀라운 결과물이다.
문단 이력으로는 마산, 경남, 한국문인협회, 한국펜클럽, 경남수필문학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수필가협회 운영이사, 한국수필작가회 이사직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재를 출연하여 제정한 경남문학상은 경남문학사의 독보적인 업적으로 평가될 만하다. 2009년 제28회 한국수필문학상, 2016년 제8회 경남수필문학상, 2021년 제3회 경남펜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문학적 위상을 확보했다고 본다.
배 수필가는 경남지역의 의료인으로서 상징성과 사회운동가, 문화인으로서도 명망이 높다. 1985년에 개설한 ‘사랑의 전화’는 고통받는 자들의 고민을 속 시원히 덜어주는 역할을 해주었고, 마산시 사회정화위원장으로 10여 년간 ‘질서 지키기 운동’도 펼쳐왔다. 1984년에는 ‘마산시립교향악단과 시립합창단’을 창단하여 시민들의 예술적 자존심까지 고취시켰다.
필자는 같은 소속 문학단체의 월례회나 행사장에서 한두 번 마주한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배 수필가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단아한 예술가 그 자체였다. 의사로서의 사무적이고 냉정함보다는 인간적인 향기가 물씬 풍겨졌다. 큰 체구가 아님에도 아름다운 거인 같은 뜨거움이 전해져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는 문인의 모습이란 이렇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본고에서는 배 수필가의 수필집《풍력 발전기》(선우미디어,2015)를 중심으로 그의 수필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2. 모험심 즐기는 탐험가적 기상
여행은 문학을 낳고 문장은 여행에서 생명을 준다고 했던가. 배 수필가는 지금 아마존 정글을 여행 중이다.
아마존의 마나우스를 출발, 뙤약볕 아래 엔 진소리 요란한 작은 보트는 아마존 정글관광 3일째 이렇게 달리고 있다. 오늘도 어제와 같이 네그로강과 솔르몬느강 만남지점의 그 무서운 밀크와 커피색 강물 지점을 통과했다. 나는 오늘 또 횡재의 여행 꾼이 되었다.
보트는 쉴 새 없이 물살을 가르건만 넓고 넓은 아마존은 강인지 바다인지 여전히 구별이 안 간다. 사방은 배 한 척도 보이지 않고, 민물 돌고래 보토가 한 마리가 보이다가 몇 마리씩 떼를 지어 배 옆을 스친다.
-중략-
열대지방은 하늘이 맑아도 이렇게 폭우가 내린다-‘템페스토우스’.등산화가 금방 풀장으로 변해 버렸다. 강변의 썩은 나무둥치는 뭇 개미들하며 우글거리고, 모기들이 쉴 새 없이 덤벼든다. 비가 오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말파리인가 하는 것들이 옷 위에서 막 찔러대니 깜짝 놀라게 아프다. 남아메리카 강변은 표범이 산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렇듯 벌레들의 기습이다. 동네가 통째로 이사를 간단다.
-중략-
나는 결코 있어본 적이 없는 먼 곳에 와있다. 별안간 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숱한 숨져간 남아메리카 탐험대들의 모습들을 떠올린다.
-〈3일간의 아마존 정글〉부분
러시아의 민담학자 프루프(1895-1970)는 동서고금의 신화와 민담의 이야기는 주인공의 출발로 시작된다고 했다. 주인공은 길 위에서 더없이 다양한 모험을 겪으며, 새로운 세계는 사막, 바닷속, 동굴, 섬, 지하, 깊은 숲 등으로 나타난다. 주인공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내면에 숨겨진 지혜와 용기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몽은 북부여를 떠나고, 손오공은 10만 8천 리 서역 길로 떠나고, 바리데기는 서천으로 떠난다. 이들은 한결같이 길 위에서 온갖 예기치 못한 고초를 겪는다. 그리하여 주몽은 고구려를 세우고, 손오공은 불경을 얻고, 바리데기는 아버지를 살려내는 것이다. 사마천은 약관의 나이에 역사의 현장을 두루 찾아보았는데, 뒷사람들은 장강대하 같은 그 문장의 동력을 그의 여행에서 찾곤 했다.
