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과 하
원제 : The Enemy Below
1957년 미국영화
제작, 감독 : 딕 파웰
촬영 : 해롤드 로슨
출연 : 로버트 미첨, 쿨트 유르겐스, 데이비드 헤디슨
테오도레 비켈, 러셀 콜린스
아카데미 특수효과상 수상
많지는 않지만 만들었다 하면 수작들이 탄생하는 영화가 바로 '잠수함 영화' 입니다. 대략 잠수함 영화들을 거론해 보면, 독일에서 만든 '특전 유보트(81)'를 비롯하여 '전우여 다시한번(58)' '잠망경을 올려라(59)' '붉은 10월(90)' '페티코트 작전(59)' '악마와 심해(32)' '크림슨 타이드(95)' 그리고 최근의 '쿠르스크' 도 있었고 우리나라 영화 '강철비: 정상회담'도 잠수함 영화입니다.
'상과 하'는 이런 잠수함 영화의 걸작계보에서 초기에 해당되는 작품입니다. 연합군의 구축함과 독일의 잠수함이 치열한 두뇌싸움을 팽팽히 벌이는 내용이지요. 구축함 함장을 연기한 미국배우 로버트 미첨, 독일 유보트 잠수함을 지휘하는 함장역의 독일배우 쿠르트 유르겐스, 두 배우의 팽팽한 연기가 볼만합니다. 냉철함과 차분한 명 지휘관 머렐함장(로버트 미첨), 용맹하고 불꽃같은 정열의 용장 스톨베르크(쿨트 유르겐스) 닮은듯 다른 두 지휘관의 대조적인 모습이 볼만합니다.
'특전 유보트'에서도 많이 묘사되었지만 잠수함의 천적은 바로 구축함입니다. 2차대전때 잠수함에 투입된 병사들은 그야말로 거의 살아돌아오기 힘든 목숨을 건 참전이고, 더구나 육지와 오래 떨어져서 좁은 잠수함 내에서 지내야 하는 고독함까지 갖고 있습니다. 잠수함은 좁고 긴 구조라서 좌우 넓이가 대략 열차의 두께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잘 묘사된 잠수함 영화들을 보면 좁은 폐쇄공간이라는 압박감이 많이 밀려옵니다. '상과 하'는 잠수함만의 영화가 아니라 잠수함 잡는 천적 구축함의 비중도 반반씩 넣어서 쫓는 자(구축함)와 쫓기는 자(잠수함)간의 고도의 수싸움과 신경전을 묘사하고 있지요.
영화의 시작은 연합군 구축함에서의 일상입니다. 선실에 틀어박혀서 은둔하다시피하는 함장에게 비아냥대는 베테랑 해군들, 심지어 민간인, 탈영병이라는 조롱까지 나옵니다. 그러던 중 레이더에 물체가 잡히고 비상상황이 되자 비로소 전면에 등장한 함장은 매우 침착한 대응으로 순식간에 구축함 내부의 질서를 잡고 독일 잠수함으로 추정되는 물체의 추격을 시작합니다. 이런 유능한 함장의 전략으로 잠수함을 순소롭게 추격하는 구축함, 하지만 독일군 잠수함의 함장 역시 철두철미한 명장이었습니다. 이미 두 아들이 비행기와 바다에서 전사한 경험을 갖고 있는 그는 용맹한 군인이지만 어느덧 전쟁에 대한 회의와 살아남아서 집에 돌아가는 것에 대한 갈망을 느끼는 인물입니다.
구축함과 잠수함의 첫 머리싸움은 잠수함의 승리입니다. 함장은 잠수함을 선제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표적이 될만한 위치에 서서 어뢰공격을 유도합니다. 잠수함이 먼저 공격하게 한 다음 전열을 가다듬으려는 찰나에 역습을 가한다는 고도의 작전. 그것을 눈치못챈 잠수함측은 표적이 된 구축함에 어뢰 두 방을 발사합니다. 그러나 이미 어뢰가 발사된 시간까지 계산한 고도의 작전진행에 의하여 구축함은 여유있게 어뢰를 비껴가는 움직임을 보이고 그런 상황을 겪게 되자 비로소 잠수함의 함장은 구축함 함장이 고도의 고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후 반격의 표적이 되지만 과감히 반대방향으로 바꾸어 구축함 아래를 스치듯 지나가면서 따돌리는데 성공합니다.
