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봉헌된 이들, 특별히 수도자들의 봉헌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넓게 보면 우리는 모두 주님께 봉헌된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 모두의 날이기도 합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부러운 것 중의 하나는 ‘자녀를 봉헌하는 전통’입니다.
성경에서 비롯된 이 전통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자녀를 주님의 것으로 봉헌하고, 또 12~3세가 되면 성인식을 하며 완전히 주님 것으로 내어드립니다.
우리도 유아세례와 첫영성체, 그리고 견진성사가 있기에 이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 부모의 정신과 우리 신앙인의 정신은 자녀를 봉헌하면서도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을 봉헌하면서 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칩니다.
이 제물은 가난한 가정이 자녀 대신 바치는 것인데, 이 제물들은 다 죽임을 당해 주님께 불살라집니다.
이 제물이 불살라질 때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주님께 봉헌된다는 믿음을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자녀에 대한 권리를 ‘나의 것’으로 절대 여길 수 없게 됩니다.
조선 시대, 효종 임금의 친척 중 ‘덕원령’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둑에 남다른 재능이 있어 국수(國手)의 호칭을 얻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마당에 말고삐를 매고 있었습니다.
덕원이 그 사람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번을 서려고 올라온 향군입니다. 저도 바둑을 무척 좋아합니다.
나리께서 국수라는 소문을 듣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물리치지 마치고 한번 대국해 주시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덕원이 마치 심심하던 차라 그렇게 하라고 허락해 주니 그 사람은 덕원에게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대국에 아무것도 걸지 않으면 재미가 없습니다. 만약 나리가 지면 소인에게 봄철 양식을 대주시고,
소인이 지면 저기 마당에 매어 둔 말을 나리께 바치겠습니다.”
덕원도 그가 제시한 내기 조건을 쾌히 수락하였습니다.
첫 번째 대국에서 덕원이 한 점을 이기고 두 번째 대국에서도 또 한 점을 이겼습니다.
그 사람은 군말 없이 자기의 말을 내놓았습니다. 덕원은 그 말을 선뜻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약속 이행이라 하지만 명색이 국수라 불리는 고수가 하수에게 말을 받는다는 것이 체면이나 자존심에 걸리기 때문이었습니다.
덕원은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아이, 이 사람아. 내가 농담으로 한 약속이니 그 말을 받을 수 없네.”
덕원이 받기를 꺼렸지만, 그 사람은 정색하며 고집하였습니다.
“나리께 소인이 감히 식언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는 끝내 고집하고 자기의 말을 두고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은 다시 와서 또 내기 바둑을 간청하였습니다.
덕원은 할 수 없이 대국을 시작하였는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가, 아무리 정신을 차려서 두었지만, 그의 수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불계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덕원령은 처음부터 그 사람의 상대가 안 되었던 것입니다.
영문이나 알고 싶어서 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라고 청하니 그는 죄송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저는 저 말을 무척 좋아하고 제 삶의 전부라 해도 과언에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번을 서는 동안 저 말을 먹여 줄 데가 없어 결국 제 말은 굶어 죽게 될 형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소인은 그 말을 살릴 욕심으로 조그만 바둑 재능으로써 감히 나리를 기만하게 된 것입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바둑을 잘 두는 것이 ‘지식’이라 하면, 그 바둑을 지면서까지 이익을 챙길 수 있는 지략이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이 어떻게 자랐는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이 성장은 분명 아드님의 봉헌과 관계가 있습니다.
봉헌은 성장과 관계있는 것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만드는 고치를 봅시다.
그 고치의 크기는 그 안에서 자라는 나비의 크기와 비례합니다.
그 고치를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경계’라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의 고치 크기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요?
부모에 의해 정해집니다.
부모가 심할 경우 그 경계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아이는 성장을 멈춥니다.
어른이 되어도 실제로 상처받은 아이로 남습니다.
히틀러의 경우를 봅시다.
히틀러는 아버지로부터 강요와 체벌로 성장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이의 경계선을 전혀 존중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상처를 히틀러는 감히 누가 자신을 건들려고 하면 굉장한 화를 낼 것입니다.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사람의 경계는 무시할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경계에 대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자녀들은 자기 속으로 더 들어가고 남의 자유도 존중하지 못하는 관계 불능의 상태로 성장합니다.
그 경계를 엄청나게 존중해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과잉보호입니다.
문제는 그 크기가 너무 좁고 두꺼워 숨 막혀 죽는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엄마 없인 아무것도 못 하는 딸’이란 내용이 있었습니다.
배우 출신 재무 설계사 여현수 부부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이 혼자 샤워를 하겠다고 하자, 예의 주시하다가 결국 도와줍니다.
머리를 말리는 것까지는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아이가 자기 방에서 자려고 할 때 자다가 오줌을 쌀까 봐 아이도 불안하고 엄마도 불안합니다.
아이는 잠이 들 때까지 기도하고 자고, 엄마는 결국 아이가 잠들기 전에 올라가 화장실에 데리고 갑니다.