배 수필가 역시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아니, 머물지 못한다. 결코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곳을 가야만 한다.“결코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취약성과 고약함의 모든 것으로 가득하고, 몸을 병들게 하는 가장 열악한 장소”라 할지라도 직접 부딪쳐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이 순간 배 수필가는“엘도라도를 찾아 나선 숱한 숨져간 남아메리카 탐험대”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배 수필가는 태생적으로 여행과 모험심을 즐기는 탐험가적인 기질을 타고난 것이라 본다. 또한 이러한 인자야말로 한편의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는 창조적인 동력이 아닐까 생각된다.
부산에서 서울까지 4백 킬로, 이보다 1백 킬로가 더 되는 평야를 지금 달리고 있단 말인가. 우리의 김포, 호남, 김해평야도 끝이 없고, 그 논밭으로 4천만 인구가 먹고 사는데, 그러고 보니 한 시간을 넘게 달리고 있건만 길은 먹줄같이 뻗어 있고, 보이는 것이라곤 잿빛 지평선뿐이다.
이 평야는 로스앤젤레스 북쪽에서 샌프란시스코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곡창지대로서 2억이 넘는 자국민의 식량은 물론 못 나라들로 팔려나가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가 받은 식량 원조는 물론, 지금 사들이고 있는 감자, 콩, 밀, 오렌지는 주산물이고 또 다른 숱한 농작물들을 재배하고 있다.
미국 서부 최남단 샌디에이고에서 출발, 캐나다 국경도시 시애틀에 이르는 유명한 고속도로 5번이 어김없이 이곳 평야를 통과하는데, 이 지점에 이르면 말 그대로‘먹줄도로’로 변한다. 나는 쭉 뻗은 길이나 철로를 달릴 때면 흥분된다.
-〈산 호킨 평야에서〉부분
이 작품 역시 미국의 캘리포니아를 여행 중이다. 배 수필가는 쭉쭉 뻗은 길을 달리며 흥분하고 있다. 좁은 국토의 우리나라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넓은 평원의 수십 분의 일도 안 되면서 교통사고도 더 일어나고, 운전자는 욕설까지 뱉어낸다고 질서의식을 지적한다. 게다가 우리는 쌀값도 두 배나 비싸고 제주산 밀감 역시 가격에서 비교가 될 수도 없다. 그리하여“우리는 해마다 이농이 늘어만 가고, 농어민들은 빚 탕감해 달라면서 아우성이다. 농경지 정리를 해마다 해왔어도 고작 1천 평 이내이고, 한 사람이 많은 땅을 소유할 수도 없게 되어 있으니 대농이니 기계농이니 하는 말은 맞지가 않다.”고 진단한다. 그럼에도 배 수필가는 결코 우리를 비하하지 않는다. 우리가 더 잘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본받아 우리도 얼마든 더 이상 발전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 작품은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행에서 얻은 소중한 결과물이다.
3. 확고한 국가관과 조국애
배 수필가의 많은 저서들 중에도 두 권의 번역서가 돋보인다. 2012년에 나온《의문의 강》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아마존강 탐험기록이다. 루스벨트는 대통령직을 마치고 1913년 10월에 탐험에 나서 1914년 5월에 탐험을 마쳤는데 그 후유증으로 1917년 세상을 떠났다. 타고난 성품이 사냥을 좋아하고 모험심이 강했던 그는 1천6백 킬로에 달하는 강을 자신의 주도로 탐험한 것이다. 배 수필가는 책의 머리말에서 "살아있는 전설의 다큐멘터리를 번역 출간함에 다시 한번 미국사람들의 불타는 개척정신에 매료되었다."며 "바라건대 우리 젊은이들에게 개척의 꿈과 불굴의 도전정신이 함께 하기를 기대한다." 고 번역 취지를 밝힌 바 있다.