주고받는 장군멍군에서 다시 구축함의 반격, 유능한 함장은 구축함이 180도 방향을 바꾸어 도주한 것을 알고 그 시간과 각도까지 계산하여 추격을 시작하고 금새 따라잡을 것을 확신합니다. 성공적인 도주라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다시 따라잡혀서 당황한 잠수함. 그러나 역시 베테랑 함장은 달랐습니다. 도저히 생각도 못할 310미터 깊이까지 잠수한 뒤 엔진을 끄고 해저에 뒤죽은 듯 머뭅니다. '특전 유보트'에서도 묘사되었듯이 잠수함은 200미터 이상 잠수할 경우 수압을 견디기 어려워 위기에 빠지기 쉬운데 310미터까지 위험을 무릎쓰고 잠수한 상황, 그런 생각지 못한 작전을 겪지만 구축함 함장은 인내심의 싸움이라 생각하고 역시 엔진을 끄고 머무릅니다. 어뢰와 폭뢰를 주고받으며 공방전을 벌였던 그들은 이제 누가 더 인내심이 강한가의 싸움을 벌이며 넓고, 깊은 바다에서 한 대는 해저에 한 대는 해상에서 길고 고요한 침묵을 지키며 대치합니다.
"구축함 함장이 내 마음을 모두 읽고 있군"
"구축함이 아마 지금쯤은 떠났겠죠?"
"아냐, 아직 위에 그냥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아"
고수 대 고수의 치열한 심리전, 결국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잠수함과 구축함, 이제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구축함의 폭뢰 포격이 1시간 단위로 이어지고 잠수함은 적지 않은 피해를 입지만, 용케 침몰되지 않고 버팁니다. 폭뢰를 많이 써버린 구축함의 최후의 일격이 남은 상황에서 잠수함 함장은 과감한 작전을 씁니다. 바로 4대의 어뢰를 동시에 발사, 이판사판의 회심의 카운터를 먹이는 배수의 진, 이런 예상치 못한 반격에 어뢰가 적중하고 피해를 입은 구축함, 전세가 역전될 상황, 그러나 최악의 상황까지 이미 대비한 함장은 일부러 배에 불을 질러 적을 다가오게 만들고 스스로 표적이 된 다음, 역공을 가하는 과감한 승부수를 띄웁니다.
우리나라에서 역대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영화가 바로 이순신 장군의 승리를 보여준 해전영화 '명량' 이었는데 '상과 하' 역시 구축함과 잠수함의 치열한 두뇌전이 펼쳐지는 수준높은 해전영화입니다. 화력이 아닌 머리싸움에 의해서 이렇게 쫓고 쫓기는 긴박감을 보여주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장군 멍군식의 엎치락 뒤치락 하는 대결양상이 상당한 긴장감과 재미를 제공합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더 높이 나는 놈, 고수와 고수간의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치열한 심리전, 특히 종반부로 치닫을 무렵 수면위로 부상한 잠수함과 어뢰 한방을 허용한 구축함이 정면 대결을 펼치는 장면은 정말 절정의 흥미를 제공합니다.
단순한 해전의 긴박감만이 다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후반부에는 나름 꽤 뭉클하고 숭고한 내용이 펼쳐집니다. 선과 악, 아군과 적군이라는 단순 대치가 아닌 고수가 고수를 인정하고 서로 경의감을 보이는 내용, 마치 격투경기에서 서로 치고받고 피터지게 싸운 두 사람이 경기가 종료된 후 서로를 인정하고 뜨겁게 껴안는 장면이 연상되는 엔딩, 승자와 패자가 갈린 상황에서 로버트 미첨과 쿨트 유르겐스가 서로를 발견하고 눈빛을 주고 받는 장면은 정말 전율입니다. 졸린 듯한 표정이 특징인 늘 여유로워 보이는 로버트 미첨, 그리고 눈 부릅뜨는 연기의 달인 쿨트 유르겐스, 이 미국과 독일의 명배우들의 불꽃튀는 대결후에 벌어진 서로에 대한 존중까지....장험한 해전후에 남는 여운입니다. 독일 함장을 악의 상징이 아닌, 어쩔 수 없이 군인으로서의 임무수행에 최선을 다해는 인물로 다루면서 선과악이 아닌 전쟁의 군인으로서 모두를 존중하고 희생자를 기리는 내용입니다. 로버트 미첨이 연기한 함장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같이 민간어선에 탔던 아내를 잃은 아픈 과거가 있지만 군의관과의 대화에서 그런 사적 감정이 아닌 공적 임무를 수행할 뿐, 독일 함장의 개인적 성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내용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모든 전쟁은 통치자의 욕망에 의해서 애꿎은 국민들이 참전해서 희생하는 비극일 뿐, 전쟁 자체가 나쁜 것이지 군인 개개인이 선악을 가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승자와 패자가 존재할 뿐, 특정인이 선, 특정인이 악 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승리의 전리품은 통치자가 가져갈 뿐, 승자와 패자 모두 많은 희생과 아픔을 겪는 것이죠. 시계 수리공이었는데 구축함 병사로 참전하여 손가락을 날리는 인물, 어뢰 공격으로 한쪽 팔이 절단나는 병사, 오래 동고동락을 한 전우를 잃게 되는 잠수함 함장과 그의 죽음을 기리며 영결식을 해주는 연합군 병사들 등 스포츠 게임처럼 경기가 끝난후 승자와 패자가 서로 리스펙해주는 모습이 다른 전쟁물과 달리 굉장히 숭고해 보입니다.