이것은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범위를 엄마가 막아버리는 행위입니다.
자라면 마마보이, 마마걸이 됩니다.
아이는 엄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자존감 낮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더 성장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자기 아들을 살찌우고 성장시킬 수 있는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고치의 크기가 이제 하느님의 자녀라는 크기로 커집니다.
tvN ‘고스트 닥터’에서 정지훈은 실력은 좋지만 남을 무시하는 안하무인인 천재 의사로 나옵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사고가 나서 코마 상태로 빠지고 영혼이 병원을 마구 돌아다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얼마나 버릇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보게 되며 서로 성장해가는 내용입니다.
유령이 된다는 말은 지금의 껍데기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범위가 넓어지니 자신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했던 일들을 똑같이 하는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변해온 모습까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줄 알게 되고 점점 착한 의사가 되어갑니다.
성장은 이렇게 이뤄집니다.
부모가 아이를 자기 범위에서 벗어나게 해주려면 그 틀을 깨고 더 넓고 큰 고치 안에서 성장하게 해야합니다.
그러려면 탄생과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 포함하는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자녀가 믿게 하려면 부모 먼저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둑에 져서 맡겨놓은 말처럼 주님의 것으로 여기고 건들지 말고 지켜봐 주기만 하면 됩니다.
유대인들은 하는데, 우리는 왜 할 수 없겠습니까?
봉헌은 바로 아이의 경계를 죽은 뒤까지 확장하는 것임을 알고 나의 세계에 아이를 가두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을 멈추는 이유는 하느님께 진정으로 봉헌되지 않아서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한 수도자 충만한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설날 아침 미사를 끝내고 바깥으로 나오니... 세상에! 한 폭의 풍경화가 따로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사가 그렇듯이 기쁨과 환희의 순간은 찰나입니다.
잠깐의 눈요기가 끝나고 길고 긴 수고의 시간이 남아있었습니다.
떡국 한 그릇 후루룩 초스피드로 흡입하고 나서는 곧바로 전투 복장을 하고 제설작업에 투입되었습니다.
세상 좋아져서 강력한 송풍기를 등에 메고 하루 온 종일 이곳저곳 눈을 치우고 또 치웠습니다.
새해 첫날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올 한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저 순백의 눈처럼 다들 깨끗하고 순수해졌으면,
구리지 않고 솔직담백해졌으면, 잔머리 굴리지 않고 좋으면 좋다고 솔직히 말할 수 있고, 싫으면 싫다고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오늘 축성 생활의 날입니다.
한국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 회장 유덕현 야고보 아빠스의 말씀대로 수도자들은 하느님이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존재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소유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 만큼 잘 존재(Well-Being)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분명히 살아계시며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바로 축성생활자들의 존재입니다.
따라서 축성생활자들은 모든 일에 앞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잘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축성 생활의 날을 맞아 스스로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수도생활, 과연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의 수도생활에 대해 나는/세상 사람들은/주님께서는 정녕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수도자들의 현존에 대해 정녕 가치와 의미를 찾고 있는가?
수도자들은 존재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수도자들의 삶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반대 증거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이 우리 사는 모습을 보고 ‘저게 뭐야? 수도자가 저래도 되는거야?’라며
충격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4~50년전, 한해 입회자가 4~50명씩 되던, 그래서 침실이 부족하던 수도 성소의 호황기 시절을 그리워며, ‘라떼는 말이야!’만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오손도손, 재미있고 편안하게 살면서, 수도원 담 너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은 아닌지? 잘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수도 규칙에 대한 철저한 준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고통받고 있는 세상과 가난한 이웃을 향한 개방과 환대, 나눔과 헌신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은 아닌지?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것은 아닌지?
참으로 큰 도전 앞에 서 있는 축성 생활이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수도 생활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찾고 회복시키기 위한 진지한 숙고와 성찰은 지속되어야 할 것입니다.
수도자들 한분 한분의 내면에 성령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열정과 활기가 넘치는 수도 공동체 생활이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수도자들의 얼굴에서 기쁨과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으면 좋겠습니다.
고통받는 세상 속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수도자들의 적극적인 봉사와 헌신도 아주 중요합니다.
각 수도회 고유의 카리스마적 현존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입니다.
어쩌면 한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나라를 증거하는 명백한 표지입니다.
수도자 한분의 현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가운데 살아 숨쉬고 계신다는 구체적인 증거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늘 바치는 삶>
2022. 02. 02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다, 시메온과 한나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한나라는 예언자도 있었는데, 프누엘의 딸로서 아세르 지파 출신이었다. 나이가 매우 많은 이 여자는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냈다.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 한나도 같은 때에 나아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그 아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주님의 법에 따라 모든 일을 마치고 나서, 그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갔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늘 바치는 삶>
하느님께서
내시니
조금씩
하느님께로
마침내
하느님 안에
하느님처럼
지으시니
조금씩
하느님처럼
마침내
하느님처럼
하느님께서
이끄시니
조금씩
하느님 따라
마침내
하느님과 하나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