2014년에 나온《폭스중대 최후의 결전》은 6·25 참전 미국 군대의 비극적 투쟁을 다룬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1950년 압록강으로 진격하던 미 해병 8천여 명은 함경남도 장진호 근처에서 10만의 중공군과 마주치게 된다. 이 때 미 해병 폭스중대 248명이 이들의 퇴로를 뚫기 위해 중공군과 필사적인 사투를 벌인다. 이들의 분전으로 미 해병 대부대는 무사히 흥남으로 철수하게 되고 흥남철수 작전으로 연결되어지게 된다. 남은 폭스중대원은 겨우 60여 명이었다. 배 수필가는 6·25 64주년을 맞아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후
손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번역에 임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여기서 굳이 두 권의 번역서를 소개한 이유는 배 수필가의 국가관과 애국심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루스벨트의 개척정신 역시 그의 조국에 대한 국가관과 연결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한 불굴의 도전정신이야말로 나라를 지킬수 있는 힘이라 생각했고, 또한 그것을 세상에 알려, 본받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64년 전 우리나라는 6·25 전쟁으로 풍전등화일 때 지구 반대편의 콜롬비아는 3천 명이 넘는 육군을 파병해 주었으며,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하였다. 은인들이었다.
-중략-
우리나라는 긴 세월 그들 참전국들에게 그 어떤 보답도 하지 못한 채 64년의 세월이 흘렀다. 군사정권 때는 잘살기 운동한다고 챙기지 못했고, 친북주의 두 대통령 때는 참전국들에 대한 분노 탓인 듯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2013년이 되자 정부는 작으나마 콜롬비아에 보답코자 고심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들은 우리나라 해군이 보유한 초계함 한 척을 기증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정부는 곧장 수락했으며, 연이어 함정 인수단이 도착하고 함께 배를 수리하면서 훈련에 임한 끝에 2014년 7월 30일 오늘 함정 인수식을 거행하게 된 것이다.
진작부터 나는 그 나라의 함정 인수단 함장과 부함장, 몇몇 장교들을 만났으며, 그럴 때마다 6·25 참전의 우정과 희생을 떠올리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중략-
오늘 이곳 진해 해군 부두는 내빈으로 가득하다. 함정 증정 행사장에 초청된 사람들이다. 그쪽 나라 해군 참모총장과 주한 콜롬비아 대사도 함께했다. 정장을 한 양국 해군들은 군악대의 팡파르 속에서 양국의 애국가가 연주되고, 콜롬비아 함장은 우리나라 함장이 전하는 인수기를 받아든 후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었다. 눈물지우고 있었다. 내빈들은 기립박수를 보냈으며 함께 울었다. 나도 울었다.
-〈눈물 흘린다〉부분
이 작품은 배 수필가가 해군 소령으로 예편을 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이 땅의 해군으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워하고 있으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애국심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사실, 평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군대 생활이란 것이 국민의 의무이기 때문에 그 임무만 마치면 끝나고 잊어버리는 것이 대다수다. 하지만 배 수필가는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해군 장교란 자긍심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그것은 조국 대한민국이라는 커다란 울타리에 대한 고마움이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배 수필가는 대한반공연맹 경남지회장으로 그 임무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64년 전에 남의 도움으로 살아난 조국이 이제 발전하여 그 도움을 갚아줄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 기쁨은 방울방울 감격의 눈물로써 작품 속에서 승화되고 있다. 더불어 배 수필가의, 어떠한 경우라도 이 나라를 기필코 지켜야한다는 애국심이 작품 도처에서 면면히 흐르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4. 순리에 대한 순응과 유년의 힘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니체(1844-1900)가 바그너에게 보낸《비극의 탄생》이란 글의 서문에서 그리스예술을 가리켜 한 말이다. 니체가 말한‘무서운 깊이’는‘죽음’을,‘아름다운 표면’은‘삶’으로 바꾸어 이해할 수가 있다. 근원을 따져보면 문학은 결국 죽음을 둘러싼 두려움, 회고, 그리움, 깨달음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카뮈의《이방인》은“오늘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고《닥터지바고》의 첫 장면 역시 어머니의 장례행렬이다. 우리 문학사의 출발점인〈공무도하가〉역시 죽음의 충격으로부터 시작되고, 박경리의《토지》또한 죽음의 그림자로 일관된다. 죽음에서 비롯했기에 그만큼 삶에 대한 깊은 통찰과 강력한 희망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 싶다.