잠수함과 구축함이 벌이는 해전에 대한 전문성도 높았고, 군인의 공과 사에 대한 사명과 비록 적이지만 용감히 싸운 상대에 대한 존중 등이 잘 묘사된 영화였고, 후반부에 벌어지는 내용은 굉장히 영화적인 드라마틱함이 있는, 사실상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었지만 그런 내용을 넣어서 마치 페어플레이를 벌인 스포츠 선수들의 존중처럼 숭고하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독일 출신 쿨트 유르겐스, 다른 많은 유럽영화인들은 히틀러 집권 시기에 미국에 망명하여 사실상 미국 영화인이 되었지만 그는 독일에서 50년대까지도 여전히 독일배우로 영화에 출연하던 인물인데 이 영화는 그의 미국영화 첫 출연작입니다. 그런 그를 존중하듯이 유능한 잠수함 함장에 대한 격식을 지켜주는 듯한 영화입니다. 많은 2차대전 영화에서 독일장교는 냉혈 괴물처럼 많이 묘사되었는데(대표적으로 '발지대전투'의 로버트 쇼같은) 쿨트 유르겐스는 오히려 존중을 받는 역할이라서 그 자신도 의미있는 출연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로버트 미첨은 전쟁영화에 꽤 어울리는 배우로 '사상 최대의 작전' '안지오' '동경상공 30초' '추격기' '백사의 결별' 'G. I. 죠' 등의 영화에서 군인역할을 연기했는데 그중 '상과 하' 가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영화의 준수함이 모두 뛰어났던 대표적 작품입니다.
'살인 내 사랑' '배드 앤 뷰티풀' 등에 출연한 배우 딕 파웰이지만, 감독으로서 몇 편을 연출했는데 존 웨인 주연 '징기스칸'도 있었고, '상과 하'는 그 다음해에 연출한 작품으로 혹평이 따랐던 '징기스칸'과는 달리 꽤 호평을 받는 수준작이었습니다. 이듬해 연출한 '추격기(The Hunters)' 라는 영화에서도 로버트 미첨을 주인공으로 활용합니다. 여러편을 감독하지 않았고, 배우로서 더 많이 활동했지만 상당한 전문성이 필요한 잠수함과 구축함의 해전영화를 너무 흥미롭게 연출했습니다.
원제 'The Enemy Below' 는 '아래에 있는 적' 즉 구축함 입장에서 바라본 잠수함을 표현한 제목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상과 하'라는 잘 어울리는 제목으로 1964년에 개봉했으며, 이후 공중파 TV 방영, DVD 출시 등으로 꾸준히 고전 팬들과 만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잠수함 측 군인들은 독일계 배우들을 많이 캐스팅했지만 영어로 연기합니다. 요즘 영화 같으면 독일어를 썼겠죠. 쿨트 유르겐스가 독일어를 하는 장면은 오랜 동료인 하이니의 죽음을 기리는 영결식 장면에서 뿐 입니다. 로버트 미첨이 그에게 '영어를 할 줄 아시오?' 라고 묻는 장면이 그래서 코믹해.. 아니 쌩뚱맞아 보입니다.
ps2 : 아카데미 특수효과상을 받았는데 폭뢰가 터지는 장면을 꽤 실감나게 촬영했습니다.
ps3 : 엔딩이 두 가지로 촬영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하나는 두 지휘관이 죽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결국 둘 다 사는 결말쪽을 선택한 것이죠.
ps4 : 여배우가 단 한 명도 출여하지 않는 영화입니다. 전쟁영화들이 종종 그렇죠.
ps5 : 이 영화에서 연합군 구축함의 이야기를 빼버리면 영락없는 '특전 유보트'의 다른 버전이 됩니다
[출처] 상과 하(The Enemy Below, 57년) 잠수함 영화의 대표작|작성자 이규웅