결국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주어진 시간만을 살다가는 고독한 나그네일 뿐이다. 필부에서 제왕에 이르기까지 이 죽음의 법도만은 철저하게도 평등한 것이다. 배 수필가 역시 1935년생이다. 이제 팔순을 훌쩍 넘긴 나이다. 그의 왕성한 활동과는 별개로 언젠가는 떠나야만 한다. 그의 수필에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순응, 대비책이 담담하게 흐르고 있다.
인간의 가장 큰 비극은 죽음이요 그 앞에 무력하다.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과 두려움만 다가온다. 세월 빠르기는 마치 가을밤 책장 넘어가듯 하고, 매일이면 매일 시험 마감 종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여 울어버린다. 마치 아이들 같다. 그 숱한 애착 관계들마저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만 가니 더욱더 허무해진다. 하지만 걱정만 하면 어리광이다. 인생의 불가피한 속성에 굴복하는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이리라.
어느 날 나는 스스로도 이해가 안가는 결심 하나를 했다. 다름 아닌 지금껏 해오던 일을 더욱 열심히 해보기로 한 것이다. 아니 미쳐보기로 했다. 젊어서부터 일 열심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부터서는 마지막 발악이듯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다.
-중략-
지나고 보니 세월이 가는지 마는지 느낄 사이도 없었다. 눈 깜빡할 사이였다. 더 놀랄 일은 그렇게도 무서웠던 죽음 같은 것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집이라고 들어가면 하숙생 삶이었고,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눈을 뜨는 순간 지겨운 하루가 또 시작된다면서 지천을 했던 노인성 우울증 같은 것도 사라져 버렸다.
가족들은 은퇴를 연거푸 제안했다. 나이가 많고 일이 너무 과하다는 걱정들이었다. 은퇴란 무엇인가. 후진들에게 밀려나는 것, 아니면 쉰다는 구실 하에 조기 은퇴한 사람들이 아닌가. 아니면 일을 애써 줄이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여생을 즐기기 위함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 것도 아니다. 지금껏 해왔듯이 더 강렬하게 일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최후의 심판도전〉부분
실로 비장함이 느껴진다. 죽음은 고통스럽고 두렵지만 피할 수 없는 속성이기에 차라리 일에 미치다 보면 그 무서운 죽음도 잊을 수 있다는 사유다. 그리하여 죽는 날까지 “더 강렬하게 일하면서 살아갈 것”을 다짐한다.
배 수필가의 죽음준비는 간단하다. 일, 즉 노동하는 행위가 전부다. 다만 노동에는 육체적인 노동과 정신적인 노동이 있다. 퇴임 이후에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지난날의 명예와 권위와도 무관하게 어떤 궂은일이라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정작 작가 자신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백지 위에 옮겨놓는 일이다. 영광된 일들일랑 후손에게 전하고저 기록으로 남겨왔으며, 잘못된 일이나 상처들은 늦게나마 사죄하여 아이들의 삶의 지혜를 부여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이름 없는 한 사람일지라도 삶은 위대한 것이다.
-〈최후의 심판도전〉부분
이렇게 문필가로서. 수필가로서,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글을 쓰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글을 쓰며 자신을 정리하는 일이 얼마나 위대하고 소중한 것인지를 몸소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배 수필가의 힘과 자신감과 모험정신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사실 필자는 이 점이 매우 궁금했지만, 곧 그 해답을 찾을 수가 있었다. 다음 작품을 보자.
백 살에 가까운 외증조할머니는 나의 몇 토막의 기억을 끝으로 돌아가셨고, 그때까지 위로는 진사 시아버지와 진사 남편을 모시고 이 집에서 80년을 넘게 사셨다. 긴 담뱃대를 무시면 나는 불을 붙였고, 그런 다음 볏짚으로 담뱃대를 깨끗이 닦아드렸다.
외할머니는 외동아들 외할아버지에게 시집와서 6남매를 두면서 그 집에서 평생을 사셨고, 큰외삼촌에 이어 지금은 외사촌이 살고 있다. 줄잡아 170년, 고가는 아직도 건재하다.
할아버지의 사랑채는 바깥손님들이 끊이지를 않았다. 어떤 때는 며칠이고 아니 한 달이고 묵으면서, 연못의 수련과 연꽃들과 함께하면서 시를 읊었고, 머슴들은 밤낮으로 술상을 날랐다. 어떤 때는 말을 타고 온 손님도 있었고, 그럴 때는 마부는 머슴방으로, 말은 따로 있는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사랑채 마당은 연못과 함께 남향이었고 마당 언저리는 철철이 꽃이 피고, 여름이면 키 큰 가죽나무에서 왕매미가 쉴 새 없이 울었다. 몇 그루의 무화과나무도 있었다.
안채 우물가에는 오백 년 되었다는 정자나무가 서 있다. 얼마나 큰가는 우리 어린 팔을 벌려 15발이 넘었으니 짐작하리라. 여름이면 4칸 집 지붕과 마당을 통째로 가렸고 동네 사람들은 ‘정자나무집’으로 통했다. 지금은 시에서 보존하는 시 보존수로 지정되어 있다.
-〈고가〉부분
배 수필가의 외증조부와 외조부는 대를 이어 진사 벼슬을 지냈다. 외증조모는 백 살 가까이 사셨고, 외사촌은 여섯 명이나 된다. 외조부의 사랑채는 바깥손님이 끊이지를 않았고 머슴들이 득실거렸다. 4칸 집 본채는 170년이나 되도록 건재하며 안채 우물가에는 오백 년이 되었다는 정자나무가 서 있다. 배 수필가는 어린 시절 이러한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외삼촌, 외사촌들과 함께 어울려 구김 없이 성장했다. 이 역시 보통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조차도 어려운 부유한 환경이다. 그 속에서 겨울밤의 황구렁이 우는 소리를 들었고, 오이, 토마토, 무화과, 대추를 남아나도록 먹었으며, 밤이면 참새 잡이 놀이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유년의 사랑과 티 없는 성장 과정은 성인이 되어 세상에 나아가서는 강력한 자신감과 도전정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 것이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이 남에게 베풀 수 있듯이 배려하는 리더십과 포용력, 휴머니티가 체득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좋은 환경에 자란 것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인생을 실패한 경우도 허다하지만 배 수필가는 이러한 동력을 긍정의 힘으로 살려내 승화시킨 것이다.
5. 동경과 방랑의 꿈
특별히 배 수필가의 작품 행간에서 발견되는‘동경’의 의미는‘방랑의 꿈’과 연결되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는 특징을 보인다.
어느 날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훌쩍 떠나 나그네가 되는 것. 그것은 나를 가두고 있는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1877-1962) 역시 이러한 방랑의 정신을 실천하고 문학으로 구현한 대표적 작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방랑을 통해 성숙했고, 작가가 됐으며, 수많은 문학작품을 빚어냈다. 이때 방랑을 거쳐 닿는 곳은 고향이며 만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도달한 목표는 더 이상의 목표가 아니며, 방랑자는 사랑을 소유하지 않는다. 최근에 나온 일곱 번째 수필집에 실린 다음 작품을 보자.
풍차는 외롭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 황량한 불모지, 바람 부는 산꼭대기에서, 캄캄한 밤에도 혼자 돌아가니 그것이 참 좋다. 전기라는 묘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이다.
-중략-
하와이 오아주 산정과 캘리포니아 팜 스프링 계곡의 풍차단지를 바라본다. 수백 개 수천 개의 풍차가 번쩍번쩍 햇살을 가르면서 돌아간다.
-〈나의 마스코트 풍력발전기〉부분
분명 배 수필가의 작품 행간에는 동경과 방랑의 꿈, 이국적 정서가 흐른다. 그의 수필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주된 정서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그가 풍차를 언급한 그 자체가 그러하고, 평생을 마스코트로 삼고 있음이 더욱 그러하다. 그 풍차는 이억 만 리 바다 건너 산정과 계곡에서 외롭게 돌아가고, 캄캄한 밤과 햇살 번쩍번쩍한 대낮에도 돌아간다. 또한 작가는 “나는 울고 싶을 때면 바람 부는 산속의 풍력발전을 떠올린다.”고 고백할 만큼 이국적인 세계에 깊이 젖어 있다. 이러한‘방랑과 동경, 이국적 정서’야말로 배 수필가의 수필집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동력임을 알 수 있다.
6.마무리에 대신하며
마무리를 하기 전에 배 수필가의 문학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글, 한 부분을 보기로 하자.《경남수필》2013년 연간집에 발표된 작품이다.
오늘날 문학상의 관습이 책을 만들게 한다고들 말한다. 수상신청은 발간한 책과 함께 스스로가 신청한다. 그들은 훌륭한 문학작품을 찾아 나서는 것이 아닌 신청해오는 사람들을 놓고 줄달음친다. 몹시 식상하다. 그런데 작가들 대부분은 아니 중진일수록 출판물과 상관없이 수상신청을 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몇몇 문학상은 신청서를 받는 것이 아닌 1년 내내 우수한 작품을 찾아 나선다. 음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사람들〉부분
작금에 난무하고 있는 문학상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아무리 훌륭한 작품일지라도 문학상에 응모하지 않으면 그 문학상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무리지어 횡횡하며 끼리끼리 나눠 먹기식의 문학상 형태에 대한 호된 질책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문학상의 권위란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자명하다. 어쩌면 문학상을 받는 자체가 부끄러울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공정한 규정을 적용하여 문학상의 권위를 회복하고 정파를 초월한 좋은 작품, 우수한 작가에게 상이 돌아가기를 염원하는 원로의 충정으로 읽힌다.
이상에서 배 수필가의 수필 세계를 살펴보았다. 8권의 수필집을 낸 문인을 두고 작품 7편을 중심으로 논한다는 데는 상당한 비약과 무리가 따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와 필자가 직접 선정한 작품이고, 작품집 전체를 아우르는 대표작을 중심으로 행간의 의미까지 읽어내는데 전력을 다했기에 어느 정도의 보편성은 확보했다고 본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배대균 수필가의 작품세계를 요약할 수 있다.
①여행을 통한 모험심과 개척정신 ②확고한 국가관과 조국애 ③순리에 대한 순응과 일의 철학이다. 이러한 동력은 ④유년의 힘에서 비롯되며, 그럼에도 ⑤동경과 방랑, 이국적 정서가 전체 작품을 관통하고 문학적 형상화가 돋보인다. 문학에 대한 현실적인 인식으로 ⑥문학상은 응모제가 아니라 주최 측에서 좋은 작품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내용으로 분석된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것이 있다면 문장에 대한 언급이다. 배 수필가의 수필문장은 단아하고 조근조근하며 힘이 있다. 화려한 만연체보다는 간결체를 선호한다. 오랜 창작과정의 절차탁마에서 오는 결과일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가끔 비문 하나쯤은 나올 수도 있건만 배 수필가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왕성한 문학 활동으로 인류에 회자될 좋은 작품 한 편 남길 수 있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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